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모 任珍模[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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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70000><colcolor=#fff> 출생 | 1959년 8월 11일[2] ([age(1959-08-11)]세) |
경기도 부천군[3] | |
학력 |
남대문중학교 (졸업) 여의도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 사회학 78 / 학사) |
경력 | |
링크 | (음악아저씨 임진모)[4] |
소속사 |
[[오간지프로덕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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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음악 평론가이자, 대중음악평론가 및 팝칼럼니스트음악평론지 izm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1993년부터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고정출연하고 있다. 배철수와 오랜 지인 사이이다. 1984년 경향신문에 기자로 입사하여 당시는 메이저신문사에서 생소한 대중음악 기자로 활동을 했다. 1986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팝컬럼니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과거 국내음악, 팝음악 아울러서 식견있는 전문가로 알려졌고, 음악평론지 izm을 약 20년 넘게 이끌고 있는 등 한국 음악 평론의 핵심 인물이다.
2021년 9월 2일 강연에이전시 오간지프로덕션과 전속 계약을 맺었다. 링크
2. 생애
1959년 8월,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나 중3 겨울방학 때 당시 명동에 있던 코스모스백화점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뒷골목을 기웃거리며 이소룡이 등장하는 스크린,로드쇼 등의 잡지를 구하다가 자연스레 팝송과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국내가요는 그보다 훨씬 일찍 접했는데 배호의 노래는 음악평론가를 꿈꾸게 했다. <비 내리는 명동거리>, <안개 낀 장충단 거리>, <누가 울어>, <두메산골>을 부르는 배호의 음색에 초등학생 때부터 취했었다고 하는데 6학년 때 배호가 죽고 KBS에서 1971년에 특집방송했던 것까지 기억할 정도라고 한다. 어쨌든 그가 처음 팝을 듣게 된 것은 1974년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존 레논의 < Imagine>이었다고 한다. 또한, 이해부터 월간 팝송을 사서 읽으며 팝송에 대해 공부했다고 한다. 음악 외에도 이소룡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아했다고 한다. 고교 입학 때까지 약 4개월을 쉬는 동안, 방안에 혼자 있는 시간이 늘자 의도적으로 라디오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또, 고1 때에는 장래희망으로 음악 평론가를 썼다가 담임한테 혼났는데, 담임의 조언을 듣고 오히려 더 평론가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존 레논, 카펜터스, 신중현 등 팝이나 가요들이 라디오에서 나오는데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겠다는 목표를 세웠죠. 그러면서 평론가라는 직업을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여의도고1학년 때 가정환경 조사를 했는데 저는 장래희망으로 음악평론가를 썼어요. 선생님한테 혼났죠(그건 자살골이다 라고 했다고). 당시에는 담임 선생님께서 ”네가 원하는 음악평론가로 현재 활동하는 사람이 누가 있니?“라고 말씀하셨어요. 당시 이백천 선생님이나 故 황문평 평론가가 있었지만 각각 PD와 작곡가라는 직업을 갖고 계셨다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일찍 꿈을 갖는 건 좋은데 좀 더 구체적인 꿈을 가져라’라고 조언해주셨죠. 지금도 그때 선생님의 충고 두 마디가 생생하게 기억이 나요. ”음악을 하면 가난해져“와 ”음악은 가난을 예약한다(너 스스로 궁핍을 예약하는거다)“는 두 마디가 잊혀 지지가 않아요. 그렇지만 그때는 그 말이 와 닿지 않겠어요. 오히려 반대로 평론가가 되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했죠.
당시 임진모는 존 레넌, 폴 메카트니, 비틀스, 롤링스톤스, 로브, 카펜터스, 핑크플로이드, 레드 제플린, 어니언스, 신중현, 이장희 등등의 음악을 들으며 이성을 잃게 만들 정도로 자신의 인생을 바꿔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세운 인생의 목표가 ‘음악평론’이며 대학 전공을 택할 때도 이 목표와 제일 가까운 것이 사회학이라 생각해 전공으로 택했다고 한다. 사회학과 다닐 때도 공부보다 귀퉁이에서 음악을 듣는데 열중했다고.
비로소 대학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음악 듣기를 시작해서 77년부터 14~15년 간 열심히 들었어요. 하지만 공부를 할 수 있는 정보가 너무 부족했어요. 좋아하는 음악을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해석해야 하는 입장이 되니까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도깨비 골목(과거 외제 상품을 팔았던 시장 골목)에서 세 권의 원서를 구입했죠. 그 책은 저에게 전부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제가 뻗어나갈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당시 제게 가장 중요한 뮤지션은 비틀스, 롤링스톤스, 국내에서는 신중현, 조용필, 산울림, 들국화, 서태지, 이렇게 나가는 것 같아요. 이런 음악들을 경험하면서 특히 80년대 말에 이르러 우리 대중음악장르가 굉장히 풍요로워지거든요. 그때를 살았던 게 제가 큰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한편, 임진모의 음악평론가 꿈은 순탄하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와의 갈등이 심했다. 임진모가 중학교 3학년 때 김세환의 <사랑하는 마음>부터 하나둘씩 음반을 모으기 시작했던 그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아버지가 도끼로 음반을 모조리 부숴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천 장 가량 되는 음반이 산산조각 났지만 다시 음반을 모으기 시작했다고. 임진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지만 나를 음악평론가로 만들어준 사람은 바로 아버지에요. 우리 아버지는 나로 하여금 fatigue를 없애줬어요. 사람이 진로를 선택함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장애물이 '피로'라는 것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물림증, 실증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음반을 부수지 않았더라면 저는 몇 년간 음악을 듣다가 그만뒀을 거에요. 분명히.
당시 임진모의 아버지는 유리 가게를 운영하였는데 대학시절, 기울어진 가세 때문에 공부를 하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고 한다. 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가장 큰 위안을 준 것은 음악이었다고. 모든 음악이 "야, 진모야. 괜찮으니까 당당하게 살아. 그렇게 살지마" 라고 자신을 응원하는 것 같았다고.
임진모는 1984년 경향신문 27기 공채로 입사해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1989년 내외경제신문로 이직해서 일하다 1991년에 퇴사했다. 약 6년 7개월여 간 재직하면서 머릿속엔 오직 음악 쪽으로 가야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고 한다. 비판과 독설을 싫어했던 터라 기자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고 하는데 음악평론가가 되고자 했던 이유는 비판과 독설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음악의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어서라고. 거기다가, 신문사에 기자로 취직한 이유 중 하나가 팝송에 대한 원서 자료를 구하기 힘들어서, 신문사에 취직해 신문사에서는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빌보드, 롤링 스톤스, 타임, 뉴스위크같은 다양한 민국 음악 관련 매체를 보기 위해서였다.
