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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르 Győ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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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헝가리 | |||
지역/주 Regio/megye |
서부 트란스다뉴비아 죄르-모숀-쇼프론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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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176.62㎢ | |||
인구 |
2019년 132,038명 (헝가리 6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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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밀도 | 747.58명/㎢ | |||
시간대 | UTC+1 ( 서머타임 준수) | |||
홈페이지 | http://www.gyor.hu/ | |||
시청 | 죄르 대성당 |
세체니 광장 | 펀논헐머 수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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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죄르는 부다페스트 서쪽 도나우 강을 따라 약 121 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 도나우 강과 라버(Rába)강과 랍커(Rábca)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라버강은 독일어로는 라프(Raab)강이라고도 하는데, 죄르의 독일어 발음이 라프(Raab)이기도 하다. 죄르-모숀-쇼프론주의 주도이자 서부 트란스다뉴비아의 행정중심지이다. 부다페스트 외에도 빈과는 123 km, 브라티슬라바와는 80 km정도 떨어져 있어 각국 수도들과 거의 1시간 거리에 위치한 교통 중심지이기도 하다. 헝가리 내부적으로도 서방의 EU 국가들로 진입하는 관문으로 상업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도시이다.2. 역사
고대 로마시대에는 판노니아 속주의 아라보나(Arrabona)라는 이름의 도시가 건설되었다. 아라보나는 제정 초기인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에 걸쳐 형성되었다. 4세기 무렵에 정착지는 버려졌고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는 슬라브, 롬바르드, 아바르, 프랑크인 등 여러 민족이 거쳐 갔다가 대 모라바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서기 900년경 마자르족이 판노니아에 도래하면서 오늘날의 죄르가 형성되었다. 11세기 무렵, 기독교를 공인한 이슈트반 1세는 헝가리 왕국 내에 교구를 설치하였고 죄르에도 교구가 설치됐다. 이 시기에 베네딕토 수도회, 가르멜 수도회와 같은 여러 수도회에서 죄르에 수도원을 건축하였다. 특히 죄르 남동쪽으로 약 20 km정도 떨어진 펀논헐머에는 수도원(Pannonhalmi Bencés Főapátság)이 건립되었고 보헤미아 지방의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이 초빙받아 성직자를 양성함으로써 헝가리의 종교 중심지이자,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13세기 몽골 제국의 유럽 침공 당시에 함락되어 파괴당하기도 했다.
모하치 전투의 참패 이후 오스만 제국에 패배한 헝가리는 삼분할 되었다. 죄르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인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빈과 오스만 헝가리의 부더 사이 절묘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양측간의 전쟁이 발발하면 제일 먼저 박살 나는 도시였고, 여러 차례 주인이 뒤바뀌었다. 오죽하면 오스만 측에서는 죄르를 '불타버린 성읍'이란 뜻의 야느크칼레(Yanık kale)라 부를 정도.
18세기 이후에는 빈과 부다페스트 중간 지점에 위치해있고 도나우 강의 수운을 이용할 수 있다는 지리적 이점을 살려 교역도시로 성장했다. 1809년 대오스트리아 전쟁 당시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맞붙은 라프(죄르의 독일어명) 전투가 벌어졌었다. 당시 전략적 상황은 나폴레옹의 군대가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허를 찔려 패배한 이후인 6월, 헝가리 왕국 영내 죄르(라프) 인근에서 벌어졌다. 나폴레옹의 양자이자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인 외젠 공이 이끄는 프랑스군 3만 9천명과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동생인 요한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3만 5천명이 맞부딪친 결과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은 전체 전력의 30%에 달하는 1만여명의 손실을 입는 통렬한 패배 끝에 프레스부르크 방면으로 물러났다. 프랑스 측의 손실은 대략 10% 수준인 3천여명 수준. 전투 결과 카를 대공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 주력과 대치 중이었던 나폴레옹군은 측면의 항가리 방면에서 가해지는 위협을 상당히 해소할 수 있었다. 곧이어 양측의 주력간에 벌어진 바그람 전투에서도 요한 대공은 전장에 제때 개입하는 데 실패하였다. 프랑스군은 카를 대공의 병력을 포위섬멸하기 위해 병력을 집결 중이었고 이를 감지한 카를 대공이 다급하게 요한 대공에게 합류할 것을 지시했으나, 요한 대공은 전투 당일 아침에나 전장으로 향했다. 요한 대공의 병력이 전장에 도착한 것은 그 다음날 전투가 끝난지 2시간이 지났을 무렵(...)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전차와 전투기 생산 시설 등 군수 공장이 위치하였기 때문에 연합군의 공습을 받기도 했다. 대전 말기에는 헝가리를 가로질러 진격해온 소련군과 독일군 간에 교전이 벌어졌다.
