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18:02:24

존 웨인 게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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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인 게이시
John Wayne G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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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ohn Wayne Gacy.jfif.jpg
본명 존 웨인 게이시
John Wayne Gacy
이명 광대 살인마
the Killer Clown
출생 1942년 3월 17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사망 1994년 5월 10일 (향년 52세)
미국 일리노이주 크레스트힐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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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정당

신체 175cm, 99.7kg
죄목 연쇄살인
강간
사체유기
은닉
종교 가톨릭
형량 사형
배우자 말린 마이어스
Marlynn Myers (1964년 ~ 1969년, 이혼)
캐럴 호프
Carole Hoff (1972년 ~ 1976년, 이혼)
자녀 아들 마이클 게이시 (1966년생)
딸 크리스틴 게이시 (1968년생)[1]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첫 번째 결혼2.3. 수감 생활2.4. 출소 이후2.5. 두 번째 이혼2.6. 지역 사회 자원봉사2.7. 범죄2.8. 체포2.9. 재판
3. 기타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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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KISS MY ASS[2]
I killed 33 times. You're only gonna kill me once. Gacy outsmarted 'em again.
나는 33번 죽였지만 너희는 날 한번밖에 못 죽여, 게이시가 또 이겼네.[3]

미국의 대표적인 연쇄살인범.

평소에 광대 분장을 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봉사를 해 왔기에 '광대 살인마\'라는 별명이 있다. 사교적인 사람으로 KFC 지점이나 건축 인테리어 업체 등을 운영한 데다 평상시에는 이웃들에게도 좋은 사람으로 인식되었으나 실제로는 심각한 성도착증이 있었고 33명에 달하는 젊은 남성과 소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살인마다.

2. 생애

2.1. 초기

파일:john-Wayne-Gacy-600x338.jpg
어린 시절의 게이시
존 웨인 게이시의 조상은 폴란드 덴마크계 혈통이었으며 1942년 미국 시카고에서 자동차 정비공인 아버지 '존 스탠리 게이시'(John Stanley Gacy)와 전업주부인 어머니 '매리언 일레인 로비슨'(Marion Elaine Robison) 사이에서 태어났다.

게이시는 심장과 몸이 약해서 대부분의 운동을 하지 못했고, 알코올 중독자였던 스탠리는 이런 아들을 남자답지 못하다고 여겨 학대했다.[4]

게이시는 엄격한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스탠리는 아들을 얕잡아봤고 마마보이(Mama's Boy)[5]나 여자애같이 약해빠진 녀석[6]이라고 끊임없이 모욕하는 가정폭력을 저질렀다. 게이시의 기억은 자동차 부품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4세의 나이에 벨트를 채찍처럼 사용해 얻어맞거나, 빗자루로 머리를 맞아 기절한 일 등이다.

2.2. 첫 번째 결혼

게이시는 고등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으나 노스웨스턴 비즈니스 칼리지[7] 경영학과에 입학했고 신발회사의 세일즈맨으로 취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게이시는 경영 능력을 인정받아 부장으로 승진했으며, 그 해 '말린 마이어스'(Marlynn Myers)라는 동료 직원과 약혼했다.

결혼 이후 게이시의 장인은 아이오와주 워털루에 있는 3개의 KFC 레스토랑을 구매했다. 게이시는 그곳으로 이사해 1966년부터 장인의 레스토랑 경영을 시작했다. 제법 수익이 좋았는데 연 15,000달러(2018년 기준 115,847 달러)와 더불어 식당의 수익금도 받게 되었다.

게이시는 2명의 자녀를 낳았고 이걸 알게 된 스탠리는 아이오와로 찾아와 자신이 했던 신체적, 정신적 학대를 정중히 사과하며 아들의 능력을 인정하였고, 게이시는 이 시기를 '완벽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역 청년회의소에 참여해 사람들에게 치킨을 나눠줬고 대령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8] 청년 회의소의 부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워털루에서 청년회의소란 스와핑, 마약, 매춘과 관련되어 있었고 게이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여러 차례 어린 소년들만을 상대로 관계를 시도했고 만약 거부한다면 농담, 도덕적 시험 따위였다고 둘러대곤 했다.[9]

그러다 10대 소년들에게 저지른 성폭행이 1968년에 크게 걸려서 10년형을 선고받았는데 불과 18개월 만에 풀려났다. 선고 당일 부인은 이혼을 신청했고 곧 정식으로 이혼하게 됐다.

