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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Wanseekonferenz 영어: Wannsee Conference |
1. 개요
반제 회의는 1942년 1월 20일 베를린 근교 반제의 별장에서 국가보안본부 본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주재 하에 슈츠슈타펠 지휘관들과 각 행정부처의 수뇌부들이 모여 진행한 회의다. 이 회의를 통하여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해결책(Endlösung der Judenfrage)의 방향이 절멸(Vernichtung)로 확정됐다.2. 배경
1933년 집권 이후 나치는 뉘른베르크 법과 같은 수단을 통해 지속적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경제/사회적인 압력을 가했다. 이에 따라 1933년 당시의 통계에 따르면 약 40만명 가량이었던 독일 내 유대인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었던 25만명이 나치의 박해를 피해 타국으로 이주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의 독일에서는 유대인의 흔적은 많이 옅어졌다. 제일 많이 망명을 떠난 곳은 미국이며 그 외에도 영국이나 프랑스, 심지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유대인들도 있다.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초반에 독일이 승승장구하면서 유럽 전역을 석권했고 이에 따라 독일이 지배하는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의 수가 다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으며 특히 1941년 6월에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고 전선과 점령지가 크게 확대되면서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서유럽에서는 18세기 후반의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기존 사회에 동화되었던 반면 동유럽에는 유대인의 정체성을 그대로 간직한 사람들이 많았다. 하이드리히는 소련에만 대략 500만명의 유대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이에 1941년 7월 공군 제국원수이자 독일 제3제국의 2인자였던 헤르만 괴링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해결책'을 강구할 것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게 지시했다.
3. 참석자
회의록 중 참석자 명단 부분. |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 게슈타포 초대 국장, 보헤미아 모라비아 총독이다. 1942년 5월 27일 그를 암살하려는 영국의 유인원 작전에 의해 부상을 입고 생존했으나 패혈증에 걸렸고 치료에 실패하여 1942년 6월 4일 사망했다.
- 하인리히 뮐러(Heinrich Müller): 게슈타포 소장 - 종전 후 잠적. 1945년 4월 29일 최종 목격
-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 게슈타포 중령, 유대인 담당 -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의해 체포, 1962년 5월 31일 반인륜범죄 교수형[1]
- 오토 호프만(Otto Hofmann): SS 중장, 인종정주국 담당 - 1945년 체포, 25년형 선고, 6년 복역, 이후 직장생활, 1982년 사망
- 카를 에버하르트 쇤가르트(Karl Eberhard Schöngart): SS 대령, 폴란드 총독부 담당 - 영국 군사법정 '테러 프로그램' 혐의 유죄, 1946년 2월 처형
- 루돌프 랑에(Rudolf Lange): SS 소령, 라트비아 특임대 부사령관 - 1945년 2월 폴란드에서 전사
- 프리드리히 빌헬름 크리칭거(Dr. Friedrich Wilhelm Kritzinger): 총통 비서실 - 1945년 체포, 전범재판에서 나치의 행위를 반성, 석방 후 1947년 사망
- 게르하르트 크롭퍼 박사(Dr. Gerhard Klopfer): 나치당 비서실 - 1945년 체포, 증거부족 석방, 이후 세무사로 활동, 1987년 사망
- 롤란트 프라이슬러 박사(Dr. Roland Freisler): 법무성 차관 - 1945년 2월 베를린 공습으로 사망
- 게오르크 라이프란트 박사(Dr. Georg Leibbrandt): 동유럽 점령지구 국장, 발틱 소련 정치국 담당 - 1945년 체포, 증거부족 석방, 이후 미국 문화원에서 활동, 1982년 사망
- 알프레트 마이어 박사(Dr. Alfred Meyer): 동유럽 점령지구 차관 - 1945년 자살
- 빌헬름 슈투카르트 박사(Dr. Wilhelm Stuckart): 내무성 차관 - 1945년 체포, 1949년 석방, 1953년 암살로 추정되는 고의적인 교통사고로 사망
- 요제프 뷜러 (Dr. Josef Bühler): 폴란드 총독부 차관 - 1945년 체포, '폴란드에 대한 전쟁범죄' 유죄, 1948년 8월 처형
- 에리히 노이만(Erich Neumann): 4개년 경제계획부 차관 - 1945년 체포, 1948년 증거부족 석방, 1948년 사망
-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외무성 차관 -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가담 혐의로 체포, 1945년 심장마비로 사망[2]
4. 진행
1941년 가을 무렵만 하더라도 독소전쟁은 몇 달 안에 독일의 승리로 끝날 것으로 점쳐졌고 이에 따라 하이드리히는 유럽 대륙의 모든 유대인을 소련 변경 지역으로 추방해서 이들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방안을 검토했다.[3] 본디 반제 회의는 1941년 연말에 열릴 계획이었으나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감행한 진주만 공습과 연이은 독일의 대미 선전포고 등이 겹치면서 하이드리히는 회의를 한 달 가량 연기했다. 게다가 같은 시기에 동부전선에서 일어난 모스크바 공방전 이후 독일의 전격적인 승리가 수포로 돌아가면서 하이드리히의 원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고 여기에 아돌프 히틀러의 독촉까지 더해지면서 하이드리히는 유대인들을 집단 학살하기 위한 절멸 수용소를 폴란드에 건설하는 안에 착수했다.1942년 1월 20일 반제에서 열린 친위대와 각 행정부처 수뇌부들의 회의는 사실상 하이드리히의 독무대였다. 하이드리히는 조만간 유대인들의 해외 이주가 하인리히 힘러에 의해 금지될 것을 암시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통한 해외망명 유도는 불완전하며 유대인들의 절멸만이 최종적인 해결책임을 역설했다. 아이히만의 증언에 따르면 하이드리히는 내심 다른 참가자들이 절멸수용소와 같은 학살 프로그램에 거세게 반발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는데 막상 아무도 반발하지 않자 기뻐했다고 한다.
