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16:36:37

창평 정치범수용소 학살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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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쿠데타 및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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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시대 사건 주동 세력
1950년 김일성 시대 <colbgcolor=#ffffff,#191919> 신천·재령군 봉기*
(황해도 봉기)
<colbgcolor=#ffffff,#191919> 대한광복회
(김화경 등)
1987년 창평 정치범수용소 학살 사건* 창평 관리소 수감자
1992년 프룬제 군사대학 쿠데타 모의 사건* 프룬제 군사대학 출신 유학생
1995년 김정일 시대 제6군단 쿠데타 모의 사건* 북한군 제6군단
2017년 김정은 시대 김성일 사건* 비밀결사 조직원
2024년 북한 내 반체제 정당조직 발각사건* 비밀결사 조직원
* 성공하지 못한 쿠데타 및 반란 }}}}}}}}}


1. 개요2. 상세3. 기타4. 관련 문서

1. 개요

1987년 함경북도 온성군의 12호 관리소( 창평수용소)[1]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

2. 상세

1987년경 12호 관리소( 창평수용소)의 탄광 주변에서 노역하던 한 정치범이 보위원으로부터 심하게 구타를 당한 게 발단이었다. 당시 주변에는 정치범 200여 명이 있었는데 이 장면을 보고 흥분해 단체로 보위원을 구타해서 죽이고 산 너머의 보위원 사택까지 습격하면서 대규모 폭동으로 번졌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보위원 가족들이 분노한 정치범들에 의해 맞아 죽었다고 한다.

그러자 보위부는 14.5mm 대공 기관총(고사총)[2]과 AK소총을 동원해 수감자 수백에서 수천 명을 학살했다. 사망자 수에 대한 주장이 갈리는데 이 기사에 따르면 당시 수용인원 15,000여 명 중 5,000여 명이 학살당했다는 말도 있고 TV조선 모란봉클럽에 출연한 한 출연자는 "300여 명이 학살당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12호 관리소( 창평수용소)는 1987년 5월 해체되었고 생존한 12호 수용자들은 다른 수용소로 분산되었다.

1987년부터 1994년까지 수용소에서 근무했다가 탈북 안명철에 의해 "비슷한 시기에 대규모 학살사건이 벌어졌다"는 실상이 알려졌고 이후 다른 북한이탈주민들도 비슷한 증언을 보태면서 사실로 굳어졌다.

주성하 기자도 이 사건을 다루었다. 유튜브 영상

3. 기타

  • 같은 해, 정확히는 1987년 5월 1일(노동절)에 평양시에서 노동절(5월 1일) 야간축제에 동원된 일부 군중이 건설 현장[3]에서의 무임금 강제노동에 항의하는 폭동을 일으킨 것에 경찰이 총격을 가해 40여 명의 사상자[4]가 발생했다고 하는데 이는 1987년 8월 남한 언론에서도 보도되었다. #1 #2 #3

4. 관련 문서


[1] 운영 당시 지도는 이 링크에서 볼 수 있다. [2] 14.5×114mm 크기가 보드마카 수준인데 이걸 사람한테 난사하면 사람은 그냥 고깃조각으로 분해된다. 김정은 집권 후 북한에서는 이걸 공개처형용으로 사용한다.(다만 장성택이 고사포로 처형되었다는 설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장성택의 측근인 리룡하 장수길이 고사포로 처형되었다.) [3] 당시 평양에서는 평양 외곽 재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광복거리 같은 시가지를 조성하는 중이었다. [4] 이들 중 10여 명은 사망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