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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E0026><colcolor=#dca600> 일본 제26대 천황
게이타이 천황 繼體天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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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450년 | ||
왜
오미국
타카시마고오 미오노 (現 시가현 타카시마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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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531년 3월 10일 (향년 81세) | ||
왜
나라현 반여옥수궁 (現 나라현 사쿠라이시) |
|||
능묘 | 미시마노아이노능([ruby(三嶋藍野陵, ruby=삼도남야릉)]) | ||
재위기간 | 제26대 천황 | ||
507년 3월 3일 ~ 531년 3월 10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BE0026><colcolor=#dca600> 휘 | 오호도([ruby(袁本杼, ruby=원본저)], [ruby(男大迹, ruby=남대적)], [ruby(乎富等, ruby=호부등)], [ruby(雄大迹, ruby=웅대적)]) | |
부모 |
부친 히코우시 왕 모친 후루히메 |
||
배우자 |
오와리노메노코히메 타시라카 황후 |
||
자녀 | 9남 12녀 | ||
관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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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풍 시호 | 게이타이 천황([ruby(繼體天皇, ruby=계체천황)]) | ||
화풍 시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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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대적천황(雄大迹天皇)[1][2][3] | |
원본저명(袁本杼命)[4][5] | |||
언태존(彦太尊)[6][7] | |||
남대적왕(男大迹王)[8][9] | |||
호부등대공왕(乎富等大公王)[10][11][12] | |||
부제왕(孚弟王)[13] | |||
남제왕(男弟王)[1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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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이시의 게이타이 천황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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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제26대 천황이자 현 일본 황실의 중시조이다.종전 직후인 1953년에 제기된 미즈노 유우(水野祐)의 <3왕조 교체설>(三王朝交替説)에 따르면 게이타이 천황 이전에 두 차례의 왕조 교체가 있었으며 게이타이 천황이 현 일본 황실 최초의 혈통적 직계 조상이다.[15] 오늘날에도 일본 사학계 내에서 게이타이 천황 이전의 천황들과 게이타이 천황 사이의 혈통적 연관성에 관한 이견이 분분하다.
화풍 시호[16]는 오오도노스메라미코토(雄大迹天皇)이며, 휘는 오호도(袁本杼)이다. 게이타이 천황은 한자로 쓰면 '계체'(繼體)인데, '조상의 뒤를 잇는다', '제왕의 자리를 잇는다'는 뜻이다.
《고사기》에는 대략 40세, 《일본서기》에는 약 80세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17]
2. 생애
2.1. 일본서기 권제17 게이타이 덴노(卷第十七 男大迹天皇 繼體天皇)
워호도노 스메라미코토(男大迹天皇)[다른 이름은 히코후토노 미코토(彦太尊)이다.]은 호무타노 스메라미코토(譽田天皇)의 5세손이며[18], 히코우시노 오호키미(彦主人王)의 아들이다.[19] 어머니는 후루히메(振媛)이라고 한다. 후루히메는 이쿠메노 스메라미코토(活目天皇)의 7세손이다.[20] 천황의 아버지는 후루히메의 용모가 단정하고 아주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아후미노쿠니(近江國) 타카시마노 코호리(高嶋郡) 미워(三尾)[21]의 별장[22]에 사람을 보내어, 미쿠니(三國)의 사카나위(坂中井)[23]로부터 맞아 들여 비로 삼았다. 비는 천황을 낳았으나, 천황이 아직 어릴 때 부왕(父王)이 죽었다. 후루히메가 탄식하여 “내가 지금 고향을 멀리 떠나 있으니 어찌 부모를 봉양할 수 있겠는가. 나는 타카무코(高向)[타카무코는 에치젠국(越前國)의 읍명이다.][24]로 돌아가 부모를 모시면서, 천황을 기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천황은 성장하여 사람을 사랑하고 어진 이를 예우하였으며, 마음이 관대하였다. 천황이 57세가 되던 (부레쓰 덴노) 8년 겨울 12월 기해(8일)에 워하츠세노 스메라미코토(小泊瀨天皇)가 죽었다(崩). 원래 자식이 없어서 후사가 끊어졌다.임자(21일), 오호토모노 카나무라노 오호무라지(大伴金村大連)[25]가 의논하기를, “지금 자손이 없어서 후사를 이을 수 없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어디에 마음을 의지할 수 있겠는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화는 이로부터 일어났다.[26] 이제 타라시나카츠히코노 스메라미코토(足仲彦天皇)의 5세손인 야마토히코노 오호키미(倭彦王)가 타니하노쿠니(丹波國) 쿠하타노 코호리(桑田郡)[27]에 계시니, 청컨대 의장(儀仗)을 갖추고 수레를 호위해, 나아가 맞아들여 왕으로 세웁시다.”라고 하였다. 대신과 오호무라지 등이 모두 따르므로 계획대로 맞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런데 야마토히코 왕은 멀리 자신을 맞으러 오는 군사를 보고 놀라 안색이 변하여 산중으로 도망치니,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원년(507) 봄 정월 신유삭 갑자(4일)에 오호토모노 카나무라노 오호무라지가 다시 도모하여, “워호도노 스메라미코토는 성품이 어질고 부모에게 순종하시니, 왕위를 계승할 만하다.[28] 바라건대 은근히 권하여 제업(帝業)의 융성함을 잇도록 합시다.”라고 말하였다. 모노노베노 아라카히노 오호무라지(物部麤鹿火大連)[29]와 코세노 오히토노 오호오미(許勢男人大臣) 등이 모두 “천황의 자손을 자세히 살펴보건대, 어진 사람은 오직 워호도노 스메라미코토뿐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병인(6일), 신련(臣連) 등을 파견하여 절(節)을 들고[30] 법가(法駕)[31]를 갖추어 삼국(三國)으로 맞으러 갔다. 병장(兵仗)으로 호위하고 위의(威儀)를 갖추어 길잡이를 앞세워 급히 도착하니, 이때 워호도노 스메라미코토는 평온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32] 호상(胡床)[33]에 앉아서[34] 배신(陪臣)[35]을 정렬시키니 이미 제왕이 앉은 것과 같았다. 절을 든 사신들은 이에 황공하고 삼가하여, 정성을 기울여 충성을 다할 수 있도록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천황은 마음속에 여전히 미심쩍은 바가 있어 오래토록 나아가지 않았다. 그때 마침 카후치노 우마카히노 오비토 아라코(河內馬飼首荒籠)[36]를 알고 지냈는데, (황롱이)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대신과 오호무라지들이 맞아들이려는 참뜻을 자세히 전하였다. 그래서 이틀 밤 삼일 낮을 머무른 후에야 드디어 출발하였다. 이때 (천황은) 찬탄하여 “훌륭하도다, 마사수(馬飼首)여. 만일 네가 사람을 보내어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뻔하였다. 세간에서 귀천을 따지지 말고 단지 그 마음을 중시할 일이다라고 한 말은 무릇 황롱의 일을 일컬음이다.”라고 하였다. 즉위함에 이르러 황롱을 두텁게 대우하였다.
갑신(12일), 천황이 쿠스하노미야(樟葉宮)[37]에 이르렀다.
2월 신묘삭 갑오(4일), 오호토모노 카나무라노 오호무라지가 무릎을 꿇고 천황의 신분을 표시하는 거울과 칼을 올리고 두 번 절하니, 워호도노 스메라미코토가 사양하기를 “백성을 자식처럼 거느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중대한 일이다. 과인은 재능이 없어서 천황이 될 자격이 없으니, 원컨대 생각을 바꾸어 어진 이를 택하라. 과인은 감당할 수 없다.”고 하였다. 오호토모노 오호무라지(大伴大連)는 땅에 엎드려 간절히 청하였으나 워호도노 스메라미코토는 서쪽으로 앉아 세 번 사양하고, 남쪽을 향하여 두 번 사양하였다. 오호토모노 오호무라지 등이 모두 말하기를 “신들이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은 백성을 자식처럼 거느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 가장 합당한 분입니다. 신들이 종묘사직을 위하여 일을 도모할 때 가벼이 하지 않겠습니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받아들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워호도노 스메라미코토는 “대신과 대련, 장상(將相)과 여러 신하들이 모두 과인을 추천하니 과인은 감히 어길 수가 없다.”고 하고, 마침내 새부(璽符)를 받았다[38]. 이 날, 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오호토모노 카나무라노 오호무라지를 오호무라지로, 코세노 오히토노 오호오미를 오호오미(大臣)로, 모노노베노 아라카히노 오호무라지를 전과 같이 오호무라지로 삼았다. 그래서 대신과 대련 등 각각의 지위가 정해졌다.
경자(10일) 오호토모노 오호무라지(大伴大連)가 주청하기를 “신이 듣건대 과거의 왕들이 세상을 다스리는 데 후계자[39]가 확실하지 않으면 천하를 다스릴 수 없고, 의 좋은 왕비[40]가 없으면 좋은 자손[41]을 얻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시라카노 스메라미코토(白髮天皇)는 후사가 없었으므로 신의 조부 오호토모노 오호무라지 무로야(大伴大連室屋)[42]를 보내어 각 지역에 세 가지의 시라카베(白髮部)[세 가지라고 한 것은 첫째 시라카베노 토네리(白髮部舍人)[43], 둘째 시라카베노 카시하데(白髮部供膳)[44], 셋째 시라카베노 유케히(白髮部靫負)[45]이다.][46]를 두어,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남길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어찌 애처롭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타시라카 황녀(手白香皇女)[47]를 황후로 맞아들이고, 신기백(神祇伯)[48] 등을 보내어 세상의 온갖 귀신에게 제사 지내고 황자를 기원하여 백성의 소망에 답하소서.”라고 하였다. 천황이, “좋다.”고 하였다.[49]
3월 경신삭(1일), 조를 내려 “귀신을 제사 지내는 데는 신주(神主)가 없을 수 없고, 천하에는 군주(君主)가 없을 수 없다. 하늘은 백성을 낳고, 우두머리를 세워 그들을 도와 기르도록 하였고, 그 본성과 천명을 온전히 하도록 하였다.[50] 오호무라지는 짐에게 자식이 없음을 진심으로 걱정하고,[51] 국가를 위하여 대대로 충성을 다하고 있다. 어찌 짐의 재위기간뿐이겠는가. 예의를 갖추어 타시라카 황녀를 맞아들이도록 하라.”고 하였다.
갑자(5일), 타시라카 황녀를 황후로 세우고 내전(內)의 일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마침내 아들을 낳으니, 이가 아메쿠니오시하라키히로니하노 미코토(天國排開廣庭尊)이다[開는 하라키(波羅企)라고 읽는다.]. 이가 적자(嫡子)이나 나이가 어렸으므로, 두 형이 다스린 후에 천하를 다스리게 되었다[두 형은 히로쿠니오시타케카나히노 미코토(廣國排武金日尊)와 타케워히로쿠니오시타테노 미코토(武小廣國押盾尊)이다.].
무진(9일), 조를 내려 “짐이 듣건대 남자가 해마다 농사를 짓지 않으면 세상에 기근이 들 수 있으며, 여자가 해마다 베를 짜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이 추위에 떠는 수가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제왕은 몸소 농사지어 농업을 권장하고, 후비(后妃)는 친히 누에를 길러 뽕잎을 제때 주도록 격려한다고 한다.[52] 하물며 백료(百寮)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농사와 베짜기를 그만둔다면 어찌 윤택해질 수 있겠는가. 유사(有司)들은 천하에 널리 포고하여 짐의 뜻을 알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계유(14일), 여덟 명의 비(妃)를 맞아들였다[8비를 맞아들인 시기에는 비록 그 선후가 있으나, 여기에서 계유에 맞아들였다고 한 것은 천황이 즉위하자 좋은 날을 택하여 비로소 후궁으로 배수(拜授)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경우도 이에 따랐다.].[53]
원비(元妃)는 워하리노 무라지 쿠사카(尾張連草香)의 딸로 메노코히메(目子媛)[54]라 한다[다른 이름은 시코후(色部)이다.]. 두 아들을 낳으니, 모두 천하를 다스렸다. 그 첫째는 마가리노 오호에 황자(勾大兄皇子)[55]로, 이가 히로쿠니오시타케카나히노 미코토이다. 둘째는 히노쿠마노 타카타 황자(檜隈高田皇子)로, 이가 타케워히로쿠니오시타테노 미코토이다.
차비(次妃)는 미워노 츠노 오리노 키미(三尾角折君)의 누이로 와카코히메(稚子媛)이라 한다. 오호이라츠코 황자(大郞皇子)와 이즈모 황녀(出雲皇女)를 낳았다.
다음은 사카타노 오호마타노 오호키미(坂田大跨王)의 딸로 히로히메(廣媛)라 한다. 세 딸을 낳으니 맏이는 카무사키 황녀(神前皇女)라 하고, 둘째는 마무타 황녀(茨田皇女)라 하고, 막내는 우마구타 황녀(馬來田皇女)라 한다.
다음은 오키나가노 마테노 오호키미(息長眞手王)의 딸로 워미노 이라츠메(麻績娘子)라 한다. 사사케 황녀(荳角皇女)[荳角은 사사케(娑佐碍)라고 읽는다.]를 낳으니, 이 황녀는 이세노 오호미카미(伊勢大神)의 제사를 받들었다.
다음은 마무타노 무라지노 워모치(茨田連小望)의 딸[혹은 누이라 한다.]로, 세키히메(關媛)라 한다. 세 딸을 낳으니 맏이는 마무타노 오호이라츠메 황녀(茨田大娘皇女), 둘째는 시라사카 이쿠히 황녀(白坂活日姬皇女), 막내는 워노노 와카이라츠메 황녀(小野稚郎皇女)[다른 이름은 나가이하히메(長石姬)라고 한다.]라 한다.
다음은 미워노 키미 카타히(三尾君堅楲)의 딸로 야마토히메(倭媛)라 한다. 2남 2녀를 낳으니 첫째는 오호이라츠메 황녀(大娘子皇女), 둘째는 마로 황자(椀子皇子)로, 미쿠니노 키미(三國公)의 선조이다. 셋째는 미미 황자(耳皇子), 넷째는 아카히메 황녀(赤姬皇女)라 한다.
다음은 와니노 오미 카후치(和珥臣河內)의 딸로 하에히메(荑媛)이라 한다. 1남 2녀를 낳으니 첫째는 와카야히메 황녀(稚綾姬皇女), 둘째는 츠부라노 이라츠메 황녀(圓郎皇女), 셋째는 아츠 황자(厚皇子)라 한다.
다음은 네노 오호키미(根王)의 딸로, 히로히메(廣媛)이라고 한다. 두 아들을 낳으니 맏이는 우사기 황자(兎皇子)로 사카히토노 키미(酒人公)의 선조이며, 아우는 나카츠 황자(中皇子)로 사카타노 키미(坂田公)의 선조이다.
이 해의 간지는 정해이다.[56]
2년(508) 겨울 10월 신해삭 계축(3일), 워하츠세노 와카사자키노 스메라미코토(小泊瀨稚鷦鷯天皇)을 카타워카노 이와츠키노 워카(傍丘磐杯丘)의 능에 장사지냈다.
12월, 남해(南海)의 탐라인이 처음으로 백제국과 통교하였다.[57]
3년(509) 봄 2월, 사신을 백제에 보냈다[『백제본기(百濟本記)』[58]에서는 “쿠라마치키미(久羅麻致支彌)[59]가 일본으로부터 왔다.”고 하였으나, 자세하지 않다.]. 임나의 일본현읍(日本縣邑)에 사는 백제 백성 중에 본관지로부터 부랑 도망하여 호적에서 삭제된 지 3·4대가 지난 자를 조사하여 백제로 보내어 관(貫)에 올렸다.[60]
5년(511) 겨울 10월, 도읍을 야마시로(山背)의 츠츠키(筒城)[61]로 옮겼다.
6년(512) 여름 4월 신유삭 병인(6일), 호츠미노 오미 오시야마(穗積臣押山)[62]를 백제에 사신으로 보냈다. 이에 츠쿠시노쿠니(筑紫國)의 말 40필을 하사하였다.
겨울 12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조(調)를 바치고 따로 표를 올려[63] 임나국(任那國)의 상다리(上哆唎)[64], 하다리(下哆唎)[65], 사타(裟陀)[66], 모루(牟婁)[67] 4현을 청하였다. 다리국수인 호츠미노 오미 오시야마가 아뢰기를, “이 4현은 백제에 근접해 있고, 일본과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백제와 4현은) 아침저녁으로 교통하기 용이하고 닭과 개의 소리도 어느 쪽의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습니다.[68] 이제 백제에 주어 같은 나라로 합치게 한다면, 굳게 지키는 대책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나라를 합쳐도 후세에는 오히려 위험할 수 있는데,[69] 하물며 따로 떨어져 있다면 몇 년도 제대도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대반금촌대련(大伴大連金村)도 이 말을 믿고 뜻을 같이하여 상주(上奏)하였다. 이에 물부대련추록화(物部大連麤鹿火)를 조칙을 전하는 사신으로 삼았다. 물부대련(物部大連)이 백제 사신에게 칙을 전하기 위하여 난파관(難波館)[70]으로 막 떠나려고 할때 그 처가 간곡히 청하기를,[71] “무릇 스미노에노 오호카미(住吉大神)[72]가 처음으로 바다 저쪽[73]의 금은이 가득한 나라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 등을 태중(胎中)에 있던 호무타노 스메라미코토(譽田天皇)[74]에게 주셨습니다.[75] 그러므로 대후(大后) 오키나가 타라시히메노 미코토(息長足姬尊)[76]와 대신(大臣) 타케우치노 스쿠네(武內宿禰)가 나라마다 처음으로 미야케(官家)[77]를 설치하고 바다 저쪽의 번병[78]으로 삼았으니, 그 유래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분할하여 다른 나라에 주면 원래의 영토와 다르게 됩니다. 후세까지 비난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79]라고 하였다. 대련이 답하여 “이치에 합당한 말이나, 천황의 칙명에 어긋난다.”고 하였다. 처는 간청하여 “병을 핑계 삼아 칙을 알리는 일을 그만두십시오.”라고 하였다. 대련은 그 청에 따라서 사자를 바꾸어 칙을 알렸다. 하사품과 칙명의 뜻을 전하고, 상표에 따라[80] 임나 4현을 주었다.
오호헤 황자(大兄皇子)는 그전에 사정이 있어 영토의 할양에 관여하지 않았으나, 뒤늦게 그러한 칙명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놀라 이를 고치고자 하였다. “ 태중지제(胎中之帝) 이래 관가를 설치하였던 나라를 가볍게 이웃 나라(蕃國)가 요구하는 대로 주어버릴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히타카노 키시(日鷹吉師)[81]를 보내어, 백제 사신에게 칙을 바꾸어 알렸다. 사신은 대답하여 “아버지인 천황이 사정을 살펴서 칙명을 내렸는데, 아들인 황자가 어찌 천황의 칙명을 어기고 함부로 고쳐 명령을 내릴 수 있는가. 이는 반드시 거짓이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82]몽둥이의 굵은 쪽으로 때리는 것과 가는 쪽으로 때리는 것 중에 어느 쪽이 아프겠는가.”라고 하고, 돌아가 버렸다. 이에 “오호토모노 오호무라지(大伴大連)와 다리국수 호츠미노 오미 오시야마가 백제의 뇌물을 받았다.”라는 소문이 돌았다.
