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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림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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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드 왕조 초대 샤
모하마드 카림 칸 잔드
محمد کریم خان زند
파일:이란 카림 칸.png
<colbgcolor=#FFF><colcolor=#fff,#fff> 이름 카림 칸 잔드
محمد کریم خان زند
출생 1705년
사파비 왕조
사망 1779년 3월 1일 (향년 74세)
잔드 왕조 쉬라즈
재위 기간 잔드 왕조 샤[1]
1751년 ~ 1779년 3월 1일 (28년)
후임자 모하마드 알리 칸 잔드
부모 아버지 : 이나크 칸 잔드
어머니 : 바이 아가
종교 이슬람 시아파
페르시아어: محمد کریم خان زند
한국어: 모하메드 카림 칸 잔드
영어: Mohammad Karim Khan Zand
1. 개요2. 생애
2.1. 배경 : 나디르 샤의 암살과 내전2.2. 건국
2.2.1. 알리 마르단 칸 vs 카림 칸2.2.2. 아자드 칸 vs 카림 칸2.2.3. 카림 칸 vs 모하메드 하산 칸
2.3. 이란의 지배자
2.3.1. 바스라 점령 (1775년)
2.4. 카림 칸의 죽음과 잔드 내전
3. 평가

[clearfix]

1. 개요

잔드 왕조의 개국 군주. 로레스탄의 루르인, 그중에서도 잔드 가문 출신이다. 나디르샤 사후에 벌어진 아프샤르 왕조의 내전 당시 서부 이란의 하마단 일대를 중심으로 자립하였다. 다른 루르인 출신 군벌 알리 마르단 칸을 격파하여 이스파한 쉬라즈를 장악하며 두각을 드러내었다. 그후 파슈툰 족의 아자드 칸, 카자르 족의 모하메드 하산 칸을 격파하여 여전히 아프샤르 조가 통치하는 호라산을 제외한 이란을 통일하였다. 그럼에도 거병 당시 샤로 모셨던 사파비 왕공 이스마일 3세를 그대로 두고 바킬 에 라아야 (민중의 대표)만을 칭하였다.

통일 후 카림 칸은 무리한 대외원정 대신 반세기 간의 전란으로 피폐해진 이란의 재건과 민생 안정에 힘썼다. 동시에 영국, 프랑스 상인들과 교류하여 대외무역을 활성화시켰고 페르시아 문학 등 각종 학문을 후원하였다. 그의 치세에 수도 쉬라즈는 아름다운 건축물로 둘러싸인 페르시아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국력을 확보한 카림 칸은 1775년 오스만 제국을 침공하여 이듬해 바스라를 점령하였다. 이후 러시아 제국과 연합하여 오스만 제국을 더욱 압박하려 하였으나, 이미 70대 중반이었던 그는 1779년 병사하였다. 카림 칸의 사후 잔드 왕조는 내분으로 쇠퇴하다가 불과 15년 만에 그가 패배시켰던 카자르 부족장의 아들이자 쉬라즈 궁전에 20년간 유폐되어 있던 아가 모하메드 칸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2. 생애

파일:카림 이란.jpg
나디르샤에 의해 파괴된 파리 성채

본명은 흔하디 흔한 모하메드로, 루르인의 한 갈래인 라크 족의 잔드 가문 출신이다. 혹은 루르인에 동화된 쿠르드인이라고도 한다. 잔드 가문은 하마단 동남쪽 말라여르에서 아라크로 이어지는 협곡의 카마잔과 파리 (피루즈) 일대에 거주하였다. 1705년 파리에서 이나크 칸 잔드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에게는 세 누이와 친남동생 모하메드 사데크 칸, 이복 남동생 자키 칸과 에스칸다르 칸이 있었다. 1720년대, 호타키 왕조의 침공으로 사파비 왕조가 붕괴되자 오스만 제국은 이란 서부를 침공하였다. 잔드 가문은 그에 대항한 현지 세력들 중 하나였고, 그 지도자인 메흐디 칸 잔드는 이란 중부로 나아가려던 오스만 제국군의 진격을 저지하였다. 10여년 후, 호타키 세력을 축출한 나디르샤 자그로스 산맥 일대를 원정하며 '산적떼'로 여긴 루르 인들을 소탕하였다. 우선 바크티야르, 페일리 족을 격파한 그는 다수를 호라산으로 이주시켰다.

