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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 왕국 9대 군주 Gelimer | 겔리메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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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겔리메르 |
라틴어 | Gelimer | |
생몰 년도 | 480년경 ~ 553년 | |
재위 기간 | 530년 ~ 53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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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반달 왕국 9대이자 마지막 군주. 동로마 제국의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나 끝내 패배해 왕국의 멸망을 초래했다.2. 행적
반달족을 북아프리카로 인도하여 로마 제국의 저항을 물리치고 반달 왕국을 성립시킨 가이세리크의 넷째 아들이자 전장에서 용맹을 떨친 전사였던 겐토의 손자이며, 겐토의 막내 아들이자 아프리카에서 상당한 영지를 소유하던 게라리스의 아들이다. 형제로 암마타스, 트자존이 있었다. 그는 사촌인 힐데리크 왕이 동로마 제국과 친하게 지내면서 정교를 용인하고 베르베르인을 상대로 소극적으로 일관하는 모습에 반감을 품고, 지지자들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킬 때를 노렸다.530년 6월, 왕을 대신해 베르베르에 대한 전쟁을 이어가던 호아메르가 비자센에서 아탈라스가 이끄는 베르베르 부족군에게 참패했다. 그는 이를 기회로 삼아 반란을 일으켜 힐데리크를 폐위시킨 뒤, 힐데리크, 에바게스 형제와 호아메르를 감옥에 가두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사절을 보내 힐데리크의 복위를 요구했지만, 그는 접견조차 거부하고 호아메르의 두 눈을 뽑아 며칠 후 죽게 만들고 힐데리크 형제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망치려 했다는 이유로 더욱 엄중한 감옥에 가두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다시 사절을 보내 힐데리크와 에바게스 형제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달라고 요구하면서, 이를 듣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했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하며 거부했다.
군주라면 누구나 자기 일에 신경 쓰는 것이 바람직하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겔리메르가 자신의 요구를 거부하고 정교 신자들을 박해하는 걸 빌미삼아 전쟁을 선포했다. 그는 사산 왕조의 샤한샤 호스로 1세와 평화 협약을 맺은 뒤 원정을 준비했다. 마침 힐데리크 실각 후 박해당하는 상황을 모면하려는 정교 신자들이 북아프리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트리폴리의 푸덴티우스가 반달 왕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동로마 제국에 합류하겠다고 선포하면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분견대를 파견해 이들을 돕게 했다.
한편, 겔리메르의 해방 노예이자 사르데냐 총독인 고다스는 반달 왕국이 소란스러워져 사르데냐에 신경쓰지 못하는 틈을 타 독립을 선포하고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사절을 보내 보호를 요청했다. 황제는 반란군을 돕기 위해 집정관을 맡은 키릴로스에게 400명의 병사를 보냈다. 이에 겔리메르는 동생 트자존에게 가장 빠르고 강한 배 122척과 병사 5,000명을 맡겨 사르데냐를 탈환하게 했다. 트자존은 사르데냐의 수도 칼리가리를 공략하고 고다스를 처형했다.
그러나 반달 왕국군이 사르데냐로 대거 투입된 사이,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1만 5천 병력과 3만 명의 선원 및 노젓는 일꾼들이 500척의 함대와 함께 지중해를 가로질러 항해했다. 그들은 항해 3개월 후인 533년 8월 31일 카르타고에서 5일 떨어진 라스 카푸디아에 상륙했다. 당시 겔리메르는 적이 이렇게 빨리 올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채 베르베르와의 전쟁에 전념하고 있었다. 동로마군은 이 때를 틈타 공세를 개시해 아프리카 해안의 세우타 시를 공략했다. 벨리사리우스는 점령지 주민들을 잘 대우하고 주민들의 재산을 약탈한 병사들을 가차없이 처형해 민심을 자기 편으로 끌여들었다. 이에 로마군이 진군하는 곳마다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했다.
로마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들은 겔리메르는 서고트 왕국의 군주 테우디스에게 동맹을 요청했으나 회답을 얻지 못했다. 그는 벨리사리우스가 힐데리크를 복위시키기 위해 여기에 왔다고 발표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힐데리크, 에바게스 형제를 처형한 뒤 동원 가능한 병력을 대거 긁어모아서 로마군에 맞서 싸우기로 했다. 프로코피우스는 이때 동원한 병력이 10만에 달했다고 기술했지만, 현대 역사학계는 이를 지나친 과장으로 간주한다.