체포 후 진행된 정신감정에서 게이시는 반사회성 성격장애 사이코패스적 성향을 진단받았다.

2.3. 수감 생활

아나모사 주 소년원에 수감된 이후 게이시는 모범수로 살았다. 그는 1개월 만에 소년원에서 명망을 얻었으며 18개월 이하의 짧은 수감 기간 동안 50명에 불과했던 청년 회의소 교도소 지부 멤버를 650명으로 늘렸다.

또 게이시는 소년원 수감자의 노동 보수를 늘리고 수감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여러 종류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게이시는 소년원의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미니 골프장을 만드는 일도 감독했다.

1969년 12월 25일 아버지 게이시가 간경화로 사망했고 소식을 들은 아들 게이시는 바닥에 쓰러져 심하게 울어 소년원 직원들이 끌어내야 했다. 비록 아버지가 어렸을 적의 본인을 심하게 괴롭혔으나 가족 간의 정은 남아 있었는지 아버지가 죽자 매우 슬퍼했다.[10] 장례를 위한 특별 외출을 신청했으나 기각되었고 투옥으로부터 18개월 뒤인 1970년 6월 18에 가석방되었다.

2.4. 출소 이후

출소 이후 존 웨인 게이시는 어머니의 돈으로 시카고에 집을 마련해 레스토랑 주방 요리사 생활을 했다. 게이시는 지속적인 남색 성향을 보였고 몇 번 정도 기소도 당했지만 더 이상 징역살이는 하지 않았다.

1971년 게이시는 두 딸을 가진 이혼녀 캐롤 호프(Carole Hoff)와 재혼했다. 호프는 존 웨인 게이시의 여동생의 친구였고 재혼 이후 게이시는 요리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요리사를 그만 둔 이후 게이시는 PDM(Painting, Decorating, and Maintenance) 건설이라는 건설회사를 만들었다.[11]이 회사는 처음엔 간판 만들기, 콘크리트 붓기 같은 비교적 간단한 일을 했으나 큰 성장을 이뤄 인테리어, 리모델링, 건물 건축 등의 복잡하고 어려운 일까지 확장했다. 여담으로 레딧에 당시 존 웨인 게이시가 자신의 할아버지 집을 공사했다며 존 웨인 게이시의 명함을 인증한 이도 있다. #

이윽고 PDM 건설의 연 매출 총액은 1970년대 당시 20만 달러를 넘기 시작했고 사장이었던 게이시는 큰 부를 손에 쥐었다.

2.5. 두 번째 이혼

1975년 말 게이시는 그의 아내에게 양성애자라고 커밍아웃했다. 그 해 어버이날에 부부가 성관계를 가졌을 때 게이시는 아내에게 이 이후로 성관계를 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던 바 있었다. 게이시는 밤늦게 일을 나가 아침 일찍 집에 돌아오곤 했다.

이윽고 그의 아내는 게이시가 10대 소년들을 차고에 데려가는 것을 보았고 집 안에서 게이 포르노도 발견했다. 둘은 1976년 3월 상호 합의 하에 이혼했다.

2.6. 지역 사회 자원봉사

노우드에서 게이시와 함께 살던 지역 주민들은 게이시를 존경했다. 그는 1974년부터 매년 열리던 지역 여름축제를 감독했는데 PDM 건설의 힘을 민주당에 무료로 제공하여 정치에도 영향력을 끼쳤고 노우드 도시경관조명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자율방범대 대장으로도 추대되었으며 시카고에서 매년 행해지는 폴란드 제헌절 퍼레이드의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게이시는 1975년부터 체포되기까지 햇수로 4년간 이 퍼레이드의 리더를 맡았고 이로 인해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영부인인 로절린 카터와도 사진을 찍었다.

지역 봉사협회에 가입한 이후 게이시는 졸리 조커(Jolly Joker)라는 광대 클럽에 대해 알게 되었다. 광대 클럽의 회원들은 병원에 있는 어린이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공연을 하고 기금 모금 행사 및 퍼레이드에 참여하는 일을 했었는데 1975년 말 게이시는 광대 클럽에 들어가 의상을 디자인하고 광대 메이크업을 하는 방법을 배웠다. " Pogo the Clown"과 "Patches the Clown"이라는 자신만의 퍼포먼스 캐릭터를 만들었다.

