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 |
호 | 구심(求心) |
출생 | 1882년 3월 3일 |
경기도
양주군 남면 황방리 (現 경기도 여주시 남면 황방리) |
|
사망 | 1937년 3월 3일 (향년 55세) |
묘소 | 경기도 양주시 남면 황방리 |
본관 | 함안 조씨 |
가족 |
아버지 조정규, 어머니 박필양 남동생 조소앙, 조용주, 조용한, 조용원 여동생 조용제 |
학력 |
관립불어학교 (졸업) 관립법률학교 (졸업)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5대 의장을 지냈던 독립유공자 조소앙은 그의 친동생이다.
2. 생애
1882년 3월 3일 경기도 양주군 남면 황방리(現 경기도 양주시 남면 황방리)에서 생육신 중 1명인 어계(漁溪) 조려(趙旅)의 16대손인 아버지 조정규(趙禎奎)와 어머니 박필양(朴必陽) 사이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구한말 시기에 관립불어학교를 거쳐 관립법률학교를 졸업했다.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독일어 등에 능통하여 외교관이 되었으며, 1901년 대한제국의 주독일·주프랑스 공사관 참사관을 지냈다. 1903년 귀국하여 경기도 죽산, 이천, 마전 3곳에서 군수를 지내기도 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한 후 경학사에 참가하여 본격적인 항일 활동에 투신했다.
1913년 미국으로 건너가 박용만, 안창호 등과 함께 하와이에서 조선독립단과 한인협회를 조직하였으며, 1920년 7월 하와이 지방 총회에서 지단장에 선출된 이후 기관지 『태평양시사』를 발행했다. 그리고 자신의 친동생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 조소앙과도 긴밀한 연락을 유지하며 외교 및 홍보 활동을 전개했다. 1921년 『신한민보』를 창간해서 언론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 생활 20여 년동안 넥타이 한 개만을 가지고 활동할 만큼 검소한 독신 생활을 해왔다고 한다.
1932년 4월 조소앙으로부터 중한동맹회 조직의 선언 및 입회 용지의 송달 임무를 받고 하와이 재류 동포들을 권유하여 가입시켰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유대를 갖고 독립운동에 힘썼다. 같은 해 10월 더 적극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 미국 기선 프레지던트 후우버호를 타고 상하이로 가던 중 고베에 기항하였다가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33년 1월 경성부로 압송되어 1933년 4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여기서 그는 대한 사람으로 왜인 사람 앞에 서는 것이 부끄럽다며 얼굴에 먹물을 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형카드로 남아있는 사진이 바로 그 모습이다. 결국 복역 중 병을 얻어 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그 후 옥고의 여독으로 1937년 3월 3일 향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