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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로스/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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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2. 중세3. 근대4. 현대5. 관련 항목

1. 고대

기원전 9000년 무렵에 아나톨리아에서 사람이 넘어가 석기 시대 문화가 생겼으며, 원시적인 도시 유적도 발굴되었다. 청동기 시대에는 독자적인 문자도 가지고 있었으며, 이후 페니키아인들과 그리스인들이 넘어오면서 그리스 초기 문명인 미케네 문명과도 관계를 맺는다. 청동 생산량이 풍부해 청동기 문명의 핵심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바다 민족들이 날뛰던 시대에 청동기 문명들이 붕괴될 때 멸망한다. 이집트 람세스 3세 대의 기록에 히타이트와 함께 멸망당했다고 남겨졌다. 이후 철기 시대에 재건되어 성경( 신약)에도 배경 지역으로 등장한다.[1]

아시리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가, 알렉산드로스 헬레니즘 제국 성립 이후로는 대체적으로 그리스- 로마 문화권이었다. 기원전 60년대에 폼페이우스가 키프로스 주변의 동방지역을 거의 다 점령하고 난 후 그 여세를 몰아 기원전 58년에 로마군은 키프로스를 접수했지만, 공화정 말기의 정세불안으로 지배가 확립되지는 못했다. 심지어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에게 결혼 선물로 이 섬을 떼다 붙여 주기도 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의 승리로 로마의 지배가 확립되었다. 이후 베스파시아누스 유대인을 진압하여 그로 인해 발생한 유대인 피난민이 키프로스로 대거 밀려들어왔는데, 40여년 후 115~117년에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 원정을 가서 동부지역 주둔군이 많이 차출되었을 때 그 틈을 노리고 키레나이카의 유대인들이 일으킨 반란이 이집트, 키프로스, 유다이아, 메소포타미아 등 유대인들의 인구비중이 높은 곳까지 단시간에 파급되어 Kitos War라 불리는 내전에 준하는 반란이 터졌다. 주둔군은 물론 시민권자들까지 키프로스에서만 만 단위~십만 단위로 살해하는 등 잔혹했지만 결국 Lusius Quietus[2]에게 진압당하여 키프로스에서 유대인은 축출당했다.[3] 이런 특수한 경우 외에는 주둔군도 거의 없는 평화로운 후방지역이었다.[4] 대체적으로 올리브유와 포도주 생산으로 번영을 누렸었다.

이후 로마 제국이 분할통치를 시작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영역이 되었다. 로마 시대에만 굵직했던 것으로 6번의 지진이 있었다고 한다.[5]

2. 중세

7세기경 이슬람 제국의 발흥으로 동로마 제국은 북아프리카, 이집트, 시리아 등을 상실했고 키프로스도 다른 섬들과 함께 650년경 이슬람의 침략을 받았다. 688년 동로마와 이슬람 우마이야 왕조가 키프로스를 300년 간 공동으로 지배하고[6] 수취된 세수도 양측이 나누기로 한[7] 내용의 전례 없는 조약을 체결한다. 그 뒤로 서로 대립한 두 세력도(특히 717-718년의 콘스탄티노플 포위전) 이 조약만큼은 대체로 잘 지켰다.

조약 체결 직후 동로마 제국이 섬 대부분의 지배권을 얻었으나,[8] 동로마 제국이 섬을 완전히 손에 넣은 때는 965년이었다. 이는 964~965년 동로마의 킬리키아 탈환의 직접적인 결과였는데, 킬리키아 지역이 키프로스와 가장 가까운 육지였기 때문이다. 중간중간 9세기 중후반에 바실리오스 1세가 잠깐 점령했던 적도 있고, 원래 동로마 출신의 전향자였으며 아바스에서는 타르수스를 연고로 하여 그 지명이 붙었고 반쯤은 사략 해적의 수장이었던 타르수스의 다미아노스가 911년에 잠깐 점령 및 약탈했었던 적도 있었다.[9] 공교롭게도 동시대에 같은 부류의 인물로서 활동했던(동로마 출신 전향자, 904년 테살로니카 일시 점령 및 약탈) 트리폴리의 레오도 참고하면 좋다.

