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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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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군사개혁
2.1. 보병2.2. 포병2.3. 기병2.4. 군수2.5. 의무2.6. 해군
3. 보병장비
3.1. 피복류3.2. 소총3.3. 권총3.4. 기관총3.5. 산탄총3.6. 폭발물
4. 중화기
4.1. 박격포4.2. 야포
5. 탑승물
5.1. 차량5.2. 군함5.3. 항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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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대체역사 웹소설.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에 묘사되는 전술, 무기체계를 서술한다.

2. 군사개혁

주인공 김시혁이 미래인인 덕에 당대 모든 군대들이 겪은 실책과 시행착오들을 겪지 않으며, 정답만을 선택해 개혁을 추진중이다.

당시 조선은 임오군란으로 기존 오군영 체제 및 신식군으로 육성되고 있던 별기군이 붕괴되고 청, 일본과 같은 외세의 간섭으로 군사 육성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군 조직과 전통, 문화가 사라져버린 상태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새로운 전술과 문화를 만들어내는데 걸림돌이 없어지는 효과로 나타났다.

2.1. 보병

의화단 사건 개입을 앞두고 강습 보병대대라는 중앙군 직할대를 만들어 현대전에 적합한 새로운 보병전술과 편제를 등장시켰다.

밀집하면 강력한 현대 무기의 살상력에 쉽게 표적이 되어 희생되기 쉽기에, 전술제대의 최소단위를 소대까지 낮추고, 분대급 이하에서 각개전투가 가능하게 만들어 적의 화력으로부터, 은/엄폐/침투기동이 용이하게 개편하는 한편, 전술단위의 소형화로 인해 수반되는 화력의 약화는 경기관총, 수류탄, 척탄통 같은 이전같으면 포병 등의 타 병과에서나 운용했을 장비를 보병 소부대에 편제시켜 보완, 치명성을 극대화[1] 하는 방향을 추구, 강습보병대대에 현대식 보병전술을 먼저 습득시킨 뒤 점진적으로 전군에 확대하여[2] 대한제국을 세계에서 제일 진보된 보병 및 보병전술 보유국으로 탈바꿈시켰으며, 타국에 비해 20년 가까이 새로운 방향성을 조기에 완성한 것 만으로 충분히 현대 군사사에 길이 회자될 업적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1차대전 참전이 결정되고 협상국의 군비 지원이 가시화되며 꾸준히 현대화가 가속화되고 있으며, 이를테면 보병대대와 중대에는 박격포가 공용화기로 편제되기 시작하였고, 1부에서는 강습부대나 기병연대, 근위사단같은 중앙군 부대만이 중대에 6정을 간신히 편제시키던 경기관총이 원정군 보병분대에서는 분대당 1정, 원정군 강습분대에는 분대당 2정까지 보급량이 늘었으며 보병분대의 구조 역시 현대화되었다.[3][4]

2.2. 포병

군사개혁 과정에서 주퇴복좌기를 최초로 적용시킨 현대식 야포인 프랑스제 Mle1897을 대량으로 도입, 1부 완결시점에서 육군은 교육부대 1개 포대와 10개 포병대대[5], 해군은 러시아제 152밀리 해안포 6문과 프랑스제 야포 1개대대를 운용하는 현대식 대규모 현대식 포병전력을 운용하고 있다. 해당 야포가 곡사포가 아닌 평사포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형지물을 최대한 활용하여 관측반, 야전 통신수단과 연계된 간접사격을 구사하고 있는데, 야전포병은 표적을 직접 조준하여 사격하던것이 일반적이던 당대 기준으로는 상당히 진보된 포병전술을 구사하는 셈이다.[6] 또한 일본군의 야포들이 주퇴복좌기가 없어서 발사속도가 느린 점을 이용해, 높은 연사력과 수준높은 전술로 부족한 수량을 만회, 대포병전에서 상당한 위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심지어 강도높은 훈련을 통해 기초적인 TOT사격까지 가능한 수준에 올랐다. 대신 이런 연사력 높은 야포의 대량운용에는 필연적으로 대량의 포탄소모가 수반되며, 이는 실제로 1부 러일전쟁 시점에서 한국의 열악한 교통 인프라와 맞물려 전쟁수행에 장애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2.3. 기병