다음으로 나디르샤는 잔드 부족장 메흐디 칸과 부하들을 파리 성채 밖으로 유인하여, 후자를 포함한 4백여 부족원들을 학살하였다. 살아남은 이들은 이나크 칸과 동생 부다크 칸을 따라 아비바르드와 다르가즈로 이주하였다. 한편 생존자 중 일원이었던 모하메드는 부친이 임시 지도자가 됨에 따라 카림 베그로 불리게 되었고, 건장한 신체 덕에 나디르샤의 군대에 편입되었다. 다만 30대가 될 때까지 그저 일개 기병이었고, 두드러지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봉급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기에 생계형 도적질을 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10여년간 힘겨운 군생활을 하던 그는 1747년 나디르샤가 암살당한 후 서부 이란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부친의 뒤를 이어 카림 '칸'이 된 그는 1748년 장군 자카리아 칸과 연합하여 경쟁 상대인 바크티야르 부족장 알리 마르단 칸과 대결하였다. 그들은 처음에 승리하였으나, 이내 패배하여 요충지인 골페이간을 알리 마르단 칸에게 내주어야 했다.

2.1. 배경 : 나디르 샤의 암살과 내전

하루는 한 아프간 장교가 마구 장인의 가게에 수리를 위해 맡겨둔 금제 안장을 훔친 일이 있었는데, 다음날 맡긴 안장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된 장교는 장인에게 책임을 물어 그를 처형하려 하였다. 이를 전해들은 카림 베그는 죄책감을 느껴 몰래 안장을 다시 가게에 가져다 놓고는 숨어서 지켜보았다. 없어진 안장이 돌아온 것을 본 장인의 아내는 무릎을 꿇고 마음을 고쳐먹은 이름 모를 도둑에게 신의 은총이 있으라 외치며, 후일 그런 안장 백 개를 가지도록 기도하였다.
ㅡ 카림 칸 , 과거 기병 시절을 회상하며.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잘 드러난다
나디르샤의 사후 아프샤르 왕조는 급속히 분열되었다. 왕족들은 상호 간의 처절한 내전을 벌였고, 아딜 샤와 이스마일 샤에 이어 1749년 샤로흐 칸이 승리한 후에도 불안이 계속되었다. 1750년 초반에는 사파비 왕가의 방계인 미르 사이드 모하메드 마라쉬가 마슈하드를 장악하고 술레이만 2세로 즉위하기도 하였다. 비록 튀르크 군벌의 도움으로 샤로흐는 복위할 수 있었지만, 이미 장님이 된 상태였기에 제대로 통치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란 지역은 각종 군벌들이 득세하는 혼란이 이어졌다. 카림 칸도 그 세력들 중 하나였다.

2.2. 건국

연이은 혼란을 틈타 이란과 아프간 지역 대부분은 군웅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카자르 부족의 모하메드 하산 칸은 재차 자립하였다. 타브리즈를 기반으로 아제르바이잔을 장악한 파슈툰계 아자드 칸, 아프간을 장악한 파슈툰계 아흐마드샤 두라니는 역시 세력을 공고히 다진 터였다. 한편 서부 이란은 루르 민족의 여러 부족장들이 난립하며 제일 혼란스러웠다. 잔드 부족의 카림 칸, 바크티야르 부족의 알리 마르단 칸과 알리 푸투흐 칸이 패권을 두고 경쟁하였다. 이브라힘 샤에 의해 임명된 후 샤로흐에게도 명목상 충성하며 이스파한 총독을 맡고 있던 바크티야르 부족-차하르 랭의 알리 푸투흐 칸이 우세를 선점한 상태였다. 이에 카림 칸과 알리 마르단 칸은 앞다투어 이스파한 진격을 원했는데, 후자가 골페이간 관문을 빼앗은 후 1750년 초엽 이스파한으로 향하였다. 하지만 격되당하자 알리 마르단 칸은 카림 칸과 연합해 2만 대군을 이끌고 재침하였다.