7년(513) 여름 6월, 백제가 저미문귀(姐彌文貴)[83] 장군(將軍)[84]과 주리즉이(州利卽爾)[85] 장군을 호츠미노 오미 오시야마[『백제본기』는 위(委)[86]의 오시야마키미(意斯移麻岐彌)[87]라고 하였다.]에 딸려 보내어 오경박사(五經博士)[88] 단양이(段楊爾)[89]를 바쳤다.
그리고 따로 “ 반파국(伴跛國)[90]이 신의 나라의 기문(己汶)[91]이라는 땅을 약탈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바르게 판단하여 원래 속한 곳에 돌려 주십시오.”라고 아뢰었다.
가을 8월 계미삭 무신(26일), 백제 태자 순타(淳陀)[92]가 죽었다(薨).[93]
9월, 마가리노 오호에 황자(勾大兄皇子)가 친히 카스가 황녀(春日皇女)를 찾아갔다. (둘은) 달밤에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느새 날이 샜다. 풍류가 절로 말이 되어 나오니 이에 노래하였다.
겨울 11월 신해삭 을묘(5일), 조정에 백제의 저미문귀 장군, 사라(斯羅)의 문득지(汶得至),[96] 안라(安羅)의 신이해(辛已奚) 및 분파위좌(賁巴委佐), 반파(伴跛)의 기전해(旣殿奚)[97]와 죽문지(竹汶至) 등을 불러 칙명을 알리고, 기문(己汶)과 대사(滯沙)[98]를 백제국에 주었다.
같은 달, 반파국이 집지(戢支)를 보내어 진보를 바치고 기문의 땅을 청하였으나, 결국 주지 않았다.
12월 신사삭 무자(8일), 조를 내려 “짐이 제위를 이어 종묘를 지키게 되니 언제나 마음이 불안하였다. 요즈음 나라가 안정되고 천하가 태평하며 계속 풍년이 들어 나라가 풍요하게 되었다. 마로코(摩呂古)야, 나의 마음을 온 세상에 보이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지금 일본은 평화로우며 나의 명성은 천하에 알려져 있고, 아키즈시마(秋津)의 세력은 번성하고 있으며 나의 영예가 왕기(王畿)에 가득 차 있다. 오로지 어진 이를 귀하게 여기고 선을 행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으면 성화(聖化)가 이에 멀리까지 미치게 되며, 현공(玄功)이 이에 오랫동안 전해지게 된다. 이를 행하는 데 네가 힘이 된다. 마땅히 춘궁(春宮)에 거처하는 이로서 짐이 어진 정치를 베푸는 일을 도우고, 나를 보필하여 부족함을 채우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8년(514) 봄 정월, 태자비 카스가 황녀(春日皇女)가 아침에 늦게 일어나 평소와 달랐다. 태자가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어전에 들어가 보았다. 비는 침상에 누워 울면서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태자가 이상히 여겨 “오늘 아침에 이렇게 울고 있으니, 무슨 슬픈 일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비가 “별다른 일이 아닙니다. 첩이 오직 슬퍼하는 바는 하늘을 나는 새도 새끼를 아름답게 키우기 위하여 나무 꼭대기에 둥지를 틀며, 땅을 기는 벌레도 새끼를 지키기 위하여 땅속에 굴을 파니, 그 지키려는 마음이 두텁다고 하겠습니다. 하물며 사람으로서 어찌 생각이 없겠습니까? 지금 태자에게 후사가 없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첩의 이름이 마침내 끊어져 버릴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태자가 슬프게 여기고 천황에게 알렸다. 그러자 천황은 조를 내려 “짐의 아들 마로코야, 너의 비의 말이 참으로 이치에 닿는다. 어찌 그에 답하여 위로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사호노 미야케(匣布屯倉)[99]를 주어, 비의 이름이 만대까지 전하도록 하라.”고 하였다.[100]
3월, 반파가 자탄(子呑)[101]와 대사(帶沙)에 성을 쌓고, 만해(滿奚)[102]와 연합하여 봉수와 저각(邸閣)[103]을 설치하여 일본에 대비하였다. 또 이열비(爾列比)[104]와 마수비(麻須比)[105]에 성을 쌓고 마차해(麻且奚)[106] 추봉(推封)[107]과 연합하여, 군사와 병기를 모아 신라를 핍박하였다. 남녀를 포로로 삼고 마을을 노략질하니, 습격을 받은 곳은 살아남은 자가 드물었다. 포악하고 사치스러우며 사람을 괴롭히고 마구 학살하니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9년(515) 봄 2월 갑술삭 정축(4일), 백제 사자 문귀 장군 등이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이에 칙을 내려 모노노베노 무라지(物部連)[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108]을 돌아가는 사신에 딸려 보냈다[『백제본기』에서는 모노노베노 치치노 무라지(物部至至連)라고 하였다.].
같은 달, 사도도(沙都嶋)[109]에 이르러 반파의 사람들이 원한을 품고 강한 힘에 의지하여 잔혹한 짓을 일삼는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모노노베노 무라지는 수군 5백 명을 이끌고 바로 대사강(帶沙江)[110]으로 나아갔다. 문귀 장군은 신라를 거쳐 백제로 들어갔다.
여름 4월, 모노노베노 무라지가 대사강에서 머문 지 6일 되었을 때 반파가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이에 옷을 빼앗기고 가진 것을 약탈당하고 막사(帷幕)는 모두 불탔다. 물부련 등은 두려워 도망가서 간신히 목숨을 건져 문모라(汶慕羅)[汶慕羅는 섬 이름이다.][111]에 머물렀다.
10년(516) 여름 5월, 백제가 전부목리불마갑배(前部木刕不麻甲背)[112]를 보내어 기문에서 물부련을 맞이하여 위로하고, 백제로 인도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각자 의복과 무기와 천을 내어 나라에서 내린 물품(國物)에 더하여 조정에 쌓아 놓았다. 위로하는 바가 간절하였으며, 평상시보다 상록(賞祿)이 많았다.
가을 9월, 백제가 주리즉차(州利卽次) 장군을 모노노베노 무라지에게 딸려 보내어 기문의 땅을 준 것에 감사하였다.
그리고 따로 오경박사 한고안무(漢高安茂)[113]를 바쳐 박사 단양이와 교체해 줄 것을 청하였다. 청하는 바에 따라 교체시켰다.
무인(14일), 백제가 작막고(灼莫古)[114] 장군과 일본의 시나노 아히타(斯那奴阿比多)[115]를 고구려(高麗)의 사신 안정(安定)[116] 등에 딸려 보내어 내조하고 우호를 맺었다.
12년(522) 봄 3월 병신삭 갑자(9일), 오토쿠니(弟國)[117]로 천도하였다.
17년(523) 여름 5월, 백제 무령왕(武寧王)이 죽었다.[118]
18년(524) 봄 정월, 백제 태자 명(明)이 즉위하였다.[119]
20년(526) 가을 9월 정유삭 을유(13일), 이와레(磐余)[120]의 타마호(玉穗)[어떤 책에서는 7년이라고 하였다.]로 천도하였다.
21년(527) 여름 6월 임신삭 갑오(3일), 오후미노 케나노 오미(近江毛野臣)[121]가 무리 6만을 거느리고 임나에 가서 신라에 의해 멸망당한 남가라(南加羅)[122]와 탁기탄(㖨己呑)[123]을 다시 일으켜 세워 임나에 합치고자 하였다.[124] 이때 츠쿠시(筑紫)의 국조(國造) 이하위(磐井)[125]가 은밀히 반역을 도모한 지 수년이 지났다. 그는 일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 항상 틈을 보고 있었다. 신라가 이를 알고 몰래 뇌물을 반정에게 보내어 모야신의 군사를 막아주기를 권유하였다. 이에 이하위는 히노쿠니(火國)[126]와 토요노쿠니(豊國)[127]의 두 지역을 점거하고, 직무를 수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밖으로는 해로를 막아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국의 연공을 바치는 배를 끌어들이고, 안으로는 임나에 파견하는 모야신의 군사를 차단하고 함부로 큰소리치기를, “지금 사신은 전에는 나의 동료로서 몸을 서로 부비고 한 그릇에 밥을 나누어 먹었는데, 어찌 갑자기 사신이 되었다고 나로 하여금 그 앞에 엎드리게 하는가.”라고 하고 싸움을 일으켜 따르지 않으며, 교만하고 기세등등하였다.[128] 이에 오후미노 오미는 방해를 받아 중도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천황은 오호토모노 오호무라지 나카무라(大伴大連金村)와 물부대련추록화(物部大連麤鹿火)와 코세노 오호오미 워히토(許勢大臣男人) 등에게 조를 내려, “축자의 반정이 반란을 일으켜 서쪽의 변방을 점거하고 있으니, 누가 가히 장군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대반대련 등이 입을 모아 “정직하고 어질고 용감하며 병법에 달통한 바가 지금 추록화(麤鹿火)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천황이 “좋다.”고 하였다.
가을 8월 신묘삭(1일), 조를 내려 “오호무라지여, 이하위가 복종하지 않고 있다. 그대가 가서 정벌하라.”고 하였다. 물부대련추록화가 두 번 절하고, “무릇 반정은 서융(西戎)의 간교한 자로서 물이 막힌 것을 믿고 복종하지 않고, 산이 험한 것을 의지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덕을 등지고 도를 어기면서 교만하게 우쭐거리고 있습니다. 과거의 미치노 오미(道臣)[129]로부터 무로야(室屋)[130]에 이르기까지 천황을 도와 나쁜 무리들을 벌하고 백성의 어려움을 구해온 바가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하늘의 도움만은 신이 항상 중히 여기는 바입니다. 삼가 명을 받들어 정벌에 나서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를 내려 “좋은 장수가 군사를 일으킴은 은혜를 베푸는 것이며, 자신을 미루어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다. 공격하면 강물이 터지는 것과 같이 하고, 싸우면 바람이 일어나는 것과 같이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거듭 조를 내려 “대장은 백성의 생명을 좌우하며, 사직의 존망이 걸려있다. 분발하여 삼가 천벌을 실행하라.”고 하고, 천황이 친히 부월(斧鉞)을 잡아 오호무라지에게 내리면서 “나가토(長門)[*
일본 열도 혼슈의 서쪽 끝으로 현재의 야마구치현 북동부에서 서반부를 말한다.] 동쪽은 짐이 다스린다. 츠쿠시(筑紫) 서쪽은 그대가 다스려서 상벌을 스스로 시행하고 일일이 보고하지 말라.”고 하였다.
22년(528) 겨울 12월 갑인삭 갑자(11일), 대장군 물부대련추록화가 친히 적의 우두머리 반정과 츠쿠시의 미위노 코호리(御井郡)[131]에서 교전하였다. 깃발과 북소리가 마주하니, 먼지가 자욱이 일어났다. 양 군사 사이에 승기를 잡기 위하여 죽음을 무릅쓴 전투가 벌어졌으나, 마침내 이하위를 참하고 반란을 완전히 평정하였다.
12월 츠쿠시노 키미 쿠즈코(筑紫君葛子)가 아버지의 죄에 연좌되어 죽는 것을 두려워하여 카스야노 미야케(糟屋屯倉)[132]를 바치고 용서해줄 것을 청하였다.
23년(529) 봄 3월, 백제왕이 하다리의 국수(國守) 호츠미노 오미 오시야마에게, “조공하는 사자들이 항상 해안의 험한 절벽[133][해안의 들쑥날쑥한 험한 절벽을 말한다. 세간에서 미사키(美佐祁)라고 한다.]을 피해 다니며, 바람과 파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때문에 물품들이 물에 젖어 모두 망가지고 못쓰게 된다. 청컨대 가라의 다사진(多沙津)[134]을 신(臣)이 조공하는 통로로 삼게 해 달라.”고 하였다. 이에 오시야마 오미(押山臣)가 청에 따라 (천황에게) 주상하였다.
같은 달, 모노노베노 이세노 무라지 치치네(物部伊勢連父根)[135]와 키시노 오키나(吉士老)[136] 등을 보내어 진을 백제왕에게 주었다. 이에 가라왕이 칙사에게 “이 진은 관가(官家)를 둔 이래 신이 조공하는 나루였는데, 어찌 갑자기 이웃 나라에 줄 수 있습니까. 원래 분봉받은 영토와 다릅니다.”라고 하였다. 칙사인 부근(父根) 등은 이에 그 자리에서 주기가 어렵다고 여기고 큰 섬으로 돌아가서, 따로 녹사(錄史)[137]를 보내어 마침내 부여(扶余)[138]에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가라는 신라와 우호를 맺고 일본을 원망하였다. 가라왕은 신라의 왕녀와 혼인하여 드디어 자식을 낳았다.[139] 신라가 처음 왕녀를 보낼 때, 아울러 1백 명을 시종으로 보냈다.[140] 이들을 받아들여 각 현에 나누어 배치하고 신라의 의관을 착용토록 하였다.[141] 아리사등(阿利斯等)[142]은 그들이 옷을 바꾸어 입은 것에 분개하여 사자를 보내어 모두 모아 돌려보냈다. 이에 신라가 크게 부끄러워하고[*
분노하였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왕녀를 불러오고자 하여 “전에 그대의 청혼을 받아들여 내가 혼인을 허락하였으나, 이제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왕녀를 돌려보내줄 것을 청한다.”고 하였다. 가라의 기부리지가(己富利知伽)[잘 알 수 없다.][143]가 “짝을 지어 부부가 되었는데 어찌 다시 떨어질 수 있으며, 또한 자식이 있는데 어찌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마침내 신라는 지나가는 길에 도가(刀伽), 고파(古跛), 포나모라(布那牟羅)[144]의 세 성을 함락시켰으며, 또한 북쪽 변경의 다섯 성을 쳤다.[145]
같은 달, 오후미노 케나 오미를 안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신라에 천황의 칙을 전하여 남가라와 탁기탄을 재건토록 권하였다. 백제는 장군 군윤귀(君尹貴)[146], 마나갑배(麻那甲背)[147], 마로(麻鹵)[148] 등을 파견하여, 안라에 가서 조칙을 들었다. 신라는 번국(蕃國)에 있는 관가를 멸망시켰으므로 두려워하여 높은 지위에 있는 자를 보내지 않고,[149] 부지나마례(夫智奈麻禮)[150]와 해나마례(奚奈麻禮) 등을 안라에 보내어 조칙을 듣게 하였다. 이때 안라는 새로 고당(高堂)을 만들어 칙사를 오르게 하였다. 안라의 국주는 그 뒤를 따라 계단을 올랐으며, 안라의 관위가 높은 자도 한두 사람이 당에 올랐으나 백제의 사신 장군 군(君) 등은 당 아래에 있었다.[151] 여러 달 동안 당 위에서 회의가 이루어졌으므로, 장군 군 등은 당 아래에 있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여름 4월 임자삭 무자(7일), 임나왕(任那王) 기능말다간기(己能末多干岐)[152]가 내조하였다[기능말다라고 함은 아마 아리사등(阿利斯等)일 것이다.]. 그리고 오호토모노 카나무라노 오호무라지에게 “무릇 바다 건너 여러 나라는 태중천황(胎中天皇)이 내관가(內官家)를 둔 이래, 원래의 국왕에게 그 통치를 위임한 것은 참으로 도리에 합당한 일이었다. 이제 신라가 원래 주어진 영토를 무시하고 빈번하게 국경을 넘어 내침하고 있다. 청컨대 천황에게 주상하여 신의 나라를 구원해 주시오.”라고 알렸다. 오호토모노 오호무라지는 청에 따라 주상하였다.