1차 대전 시기까진 현역이고, 본격적인 전차 차량화보병이 등장하기 전 유의미한 기동전력으로써 잘 써먹는다. 대한제국은 베이스도 거의 없다보니 개선 작업이 오히려 쉽게 이루어졌고, 1차 친위 쿠데타 당시 들어온 러시아 카자크들에게 기병 훈련을 맡겼으며 이후 러시아에서도 군마를 수입하고 하코트를 기병 고문으로 기용하며 제대로 된 기병대를 갖추게 된다.

2.4. 군수

군대는 보급 없이 전진도 후퇴도 할 수 없고, 김시혁 역시 미래에서 군수를 소홀히하다 일어난 참사들을 목격했으며 남만주 영향권을 확보한 이후 확장을 해나가며 지속적인 무력충돌을 겪여야 했던 만큼 발언권이 강해질 수 밖에 없기도 했다. 작품 속 대한제국군에서 군수의 발언권은 매우 강력한 편으로, 장작림과의 전쟁에서도 탄약 보급이 충분히 이루어지겠냐는 질문에 대해 군수참모가 가능하다고 답하고 나서야 작전을 시작하였고. 1차대전 동부전선 원정군을 편성할때, 김시혁이 물자들을 모스크바에 두자고 하자 군수국장인 민영찬이 아예 정색까지 하면서 지적했는데, 극동전쟁의 영웅이자 원정군 최고사령관인 그에게 대놓고 반대가 가능할 정도로 발언권이 강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2.5. 의무

의무는 군수와 마찬가지로 남만주 영향권을 확보한 이후 확장을 해나가며 지속적인 무력충돌을 겪는 과정에서 발언권이 강해졌다. 원정군 편성중에도 러시아의 질낮은 수질, 풍토병에 대해 여러 해결책을 내놓는 것으로 부각되기 시작했으며, 김시혁의 미래지식을 이용해 머큐로크롬[7]의 조기발견, 현대식 지혈대의 도입 등으로 사상자를 극적으로 낮추는데 성공했다. 해당 의료품들은 협상국도 사용하며 큰 효과를 발하고 있다.

2.6. 해군

원역사에서는 대충 구색만 갖췄던 해군이 여기서는 프랑스로부터 구축함 6척을 도입하고 관련 교육도 제대로 받은 나름 싸울수 있는 해군이 되었다. 본래는 추가로 어뢰정 6척도 갖춰질 예정이었으나 해군 양성을 견제하려는 일본의 순양함 판매라는 미끼에 넘어가 무산되었고 결국 그 자리는 자칭(?) 순양함인 양무호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결과 양무호를 뺀 나머지 배들은 러일전쟁에서도 제대로 싸우며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양무호는 전쟁 막바지까지 후방에 틀어박혀있다가 의외로 원산 상륙작전에서 활약해서 독자들 사이에선 군밤의 혜안(...)이라 불리기도 하며 일본 역사상 최악의 실수라고도 칭해지기도 했다. 전후에는 보로디노급 전함까지 운용하며 성장중.[8]

3. 보병장비

3.1. 피복류

  • 전투복
    1914년 장작림 토벌 시점까진 카키색. 1차 대전 시기 녹색으로 전환된다.
  • 아드리안 철모
    1차 대전 참전을 앞둔 시점에 박격포와 함께 도입된 프랑스제 철모. 고종은 조선 초에 쓰던 첨주형 투구와 닮았고 보다 저렴하단 이유로 영국제 브로디 철모를 밀었으나 방호 성능, 중량, 착용감, 편의성 등 모든 부분에서 아드리안이 우월했기에 김시혁은 이쪽으로 강행한다.

