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독립운동 명문가 안중근 일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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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ddd> 성명 | 서훈 내역 | 비고 |
안봉생 | 건국훈장 애국장 (1990) |
안태진의 차남 안장근의 장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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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춘생 | 건국훈장 독립장 (1963) |
안태진의 차남 안장근의 차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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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옥 | 건국훈장 애국장 (1962) | 안춘생의 처 | |
안명근 | 건국훈장 독립장 (1990) | 안태현의 장남 | |
최익형 | 건국훈장 독립장 (1977) | 안태현의 장녀 안익근의 남편 | |
조마리아 | 건국훈장 애족장 (2008) | 안태훈의 처 | |
안중근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62) |
안태훈의 장남 | |
안정근 | 건국훈장 독립장 (1987) | 안태훈의 차남 | |
안원생 | 건국훈장 애국장 (1990) | 안정근의 장남 | |
안미생 | 건국포장 (2022) | 안정근의 차녀 | |
김인 |
건국포장 (1977) 건국훈장 애국장 (1990) |
김구의 장남, 안미생의 남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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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공근 | 건국훈장 독립장 (1995) | 안태훈의 3남 | |
안낙생 | 건국훈장 애족장 (1995) | 안공근의 차남 | |
안성근 | 건국훈장 애족장 (1990) | 안태건의 3남 | |
안경근 | 건국훈장 독립장 (1977) | 안태민의 장남 | |
김구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62) |
안미생의 남편 김인의 부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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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의 조부 안인수는 안태옥, 안태진, 안태현, 안태훈, 안태건, 안태민, 안태순 등 7남 및 4녀를 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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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애시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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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colcolor=#fff> 본명 | 조성녀(趙姓女) |
출생 | 1862년 4월 8일 |
황해도 해주군 광석동 | |
사망 | 1927년 7월 25일 (향년 65세) |
중화민국 상하이 | |
본관 | 배천 조씨 |
부모 | 아버지 조선(趙煽), 어머니 원주 원씨 |
배우자 | 안태훈(1905년 사별) |
자녀 |
장남
안중근 차남 안정근 삼남 안공근 장녀 안성녀 며느리 김아려 |
종교 | 천주교 ( 세례명: 마리아) |
서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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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네가 만일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조소(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흔히 조마리아의 편지로 알려진 글[1] 편지 내용으로 만들어진 노래
흔히 조마리아의 편지로 알려진 글[1] 편지 내용으로 만들어진 노래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이며, 자신의 아들 안중근이 사형을 구형당하고 뤼순감옥에 갇혀있을 때 수의와 편지를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1862년경 황해도 해주목 광석동에서 배천 조씨 진사 조선(趙煽)[2]과 원주 원씨의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본명은 조성녀이며, 마리아는 세례명이다. 조마리아의 고조부 조완옥(趙完玉)은 무과 급제 후 훈련원 주부(主簿)로 봉직했으며, 증조부 조기원(趙箕源)은 명예직인 통덕랑(通德郞)의 품계를 받았고, 오빠 조규증(趙珪增)과 사촌 오빠 조철증(趙喆增)은 고종 대에 각각 행(行)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와 충훈부도사 겸 선략장군을 지냈다.그녀는 같은 마을에 사는 안태훈(安泰勳)과 결혼하였고, 남편의 뜻에 따라 1897년 10월 프랑스인 니콜라 빌렘 신부로부터 세례성사를 받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그녀는 안태훈과의 사이에 안중근, 안성녀, 안정근, 안공근, 총 3남 1녀를 두었다. 그러던 1905년 가을 안중근이 중국의 상황을 시찰하고자 상하이로 이동했고, 안태훈은 남은 가족과 함께 평양부의 관문인 진남포로 이주하여 안중근의 귀국을 기다렸다. 그러나 얼마 후 안태훈이 지병으로 선종했고, 그녀는 신천군 청계동에서 남편의 장례를 치른 뒤 진남포로 이주했다.