큰 틀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절멸계획이 수립된 가운데 프랑스 혁명 이후 유대인들이 이미 150년 가까이 유럽 사회에 상당 부분 동화됐다는 점이 문제로 부각되었다. 이에 대해 하이드리히는 나름대로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는데 유대인 혼혈의 경우 조부모를 기준으로 조부모 4명 가운데 둘 이상이 유대인이면 ( 뉘른베르크 인종법의 기준에 따르면 소위 1급 혼혈) 유대인으로 취급하며 그 이하면 (소위 2급 혼혈) 독일인으로 취급하는 방안이 제안되었고 덧붙여서 1급 혼혈일지라도 독일인과 결혼했고 아리안족스러운 외모를 가졌다면 박해대상에서 제외할 것을 주장했다고 전해졌으며 독일을 위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서 철십자 훈장을 받은 유대인들도 박해 대상에서 제외할 것이 하이드리히에 의해서 제안되었지만 실제 홀로코스트 집행 과정에서는 그런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조차 신경 안 쓰고 유대인이다 싶으면 무작정 체포해서 그냥 절멸수용소로 이송한 경우가 많았다.
독일의 반유대인 정책에 공공연히 저항하는 동맹국들(특히 루마니아와 헝가리)에 대한 대처법도 반제 회의에서 논의되었다. 특히 호르티 미클로시 섭정이 이끌던 헝가리는 독일의 반유대인 정책에 완강히 저항했고 아돌프 아이히만이 여기에 몹시 분개했다. 결국 호르티 미클로시가 실각한 1944년 여름에야 헝가리에서도 반제 회의에서 결정된 절멸정책이 실시되었다.
5. 여담
- 1947년 미군 조사단에 의해서 독일 외무부에서 발견된 마르틴 루터의 반제 회의록 사본이 현존하는 유일한 회의록이다.
- 반제 회의의 내용을 기록한 문서를 보면 '절멸'과 같은 직접적인 표현 대신에 '최종해결책'과 같은 두루뭉술하기 짝이 없는 표현들을 주로 사용했는데 이는 자신들의 범죄를 최대한 감추기 위한 나치의 노력이었다. 반제 회의의 준비를 담당한 아돌프 아이히만은 전후 재판에서 실제 회의에서는 살해, 절멸과 같은 직접적인 표현들이 언급되었지만 문서상에서는 이러한 표현들을 일부러 모호한 표현으로 포장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나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와 같은 절멸수용소를 이용하는 것 외에 동유럽의 식량 보급을 끊어 버려 서서히 유대인과 슬라브족을 아사시키는 방법도 이용했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약 420만 명의 소련인들이 이로 인해 아사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전쟁 포로였다.
- 반제 회의가 열렸던 별장은 나치 초기에 한 기업가에게 강제로 빼앗은 것이며 문제의 기업가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횡령 혐의로 감옥에 갇혀 있었다가 전쟁이 끝난 직후에 사망했다. 별장 건물 자체는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어서 반제 회의를 다루는 역사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6. 대중매체
- 반제 회의를 다룬 영화로 HBO에서 제작한 컨스피러시(Conspiracy. 2001)가 있다. 케네스 브래너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콜린 퍼스가 빌헬름 슈투카르트, 스탠리 투치가 아돌프 아이히만을 맡았다.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전기 영화인 2017년작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에도 등장한다.
[1]
다만 아이히만은 아들이 떠벌려서 잡힌 것이기 때문에 본인이 아들에게 말하지 않거나 아들이 떠벌리지 않았다면 뮐러처럼 연기처럼 사라진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2]
종교개혁가 루터와 이름만 같다.
[3]
당시 동부점령지관리부(Reichsministerium für die besetzten Ostgebiete) 장관이었던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에 의해 이른바
로젠베르크 계획으로 불리는 동부 점령지 관리안이 제안된 것도 바로 이 회의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