1986년 경향신문 주간지 <주간경향>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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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기자생활을 원해서 한 게 아니었어요. 저는 오로지 음악평론가를 원했죠. 기자생활 자체가 자아를 실현하는 방법은 아니었다는 의미죠. 기사 작성법을 배우고 어떤 현안에 대한 관점을 갖는 과정을 배우긴 했지만, 저는 음악에 대해 쓰고 싶다는 열망이 더 컸죠. 신문사에 들어가서는 한 주간지에 팝송기사를 6년 동안이나 쓰게 되었는데요. 이때 외국 자료들을 보며 많은 공부를 한 것 같아요. 하지만 매주 팝송에 대한 칼럼을 쓸 수 있었지만 성에 차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1991년 5월에 사표를 던지고 황무지 같은 음악계에 나왔던 거죠.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에 제가 철이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요즘 같았으면 그런 선택을 못했을 거에요. 어머님을 봉양하고 아내와 두 아이들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직업을 포기하고 음악평론가가 된다는 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이기적인 선택이었다고 봐요. 그래서 저 나름대로는 자아실현 행위는 이기적인 행위라고 규정을 내렸죠.
막상 퇴사를 하고보니 당시에는 이미 팝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선배들이 존재하였기에 바로 뛰어들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또한 음악평론가로서의 경제적 삶이 불투명했기에 우선은 음반 제작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음반제작과 음악평론을 동시에 해내기로 했다. 하지만 경험부족과 의욕 과잉으로 음반이 모두 실패를 하며 쓴 맛을 보게 된다. 극단적인 생각을 할 정도로 모든 것이 힘든 시절이었다고[6]
그러다 1993년, 아카펠라 그룹 인공위성이 1집 타이틀곡 '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로 대박을 치면서 빚을 모두 갚았다. 1집 앨범은 50만장 이상 팔렸다. 그는 인공위성의 성공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빚 때문에 계속 음반을 제작했을 지도 모른다고 자주 언급한다. 여기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약간 있다. 임진모는 대학생 아카펠라 팀이었던 서울대학교 합창단 출신의 베거스 싱어즈를 소개받았다. 이들은 1991년 영국 6인조 아카펠라 그룹인 킹스 싱어즈(King’s Singers)가 내한공연을 해 큰 성공을 거둔 것을 보고 팀을 꾸렸다고 알려졌다. 임진모는 이들에게서 사업성을 봤고 결국 인공위성이란 이름으로 음반을 만들었다. 인공위성은 데뷔하자마자 주목을 받았다. 그 이유는 첫번째 신시사이저를 이용한 전자음악이 유행하던 시기에 무반주 음악을 했다는 점이고 두번째는 이들이 서울대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인공위성은 아마추어였지만 순수한 목소리를 무기로 삼았다. 그리고 앞서 서술한 대로 1집이 대박을 친 것이다. 인공위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문서를 참조하자.
이때가 1992년 9월이었는데요. 이때부터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의 원고를 쓰기 시작했어요. 3개월 만에 탈고를 했지만 출판사에서 내주질 않는 거에요. 한 출판사에서는 계약금까지 주고도 8개월 동안 책을 내주지 않았죠. 그러던 어느 날, 동인기획 사무실로 대륙출판사 사장이 찾아와 원고를 보더니 곧바로 위약금을 물어주고 출판을 하게 됐어요. 갑자기 스케쥴이 폭발했죠. 인공위성과 제 스케쥴을 동시에 소화할 수 없어서 기획사 일을 그만뒀습니다. 바로 지금의 저를 있게 만든 소중한 책이죠.
저서 <리얼리즘 팝아티스트>는 음악평론가로 인정받는 계기가 됐는데 대형서점 이달의 책 코너에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와 동시에 선정되기도 했다. < 배철수의 음악캠프> 조정선 PD가 이 책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섭외해 지금까지 연을 맺고 있으니.... 효자노릇을 제대로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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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모의 첫 방송은
CBS 라디오에서 했던 김창환의 <꿈과 음악 사이>라는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1993년부터
MBC 라디오에서 방영하는 <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30년이 넘게 고정게스트로 출연하고 있다.
2001년 8월 30일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음악웹진 IZM(이즘)을 설립해 지금까지 21년 째 운영하고 있다. 초기에는 투자자가 6~7천만원 가량 대줬지만 2년 후 자력갱생하게 되었다고. 그때부터 매달 300에서 350 이상이 나갔다고 한다.
3. 저서
제목 | 발간 연도 |
《팝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 | 1993년 |
《시대를 빛낸 정상의 앨범》 | 1994년 |
《록, 그 폭발하는 젊음의 미학》 | 1996년 |
《팝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대중예술산책 1)》 | 2002년 |
《팝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대중예술산책 2)》 | 2003년 |
《젊음의 코드 록》 | 2003년 |
《우리 대중음악의 큰별들》 | 2004년 |
《가수를 말하다》 | 2012년 |
《팝, 경제를 노래하다》 | 2014년 |
《한국인의 팝송 100》 | 2018년 |
《국가가 위기다》 | 2021년 |
《오랜 시간 멋진 유행가 365》 | 2022년 |
평론가답게 당연히 글을 잘 쓴다. 이는 임진모가 음악평론가 이전에는 경향신문, 내외경제신문[7]에서 활동한 기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지향하는 글은 '크리티시즘'과 '저널리즘'의 완벽한 조화이다. 대중음악이기 때문에 대중과의 공감이 전제가 돼야 하지만 소중음악도 소중한 것이다. 대중문화에서 중요한 것은 대중론이지만 이를 보완하는 소중론을 동시에 포괄하는 것이 크리티시즘과 저널리즘의 조화(교배)라고 한다.
지나고 보니 기자생활로 터득한게 꽤 있더라구요 스트레이트 글을 통한 단문의 미학이라까요 한문장으로 어떤 상황에 대한 묘사를 압축해서 전달하는 스트레이트 글만의 강점이 분명 있거든요. 길지 않아도 풍부한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이런 저널리즘 글이 아닌 크리티시즘 글을 숭배하고 그것에 길든 사람들은 사실 스트레이트 글을 잘 못 쓰죠. 다른 사람들은 17~18매 쓸 것을 저는 7~8매로 압축해서 쓸 수 있어요. 이게 기자 생활하며 얻은 장점이 아니었나 싶어요.