3. 교통
죄르는 철도와 도로가 교차하는 헝가리 서부의 교통 중심지이다. 특히 빈과 부다페스트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어 헝가리 국내의 서유럽 관문 역할을 맡는 지리적 이점을 누리고 있다.[1]주요 철도는 역시 빈과 부다페스트를 잇는 노선이 존재하고 M1, M19 고속도로를 비롯해 여러 국도가 분기한다. M1 고속도로를 통해서는 빈과 부다페스트와 연결되어 있다.
이밖에 교외에 죄르-폐르 공항과 소규모 항만이 있다.
4.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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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19세기에 네오바로크 양식으로 건설되어 죄르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 중 하나이다. 매주 화요일마다 죄르 관광센터에 먼저 예약신청한 경우 관람이 가능하다. 개방시간은 오전 10시에서 오후 2시 -
죄르 대성당
오늘날 죄르 교구의 주교좌 성당으로 11세기 이슈트반 1세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본디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이었지만 몽골 침공 이후에는 고딕 양식으로 증축되었다. 16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거치고 교회첨탑이 벼락을 맞으면서 훼손되었고 바로크 양식과 신 고전양식으로 재건되었다. 이렇게 파괴와 증개축을 반복한 결과 오늘날의 독특한 외관을 구성하고 있는데, 정면 입구는 신고전양식, 남쪽 성당은 고딕양식, 전체적으로는 로마네스크풍으로 여러 건축 양식이 혼재되었다. 여러모로 굴곡진 죄르의 역사를 대변해주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내부는 프레스코화로 꽤 유명하기도 하며 북쪽 통로의 성모 마리아의 성화는 1655년 아일랜드에서 들여온 것으로 알려져있다. 헝가리의 국왕이자 성인인 라슬로 1세[2]의 것으로 전해져 오는 유해 일부가 보관되어 있기도 하다. -
펀논헐머 수도원
996년에 세워진 수도원으로 죄르 시의 영역에 속해있지는 않고 이웃한 펀논헐머에 속해있지만, 대체로 이곳을 방문하려면 죄르를 거쳐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건립 1000주년인 1996년에는 파논하르마의 베네딕토회 수도원과 자연환경[3]이라는 명칭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4] 죄르의 다른 성당이나 건축물과 같이 수도원 또한 외세의 침공 등을 거치면서 여러차례 증개축이 이루어졌고 초기와는 꽤나 다른 모습이 되었다. 수도원 부지 내에서는 신학교 김나지움이 있어 자체적인 사제 양성이 가능하고, 노인복지 등 사회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수도원의 부속건물 중 특히 라슬로 1세가 창설한 고문서관의 경우는 종교서적 뿐 아니라 법학, 약학, 지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다. 이 중에는 라틴어 문헌 외에도 헝가리어 문헌 또한 많이 남아 있어 헝가리어의 기원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관광은 2012년 현재 개인 투어의 입장료는 5,000포린트[5] 단체입장은 헝가리어 투어가 500포린트[6], 영어투어는 800포린트[7] 정문 매표소에서 표를 판매한다. 개인 투어는 관람시간이 8시 30분부터이지만 가이드 투어는 대략 10시부터 시작한다.
파논할마 역에서 수도원까지 이동할만한 대중교통이 없는 게 흠 -
세체니 광장
여러 동상과 조각품, 노천카페 및 옛건물을 활용한 박물관 등이 위치해있다. 죄르 시민의 문화 생활 중심지로써 기능하고 있다.