한 때 남편 안태훈의 생전에는 그의 충실한 내조자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남편과 사별한 다음에는 구국 차원의 애국계몽사업에 뜻을 둔 장남 안중근을 따라 개화운동이 활발했던 삼화항으로 이주하였다. 그녀는 아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호응하는 걸 지켜보고 자신도 뜻을 함께하기로 했다. 1907년 5월, 그녀는 평안남도 ‘삼화항 은금폐지부인회’를 통해 국채보상의연금을 납입했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5월 29일자 '국채보상의연금 수입광고' 기사엔 그녀가 지불한 패물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삼화항 은금폐지부인회 제이회 의연
안중근 자친 은지환 두쌍 넉량 닷돈중은 아직 팔리지 못하였음.
은투호 두 개 은장도 한 개 은 귀이개 두 개 은가지 세 개 은부전 두 개
합 십종 넉량 닷돈중 대금 20원."
안중근 자친 은지환 두쌍 넉량 닷돈중은 아직 팔리지 못하였음.
은투호 두 개 은장도 한 개 은 귀이개 두 개 은가지 세 개 은부전 두 개
합 십종 넉량 닷돈중 대금 20원."
1909년 10월 26일, 장남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 일제는 거사의 배후를 추적하기 위해 안중근의 고향집을 덮쳐 조마리아와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 안공근을 심문했다. 이때 그녀는 집요한 심문조사 과정에서 갖은 협박을 받았지만 끝까지 이겨냈다. 아우 정근과 공근은 여순법원에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되었는데, 이 때 이들을 만난 안중근은 러시아와 영국인 변호사가 변호를 맡기를 자청하고 있으나, 자신은 한국인 변호사의 변호를 받고 싶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두 아우는 이 소식을 어머니 조마리아에게 전보로 알렸다.
이에 따라 그녀는 변호사를 선임하기 위해 평양의 천주교당에 머물렀는데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빈번하게 방문하여 책임 추궁을 하며 괴롭혔다. 그러자 이에 다음과 같이 항변했다.
"당신 아들이 이토
수상을 살해하여 두 나라에 변란이 일어났는데 어찌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는가? 당신의 자식 교육이 잘못된 탓인데 죄가 없다고 부인할 셈인가?"
“내 아들이 나라 밖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내 알 바 아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 국민으로 태어나 나라의 일로 죽는 것은 국민된 도리이자 의무다. 내 아들이 나라를 위해 죽는다면, 나 역시 아들을 따라 죽을 따름이다. 중근은
러일전쟁 이후로 밤낮으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뿐이었고, 평소 매사를 정당하고 합리적으로 행하면서 조금도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아 집안에 항상 숙연하였다. 국채보상운동 때에도 아내의 패물을 기증하면서 나라가 망하면 우리도 망하는데 무엇이 아깝겠느냐고 하였다. 이에 아내도 흔쾌히 그 뜻을 따랐다."
이에 그녀를 비난하러 왔던 일본인들이 오히려 감탄하면서 돌아가고는 했다고 한다.
그녀는 일제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한성 변호사회가 추천해 준 평양의 안병찬 변호사를 찾아가 아들의 변호를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결국 안병찬은 조마리아의 간청에 안중근의 변론을 맡기로 하고 여순으로 갔다. 안병찬은 11월 30일 여순지방법원의 마나베 지방법원장 앞으로 변호인 신고서를 제출했으나, 담당 서기는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이라며 안중근에 대한 재판은 일본 형법에 따라 일본법정이 하는 것이므로 외국인 변호인의 변호를 허용하지 않으며, 대신 관선 변호인 두 명을 선임했다는 회신을 받았다.
1910년 2월 14일 여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법정 공판에서 안중근에 대한 사형이 선고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자 안정근과 안공근을 여순으로 보내 안중근에게 항소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 저술을 마칠 시간을 만들기 위해 항소를 고민했으나 결국 2월 19일 포기했다. 오히려 놀란 쪽은 일제였다. 당시 안중근의 결단에 놀란 고등법원장 히라이시(平石)는 일부러 형무소에 수감돼 있는 그를 찾아가 상고를 권했다. 그러나 안중근은 응하지 않았다. 일본 변호사들도 형량을 낮추기 위해 상고할 것을 권했지만, 안중근은 “나는 처음부터 무죄요, 무죄인 나에게 감형을 운운하는 것은 치욕이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국내의 대한매일신보와 일본의 아사히 신문은 '시모시자(是母是子: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는 글을 실었다.