하지만 이스파한에서 아불 푸투흐 칸이 완강히 저항하며 공성전은 장기화 되었다. 결국 세 칸들은 상호 간에 서부 이란을 분할하자는 합의에 이르렀고, 부족한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술탄 호세인의 외손자 아부 토라브를 이스마일 3세를 추대하였다. 명목상으로나마 재건된 사파비 왕조 하에서 알리 마르단 칸은 바킬 에 다울라 (국정 책임자). 카림 칸은 사르다르 (총사령관)에 올랐고 아불 푸투흐 칸은 그대로 이스파한 총독으로 남았다. 하지만 이후 사르다르 카림 칸이 쿠르디스탄 원정에 나선 틈에 알리 마르단 칸이 아불 푸투흐 칸을 살해하며 삼두 체제는 조속히 붕괴되었다. 그후 알리 마르단 칸은 파르스 지방을 약탈하였으나 키스흐트 부족의 무자리 알리에게 퇴로를 차단당하여 쉬라즈에서 월동하였다. 1751년 1월 이스파한으로 돌아온 카림 칸은 하마단, 케르만샤, 카즈빈 등 서부 이란 대부분을 장악하고 알리 마르단 칸과 대립하였다.

2.2.1. 알리 마르단 칸 vs 카림 칸

이스마일 3세와 와지르 자카리야의 지지로 명분상 우위를 확보한 카림 칸에게 전황이 유리해지자, 알리 마르단 칸은 로레스탄 총독 이스마일 칸과 함께 후제스탄으로 후퇴하여 현지 총독인 카압 부족의 셰이크 사드와 동맹하였다. 1752년 봄, 알리 마르단 칸은 케르만샤로 진격하여 반격에 나선 카림 칸을 격파하였다. 기세를 얻은 알리 마르단 칸은 잔드 부족의 거점인 말라예르를 향해 진격하였으나 나하반드 부근에서 벌어진 재대결에서 카림 칸에게 패하였다. 카림 칸은 산중으로 도주한 알리 마르단 칸을 집요하게 추격하였고, 결국 후자는 오스만 제국령 이라크로 망명하였다. 서부의 위협이 제거되자 카림 칸은 재차 이란 북부를 장악한 카자르 부족의 모하메드 하산 칸을 공격했으나 패하고 테헤란으로 후퇴하였다. (1752년 말엽) 한편 바그다드에서 머물던 알리 마르단 칸은 나디르 샤의 외교관이던 무스타파 칸과 동맹하였고, 카림 칸의 북부 원정이 실패한 것에 고무되었다.

1753년 초엽, 알리 마르단 칸은 스스로 타흐마스프 2세의 아들이라 주장하는 이를 데리고 로레스탄으로 향하였다. 파슈툰 군벌 아자드 칸[2]의 지원을 얻어낸 그는 케르만샤를 장악한 후 대동한 '왕자'를 호세인 2세로 즉위시켜 이스마일 3세를 옹립한 카림 칸의 정통성에 도전하였다. 사파비 왕조의 두 샤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아자드 칸 역시 호세인 2세를 인정하며 양측은 이란의 패권을 두고 격돌하였다. 그러나 호세인 2세의 대관식을 치르느라 알리 마르단 칸의 진격은 지연되었고, 더욱이 전자가 사실은 왕자가 아니라 아제르바이잔인 부친과 아르메니아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범인이라는 사실이 폭로되며 병사들이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탈영병들을 그대로 흡수한 카림 칸은 2년간 케르만샤를 포위한 끝에 알리 마르단 칸을 격파하였고, 무스타파 칸을 사로잡았다. 알리 마르단 칸은 호세인 2세와 함께 철수하던 도중 후자를 실명시켜 이라크로 보내버렸다.

2.2.2. 아자드 칸 vs 카림 칸

파일:이란 내전.png
1754년경 이란의 세력 판도. 흑색이 아자드 칸, 청색이 모하메드 하산 칸, 녹갈색이 카림 칸의 영토이다.

1754년 봄, 알리 마르단 칸은 카림 칸의 친척 무함마드 칸과 사촌 셰이크 알리 칸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둘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려 했는데, 그들은 협상에 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알리 마르단 칸과 대면한 그들은 서로 신호를 주고받은 후, 갑자기 돌격하여 단검으로 그를 찔러 살해하고는 도주하였다. 갑자기 지도자를 잃은 알리 마르단 칸의 세력은 와해되었고, 병사들 대부분은 카림 칸에게 귀순하였다. 이에 알리 마르단을 돕기 위해 남하했던 아자드 칸은 타브리즈로 회군하였고, 카림 칸은 추격병을 보내었다. 하지만 아자드 칸은 추격군을 대파하고 카림 칸의 고향인 파리 (현 피루즈, 하마단 근처) 성채마저 점령하였다. 이후 그는 아프샤르 부족장 파스 알리 칸과 연합하여 카림 칸을 격파하고 쉬라즈에 이어 이스파한까지 점령하였다. 카제룬으로 철수한 카림 칸은 재정비한 후 반격에 나서 아자드 칸을 격파하였고 11월 29일 쉬라즈를 수복하였다.