일부 전문 광대들은 게이시의 광대 분장에서 입가 가장자리에 그려진 날카로운 모서리가 전문적인 광대들이 사용하는 둥근 테두리와 다르므로 아이들이 두려워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게이시는 여러 지역 파티, 민주당 행사, 아동 병원 등에 포고와 패치의 광대 분장을 하고 참석했으며 자신의 광대복을 입고 "The Good Luck Lounge"라는 자선행사에 여러 번 참여해 자선 행사에서 모금활동과 기부를 진행했다.

2.7. 범죄

게이시는 한창 사업이 번창하던 즈음부터 다시 범행을 시작했다. 문제는 단순한 추행이나 강간만 해서는 감옥에 간다는 것을 깨닫고 피해자를 확인사살하여 입을 막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물론 발각 시 100% 사형이지만 살인범은 사형이 무서워서 살인을 주저하지는 않으니 사형 제도가 아무런 억제 수단이 되지 못했다. 게이시는 1972년 첫 살인을 저지른 후 1974년(추정)과 1975년에 두 번의 살인을 저질렀다. 그의 대부분의 살해 행각은 그가 이혼 후 독거하던 1976년부터 1978년 사이에 일어났다.

처음에는 회사의 직원이 타겟이었으나 점점 대담해져서 길가는 소년들을 몰래 납치해서 강간 후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게이시는 그렇게 남성 33여 명을 살해했다.[12] 가족들은 자신의 아들이 실종되었다며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단순 가출로 판단하고 수사에 나서지 않았고 이는 피해자들이 늘어나는 결과를 낳았다.

게이시는 연쇄살인을 위해 매우 교활한 수법을 사용했다. 게이시가 살던 시카고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사회 분위기가 보수적인지라 청소년들이 동성애 성향을 지녔다는 것이 발각되면 집에서 쫓겨나거나 가족들의 핍박을 견디지 못해 가출하기 십상이었는데 게이시는 이처럼 사회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소년들을 주요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그런 소년들이 모이는 장소를 찾아다니며 돈을 건네주고 매춘을 제안하거나 마약이나 일자리 등을 주겠다고 꼬드겼다. 의지할 데 없었던 소년들이 게이시의 말을 믿고 그의 집까지 따라가면 게이시는 우선 그들에게 수갑을 채운 후[13] 목에 밧줄을 걸고 뒤에서 이를 조이고 당겨서 교살했다. 설사 동성애 성향이 없는 소년들이라도 돈과 일자리를 주겠다고 꼬드겨서 살해하기도 했다.

2.8. 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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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시의 범행이 막을 내리게 된 것은 1978년 12월 13일에 로버트 피스트(Robert Piest)[14] 살해 혐의로 체포되면서다. 지역의 약국에서 일하던 피스트는 알바가 끝나고 데리러 온 엄마 엘리자베스 피스트에게 "어떤 건설회사 사장이 자신에게 일자리를 제안했다"며 문을 나선 뒤 실종[15]되었는데 그 사장이 바로 게이시였다. 게이시가 수사 협조를 거부하자 경찰은 영장을 발부받아 가택수색을 했다. 가택수색 결과 2개의 운전면허증과 반지들, 각종 마약과 포르노 잡지들과 게이 관련 서적이 발견되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피스트 살해 혐의를 입증할 수 없었다. 경찰은 마약 소지 혐의로 기소한 뒤 수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게이시의 집에서 피스트의 알바 동료가 끊은 약국 영수증이 발견[16]되었으며 이전에 실종된 사람[17]의 차가 게이시의 소유로 된 것이다. 결국 게이시는 피스트를 살해하고 시체를 강에 버렸다고 자백했다. 경찰은 게이시가 진술한 강을 수색하면서 끔찍한 악취를 풍기고 있던 집의 지하[18]를 발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29구의 백골화된 시신이 발굴되었다.[19]

결국 1978년 12월 22일, 존 웨인 게이시는 자신이 1972년부터 살인을 시작하여 6년간 33명을 죽였다고 자백하였다.

물론 이전에 게이시가 체포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경찰은 실종된 피해자들을 단순 가출로 처리하거나 살아남은 피해자의 증언을 믿지 않는 등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다.[20] 또 당시 게이시는 마을에서 명망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경찰은 게이시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나마 로버트 피스트 실종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에게 피스트와 같은 학교를 다니던 아들이 있어서 그 부모의 말을 믿고 수사를 시작했기 때문에 마침내 게이시의 범행이 수면 위로 드러날 수 있었다.