같은 달, 사신을 파견하여 기능말다간기를 전송하고, 아울러 임나에 있는 오후미노 케나 오미(近江毛野臣)에게 “보고된 바를 조사하고, 서로 의심하고 있는 바를 화해시키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모야신은 웅천(熊川)[153]에 머물면서[어떤 책에서는 임나의 구사모라(久斯牟羅)에 머물렀다고 하였다.[154]], 신라와 백제 두 나라의 왕을 소집하였다. 신라왕 좌리지(佐利遲)[155]는 구지포례(久遲布禮)[156][어떤 책에서는 구례이사지우나사마리(久禮爾師知于奈師磨利)[157]라고 하였다.]를 보내고 백제는 은솔(恩率)[158] 미등리(彌縢利)를 보내어 모야신이 있는 곳에 가게 하였으며, 두 왕이 직접 오지 않았다. 모야신은 크게 노하여 두 나라의 사신을 문책하여,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이 정한 도리이다[어떤 책에서는 큰 나무의 끝은 큰 나무로 잇고, 작은 나무의 끝은 작은 나무로 잇는다고 하였다.]. 무슨 까닭으로 두 나라의 왕이 직접 와서 천황의 칙명을 받지 않고 함부로 사자를 보내는가. 지금 만일 너희 왕이 몸소 칙명을 들으러 온다고 해도, 내가 칙명을 전하지 않고 반드시 물리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구지포례와 은솔 미등리는 두려운 마음을 품고 각자 돌아가 왕에게 알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는 다시 상신(上臣) 이질부례지간기(伊叱夫禮智干岐)[159][신라는 대신(大臣)을 상신이라고 한다. 어느 책에서는 이질부례지나말(伊叱夫禮知奈末)이라고 하였다.]를 파견하였으며, 무리 3천 명을 이끌고 칙명을 듣기를 청하러 왔다. 모야신은 멀리 무장을 갖춘 무리 수천 명을 보고 웅천으로부터 임나의 기질기리성(己叱己利城)[160]으로 들어갔다. 이질부례지는 다다라원(多多羅原)[161]에 머물면서 귀복하지 않고 석 달을 기다리면서 번번이 칙명을 듣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칙명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질부례지가 거느린 병사들이 마을에서 구걸을 하며 모야신의 종자 카후치노 우마카히노 오비토 미카리(河內直馬飼首御狩;카후치노우마카히노오비토미카리)[162]가 있는 곳을 지나갔다. 어수는 다른 사람의 집에 숨어서 구걸하는 병사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주먹을 휘두르며 멀리서 때리는 시늉을 하였다. 걸식하던 자들이 이를 보고 “삼가 석 달이나 기다리며 칙지를 듣기를 고대하였는데, 아직도 알려주지 않으면서 칙명을 듣고자 하는 사신을 괴롭혔다. 이제 속임수를 써서 상신을 주륙하려고 함을 알겠다.”고 하면서, 본 바를 상신에게 자세히 일렀다. 상신은 네 촌[금관(金官)[163], 배벌(背伐)[164], 안다(安多), 위타(委陁)[165]가 그 네 촌이다. 어떤 책에서는 다다라(多多羅), 수나라(須那羅), 화다(和多), 비지(費智)의 네 촌이라고 하였다.]을 초략하여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어떤 사람은 “다다라 등 네 촌이 공격을 받은 것은 케나 오미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가을 9월에 코세노 워히토노 오호오미(巨勢男人大臣)가 죽었다.[166]
24년(530) 봄 2월 정미삭(1일), 조를 내려 “ 이하레비코노 스메라미코토(磐余彦帝)와 미마키노 키미(水間城王) 이래로 천하를 다스리는 데 모두 박식한 신하와 명철한 보좌에 의존하여 왔다. 그러므로 도신(道臣)이 방책을 올려 카무야마토(神日本)[167]의 시대가 번성하였으며, 오호히코(大彦)[168]가 계략을 올려 이니웨(瞻瓊殖)의 시대가 융성하였다. 황위를 이은 자로서 중흥의 공을 세우고자 하는 자라면, 현철의 모책에 의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호하츠세노 스메라미코토(小泊瀨天皇)가 세상을 다스림에 이르러 과거 성인들의 공적에 힘입어 태평함이 오래 지속되는 가운데 백성들은 점차 폐단에 빠져 깨어날 줄 모르고, 정치도 점점 쇠퇴하여 고쳐지지 않게 되었다. 다만 적당한 인물이 각각의 재능에 따라 천거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큰 계략이 있는 자는 그 단점을 묻지 않으며, 뛰어난 재능이 있는 자는 그 부족한 점을 따지지 않는다. 그래서 종묘를 능히 받들 수 있고, 사직을 위태롭지 않게 할 수 있다. 이렇게 현명한 신하의 보좌가 없을 수 없다. 짐이 제업을 이은 지 이제 24년이 되어 천하가 태평하여 안팎으로 우환이 없으며, 토지가 비옥하여 곡식이 잘 여물고 있다. 짐이 근심하는 바는 이로 말미암아 타성에 젖어 교만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렴한 이를 발탁하여 대도를 선양하고 홍화를 널리 펴도록 하는데, 인재를 적절하게 기용하는 일은 예로부터 어려운 것이었다. 짐에 이르러서도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169]
가을 9월, 임나의 사신이 “케나 오미(毛野臣)가 구사모라에 택사를 짓고 머문지 이미 2년[어떤 책에서는 3년이라고 하였으니, 왕복하는 데 걸린 햇수를 합한 것이다.]이 되었으나, 정사는 게을리하고 있습니다. 일본인과 임나인이 자주 자식을 두고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원래 쉽게 판결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케나 오미는 즐겨 서탕(誓湯)[170]을 설치하여 ‘사실을 말하는 자는 데이지 않을 것이며, 거짓을 말하는 자는 반드시 데일 것이다’라고 하며 끓는 물 속에 던져 넣으니, 죽는 자가 많습니다. 또 키비노 카라코 나타리(吉備韓子那多利)와 시후리(斯布利)[일본인(大日本人)이 이웃 나라의 여자를 취하여 낳은 자를 카라코(韓子)[171]라고 한다.]를 죽이고, 항상 백성을 괴롭히고 용서하는 마음이 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천황은 그 행적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불러들였으나 (케나 오미는) 가지 않았다. (이때 케나 오미는) 몰래 카후치노 오모노키노 우마카히노 오비토 미카리(河內母樹馬飼首御狩)[172]를 도읍에 보내어 “신이 아직 칙지를 수행하지 못하였으니, 도읍에 돌아간다면 수고롭게 왔다가 헛되이 돌아가는 것이 되어 면목이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국명을 완수한 다음 입조하여 사죄하기를 기다려주십시오.”라고 아뢰었다. 사자를 보낸 다음 (케나 오미는) 다시 혼자 탄식하며 “츠키노 키시(調吉士)[173]는 천황의 사자이다. 만약 내가 보낸 사자보다 먼저 돌아가서 사실대로 보고한다면 나의 죄가 반드시 무거워질 것이다.”라고 하고, 조길사를 보내어 무리를 이끌고 이사지모라성(伊斯枳牟羅城[174]을 지키게 하였다.
이때 아리사등은 (케나 오미가) 사소한 일에만 집착하고 약속한 바를 지키지 않음을 알고 빈번히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였으나,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행적을 모두 알고 등을 돌릴 마음을 품었다. 드디어 구례사기모(久禮斯己母)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군사를 청하였다. 또 노수구리(奴須久利)를 백제에 사신으로 보내어 군사를 청하였다. 케나 오미는 백제병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배평(背評)[175][背評은 지명이다. 또한 능비기부리(能備己富利)라고도 한다.]에서 맞아 싸웠으나 사상자가 절반이나 되었다. 백제는 노수구리를 포로로 잡아 여러 가지 형구로 묶고 신라와 함께 성을 포위한 다음 아리사등을 꾸짖으며 “케나 오미를 내어 놓으라.”고 하였다. 케나 오미는 성을 굳게 지키므로 사로잡을 수 없었다. 이에 두 나라는 유리한 지역을 점령하고 한 달간 머무르다가, 성을 쌓고 돌아갔다. 이를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176]이라고 하였다. 돌아가는 길에 등리지모라(騰利枳牟羅), 포나모라(布那牟羅), 모자지모라(牟雌枳牟羅), 아부라(阿夫羅), 구지파다지(久知波多枳)[177] 다섯 성을 함락시켰다.[178]
겨울 10월, 츠키노 키시가 임나로부터 돌아와서 “케나 오미는 사람됨이 오만하고 정사에도 익숙하지 못하여 포용하는 마음이 없어, 가라를 혼란케 하고 환란을 막지도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래서 메즈라코(目頰子)를 보내어 불러 들였다[목협자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같은 해, 케나 오미가 부름을 받아 쓰시마(對馬)에 이르러 병에 걸려 죽었다. 장송을 위한 배는 강을 거슬러 올라 오후미에 이르렀다. 그 처가 노래하였다.
25년(531) 봄 2월, 천황의 병이 심해졌다.
정미(7일), 천황이 이하레노 타마호노미야(磐余玉穗宮)에서 죽으니(崩), 이때 나이 82세였다.
겨울 12월 병신삭 경자(5일), 아위노노 미사자키(藍野陵)[179]에 장사지냈다[어떤 책에서는 천황 28년 이 해의 간지 갑인[180]에 죽었다(崩)고 하였다. 여기서 25년 이해의 간지 신해에 죽었다(崩)고 한 것은 『백제본기』를 취하여 기록한 것이다. 그 기록에서는 ‘이 해의 간지 신해[181] 3월, 군사가 안라로 나아가 걸탁성(乞乇城)[182]을 쌓았다. 같은 달, 고구려는 그 왕 안(安)[183]을 시해하였다. 또한 일본 천황 및 태자 황자가 모두 죽었다고 한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신해년은 25년에 해당한다. 후에 교감하는 자가 어느 것이 옳은지 알 것이다.].
2.2. 일본서기 권 제18 안칸 덴노(卷第十八 廣國押武金日天皇 安閑天皇)
마가리노오호에히로쿠니오시타케카나히노 스메라미코토는 워호도노 스메라미코토(男大迹天皇)[184]의 장자다. 어머니는 메노코히메(目子媛)라 한다. 이 천황의 사람됨은 기량이 빼어나 헤아릴 수가 없었다. 용감하고 관대하여 임금이 될 만한 도량이 있었다.25년 봄 2월 신축삭 정미(7일)에 워호도노 스메라미코토가 오호에(大兄)를 천황으로 삼았다. 그날 오호도노 스메라미코토가 죽었다(崩).[185]
이 달에 오호토모노 오오무라지(大伴大連)와 모노노베노 아라카히노 오호무라지(物部麁鹿火大連)를 오호무라지로 삼은 것은 모두 전과 같았다.
2.3. 일본서기 센카 덴노(卷第十八 武小廣國押盾天皇 宣化天皇)
타케워히로쿠니오시타테노 스메라미코토는 워호도노 스메라미코토(男大迹天皇)의 둘째 아들이다. 마가리노오호에히로쿠니오시타케카나히노 스메라미코토의 동모제(同母弟)이다.2년 12월에 타케워히로쿠니오시타테노 스메라미코토가 죽었는데 후사가 없었다. 군신(群臣)들이 검과 거울[186]을 무소광국압순존에게 바쳐 천황으로 즉위하도록 하였다. 이 천황의 성격은 맑고 깨끗하였으며 마음이 명랑하였다. 재능과 지위를 사람들에게 과시하여 왕의 티를 내려고 하지 않았다. 군자(君子)들이 감복하는 바가 되었다.
2.4.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卷第十九 天國排開廣庭天皇 欽明天皇)
아메쿠니오시하라키히로니와노 스메라미코토[187]는 워호도노 스메라미코토(男大迹天皇)의 적자이다. 어머니는 타시라카 황후(手白香皇后)라 한다.(게이타이)천황이 그를 예뻐하여 늘 곁에 두었다. 천황이 어릴 적에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천황께서 하다노 오호츠치(秦大津父)라는 자를 총애하시면, 커서 반드시 천하를 다스릴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꿈에서 깨어 사자를 보내 찾게 하니 야마시로노쿠니(山背國) 키노 코오리(紀郡)의 후카쿠사노 사토(深草里)에서 찾을 수 있었다. 씨명이 과연 꿈에서 본 바와 같았다. 이에 매우 기뻐하며 이제까지 꿔 본 적이 없는 꿈이라고 찬탄했다. 그리고는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라고 묻자, (하다노 오호츠치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단지 제가 이세(伊勢)로 가서 장사하고 돌아올 때, 산에서 늑대 두 마리가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입과 손을 씻고 기도하며 청하여 ‘당신은 귀한 신(神)인데 거친 행동을 즐기고 있습니다. 만약 사냥꾼을 만난다면, 반드시 잡힐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로 다투는 것을 그치게 하고 피 묻은 털을 닦아준 후에 놓아 주어 모두 생명을 보전하게 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천황이 “반드시 이 보답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즉시 근시하도록 하여 나날이 총애를 더하니 매우 유복하게 되었다. 천황이 제위에 오르 대장성(大藏省)을 맡게 하였다.
4년 겨울 10월에 타케워히로쿠니오시타테노 스메라미코토(武小廣國押盾天皇)가 죽었다(崩). 황자인 아메쿠니오시하라키히로니와노 스메라미코토는 군신에게 명하여 “나는 어리고 학식이 미천하며 아직 정사에 능통하지 못하다. 야마다 황후(山田皇后)[188]는 모든 정무에 능통하시다. 즉위하여 결재하시도록 (황후에게) 청하라.”고 말했다. 야마다 황후는 놀라 사양하며 “첩은 은총을 입은 바가 산과 바다와 같습니다. 어려운 국정을 어찌 부녀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황자는 노인을 공경하고 어린 자에게 인자하시며, 현자에게는 예로 대하십니다. 해가 높이 오른 정오까지도 식사하지 않고 어진 인물을 기다리신다 합니다. 또한 어렸을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 일찍부터 칭송하는 소리가 높습니다. 성정이 관대하시어 힘써 주위를 안정시키신다 하십니다. 청컨대 여러 신하들은 빨리 (황자를) 제위에 오르시게 하여 천하에 군림하게 하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겨울 12월 경진삭 갑신(5일)에 아메쿠니오시하라키히로니와노 스메라미코토가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이때 나이 약간(若干)[189]이다. 황후를 높여서 황태후라 하였다. 오호토모노 카나무라노 오호무라지(大伴金村大連와 물부미여대련(物部尾與大連)을 오호무라지로 삼고, 소아도목숙녜대신(蘇我稻目宿禰大臣)을 오호오미로 삼은 것은 모두 예전과 같다.
3. 한국사 관련 기록
한국사 관련 기록이 많이 나오는데, 백제계 사관들이 게이타이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데도 백제 관련 기록들을 엄청나게 집어넣었다.[190]509~530년까지의 한반도 관련 기록 중에서 정말로 모든 기록이 게이타이 덴노의 기록이 맞는지 의문이 있다. 한반도 관련 기록에서 명확하게 오호도 왕이라 명시된 것도 아니고, 선대나 후대 왕의 기록을 게이타이 기로 소급했을 수도 있으며, 게이타이 재위기간 초기의 기년을 왜곡하는 건 가능하다. 따라서 해당 기록이 전부 게이타이의 기록이라 확신할 수는 없으며, 게이타이가 맞더라도 재위 중반까지 기년이 정확하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다만 511년 교토부에 처음 천도한 뒤부터는 왜 호족의 일원으로서 백제를 도왔을 수도 있기 때문에 게이타이가 대왕이 되기 전이라 그렇지 백제를 도운 건 게이타이 본인이 맞을 수도 있다. 509년 2월 백제 사신 기사가 다소 모호한 정도이나, 게이타이 원년(507)에 타시라카 황녀와 혼인했다는 기사가 있으므로 526년으로 미루면 528년이 되어 크게 어긋나는 건 아니다.
잘 보면 대부분의 기록이 백제 무령왕~ 성왕 대의 기록이고 게이타이의 국내 기록은 극소수다.(...) 한반도 관련 기록을 다 쳐내고 보면 게이타이가 즉위해서 타시라카 황녀와 혼인함, 처자식들, 오미와 에치젠 일대 출신이었던 게이타이가 나라 분지 가기 전에 교토부 일대를 옮겨다님, 농업과 양잠을 권장함, 인재 발탁, 안칸 덴노가 태자 시절 카스가 황녀와 혼인함뿐이다. 게이타이 덴노가 본래 변방 호족 출신이었음을 고려하면 한반도 관련 기록을 제외하면 게이타이의 실제 기록이 부실한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191]
4. 가문
《일본서기》에 의하면 게이타이 천황의 아버지는 15대 오진 천황의 현손자 히코우시 왕(彦主人王)이고, 어머니는 11대 스이닌 천황의 7세손이라 전하는 후리히메(振媛)이다. 하지만 《고사기》나 《일본서기》는 오진 천황에서 게이타이 천황 사이의 중간 4대의 계보를 생략했으므로, 《석일본기》(釋日本記)에 인용된 《조구키》(上宮記) 일문으로 가까스로 짐작할 수 있다.이를 따른다면 남자의 직계는 호무타와케노오키미(일본어: 凡牟都和希王)라고도 불렸던 오진 천황에서 와카누케후타마타 왕(若野毛二俣王) ─ 오이라츠코(大郎子), 일명 오호호도노오키미(意富富等王)[192] ─ 오이도 왕(乎非王) ─ 우시 왕(汙斯王), 즉 히코우시 왕 그리고 '오호도노오키미'(乎富等大公王)라 불린 게이타이 천황으로 이어진다고 여긴다. 앞서 언급한《조구키》 일문은 마유즈미 히로미치(黛 弘道)가 33대 스이코 덴노 때의 유고일 가능성을 지적한 이후로는 그 내용의 신빙성이나 실제 혈통에 대해서는 논의가 나뉜다. 《제기》(帝紀) 원사료의 편찬(제29대 긴메이 천황 때로 추정) 무렵에는 이와 비슷한 형태의 계보 전승이 성립한 듯하다.
게이타이 천황의 황후인 타시라카 황녀는 제21대 유랴쿠 천황의 손녀이자 제25대 부레츠 천황의 남매이다.[193] 이미 야마토로 들어오기 이전에 현지에서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리고 많은 자식을 두었음에도, 즉위한 후 게이타이 천황은 선대 오오키미인 부레츠 천황의 여동생을 정식 황후로 맞아들였다.
선대 천황의 누이이며 정당한 혈통인 '직계' 타시라카 황녀를 황후로 삼음으로써 부레츠 천황계와 융화를 도모함과 동시에, 부족한 혈통적 권위를 일종의 데릴사위 형태로 보강하려는 정략결혼일 것이다.[194]
또한 타시라카 황녀 사이에서 난 아들인 긴메이 천황은 게이타이 천황의 많은 아들들을 제치고, '적자'(嫡子)로서 대왕위를 이어받았으며, 마찬가지로 타시라카 황녀의 자매 소생인 28대 센카 천황의 딸 이시히메 황녀(石姬皇女)를 황후로 삼아, 이시히메로부터 제30대 비다츠 천황을 얻었다. 이것은 야마토 왕권의 '방계'라는 혈통적인 결점을 황후의 '직계' 혈통으로 보강하고자 한 것으로, 이렇게 해서 게이타이 천황과 타시라카 황녀 사이 아들인 긴메이 천황의 혈통이 오늘날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게이타이 천황이 즉위함은 우선 야마토 왕권의 성립 근간에서 기인한다. 3세기에 형성된 초기 야마토 왕권은 서일본이 동일본을 지배하기 위한 구조였다. 동일본이 인구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서일본은 둘을 사이에 둔 거대한 산맥과 강 일대를 중심으로 일종의 장벽을 형성시켜 자신들을 통해서만 외부 문물이 유입되도록 했다. 하지만 4세기에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문에 주 교류 대상이었던 한반도의 백제, 신라, 가야제국의 힘이 꺾이자 야마토 정권은 곤란해졌다. 그래서 중국 남조를 대상으로 조공무역을 했지만 남조의 진나라도 수나라에 멸망했다. 동일본은 이 혼란 속에서 외부와 직접 교역할 독자적인 루트 확보에 성공해 유랴쿠 천황 이후에 야마토 왕권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하지만 6세기로 접어들면서 일본에서는 과거와 다른 새로운 호족들이 형성되었고, 다시금 도래인들이 확산되면서 새로운 대왕권을 창출할 필요가 있었다.
6세기에는 교통의 발달과 개발의 진행으로 대왕권의 기반이 초기 야마토 대왕권의 중심지였던 마키무쿠가 아닌[195] 기내 주변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주목할 곳은 오미(近江)였다. 후에 '삼관'(三關)이라고 해서 설치된 호쿠리쿠도(北陸道)의 아라치, 도산도(東山道)의 후와, 도카이도(東海道)의 스즈카 관문은 모두 오미와 가깝다. 즉, 오미가 동국으로부터의 거점이 된 것이다.
오호도 왕은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 히코우시 왕의 미오 별장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미오는 오미의 다카시마군이다. 어머니는 에치젠의 미쿠니 출신이며, 친할머니는《상궁기일운》에 따르면 미노의 무게쓰노구니노 미야쓰코의 딸이었다. 처는 8명이었는데, 미오 2명, 사카타, 오사나가 등 비와 호 연안 호족의 딸이 가장 많았고, 그 밖에 요도가와 유역의 만다, 야마토 분지 동북부의 와니, 그리고 오와리노 무라지의 딸이 있었다. 이런 혼인관계를 볼 때 오호도 왕의 세력권이 오미를 중심으로 에치젠, 미노, 오와리에 있었음은 확실해 보인다.