2.2.3. 카림 칸 vs 모하메드 하산 칸

파일:카림 칸 이란 동전.jpg
1756년경 이스파한에서 발행된 카림 칸의 주화

아자드 칸은 이스파한으로 철수하였는데, 이듬해인 1755년 이란 북부의 모하메드 하산 칸이 남하하자 이번에는 그와 대결하며 병력을 소진하였다. 결국 1756년 아자드 칸은 이스파한을 잃었고, 1757년 봄에는 카자르 군에게 우르미아에서 재차 패배하며 본진 타브리즈까지 내주었다. 아자드 칸은 바그다드로 망명했다가 회복 시도가 좌절된 후 조지아로 망명하였다. (1760년) 한편 이란 북부는 물론 아제르바이잔과 이스파한까지 장악한 모하메드 하산 칸은 1758년 카림 칸의 본진인 쉬라즈로 진격하였다. 하지만 그는 점령지에서 호족들의 땅을 몰수해 친척들에게 영지를 나눠주는 무리수를 두었고, 이에 토착 귀족들 대부분은 카림 칸에게 합류하였다. 아자드 칸과 모하메드 하산 칸이 싸우는 약 3년 반의 시간 동안 군대를 재정비한 카림 칸은 쉬라즈 부근에서 카자르 군을 대파하였고, 거침없이 반격에 나선 끝에 1759년 2월 마잔다란을 정복하고 모하메드 하산 칸을 붙잡아 처형하였다.

2.3. 이란의 지배자

파일:이란 쉬라즈 1.jpg
1766-76년에 수도 쉬라즈에 건설된 아르그 카림 칸 (ارگ کریم خان) 내의 궁전

1759년, 카림 칸은 나디르 샤의 사후 12년간 계속되던 이란의 내전을 종식시켰다. 동쪽 호라산의 샤로흐 샤를 제외한 모든 왕공들이 그에게 복속하였다. 1762년에는 조지아에 망명했던 아자드 칸이 항복해 왔다. 그는 이후 쉬라즈의 궁전에서 안락히 갇혀 지내가다 1781년에 사망한 후, 유언에 따라 고향인 카불에 매장된다. 스텝 지방으로 도주했다가 사로잡힌 모하메드 하산 칸의 아들 아가 모하메드와 호세인 쾰리 역시 처형당하는 대신 궁전에 연금되었다. 한편 승리한 후에도 카림 칸은 샤로 등극하지 않고 일전에 모셨던 이스마일 3세를 그대로 둔 채, 바킬 에 라아야 (민중의 대표)[3]만을 칭하며 실권을 장악하는 데에 만족하였다. 조조 카림 칸은 무리하게 호라산 원정에 나서기 보다 피폐해진 이란의 재건에 힘썼다. 그는 감세 정책과 함께 농업을 장려하여 생산력을 높혔고, 영국과의 무역을 증대시켰으며 학자들을 후원하고 수도 쉬라즈에 여러 건축물을 세웠다.

1763년 카림 칸은 쉬라즈에서 멀지 않은 부셰르 항구에 영국 동인도 회사이 상관을 세우도록 허가하였다. 이는 18세기 들어 걸프 지역에 침투하던 네덜란드 상인들을 견제하는 움직임이었는데, 동시에 그는 항구에서 얻은 수익을 현금이 아닌 이란산 제품으로만 가져갈 수 있게 하여 지나친 금의 유출을 방지하였다. 다만 같은해 카림 칸의 이복동생이자 사촌인 자키 칸이 이스파한을 점거하고 주민들을 착취하였다. 이에 카림 칸이 친히 남하하자 자키 칸은 후제스탄으로 도주하여 반란을 일으킨 데즈풀의 총독과 동맹하고 바크티야르 부족을 모아 군대를 조직하였다. 이어진 1년 간의 전쟁과 협상 끝에 자키 칸은 결국 자비를 구하며 항복하였고, 카림 칸은 이를 수용하고 그를 용서하였다. 이름 그대로 관대함 그 자체,,[4] 그리고 1773년 이스마일 3세가 사망하자 카림 칸은 후임 샤를 지목하지 않으며 완전한 군주가 되었고, 이로써 잔드 왕조라 불릴 수 있게 되었다.