게이시가 밝힌 범행 수법은 희생자들을 납치하든 유인하든 집으로 데려와 수갑을 채운 후 입에 옷가지들을 집어넣어 비명을 못 지르게 한 다음 강간과 고문을 하고 나서 살해하는 것이었다. 살해한 이유를 묻자 의외의 대답이 나왔는데 살인을 즐겨서 그 많은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피해자가 나중에 고발할까봐 죽였다는 것이다. 상술했듯이 게이시는 심각한 성도착증을 지닌 탓에 피해자들을 자기 욕구 충족 대상으로 여긴 것이다.[21] 당연히 걸리면 사형이지만 애초에 재산범죄도 아니고 살인, 성폭력 등을 저지르는 자들이 사형 제도를 의식하여 범행을 자제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경찰은 게이시의 진술을 토대로 그의 자택 마루 밑 크롤 스페이스와 다른 소유지에서 29구의 시체를 찾아냈으며 근처의 강에서도 시체 4구를 찾아냈다. 게이시는 시체를 강에 버린 이유에 대해 집에 더이상 시신을 묻을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리하여 경찰이 찾아낸 시체는 최종적으로 33구에 달하며 게이시는 그들 모두를 살해한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물론 33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에게 내려질 처벌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1980년 재판 끝에 법정 최고형인 사형이 확정되었다.

2.9. 재판

여타 살인범들과 달리 의외로 게이시는 재판에 돌입하자 사법거래도 없이 모든 혐의를 순순히 인정하고 수사에도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담당 수사관에 따르면 게이시가 범죄 사실을 털어놓는 동안 그의 얼굴에는 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 게이시는 자신의 범행을 자랑이라도 되는 양 거침없이 떠들어대서 심문하던 경찰들을 경악케 만들었다. 자기 딴에는 이렇게 최대한 협조적인 자세를 보여서 사형만큼은 면할 속셈이었나 본데, 오히려 그 과정에서 양심과 도덕관념이 완벽하게 결여된 본성을 드러낸 탓에 혐오감과 괘씸죄만 더 산 꼴이었다. 이후 재판이 예상 외로 불리하게 돌아가자, 급기야 게이시는 자신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선처를 구했다. 변호인은 심신미약을 입증하기 위해 증인으로 게이시에게 강간과 고문을 당했다가 버려진 제프리 리그널[22]을 내세웠다. 실제로 리그널은 게이시에게 당한 끔찍한 범행으로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었다. 물론 이는 피고인이 이 정도로 자기 통제력이 전혀 없는 미친 자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한 것이었으나, 배심원들은 이 정도로는 게이시의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고 판단하였고 오히려 리그널에게 저지른 범죄를 자백한 것으로 간주되어 형이 가중되었다. 결국 1980년 사형이 선고된다. 후에 게이시는 영장 발부가 유효하지 않았으며, 자신은 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한 자백까지 번복하며 항소했지만 항소법원과 대법원은 사형이 합당하다고 판단하여 기각했다.[23]

게이시의 사형은 3심 공판이 마무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후인 1994년 5월 10일에 약물주사형으로 집행되었다. 게이시는 마지막 식사로 튀긴 새우 12마리, KFC 오리지널 치킨 한 마리, 감자튀김, 딸기 500g, 제로 콜라를 먹어치웠다. 유언은 'KISS MY ASS'.[24] 하지만 넷플릭스에서 2022년 4월 공개한 존 웨인 게이시 관련 다큐멘터리에서는, 당시 사형 현장에 입회한 경찰관이 출연해 게이시는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존 웨인 게이시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눈을 뜬 채 사망했다"고 한다. 게이시의 사형 집행 중에 약물이 응고되어 체내에 주입되지 않아서 튜브를 교체하는 등 소동이 있었고, 이 때문에 다른 사형수들에 비해 매우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사형 폐지론자들을 중심으로 약간의 비난 여론이 있었지만, 그를 사형시킨 집행관은 "게이시는 자기가 죽인 사람들보다 훨씬 빨리 죽었다"라고 일축했다. 물론 그 이후 비난 여론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3. 기타

