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10 19:19:33

척화비

파일:external/img.newdaily.co.kr/art_1321319632.jpg

1. 개요2. 역사3. 현황
3.1. 현재 남아 있는 곳

1. 개요



조선 고종 때 문호 개방에 부정적이었던 흥선 대원군이 서양과 양인()과의 교류 및 접촉을 배제하고, 서양의 침범에 대비하여 싸우지 아니함은 나라를 파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세웠던 석비().

2. 역사

신미양요가 일어났던 1871년에 처음 건립했는데 비문은 아래와 같다.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매
싸우지 않음은 곧 화친을 주장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
작은 글자로 왼쪽, 또는 뒷면에 이런 내용을 병기했다.
' '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우리 자손 만대에 훈계하노라.
병인년(1866)에 만들고
신미년(1871)에 세우다.
원래는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흥선 대원군의 명령하에 처음 만들었는데, 1871년 신미양요까지 겹치면서 더 이상은 서양 오랑캐들과는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흥선 대원군과 위정척사파 및 유림들의 확고한 입장을 드러내었다.

신미양요 이후 한양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널리 세웠다. 그러나 흥선 대원군이 1882년 청나라로 납치되어 정치에서 실각하고, 명성황후 민씨가 환궁하여 실권을 잡은 뒤 문호 개방을 가속화하면서 일본 공사의 요구에 따라 철거되거나 매장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삼전도비와 마찬가지로 부끄러운 역사의 증거라는 이유로 종종 척화비를 페인트칠 등으로 훼손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3. 현황

똑같은 척화비를 여러 기 만들어 세웠지만, 상당수는 통상 수교 거부정책( 쇄국정책)이 끝난 뒤에 의미를 잃어 폐기 처분되거나 방치, 훼손되었다. 그래도 워낙 많이 만들었다 보니 지금도 전국 각지에 여럿 남아 있다.

3.1. 현재 남아 있는 곳


이외에도 전국 각지에 척화비 30여 개가 남아 지방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