임진모의 글은 쉽게 읽히면서도 인문학적인 터치와 감성적인 혼이 베어나오는 건 문화의 씨앗이 뿌려졌기 때문이다. 청소년 시절부터 발자크, 헤르만 헤세, 토마스 만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문화의 맛을 느꼈고, 특히 소설가 최인훈, 이청준의 작품들은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책이라고 한다. "내가 나아가는 것과 뒤로 물러서는 것,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 공존하는, 서로 배반하는 것이 내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책"이라고 할 정도라고. 그래서 그가 삶을 바라보는 기준은 '더블 스탠다드' 즉 이중기준이다.
4. 방송
4.1. 라디오
}}} ||<width=50%>- MBC 표준FM 임진모의 뮤직스페셜 (2007~2008) 임진모의 뮤직스페셜[9]
-
TBS FM 임진모의 마이웨이 (2018~2020)
-
MBC 표준FM
유행가, 시대를 노래하다 (2021)[10][11]
4.2. TV
}}}||4.3. 유튜브
뉴미디어를 통해 대중과 직접 소통하기 위한 유튜브 채널 '음악아저씨 임진모'를 2022년 5월 개설했다. ‘대중가요 사랑방’이라는 카테고리로 오상익 오간지 프로덕션 대표와 가요계 역사를 돌아보는 대담 형식이다. 직접 추진을 한 것은 아니고 주변에서 계속 ‘이제 유튜브를 꼭 해야 하는 시대’라고 강권하고 제안도 받아서 하게 됐다고 한다. 영상 속에서 모자를 쓰고 토시를 착장한 ‘캐릭터’로 등장한 것에 대해선 제작사에서 여러가지를 준비해 준 것이라고 함. 임진모는 언론 인터뷰에서 “과거 시대에 대한 향수와 윗 세대에 대한 이해를 주고 싶었고 세대간에 서로를 이해를 하는 콘텐츠가 됐으면 한다”고 하였다. 또한 “음악이 예전에 차지했던 ‘대화용 콘텐츠 1위’ 자리를 다시 차지하도록 힘을 더하고 싶은 마음에서 유튜브를 하게 된 것도 있다”며 “예전에는 일상에서 나누는 대화 중 많은 부분이 ‘딥퍼플이냐 레드제플린이냐’, ‘소녀시대 멤버 중 누가 제일 좋으냐’, ‘메탈리카 대단하다’ 등 음악에 대한 것이 었지만 지금은 영화, 게임, 그리고 정치 등 다른 콘텐츠가 일상에서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며 “음악이 지닌 원초적인 매력에서 나오는 호기심이 모든 세대 대화의 중심이 되도록 부활하고 재생을 하도록 돕고 싶다”고 했다. 링크5. 공연
5.1. 임진모 음악평론가의 '우리가 신해철을 기억하는 이유'
2023년 10월 28일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우리가 신해철을 기억하는 이유' 라는 주제의 토크콘서트를 진행했다. 유튜브 <음악아저씨 임진모> 제작사이자 소속사인 오간지프로덕션의 오상익 대표와 대담형식으로 진행됐다. 링크6. 평가 성향
임진모는 대중음악인을 음악 하는 자세와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였다.그 중 하나는 시대상황,대중의 정서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측면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런 측면 보다는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과 정서를 음악을 통해 표출하는 측면이었다.[12]임진모는 '무엇을 하든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대중이 음악 쪽으로 이행할 수 있는 체계를 세우는 일'이라고 말한다. 대중을 음악으로 끌어들이지 못한다면 평론가로서는 실패한 것이며, 평론가는 대중과 함께 있을 때만이 의미가 있는 대중음악의 종사자이기 때문이라는 것.
하나의 밴드는 하나의 장르다
대중음악은 단순히 듣고 즐기는 오락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는 산물이다
음악은 인류가 만들어 온 세상에서 가장 큰 위로의 쉼터다.
조용필 그의 음악을 두고 장르의 위대한 통합이자 한국 대중음악의 용광로라고 찬사한다.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따라 하기보다 자기 세계를 가진 사람들, 얼마나 매력적인가요.
6.1. 평론가의 정체성에 대한 철학
홍유진[13]: 평론가의 진정한 정체성은 무엇인가?
임진모 : 일단 평론가는 아티스트에 대한 봉사자다. 음악인들이 임진모를 전제하고 음악을 할까? 평론가 없어도 좋은 음악은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음악인이 없으면 안된다. 우리는 2차 직업이다. 평론가들이 이걸 까먹으면 아주 추악한 문화 권력자가 된다. 어디 가서 건방 떨고 거드름 피우게 된다. ... 조용필은 이 시대가 잃어버린 '진정한 정체성'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워줬다. 평론가가 평론가다워야지, 기자라면 기자다워야지, 만약에 당신이 빵 굽는 사람이라면 빵 굽는 걸 제일 잘 해야 한다. 현재 자기의 정체성이 진정으로 발휘되는 걸 첫번째 덕목으로 생각해야 된다. 마찬가지로 가수는 뭔가? 가수는 무대에서 노래를 해야 한다. 조용필은 단 한번도 예능 프로에 나오지도 않았고, 오로지 노래 부르는 모습만 보여줬다. 조용필을 보려면 공연장을 가야 한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홍유진 : 예전에 음악인에 대해서 존경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임진모 : 아무리 싸구려 트로트 가수라도 애정을 갖고 써야 한다. 후배들에게 내가 하는 소리다. 어디서 아주 이상한 신념과 미신에 사로잡혀서 쓸데 없는 편견을 가진 이들이 있다. 그거 버려야 한다. 우리는 아티스트, 예술가, 음악가들한테 서비스하는 직업이고 그게 첫번째다. 나에게 음악가에 대한 봉사는 이미 굉장히 숭고한 것이다. 평론가의 가치 두번째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듣게끔 만드는 것이다. 즉,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쉬라는 뜻이다. 우리는 오로지 일만 해왔다.이 혹독한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가혹한 노동을 강요하고 있고, 그것에 우리가 저항하려면 쉬어야 한다. 쉼! 이걸 알아야 한다.
홍유진 : 평론가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려면?