  • 사건 당시 게이시를 체포하고 심문했던 경찰들은 물론 그의 주변인들까지 공통적으로 그의 성격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그것은 바로 강렬한 자기애와 오만함이었다. 어릴 적에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학대를 받았던 기억 때문인지 그는 그 자신의 가치를 끊임없이 입증하는 데 집착했으며 그것이 그를 사업가이자 사회활동가의 길로 이끌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항상 상대방을 고압적으로 휘두르며 자신이 주도권을 잡으려는 경향이 강했다. 이처럼 자기애가 강하다 보니 오만함이 하늘을 찔러서 스스로에 대한 자랑과 과시가 심했다.[25] 그가 정착한 곳마다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려고 한 것도 자기애 충족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 자기애가 강했던 게이시는 그만큼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했다. 그가 여러 무고한 소년과 청년들을 자신의 성적 쾌락을 위해 무참히 살해하고도 심문 과정에서 도리어 그들이 자신을 먼저 공격해서 반격했더니 상대가 죽어 버렸다거나 자신은 그저 장난으로 수갑을 채웠을 뿐인데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까닭 없이 죽어 있었다고 둘러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죄책감이라는 것이 없었으며 그저 자기 자신만을 사랑했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해한 소년들을 그저 "매춘부(prostitute)"라고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었고 심지어 심문 중에 자신이 피해자들에게 돈을 주고 집으로 데려와 죽인 것은 다른 사람들이 쇼핑몰에서 물건을 사서 집으로 가져와 마음대로 처분한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소리까지 했다. 이런 언행은 게이시가 애초부터 피해자들을 자신과 동등한 사람이 아닌 쓰고 버리는 물건 정도로 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존 웨인 게이시가 장기간에 걸쳐 수십 명의 희생자를 냈음에도 범죄행각이 쉽게 드러나지 않은 것은 당시 동성애자들에 대한 미국 사회의 편견과 억압 또한 크게 한 몫을 했다. 게이시의 연쇄살인 희생자 중에는 동성애 성향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가족이나 주변인들에게 핍박을 받아 길거리로 내몰려 방황하거나 가출한 청소년들이 많았다. 이런 사람들이 죽어나가든 사라져 버리든 미국 사회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심지어 게이시에게 거의 살해당할 뻔했다가 간신히 빠져나간 생존자들도 있어서 게이시를 신고하기도 했으나 경찰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때 경찰이 손을 썼더라면 희생자들을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게이시에게 살해당한 청소년들이 모두 동성애자라는 루머가 퍼지는 바람에 유족들의 신원 확인이 늦어지는 문제점도 있었다. 실상 게이시의 희생자 중에는 동성애자가 아닌 사람들도 여럿 있음에도 그랬다. 몇몇 희생자들은 여친이나 전 여친이 있기도 한 이성애자였다.
  • 시신이 발견된 피해자 33명 중 5명의 신원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2011년 신원 확인 수사가 다시 시작되어 DNA 대조법으로 35년 만에 윌리엄 조지 번디를, 41년 만에 지미 하켄슨의 신원을 확인하는 성과가 있었지만 아직 나머지 5명의 신원은 오리무중인 상태다.[26] 그러다 2021년 하반기에 프랜시스 알렉산더라는 피해자의 신원이 밝혀졌다. # 이외의 피해자들[27]의 정보는 이곳에도 있다. 링크
  • 사형수로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는 글과 그림에 집중해 1만 통이 넘는 편지글을 썼고 2천 점 이상의 유화(油畫)를 완성했다. 게이시가 가장 좋아한 그림의 소재는 광대의 초상이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디즈니의 일곱 난쟁이나 찰스 맨슨, 제프리 다머 등 자신과 비슷비슷한 부류의 흉악 범죄자들이나 연쇄살인자들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글과 그림 모두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능력[28]뿐 아니라 예술적 재능도 충분했기에 기본 윤리 의식만 있었다면 나름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자가 욕망을 이기지 못해 자신과 수십 명에 달하는 타인의 인생을 모두 파멸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의 그림은 대부분 피해자 유족들이 구입하여 불태워 버렸으나[29] 소수의 작품은 살아남아 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러 명사들이 그 그림에 서명[30]을 했고 그들은 게이시의 연쇄살인에 대해 알지 못하고 일반 화가인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악행 때문에 좋은 그림도 외면받아 묻혀 버린 셈.
    파일:external/news.chosun.com/2007062000030_0.jpg