파일:이란 카림 칸 잔드.jpg
1773년 타브리즈에서 발행된 주화. 통일 후에 정비된 형태이다

내저에 치중한 잔드 칸은 1763년 반란 진압 이후 10년간 원정을 나서지 않고 민생을 살폈다. 마침내 1773년 문제의 동생 자키 칸이 점차 독립을 넘보던 페르시아 만의 토후국들을 복속시킨 후 오만 제국 호르무즈 섬 점령에 나섰으나 패전하고 말았다. 비슷한 시기, 1747년의 휴전 이후 평화가 유지되던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배경은 이러하다. 이란 최대의 쉬아 성지인 마슈하드가 여전히 아프샤르 조의 수중에 있었기에 카림 칸은 오스만령 이라크에 있는 나자프 카르발라로 향하는 이란의 쉬아 순례객들의 권리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총독을 세습하던 이라크 맘루크 정권의 우마르 파샤는 이란 순례자들로부터 과한 세금을 걷었고, 1773년 역병으로 순례자들이 사망하자 그 유산을 몰수하였다. 이로써 쉬아 이슬람의 보호자라는 종교적 위상에 금이 가게 되자 카림 칸은 무력 대응을 고려하게 되었다.

2.3.1. 바스라 점령 (1775년)

파일:이란 오스마.png
오스만 사절 베흐비 에펜디와 분노하신 카림 칸

이라크의 동쪽 끝인 키르쿠크 일대에는 쿠르드 계열의 바반 토후국이 있었다. 1762년 바반의 술레이만 아부 라일라 파샤가 사망한 후 즉위한 무함마드 파샤는 잔드 조의 아르달란 총독 호스로 칸 보즈로그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그리고 1774년, 긴장이 고조되던 그 때에 우마르 파샤는 바반 토후국의 무함마드 파샤를 폐하고 압돌라 파샤를 옹립하는 내정 간섭을 행하였다. 바반 토후국 문제와 쉬아 순례객의 착취는 1747년 협정의 위반이었고, 호르무즈 원정 실패 후 명예 회복을 원하던 잔드 군부의 요구에 부합하여 카림 칸은 약 30년 만에 대외 원정에 나서기로 결심하였다. 대상은 1769년 영국 동인도 회사의 상관이 설치된 이래로 걸프 무역에 있어 부셰르의 경쟁 도시로 떠오른 바스라였다. 1774-75년 겨울, 알리 모라드 칸과 나자르 알리 칸의 잔드 군대가 쿠르디스탄을 공격해 오스만 주력군을 묶어두는 동안 카림 칸의 동생 사데크 칸 휘하의 3만 대군은 바스라로 진격하였다.

이러한 양동 작전은 성공을 거두었고, 대군의 출현에 놀란 바스라측 아랍 부족 알 문타피크는 사데크 칸의 샤트 알 아랍 도하를 멀찍이서 바라보기만 하였다. 후제스탄의 카압 부족과 부셰르 후국은 각종 물자와 선박을 보내어 지원에 나섰고, 사데크 칸은 별 저항도 없이 바스라를 완전히 포위할 수 있었다. (1775년 4월) 그럼에도 바스라 수비대장 술레이만 아가는 효과적으로 수비에 나섰기에 공성전은 장기화되었다. 도중 영국 동인도 회사의 헨리 무어가 잔드 측 보급 선단을 공격해 샤트 알 아랍을 봉쇄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뭄바이로 철수하였다. 한편 바스라에 왕래하던 많은 아랍 상인들이 전란을 피해 쿠웨이트로 향하며 그곳의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포위가 6개월째 이어지던 10월, 이란과 원수 지간인 오만 함대가 나타나 바스라에 무기와 식량을 전달하였다. 이로써 사기가 높아진 수비대는 다음날, 오만 함대와 함께 반격에 나섰으나 격퇴되었다.