임진모 : 어떤 친구가 이런 글을 올렸다 "당신은 음악평론가인가? 평론관인가?" 무슨 말이냐면 정부나 권력에 영합하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음악만은 자본에 의해서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구에서 시작된 음악평론의 핵심이기도 하다. 안 그런가? 모든 것이 대자본에 의해서 움직인다면 거기에 창의성과 시대에 대한 아티스트의 고민, 어떤 대치적 상황, 이런 것들은 사라지고 만다. 그러니까 미술이든, 음악이든 최소한 예술은 자본에 의해서 움직이면 안 된다. 그런데 지금 자본은 완전히 제쳐놓고, 자본을 완전히 도외시한 상태에서 말하고 활동하기 쉬운가? 쉽지 않다. 가끔 가다 그런 경우가 있다. 내 주관대로 막 쓰다가, 어떤 때 결정적으로 그 기획사 소속의 가수하고 인터뷰를 해야 할 일이 생긴다. 안 해준다[14] 폭 넓게 해석하면 평론에 대한 사회적 관념이 투철하지 않기 때문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건 평론을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한다는 생각을 아무도 못하는 것이다. 평론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무슨 평론가인가. 그냥 귀엽게 애호가 아니면 해설가. 해설도 제대로 못한다. 지면의 한계, 현실적인 한계 때문에.
임진모, 홍유진, 권영탕 '우리에게 음악은 구원이자 휴식'(인물과사상사인물과사상) pp. 17- 40
임진모 : 일단 평론가는 아티스트에 대한 봉사자다. 음악인들이 임진모를 전제하고 음악을 할까? 평론가 없어도 좋은 음악은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음악인이 없으면 안된다. 우리는 2차 직업이다. 평론가들이 이걸 까먹으면 아주 추악한 문화 권력자가 된다. 어디 가서 건방 떨고 거드름 피우게 된다. ... 조용필은 이 시대가 잃어버린 '진정한 정체성'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워줬다. 평론가가 평론가다워야지, 기자라면 기자다워야지, 만약에 당신이 빵 굽는 사람이라면 빵 굽는 걸 제일 잘 해야 한다. 현재 자기의 정체성이 진정으로 발휘되는 걸 첫번째 덕목으로 생각해야 된다. 마찬가지로 가수는 뭔가? 가수는 무대에서 노래를 해야 한다. 조용필은 단 한번도 예능 프로에 나오지도 않았고, 오로지 노래 부르는 모습만 보여줬다. 조용필을 보려면 공연장을 가야 한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홍유진 : 예전에 음악인에 대해서 존경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임진모 : 아무리 싸구려 트로트 가수라도 애정을 갖고 써야 한다. 후배들에게 내가 하는 소리다. 어디서 아주 이상한 신념과 미신에 사로잡혀서 쓸데 없는 편견을 가진 이들이 있다. 그거 버려야 한다. 우리는 아티스트, 예술가, 음악가들한테 서비스하는 직업이고 그게 첫번째다. 나에게 음악가에 대한 봉사는 이미 굉장히 숭고한 것이다. 평론가의 가치 두번째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듣게끔 만드는 것이다. 즉,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쉬라는 뜻이다. 우리는 오로지 일만 해왔다.이 혹독한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가혹한 노동을 강요하고 있고, 그것에 우리가 저항하려면 쉬어야 한다. 쉼! 이걸 알아야 한다.
홍유진 : 평론가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려면?
임진모 : 어떤 친구가 이런 글을 올렸다 "당신은 음악평론가인가? 평론관인가?" 무슨 말이냐면 정부나 권력에 영합하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음악만은 자본에 의해서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구에서 시작된 음악평론의 핵심이기도 하다. 안 그런가? 모든 것이 대자본에 의해서 움직인다면 거기에 창의성과 시대에 대한 아티스트의 고민, 어떤 대치적 상황, 이런 것들은 사라지고 만다. 그러니까 미술이든, 음악이든 최소한 예술은 자본에 의해서 움직이면 안 된다. 그런데 지금 자본은 완전히 제쳐놓고, 자본을 완전히 도외시한 상태에서 말하고 활동하기 쉬운가? 쉽지 않다. 가끔 가다 그런 경우가 있다. 내 주관대로 막 쓰다가, 어떤 때 결정적으로 그 기획사 소속의 가수하고 인터뷰를 해야 할 일이 생긴다. 안 해준다[14] 폭 넓게 해석하면 평론에 대한 사회적 관념이 투철하지 않기 때문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건 평론을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한다는 생각을 아무도 못하는 것이다. 평론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무슨 평론가인가. 그냥 귀엽게 애호가 아니면 해설가. 해설도 제대로 못한다. 지면의 한계, 현실적인 한계 때문에.
임진모, 홍유진, 권영탕 '우리에게 음악은 구원이자 휴식'(인물과사상사인물과사상) pp. 17- 40
서울대 경력개발센터 기자단 : 평론에 있어 사회과학 공부의 필요성을 언급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가?
임진모 : 공부는 시험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관점,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평론은 음악을 통해 사회를 내다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음악을 사회적으로 해석할 토대가 있어야 하는데, 사회학이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었다. 경제신문의 기자로 일했던 적도 있었는데, 경제학도 사회를 보는 시각에 좋은 토대가 되었다. 사회과학이 view의 바탕이 된 것이다. 봉준호 감독(연세대 사회학 학사)이 왜 사회적인 의미를 갖는 영화를 잘 만들까? 사회과학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 맛을 알기 때문에 돋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울대 경력개발센터 기자단 : 평론가의 존재 의미를 묻고 싶다. 음악,영화 등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이기 마련이다. 각자의 취향이 존재함에도 평론가의 평가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임진모 : 산업적 조정자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좋은 음악이 자본의 논리에 의해 잠식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이다. 현재 음악 시장의 지분은 현재 아이돌, 댄스 음악이 70%를 차지한다. 비교적 주목받지 못하는 음악이 훌륭하다는 것을 평론가는 대중에게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자본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예술은 독립적일 필요가 있다.
서울대 경력개발센터 기자단 : 평론가가 되는데 필요한 자질이나 역량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임진모 : 순수와 잔혹, 평론가는 상업적인 이유로, 감정적인 이유로 평론을 해서는 안 된다. 친한 사이라도 강렬한 비판을 할 줄 알고, 건방진 아티스트라 생각해도 칭찬할 것은 칭찬해야 한다. 비판과 칭찬이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순수하면서도 잔혹할 필요가 있다. 또한 앞서 말했던 사회적 시각, 잣대를 볼 줄 알고, 음악이 그 안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 볼 수 있어야 한다. 사회과학적 접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외국어를 잘해야 한다. 이게 부족해서 좌절하는 사람이 많다. 레이디 가가의 팝송이 유명하다고 해도 그 가사를 직접 해석할 수 없으면 어떻게 평가를 하겠는가? 정보의 접근과 해석 측면에서 외국어 능력 또한 매우 중요하다.