3.2. 소총

  • 게베어 1871
    청나라에 요청해 1000정을 받아온 것이 동학농민운동에서 친위영의 무장으로 사용된다.
  • 모신나강
    러시아 제국제 볼트액션 소총. 생산량의 일부를 러시아에게 넘겨주는 조건으로 조병창을 건설하여 생산하기 시작해 러일전쟁기에는 대한제국군의 제식소총이 되었다. 러시아의 한자식 표기 중 하나인 아라사에서 따온 것인지 아식 보총이라 불리는데, 현실 한국에서 모신나강에 붙인 별명과 같다. 한국군 체형에는 너무 길고, 무겁다는 단점과 소총수의 실제 교전거리는 길어도 200미터 내외라는 극동전쟁에서 얻어진 전훈, 산이 많은 한반도 지형, 기동전을 선호하는 한국군 교리등을 고려해 1910년부터 짧고 가벼운 개량형이 M91/10이란 제식명을 받고 개발되어 1915년 시점에 이미 북부 지역 부대들은 교체를 마쳤다.
  • 30년식 소총
    일본군의 제식소총. 군제 개혁 와중에 고종이 미쓰이의 로비에 넘어가는 바람에 계획에 없던 3만 정이 도입되었다.[9] 극동전쟁을 앞두고 방어가 불가능한 남부 지역의 향교, 서원, 사찰 등지에 은닉해 두었다 현지 유격대에 보급되었다. 별도로 극동전쟁 중에 노획, 무장해제 과정에서 20만 정에 육박하는 수량을 확보해 종전 후 한동안 1.5선 장비로 쓰이다 민간에 불하된다.
    이후 1차대전기에도 뜬금없이 대한제국 내에서 생산중이라며 등장하는데, 극동전쟁 당시 한국 해군의 통상파괴전에 시달린 일본이 소총과 소총탄을 현지에서 제작, 보급할 요량으로 용산에 30년식 소총, 6.5mm탄 제작 설비와 숙련공을 들여와 조병창을 구축했지만 대한제국군의 반격으로 패주하는 과정에서 고스란히 한국 손에 넘겨주게 된다. 뜻하지 않게 생산설비를 획득한 한국은 일본 다음으로 일본제 소총을 많이 생산하는 나라가 된다. 군에서는 모신나강에게 밀려났으나 여전히 치안이 불안한 남만주 정착촌 등 민간에서는 인기가 좋아 미쓰이 사와 협력해 인력과 기계 설비를 보충하고 매월 10만발 가량의 6.5mm 탄환을 생산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 M16 강습소총/강습기병총[10]
    다가오는 1차대전과 그 이후를 걱정하던 김시혁이 기관단총 돌격소총을 보급하고자 했으나 서로의 문제로[11] 인해 고민한 끝에 민간 기업인 홍익 정밀과 개연성 그 자체 존 브라우닝, 현지 협조를 위한 외국 총기 기업 윈체스터 사 섭외를 통해 제품화에 성공했으며, 사용하는 탄환도 보틀넥 구조, 스피쳐 탄두를 적용하는등 개선되었다.
    이후 강습보병대에 선지급되어 1914년 장작림 토벌에서 실전성을 인정받았고 1차 대전 참전이 확정된 1915년 예정보다 빨리 대량 생산에 돌입한다. 본래는 1916년부터 본격 생산될 예정이었기에 군 제식명은 M16. 홍익정밀에서 붙인 상품명은 최초 독자모델 총기라는 의미에서 M1. 한국군 외에 미군과 프랑스군이 소량 도입해 운용중이며 프랑스군 운용분을 노획한 독일군도 이 총의 존재와 성능을 확인한다. 독일군 역시 이 총을 매우 높이 평가해 그대로 카피해서 만들 것이냐 vs 자국 기술력으로 새로 만들것이냐를 두고 내부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 아브토마트
    강습소총이 러시아군에 소개되고 좋은 평가를 받아 개발과 양산이 탄력을 받게 되었고 쇼샤의 활약으로 더욱 필요성은 늘었으나 열악한 러시아 제국의 공업능력으로 한국에서 양산해줄 수 있을지 요청했다. 그러나 한국에 위치한 조병창들은 강습소총 및 러시아 지원용 소총 양산도 밀려서 불가능했고 이에 수소문 하던중 김시혁의 장인이 소유한 공장에 제작에 필요한 설비도 있겠다, 사용탄인 6.5mm까지 제작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고 이쪽에 부탁해 양산을 시작한다.