겨울이 다가오자 오만 함대는 더이상의 손실을 방지하고자 무스카트로 회군하였다. 얼마 후 바그다드에서 원군이 파견되었으나 잔드 조와 동맹한 쉬아 아랍 부족인 카자일이 격퇴하였다. 1776년 봄, 1년에 가까운 봉쇄 끝에 바스라 주민들은 기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탈영병이 잇달아 나왔고, 반란 소문까지 돌자 견디지 못한 술레이만 아가는 마침내 항복하였다. (1776년 4월 16일) 한편 오스만 제국은 1769년부터 러시아와 벌인 전쟁에서 대패하여 1774년 6월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을 체결하고 약화된 상태였다. 따라서 잔드 조의 침공에도 역사상 유례가 없이 미온적으로 대처한 것이다. 키르쿠크 전선이 소강 상태를 보이던 1775년 2월, 오스만 조는 사절 베흐비 에펜디를 쉬라즈로 파견하여 협상을 시도했는데, 바스라 함락 소식이 당도하자 사절단은 그대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한편 1775년 자키 칸은 마잔다란의 카자르 잔당을 잔혹히 진압하여 악명을 남겼다.

2.4. 카림 칸의 죽음과 잔드 내전

파일:이란 잔드.jpg
잔드 왕가 가계도

바스라를 얻은 카림 칸은 1778년, 러시아 제국과 동맹을 맺고 함께 오스만령 동부 아나톨리아로 진격하기로 합의하였다. 하지만 그해 말엽부터 아프기 시작한 카림 칸이 6개월 간의 투병 끝에 1779년 3월 1일에 사망하며 오스만 제국에 큰 위협이 되었을 합동 공격은 무산되었다. 사망하고 3일이 지난 후 카림 칸은 현재는 파르스 박물관이 된 나자르 정원에 매장되었다. 카림 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장남 아볼 파스는 20대, 차남 모하메드 알리는 10대였다. 그중 후자를 지지한 자키 칸은 도주에 성공한 사데크 칸을 제외한 전자의 지지자들을 대부분 처형하였다. 그후 모하메드 알리가 샤로 추대되었고, 자키 칸이 실권을 행사하였다. 한편 카림 칸의 죽음을 틈타 연금되어 있던 카자르 왕공 아가 모하메드 칸이 쉬라즈를 탈출하였다. 이에 자키 칸은 조카 알리 모라드 칸을 보내 추격하게 했는데, 후자는 이스파한에 당도한 후 아볼 파스를 지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3. 평가

파일:잔드 조 이란.jpg
쿨하게 물담배 피는 카림 칸과 대신들. 19세기 카자르 시대 작품

이란인들에게 카림 칸은 백성을 사랑한 성군으로 기록되고 있다. 비록 이란의 다른 위대한 군주들과 달리 많은 대외 정복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는 사파비 왕조 이후 안정을 찾지 못하던 이란에 회복할 시간을 주었다. 또한 전란으로 쇠퇴하던 페르시아 문화가 카림 칸의 치세를 거치며 다시 날개를 펴고 보다 더 근대적으로 재정비될 수 있었다. 옥스퍼드 이슬람 사전에서는 카림 칸을 '이슬람 시기 이란에서 가장 인간적이었던 군주의 표상'으로 정의하였다. 특히 그가 수도로 삼았던 쉬라즈에서는 엄청난 위상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카림 칸은 아프샤르 왕조의 나디르 샤의 내치실패와 지나친 정복 전쟁으로 인한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지나친 정복 전쟁을 자제하면서 이란 내부의 내전이 끝난 후 내치에 집중하면서 정국을 안정시켰다.

이란 혁명 이후 이슬람주의 및 반왕정 정책으로 각 도시들에서 옛 군주들의 이름을 딴 거리 이름들이 금기시되던 상황에서도 쉬라즈 주민들은 잔드 왕조가 남긴 카림 칸 잔드 거리와 로프트 알리 칸 잔드 거리의 개명을 거부하는, 소소하지만 유의미한 저항에 나선 바 있다. 현재까지도 카림 칸 잔드 대로는 쉬라즈 중심가를 지난다. 고향인 하마단과 현 수도인 테헤란에도 같은 거리가 있을 정도로 그에 대한 이란인들의 사랑은 유별나다.

[1] 잔드 왕조는 여타 페르시아 왕조들과는 달리 샤한샤를 칭한 적이 없기에 그냥 다. [2] 본래 이스마일 샤를 따랐으나 샤로흐 샤가 집권한 후 아제르바이잔으로 철수, 1751년 7월 조지아를 침공했으나 카헤티 왕국과의 키르흐불라흐 전투에서 패배함 [3] 이것을 대재상인데 현대로 치면 의원내각제 총리에 해당한다. [4] 카림은 아랍어로 관대하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