서울대 경력개발센터 기자단 : 마지막으로 평론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가?
임진모 : 김창완씨가 내게 평론의 기준이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거기에 '주관적 객관'이라 답했다. 지극히 나의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이 객관적 설득력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설득력은 그간의 행보에서 오는 신뢰에서 비롯된다. 신뢰를 쌓기 위해, 좋아하는 분야를 결정하고 오랫동안 묵묵히 자신의 에너지를 투자하길 바란다. 나도 재능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평론을 쓰는 데 있어 지극히 대중적으로 접근한다.
서울대커리어기자단과 함께 하는 커리어스토리 2015 : 임진모(음악을 통해 세상을 보다, 2015)에서 발췌
임진모 : 공부는 시험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관점,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평론은 음악을 통해 사회를 내다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음악을 사회적으로 해석할 토대가 있어야 하는데, 사회학이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었다. 경제신문의 기자로 일했던 적도 있었는데, 경제학도 사회를 보는 시각에 좋은 토대가 되었다. 사회과학이 view의 바탕이 된 것이다. 봉준호 감독(연세대 사회학 학사)이 왜 사회적인 의미를 갖는 영화를 잘 만들까? 사회과학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 맛을 알기 때문에 돋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울대 경력개발센터 기자단 : 평론가의 존재 의미를 묻고 싶다. 음악,영화 등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이기 마련이다. 각자의 취향이 존재함에도 평론가의 평가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임진모 : 산업적 조정자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좋은 음악이 자본의 논리에 의해 잠식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이다. 현재 음악 시장의 지분은 현재 아이돌, 댄스 음악이 70%를 차지한다. 비교적 주목받지 못하는 음악이 훌륭하다는 것을 평론가는 대중에게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자본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예술은 독립적일 필요가 있다.
서울대 경력개발센터 기자단 : 평론가가 되는데 필요한 자질이나 역량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임진모 : 순수와 잔혹, 평론가는 상업적인 이유로, 감정적인 이유로 평론을 해서는 안 된다. 친한 사이라도 강렬한 비판을 할 줄 알고, 건방진 아티스트라 생각해도 칭찬할 것은 칭찬해야 한다. 비판과 칭찬이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순수하면서도 잔혹할 필요가 있다. 또한 앞서 말했던 사회적 시각, 잣대를 볼 줄 알고, 음악이 그 안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 볼 수 있어야 한다. 사회과학적 접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외국어를 잘해야 한다. 이게 부족해서 좌절하는 사람이 많다. 레이디 가가의 팝송이 유명하다고 해도 그 가사를 직접 해석할 수 없으면 어떻게 평가를 하겠는가? 정보의 접근과 해석 측면에서 외국어 능력 또한 매우 중요하다.
서울대 경력개발센터 기자단 : 마지막으로 평론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가?
임진모 : 김창완씨가 내게 평론의 기준이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거기에 '주관적 객관'이라 답했다. 지극히 나의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이 객관적 설득력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설득력은 그간의 행보에서 오는 신뢰에서 비롯된다. 신뢰를 쌓기 위해, 좋아하는 분야를 결정하고 오랫동안 묵묵히 자신의 에너지를 투자하길 바란다. 나도 재능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평론을 쓰는 데 있어 지극히 대중적으로 접근한다.
서울대커리어기자단과 함께 하는 커리어스토리 2015 : 임진모(음악을 통해 세상을 보다, 2015)에서 발췌
6.2. 유희열 표절 논란 100분 토론 참여
임진모는 2022년 7월 5일 방송된 MBC ‘100분 토론’에 부활의 김태원과 함께 출연해 “ 유희열은 작곡을 전공하신 분이다. 이 부분에 대해 아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을 거다. 그런데 이런 사건이 터졌다는 건 객관적으로 양심과 의도를 이야기하기 민망할 수준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납득이 안 간다. 충분히 알 사람이다. 도덕적 해이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분명히 잘 알 거다. 재차 사과했다. 메인 테마의 유사성을 인정하고 있다.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한편 김태원은 "유희열씨 같은 경우는 작가로서 보통 표절을 한다면 멜로디를 한 두개 변형한다. 하지만 제가 들었을 때는 8마디가 똑같았다. 그 점이 아이러니하다"고 말했다. 임진모는 "메인 테마의 유사성을 인정한 상황에서 양쪽 의견이 부딪히면 표절이 된다. 하지만 사카모토 류이치 측도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표절이라고 이야기하기 그렇다. 음악가들끼리 서로 양해하는 상황이 있다"라며 "이미 원작자가 표절이라 단정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 이상 사실상 표절 논란은 끝이 난 것이다"라고 법적인 처리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임진모는 유희열의 표절이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해도,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기 위한 사후처리는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서 2022년 7월 8일 YTN '뉴스큐'에 출연한 임진모는 유희열 표절 의혹이 큰 파장을 일으킨 것에 대해 "아무래도 우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한국의 대중음악을 얘기할 때 3~40대 팬들에겐 최고의 음악가라는 소리를 듣는 음악가에게 이런 소리가 들려 충격을 준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임진모는 "법정 사례를 볼 수 밖에 없다. 무의식 중이라는건 나도 모르게 나왔다는 것이기 때문에 무의식 때문에도 표절했다고 인정된 사례가 있다"면서 "누구든 음악가는 많은 곡을 듣고 일반인도 어렸을 때부터 많은 음악을 듣는데 본인이 곡을 쓰면 누적된 상태에서 조금씩 나오지 않을까 싶다. 음악가는 유사성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인정할 수 있는 범위와 없는 범위가 있다"고 덧붙였다.
법적조치를 취하지 않겠다는 사카모토 류이치에 대해 임진모는 "다른 사람들이 16마디가 똑같다고 해도 원작자가 듣기에 '음악 하는 사람이 이럴 수 있지. 충분히 가능한데?' 하면 넘어가는거고 어떤 경우에는 결정적인 두 마디 가지고도 표절 판정이 날 수가 있다"며 원작자의 입장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임진모는 류이치 태도의 의미로 "제 생각엔 첫 번째는 본인이 음악적 양심으로 이 정도는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표절 관련해서 결론을 명쾌하게 내준 것"이라며 "우리나라는 판소리가 대중화된 나라가 아니라 미국, 영국, 일본 등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다 스며들어 우리 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티즌들이 이의를 많이 제기하는데 법적으로 영향을 주는 건 아니지만 대중가요는 대중들이 듣지 않나. 대중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야하고 곡을 만들 때 신경 써야 한다. 단 한곡이 그 사람의 운명을 가를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어 "이번에도 유희열 씨가 너무 바쁘고 회사도 운영하다 보니 충분히 음악적으로 몰입하기 어렵지 않았을까 싶다. 긴장이 완화됐고 도덕적 해이가 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케이팝이 이제 세계로 나가지 않았나.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한국의 대중 음악에 표절이 있다는 게 우리에게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지 않나. 저는 케이팝에 이런 일들이 굉장히 부정적이라고 생각한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임진모는 "제 생각에는 공백을 가지면서 표절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가져야할 것 같다. 다시 좋은 곡을 쓰면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워낙 좋은 곡을 써왔고, 몇 곡이 터지긴 했지만 많은 곡 중 빙산의 일각이다. 저는 좋은 곡으로 컴백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고 조언했다.
