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ito Liberale Italiano (PLI) | |
슬로건 | |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0000FF> 영문 명칭 | Italian Liberal Party |
한글 명칭 | 이탈리아 자유당 |
창당일 | 1922년 10월 8일 |
해산일 | 1994년 2월 6일 |
전신 | 자유연합 |
후신 | XX당 |
중앙당사 | 이탈리아 로마 Via Frattina, 89 |
대표 | XX |
이념 |
자유주의 자유방임주의 반공주의 |
정치적 스펙트럼 | 중도우파 |
당 색 |
파란색(#0000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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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원 수 | XXXX명 |
상원 |
4석 / 315석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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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원 |
17석 / 630석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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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조직 | |
국내조직 | |
청년조직 | 한국어 이름 (원어 이름) |
기타 조직 | 한국어 이름 (원어 이름) |
기관지 | 의견 (L'Opinio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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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22년부터 1994년까지 존재했던 이탈리아의 중도우파 자유주의 정당으로, 자유연합[1]의 후신이다.2. 역사
2.1. 불안한 출발
1919년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상실하고 원내5당으로 전락하는 참패를 겪은 자유연합은 1921년 총선에서도 부진을 면치 못하다가, 1922년에 조반니 졸리티 전 총리의 주도하에 이탈리아 자유당이라는 이름으로 재창당하게 되었다.당시 자유당은 현직 총리 루이지 팍타가 소속된 여당이긴 했으나, 연정 협상으로 간신히 총리직을 차지한 소수정당이라서 의회 내 기반이 약했고, 당내에서도 현직 총리 팍타와 실세인 졸리티 전 총리 간의 알력이 있었다.
그리고 창당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베니토 무솔리니의 국가 파시스트당이 검은 셔츠단을 동원한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검은 셔츠단은 인원도 적고 조잡한 무기로 무장하고 있어서 쉽게 진압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정작 통수권자로서 쿠데타 진압에 있어 최종 결정권을 가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1차 대전 종전 이후 치러진 두 차례의 조기총선과 그로 인한 잦은 내각 교체에 질려 의회민주주의를 불신하고 있는 상태였고, 때마침 무솔리니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기다렸다는 듯이 팍타 내각을 불신임하고 무솔리니를 총리로 임명했다.
이로써 자유당은 창당하자마자 정권을 잃었지만, 자유당의 졸리티 전 총리 등 자유당의 중진들은 파시스트 정권에 협조하는 노선을 택해 1923년에 국가 파시스트당이 제출한 아체르보 법(Legge Acerbo)을 통과시켰는데, 해당 법안은 앞으로 있을 총선부터는 원내1당에게 2/3 의석을 부여하여 일당독재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주는 악법이었다.
그리고 해당 법이 적용된 1924년 총선에서 자유당은 국민명단(Lista Nazionale)이라는 국가 파시스트당이 주도하는 정당연합 소속으로 선거를 치렀고, 같은 연합 소속인 국가 파시스트당에게 지지층을 빼앗기며 기존 의석인 43석에서 거의 1/3 토막이 난 15석으로 쪼그라들었다.
이후에는 어쨌든 무솔리니의 총선 승리에 기여했으니 연립내각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1926년에 국가 파시스트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불법화되면서 자유당 역시 불법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2.2. 파시스트 정권 치하
1926년 당이 불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반니 졸리티 전 총리를 비롯한 자유당의 중진 상당수는 국가 파시스트당의 일당독재에 순응하고 협조하는 노선을 택했고, 일부 당원들이 반파시즘 투쟁에 참여하기는 했으나 당 전체가 지하에서 반파시즘 투쟁을 이끈 이탈리아 사회당, 이탈리아 공산당 등 좌파 정당들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2.3. 레시스텐자와 거국내각
1943년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이탈리아 왕국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자유당은 합법정당으로 부활했다.그러나 독일 국방군이 무솔리니를 구출하여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수립하는 바람에 이탈리아 전선이 장기화되었고, 자유당은 이에 맞서기 위해 기독교민주당, 이탈리아 공산당, 이탈리아 사회당 등과 함께 민족해방위원회를 결성하여 반파시즘 무장투쟁을 벌였고, 이탈리아 왕국의 거국내각에도 참여했다.