3.3. 권총

  • 콜트 뉴 서비스
    대한제국군의 제식 권총. 작중 물주 포지션인 최씨 어르신의 회사 "홍익정밀"에서 라이센스 생산을 맡는다.
    의화단 사건을 대비하여 강습보병대대 전원에게 지급한 것을 시작으로 꾸준히 지급되고 있다.
  • C96
    작중 홍범도가 가진 이질적으로 생긴 권총이라며 흘러가듯 묘사된다.

3.4. 기관총

  • 맥심 기관총
    대한제국군은 이를 지방군에는 여단에 6정씩, 중앙군(근위사단, 강습보병연대, 기병연대)에는 대대당 6정씩 배치하였다. 1900년대 초 당시 타국군은 여단, 사단에나 1~2정이 배치되는게 평균임을 감안하면 매우 많이 편제된 것이며, 이를 통해 침략한 일본군을 갈아버린다. 사용 탄환은 모신나강과 동일한 7.62x54mmR.
  • 마드센 경기관총
    세계 최초로 실용화 된 경기관총. 러시아와 공동으로 구매하여 극동전쟁기에는 강습보병연대와 기병연대에서 중대에 6정씩 보급했으며 1차대전기엔 권총손잡이가 붙고 소염기도 장착하는 등 개선된 버전을 동부전선 원정군을 기준으로 일반 보병 분대마다 1정, 강습보병에겐 분대당 2정을 지급하고 있다.

3.5. 산탄총

  • 윈체스터 M1897
    의화단 사건 때 공사관 경비대가 사용. 시가지에서 강력한 근접화력으로 의화단과 폭도들을 막아내거나 길을 뚫는데 쓰였다. 깨알같은 슬램파이어 묘사가 백미.
  • Auto-5
    반자동 산탄총. 제식화기는 아니지만 징발한 총포상에서 가져온 오토-5들이 백병전, 시가전에서 활약하는 모습이 종종 등장한다. 김시혁이 M16 개발을 위해 장인을 찾았을 때 언급된 바에 의하면 포수와 순검들에게 인기만점으로 민간 총포시장에선 가장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3.6. 폭발물

  • 수류탄
    보병싸움의 핵심이 되는 폭발물. 마찰점화식 신관을 이용한다. 의화단 토벌 때 사용한 다이너마이트가 불편함이 많다는 지적 아래 개발되었다. 고종이 즉위 40주년 기념 열병식에 쓸 공포탄을 제작한다며 포공국 예산을 모조리 끌어가는 바람에 하마터면 엎어질 뻔 했던 걸 김시혁이 국내외 인맥을 총동원해 민간 기업에서 개발에 성공했다. 극동전쟁에서 이를 노획한 일본군도 손쉽게 복제해서 사용한다.
  • 척탄통
    유탄발사기와 수형 박격포 사이에 걸쳐있는 지원화기. 위의 수류탄을 탄약으로 하며 수류탄이 개발될 때 함께 개발된다. 원 역사에서 일본군이 사용한 것을 김시혁이 훨씬 빠르게 도입한 것으로 수류탄과 함께 보병의 화력 강화가 능동적인 전술 행동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극동전쟁 종전 이후 일본군도 똑같이 복제해서 사용한다.
  • 관형폭약
    1차대전에서 철조망 지대를 돌파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첫 출현.
  • 도약지뢰
    위력은 덜해도 제조 자체는 1차 대전 기술 수준으로 충분히 가능해 본래 역사보다 훨씬 일찍 등장한다. 1935년은 되야 나올 물건을 양산해서 하필이면 독일군에게 사용하고 있다.