6.3. BTS 병역 특혜 논란 100분 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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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모는 또 "과거와 달리 대중예술인에 사회적 인정이 상승하는 것 같아 기쁘지만 따지고 보면 대중예술 분야는 사실은 투자 대비 이익을 전제하는 분야"라며 "다른 무엇보다 대중들이 인정하고 기억하고 사랑하는 부분이 가장 큰 포상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아무리 해외에서 공헌을 했다고 해도 다시 병역 특례, 면제가 부여되는건 형평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 "병역특례가 가능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도 "클래식이나 국악 같은 경우는 시장 지분이 굉장히 미약하다. 클래식이나 국악 분야는 보호 측면에서도 특기자 개념으로 (병역특례를) 적용할 수 있을거다. 하지만 (대중 문화 분야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충분히 그에 상응하는 많은걸 얻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임진모는 무엇보다 "지금 시대의 키워드는 공평, 평등, 공정"이라며 "입대를 앞둔 젊은이들은 방탄소년단이 입대해 주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을 가질 것이라 본다. 방탄소년단은 엄청난 돈을 벌었고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룬 팀"이라고 강조했다.
7. IZM 선정 우리시대 최고가수 TOP 10
(연합뉴스, 2023.10.8) 대중음악평론가 39명이 선정한 '우리 시대 최고 가수'에 '가왕' 조용필이 꼽혔다.8일 임진모 평론가의 소속사이자 유튜브 채널 '음악 아저씨 임진모' 제작사 오간지프로덕션에 따르면 조용필은 총 43명의 표본 가수를 대상으로 한 평론가 설문조사에서 35표를 얻어 1위에 올랐다. #
조용필은 1968년 록그룹 애트킨즈로 데뷔해 김트리오, 조용필과그림자 등 밴드를 거쳐 솔로로 나섰다. 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히트한 것을 시작으로 1980년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등이 수록된 1집으로 국내 가요계 사상 첫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그는 지난해 11월 20집의 선공개 싱글인 '찰나'와 '세렝게티처럼'을 발표해 여전히 세련된 감각과 녹슬지 않은 보컬로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올해 데뷔 55주년을 맞아 정규 20집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조용필에 대해 박효재 평론가는 "소리의 탐구자, 그의 여정이 곧 한국 대중음악 역사의 단면"이라고 평했다. 조해람 평론가는 "한국이 보이저호(무인우주탐사선)를 쏘면서 단 한 곡만 실어야 한다면 조용필 노래 중에서 골라야 한다"고 했다.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는 23표를 얻어 2위, '서른 즈음에'를 부른 고(故) 김광석은 21표로 3위를 각각 기록했다.
김진성 평론가는 "이미자의 진솔한 가창은 시대를 초월해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고 말했다. 신혜림 평론가는 "(김광석은) 세상을 떠난 지 27년이 지났어도 대체할 수 없는 목소리"라고 평가했다.
나훈아는 20표로 4위를 차지했다. 5위에는 상대적으로 젊은 아이유(19표)가 올라 눈길을 끌었다. 아이유에 대해 박수진 평론가는 "젊은 창법의 '나우'(NOW) 아티스트", 김진성 평론가는 "드라마와 영화까지 21세기의 K팝은 물론 문화 콘텐트의 아이콘"이라고 말했다.
이밖에 이소라·김건모(18표·공동 6위), 이승철·박정현(17표·공동 8위), 임재범(16표·10위)이 상위 10위 이내에 이름을 올렸다. 이어 패티김(14표·11위), 김현식(13표·12위), 송창식(10표·16위), 배호·신승훈(9표·공동 17위) 순이었다.
이번 조사에는 임진모, 김도헌, 정민재 평론가 등 음악 웹진 '이즘'(IZM)의 전·현직 필자 39명이 참여했다. 조사 대상 가수는 1960년대 이후로 한정돼 이난영·고복수·남인수·현인 등은 제외됐다.
8. 비판
한국의 대표적인 음악평론가라고 하지만 오류에 대한 비판도 잦다. 사실 이는 임진모가 국내 음악을 주로 비평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 최초의 대중음악평론가 서병후[15]가 스스로의 직업을 " 팝 음악 칼럼니스트"라고 정의했듯 임진모가 주로 활동하던 8~90년대에 대중음악은 당연히 해외, 즉 영미권의 팝 음악을 칭하는 말이었다. 음악 좀 들었다 하는 사람들은 다들 외국, 그것도 선진국인 영미권의 음악에 빠삭하고 한국 대중음악은 질낮은 2류 음악으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한국 대중음악에 재평가의 바람이 불고 신중현 등의 원로 음악가들이 다시금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들어 임진모의 다음 세대라 볼 수 있는 신현준 등의 음악 평론가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본인도 이 재평가의 흐름에 동참하며 한국음악을 소개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임진모는 한국 대중음악평론가라기보다는 팝 칼럼니스트로서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과거 문화 탄압이 심각하던 시절 전문가의 한계이기도 하다. 어지간한 해외 음반은 검열을 먹고 금지곡이 빠진 채 발매되거나 아예 한국에 발매되지도 않아 이른바 "빽판"을 구해야 했던 시절에는 구할 수 있는 정보가 극히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임진모와 같은 팝 칼럼니스트들은 질높은 정보를 독점한 채 전문가로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 전문가조차도 사실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질이 그렇게 좋지 않았으며, 정보를 얻는 루트도 미국 음악잡지의 가십성 뉴스나 그 가십을 번역한 일본 잡지 등으로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사실 이 전문가들이 말하던 지식들도 사실 완전히 틀렸거나 부정확한 것이 적지 않았다. 당장 한국 프로그레시브 록, 아트 록 전문 DJ이자 시완레코드의 설립자인 성시완은 이탈리아 프록 밴드 프레미아타 포르네리아 마르코니(Premiata Forneria Marconi, P.F.M)의 이름의 유래가 뭔지 몰라 “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무선전신의 선구자 굴리엘모 마르코니를 기린 이름을 지닌 이탈리아 그룹”이라고 엉터리로 해석해 소개한 적이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16] 나름 한국 아트 록 음악의 전문가이며 그 지식 수준이 임진모보다 훨씬 더 전문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성시완도 이러한 기본적인 정보를 몰라서 쩔쩔매던 시절이었다. 임진모가 퍼트린 정보 중 엉터리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도 이러한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다.