이후 200여 년간 다시 로마령으로 있다가, 1185년 안드로니코스 1세의 폐위 및 앙겔로스 일가의 제위 장악 등 중앙정부가 혼란한 와중에 키프로스의 이사키오스 콤니노스[10]가 독립을 선포했다. 이사키오스는 3차 십자군 원정 도중 키프로스에 표류한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부하들을 포로로 잡고 물자를 약탈했으며 리처드의 누이까지 포로로 사로잡으려 해서 리처드 1세를 극도로 분노하게 했다.

리처드 1세가 포로와 물자 반환을 요구해도 이사키오스가 듣지 않자 리처드 1세는 키프로스를 정복하여 잉글랜드의 영토로 삼았다. 몬페라토의 콘라드와 기 드 뤼지냥이 예루살렘 왕국 왕위를 놓고 다투던 중에 몬페라토의 콘라드의 지원을 받기 위해 리처드 1세가 뤼지냥의 왕위를 빼앗아 콘라드에게 주는 과정에서 보상으로 키프로스를 뤼지냥에게 주었다. 이후 뤼지냥 왕가는 키프로스 왕국을 세워 200년 간 키프로스를 지배했다.

키프로스 왕국의 인구 대부분은 그리스 정교회 신도였다. 로마 가톨릭을 믿는 이른바 라틴인들은 키프로스 인구의 4분의 1을 넘지 않았으며 주로 도시에 집중되어 있었다. 프랑크 기사와 귀족들은 대부분 니코시아에 살았고 이탈리아 상인들은 파마구스타에 몰려있었다. 1270년대부터 1280년대 십자군 국가가 맘루크 왕조의 침공으로 수세에 몰리고 최후의 보루였던 아크레마저 함락당하자 십자군 패잔병들이 키프로스로 몰려들었다. 십자군의 보조부대로 봉사하던 마론파 아르메니아인, 가톨릭으로 개종한 시리아인 일부도 이 당시 키프로스로 피난하였는데 이들에게는 산기슭을 개간하고 정착할 권리가 주어졌다.

키프로스 왕국은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조금씩 종속되다가 1489년에 이르러 마지막 국왕 자크 2세가 죽고 베네치아 출신 왕비가 왕국의 주권을 베네치아에 양도하면서 공식적으로 베네치아에 합병된다. 이미 이 시기 동지중해의 패권은 오스만 제국이 점차 장악해가는 상황이었고 베네치아는 주요한 무역 루트인 키프로스의 주요 도시-니코시아, 파마구스타 등-를 요새화하는 등 영향력을 최대한 유지하고자 했지만 당시 오스만은 한창 물이 오른 상황이었고 키프로스 현지 주민인 그리스계 주민들이 무관심했기[11] 때문에 대세를 꺾을 수 없었다. 결국 1571년에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받아 파마구스타가 함락되며 오스만의 영토가 되었다.[12]

3. 근대

오스만 제국이 들어오면서 3차 십자군 이래로 키프로스의 지배층이었던 프랑스, 베네치아 혈통의 라틴계 봉건 영주들에게는 가혹하게 대해 그들을 거의 완전히 제거했고 그 자리는 키프로스 원정에 참가했던 튀르키예계 군인들을 정착시켜 대체했다. 그러나 현지 주민들 대다수를 구성하는 그리스계 정교회 신자들은 밀레트 제도 하에 편입되었고 키프로스 정교회 대주교의 관리를 받게 되었다. 오스만 지배 초기에는 농노 신분에서 벗어나고 종교적 자치까지 얻은 그리스계 주민들은 오스만의 통치를 환영하기도 했다. 키프로스에는 무슬림 튀르키예인들과 정교도 그리스인들의 후손들이 함께 거주하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 시기 내내 키프로스의 무슬림과 정교인들은 마을별로 모여 살았으며, 비록 종교는 달라도 전반적으로 평화롭게 공존했다. 다만 모두가 종교적 자유를 누린 것은 아니었던 것이 그리스인들에게는 나름 유화책을 폈던 오스만이지만 키프로스의 옛 지배층이었던 라틴계 가톨릭 신자들이나 마론파, 아르메니아인 등등에게는 세금을 더 많이 거두는 등의 가혹한 탄압이 가해졌고 이들은 무슬림으로 거짓 개종을 하거나 숨어서 지내는 식으로 신앙 생활을 유지했다.