4. 중화기

4.1. 박격포

2부 프롤로그에서 박격포의 시안이 등장했으나, 대량 생산은 아직이라며 잠깐 언급된다. 1차 대전 참전을 목전에 두고 철모, 방독면 등과 함께 대량 생산에 착수한다. 구경은 60mm와 80mm이며 제식명은 불명.

4.2. 야포

  • 1897년식 75mm 야포
    프랑스제 75mm 야포. 세계 최초로 주퇴복좌기를 장착한 야포로 극동전쟁에서 대한제국군의 주력 야포로 활약한다. 극동전쟁 이후 개량을 거쳐 18도에 불과했던 포각이 45도까지 늘어나며 부족했던 사거리와 전술 유연성을 챙겼다.
  • 1913년식 105mm 야포
    프랑스의 슈나이더 사가 제작한 105mm 야포. 슈나이더 사는 원래 프랑스군 도입을 노렸으나 프랑스군이 이를 도입하지 않자 새로운 고객으로 대한제국을 골랐으며, 마침 화력보국[13] 이라는 이름하에 건실한 포병을 건설하고자 하는 의지와 맞물려 도입은 물론 아예 공장을 차려 라이센스 생산까지 하게 되었다.원 역사와 큰 차이가 있는데,원역에선 평사포로 개발되었지만 작중의 1913년식 105mm 야포는 곡사포로 개발되었다는 점이다. 곡사포의 지형 극복능력을 고평가하는 한국군 포병의 입김이 제작간에 반영되어 생긴 차이점인 듯 하다.
    특이하게도 김시혁 본인이 초도도입량을 2분의 1로 줄이는데 찬성하였는데 대한제국군이 이를 재대로 운용할 교리, 기반[14]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 이후 이 야포도 결국 프랑스군에 도입되긴 한다. 정확히 말한다면 독일군의 대공격으로 포병 자원이 슬슬 딸리던 프랑스가 마침 대한제국에 포장도 안뜯은 105mm 야포들이 있는 것을 보고 급하게 비밀리에[15] 도입해 온 것.
  • 31년식 75mm 야포
    일본군의 주력 야포. 주퇴복좌기가 없는 구식화포로 분당 2발이라는 느린 발사속도를 가졌으며, 이러한 스펙 차이로 인해 포병싸움에서 밀리게 된다.

5. 탑승물

5.1. 차량

  • 오스틴 장갑차
    공세를 앞둔 브루실로프가 러시아군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주목한 병기 중 하나. 푸틸로프 - 가포드 장갑차와 함께 장갑대대를 구성한다. 독일에 전적으로 의존한 대가로 차량도, 정비 물자도 극히 부족했던 러시아군에서 귀하디 귀한 병기로 본래 43개 소대로 쪼개져 운용했으나 소규모 제대로는 성과를 낼 수 없다는 판단하에 12개 대대로 재편되어 브루실로프 손에 쥐어쥔다. 브루실로프가 직접 한국군 지휘부를 방문해 코벨 방면 공세를 부탁할 때 2개 대대가 넘겨져 대한군의 예비대로 편성된다.

    빌려 쓴 것이긴 하나 대한군이 최초로 운용하는 기갑전력이다.