임진모는 어느 인터뷰에서 비틀즈 마니아들에게 미안한 점이 있다고 했다. 그동안 활동하면서 방송이나 글을 통해 비틀즈에 대해 몇 가지 잘못된 정보를 소개한 일을 염두에 두고 한 말 같았다. 그는 “비틀즈 팬들은 팝의 전설에 대해 모든 것을 꿰고 있지만 나는 음악평론가이기에 A부터 Z까지 다른 음악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다 챙겨야 되는 상황입니다.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알 수가 없죠”라며 사정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내게 비틀즈에 대해 가르쳐주면 고맙겠다, 메일로 지적을 받을 때가 가장 고맙다”라고 했다. 팬은 그 가수에 대해서만 애정 만세를 부르면 그만이지만, 평론가는 모든 가수들의 음악을 챙겨야 하기에 고충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편, 이러한 구세대 방송인과 (자칭) 음악평론가들은 이후 문화 검열이 해제되고 인터넷이 등장하자 서서히 하나둘씩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17][18] 문제는 임진모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임진모는 배철수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십수년간 꾸준히 고정 출연했고, 이를 바탕으로 각종 방송 출연, 라디오 DJ, 신문 기고, 대중강연 등으로 어느새 대한민국 최고의 음악평론가, 팝칼럼니스트로 자리잡아 버렸다. 거기에 김구라 등의 연예인들이 음악평론가의 대명사로 그를 언급하며 한국 음악평론가로서 임진모의 커리어를 계속해서 연장시켰다. 이로 인해 '음악평론 하면 임진모'하는 공식이 대중사이에 생겨버렸고 나아가 이 임진모의 인맥으로 구성된 izm 사단이 등장하며 한국 음악평론계에 이른바 '임진모 카르텔'이 형성되게 되었다.
뮤직메카라는 음악유튜버는 "언제까지 임진모일 것인가? 국내 음악평론의 현실에 대해 알아보자"라는 영상을 올리기도 했는데, 언제까지 임진모만 찾을 것이냐라는 비판의 시각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후배들 실력이 임진모와 비교 안될 정도로 자타공인의 인정을 받았었다면 진작 임진모는 끝났을 것 아닌가 하는 외부 시각도 존재한다.[19]
방송계에서 임진모를 편애하게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평론계에 해외 유학파가 드문 것, 방송에 어울리는 인물이 적은 것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다른 분야는 해외에서 그 분야를 전공한 전문가들이 있지만, 평론계는 유독 진입장벽이 낮으며, 해외에서 그 분야를 공부할 수 있을 만큼 어학 실력이 뛰어나다면 굳이 대중음악 평론을 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20]
물론, 김영대 평론가처럼 본고장인 미국 매체에도 기고하는 유학파 평론가도 있지만, 매체 수에 비해 유학파 평론가의 수는 적으므로 결국은 대중에게 익숙한 인물인 임진모에 의존하게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TV나 라디오 같은 매체에서 활동할 경우, 글솜씨 뿐만 아니라 음성도 중요한데, 임진모는 대중에게 신뢰감을 주는 안정적인 중저음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 글솜씨도 좋으면서 좋은 음성과 정확한 발성을 지닌 인물을 찾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임진모에게 유리한 환경인 것이다.
8.1. 중계위원 해설 논란
2010년대 후반에 들면서 그래미, AMA 시상식 중계위원의 역할을 맡았을 때 상당한 비판을 많이 받았다. 같이 나온 배철수와의 합이 안 맞고 기싸움 하는 것 같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고 뜬금없는 아재개그로 흐름을 해친다는 평가를 받았다. 원래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임진모가 출연하는 "스쿨 오브 록" 코너에서도 배철수와 임진모의 진행이 그런 식이기는 하지만, 시상식 무대 중계에서 라디오 프로그램과 같은 식으로 진행을 하는 것은 호불호가 갈릴 만 했다.가수를 소개할 때도 기성가수들, 자신의 시대에 활동했던 유명 팝 가수의 소개는 길게 하지만 활동기간이 기간이 길지 않은 2010년대의 가수들의 경우 비교적 짧고 알려진 내용만을 말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방탄소년단과 EXO를 혼동하는 기초적인 자료 조사 미숙은 물론이고, 레이디 가가를 가리켜 "공연녀"라고 부르는 등 경솔한 발언으로 비판을 받았다. 2011년 그래미에서는 The Suburbs로 올해의 앨범상을 탄 아케이드 파이어에 대해 '잘 모르고 별 관심도 없다'라는 식의 태도를 보여 음악 리스너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제 64회 그래미 시상식을 끝으로 배철수, 임진모는 더이상 그래미 중계를 하지 않을 것을 선언했다. 무려 20여년의 세월동안 그래미 시상식을 중계한 이들의 노고에 대해 찬사와 아쉬움을 표하는 일부 리스너들이 있었다. #1
9. 임진모에 대한 말, 말, 말
평론가로서의 임진모는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훌륭한 평론가다. 음악과 이 음악이 사회에 미치는 현상과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이 음악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대중적으로 사랑을 크게 받았을까에 대해 심도깊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보기에는 대한민국에서 임진모 씨가 제일 뛰어나다고 본다.
배철수
배철수
시대성을 놓치지 않고 자기만의 시각을 견지하는 평론가는 거의 없다. 내가 볼 때는 유일한 대한민국 음악평론가라고 생각한다.
전찬일
전찬일
평론가 임진모는 인간을 읽을 수 있는 평론가다. 인간을 품어서 문장을 쓰는 평론가다.
김윤아
김윤아
항상 객관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해 노력하는 평론가다. 단순한 비판이 아닌 발전을 위한 비판을 하는 점에서 평론가로서 레전드로 자리잡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윤도현
윤도현
임진모는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이 있다. 요즘도 젊은 친구들과 글을 쓰고 평론을 하는, 소통에도 일가견이 있는 평론가들의 롤모델이다.
