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4-13 09:21:28

이종환(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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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이종환(李種煥)
본관 덕수 이씨[1]
출생 1937년 12월 7일
충청남도 아산군
사망 2013년 5월 30일 (향년 75세)
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 아파트 자택
학력 경복고등학교 (졸업 / 31회)
중앙대학교 ( 법학 / 중퇴)

1. 소개
1.1. 리즈 시절1.2. 1990년대 이후
2.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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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의 방송인.

충청남도 아산군(現 아산시) 태생. 본관은 덕수(德水)다.[2]

나이가 70이 넘은 이후에도 목소리는 그다지 늙어 보이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유명 라디오 DJ이자 방송인. 으로, 김기덕과 함께 MBC 라디오 골든마우스의 최초 수상자. 여성시대, 지금은 라디오 시대, 별이 빛나는 밤에, 밤의 디스크쇼, 음악살롱, 밤으로의 초대 등등을 진행하면서 주가를 높였다. 여기까지만 보자면 한국 연예계 최고의 방송인 칭호를 들을 만한 사람 중 하나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대한민국 문화계의 가장 큰 어둠 중 하나였을 정도로 전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왜인지는 이제 아래부터 쭉 읽어보면 알게 된다.

2013년 5월 30일, 지병인 폐암으로 사망했다.

1.1. 리즈 시절

1937년 12월 7일 충청남도 아산군(현 아산시)에서 아버지 이순영(李順永, 1917. 6. 20 ~ ?)과 어머니 하음 봉씨 봉정임(奉貞任, 1927. 11. 29 ~ )[3] 사이의 1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큰아버지 이관영(李寬永, 1914. 11. 6 ~ 1954. 6. 12)에 입양되었다.

경복고등학교(31회)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법학과를 중퇴한 후, 음악감상실 "디쉐네"의 DJ로 활동하다가 1964년, MBC의 라디오 PD로 입사했다.

당시는 레코드나 테이프조차 구하기 어려웠던 1960년대였는데, 이 음악감상실이 그나마 팝음악이나 클래식을 들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다방과 결합된 형태였으며, 고객이 신청곡을 내면 DJ가 구라를 떨면서 틀어주는 방식. 현재의 라디오 프로그램과 형식이 비슷하다. 영화 위험한 상견례 품행제로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시에도 가요의 경우에는 그래도 국내에서 음반이 나왔지만, 팝이나 클래식은 라이센스반이 거의 없던 그 시절이었는데다 수입원판은 제대로 된 국내 유통경로도 없고 가격도 비싸 구하기가 어려웠고, 미8군 등을 통해서 나오는 음반 등으로 신보를 접하던 시기였다. 물론 당시 이른바 전축이라 불리우던 오디오의 보급율도 낮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퇴생이라 하더라도 당시 대학 물 먹은 사람이 DJ로 활동한다는 것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고, 그래서 꽤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알다시피 1950년대는 대학 진학률이 10%도 채 안 되었던 시절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고졸조차도 흔치 않았다. 중앙대학교가 2020년대인 現 시점에서도 들어가기 쉬운 학교는 아니지만, 당시의 이종환은 현재 최고 명문대 출신 연예인들의 프리미엄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워낙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에 학교의 위상은 그다지 좋은 건 아니었다. 이 때는 오히려 경복고등학교라는 일류 학교 출신이 디제이를 하네가 더 의아할 정도이다. 그래서 아마 중퇴했을 것이다. 비슷한 예로 원로 연기자 신구가 있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 2번이나 응시했는데 다 탈락하여서 결국 성균관대학교로 진학했으나, 그마저도 중퇴했다. 이유는 마찬가지로 학비에 비하여[4] 대졸자의 메리트가 그다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종환도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를 진학했다면 정황상 전기 때 서울대 진학을 하려다가 떨어지고, 대신 후기 때 중앙대로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경복고 졸업한 거나 중앙대 졸업한 거나 큰 메리트가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어마어마한 학비를 내느니 차라리 중퇴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1950년대 당시엔 연예인의 사회적 지위가 높지 않았으며, 사회 전반적으로 저학력인 사회인지라 고학력 연예인이 드물었다. 오죽하면 대학 나온 사람을 따로 부르는 "학사 가수"란 명칭이 있었겠는가? 대졸자 정도면 방송국 실세들과 어느 정도 대화가 통했기 때문에 특별한 취급을 받으면서 자신의 계통에서 권력을 휘두르기 쉬웠다. 당시의 학사의 위상은 현재의 SKY 대학 석사, 타 대학 박사 정도로 보면 된다. 비슷한 예로 배우 오지명이 있는데, 역시 좋지 않은 소문이 많다.