5.2. 군함

  • 아퀘부스급 구축함
    프랑스제 구축함. 배수량 323톤의, 현대 기준으로는 대형 고속정 수준의 체급이지만 어엿한 정식 군함. 주포는 러시아 해군과 규격을 통일해 75밀리로 강화했으며 외에도 47밀리 속사포 6문과 15인치 어뢰발사관 2문으로 무장하고 있다. 1900년대 초반 시점에서는 상당한 고속인 최대시속 28노트로 항해가 가능하다. 극동전쟁 직전까지 6척이 도입되어 전쟁 기간 내내 활약했다.
  • 보로디노급 전함
    러시아제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본디 대한제국 해군은 33함대라는 함대구축 계획을 세워 방호순양함을 우선 도입해 거함 운용법을 익히며 서서히 전함을 도입하려 했으나 생각보다 빠르게 도입이 되었다. 그 과정이 기가 막힌데 일본이 극동 전쟁 중 자신들이 격침시킨 제1태평양함대의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4척을 건져서 수리해 쓰자 러시아에서 전함 반환을 요구하며 충돌이 있었는데 이때 고종이 끼어들어 저 전함 4척의 일본행을 묵인하는 대신 러시아가 보로디노급 전함 1척을 대한제국에 팔아달라고 요청한 것. 당연히 원래 같다면 못 먹는 감 찔러나보자는 거지만 주변 상황이 기가 막히게 돌아가며[16] 실제 전함 도입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보로디노급 전함 중 3번함인 오룔이 대한제국으로 들어와 충무함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도입과정에서 잡음이 정말 많았고 해군과 고종은 다시 한 번 틀어지지만, 전함이 곧 국력의 현시이던 시절에 북양 군벌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유용하게 쓰였다.

    1차 세계대전 때 대한제국 원정함대의 기함이 되어 지중해에 투입될 예정이다. 전노급이라 해도 어엿한 전함이 들어오는 것이다 보니 오헝 제국 해군과 지중해 파견 독일 제국 유보트들이 상당히 긴장하고 있다고 한다.

5.3. 항공기

  • 파먼 III
    한국군이 최초로 도입한 항공기. 기초적인 복엽기라 정찰 용도로만 활용했다. 본래는 육군만 사용하고 해군은 따로 도입할 예정이었으나 고종의 욕심으로 도입된 보르디노급 전함 탓에 해군이 세워둔 건함 계획이 다 꼬이면서 울며 겨자먹기로 육군에 협조를 구해 나눠 사용했다. 한국군이 신형 장비를 도입하면 일단 따라하고 보는 일본도 뒤따라 도입. 이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뉴포르로 교체된다.
  • 뉴포르
    동부전선 참전이 확정되어 항공 전력 강화가 절실한 시점에 브루실로프의 주도로 공군력 강화에 열을 올리던 러시아군이 도입할 때 함께 도입한다. 탁지부에선 예산 문제로 난색을 표했으나 삐까번쩍한 신형 장비라면 사죽을 못쓰는 고종이 내탕금까지 꺼내며 열렬히 지지한 덕분에 도입에 성공. 정찰기인 뉴포르 10과 전투기인 뉴포르 11이 우선 도입되어 항공정찰, 폭격기 호위 임무를 수행했다.
  • 일리야 무로메츠
    러시아군이 자랑하는 폭격기. 뉴포르10, 11과 묶어 초기형 스트라이크 패키지를 구성한다. 수적 우위를 앞세워 달려드는 포커 복엽기들의 맹공을 특유의 단단함으로 버텨내며 공중포병 역할을 수행해낸다.