역사적으로 키프로스는 절묘한 위치덕에 지중해 무역의 중개지로서 큰 번영을 누려왔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기에는 해상무역의 축이 대서양과 북해 등으로 옮겨간 덕에 이전까지의 무역 중심지로 명성이 높았던 키프로스의 해상 도시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오스만도 나름 이를 알고 상업 대신 농업을 육성해 수도교를 파고 농산물의 판매를 위한 도로를 건설하는 등 다른 방법을 모색했으나 쇠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시대가 변하며 키프로스에도 민족주의의 광풍이 덮쳐왔다. 그리스 독립 전쟁이 일어나자 민족의식을 각성한 그리스인들이 키프로스를 떠나 그리스군에 가담했으나 무자비하게 징벌된 후[13] 1878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베를린 회의에서 영국이 오스만 제국을 지지해주는 대가로 영국이 실질적으로 지배했다.[14] 그나마 명목상 오스만의 속주였으나 실질적으로 영국의 보호령이었던 이집트의 경우처럼 세금의 일부라도 계속 오스만 제국에게 바치도록 했지만 영국이 크림 전쟁 이후 오스만 제국이 갚지 못한 부채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거부해서 형식적으로만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어버린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때 오스만 제국이 동맹국 편으로 참전하자 정식으로 합병되었다.

키프로스에서 그리스인 튀르키예인 사이의 대립이 일어나게 된 사상적 배경은 '에노시스' 운동이었다. 에노시스(Ένωσις)란 그리스어로 '하나되기', '통합'을 뜻하는 단어인데, 에노시스 운동은 세계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인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구심점을 만들자는 사상이다. 1898년에 크레타 크레타 정부(Η Κρητηκη Πολιτεία)로 독립했을 때도 그리스 민족주의자들은 두개의 국가는 있을 수 없다며 크레타 정부와 그리스 왕국의 합병을 주장했으며 결국 크레타 정부는 그리스에 합병되는 식으로 사라졌다.[15]

키프로스에서도 에노시스 운동이 일어났다. 1923년 튀르키예 독립 전쟁 때는 튀르키예군이 이 지역을 재정복하려 했으나, 국력의 한계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대국민회의에서 영국과 협상을 벌여 이 지역을 포기하기로 타협했다. 아타튀르크는 키프로스가 독립할 경우 튀르키예 본토에서처럼 그리스인과 튀르키예인 사이의 갈등이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예상했다. 튀르키예가 키프로스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기로 영국과 합의하고 키프로스의 그리스계 민족주의자들은 키프로스가 그리스라고 주장하면서 섬 전체에서 파업과 강력한 투쟁을 했다.

에노시스 운동을 최초로 주장했던 그리스 최초의 대통령 이오아니스 안도니오스 카포디스트리아스(Ιωάννης Αντώνιος Καποδίστριας, 1776~1831)의 조상이 키프로스인이었다는 것도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에게 강력한 명분이 되었다.[16] 키프로스 가문 출신이 그리스 대통령까지 되었으니 키프로스는 곧 그리스라는 것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ypriot_demonstration_1930.jpg
그리스 국기를 걸고 에노시스 지지 시위를 하는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 (1930년, 현수막에 씐 문구는 '통합 만세!'라는 뜻이다.)

영국에서는 이러한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의 움직임을 좋게 보지 않았다. 하지만 대다수의 키프로스인들이 조국으로 여기고 있는 그리스가 떡하니 버티고 있어서 영국은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의 에노시스 운동을 진압할 만한 구실도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이 그리스로 병합하자고 더욱 게세게 요구했다. 1950년 1월 15일부터 22일까지 있었던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5.7%가 독립이 아닌 그리스 왕국으로 병합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에노시스는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의 요구 사항이었고, 섬에 거주하는 튀르키예계 주민들은 그렇지 않았다. 튀르키예계 주민들은 아타튀르크가 키프로스를 포기하겠다고 영국과 협상한 순간 국가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꼈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영국과 협조하려고 했다. 이미 튀르키예 독립 전쟁 이후 그리스에 거주하던 튀르키예인들은 재산을 모조리 압류당한 뒤 튀르키예로 추방당했고, 그 이전에 크레타가 독립했을 때도 섬에 거주하던 튀르키예인들은 모조리 추방되었다.