    게이시의 그림

    이후 존 웨인 게이시의 유가족에게 사형 집행 사실을 통보한 뒤 시신의 인수 여부를 물었고 유가족이 수용하자마자 즉시 인도하였으며 소재는 비밀로 부쳐졌다고 한다. 물론 시신 모욕은 미국에서도 범죄이므로 공식적인 소재만 비밀이지[31] 당연히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처리되었다. 일단 뇌는 연구소에 기증되었으며[32] 시신은 장례 이후 가족 묘지 혹은 가족들만 아는 모종의 장소에 안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33][34]
  • 어떻게 보면 어린 시절엔 아버지 'J. 스탠리 게이시'에게 이유없는 가정폭력 아동 학대를 당했던 가해자가 된 피해자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그의 과거의 불우한 환경만으로 어른이 된 후 저지른 범행들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런 아버지의 폭력성으로 인해 자식에게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과 그의 아버지의 책임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 현재까지도 미국에 돌고 있는 이른바 살인 광대 괴담의 원형을 만든 인물. 매체에 등장하는 통통한 살인 광대 컨셉을 가진 캐릭터들은 거의 대부분 존 웨인 게이시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35] 만화 스폰에 등장하는 광대 악마인 클라운(Clown)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보이며[36] 카우보이 비밥에도 게이시를 모티브로 한듯한 통푸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며 유희왕에서도 역시 그를 모티브로 한 듯한 머더 서커스란 몬스터 카드가 발매되었다.
  •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의 동성애 성향으로 고통받았고 또 그 때문에 천인공노할 범죄까지 저질렀지만 정작 그 자신은 동성애자들을 지극히 혐오했고 그런 발언을 서슴치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성적 지향은 양성애자이므로 동성애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동성애자들은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쓰레기들이기 때문에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떠벌리고 다녔다. 경찰의 심문과정에서 녹음된 그의 육성 증언에서 그의 이와 같은 뒤틀린 성적 사상을 엿볼 수 있다.
  • 당시 전례가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인지라 사건이 발생했던 미국 전역은 물론이고 전세계 뉴스에도 앞다투어 보도되었을 정도로 그 임팩트가 매우 컸다. 당연히 당시 한국 일간지에도 소개되었고, 94년 사형 집행 당시에도 보도되었다. 사건 발생 당시 한국 신문 기사[37]

4. 대중매체에서

'광대 살인마'라는 이명과 존이 생전 대중들 앞에선 자선행위를 일삼는 이중 인생을 살아왔기에 문화적으로 그를 모티브로 한 것들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 조커가 나오는 실사 영화들에 간간히 묘사되는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초반 은행강도 씬에서 강도들이 쓴 마스크는 존 웨인 게이시가 쓰고 다녔던 마스크와 흡사하며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에선 주인공 아서 플렉이 공연하는 소극장 이름이 Pogo인데 이는 존 웨인 게이시의 별명 중 하나였던 "Pogo the Clown"를 떠올리게 한다.
  • 미국 범죄 수사 드라마 CSI : NY에 등장하는 연쇄 살인마 쉐인 케이시의 이름은 이 인물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쪽의 살인 컨셉은 예술 & 수수께끼에 기반한 키워드라 존 웨인 게이시와는 전혀 다르다.
  • 2022년 6월 15일자 한글판 휴먼버그대학교에서도 존 웨인 게이시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나왔다. #
  • 미국 드라마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에는 이 자를 모티브로 한 광대 살인마가 등장한다. 사이코패스 쾌락 살인마에 불과했던 게이시에 비하면 그나마 좀 사연이 있는 불쌍한 인물인 편이다.
  • 다머[38] 10화에 등장한다. 영국 배우 도미닉 버지스가 분했으며 마지막 희생자였던 로버트 피스트의 살해 장면이 묘사된다. 이후 사형 집행을 앞두고 인터뷰를 하는걸 다머가 본 후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다. 사형 장면도 묘사되는데 침대에 묶여서 약물주사를 맞기 직전 모두 내 엉덩이에 입이나 맞추시지라고 빈정거리고 사형에 처해진다. 같은 순간에 다머는 세례를 받고, 스카버는 다머의 악행에 치를 떤다.
  • 워블에 등장하는 메인 빌런 집단인 그리모어의 7인의 장로 중 대놓고 존 웨인 게이시를 모티브로 한 '게이시'가 등장한다. 시대마다 껍질과 이름이 바뀌고 있으며 과거에는 흡혈귀 블라드 체페슈, 피로 피부를 미용한 바토리 에르체베트, 중세 유럽에서는 흑사병의 기사, 19세기에는 잭 더 리퍼로 불렸다. 작중에서는 대놓고 그 모티브를 드러내서 같은 7인의 장로인 잭도 역겹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모티브가 이 범죄자이다 보니 소년 강간 욕구도 보이고 있다.
  • 사우스 파크에서 유명세를 떨친 또 다른 연쇄살인범인 테드 번디, 제프리 다머와 함께 등장한다. 지옥에 거주하는 세 살인범들이 사탄의 페파리 케이크를 호텔로 배달하라는 임무를 맡고 이승에서 사람을 죽이고 신체를 훼손하는 짓을 전생처럼 서슴치 않게 저지른다. 결국 케이크 만든답시고 서로 언쟁을 벌이다가 흉기로 자르고 찌르면서 사이좋게 다시 지옥으로 가면서 실패.
  • DIR EN GREY 의 싱글 The Devil in me 에서 John wayne gacy 를 다루었다.