광대한 면적과 많은 인구를 가진 동일본을 장악하는 것이 대왕권의 최대 근거였는데, 오호도 왕은 충분히 그 조건을 충족하고 있었다. 더욱이 오미의 미오 부근에 가모이나리야마 고분이 있는데, 축조 연대가 6세기 전반이므로 오호도 왕의 일족 출신이었을 것이다. 이 고분에서는 중국 남조 계통의 환두대도, 금제 귀걸이, 금동제 관, 신발, 쌍어패 등 한반도계 장신구가 대량 출현했다. 이를 보아 요도가와에서 세토 내해를 거쳐 한반도까지 인맥을 확보한 것 같다.
오호도 왕이 야마토로 와서 대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야마토에서 대호족으로 군림한 소가씨와 협동한 덕이었다. 이는 소가씨가 누리던 권세의 원인이 되었다. 야마토 분지에 들어간 오호도 왕은 이와레를 궁도로 삼았는데, 이곳은 미와 산 산록에 가까운 곳으로 하쓰세가와를 이용한 동국(東國) 지배를 염두에 둔 곳이었이다고 생각하면 된다. 자신을 옹립한 세력 중 오오토모 씨족이나 모노노베 씨족은 지명에서 유래된 씨(氏)가 아니라 '도모'나 '베'를 칭하고 있는데, 이는 토지에서 기원한 씨족이 아니라 대왕권 측근에서 편성된 일족임을 보여준다. 5세기의 장도인(杖刀人)이나 전조인(典曺人) 등의 호칭과 원리적으로 상이하며, 오호도 왕 이후 왕권의 권력 기반으로서 일정한 목적 수행을 위해 위에서 만들어낸 씨족(氏族)으로 볼 수 있다.
오호도 왕이 이끌고 온 세력은 오미와 요도가와 구역, 오와리 · 미노 · 에치젠 등지의 호족들이었다. 전체적으로 기나이의 동쪽인데, 엄밀히는 오미를 중심으로 야마시로 · 가와치 북부 · 야마토 분지 동북부, 거기에 오와리 · 미노 · 에치젠이었다. 본거지는 이와레였다. 반면에 소가 씨족은 야마토 분지 서남부의 카츠라기를 본거지로 하여 기이, 가와치 남부(이즈미)를 지배했다. 이와레와 카츠라기의 중간이 아스카로, 후에 이곳이 정권의 소재지가 되었다.
오호도 왕의 진짜 출신지가 어디인지는 모호하나,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오미 다카시마군의 미오로 봐도 좋다고 여겨진다. 미오에서 태어났다는 《일본서기》의 기사와 가모이나리야마 고분의 존재가 주요 근거지만, 이는 혼인관계로도 추측이 가능하다. 일본 호족들의 혼인관계를 보면 처음에는 가까이에 있는 여성과 결혼하고, 힘이 생기면 정략결혼으로 먼 곳의 여성과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 오호도 왕의 아내 중 네 명이 오미 출신이고, 그중에 두 명이 미오다. 그 밖에는 오와리와 만다, 와니다.
다만 미오의 호족이 유력했다기보다는 미오 출신인 오호도가 시대의 전환기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일약 근린 지역의 지지를 얻고, 마침내 옹립되어 야먀토로 가서 대왕의 자리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우선 오미에서 유력해진 뒤 그것을 근거로 오와리와 만다에 인맥을 확보한 후, 다시 와니를 매개로 야마토와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소가씨와의 협동으로 대왕위까지 올랐다는 것이다.
5. 오오키미(대왕, 大王) 즉위 당시 의문
《고사기》나 《일본서기》는 선대 부레츠 천황에게 자손이 없었기에 ' 오진 천황의 5세손'인 게이타이를 맞아들였으며, 군신의 요청으로 그가 즉위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계도 가운데 한 권이 사라져 정확한 계보는 쓸 수 없으며, 게이타이의 출자를 전하는 문헌인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의 《조구키》(上宮記) 일문(逸文)을 통해서 겨우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게이타이 천황의 특수한 즉위 사정을 둘러싸고 여러 논의나 추측이 있다. 기존의 기록을 존중한다면 게이타이 천황을 오오키미 집안의 5대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먼 방계로서 유력했던 왕족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종전 후, 일본에서 자국의 역사, 특히 천황가를 두고 더 자유로이 연구하면서 게이타이는 그 전의 오오키미 집안과는 혈연 관계가 없는 '신왕조'(新王朝)의 초대 오오키미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것이 미즈노 유우(水野祐)가 주장한 <3왕조 교대설>(三王朝交代設)이었다. 이 경우 오늘날의 천황가로 이어지는 오오키미의 계통은 일체의 변동이나 단절 없이 하나의 피로만 이어져 내려왔다는 이른바 '만세일계'(萬世一系)는 부정되고, 출자가 확실하지 않은 제26대 게이타이 천황부터 야마토 왕권의 새로운 오오키미 계통이 이어진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서 한 발짝 나아가, 게이타이 천황을 오미의 황별씨족(皇別氏族), 즉 신적강하(臣籍降下)된 황족 오키나가(息長) 씨족 출신으로 보고, 야마토 왕권을 무력으로 제압하여 대왕위를 찬탈했다는 설도 제기되었다.
근래에는 5세기 야마토 정권의 대왕의 지위란 특정 혈통으로 고착된 것이 아니었고,[196] 게이타이 천황 이전의 야마토 정권이란 각각의 지역 국가들의 연합이었으며, 그 수장인 '대왕'도 지역 국가의 왕들 가운데서 때때로 선택되었기 때문에 그 조상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는 설도 나왔다.[197]
다케미츠 마코토(武光誠)는 게이타이 천황 이전의 오오키미는 복수의 유력 호족들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했으며, 또한 부레츠 천황 등도 실재한 천황이 아니고, 오진 천황의 실재 여부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음을 지적했다. 1982년 마유즈미 히로미치(黛弘道)가《조구키》의 성립 시기가 스이코 덴노 때로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방계 왕족이라는 설이 다시 지지를 모으게 되었다. 즉,《조구키》 일문이 실려 있는 《석일본기》에
《조구키》(上宮記)에 이르기를(上宮記曰一傳)
이라는 기술이 있지만, 《조구키》의 작자는 별도의 더 오래된 자료에 근거한 왕권 계보가 실려 있는 자료를 인용했다는 것이다.현재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게이타이 천황이 정말 오진 천황의 5대손인가 하는 문제의 진위 여부를 밝히기보다도,[198] 그가 야마토 왕권의 오오키미 지위를 찬탈한 것은 아니며, 야마토 정권의 중추를 이루고 있었던 호족들의 지지로 즉위했다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게이타이 천황 이후의 천황 계보에 대해서는 《고사기》와 《일본서기》 외에 어떤 근거 있는 사료도 없다. 다만 미즈노 유우 등이 제창한, 게이타이 천황으로부터 신왕조가 시작되었다는 설을 따르고 「실존 및 계보가 분명한 기간에 한해서」라는 조건을 걸어도 일본 황실의 역사는 1,500년 이상으로 전 세계에 현존하는 왕조 가운데 가장 오래된 왕실임에는 변함이 없다.[199] 따라서 일본 황실의 역사를 기릴 때에도 게이타이 천황의 이름은 자주 언급된다.
6. 게이타이~ 긴메이 천황 내란설
26대 게이타이 천황에서 29대 긴메이 천황에 이르는 시기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 자료에 존재하는 부자연스러운 점을 들어, 6세기 전반의 게이타이 천황의 죽음과 그 후 대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본 열도 내에서 내란이 발생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내란이 일어난 시기는 《일본서기》에서 게이타이 천황이 사망했다는 신해년(서기 531년)으로 비정되며, 간지를 따서 신해의 변(辛亥の變, 신가이의 난)으로 부르기도 한다.우선 《일본서기》에는 게이타이 천황의 사망 년도에 대해서 백제 기록인《백제본기》의 설을 채용하여 신해년(531년)으로 비정하는 한편, 갑인년(534년)이라는 설도 실었다. 갑인년은 게이타이 천황의 다음으로 즉위한 안칸 천황의 즉위년으로, 게이타이 천황 사후 안칸 천황의 즉위에 이르기까지 2년 동안 대왕 자리는 비어 있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제기되는데, 이러한 모순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하여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에 기년론이 주목받은 이래로 줄곧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백제본기》의 신해년 기사는
"일본의 천황 및 태자 · 황자들이 모두 죽었다."
전했고, 《상궁성덕법왕제설》(上宮聖德法王帝說)· 《겐코지가람연기》(元興寺伽藍緣起)에는 긴메이 천황이 즉위한 해를 신해년(531년)으로 적어, 마치 게이타이 천황의 바로 다음이 긴메이 천황인 양 서술했다.[200] 또 《고사기》에는 게이타이 천황이 《일본서기》에서 언급한 신해년보다 4년 전인 정미년(527)에 붕어했다고 적었다.가장 먼저 등장한 설은 게이타이 천황의 죽음은 정미년(527년), 긴메이 천황의 즉위는 신해년(531년) 때 일로 보아, 그 사이 4년을 안칸 천황과 센카 천황의 재위 기간으로 상정하는 설인데, 이 설은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모두 안칸 천황이 사망한 해를 똑같이 을묘년(535년)으로 기록했다는 점과 충돌한다.[201]
쇼와 시대에 이르러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는 《백제본기》가 말한 신해년(531)에 왜국에는 뭔가 중대한 정치 위기가 발생했으며, 그 결과로 게이타이 천황 사후 야마토 조정(야마토 정권)은 지방 호족의 딸인 오와리노 메코히메(尾張目子媛) 소생의 안칸-센카계와, 타시라카 황녀 소생의 긴메이계가 서로 갈라져 '조정 두 곳'이 서로 병립했을 것이라고 시사했고, 패전 뒤 하야시야 진사부로(林屋辰三郞)가 이를 계승하여, 게이타이 천황 치세 말기에 한반도의 정세와도 관련된 대립에서 비롯된 혼란( 이와이의 난) 등이 발생했고, 게이타이 천황 사후 '조정 두 곳'이 병립한다는, 그리고 이에 수반한 전국적인 내란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일본서기》는 이러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마치 배다른 형제가 나이 순서에 따라 즉위한 것처럼 기록해 놓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단 이러한 사실을 전한 《백제본기》가 현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기술에 대한 검증이 곤란하다는 어려움이 따른다. 나아가 이 책은 백제에 관련된(백제인들에 의해 서술된) 사료라는 점에서 왜국(일본) 관계 기사를 전면적으로 신용하는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도 있다. 《백제본기》의 말처럼 신해년에 '일본의 천황 및 태자와 황자'가 사망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여기서 말한 것이 정말 게이타이 천황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못한 것이다.[202]
따라서 '두 조정이 병립'하는 내란 같은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고, 이 시기의 대왕위 계승은 게이타이 천황의 사망 이후 그 후사였던 안칸 천황과 센카 천황이 자연스러운 이유로 해서 짧은 기간 동안에 사망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게이타이→안칸→센카→긴메이로 이어진다는 《일본서기》 기술을 따라야 한다는 학설도 유력하다.
'조정 두 곳이 병립'했다고 보는 학자들 중에서도 하야시야의 학설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하야시야는 긴메이 천황의 배후에는 천황과 혼인 관계였던 소가씨(蘇我氏)가, 안칸 · 센카 천황의 배후에는 (이 시기에 쇠퇴한) 오오토모씨(大伴氏)가 있었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이러한 배후의 관계를 서로 바꾸어 파악하는 설이 있는가 하면 게이타이 천황과 그 후사를 지지하는 지방 호족, 그리고 옛 왕통(부레츠 천황 이전의 대왕)의 피를 이어받은 긴메이 천황을 지지하며 반격을 준비하던 야마토 호족과 그들 사이의 대립을 주장하는 설, 오미(臣)의 가바네(姓)를 가진 호족과 무라지(連)의 가바네를 가진 호족 사이의 대립으로 보는 설도 있다.
게이타이 천황에서 긴메이 천황에 걸치는 시대에 왜국에서는 백제로부터의 불교 전래나 미야케(屯倉, 둔창) 설치, 《제기》(帝紀) · 《구사》(舊辭) 등 기록물 편찬, 화풍 시호(和風諡號)의 도입, 무사시노 쿠니노미야츠코(武蔵國造)의 난 등, 향후 일본의 역사 전개와 관련된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 과연 '두 조정'이 병립했는가, 두 조정이 서로 내전을 벌였는지 진위 문제는 이 시기에 있었던 일본 역사의 중대한 변화들을 바라보는 해석에도 영향을 준다.
7. 전설
게이타이 천황이 에치젠국의 개척자라는 전승이 있다. 에치젠은 온통 습지대로 농경이나 거주에는 적합하지 않은 땅이었는데, 오호도노미코(男大迹王, 후의 게이타이 천황)가 이 땅을 다스리면서 우선 아스와야산(足羽山)에 신전을 짓고, 오오미야도코로노미타마(大宮地之靈) 신을 모셔 이 땅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이것이 현재의 아스와야 신사(足羽神社)이다.신사를 세운 다음 오호도노미코는 지형을 조사한 뒤, 대규모 치수 사업을 펼쳐 구즈류 강(九頭竜川) · 아스와야 강(足羽川) · 히노 강(日野川)의 3대 하천을 만듦으로써 습기 많은 에치젠의 초원을 개간하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에치젠의 평야는 풍요로운 토지가 되어 사람들이 살 수 있었다.
오호도노미코는 나아가 항구를 열고, 수운을 발전시켜 벼농사, 양잠, 채석, 제지 등 여러 가지 산업을 발달시켰다. 이후 오호도노미코는 오오키미로 즉위하게 되어 에치젠을 떠나게 되었다. 떠나면서 이 땅을 염려하여 자신의 생령(生靈)을 아스와야 신사에 남겨두고, 딸 우마쿠다 황녀(馬来田皇女)를 제주로 삼아 뒷일을 맡겼다.
이러한 전승에 연유해서 게이타이 천황은 에치젠을 개척한 조신(祖神)으로 받들어지고 있으며, 훗날 이를 연극으로 각색한 것이 노(能) 작품 <화광>(花筐)이다. 극 중 게이타이 미카도(繼體帝)는 부레츠 미카도(武烈帝)의 후계자로 선택받고, 총애하던 시테(照日)에게 편지와 함께 꽃바구니를 기념으로 남긴 채 수도로 떠났다.
시테는 게이타이를 그리워하다가 시녀와 함께 미친 여자의 모습으로 수도로 뒤따라 갔고, 마침 단풍 구경을 하러 나온 미카도의 행차 앞에 나타난 시테는 미카도의 와키(從者)에게 밀려 바구니를 떨어뜨리고는 그만 미쳐서, 중국 한(漢)나라의 무제(武帝)와 이부인(李夫人)의 고사를 춤으로 추었다.
곧 그 바구니가 예전 자신이 시테에게 주었던 꽃바구니임을 알아본 미카도는 시테를 맞아들여 수도로 데리고 돌아왔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훗날 안칸 덴노로 즉위한다.
8. 스다하치만 신사 인물화상경과 백제 무령왕과의 관계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男弟王在意柴沙加宮時斯麻念長寿遣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取白上同二百旱作此竟
계미년(443년? 503년?) 8월 10일(日十)(?) 대왕년(大王年)(?), 남제왕(男弟王)이 오시사카궁(意柴沙加宮)에 있을 때 사마(斯麻)가 장수를 염원하여 카와치노아타이(開中費直)와 예인(穢人) 금주리(今州利) 2명 등을 보내어 백상동(白上同→銅, 양질의 구리) 200한(旱)을 가지고 이 거울(竟→鏡)을 만들었다.
계미년(443년? 503년?) 8월 10일(日十)(?) 대왕년(大王年)(?), 남제왕(男弟王)이 오시사카궁(意柴沙加宮)에 있을 때 사마(斯麻)가 장수를 염원하여 카와치노아타이(開中費直)와 예인(穢人) 금주리(今州利) 2명 등을 보내어 백상동(白上同→銅, 양질의 구리) 200한(旱)을 가지고 이 거울(竟→鏡)을 만들었다.
현전하는 일본 금석문 중 와카야마현 하시모토시 스다하치만 신사(隅田八幡神社) 소재의 인물화상경(人物画像鏡)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가 백제 무령왕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이 제기된 바 있다. 이걸 가지고 아예 '사실 무령왕의 남동생이 게이타이 천황이였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일본서기》에는 부레츠 천황이 죽고 후사가 없어서 적당한 사람을 찾다가 아버지가 16대
오진 천황의 5대손이고, 어머니가 11대
스이닌 천황의 7대손인 게이타이를 옹립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게이타이 천황의 아버지의 5대조로 되어 있는 16대 오진 천황은 제2왕조의 대왕('오오키미')이었고, 어머니의 7대조로 되어 있는 11대 스이닌 천황은 제1왕조의 대왕이었다. 따라서 일부 학계에서는 게이타이 천황의 출신이 불분명하므로 그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부모를 이전 두 왕조 대왕들의 자손으로 하는 계보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냈다고 보고 있다. 게다가 게이타이 천황의 ‘게이타이’라는 말 자체가 새로이 왕조를 계승했다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무령왕이 ‘남동생 왕’이라고 칭한 일본 천황이 게이타이 천황이 틀림없다면 게이타이 천황이야말로 행방을 알 수 없는 곤지의 세 아들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p.190~191
권오영 서울대 교수
“만약에 이 사마가 정말로 백제의 무령왕이라고 한다면 등극하기 전의 계체와 백제의 무령왕이 이미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요. 그렇다고 한다면 무령왕의 재위기간 그리고 계체천황의 재위기간 동안에 왜 이렇게 두 인물이 서로 긴밀하게 협조하고 백제와 왜 왕권의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지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겠습니다.”
권오영 서울대 교수 < 차이나는 클라스> 2020년 6월 방영분 중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왕이 계체(継体)입니다. 근데 그 계체(継体)가 왕이 되기 전에는 일본의 변두리에 있었던 작은 세력의 우두머리에 불과했어요. 근데 그 인물이 전체 일본의 왕이 되는 데는 백제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어요. 그래서 스다하치만 신사에 거울이 모셔져 있는데, 일본 국보입니다. 저기 글씨가 씌여져 있어요. (중략) 이 거울에 나와있는 내용이 한•일 학계의 수수께끼에요. 근데 분명한 것은 오오도{'남제왕'(男弟王)}라는 인물은 계체(継体)가 왕이 되기 전 본명이에요. 사마는 무령왕의 본명이고.. 그래서 게이타이가 왕이 되기 전에 무령왕이 관계를 갖는 것이에요.
이에 덧붙여 《백제삼서》를 인용하여 일본 국내에 있었던 태자와 황후 등 일족들이 모두 죽어버린 대란을 전하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더욱 의문스럽다. 자국에서 벌어진 참화를 《백제삼서》를 인용하여 전하는 것을 보면, 당시 백제와 왜국 사이는 상당히 가까웠다고 유추할 수 있다.