전쟁 직후인 1946년에 왕정 유지 여부를 묻는 개헌 국민투표와 함께 치러진 제헌의회 총선에서 자유당은 노동민주당[2]과 함께 국민민주연합이라는 정당연합을 구성하여 선거를 치렀고, 31석을 확보하며 기민당, 사회당, 공산당에 이은 원내4당이 되었다.
또한 왕정 폐지가 확정되면서 저명한 법학자이자 자유당원인 엔리코 데 니콜라가 이탈리아 공화국의 임시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다.
2.4. 냉전
1947년에 냉전이 격화되자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이탈리아의 거국내각을 이끌던 알치데 데 가스페리 총리에게 사회당과 공산당을 내각에서 축출할 것을 요구했고, 가스페리가 이를 수용하여 거국내각은 두 좌익 정당이 배제되고 기민당과 자유당을 비롯한 중도좌파~ 중도우파 정당만이 참여하는 중도주의(Centrismo) 내각으로 전환되었다.이후 자유당 소속으로 임시 대통령을 역임하던 엔리코 데 니콜라는 1948년 1월 1일 이탈리아 공화국 헌법의 효력이 발휘되자 정식으로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가 같은 해에 의회에서 선출된 루이지 에이나우디에게 대통령직을 넘겼는데, 에이나우디 역시 니콜라와 마찬가지로 자유당 소속이었다.
1948년 총선에서도 자유당은 원내4당 지위를 유지하며 기민당 주도 연립내각에 참여했으나, 1953년 총선에서는 원내7당으로 전락했다.
1963년 총선에서는 상원 18석, 하원 39석을 얻어 역대 최다 의석을 확보하는 동시에 다시 원내4당으로 약진했고, 1968년 총선에서는 의석이 소폭 감소하긴 했으나 원내4당 지위를 유지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1972년 총선에서는 다시 원내6당으로 떨어졌고, 이후에는 60년대와 같은 전성기를 누리지 못하고 군소정당으로 연명했는데, 원내1당인 기민당이 단독 과반을 확보하지 못해서, 자유당이 연립내각에 자주 참여하긴 했다.
2.5. 마니 풀리테, 해산
1989년 동유럽 혁명과 1991년 소련 해체의 여파로 인해 이탈리아 공산당이 좌파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면서 이탈리아에도 정계 개편이 시작되었고, 1992년 2월 사회당 간부의 비리가 드러난 것을 계기로 대규모 반부패 수사인 마니 풀리테는 기민당이 사회당과 자유당, 공화당, 민주사회당 등을 끌어들여 연정을 구성하던 기존 체제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마니 풀리테 당시 자유당 정치인들 역시 검찰 수사망에 오르긴 했으나, 1992년 총선에서는 원내1당인 기민당이 어그로를 끌어준 덕분에(?) 자유당은 오히려 이전보다 의석을 늘리며 선전했다.
그러나 이는 곧 자유당 소속 정치인들이 줄줄이 구속되며 회광반조에 불과했음이 드러났고, 결국 1994년 총선을 앞두고 자유당은 자진 해산을 선언하여 72년에 걸친 역사에 마침표를 찍었다.
3. 주요 인물
3.1. 창립자
- 조반니 졸리티
- 루이지 팍타
3.2. 자유당 출신 대통령
- 엔리코 데 니콜라
- 루이지 에이나우디
3.3. 자유당 출신 총리
- 루이지 팍타
4. 선거 결과
4.1. 이탈리아 왕국 하원
1924년 15/535 3.3%4.2. 이탈리아 제헌의회
1946년 31/535 6.8%4.3. 이탈리아 의회
1948년 상원 7/237 5.4% 하원 14/574 3.8%1953년 상원 3/237 2.9% 하원 13/590 3.0%
1958년 상원 4/246 3.9% 하원 17/596 3.5%
1963년 상원 18/315 7.4% 하원 39/630 7.0%[3]
1968년 상원 16/315 6.8% 하원 31/630 5.8%
1972년 상원 8/315 4.4% 하원 20/630 3.9%
1976년 상원 2/315 1.4% 하원 5/630 1.3%
1979년 상원 2/315 2.2% 하원 9/630 1.9%
1983년 상원 6/315 2.7% 하원 16/630 2.9%
1987년 상원 3/315 2.2% 하원 11/630 2.1%
1992년 하원 4/315 2.8% 17/630 2.9%
4.4. 유럽의회 선거
1979년 3/81 3.6%1984년 3/81 6.1%
1989년 0/81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