따라서 튀르키예계 주민들은 그리스계를 적대했다. 이에 튀르키예계 키프로스인들은 에노시스 운동에 대항해 '탁심(Taksim: 분리)'이라는 문구를 내세우며 그리스계 키프로스인과는 별개로 튀르키예계 키프로스인의 자결(그리스계 국가와는 별개의 튀르키예계 국가의 수립, 더 나아가 튀르키예계 국가의 튀르키예와의 통일)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결국 1955년 에노시스를 지지하는 그리스계 키프로스인 무장단체인 EOKA(Εθνική Οργάνωσις Κυπρίων Αγωνιστών; 키프로스 투사 민족 기구)가 그리스의 지원을 받아 영국 당국을 상대로 대대적인 무력 투쟁에 나섰고, 이를 저지하려는 영국군과 영국군을 지지하는 튀르키예계 키프로스인 무장단체와의 무력 충돌이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그리스계와 튀르키예계를 지지하는 그리스와 튀르키예 모두 NATO 회원국이라 미국과 NATO 모두 섣불리 한 쪽 편을 들어 개입할 수 없었고, 결국 UN이 개입하여, UN의 중재 아래 1959년 런던에서 영국, 그리스, 튀르키예, 그리스계 키프로스인, 튀르키예계 키프로스인 5자는 아래와 같이 합의하였다.
  • 키프로스는 그리스나 튀르키예의 일부가 아닌 별개의 독립국가로 독립.
  • '에노시스'와 '탁심'은 모두 금지.
  • 그리스계와 튀르키예계의 안전 보장을 위해 그리스군 튀르키예군이 키프로스에 주둔. 양국군의 비율은 그리스군:튀르키예군 = 3:2로 함.
  • 대통령은 그리스계로 그리스계가 대통령을 선출, 부통령은 튀르키예계로 튀르키예계가 부통령을 선출.
  • 내각 구성원 중 7명은 그리스계 몫으로 그리스계 대통령이 임명, 3명은 튀르키예계 몫으로 튀르키예계 부통령이 임명.
  • 의회는 단순 다수결로 표결, 그러나 그리스계 대통령과 튀르키예계 부통령 모두한테 거부권이 있음.
  • 키프로스의 독립 보장을 위해 영국군이 아크로티리와 데켈리아에 주둔.

그리하여 1960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그리스계와 튀르키예계의 합의로 키프로스 헌법이 완성되었고 8월 16일 키프로스는 독립국 ' 키프로스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4. 현대

초대 대통령이자 키프로스 정교회 대주교이기도 한 마카리오스 3세(1913~1977)는 독립 전에는 열렬한 에노시스 지지자로서 에노시스 운동의 구심점인 인물이었으나 키프로스가 독립한 후에는 그리스계와 튀르키예계의 공존을 명시한 헌법을 준수하면서 키프로스에서 무슬림 자치 구역을 허용하고 이 구역에선 자유롭게 권한을 행사하도록 하는 관용적인 조치를 취했다. 덕분에 독립 직후에는 튀르키예계나 튀르키예에서 별다른 반발이 나오지 않고 꽤 평화롭게 지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던 그리스계가 점차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그리스계 주도 하의 튀르키예계 키프로스인의 박해가 시작되었고 섬 전체에 흩어져서 그리스인들과 같이 지내던 튀르키예계 주민들은 점차 게토화되기 시작했다. 다농경지가 많은 섬 북쪽 지역에서 쫓겨나 키프로스 정부가 지정해주는 곳으로 옮겨 살았는데 튀르키예계 주민들은 전부 구릉 지대나 고원 지대로 옮겨져 버린다. 튀르키예에서는 키프로스의 튀르키예계 주민들이 핍박받는 것이 언론을 탔으며 그리스계와 튀르키예계, 나아가 그리스와 튀르키예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계 강경파들의 반발로 군사 반란이 벌어졌고 여기에 그리스 군사정권이 자국의 독재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을 돌리고 키프로스를 합병하고자 1974년 7월 13일, 군대를 보내어 마카리오스 대통령을 그리스 민족주의를 침해한다는 근거없는 죄로 축출하고 니코스 삼프손(Νίκος Σαμψών - 1935~2001)[17]을 후임 대통령으로 앉혀 놓았다.