게이타이 덴노가 정말로 무령왕과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면 무령왕이 젊은 시절 왜에 거주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무령왕의 즉위 이전 기록에는 공백이 많기 때문에 많이 잡으면 501년 이전까지 잡을 수 있으므로 게이타이 덴노가 고사기 기록대로 480년대에 태어났다 가정해도 인연이 있을 가능성은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무령왕이 태어난 뒤 곧 백제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477년 부여곤지가 귀국했을 당시 무령왕의 상황은 기록되지 않았고[203] 무령왕은 동성왕 시절 백제에서의 활동이 보이지 않는다. 무령왕이 아버지가 누구든 서자로 추측되는 것과, 신찬성씨록에서 무령왕의 후손을 자처한 씨족이 제법 되는 것으로 보아 501년 이전까지 왜에 있었을 수도 있다. 475년 한성 함락 당시 개로왕의 일가족들이 다 죽는 상황에서 무령왕이 무사한 것으로 보아 무령왕이 당시 다른 곳에 있던 건 확실하고, 설령 도중에 귀국했다 쳐도 문주왕- 삼근왕-동성왕이 연달아 살해당하는 혼란을 피해 다시 왜로 갔다가 다시 백제로 돌아가도 이상할 건 없다. 이 경우 무령왕은 61년의 인생에서 백제 시절보다 왜 시절이 더 길었을 것이다.
게이타이 본인이 아니더라도 부여곤지-무령왕& 동성왕 부자는 5세기 중반 왜로 이주했을 당시 백제계 도래인들의 왜 개척을 이끌며 키미(王)라고 불릴 정도의 위세가 있었기 때문에 현 시가현인 오미(近江) 일대 호족 출신인 게이타이 덴노의 선조가 곤지-무령왕 부자와 아는 사이라도 별로 이상한 건 아니다. 곤지-무령왕&동성왕 부자의 후손의 일부가 왜에 남아 야마토(大倭)의 대호족이 되었으며, 게이타이 덴노가 오미에서 나라 분지로 이주해 대왕(大王)으로 추대되는 과정에서 아스카베(飛鳥)(곤지의 후손) 씨족을 비롯한 무령왕, 동성왕 일족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신찬성씨록을 보면 곤지, 동성왕, 무령왕의 후손들이 제법 많다.[204]
일본서기를 보면 왜계 백제인 관료들이 무령왕~성왕 시기 대규모로 출연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도 무령왕과 왜의 긴밀한 관계를 엿볼 수 있으며, 자연히 게이타이와도 직간접적인 인연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기록에 안 남아서 그렇지 게이타이와 무령왕이 인척지간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511~526년까지 게이타이 덴노가 교토부 일대를 떠돈 것도 특이점인데, 교토부 일대는 5세기 중반까지 키나이에서 덜 개척된 지역으로 부여곤지가 백제계 도래인들을 지휘하며 대규모로 개척한 지역이며 헤이안 시대까지도 백제계 도래인들의 영향력이 나타나는 지역이다. 야마토 왕권은 건국 당시부터 나라 시대까지 나라현 일대가 수도권이었고 오사카부 일대가 한반도와의 무역 때문에 위세가 꿇리지 않는 수준이었지 교토부 일대는 5세기까지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었다. 게이타이 덴노의 즉위 과정에서 교토부 일대 백제계 도래인들의 도움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 요소 중 하나.
9. 묘소
게이타이 천황의 능은 미시마노아이노능(일본어: 三島藍野陵)에 마련되었다. 일본 궁내청은 지금의 일본 오사카부 이바라키시 오오타 산쵸메(太田三丁目)에 소재한 길이 227m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 오오타 챠우스야마 고분(太田茶臼山古墳)을 이 미시마노아이노능으로 비정하고 있지만, 실제 무덤의 축조 시기는 게이타이 천황의 시대보다 앞선 5세기 중순으로 여겨진다.같은 오사카부의 다카쓰키시(高槻市) 군게신마치(郡家新町)에 소재한 길이 190m 전방후원분 이마키즈카 고분(今城塚古墳)에서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 진나라의 병마용(兵馬俑)을 닮은 하니와(埴輪)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1997년부터 매년 다카쓰키 시립 매장문화재 조사센터가 이마키즈카 고분을 찾아 발굴조사를 실시했는데, 이중의 해자를 나눈 제방에서 발견된 하니와는 출토된 양이나 크기가 일본 최대의 것이었다.
하니와 제사구(祭祀区)는 동서 62-65 m、남북 약 6 m 넓이로, 주택 모양이 15점, 목책 모양이 25점, 덮개 모양이 4점, 다치(大刀) 모양이 14점, 방패 모양이 1점, 유키(靱) 모양이 1점, 무인형(武人形) 2점, 매잡이 모양이 2점, 역사(力士) 모양이 2점, 관모를 쓴 남자 모양의 1점, 앉은 자세의 남자 모양 4점, 미코(巫女) 모양의 7점, 다리 넷 달린 동물(말 같은) 형태의 18점, 닭 모양이 4점, 물새 모양의 13점으로 모두 113점 이상이 발굴되었다.특히 주택형 토용은 높이가 170 cm에 달하는 것도 있었는데, 이리모야(入母屋) 구조로 일본의 신사 건축에서 지붕을 장식하는 가쓰오키(鰹木), 지기(千木), 높은 상(床)의 둥근 기둥도 표현되어서 신사 건물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마키즈카 고분은 오오타 챠우스야마 고분에서 동쪽으로 1.3 km 거리에 있다. 옛 셋쓰국(攝津國) 북부의 미시마 평야(三島平野) 한복판에 위치해 있으며 미시마노 고분군(三島野古墳群)에 속해 있는 전방후원분으로 요도강(淀川) 유역에서는 가장 큰 분묘이다.
무덤 주위로 이중의 해자가 둘러쳐져 있으며, 이 해자를 포함한 무덤 권역은 340×350 m의 범종 형태의 구획을 나타내고 있다. 무덤은 심하게 황폐해져 있었는데, 한 때는 오다 노부나가가 미요시(三好) 집안을 공격했던 에이로쿠(永祿) 11년(1568)의 셋쓰(攝津) 침공에 즈음해 성채로 쓰였기 때문으로 여겨졌으나, 발굴 조사 결과 게이초(慶長) 원년(1596)에 있었던 후시미 대지진(伏見大地震)으로 인한 붕괴 때문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무덤의 형상이나 출토된 등의 연대적 특징, 또 《고사기》와 《 일본서기》, 《엔기시키》(延喜式) 등 문헌 자료의 검토를 통해, 6세기 전반에 지어진 것으로 6세기 야마토 정권의 오오키미의 무덤으로 추정된 이 고분이 진정한 게이타이 천황의 능이라고 보는 것이 오늘날에는 정설로 되어 있다.[205]
이미 임시능묘조사위원회(1935~1944)에서도 이 고분을 능묘 참고지로 편입할 것을 요청하는 답신을 보냈지만, 궁내청은 이마키즈카 고분의 능묘 참고지 지정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난색을 보인다. 천황의 능묘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는 일본 궁내청의 규정에도 구애받지 않고 현재 이마키즈카 고분에는 일반 시민들도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으며, 무덤에는 주민들의 산책로가 조성되었다.
타카츠키시에서는 이마키즈카 고분의 사적 공원 정비를 목표로 1997년 이후 지속적으로 그것을 위한 정보를 얻기 위한 발굴조사를 실시해 왔으며, 7개년에 걸친 복원정비 사업이 2011년 3월에 완료되었다. 4월 1일에 타카츠키시 교육위원회는 이마키즈카 고분을 사적 공원으로 정비하고 하니와 제사장소 등의 발굴 조사 위치에는 하니와의 복제품을 두었으며, 가까운 이마키즈카 고대역사관(今城塚古代歷史館)에서는 이 일본 최대급의 주택 형태의 하니와들을 손에 닿을 수 있을 위치에 복원, 전시 중이다. 무덤을 둘러싼 해자는 현재 낚시는 금지되었지만, 공원으로 조성되기 전에는 낚시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러한 대왕의 무덤이 6세기에 이르러 기나이 북부의 요도 강 수계에 처음 출현한다는 것은, 여태껏 남부 야마토 강 수계의 야마토 · 가와치에 있던 세력에서 정권의 주도권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10. 기타
현 일본 왕조의 실질적인 시조이자 기년이 정상화되는 기점으로 기년 정상화의 기준이라는 점에서 백제 고이왕, 신라 내물 마립간 포지션에 속하는 인물이다. 적어도 이후 일본 왕조의 인물과 기년은 모두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기년 인상의 기점이라는 것이지 게이타이 조의 모든 기년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당대 야마토(大倭) 대왕위의 특성을 고려하면 게이타이가 야마토 대왕이 된 시기는 야마토(大倭)에 도읍한 526년이고, 507년은 오미 또는 에치젠의 왕 즉위 당시를 인상했을 가능성이 높다.[206] 타시라카 황녀의 혼인 등을 비롯한 몇몇 사건들은 실제로는 재위 초반이 아니라 후반에 일어난 일을 인상해서 기록한 것으로 추측된다.다른 초기 대왕들에게도 지적되는 사실인데, 사서의 기록을 보면 명확하게 오호도 대왕이 ~했다 기록된 게 아니라 특정 사건만 늘어놓거나 '천황'으로만 호칭된 사건이 많아서 전대 또는 후대에 일어난 일이 게이타이 기에 소급되어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오호도 대왕의 실제 대왕 즉위년이 526년일 경우, 일부 기록은 전대 대왕들의 기록이 섞였을 수도 있다.[207]
게이타이 덴노는 근거지를 여러 번 옮긴 것이 확인되는데, 아마 오미 또는 에치젠의 왕이었던 게이타이 덴노가 일찍부터 대왕이 되고자 키나이 일대 각지의 호족들과 혼인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근거지를 옮긴 끝에 최종적으로 이와레(磐余)에 도읍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레는 리추 덴노와 세이네이 덴노의 근거지라 기록된 지역이기 때문에, 리추-세이네이의 근거지를 물려받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208]
사서에서 제2왕조로 분류되는 오진~부레쓰기의 기록을 보면 가족관계와 근거지가 일치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송서 왜5왕은 대체로 리추 덴노~ 유랴쿠 덴노기로 여겨지는데, 리추-한제이 형제, 인교-안코&유랴쿠 부자관계는 기기(記紀)와 일치하나 한제이-인교의 관계에 대한 기록은 없다.[209]
근거지로 가면 또 이야기가 다른데, 오진의 근거지는 카루시마(軽島), 닌토쿠의 근거지는 나니와(難波), 리추-세이네이-게이타이의 근거지는 이와레, 한제이는 타지히(丹比),[210] 인교-겐조는 아스카(飛鳥), 안코-닌켄은 이소노카미(石上), 유랴쿠-부레쓰는 하츠세(泊瀬)에 속한다.
오진의 무덤은 에가노 모후시노 오카 능(惠我藻伏崗陵), 닌토쿠는 모즈노 미미하라노 나카 릉(百舌鳥耳原南陵), 리추는 모즈노 미미하라노 미나미 능(百舌鳥耳原南陵), 한제이는 모즈노 미미하라노 키타 능(百舌鳥耳原北陵), 인교는 에가노 나가노노 키타 능(恵我長野北陵), 안코는 스가하라노 후시미노 니시 능(营原伏見西睖), 유랴쿠는 타지히노 타카와시노 하라노 릉(丹比高鷲原陵), 세이네이는 카와치노 사카토노 하라 능(河内坂門原陵), 겐조는 카타오카노 이와츠키노 오카노 키타 능(傍丘磐坏丘南陵), 닌켄은 하뉴노 사카모토 능(埴生坂本陵), 부레쓰는 카타오카노 이와츠키노 오카노 키타 능(傍丘磐坏丘北陵), 게이타이는 미시마노 아이노 능(三嶋藍野陵)이다. 사서에서 무덤의 일치성이 드러나는 건 닌토쿠, 리추&한제이, 인교 정도이며 나머지는 호칭이 전부 중구난방이다.
사서에 기록에 따르면 타시라카 황녀는 유랴쿠 덴노&와니노 와라와키미- 닌켄 덴노&카스가노 오호이라츠메 황녀-타시라카 황녀 순이고, 선왕인 부레쓰 덴노는 닌켄 덴노&카스가노 오호이라츠메 황녀의 아들이며 카스가노 이라츠메라는 부인에 대한 기록만 확인된다. 또 게이타이의 아들인 안칸 덴노와 센카 덴노는 닌켄 덴노&누카키미노 이라츠메의 딸인 카스가노 야마다 황녀와 닌켄 덴노&카스가노 오호이라츠메의 딸인 타치바나노 나카츠 황녀와 혼인하였다.
게이타이는 526년에 야마토(大倭)에 도읍하였는데, 527/531년에 게이타이가 사망하자 '긴메이 덴노가 어려서' 531년에 안칸 덴노가, 536년에 센카 덴노가, 539년에 긴메이 덴노가 즉위하였고 긴메이 덴노는 3촌 조카인 센카 덴노의 네 딸과 혼인하였다. 여러 정황을 감안하면 긴메이 덴노는 실제로는 520년대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며, 520년대~530년대에 게이타이, 안칸, 센카가 타시라카 황녀, 카스가노 야마다 황녀, 타치바나노 나카츠 황녀와 혼인한 것으로 보인다.
세이네이-겐조-닌켄은 서로 동세대이며[211] 송서에서 겐조-닌켄의 조부로 기록된 왜왕 찬(리추)은 521년 이전~538년, 왜왕 무(유랴쿠)의 아버지인 왜왕 제(인교)는 443?~462년, 왜왕 흥(안코)은 462~477년, 왜왕 무는 477~502년 이후 재위하였다. 이러한 재위기간을 고려하면, 세이네이-겐조는 유랴쿠의 5촌 조카라는 사서의 기록과 달리 유랴쿠와 나이가 비슷했고 동시대에 병존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212] 즉위 이후 혼인했다고 명시된 쿠사카노 하타비 황녀와 달리, 와니노 와라와키미는 즉위 이후에 혼인했다는 기록이 없다.
타시라카 황녀, 카스가노 야마다 황녀, 타치바나노 나카츠 황녀의 나이를 고려하면 실제로는 1세대 더 밑일 수도 있다. 이들 모두 사서에서 닌켄 덴노의 딸이라 기록된 점을 고려하면 닌켄 덴노와 관련된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또 사서에서 유랴쿠 덴노와 동일인물설이 있는 닌켄 덴노의 아들 부레쓰 덴노는 근거지부터 시호까지 유랴쿠 덴노와 많이 유사한데, 사서에서 황후로 기록된 카스가노 이라츠메(春日娘子)의 이름은 유랴쿠의 딸이자 닌켄의 황후인 카스가노 오오이라츠메(春日大娘皇女)와 이름이 매우 유사하다. 부레쓰 덴노의 실존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독자성이 강한 시호임을 고려하면 대왕이 아니라 일반 호족(왕)의 일원으로서 실재했을 수도 있고, 유랴쿠의 근거지인 하츠세를 물려받은 인물일 수도 있다.
게이타이 이후 대왕들의 근거지는 그렇다 쳐도, 중앙집권이 6세기 초반까지 매우 느렸는 데다 게이타이가 본래 키나이 밖 출신이라 키나이 내에 근거지가 없었음을 고려하면 타시라카 황녀는 이와레의 호족과 관련된 인물일 가능성이 적지 않다. 실제로는 타시라카 황녀, 카스가노 야마다 황녀, 타치바나노 나카츠 황녀는 닌켄의 손녀라는 점만 일치할 뿐 친자매가 아니라 친척 자매일 수도 있다.
11. 가족관계
- 타시라카 황녀
- 오와리노메노코히메(尾張目子媛, ? - ?) - 오와리노무라지 구사카(尾張連草香, ? - ?)의 딸
- 와카코히메(稚子媛, ? - ?) - 미오노츠노오리노키미(三尾角折君, ? - ?)의 딸
- 오이라츠코 황자(大郎, ? - ?)
- 이즈모 황녀(出雲, ? - ?)
- 히로히메(広媛, ? - ?) - 사카다노오마타 왕(坂田大跨王, ? - ?)의 딸
- 카무사키 황녀(神前, ? - ?)
- 만타 황녀(茨田, ? - ?)
- 우마구타 황녀(馬来田, ? - ?)
- 오미노이라츠메(麻績娘子, ? - ?) - 오키나가노마테노오키미(息長真手王, ? - ?)의 딸
- 사사게 황녀(荳角, ? - ?)
- 세키히메(関媛, ? - ?) - 마무타노 무라지 고모치(茨田連小望, ? - ?)의 딸
- 마무타노오오이라츠메노 황녀(茨田大娘, ? - ?),
- 시라사카노이쿠히히메노 황녀(白坂活日姫, ? - ?)
- 오노노와카이라츠메 황녀(小野稚娘, ? - ?)
- 야마토히메(倭媛) - 미오노키미 가타히(三尾君堅楲, ? - ?)의 딸
- 오이라츠메 황녀(大郎子, ? - ?)
- 마로코 황자(椀子, ? - ?) - 미노쿠니노키미(三國公)와 미노쿠니노 마히토(三國眞人)의 시조다.
- 미미 황자(耳, ? - ?)
- 아카히메 황녀(赤姬, ? - ?)
- 하에히메(荑媛, ? - ?) - 와니노오미 가와치(和珥臣河内, ? - ?)의 딸
- 와카야히메 황녀(稚綾姬, ? - ?)
- 츠부라노이라츠메 황녀(円娘, ? - ?)
- 아츠 황자(厚, ? - ?)
- 히로히메(広媛, ? - ?) - 네 왕(根王, ? - ?)의 딸
- 우사기 황자(菟, ? - ?) - 사케히토노키미(酒人公)의 시조다.
- 나카츠 황자(中, ? - ?) - 사카다노키미(坂田公)의 시조다.
==# 천황 계보 #==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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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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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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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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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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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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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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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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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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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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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호도노스메라미코토
[2]
《일본서기》
[3]
《지쿠고 국 풍토기》(筑後國風土記)
[4]
오호도노미코토
[5]
《고사기》(古事記)
[6]
히코후토노미코토
[7]
《일본서기》
[8]
호도노오오키미
[9]
《일본서기》
[10]
호도노오오키미
[11]
인물화상경.