김현철
김현철
10. 여담
- 키는 160cm 초반대로 단신이다.
- TMO로 군 복무를 하였다.
- 음악 평론가가 되지 못했다면 야구 해설가가 되려고 했다.[22]
- 1991년 기자를 관두고 아카펠라그룹 인공위성의 매니저 생활을 잠깐 했었다. 1993년도에 잘 돼서 빚을 다 갚았는데, 만약 인공위성이 없었다면 아직도 빚 때문에 계속 음반을 제작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23]
-
1997년쯤부터는 강연 요청이 밀려들었다고 한다. 바쁠 때는 한 달에 많게는 20번 넘게 강연을 나갔다고 한다.
- 신촌의 록카페 'JFK'에서 다른 음악평론가들과 함께 DJ로 활동하였다. 링크
- 개그맨 지상렬이 드립의 소재로 자주 소환되는 편이다. EX) 상대가 음악에 대해서 전문용어를 남발할 경우, " 네가 임진모야!?"
-
이러한 드립의 소재는 지상렬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송에서도 활용된다. 예를 들아,
박명수도 라디오에서 전주 듣고 바로 노래 맞춘 청취자에게 "죄송한데, 임진모에요?"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링크 또,
TVN <
뿅뿅 지구오락실> 3화에서도
이은지가 "진짜 가요계 열풍이 2010년도야!"라고 하자
나영석 PD가 "근데 어디서 나오셨어요?" 물었더니
이은지가 '엫, 임진모입니다'.라고 답변하기도 하였다.
-
음악 분야 외에도 특정 분야에서 전문성을 보일 때[25] 쓰이는 대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ex.방구석 임진모, 먹방계의 임진모 등등
- 포스트락 마이너 갤러리에서는 그의 군복무 시절 미담이 올라오기도 했다.[26]
-
김구라와 오랜 인연이다. 팝 음악DJ가 꿈이었던 김구라는 본명인 김현동으로 활동하던 무명시절 때 음악쪽으로 공부를 하고파 임진모에게 직접 연락을 취했다고. 구체적으로 당시 임진모가 연재했던 조선일보 칼럼,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진행한 '팝의 사회사' 코너를 듣고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같이 공연도 보러 다니는 사이였다고. 김구라는 임진모와 음악이야기하는 시간이 너무 좋고, 언제 만나도 반갑고 유쾌한 사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연인지
구라철에도 임진모가 나온 적이 있다.
-
상당한 명필이다. 지금도 무언가 필사한 손글씨 노트를 지참하고 다닌다.
}}}||
- 2024년 5월 23일 배철수의 음악캠프의 3부 막바지에 빌리 아일리시의 음성 메시지가 공개되었다. 이때 임진모를 영어 스펠링인 Lim Jinmo대로 림진모로 발음해서 배캠 팬들이 임진모가 북한 사람같이 되었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11. 관련 링크
[1]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본인이 직접 성이 수풀 임(林)이 아닌 맡길 임(任)이라고 밝혔다.
[2]
음력 생일.
TBS
2018년
9월 20일자 임진모의 마이웨이 방송 참조.
[3]
현
경기도
부천시
[4]
공식 유튜브 채널
[5]
기자시절 매주 팝 칼럼을 연재했다고 한다.
[6]
발매한 음반 3개가 잇따라 실패하면서 1년 여만에 3억원 가까운 빚만 떠안았다고 한다.
[7]
현
헤럴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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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수의 음악캠프 최장수 게스트
[9]
초기에는 매일 방송되었다가 2007년 10월 14일부터 MBC 라디오 가을개편으로 일요일에만 방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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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창사60주년 특별기획.
[11]
2021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매일 방송하였다.
[12]
김지연 (2009).Elton John의 앨범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 (1975) 분석 :석사학위논문.동덕여대 공연예술대학원
[13]
1955년생.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1977년 동양방송 18기 텔런트로 데뷔한 배우 출신이다.
[14]
가수가 안해준다는 뜻인 것으로 보인다.
[15]
1942~2014.
타이거 JK의 아버지이다.
[16]
실제 밴드 이름의 유래는 밴드의 고향
밀라노 근교에 있던 빵집에서 따온 이름이며, 이는 밴드 멤버들이 데뷔 당시부터 꾸준히 설명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정보마저도 전해지지 못할 정도로 당시 한국 음악 평론가들의 정보력이 열악했다는 것.
[17]
이종환,
김기덕,
김광한 등등이 대표적이다. 모두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영향력을 잃고 밀려났다.
[18]
대중음악평론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모든 분야에서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대중문화, 언론, 기업, 관료, 사회운동뿐 아니라 심지어 엄격한 학문적 검증을 요구하는 학계에서도 숱하게 벌어졌다. 이것은 구세대가 특별히 무능하거나, 사악해서가 아니라 국제교류가 거의 없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전문성을 쌓기 힘들었던 당시 시대의 한계로 봐야 한다. 그래서 경제적 풍요와 함께 국제교류가 활성화되는 1990년대 이후로는 사회 전반에서 급격하게 세대교체가 이루어진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정치의 핵심구호로 "세대교체"가 계속 등장했던 것도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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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된 평론가로서의 철학을 보면, 어디서 아주 이상한 신념과 미신에 사로잡혀서 쓸데 없는 편견을 가진 이들이 있다. 그거 버려야 한다.라고 쓴소리를 한 부분도 있는데, 사실,
izm 사단이 이런 비판을 많이 듣는 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임진모가 키운 사람들이 정작 스승의 충고는 염두에 두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평론가로서의 전문성은 일반 대중이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평론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는 일반 대중이라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에 그나마 태도 논란이 덜한 사람을 찾는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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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라이선스 음반 해설로 명성을 떨쳤던 성문영 평론가의 경우가 그러하다. 이 사람은 영국에서 관련 분야를 전공했으며, 특히
디페시 모드를 비롯한 영국 대중음악 분야에 조예가 깊었으나, 현재는 음악 평론가로 활동하기보다는 영어 번역가로 활약하고 있다.
링크
[21]
TBS FM
2018년
8월 30일 임진모의 마이웨이
[22]
TBS FM
2018년
9월 4일 임진모의 마이웨이
[23]
KBS Cool FM
2015년
8월 27일
박명수의 라디오쇼
[24]
TBS FM
2018년
9월 20일 임진모의 마이웨이
[25]
혹은 비꼴 때
[26]
최근의 음악 리스너들이 그렇듯 포락갤도 안티 임진모 성향이 강한데, 그럼에도 임진모의 미담에 대해서는 모두가 인정해주는 분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