DJ를 연예인이 아닌 방송인으로 본다고 해도, 당시의 방송사 직원의 위상 역시 지금과는 다르다. 지금은 이른바 언론고시라 불릴 만큼 방송사 직원의 직업적 위상이 크지만, 80년대 초반 컬러TV 시대 이전까지는 기자 직종을 제외하면[5] 다른 부문의 직종은 지금만큼의 인기 직종은 아니었다. 이종환과 동 시대 DJ로 활약한 황인용이 어느 인터뷰에서도 밝힌 바 있다. 물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지만, 70년대까지는 방송사 월급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고 한다.[6]

이종환은 이후 여러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나 프로듀서를 맡았고, 가끔은 동시에 DJ와 PD를 겸임하기도 했다. 당시 팝송을 소개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은 드물었는데, 이종환은 비록 중퇴했지만 대학교도 다녔을 정도로 그 당시로써는 보기 드문 고등교육도 받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가능했다.

그러나 이쪽 업계가 그렇듯이 1980년대에 그의 방송을 들었던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인터넷 시대에 접어들자 그가 얼마나 구라를 떨었는지 알게 되었다는 평이 많다. 즉, 잘 알지도 못하는 얕은 팝송 실력을 가지고 전문가인 양 했다는 점. 팝송에 대한 정보 접근이 미 8군에서 나오는 미국 잡지가 전부였던 시절이니 어쩔 수 없었던 면도 있지만, 그나마 그 시절 해외 언론을 접할 수 있는 방송국에 있었기 때문에 귄위자 행세를 하려면 좀더 공부가 필요했던 건 사실인데, 이 사람은 전혀 그런 게 없었음에도 자신이 전문가인 양 한 것은 좋게 보기 힘들다.

물론 대한민국은 당시 모든 면이 그랬다. 방송계도 그랬지만, 학계는 훨씬 더 심했다. 이런 면이 개선된 것은 역시 2000년대 들어와서이니 당시 시대의 한계로서 조금 실드는 쳐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종환 뿐만 아니라 당시 팝전문가 행세를 했던 DJ들, 예를 들어 김광한, 김기덕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방송을 듣고 자랐던 60-70년대생들은 인터넷 시대가 되고 해외 유학으로 정보 접근이 넓어지면서 이들이 그당시에 전혀 전문가라고 볼 수 없는 얄팍한 지식으로 전문가 행세를 했음을 깨닫게 됐다.[7][8] 하지만 그 당시 한국은 모든 면이 그랬으니 이들을 탓하기보다는 시대의 한계라고 봐야 한다.

이 때부터 그는 '연예계의 밤의 대통령' 노릇을 했는데, 여러 연예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키워 주거나, 혹은 죽이거나 했다. 소위 "이종환 사단"이라고 불리는 연예인들이 나타난 게 이 무렵이었다. 이들 중 일부가 바로 일명 " 쎄시봉 트리오"로 불리는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 등. '쉘부르'라는 음악 다방을 직접 경영하는 등 사업적인 활동도 했는데, 명동에서 명품 구두가게를 하던 시절에는 자신들의 사단을 동원하여 홍보 활동을 했다. 문제는 이런 것이 거의 강압적이었고 무보수였다는 소문이 많다.

1980년대 초반,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한 후 잠시 로스앤젤레스 이민을 가서 자신의 사단의 일원인 이장희와 함께 교포대상 라디오 방송국을 세웠으나 대차게 말아먹고 1980년대 중반에 귀국한 후 MBC에서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 쇼>, < 여성시대>를 진행한다.