[12]
《상궁기》(上宮記)
[13]
인물화상경
[14]
인물화상경
[15]
다만
일본국의 국호와
천황이라는 제호가 등장한 것은 당나라 풍(唐風)으로 국가 체제를 정비한 제40대
덴무 천황부터이고, 그 이전에는 왜국(倭國,
야마토 왕권)의 대왕(大王, 오오키미)이었다. 따라서 게이타이 천황 또한 본래는 왜국의 대왕이었고, 덴무 천황부터 황제국을 칭하면서 선조를 황제로 추존한 것이다. 동아시아 유교 문화에서 선조를 황제로 추존하는 일은 흔했다. 일반적으로 초대 황제는 자기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를 추존했고, 세대를 거친 왕실에서 황제국을 자칭할 때는 자신부터 고조부까지 추존하고 추가로 건국시조와 그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까지만을 추존했다. 일본에서 처음 천황을 칭한 자는 이를 따르지 않고 자기보다 앞서 재위했던 왕들을 모두 천황으로 추존했으니, 이는 일본이 유교 예법을 따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16]
헤이안 시대까지 존재하던 원시적 시호.
[17]
고사기의 기록대로라면 게이타이 덴노는 480년대에 태어난 것이 되는데,
오진 덴노가 실제로는 4세기 중반 인물로 추정됨을 고려하면 고사기 쪽이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다만 게이타이가 40세보다 나이가 많다는 정황도 있어 50~60대일 수도 있다.
[18]
문맥상 오진의 5세손인 彦主人王의 아들로 볼 수 있다. 『고사기』에서도 品太王(오진)의 5세손 袁本杼命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그 사이 2대의 계보가 누락되어 있다. 현대에는 오진이 게이타이의 5세손이라는 기록이 사실일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
[19]
汙斯王으로도 표기하며, 오진 덴노의 4세손으로 乎非王과 久留比賣命 사이에서 태어났다(『석일본기』).
사가현
타카시마시 安曇川町에 있는 田中王塚古墳이 히코우시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어 현재 陵墓參考地로 지정되어 있다.
[20]
『석일본기』에 인용된 「상궁기」에는
스이닌 덴노로부터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으나,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따르면 게이타이는 부계와 모계가 동시에 스이닌 덴노에 출자를 두고 있으므로, 모계만을 스이닌에서 계산하고 있는 점에 의문이 있다. 또 스이닌보다 실재성이 높은 오진에게는 대왕이 아닌 왕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21]
현재
시가현
타카시마군 高島町이다. 여기서 보이는 國郡의 명칭은 8세기 이후 율령제 하에서 정비되므로, 이는 『일본서기』 편찬자가 편찬 당시의 지식에 근거하여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 郡의 訓은 코호리(こほり)로, 우리 말의 ‘고을’과 동일한 어원으로 생각된다. 또한 7세기 말까지는 郡 대신 評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음이 木簡을 통하여 확인되었다.
[22]
원문은 別業으로 別邸·別莊이라는 뜻이다. 주로 농업을 관리하기 위해서 세운 건물을 말하며 田宅·田家라고도 한다
[23]
현재
후쿠이현
사카이시(후쿠이) 三國町 지역이다.
[24]
현재
후쿠이현
사카이시(후쿠이) 丸岡町 高田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에는 振媛의 아버지인 오하치노키미를 모시는 高向神社가 있다.
[25]
오호토모 씨(大伴氏)는 고대 키나이(畿內)의 대호족으로
야마토 정권의 성립, 발전과 더불어 來目部·靫負部·佐伯部 등을 이끌고 왕실의 호위를 담당하게 되었으며, 중앙의 군사력을 통솔하는 유력한 씨족이었다.
모노노베 씨(物部氏)와 함께 일본 율령제 이전의 최고 관직이었던 오호무라지(大連)에 임명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카나무라(金村)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중엽에 걸쳐 부레쓰·게이타이·안칸·센카·긴메이 5대의 오호무라지였다. 게이타이의 영입, 임나 4현의 할양,
이와이의 난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긴메이에 이르러 이른바 ‘임나 문제’의 실패와 관련하여 실각한 것으로 전한다.
[26]
『한서』 성제기 권10 ‘至今未有繼嗣, 天下無所係心. 觀于往古, 近事之戒, 禍亂之萌, 皆由斯焉’의 인용으로 보기도 한다.
[27]
현재
교토부 키타쿠와타 군(北桑田郡) 및 카메오카시(龜岡市)이다.
[28]
『한서』 성제기 권10 「慈仁孝順, 可以承天序」의 인용으로 보기도 한다.
[29]
모노노베 씨는 모노노베의 伴造로서 군사와 형벌 등을 관장하였으며, 오호토모노 씨와 더불어 오호무라지의 직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교 수용 문제를 계기로
소가씨와 대립하여 세력을 잃었다. 부레쓰와 게이타이 양 시기의 오호무라지였으며, 특히 게이타이 21년에 대장군이 되어 츠쿠시에서 일어난
이와이의 난을 진압하였다. 오히토(男人)는 게이타이 조의 대신이었으며, 두 딸이 안칸의 비(妃)가 되었다.
[30]
원문은 持節이다. 節은 군주의 명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징표로, 깃발이나 칼이 주로 사용되었다.
[31]
천자가 타는 수레의 한 종류이다. 천자가 타는 수레에는 大駕, 法駕, 小駕가 있는데, 법가는 6마리의 말이 끄는 금은으로 장식한 수레를 중심으로 이를 호위하는 수레 36대를 거느린다. 여기서는 워호도 왕을 맞이하기 위한 수레를 미화하기 위하여 『사기』·『한서』 혹은 『藝文類聚』와 같은 類書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32]
『
삼국지』 吳志 孫堅傳 권1 「晏然自若」의 인용으로 보기도 한다.
[33]
한 사람이 앉는 접이식 의자를 말한다. 앉는 부분은 천이나 가죽으로 만들었으며, 원래 호족(胡族)이 쓰던 것으로 이동 중 야외에서 사용하였다. 수대(隋代)에 이르러 호(胡)라는 말을 피하여 交床이라고 하였다(『태평어람(太平御覽)』 演繁露).
[34]
원문은 踞坐이다. 据坐라고도 하며 걸터앉는다는 뜻이다. 古墳時代의 土偶를 통하여 수장이나 무녀가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35]
천자에 대한 제후, 제후에 대한 가신(家臣)을 모두 배신(陪臣)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원래 워호도 왕이 거느리고 있던 가신들을 말한다.
[36]
카후치노 우마카히노 오비토(河內馬飼首)는 카후치 우마카이 부(河內馬飼部)를 통솔하는 씨족을 말한다. 카후치 우마카이 부는
나니와를 중심으로 말의 사육 및 마구의 제작에 종사한 도래계 씨족으로 생각된다. 5세기에 카와치의 古市郡과 讚良郡 지역에 말의 사육을 담당하는 집단이 있었으며, 荒籠은 讚良郡 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생각된다. 2000년부터 조사되기 시작한
오사카부
시조나와테시 蔀屋北遺跡에서는 마구·제염토기를 비롯하여 말의 유골 등 말의 사육을 관장한 집단과 관련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지역은 고대 카와치 호(河內湖)에 인접한 곳으로, 해상 교통이 원활한 곳인 동시에 말의 사육에 필수적인 제염도 용이한 곳이었다. 이곳을 카후치노 우마카히노 오비토 집단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밖에도 河內馬飼首御狩(『일본서기』 게이타이 23년 4월, 24년 9월)·河内馬飼首押勝(『일본서기』 긴메이 22년) 등이 『일본서기』에 보인다. 카후치노 우마카히노 오비토 집단은 사육한 말을 유력 호족들에게 제공하는 동시에 말을 이용한 물자의 운송에도 종사하였을 것이므로 많은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을 것이다. 황롱이 이전부터 워호도 왕과 알고 지냈고 또한 오호토모노 카나무라노 오호무라지의 의도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었던 점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37]
현재
오사카부
히라카타시 楠葉이다.
나라현과
교토부 쪽에서 흘러오는 桂川·宇治川·木津川이 합류하여 淀川이 되는 지역으로 교통의 요지라고 할 수 있다. 게이타이는 5년 10월에 山背 筒城, 12년 3월 弟國을 거쳐 20년 9월에야 磐余 玉穗, 즉 야마토(大和) 지역에 들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사들로 보아 게이타이 즉위 당시 야마토 지역 호족들과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게이타이 기의 기년 자체를 신뢰할 수 없으므로, 쿠스하노미야를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최근에는 워호도 왕이 야마토·카와치 지역을 봉쇄하는 형태로 야마토 외곽 지역에 포위망을 형성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38]
『한서』 문제기 권4의 「代王曰, ‘奉高帝宗廟重事也. 寡人非敢當.’ 群臣皆伏固請, 代王西鄕讓者三, 南鄕讓者再. 丞相平等皆曰, ‘臣伏計之, 大王奉高祖宗廟最宜稱, 雖天下諸侯萬民, 皆以爲宜, 臣等爲宗廟社稷, 計不敢忽. 願大王幸聽臣等, 臣謹奉天下璽符.’ 再拜上. 代王曰, ‘宗室將相王列侯以爲其宜寡人, 寡人不敢辭.’ 遂卽天子位.」의 인용으로 보기도 한다.
[39]
維城은 宗子, 즉 왕위를 계승할 황태자를 말한다.
[40]
掖庭은 中宮, 혹은 황후의 거처를 말한다.
[41]
扶萼은 꽃받침이다. 전하여 형제가 함께 번성함을 뜻한다.
[42]
인교 기에 이름이 처음 보이며 유랴쿠 대에 오호무라지가 되었다. 武以의 아들, 金村의 조부로 전하며, 오호토모 씨로서 실재가 거의 확실한 최초의 인물이다. 유랴쿠에서 부레씨의 5대에 걸쳐 오호무라지를 지내면서 유랴쿠 사후에 일어난 星川皇子의 반란을 진압하고, 세이네이 대에는 白髮部 舍人, 膳部, 靫負를 설치하고, 부레쓰 대에는 水派邑에 성을 쌓는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하였으며, 오호토모 씨 전성기의 기초를 쌓았다.
[43]
舍人은 일본 고대 율령제하에서 천황, 황후, 황태자의 측근에서 잡역 및 호위 숙직 등을 담당한 하급 관료이며, 중국 진대에 궁중에서 숙직과 잡역을 담당하는 관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일본에서는 5세기 대에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기사 중의 淸寧天皇 단계에서는 部民制로 파악되는 皇室私有民이었을 것이나, 『일본서기』 편찬 당시 율령제의 지식으로 사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44]
供膳은 膳夫와 같다. 궁중에서 食膳을 담당한 하급관리로 원래 조리를 담당한 伴部였으나, 伴造制의 확립과 더불어 品部로서의 膳部로 변하였다.
[45]
채부는 활통을 지고 궁정의 경호를 담당한 무사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점차 의미가 확대되어 율령제 하의 위부(衛府) 관인을 총칭하게 되었다. 특히 궁성문을 지키는 위문부(衛門府)를 靫負司라고 하였다. 5~6세기 단계에서는 왕족을 근시하는 명대(名代)였던 것으로 생각되며, 丹比靫負部와 刑部靫負部 등도 있었다.
[46]
『일본서기』 세이네이 2년 2월조에 「天皇恨無子, 乃遣大伴室屋大連於諸國, 置白髮部舍人白髮部膳夫白髮部靫負. 冀垂遺跡, 令觀於後.」라는 기사가 보인다. 이들 部는 세이네이 덴노에게 봉사하는 천황 및 황족의 사유민적 성격을 가진 어명대(御名代)및 자대(子代)로 파악하는 것이 통설이나, 名代와 子代를 구별하고자 하는 견해 및 『일본서기』 편찬자가 황거(皇居)의 소재지 등 지명을 부명으로 하는 부를 名代와 子代로 부회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47]
제24대
닌켄 덴노의 황녀이다. 『고사기』에서는 手白髮命으로 나온다. 어머니는
유랴쿠 덴노의 황녀 春日大娘이다. 게이타이 덴노가
오진 덴노의 5세손이라는 기록을 부정하는 입장에서,
타시라카 황녀를 매개로 게이타이가 오진 및 닌토쿠 왕조와 혈연관계를 맺었다고 이해한다.
[48]
율령제 하에서의 신기관(神祇官)의 장관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신지관 등의 제도가 확립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율령제 관념에 의한 文飾이다.
[49]
원문은 可이다. 養老 公式令 詔書式에 의하면 천황의 명령대로 詔書를 작성하면 연월일 다음에 ‘可’라고 써넣어 시행하도록 하였다.
[50]
『藝文類聚』 권13 帝王部 晋元帝의 「晋劉琨勸進元帝表曰,“臣聞, 天生蒸民, 樹之以君, ~司牧黎元 ~天地不可以無響 ~ 黎元不可以無主」 및 권52 治政部 論政의 「晋潘岳九品議曰, 天生蒸民, 以樹之君, 使司牧之, 勿失其性」에 의한 문식이다.
[51]
오호도노 스메라미코토가 천황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이미 尾張連草香의 딸인 目子媛과 혼인하여 두 아들이 있었고, 이들이 각각 안칸·센카 덴노로 즉위하였다. 자식이 없다고 한 것은 천황가의 여자 사이에 둔 아들이 없다는 뜻이다. 타시라카 황녀와 혼인한 것은 천황가와의 혈연적인 관계를 보완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52]
『藝文類聚』 권11 帝王部 神農氏의 「呂氏春秋曰, 神農敎曰, 士有當年不耕者, 則天下或受其飢矣. 女有當年不績者, 則天下或受其寒矣. 故夫親耕, 妻親績」에 의한 문식으로 보기도 한다.
[53]
이 分註는 여러 비를 맞아들인 날은 다르지만, 천황이 즉위한 후 일괄해서 특정한 날에 기록한다는 범례의 성격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안코 3년조 이후 여러 곳에서 이러한 원칙이 적용되고 있으므로, 최초의 사례에서 범례를 밝히는 상식에서 벗어나고 있다. 이는 『일본서기』에서 나타나는 체제상의 통일성 결여의 한 예이다.
[54]
『고사기』 게이타이 단에서는 「尾張連等之祖, 凡連之妹 目子娘女」라고 하였다. 게이타이가 오와리 지역의 호족 세력을 배경으로 야마토(大和) 지역 호족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천황이 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또 게이타이를 오미 및 에치젠을 중심으로 한 오키나가 씨(息長氏) 세력으로 보고, 도래계 씨족의 철제 기술 등을 바탕으로 키나이(畿內)의 오호키미(大王)가 된 것으로 파악하는 주장도 있다.
[55]
勾는 현재의
카시하라시 曲川町의 지명으로 추정되며, 오호헤(大兄)는 황자 중 적장자 또는 유력 황자에 대한 용어이다. 오호에는
덴지 덴노 이후 사용되지 않으며, 황태자제가 정착되기 이전 시기에 가장 유력한 왕위계승자와 황후 및 정비의 장자를 지칭하였다.
[56]
원문에는 太歲로 되어 있다. 원래는 木星을 의미하였으나, 목성이 12년을 주기로 天球를 순행하므로 12支와 결부되어 어떤 해의 간지를 표시하게 되었다. 간지로 기년을 표시하는 방법은 중국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한반도에서 고대의 일정 기간 동안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서기』에서 태세 간지로 기년을 표시한 것은 백제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일본서기』 게이타이 25년조 참조.
[57]
현재의 제주도인 탐라를 남쪽 바다에 있다고 본 이 기사는 『일본서기』 게이타이 기와 긴메이 기에 다수 인용되어 있는 『백제본기』를 출전으로 하였을 것이다. 일본과 직접 관련이 없는 백제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한 예는 백제왕과 태자의 사망 및 즉위기사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용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기년의 확정 문제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서는 백제본기
문주왕 2년(476) 및
동성왕 2년(498)에 각각 탐라 관계기사가 보인다.
[58]
『일본서기』에 인용되어 있는 백제삼서 중 하나이며, 주로 게이타이 기와 긴메이 기를 중심으로 보인다. 分註의 형태로 18개소에 보이며, 실제로 게이타이 기와 긴메이 기의 한반도 관계 기사의 대부분이 『백제본기』에 의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시기적으로는 백제의
무령왕 및
성왕을 중심으로 한 기록이며, 그 원형은 편년체의 실록류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편찬 주체에 대해서는 크게 왜의 군사 원조를 요청하기 위한 목적으로 백제에서 편찬하였다는 설과 백제 멸망 후 왜에 망명한 백제인들 중 특정 씨족이 자신의 유래를 밝히기 위해 편찬하였다는 설, 원래 백제에서 편찬된 사서를 바탕으로 후대에 윤색 과정을 거쳐 『일본서기』에 인용되었다는 설 등 세 가지 설로 나눌 수 있다. 최근에 백제 유민 편찬설을 중심으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백제본기』 자체에도 통일된 체제가 결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시기에 따라 기술체계가 다르다는 지적도 있어서, 현재로서는 충분히 해명되지 않은 점이 있다.
[59]
누구인지가 분명하지 않으며, 『百濟本記』의 원문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車持君으로 보는 설이 있다.
[60]
浮逃는 일정하게 사는 곳 없이 떠돌아 다니거나[浮浪], 피하거나 쫓겨 달아남[逃亡]을 말한다. 貫은 戶籍이다. 백제로부터 임나로 도망해 들어 와서 백제의 호적에서 빠진 것이 3~4대가 지난 사람들을 백제로 돌려보냈다는 뜻이다. 여기에 보이는 浮逃, 絶貫, 括出, 附貫 등은 모두 律令制에서 사용하는 용어이다. 고구려의 침략으로 한강 유역을 상실한 백제가 노동력 확보를 위하여 적극적인 인구파악에 나선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이들을 推刷하기 위하여 道使를 파견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61]
야마시로국(山城國) 綴喜郡으로 현재
교토부 츠즈키군(綴喜郡) 田邊町 普賢寺 일대로 추정된다. 12년 3월에 弟國으로 천도하였고, 다시 20년 9월에 磐余玉穂宮로 천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62]
호츠미노 오미(穂積臣)는 모노노베씨(物部氏)에서 갈라져 나온 지족(支族)이다. 『일본서기』
가이카 덴노 卽位前紀 참조. 덴무 13년 11월에 아소미(朝臣)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오시야마(押山)는 6년 12월조나 23년 3월조에 다리국수(哆唎國守) 및 하다리국수(下哆唎國守) 등으로 나타나므로 단순한 사자(使者)가 아니라 백제의 왜계 관료로서 해당 지역에 파견된 지방관으로 볼 수도 있다. 혹은 일본의 번국관에 의한 윤색일 가능성이 크다.
[63]
별도로 이른바 임나 할양과 관계된 상표문을 바쳤다는 뜻이다.
[64]
哆는 현재의 한자 음가가 ‘치’이지만, 과거에는 ‘다’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는 옛음에 따랐다. 哆唎는
전라남도의 榮山江 東岸, 혹은 섬진강 서안, 구체적으로는 여수(猿村縣)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65]
전라남도
여수시 突山縣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66]
전라남도
구례군 沙等 또는 沙等村 혹은 欿平郡(현재의 순천)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67]
전라남도 서부
영광군,
고창군,
무안군,
광양군(마로현馬老縣) 지방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상의 4현은 전라남도 모든 전역에 이르는 지역이다. 『梁職貢圖』의 麻連과 연관시켜 보는 견해도 있다.