5. 경제
동구권 붕괴와 민주화 이후에는 죄르는 지리적 이점을 살려 외국인 투자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특히 1993년에 아우디 공장이 건설되어 2011년에는 엔진 188만개, 승용차 3만 9,000대를 생산했고 5천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다. 2019년 현재에는 추가적인 투자로 근로자 수만 1만2천여명에 이르고 독일자동차 업계의 헝가리 투자 중 가장 사업규모가 큰 곳이다. 죄르의 인구가 13만명 수준인데 아우디 공장 하나가 직접 먹여살리는 인구만 해도 도시 인구의1/3에 달하는 셈. 죄르의 아우디 공장이 헝가리 전체 수출의 약 9%를 담당하고 있다. #[8]
헝가리는 2000년대 이후부터 외국기업의 투자로 공장이 들어서고 있는데 이는 헝가리의 내수시장을 노리기보다는, 전체 EU 시장을 노린 생산기지로서의 성격이 매우 강하다. 따라서 헝가리 서부에 위치하여 빈과 부다페스트 중간 지점에 위치한 죄르는 매우 매력적인 투자처로 떠오르고 있는 셈이다. 빈에서 죄르까지 이동시간은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이동시간보다도 더 짧다. 특히 2007년 이후 동유럽 국가들이 솅겐 조약에 참여하여 국경이 개방됨에 따라, 죄르지역의 공장은 서유럽으로 향하는 물류 이동 시간 단축으로 인해 상당한 수준의 비용 삭감 효과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민주화 이후 헝가리는 인구 유출로 인해 전역에서 인구 감소를 겪고 있다. 90년대 이후 부다페스트를 포함한 헝가리의 5대 도시[9]는 10%에서 최대 20% 가까이 도시인구가 감소하는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죄르의 경우 위와 같은 경제발전에 힘입어 인구 순위가 바뀔 정도는 아니지만 인구가 소폭 증가하였다. 죄르가 속한 죄르-모숀-쇼프론 주의 구매력은 부다페스트에 이은 헝가리 내 2위에 달한다. 하지만 이에 따라 헝가리 서부와 동부간에 경제력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는 지적 또한 나오고 있다.
6. 생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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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2019년 지방선거 결과 죄르의 시의회 23석 중 연립여당인 피데츠-기독민주인민당(KDNP)이 16석을 구성하고 있고, 야당연정이 4석을 구성하고 있다. 나머지 3석은 지역정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졸트 보르커이(Zsolt Borkai)가 시장직을 재임중에 있다. 기계체조 선수 출신으로 1988 서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하다. 이후 헝가리 올림픽 위원회를 거쳐 정계에 입문하였다. 2019년 10월 경에는 졸트 보르커이의 성추문 동영상이 공개되어 큰 파문이 일어났다. 당장 비슷한 시기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피데스가 상당한 타격을 입었는데 여기에 보르커이의 성추문이 한몫 기여했다는 평이 많다. 이전 선거에서는 23개 도시중 20개에서 승리했으나 2019년 지방선거에서는 10개 도시에서 패배했고, 무엇보다 피데스가 확보했던 부다페스트의 시장직이 녹색당에 넘어갔다!
-
스포츠
핸드볼이 인기가 많다. 지역연고 팀으로 여성 핸드볼팀인 죄르 ETO KC가 있다. ETO KC는 2007년 이후 여성 EHF[10] 컵에서 한번(2015년)을 제외하고는 4강에 지속적으로 진출하는 강호팀으로 5번의 우승과 3번의 준우승을 거두는 성적을 올리고 있다. 축구 구단으로는 죄르 ETO FC가 있다. 90년대에 포항제철 아톰스에서 잠시 선수생활을 했던 메쇠이 게저가 2018년부터 감독을 맡고 있다.
7. 자매결연도시
한국과는 아직까지 자매 결연 도시가 없다.
[1]
빈-죄르, 부다페스트-죄르 간 이동시간은 대략 한국의
서울-
천안과 비슷한 수준이다.
[2]
재위 기간 1091-1095
[3]
영칭 Millenary Benedictine Abbey of Pannonhalma and its Natural Environment
[4]
등재기준 (iv) (vi)
[5]
한화로 약 2만원
[6]
약 2천원
[7]
약 3,200원
[8]
헝가리의 전체 수출에서 자동차의 비중이 약 20% 정도인데 죄르의 아우디 공장이 헝가리 전체 자동차 수출 비중의 약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9]
데브레첸,
페치,
세게드,
미슈콜츠
[10]
Europe Handball Federation, 유럽핸드볼연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