이때도 팝에 관련된 구라는 여전했지만, 워낙에 그를 추종하던 팬들이 많았던지라 <밤의 디스크 쇼>가 진행하던 슬롯의 청취율이 꽤 높았다. 당시 밤 10시~12시까지의 프라임 타임에 MBC FM - 이종환, MBC 표준FM - 이문세(별이 빛나는 밤에), KBS - 김미숙/ 김희애로 삼분 되었는데, 10대 소녀층에서는 별밤이 가장 인기였으나, 남성이나 2~30대 이상은 이종환이나 김미숙을 많이 들었다. 일요일 밤의 공개방송은 별밤과 디스크쇼가 막상막하였는데[9], 많은 수의 청소년들이 둘 중 하나를 본방 청취하고, 다른 하나를 테이프에 녹음해서 듣고는 했다.[10]

그러면서 이문세, 이수만, 유열 등과 함께 MBC 라디오 프로그램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이때 공개방송에서도 나이(당시 50대)에 걸맞지 않게 여러가지 저속한 표현으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이때도 '연예계의 밤의 대통령' 노릇은 여전해서, 그의 휘하에서 큰 가수들이 좀 된다. 이 때 이종환 사단으로 불린 사람은 최성수, 도시의 아이들[11] 등이었다. 물론 미국에서 돌아와 방송하던 80년대의 이종환의 위상은 당시 DJ 중 POP의 제왕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 그의 공백기 동안 MBC의 김기덕, 2시의 데이트와 KBS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 등이 주간타임 팝 전문 DJ를 양분하고 있었고, 저녁이 되면 8시~10시 사이에는 KBS 황인용의 영팝스가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동 타임에 MBC의 왕년의 인기스타 백형두가 진행하는 팝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당사 음악세계 등 음악잡지에 FM 음악 프로그램 인기순위에서는 황인용이 부동의 1위. 심야에 전영혁이 진행하는 1시의 데이트(25시의 데이트)는 일반적인 팝이라기보단 록음악 중에서도 프로그레시브 등을 많이 다루었기에 대중적인 인기는 적었다.

80년대까지는 국내 FM라디오 프로그램 편성에서 팝음악이 가요 프로그램보다 많았다. 비율로 65:35 정도. 이후 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가요시장이 크게 성장하면서 FM에서 팝의 비중은 급속히 줄어들었고, 2000년대 이후에는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홀로 고군분투, 독야청청하는 시대가 온다.

1.2. 1990년대 이후

그러나 1990년대에 접어들자 이미 나이가 환갑에 들어서 그런지 10~20대 취향의 방송은 당연히 그와 잘 안 맞았다. 1990년에 미국에 건너가서 2년여간 미주한인방송 (이장희가 진행하던 라디오코리아와는 다른 곳이다)을 진행하다가 1992년 말에 귀국하여 MBC 표준FM 저녁 8시 ~ 9시 슬롯에 단독으로 <밤으로의 초대>를 진행하였으나 6개월 만에 심야시간인 자정~2시로 바뀌었다. 저녁 8시 ~ 10시 슬롯은 전통적으로 중고생이나 퇴근하는 직장인이 주 청취층인데, 결국 이들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청취율에서 고전을 면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은 "원래 내 시간대는 심야다"라면서 의욕적으로 심야시간대로 옮긴 방송을 하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이 역시 오래가지 못하고 하차하게 된다.

그래서 어릴 때 그의 방송을 들었던 30 ~ 50대 아줌마 취향의 방송프로로 옮겨간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밤의 디스크쇼> 진행 당시 여성시대 진행을 병행한 바 있었다. 이 때 연기자 최유라와 진행한 MBC 라디오의 '이종환,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는 공전에 대히트를 기록했다.

이 시절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사이에 LA 한인방송국과 전화연결로 대한민국 상황을 정기적으로 이야기해주기도 했는데, 나이대가 나이대인지라 지극히 보수적인 정치적 견해를 공개적으로 내세워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종환,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를 진행하면서 숱한 구설수를 만들어 냈고, 결국 2003년 이후 MBC FM4U에서 아침 9시 ~ 11시 슬롯에 방송한 <이종환의 음악살롱>을 진행하다가 다시 한 번 구설수에 휘말리는 바람에 하차하면서 결국 MBC 라디오와 연이 끊어지게 된다. 이후 자숙의 시간을 갖다 TBS으로 복귀해 밤 프로그램인 <이종환의 마이웨이>의 DJ를 맡았다. 방송 시간은 초창기엔 저녁 8시 ~ 10시였고 2007년 이후에는 새벽 12시 ~ 2시로 옮겼으나 2008년부터는 저녁 10시 ~ 12시로 고정. 헌데, 간간히 욕설 방송을 해서 경고먹은 적도 있었다. 결국 <마이웨이>는 2011년 11월, 가수 이상우에게 DJ 자리를 넘겨주고 하차하였다.[12]

2012년 11월에 나온 보도에 의하면 폐암 투병 중이라고 한다. 결국 2013년 5월 30일, 폐암으로 노원구 하계동 자택에서 사망. 향년 75세. 평소 상당한 골초였다고 한다.