[68]
哆唎는 백제와는 아침저녁으로 교통하기에 쉽고, 닭과 개소리가 서로 들릴 정도로 가까운 나라이다. ‘雞犬相聞’이라는 말은 『老子』및 陶潛의 『桃花源記』에서 ‘人家가 근접하여 있다’는 의미로 쓰였다.
[69]
설령 백제에 합병해도 후세의 안전은 보증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백제와 분리해 둔다면 아무래도 몇 년조차도 지킬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백제 중심으로 표현이므로, 『백제본기』에서 인용된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70]
難波館은 이곳에 처음 나타나는데, 여기서 외국의 사신을 宿泊시켰다. 옛 터는 大阪 시내에 있다.
[71]
『한서』 문제기에는 ‘황태후가 완고하게 청했다(皇太后固要).’고 되어 있다.
[72]
住吉神社의 祭神을 말한다. 表筒男, 中筒男, 底筒男의 3신을 모신다. 뒤에
진구 황후를 合祀하였다. 『연희식(延喜式)』 神名式 攝津國 住吉郡에는 ‘스미요시라는 곳에 진좌해 있는 신사의 4좌(住吉坐神社四座)’라고 되어있다. 현재
오사카시
스미노에구이다.
[73]
바다의 바깥, 바다 밖(海外)을 말한다.
[74]
진구 황후의 삼한 정벌 전설을 거론하고 있다.
[75]
원문은 授記이다. 梵語 vyakarana의 번역어로 預言이라는 의미이다. 불교 용어로 장래에 성불(成佛)을 증명한다는 뜻이다. vyakarana는 授記, 受別, 受決이라고도 하며, 和伽羅那라고 음역되기도 한다. 부처가 어떤 사람들에게 성불하리라는 것을 미리 예언하는 것이다.
[76]
진구 황후다. 대후(大后)라고도 한다. 천황은 많은 처를 거느렸으며 처의 신분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율령제도의 도입과 함께 후궁 제도도 갖추어져 養老令, 儀制令과 後宮職員令에는 정처正妻를 황후皇后라고 하고 처인 내친왕(內親王)을 비(妃), 이 이외를 부인(夫人) 혹은 빈(嬪)이라 하고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진무 이래 황후라는 칭호를 사용하였고, 그 후 비 이하의 호칭을 점차 많이 사용하지만, 이것들은 『일본서기』 편찬 당시의 令의 관념에 의해서 구분하여 쓴 것일 것이다.
[77]
『일본서기』에서는 한반도 관계 기사에는 전부 官家라고 써서 일본열도의 屯倉과 구분하고 있지만, 이는 같은 ‘미야케’이다. 屯倉 및 官家의 뜻은 천황에 속한 건물(御宅), 즉 屋舍와 倉庫에 대한 敬稱이기 때문에 郡家나 正倉 혹은 개인적인 莊園의 시설 등도 일반적으로 미야케라고 불리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日本書紀』의 屯倉은 國家制度로서의 미야케로, 大化改新 이전의 조정 직할의 농업경영지 혹은 직할령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초기의 둔창은 仁德 11년, 13년조의 茨田屯倉과 같이 대부분 治水灌漑 공사에 의한 대규모 水田 개발의 결과로 성립한 것으로, 5세기에 들어가는 무렵부터 畿內 지방에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종류의 둔창에는 농민을 다른 지역으로부터 이주시키고, 倉庫와 관리시설이 설치되고 屯倉首 등의 현지관리자가 배치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농민에 대한 수취 내용은 명확하지 않다. 또 보통은 이러한 둔창 내의 농민을 田部라고 불렀다고 하고 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미야케라는 명칭으로부터 이러한 둔창을 창고를 중심으로 出擧에 의한 농민지배방식이 발전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倉庫 등의 시설이 가장 눈에 띄기 때문에 미야케라고 불린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므로 둔창의 본질을 특히 창고라는 기능에서 찾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러한 초기의 둔창에 대하여 게이타이 22년 12월조의 糟屋屯倉처럼 國造 등의 지방호족이 그 소유지의 일부를 贖罪 등의 목적으로 조정에 헌상한 결과 성립된 것이 6세기에 들어가면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종류의 둔창에는 나중에 하나의 군에 상당하는 것도 적지 않고, 종래의 주민이 그대로 둔창의 백성이 되어 국조의 일족 등이 현지관리자에 임명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새롭게 창고 등의 시설이 설치되었는지, 주민에 대한 수취 내용이 어떻게 변했는지 등의 점은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이것을 둔창이 되기 전과 내용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고 보고 (세금을 걷기 위한) 과세지구적 둔창 등으로도 부르기도 한다. 또 6세기에는 良田만을 占定하여 중앙으로부터 田令이라는 감독자를 파견하여 외부 농민의 徭役勞動으로 경영하는 둔창이 나타난다. 안칸 원년 10월조의 小墾田, 桜井, 難波屯倉, 12월조의 竹村屯倉 등이 그런 예이다.
[78]
해외의 속국으로서 유래는 오래되었다. 藩屛은 울타리, 가려서 막는다는 뜻이다.
[79]
명주솜이 가늘고 길게 이어진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후세에 언제까지나 비난(非難)이 이어질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80]
백제의 상표문에 응하였다는 뜻이다.
[81]
이름이 없다. 닌켄 6년조에도 보인다. 키시는 카바네(姓)다.
[82]
만약 황자의 명령이 사실이라면 몽둥이의 큰 쪽 끝으로 치는 것과 가는 끝으로 치는 것 중에 어느 쪽이 아프겠냐는 뜻이다. 천황의 勅은 무겁고, 황자의 命은 가벼운 것을 비유한 말이다. 4현 할양 문제 기사는 전해지는 이야기와 같은 전승적인 기록에 의거하였다고 생각되는 바가 많다. 또한 호츠미노 오미 오시야마는 7년 6월조와 같이 『백제본기』에 의거하여 기사를 작성하고 ‘意斯移麻岐彌’라고 注記하였지만 여기에서는 아무 주기가 없으므로, 일본 측의 기록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 같다. 한편 4현이라는 명칭이나 오시야마가 아뢴 말 등은 『백제본기』에 의거한 것으로 보인다. 즉 4현 할양의 사건은 일본의 기록과 『백제본기』 두 기록을 합하여 사건의 경과를 정리해서 12월의 한 기사로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83]
저미(姐彌)는 백제성으로 진모씨(眞牟氏) 혹은 진씨(眞氏)로 보는 견해가 있다. 저미문귀는 게이타이 9년 2월에 백제로 귀국하였다.
[84]
백제의 장군으로 처음 보이는 것은 『일본서기』의
목라근자와 『삼국사기』
근초고왕 대의 막고해(莫古解)가 있다. 이들은 백제의 최고 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좌장(左將) 휘하에서 군사작전 등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사비 시대에는 방方과 군郡에 소속된 지방군이 있었는데, 이 기사에서 두 명의 장군이 동시에 보이는 것으로 보아 방령方令의 휘하에 있는 군장郡將 혹은 군郡의 장관長官인 군장郡將(군령郡令)일 것이다. 『주서(周書)』에서는 군장 3인(덕솔德率)을 두었다고 하였으나, 『翰苑』에서는 군장은 사솔(思率)이 맡는다고 하여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군장은 덕솔이나 사솔이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85]
州利卽次로도 보인다. 게이타이 10년 9월에 다시 왜국에 파견되었다.
[86]
委는 倭와 통용되는 글자이다. 奴國王印에서도 倭를 委로 쓴 예가 보인다.
[87]
호츠미노 오미 오시야마의 押山을 ‘오시야마’라고 읽은 것으로 보인다.
[88]
오경은 『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이며 박사는 이들 경전을 硏究 敎授하는 관인을 말한다. 6세기 전반에 백제는 여러 차례 왜에 오경박사를 교대제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들 오경박사 중에는 당시 남조 양(梁)의 관인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일본의 한자음 중 오음(吳音)의 형성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89]
백제가 왜에 파견한 최초의 오경박사(513)이며, 일정기간이 지난 후 오경박사 漢高安茂와 교체되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양(梁)에 毛詩博士의 파견을 요청한 것이 보이고, 중국 사서에도 양의 講禮博士 陸詡가 백제에 파견된 것이 보인다.
[90]
경상북도
고령에 있던 소국의 이름이다. 후에 대가라(大加羅)로 개칭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지리지의 本波, 『양직공도』의 叛波도 동일한 지명으로 생각되며, 성주로 보는 견해도 있다.
[91]
전라북도 남원·임실 지역에 있던 소국의 이름이다. 『梁職貢圖』에도 上己文이 보이고, 『翰苑』에 인용된 『括地志』에 基汶河가 보인다. 이는
섬진강으로 보이며 기문 역시 섬진강 유역으로 있었던 소국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지역도 가야 문화권에 속한 곳이므로 기문이 백제의 영토였다는 것은 백제의 주장이고, 실제로는 백제가 이 지역을 공격하여 점령한 것으로 보인다. 기문과 관련된 기사들은 고령의 반파국 등 가야의 여러 나라들이 반발하여 백제에 대항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문을 장수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92]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무령왕의 태자이지만, 『
삼국사기』 등에는 보이지 않는다. 후대에 『
속일본기』에서는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가 純陁의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일본서기』에는 그러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타카노노 니이가사는 원래 야마토노 후히토 오토쓰구(和史乙繼)의 딸인데, 야마토노 후히토(和史)는 문필을 담당하는 집안이다.
[93]
백제 태자의 죽음을 훙(薨)이라고 한 것은 『백제본기』의 기사를 인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무령왕릉 묘지석에서 무령왕의 죽음을 붕(崩)이라고 하였으므로, 태자의 죽음은 훙으로 기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서기』 편찬자의 입장이라면 백제 태자의 죽음을 졸(卒)로 표기했을 것이다.
[94]
三輪山
[95]
남자가 여자의 집을 찾아가는 결혼 형태인 처문혼(妻問婚)과 관련된 노래와 의식을 보여주는 기사이다. 『고사기』와 『만엽집』에도 이와 유사한 노래가 실려있다.
[96]
汶得至 이하 辛已奚, 賁巴委佐, 竹汶至는 여기에서만 보인다.
[97]
『일본서기』 긴메이 2년 4월조의 가라加羅 상수위上首位 고전해(古殿奚)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98]
帶沙라고 표기된 寫本도 있어서 滯沙는 오기로 보인다. 음이 섬진강 하류 하동河東의 고명古名인 한다사韓多沙와 통한다. 뒤에도 帶沙로 보이므로 滯를 ‘대’로 읽어둔다.
[99]
屯倉은 大和政權의 직할 지배지 및 그곳에 설치된 관리시설, 창고 등을 일컫는 말이다. 大阪 평야와 같은 농업경영의 요지나 吉備와 筑紫 등의 군사 및 교통상의 거점에 설정되었으며, 곡물과 무기를 비축하는 창고를 세웠다. 농경지는 현지의 농민을 田部로 설정하여 경작토록 하였다. 6세기에 들면, 지방호족들이 지배하던 영역의 일부를 중앙에 바치게 하여 둔창으로 삼는 예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匣布는 佐保로도 표기하며 야마토국(大和國) 添上郡의 지명으로 현재
나라시 佐保川町이며 카스가(春日)와 가까운 곳이다. 佐保川의 상류 일대를 뜻하며, 沙本(『고사기』 가이카 단)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100]
屯倉과 함께 이를 경작하는 田部를 春日皇女의 이름을 딴 사유민으로 설정한 것이다. 이처럼 천황이나 황족의 이름이 후대에 전해지도록 하기 위해서 설정한 부민部民을 명대名代라고 한다. 645년에 이르러 명대 등의 사유민을 폐지한다.
[101]
子呑은 子他, 즉 경상남도 晉州(고명 居陁)로 추정된다.
[102]
滿奚는 섬진강의 서안인 광양으로 추정된다. 섬진강을 따라 남하하는 백제의 공세를 차단하기 위하여 하동-광양, 진주 등에 있던 소국들이 방어선을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103]
무기와 양식을 보관하는 창고.
[104]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고명 推浦縣), 창녕 남지 등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105]
경북 慈仁(古名 奴斯火), 경남 義寧(古名 獐含), 경남 부림(古名 辛爾縣)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106]
경남 三嘉(고명은 三支 및 麻杖), 경남 창녕군 영산면 등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107]
경북 현풍(고명 推良火), 경남 밀양(고명 推火) 등으로 추정되고 있다.
[108]
『일본서기』 게이타이 23년 3월조의 物部伊勢連父根와 동일인물로 보인다.
[109]
거제도를 말한다. 거제도의 서북쪽에 위치한 沙等面 沙等里에 유사한 지명이 보인다. 섬진강 쪽으로 항해하기 위해 지나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사등면에는 신라 신문왕 때 쌓았다고 전하는 沙等城址가 남아 있다.
[110]
섬진강으로 추정
[111]
남해도 등으로 추정되지만 분명하지 않다. 慕羅는 모라 즉 일본어에서 村을 뜻하는 ‘무라’의 어원이며, 우리 말의 ‘마을’이란 뜻이다.
[112]
전부(前部)는 백제 도성을 구획하는 오부(五部) 중 하나이며 오부는 상부上部, 전부前部, 중부中部, 하부下部, 후부後部이다. 부명部名은 오방五方과 혼용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목리木刕는 목협木劦으로도 표기된 경우가 있으나, 이는 목라木羅의 이표기로 생각되므로 목리木刕가 옳다. 목라씨(木羅氏)로는
목라근자,
목협만치木劦滿致(목만지木滿智) 등을 들 수 있다. 갑배甲背는 신분을 나타내는 용어로 갑옷을 입은 자라는 뜻으로 생각된다.
[113]
단양이와 교체된 오경박사이다. 高라는 성은 고구려 계통에도 있지만, 여기서 특히 漢을 冠稱한 것은 그가 중국 계통 사람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114]
여기에서만 보인다. 저미문귀 장군과 마찬가지로 군장(郡將)으로서 외교 사절로 파견된 것으로 보인다. 灼은 백제의 성씨 중 燕 혹은 適·嫡의 이표기로 보기도 한다. 『일본서기』 겐조 3년 시세조에 適莫爾解, 『일본서기』 안칸 원년 5월조에 嫡德孫이 보인다.
[115]
시나노(斯那奴)는 우지, 아히타(阿比多)는 이름 혹은 直(아타이)이라는 카바네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 긴메이 5년 2월조 및 14년 정월과 8월조에 백제 사신으로 斯那奴次酒와 科野次酒가 보이므로 斯那奴는 科野로도 썼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이라고 관칭한 점으로 미루어 왜인으로서 백제 관인으로 활동하는 이른바 왜계 백제관료로 생각된다.
[116]
고구려가 왜에 파견한 최초의 사신이지만, 달리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117]
山城國 乙訓郡을 가리키며, 현재
교토부 나가오카쿄시(長岡京市) 今里 부근으로 추정된다. 게이타이가 이처럼 야마토 지역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 지역으로 천도를 계속한 이유에 대하여 그가 오진의 5세손이 아니라 에치젠 등 나라 분지 외부의 호족 세력이었기 때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초기
야마토 왕권의 수도권은
나라현 일대였고,
교토부 개척은 5세기 중반
부여곤지-
무령왕&
동성왕이 백제계 도래인들을 데리고 대규모 개척을 하기 전까지 개척이 덜 된 지역이라 중심지와 다소 거리가 있었으며, 오히려
오사카부 일대가 고대부터 한반도와의 교역으로 번성해 나라현 일대와 크게 꿇리지 않았다.
[118]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도 무령왕 23년(523) 5월에 왕이 죽으므로(薨) 시호를 무령이라 하였다고 되어 있으며, 무령왕릉 묘지석에서도 계묘년(523) 5월 丙戌朔 7일 壬辰에 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이 죽으므로(崩), 을사년(525) 8월 12일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119]
백제의 제26대 성왕(성명왕(聖明王), 재위:523~554)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諱가 明襛 혹은 明穠이라고 하였다. 무령왕의 아들로 재위 32년에
관산성 전투 과정에서 신라군의 기습을 받아 죽었다.
[120]
나라현 사쿠라이시(櫻井市) 池之內 일대로 생각된다. 天香久山의 북쪽, 櫻井市의 남부 지역으로
진구 황후와
리추 덴노의 磐余稚櫻宮,
세이네이 덴노의 磐余甕栗宮,
요메이 덴노의 磐余池邊雙槻宮 등이 조영된 곳이다. 현재까지 宮의 자취가 확인되지는 않았으나 稚櫻神社 서남쪽 300m에 위치한 낮은 구릉을 磐余玉穗宮 터로 추정하고 있다. 게이타이는 즉위한 지 20년 만에 나라 분지 내부로 들어온 셈이며, 이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121]
『고사기』에는 建內宿禰(
타케우치노 스쿠네)의 후손으로 波多臣 및 淡海臣이 있다고 하였는데, 오후미노 오미(近江臣)는 淡海臣의 이표기로 생각된다. 오후미노 케나노 오미에 관한 내용은 그의 죽음과 관련된 가요 등의 일본 측 전승과 가야, 신라의 인명·지명을 담은 한반도 계통의 자료를 조합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122]
김해의
금관국을 가리킨다. 고령의
반파국이 성장하면서 가라(加羅=금관국)를 남가라(南加羅)로 부른 것으로 생각된다.
[123]
가야 소국 중 하나로 생각되며 경산, 낙동강 동안의 영산 주변, 영산 등으로 추정되고 있다.
[124]
오후미노 케나노 오미가 6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것은 『일본서기』 편찬자의 윤색으로 보인다. 게이타이 23년 3월 시월조에 보이는 것처럼
안라국에 파견된 사신이었던 것이다. 만약 그 정도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다면 이와이(磐井)의 방해나 반란을 얼마든지 진압할 수 있었을 것이고, 또한 신라의 공격으로 곤경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125]
『고사기』 게이타이 단에서는 竺紫君 石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筑後風土記』 逸文에는 磐井의 무덤에 관한 기록이 있고, 현재
후쿠오카현
야메시의 岩戶山古墳이 磐井의 묘로 추정되고 있다.
[126]
큐슈의 활화산인 阿蘇山 주변에 위치한 지역으로 肥國으로도 표기하였다. 율령제에서는 肥前國과 肥後國으로 분리되었다.
[127]
큐슈의 동북부 지역으로, 현재
후쿠오카현의 동부 및
오이타현 전역에 해당한다. 7세기 말에 豊前國과 豊後國이 설치되었다.
[128]
이와이의 난에 대해서는 야마토 정권의 한반도 출병으로 인한 군사적·경제적인 부담에 츠쿠시 지역 수장층이 반발한 것으로 보는 견해를 비롯하여, 야마토 정권의 지방에 대한 직접 지배를 강화하는 데 대한 불만, 큐슈 지역이 야마토 정권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전쟁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이와이의 동향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신라가 이와이과 결탁 혹은 지원하여 야마토 정권과 대립토록 하고 있는 점이다. 신라가 김해 등 가야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가야와 야마토 정권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와이와 제휴했을 개연성이 높다.