겔리메르는 튀니스 인근의 아드 데키뭄에서 동생 암마타스가 정면, 사촌 길타문드가 측면, 자신은 후방을 맡아 동로마 군대를 포위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먼저 도착한 암마타스가 로마군과 홀로 대적했다가 전사해버렸고, 뒤이어 도착한 길타문드의 군대는 매복하고 있던 훈족 용병대에게 각개격파당했다. 이후 전장에 도착한 겔리메르는 선두의 적군을 격파했지만, 암마타스가 죽은 걸 보고 동생의 장례식을 치를 때까지 전투를 미루기로 했다. 그 사이 군대를 재정비한 벨리사리우스는 총공격을 퍼부어 반달군을 격파했고, 겔리메르는 서쪽의 누미디아로 피신했다.
다음날 카르타고에 무혈 입성한 벨리사리우스는 베르베르 부족장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내고 은관을 그들에게 수여했다. 겔리메르는 불라 레기아에서 군대를 재정비한 뒤 사르데냐에서 달려온 트자준의 주력군도 불러들였다. 벨리사리우스는 카르타고가 함락됐다는 걸 모른 채 카르타고로 들어왔다가 사로잡힌 트자존의 사절로부터 적의 공세가 임박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카르타고 성벽 보수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겔리메르는 서고트 왕국에 다시 사절을 보내 동맹 제안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트자존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카르타고로 진군하면서 카르타고로 이어지는 수도교를 끊었다. 이로 인해 시민들이 동요하고 훈족 용병대 일부가 수적으로 우세한 적에게 동요하자, 벨리사리우스는 회전에 임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533년 12월 15일, 양군은 카르타고로부터 서쪽으로 50km 떨어진 트리카마룸에서 맞붙었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겔리메르와 트자존 형제는 이 전투에서 보병 1만, 기병 5천을 동원했다고 한다. 이렇게 벌어진 전투에서 동로마 장성인 아르메니아의 요한이 지휘한 로마 기병대의 돌격으로 트자존이 전사하자, 겔리메르는 절망한 채 잔여 병력을 수습하고 진영으로 도주했다가 적이 밀려오자 도로 누미디아로 도주했다. 로마군은 진지에 쌓여있는 막대한 금은보화에 눈이 돌아가 이를 약탈하는 데 정신이 팔려서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그 후 벨리사리우스는 아르메니아의 요한을 필두로 한 겔리메르 추격조를 편성하였다. 그들은 5일간 밤낮으로 겔리메르를 추격, 거의 따라잡았지만 요한이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로마 기병대가 그의 죽음을 기리는 동안 겔리메르는 히포 레기우스를 거쳐 무어인 동맹이 있는 푸아 산중의 메데우스로 피신하였다. 히포에 무혈입성한 벨리사리우스는 그곳에 있던 반달 군대를 포로로 잡았고, 항구에 정박해 있던 선박에서 반달 왕실의 보물을 발견했다. 벨리사리우스는 파라우스에게 4백의 군사를 주어 겔리메르의 산중 요새의 입구를 차단하게 하였다. 이후 그는 키릴로스, 요한, 아폴리나리우스 등의 부장들을 각각 사르데냐, 코르시카,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 지브롤터 해협 일대, 그리고 발레아레스 제도 일대로 파견했다. 전쟁 동안 베르베르 인의 침공을 받던 트리폴타니아에도 지원군이 보내져서 안정을 회복하였으며, 동고트 왕국과의 협상으로 시칠리아 서부의 반달 왕국의 항구였던 릴리바이움을 제국령으로 편입시켰다.
겔리메르는 메데우스에서 계속 저항했지만 온 나라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식량이 바닥나자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534년 3월에 항복하여 카르타고를 거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되었다. 이후 벨리사리우스의 개선식에 '전리품'으로 끌려간 그는 황제가 높은 보좌에 앉아 있고 주위의 신하들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그 후 그는 모든 친척과 함께 갈라티아 영지를 할당받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또한 로마 당국에게서 작위를 제안받았으나, 국교(니케아- 칼케돈파)로 개종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에 대해 아리우스파를 끝까지 고수하며 거절했다. 553년경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