[1] 둘 다 첫번째 부인 말린 마이어스 소생이다. [2] 직역하면 '내 엉덩이에 뽀뽀해'이지만, 정확히는 '엿이나 먹어라'는 뜻의 비속어로 그의 유언으로 알려져 있으나 게이시의 사형 집행을 참관했던 쿡 카운티의 형사 그레그 비도(Greg Bedoe)는 그가 말없이 죽었다며 미디어가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라고 증언했다. [3] 그가 죽기 전 녹음된 인터뷰 중. 뒤에 이어지는 그의 본성이 드러나는 웃음소리가 대단히 섬뜩하다. # [4] 실제로 1960년대 이전의 미국은 동시기의 한국과 비교해 봐도 한국보다 결코 덜하지 않을 정도로 가부장적인 나라였다. [5] 주로 스탠리의 가정폭력을 아내가 말릴 때, 폭력을 멈춘 상태에서 웨인한테 이 말을 사용해 모욕했다고 한다. [6] Sissy(여자아이 같은 남자아이의 비속어), dumb and stupid(dumb과 stupid 둘 다 '멍청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비속어다.) 등등. [7] 노스웨스턴 대학교와는 다르다. [8] 할랜드 샌더스한테서 따 온 듯하다. 마침 경영하던 레스토랑도 KFC였고. [9] 당시 18세 소년이었던 어느 피해자의 증언에 따르면 친구들과 함께 게이시의 집에 들렸다가 술을 많이 마신 탓에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게이시는 처음에는 피해자와 지하실에서 포켓볼을 치며 놀다가 포르노 영화를 보여주더니 자신에게 성행위를 해줄 것을 요구하며 머리에 총을 들이댔다고 한다. 놀란 피해자가 거부하자 게이시는 그냥 시험이었다고 둘러댔다. 그러나 피해자가 잠을 자는 동안에 그의 방에 들어와 목에 나이프를 들이대며 같은 소리를 했고 피해자가 눈물을 흘리며 거부하자 실실 웃어대며 이번에도 농담이었다고 둘러댔다고 한다. [10] 오로지 아버지에게 인정받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일했는데 감옥에 들어가면서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존 웨인 게이시로서는 힘들게 얻은 아버지의 신뢰를 잃고 이를 영영 회복할 수 없다는 사실에 크게 절망한 듯 싶다. [11] 회사 자체는 현재도 운영중인 것으로 보인다. [12] 후에 시신이 발견된 피해자 33명의 목록 [13] 아이들이 순순히 수갑을 차지 않을 경우에는 자신이 스스로 "수갑 마술"을 보여주었다. 스스로 수갑을 채우고 푸는 마술 트릭을 보여준 후 "너도 배우면 할 수 있다"며 꼬드겨서 저항을 받지 않고 수갑을 채운 것이다. [14] 1963년생으로 당시 15세였다. [15] 이 날은 엘리자베스 피스트의 46번째 생일이었다. 피스트 가족은 막내가 집으로 돌아오면 다같이 엄마의 생일 축하를 할 예정이었다. [16] 실종 당일 피스트의 알바 동료 킴 바이어스는 피스트에게 겉옷을 빌려 입었으며 약국에서 필름을 인화한 뒤 영수증을 무심코 겉옷 주머니에 넣었다. 게이시는 수사 협조에 거부하며 피스트를 만난 적도 없다고 했는데, 피스트의 겉옷 주머니에 있던 영수증이 게이시의 집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피스트가 게이시의 집에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것. [17] 존 시크( John Alan Szyc) [18] 크롤스페이스(일명: 크롤링 공간) [19] 더 이상 묻을 공간이 없어 나머지 4구의 시신은 강에 버렸다고 한다. [20] 게이시가 피해자들의 시신을 완벽하게 숨겼기 때문에 경찰이 실종된 피해자가 살해되었다고 추측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21] 그러니까 피해자를 사람으로 안 봤다는 거다. [22] 리그널은 게이시에게서 풀려난 후 경찰에 신고했지만, 상술된 대로 경찰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고 수사도 하지 않는 직무유기를 행했다. 