[129]
진무 덴노를 섬겼다고 전하는 道臣命을 가리킨다. 그는 오호토모 씨의 시조로 전한다.
[130]
大伴大連金村의 조부이다. 道臣과 室屋이 모두 오호토모 씨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麤鹿火의 발언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다만 오호토모 씨를 대신하여 모노노베 씨가 그 일을 맡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
[131]
筑後國 御井郡으로 현재의
후쿠오카현 미이군(三井郡)이다.
[132]
筑前國 糟屋郡으로 현재의 福岡縣 糟屋郡이다.
[133]
원문은 島曲이다. 이를 ‘미사키’라고 한다.
[134]
帶沙 및 滯沙로도 보인다. 가라加羅의 다사多沙라고 한 것은 임나의 滯沙라고 한 기록과 다른 계통의 사료로 생각된다. 전자가 백제 계통의 사료라면 후자는 가야 계통의 사료로 생각된다.
[135]
『일본서기』 게이타이 9년 2월조의 物部至至連과 동일인물로 생각된다.
[136]
吉士는 수장을 뜻하는 고대어이다. 일본 고대에도 氏名과 카바네로 쓰였다. 氏名으로는 『신찬성씨록』에 吉志氏는 大彦命을 시조로 하는 難波忌村과 同祖라고 하였다. 吉士老는 다른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137]
문서 기록 등을 관리하는 하급 관인
[138]
백제를 뜻한다. 538년에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다.
[139]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법흥왕 9년(522)에 가라의 국왕이 신라에 통혼을 청하므로 신라는
이찬(伊湌)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를 보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신라와 통혼한 가야에 대해서는
반파국으로 보는 설과
금관국으로 보는 설로 나누어져 있으나 반파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140]
1백 명의 종자는 가라를 침략하기 위해 파견한 잘 훈련된 공작원이나 첩자로 보인다.
[141]
각 지역에 신라 왕녀의 종자를 배치한 주체에 대하여 가라왕과 신라왕으로 보는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원문의 착란이 있는 것 같다.
[142]
4월조에 임나왕 己能末多干岐가 보이며, 『이론서기』 편찬자는 阿利斯等과 동일인물로 보고 있다. 아리사등이라는 이름은 스이닌 기 都怒我羅斯等, 비다쓰 기 12년 7월조의 火葦北國造 阿利斯登이 보인다. 아리사등을 位號로, 기능말다를 인명으로 보아 동일인으로 간주하고 가라국왕, 탁순국왕 등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143]
己富里는 ‘고을’의 고대어로 ‘고후리’, ‘고훌’ 등으로 읽혔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자로는 評이라고 표기하였고, 村(무라, 마을)보다 상위의 지방 단위이다. 따라서 己富利知伽는 고을의 수장 혹은 그의 이름으로 생각된다.
[144]
가야 지역의 지명으로 생각되지만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布那牟羅는 5城 속에도 다시 보인다.
[145]
『일본서기』 게이타이 24년 9월조의 5城으로 생각된다.
[146]
이하 세 사람은 『일본서기』 긴메이 2년 4월조, 4년 12월조에도 보인다.
[147]
『일본서기』 부레쓰 6년 10월조에도 백제에서 왜로 파견되었다. 긴메이 2년 4월조의 城方甲背昧奴도 동일인물로 생각된다.
[148]
번국은 『養老令』 公式令에 보이는 용어로 신라와 발해를 지칭하며, 당을 지칭하는 隣國과 대비된다. 8세기에 일본은 관념적으로 번국을 하위로 보고, 隣國은 대등한 관계로 파악하였다. 이 기사 속의 번국도 그러한 관념을 반영한 것이다.
[149]
원문은 大人으로, 대인은 국정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지배층 인물을 말한다. 신라의 경우 간干 혹은 찬飡이란 관등을 가진 관인들이 가야 소국의 왕인 한기旱岐에 대응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나말奈末은 10등 이하의 관위로, 실무 관료라고 할 수 있다.
[150]
달리 보이지 않는다. 나마례奈麻禮는 나마奈麻 및 나말奈末과 마찬가지로 신라 17관등 중 11번째 관등의 이표기이다. 신라어로는 ‘나말’인 것으로 생각되며 나마례奈麻禮의 례禮는 ‘ㄹ’ 받침을 나타내기 위한 글자로, 나마奈麻는 받침을 생략한 형태로 볼 수 있다.
[151]
장군 군윤귀 등도 고당에 올라갈 수 없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장군이라는 지위는 안라국왕 및 안라의 고위 관인인 한기보다 낮았음을 알 수 있다.
[152]
己를 已의 誤記로 보고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인용된 『釋順應傳』의
반파국 9대 왕인
이뇌왕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뇌왕은 신라 비지배(比枝輩)의 딸과 결혼하여
월광태자를 낳았다고 한다.
[153]
경상남도 진해시 웅천동 일대로 생각된다. 웅천 앞의 薺浦는 조선 전기에 왜관이 설치된 곳으로도 유명하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웅천 앞 남산에 웅천왜성이 축조되었다. 웅천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왕래하는 데 편리한 지리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154]
현재의 창원과 마산 지역의 고명이었던 屈自郡과 연관시키는 견해가 있다. 합포만을 중심으로
포상팔국의 한 나라인 골포국(骨浦國)이 있었고, 그 중심이 己叱己利城(현재 城山貝塚으로 추정)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骨浦國이 후에
탁순국으로 국명을 바꾼 것으로 보기도 한다.
[155]
법흥왕의 이름인 원종 혹은 당시 신라의 중신이었던 철부(哲夫)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156]
거칠부(황종荒宗)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57]
한 사람의 인명으로 보고 있으나, 久禮爾師知와 于奈師磨利의 두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158]
백제의 16관등 중 네 번째 관등이다.
[159]
6세기를 대표하는 신라의 장군인
이사부를 가리킨다. 이질부례伊叱夫禮+지智+간기干岐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智는 수장 혹은 존칭으로 사용된 말이다. 간기는 한기旱岐 혹은 한지旱支로도 표기되며 역시 수장을 뜻하는 말이다. 가야 소국의 왕들은 한기라고 불렀다.
[160]
창원 시내에 위치한 城山貝塚으로 생각된다. 城山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성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낮은 독립 구릉으로 방어에 좋은 입지를 가지고 있다. 久斯牟羅와 동일한 곳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161]
낙동강 하구 동안의 多大浦, 혹은 낙동강 하구에 형성된 삼각주로 생각된다.
[162]
『일본서기』 게이타이 24년 9월조에는 河內母樹馬飼首御狩로 보인다.
[163]
金官은 아래에 보이는 須那羅(쇠나라)에 대한 訓表記로 보인다.
금관국의 중심지일 것이다.
[164]
背伐은 背評(能備己富里)과 연관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165]
委陁는 和多의 異表記로 생각된다.
[166]
『속일본기』 天平勝寶 3년 2월 기묘조에 雀部朝臣眞人의 奏狀에 의하면 코세노 워히토는 게이타이와 안칸 양 조정의 대신이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게이타이 23년 9월에 죽었다면 안칸 때 대신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이를 근거로 게이타이 기의 기년을 의심하기도 한다.
[167]
진무 덴노의 시대
[168]
고겐 덴노의 아들로 사도장군四道將軍의 한 사람이다.
[169]
이 詔는 『藝文類聚』 治政部 論定에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윤색한 것이다.
[170]
盟神探湯을 말한다.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위하여 신에게 맹서하고 뜨거운 물 속에 손을 넣는 신판神判을 말한다. 나쁜 일을 한 사람이 손을 데인다고 믿었다.
[171]
韓子는 한반도 주민과 왜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吉備韓子那多利 이외에도 蘇我韓子宿禰의 사례가 있다.
[172]
인명 중의 오모노키母樹는 지명으로 생각된다.
[173]
백제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가 정착한 씨족이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동족인 調曰佐와 調連은 백제 노리사주奴理使主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긴메이 23년 7월조에 調吉士伊企儺가 보인다.
[174]
伊斯枳라는 자연 촌락에 牟羅라는 행정 단위 명칭이 붙어서 만들어진 지명이다. 또한 牟羅의 주변에는 城이 둘러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가야 시대 마을 주변에 土城 등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목책을 둘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175]
背評은 가야 4촌 중 하나인 背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能備己富利라고도 하였는데, 背가 能備, 評이 己富利에 대응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己富利의 음은 ‘고후리’나 ‘코오리’로 ‘고을’의 고대어다. 일본 고대에도 評이라고 표기하고 ‘코오리’라고 하였다.
[176]
久禮山戍와 같은 곳으로 보이며 대구광역시 달성군 서남부 비슬산 서남록, 경남 칠원, 경남 영산, 김해 창녕 사이의 낙동강 북안, 창녕·밀양 사이의 낙동강 동안, 함안 구성리산성 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177]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城山洞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때 문제가 된 지역은 近江毛野臣이 도착한 곳이 熊川이고 창원으로 비정되는 己叱己利城에 들어가 농성하였다고 하였으므로, 김해와 창원 주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178]
이상의 지명은 阿夫羅, 久知波多枳와 같은 자연 촌락, 騰利枳牟羅, 布那牟羅, 牟雌枳牟羅와 같이 자연 촌락에 牟羅가 붙은 지명, 伊斯枳牟羅城, 久禮牟羅城과 같이 모라 다음에 다시 城이 붙은 세 등급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179]
『延喜式』에서는 攝津國 島上郡에 있다고 하였다. 현재 大阪府 茨木市의 茶臼山古墳(墳丘長 227m, 5세기 중엽)이 繼體陵으로 지정되어 있으나, 大阪府 高槻市의 今城塚古墳(墳丘長 190m, 6세기 초)을 繼體陵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大和政權의 王陵은 5세기 후반까지 일관되게 大和川 유역에 조영되었으나, 앞의 두 고분은 왕릉급 고분으로는 처음으로 淀川 유역에 조영된 것이다. 5세기 말부터 6세기 초에는 大和川 유역에 왕릉으로 볼 수 있는 고분이 없다. 능의 위치나 전승으로 보아 繼體는 淀川 유역 및 近江, 尾張, 越前 등의 세력이 옹립한 大王으로 생각된다.
[180]
534년(甲寅)이다. 繼體의 뒤를 이은 안칸 원년을 「是年也, 太歲 甲寅.」이라고 하였다. 반면 『고사기』에는 527년(丁未)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의 본문처럼 게이타이가 재위 25년 신해에 죽었다면, 안칸의 즉위까지 2년 이상의 공백이 생긴다. 한편 『上宮聖德法王帝說』과 『元興寺伽藍緣起』 등은 欽明이 신해년(531)에 즉위한 것으로 기록하였다(재위기간 41년). 그렇다면 안칸과 센카의 즉위 사실을 인정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서로 다른 기록을 근거로 게이타이 사후에 안칸, 센카를 지지하는 尾張目子媛 쪽 세력과 긴메이를 지지하는
타시라카 황녀 쪽 세력이 대립하여 내란 상태에 빠졌으며, 두 왕조가 병립한 것으로 보는 설이 제기되어 있다.
[181]
531년(辛亥)으로 고구려
안장왕 13년, 백제
성왕 9년, 신라
법흥왕 18년에 해당한다.
[182]
안라국(
함안군) 주변으로 생각되나 자세하지 않다.
경상남도
진주시로 보는 설과 함안의 飽德山城으로 보는 설, 함안의 서쪽 지역으로 보는 설 등이 있다.
[183]
『삼국사기』에서는 531년 5월에 고구려 제22대
안장왕이 죽은 것으로 되어 있어서 3월과 차이를 보인다.
[184]
『일본서기』 계보상 제27대 천황(446~536, 재위:531~535)이다. 아버지는 게이타이 덴노고, 어머니는 尾張連草香의 딸 目子媛이다. 勾大兄이라고도 하며 제28대 천황인 宣化天皇의 同母兄이다. 게이타이 덴노가 사망하고 난 뒤 3년 후(2년 공위)에 즉위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안칸, 센카 두 천황과 이복동생인 긴메이 덴노(제29대 천황) 사이에 황위 계승을 둘러싸고 양 조가 대립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이른바 ‘신해辛亥의 난’이다(게이타이 25년 동12월조 참조). 안칸 기는 일본 도처에 屯倉을 설치했다는 기사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185]
大兄은 勾大兄皇子, 즉 安閑天皇을 가리킨다. 그런데 안칸 천황은 계체가 신해년(531)에 죽은 3년 뒤인 갑인년(534)이 즉위 원년이다(원년조 말미에 「이 해는 태세太歲 갑인년(534)이다.」라는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음). 따라서 같은 『일본서기』 내에서도 안칸 즉위 전기와 원년의 기년이 서로 모순된다.
[186]
천황이 가져야 할 권위의 상징이다. 칼과 거울이라고 하였지만 璽符였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187]
긴메이 덴노는 『일본서기』 계보상 제29대 천황(재위:540~571)이다. 아버지는 게이타이, 어머니는
닌켄 덴노의 황녀인
타시라카 황녀이다. 비다쓰, 요메이, 스슌, 스이코 4대 천황의 아버지이다. 게이타이 말년에 이복형인 안칸, 센카와 황위 계승을 둘러싸고 병립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치세 중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해졌으며, 고구려와 교류가 시작되었다. 한편 긴메이 기는 대외 관계 기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점이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게이타이 기와 마찬가지로 많은 부분이 한반도 관계 기사로 메워져 있다. 긴메이 재위 32년간 전체 기사 가운데 국내 기사가 기록된 곳은 14년에 불과하며, 나머지 18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에 반해 대외 관계 기사는 23년에 걸쳐 풍부하게 나오는데, 국내 기사보다 훨씬 자세하고 사실성도 높다.
[188]
닌켄 덴노의 딸이자 안칸 덴노의 황후
[189]
천황이 되기에는 어린 나이라는 의미, 혹은 즉위시 나이를 모른다는 의미이다.
[190]
이건 이전 대왕들 기록에서도 나타나는 특성이기는 하다.
이주갑인상 기년 조정의 기준점으로 쓰기 위해서로 보이나, 백제 기록을 은근슬쩍 넣고 싶었던 사심(?)이 있었을 수도 있다.
[191]
이 점은 긴메이 덴노가 더 심한데, 31년 재위했으면서 국내 기사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고 대부분이 한반도 관련 기사로 도배해놨다. 재위기간이 짧아 기록이 부실하지만 국내 기사로 메워진 안칸, 센카 덴노와 정반대.
[192]
여담으로 오호호도(おほほと)의 "오호"(おほ)는 상대 일본어로 “크다”는 뜻이며, 이는 게이타이 천황의 본명 오호도(をほと)의 "오"(を, 작다)와 대비를 이룬다.
[193]
유랴쿠 천황은 고분 출토로 실존이 확인된 인물이다.
[194]
신라에서는 초기에 박씨가 왕이었다가 데릴사위 형식으로 석씨, 김씨가 왕위를 이어받기도 했다. 이 때문에
고려의 태조
왕건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과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고, 경순왕의 사촌을 왕비로 들여 신라계를 포섭했다.
[195]
3세기 마키무쿠에 거대한 전방후원분 고분군이 처음으로 들어선 점과 그 인근에 왕궁이 있었다고 일본서기가 기록한 점에서 유추할 수 있다.
[196]
즉, '왕조'라 불릴 만한 정치체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197]
실제로 2세기 후반~3세기 초반 일본
야마타이국의 여왕들이었던
히미코와
토요만 하더라도 당시 혼슈에 있던 소국들끼리 연합한 국가의 수장으로 추대된 것으로, 일종의
단군왕검 비슷한 지위에 있으면서 사람들을 통솔했고, 한반도의
고구려와
신라 또한 초기에는 여러 부족들의 연합체 군장국가에서 고대 왕정국가로 발전했다.
[198]
정말 오진 천황의 자손이었더라도 5대손이라면 전근대 기준으로도 가까운 혈족은 아니다. 중국의 유교예법에서도 5대조부터는 따로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만약 게이타이가 오진의 5대손이라면, 타시라카 황녀와는 10촌 관계이다. 이처럼 혈연의 정통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게이타이 천황은 굳이 오진 천황의 '직계'인 타시라카 황녀를 아내로 맞아들였고, 장남이 아니라 타시라카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왕실의 중시조로서 대왕위를 계승했다.
[199]
게다가 타시라카 황녀의 존재 때문에 모계까지 포함하면 더더욱 소급의 여지가 있다.
[200]
《일본서기》에는 게이타이 천황과 긴메이 천황 사이에 안칸, 센카 두 천황이 존재했다.
[201]
이런 차이를 정확한 사료에 근거한 연차로 볼지 사료 자체에 결함이 있다고 봐야 할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202]
만약 안칸 천황의 사망년도가 틀렸다는 견해를 따른다면 신해년을 센카 천황이 죽고 긴메이 천황이 즉위한 해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203]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동성왕은 479년까지도 어려서 왜에 남았다 479년에 귀국한 것으로 추측된다. 시기를 감안하면 동성왕은 왜에서 나고 자란 귀국자녀였을 가능성이 높다.
[204]
동성왕은 꽤 어릴 때 왜에서 백제로 귀국한 것으로 추측되므로, 동성왕의 후손은 동성왕이 죽고 무령왕이 백제왕이 되면서 왜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205]
또한 하니와를 만들었던 공방터로 추정하는 니이케(新池) 유적과도 관련이 깊다고 지적된다.
[206]
게이타이의 나이는 530년대~580년대 사이로 추정되는데, 580년대라 가정해도 507년 당시에는 이미 성인이라 즉위가 가능하다.
[207]
송서
왜5왕 기록에 따르면
부레쓰 덴노와 동일시되는
유랴쿠 덴노는 506년 이후까지 재위했으며, 세이네이-겐조-닌켄은 부레쓰 후기에 동시에 존재한 왕들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학계에서는 6세기 초 유랴쿠 덴노 사후 20년에 가까운 대왕위 공위기가 일어난 것으로 보지만, 타시라카 황후가
닌켄 덴노의 딸임을 고려하면 이들의 기록 중 일부가 섞였을 수도 있다.
[208]
다만 세이네이 덴노는 시호의 '야마토네코' 때문에 가공인물설이 있다.
[209]
실제로 제2왕조에서 부자지간으로 기록된 대부분의 인물들이 실제로는 부자지간이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210]
유랴쿠의 능묘가 타지히에 있다는 기록을 보아 유랴쿠와 관련이 없지는 않은 듯하다.
[211]
사실 여부와 별개로 사서에서 6촌 형제라 기록된 점을 보아 동세대로 추정된다.
[212]
538년에서 502년까지 64년이라는 시간차가 남을 고려하면 오히려 유랴쿠보다 더 나이가 많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