그러자 튀르키예는 튀르키예계 주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7월 20일 파병을 시작했고 그리스계 구역을 폭격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튀르키예군이 빠르게 상륙하여 진주하자 당황한 키프로스군은 아군인 그리스로부터 들어오던 수송기를 격추시켜 버리는 일까지 벌어질 정도로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했다. 전쟁 이전부터 그리스나 키프로스 측에서 튀르키예군 따위는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자발적인 시민군은 튀르키예군의 초반 폭격으로 500명이 넘는 사망자가 생기자 놀라 달아났다. 무장과 병력 수, 모든 것에서 불리한 일개 민병대가 튀르키예 정규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튀르키예는 영국군이 배치된 아야 나파 지역을 제외한 키프로스 각지를 빠르게 장악해 나갔다. 미국 유럽이 중재하여 튀르키예군이 일부 물러났으나 불과 한달도 안되어 키프로스는 1974년 8월 중순, 완전히 분리되었다. 키프로스 전쟁의 패배로 그리스 군사정권은 붕괴되었다. 상황이 어찌 됐건 남의 영토에 먼저 침공한 모양새가 된 튀르키예는 미국에게 일시적인 무기 금수 조치를 당했고, 그리스는 튀르키예의 침공을 방기한 서구에 치를 떨며 NATO를 탈퇴하니 마니 하며 한동안 소란을 일으켰다.

전후 남키프로스에서는 강제로 하야당한 마카리오스 대통령이 복권되었고, 마카리오스는 북키프로스로 가서 남북 키프로스를 다시 합치고 과거처럼 평화롭게 공존하자고 요청했다. 그러나 키프로스 전쟁 당시 그리스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은 튀르키예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마카리오스는 하나였던 키프로스의 과거를 그리워하며 세상을 떠났다. 1983년에는 북키프로스 측에서 자체 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을 선언했지만 튀르키예 이외에는 독립을 인정받지 못했다.

2006년 이스라엘 레바논을 침공하자 튀르키예는 레바논에 거주하던 무슬림들이나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바로 북키프로스에 정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덕분에 북키프로스에 아랍계와 다양한 이슬람 거주민들이 대거 늘어났으며 이로인해 아랍 연맹에서도 키프로스를 신경쓰기 시작했다. 그리스는 아랍 연맹이 키프로스의 갈등에 관여하게 만든다고 비난했으나 튀르키예는 아랍 연맹과 우호 관계인 그리스가 레바논 피난민을 받아주지 않아 이런 상황을 자초했다고 반박했다.

2008년 3월 수도인 니코시아를 나누던 분리 장막을 33년만에 해체했고 장막이 있던 레드라 거리에 튀르키예계와 그리스계 공무원이 상주하는 가운데 개방되었다. 현재는 남북 키프로스인들이 여권없이 자유롭게 상대방의 지역을 여행할 수 있지만, 분단 이전의 키프로스 국적을 보유한 그리스계, 튀르키예계 키프로스인 당사자와 자손들에게만 해당되며 그 외에는 외국인으로 간주되어 여권을 요구한다.