리그널은 1979년 게이시에게 당한 피해에 대한 회고록을 썼으며, 2000년 에이즈로 사망했다. [23] 게이시가 사형되기 한 달 전의 인터뷰를 보면 그가 사형 판결에 굉장히 억울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4] "웃기고들 있네" 또는 " X까"로 해석된다. 게이시의 재판을 담당한 변호인은 자기를 죽여 봤자 희생자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25] 존 웨인 게이시를 감시한 경찰들이나 주변인들의 말에 따르면 게이시는 한적한 동네 도로에서 운전을 할 때조차 마치 드리프트 선수라도 되는 것마냥 정신나간 속도로 차를 몰며 곡예를 펼치는 등 자신의 운전 실력을 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26] 윌리엄 번디와 지미 하켄슨은 가족 및 친인척이 수사에 협조해서 신원 확인이 40년만에 된 것이다. [27] 신원이 밝혀진 자들. [28] 고교 중퇴, 교도소 수감 등 인생의 2차례 큰 위기에서 모두 사업에 성공하여 재기하고 가정까지 이룬 것만 봐도 능력에 대해서는 설명할 필요가 없다. [29] 공식적으로 게이시가 죽은 교도소 앞에서 화형식까지 치렀다니 게이시에 대한 원한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30] 저명한 야구선수들은 물론이고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마저 낚였다. [31] 당연히 경찰과 장례업자는 알고 있겠지만 가족이 밝히지 말라고 하고 장례를 정상적으로 치렀으면 밝히지 않을 것이다. [32] 일반인의 뇌와 다른 점이 없어서 놀랐다고 연구자들이 증언하기도 했다. [33] 실제로 서양에서는 사형을 당하거나 무기징역을 살던 중 감옥에서 죽은 가족은 시신을 인수해서 가족묘지에 매장하더라도 가문의 불명예로 여겨 어디가 그의 묘지인지 알 수 없게 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도 일제에 처형된 독립운동가나, 정치적인 이유로 죽거나 한 사람이 아니라 흉악범이 사형 혹은 감옥에서 병들어 죽었으면 가족들이 시신 인수를 하기는 하나 선산에 매장하고 직계끼리만 위치를 공유하여 시기 맞춰서 간단한 제사만 지내 주는 수준으로 제3자는 거기 있는 무덤이 누구 건지도 모르는 경우가 보통이다. 물론 무연고자일 경우 정상적인 장례, 매장 및 제사가 이뤄진다. [34] 실제로 에드워드 게인은 죽은 뒤 무덤의 위치가 알려지자 본인의 비석이 반달리즘을 이어 도난까지 당했었다. [35] 살인 광대 컨셉의 캐릭터들은 거의 대부분이 DC 코믹스의 조커 혹은 이 존 웨인 게이시를 모티브로 하고 있는데 조커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의 경우 광대의 이미지보단 미치광이 살인마의 특징이 더 두드러지는 한편 존 웨인 게이시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는 광대라는 이미지 자체에 초점을 두는 경우가 많다. [36] 연쇄살인마라는 특징은 빌리 킨케이드가 가져간 것으로 보인다. [37] 그 당시 한국은 외국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사건들은 잘 보도하지 않았다. 보도될 정도면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38] 마찬가지로 80-90년대 위스콘신주 밀워키 일대와 미 전역을 공포와 충격에 빠뜨렸던 연쇄살인범 제프리 다머에 대한 인생사를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다. 여담으로 존과 제프리 모두 같은 1994년에 죽었다. 차이점은 존은 사형당한 반면 제프리는 동료 재소자에게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