[1] 1차 세계대전 중후기에 들어 동맹국/협상국 양 진영에서 수렴진화하듯 등장하여 현대에까지 큰 틀이 이어지고 있는 현대 보병전술의 기본 전제이다. [2] 강습부대-> 중앙군 근위사단-> 지방군 여단 [3] 원정군 보병분대는 소총수 위주의 소총조와 경기관총 위주의 지원조로 나뉜 전간기~현대 유럽식이고, 원정군 강습분대의 구조는 냉전기에 완전히 정착된 미국식의 사격조 체제이다. [4] 원정군이 아닌 본토 주둔부대의 편제 변화는 현재로서는 불명이다. [5] 포병학교 교도대대 1개 포대, 중앙군 4개 대대, 지방군 6개 대대 [6] 실제 러일전쟁 중후반경에야 러일 양국 포병에서 지형지물을 끼고 엄폐한 간접사격이 보편화되기 시작하며, 이러한 전훈은 독일군같은 일부 열강 육군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1차대전 개전시점에서 이미 상당히 보편화된다. [7] 머큐로크롬의 발견 자체는 1900년대 초였으나 미국의 휴 H. 영 박사에 의해 살균효과가 있음을 발견된 것이 1918년이다. [8] 다만 해군에겐 영 좋지않은 루트로 도입하였다. 이에 대해선 하술. [9] 이때문에 하마터면 모신나강 도입을 말아먹을뻔 하였고, 30년식 값을 군 예산이 아닌 내장원 자금으로 지불하여 고종의 독단적인 지름으로 마무리하였다. [10] 기병총버전은 M1A1카빈처럼 접철식 개머리판을 장착했다. [11] 기관단총의 문제로, 당시 대한제국군의 제식 권총탄은 림드탄이여서 자동화기인 기관단총을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위해 새로운 권총탄을 채택하자니 해당 권총탄을 사용할 권총도 새로 보급해야 하는등 문제가 있다. 거기가 작중 대한제국군은 보병간 교전거리를 200m 내외로 보는데 기관단총의 교전거리는 길어봐야 100~150m라는 문제도 있다. 그렇다고 돌격소총을 만들자니 기술부족으로 인해 지나치게 무거워질것을 우려해야했다. 예시로 최초의 돌격소총으로 알려진 StG44의 무게가 5kg에 육박하고, 절삭가공으로 제작하던 초기형 AK-47도 4.3kg이 나간다. 대한민국 제식소총 K2 소총의 무게가 3.3kg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무거운 것. 이에 고민하던 중 꼭 둘중 하나만을 고를 이유가 없으며, 그 중간이라 부를 수 있는 M1 카빈을 제작하여 지급하면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다만 자동사격이 기본으로 지원되는 것을 보면 M2 카빈에 가깝다. [12] 당시에는 기관총을 포병이 운용했기 때문에 총이 아닌, 포라고 불렀다. [13] 강력한 화력이 부족한 인력을 매꿔주고, 인명손실을 줄여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선 막대한 비용이 들겠지만 이를 도입하지 않을때 전쟁에서 일어날 피해에 비하면 적을것이라는 논리에 의해 생겨났다. [14] 한국전을 예시로, 105mm 야포 대대를 재대로 운용하기 위해선 차량이 최소 50대 이상이 필요하며, 자동차 기술이 아직 미비한 시대이기에 이보다 더 많은 차량이 필요할텐데 대한제국이 이를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 군마로 수송하는 방안도 있지만 중포를 무리하게 견인하다 폐사해버린 것을 예시로 들며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15] 당시 대한제국은 남만주 문제로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대놓고 가져오는 건 무리였다. [16] 당시 드레드노트급 함선이 등장하며 러시아 역시 드레드노트 도입을 위해 준비중인 상황에서 남아있던 보로디노급 전함들이 애물단지가 되가고 있던지라 빠르게 처분하길 원했고 마침 태평양에서 활동할 제2중대의 개념으로 우방인 한국 해군을 강화시킬 명분도 있었다. 거기다 나머지 열강들도 전함 1척 가지곤 균형이 깨지진 않을거라 판단했다. 그나마 반발할 여지가 있던 일본 같은 경우에도 당장 전드레드노트급 4척을 얻은데다 어차피 대세는 드레드노트급이 될테니 한국이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1~2척 갖는다 해도 개의치 않는다고 본인들 입으로 직접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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