5. 관련 항목


[1] 바울로와 함께 선교여행을 가기도 했던 바르나바의 고향이며, 선교 여행 때 처음으로 방문한 곳이다. 개신교의 개역 개정 성경에 나오는 구브로가 이 곳. 참고로 개역개정에서 바보(...)라고 표기되는 파포스 역시 키프로스의 도시이다. [2] 이 Quietus가 음운변화해서 Kitos가 된 것. [3] Roman Cyprus 중 'After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in 70 AD by Vespasian, the Roman Emperor, and his son Titus there was a large influx of Jewish refugees into Cyprus. In 115-117 AD a widespread Jewish revolt (Kitos War) resulted in tens of thousands of deaths in Cyprus and around the Eastern Empire and in the expulsion of Jews from Cyprus.' 및, Kitos War 중 ' The rebellions erupted in 115, when most of the Roman armies were fighting Trajan's Parthian War on the eastern border of the Roman Empire. Major uprisings by Jews in Cyrenaica, Cyprus and Egypt spiralled out of control, resulting in a widespread slaughter of the remaining Roman garrisons and Roman citizens by Jewish rebels.' 및, 'A revolt in far-off Cyrenaica soon spread to Egypt and then Cyprus and incited revolt in Judea. A widespread uprising, centred on Lydda, threatened grain supplies from Egypt to the front. The Jewish insurrection swiftly spread to the recently-conquered provinces. Cities with substantial Jewish populations, Nisibis, Edessa, Seleucia and Arbela (now Erbil, Iraq) joined the rebellion and slaughtered their small Roman garrisons.', 및 ' In Cyprus a Jewish band, led by Artemion, took control of the island and killed tens of thousands of Cypriot Greek civilians. The Cypriot Jews participated in the great uprising against the Romans under Trajan in 117 and massacred, according to Dio, 240,000 Greeks. A Roman army was dispatched to the island and soon reconquered the capital. After the revolt had been fully defeated, laws were created that forbade any Jews from living on the island.' [4] Roman Cyprus 중 'There was very little significant Roman military presence on Cyprus, with the exception of two notable incidents;' [5] Roman Cyprus 중 'Six earthquakes of note affected Cyprus during the Roman period.' [6] 이를 공동통치령(Condominium)이라고 한다. [7] Cyprus in the Middle Ages 중 'The collected taxes were divided among the Arabs and the emperor.' [8] 한 섬 안에서 그리스 계열과 이슬람 계열로 분단되어 있고, 더 대표성을 가진 쪽이(영역이 넓거나, 국제적으로 넓게 승인받거나) 그리스 계열이라는 점에서, 오늘날의 친 그리스계 (남)키프로스와 친 튀르키예계 북키프로스 간의 관계와 유사한 점이 있다. [9] Cyprus in the Middle Ages 중, 'Under Basil I the Macedonian (r. 867–886) Byzantine troops recaptured Cyprus, which was established as a theme, but after seven years the island reverted to the previous status quo. Once again, in 911, the Cypriots helped a Byzantine fleet under admiral Himerios, and in retaliation the Arabs under Damian of Tarsus ravaged the island for four months and carried off many captives.' [10] 요안니스 2세의 아들의 딸의 아들이라서, 좁은 의미로는 부계 콤니노스 일가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앙겔로스 가의 알렉시오스-이사키오스 형제 또한 알렉시오스 1세의 딸의 아들의 아들들이라서 서로 모두 친척이었다. [11] 심지어 유대인들은 오스만에 협력하는 스탠스를 취했다가 추방당하기도 했다. [12] 이때 키프로스를 구원하기 위해 베네치아를 비롯한 기독교 국가들의 함대와 오스만의 함대가 충돌하며 레판토 해전이 발발했다. [13] 밀레트의 관리 책임이 있는 대주교 하나와 주교 4명을 포함한 주요 키프로스인 486명이 체포되고 처형당했다. [14] 1878년에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끝내는 산 스테파노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러시아의 세력을 견제한 영국, 독일 제국 등이 개입하여 러시아가 오스만에 강요했던 조건들을 일부 완화하거나 폐지했다. [15] 당시 크레타 정부의 수반이었던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부터가 오스만 제국 시절 크레타 의회의 의원이었을 때부터 강력한 에노시스 지지자였다. 그리고 이후 베니젤로스는 그리스로 건너가 그리스 총리로 활약, 발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크레타를 조국의 품으로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16] 정확하게는 모계쪽으로 키프로스 혈통이다. 카포디스트리아스 본인은 이오니아 제도 코르푸 출생으로 부계는 베네치아 공화국 카포디스트리아 출신의 그리스화된 베네치아 혈통이다. [17] 친그리스, 우익, 반튀르키예, 반영 계열 민병대이자 사실상 테러리스트 조직이었던 EOKA의 핵심 인물이었고, 단순 가담자 수준이 아니라 최소 15건 이상의 튀르키예 영국의 민간인 및 경찰을 살해, 고문하는데 직접 참여했고 이로 인해 감옥살이까지 했던 사람이다. 삼프손의 원래 직업이 신문 기자였는데, 종종 누군가를 살해하고 그 현장을 살인 사건이라면서 특종으로 보도했다. 즉, 자기 자신이 사건을 저지르고 보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건 현장에 제일 먼저 와서 기사를 쓰는 일이 여러번 반복되자 경찰의 의심을 사게 되었고, 결국 꼬리를 밟히게 된 것이다. 석방된 이후에도 영국 건축가를 사살했다는 의혹이 있는가 하면 오모르피타의 폭동에서는 직접 민병대를 이끌고 튀르키예계 민간인들을 적극적으로 탄압하여 오모르피타의 도살자라는 별명까지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