2. 평가

구수한 중저음으로 사연을 읽어 줄 때는 영락없이 맘씨 좋은 아저씨 같아서, 올드 팬들 중에는 학창 시절의 향수로 인해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는 팬이 많다. 젊은 층에서도 < 이종환,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에서 보였던 최유라와의 절륜의 호흡을 기억하는 팬이 있긴 하다.

상술했듯, 1980년대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독보적인 위치 때문에 '팝송 하면 이종환'이라는 인식이 강했으나, 1990년대 이후 들어 밑천이 얕은 팝 지식으로 인해 그 이상의 매력은 잃은 지 오래됐다. 1990년대 초 자신이 단독으로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을 대차게 말아먹은 후 청취대상을 30 ~ 50대 장년층으로 잡아 전환해 성공한 것을 보면 그 때까지만 해도 이종환에 대한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편향적이고 권위적이며, 성찰이 부족한 언행으로 인해 물의를 일으키는 일이 잦아지면서 중장년층들 사이에서도 안티가 상당히 많아졌다. <이종환,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시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최유라는 처음 진행할 때 그의 기세에 눌려서 거의 울 뻔했다는 이야기도 할 정도였다. 2013년 현재야 최유라는 방송인 중에서도 아줌마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이종환,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를 처음 진행하던 1990년대 중반 20대 후반의 새댁이었던 최유라가 환갑을 바라보는 시아버지 같은 이종환한테 기가 눌린 건 당연지사다.


[1] 충무공파 25세 종(種) 항렬. [2] 출생지를 보면 알겠지만, 한국사 최고의 명장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13대손이다. 출처. [3] 봉영운(奉永雲)의 딸이다. [4] 서을대와 지방 국립대, 시립대를 제외한 다른 학교 등록금은 당시 나라 경제 수준이나 물가에 비해 매우 비쌌다. 대학의 별칭 상아탑을 학부모들이 논밭 팔고 소 팔아 낸 돈으로 쌓은 우골탑이라 비꼬아 말했을 정도. [5] 기자는 언론인이라는 부심. [6] 대신 요즘 비리 기자들처럼 뒷돈을 받거나, 부업으로 수입을 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7] 해외여행 자유화와 해외유학파의 급증 그리고 인터넷의 발달, 국제교류 활성화 등으로 실체가 드러나면서 이 부류의 방송인, PD, DJ, 음악평론가들은 1990년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서서히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밀려나게 된다. 다만 끝까지 살아남아서 지금까지 해악을 끼치고 있는게 임진모... 다만 연령대로 보면 임진모는 이종환, 김기덕 바로 다음 세대이다. [8] 그 중 예외적인 인물이 황인용이다. 원래는 뉴스, 시사교양, 예능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던 아나운서 출신이지만, 라디오 팝 음악 방송 DJ를 맡으면서 해외 팝 정보를 적극적으로 찾아 공부하였고, 자신이 틀린 점을 지적하는 청취자가 있으면 바로 인정하고 수정하여 말하곤 하였다. 오디오 기기에서도 꾸준히 내공을 쌓아서 전문가 경지에 올라 은퇴 한참 후인 현재에도 음악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9] 별이 빛나는 밤에는 본 방송은 수도권에만 나가고 지역 MBC가 자체방송을 하던 때였다. 예외적으로 공개방송만 전국에 송출됐다. [10] 88년부터 별이 빛나는 밤은 일요일에 방송하던 공개방송을 디스크쇼와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토요일로 바꾸기도 했었다. 그러나 89년 7월에 이종환이 디스크쇼에서 하차하면서 공개방송이 폐지된 것이 함정. [11] "선녀와 나무꾼"으로 유명했던 가수 김창남이 이 그룹 출신이다. [12] 사실 그 전부터 지병인 폐암이 악화된 상태여서 생방송 중 수시로 기침을 하는 모습이 그대로 방송으로 통해 나오기도 했다. 그래도 개편 시기까지 마치고 하차했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