사형이 집행되기 사흘 전, 안중근은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유서를 썼다.
“예수를 찬미합니다.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 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으니 마음을 평안히 하옵기를 천만번 바라올 뿐입니다. 분도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기를 희망하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옵시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 주십시오.
이상이 대요이며, 그밖에도 드릴 말씀은 허다하오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온 뒤 누누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아래 여러분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꼭 주교님을 전심으로 신앙하시어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은 정근과 공근에게 들어 주시옵고, 배려를 거두시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아들 도마 올림.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 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으니 마음을 평안히 하옵기를 천만번 바라올 뿐입니다. 분도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기를 희망하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옵시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 주십시오.
이상이 대요이며, 그밖에도 드릴 말씀은 허다하오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온 뒤 누누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아래 여러분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꼭 주교님을 전심으로 신앙하시어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은 정근과 공근에게 들어 주시옵고, 배려를 거두시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아들 도마 올림.
안중근이 여순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후, 조마리아는 안중근의 장녀이자 자신의 손녀딸 안현생을 명동성당 뒤편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프랑스인 수녀에게 맡긴 뒤 자신은 아들을 따라 연해주로 망명하여 크라스키노에 잠시 머물렀다. 그녀는 이 과정에서 연해주 한인들의 지원을 받았다. 안중근 유족 구제공동회가 모금한 기금이 크라스키노의 한인지도자 최재형의 손을 거쳐 안중근 유족에게 전해진 것이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10km 떨어진 니콜리스크로 이주하여 잡화상을 운영했다. 이때 안중근 유족은 안정근의 장모인 황해도의 만석꾼 왕재덕과 독립운동가 이갑의 동생의 후원을 받으며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안중근 가족에 대한 끈질긴 탄압은 지속되었고, 급기야 1911년 여름 안중근의 맏아들 안분도가 일제의 밀정이 건네준 과자를 먹고 독살당했다. 그 후 1917년 7월에는 니콜리스크로 이주하여 벼농사를 시도했지만,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치안이 어지러워지자 상하이로 이주했다. 1919년 10월 상하이에 도착한 뒤 프랑스 조계의 남영길리에 정착했다.
그녀는 상해에서도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라는 특별한 위상과 그녀의 헌신으로 독립운동가들과 교포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함께 항일독립운동계를 중심으로 교포사회의 대모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 1920년 1월 30일자 기사에는 조마리아의 행적이 실려 있다.
안중근 의사의 모친은 해외에 온 이래 거의 쉬는 날이 없이 동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서쪽으로는 바이칼호수에 이르기까지 분주하여 동포를 각성시키는 사업에 종사하였다.
1926년 7월 19일 안창호의 주도로 결성된 상해재류동포정부경제후원회에 참여하여 최승봉, 김보연, 하상린, 정광호, 김순애 등과 함께 정위원이 되었다. 또한 조마리아는 상해 동포들 가운데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봉사활동에도 힘썼다. 상하이에서 조마리아와 함께 생활한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는 조마리아에 대해 “너그러우면서도 대의에 밝은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1927년 7월 15일, 상하이에서 향년 65세의 나이에 위암으로 사망했다. 장례는 상하이 프랑스조계 천주교당에서 사회장으로 치렀고, 유해는 프랑스조계 만국공묘(萬國公墓)의 월남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이후 도시 개발로 묘지터가 개발되고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그녀의 무덤은 영영 사라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조마리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3. 매체에서
- 뮤지컬 영웅 2022~23년 시즌에서, 임선애 및 임용희 배우가 연기했다. 그리고 2월 14일(안중근의 사형 선고일)을 맞이하여, 이 두 배우가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를 읽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