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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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교 교조 이유립 李裕岦 |
|
<colbgcolor=#fbc4c4><colcolor=#fff> 자 | 채영(采英), 중정(中正) |
호 |
한암당(寒闇堂), 정산초인(靜山樵人) 단하산인(檀下山人), 호상포객(湖上逋客) 단학동인(檀鶴洞人) |
본관 | 철성 이씨[1] |
출생 | 1907년 12월 18일[2] |
평안북도 삭주군 | |
사망 | 1986년 4월 18일 (향년 78세) |
가족 |
아버지 이관집(1866~1947) 어머니 배천 김씨(1863~?) ,또는, 태인 백씨(1875~1920) |
형 이유성(1885~?), 이유정(1893~?), 이유필(1899~?) 남동생 이유헌(1913~?) 누이 2명 |
|
아내 진주 이씨(1913~?), 평산 신씨(1922~?) | |
장남 이진후(1944~?), 차남 이진남(1958~) | |
직업 | 종교인, 역사가 |
종교 | 유교 → 대종교 → 태백교 |
정치 성향 | 민족주의, 근본주의 |
저서 | 환단고기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종교인이자 유사역사학자. 호는 한암당(寒闇堂). 태백교[3]의 창시자로, 환단고기의 실제 저자로 여겨지는 자이다.[4]2. 생애
1907년 평안북도 삭주군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철성이다. 13세 때 배달의숙에 들어가 계연수로부터 환단고기에 대해 배웠으며, 계연수는 이유립에게 환단고기를 주며 한 갑자 뒤(1980년)에 환단고기를 공개해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계연수 사후 이유립은 1930년 삼육사란 단체를 발족하고 잡지 『삼육(三育)』을 창간하여 일본의 역사왜곡을 널리 알렸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동아일보 1931년 3월 2일 자에 실린 삼육사 창립 기사를 보면 독립운동이나 역사왜곡 비판같은 문구는 일절 없고 저축을 장려한다거나 잡지를 편찬할 때 주재소의 검열을 받겠다는 내용만 있다. 해당 기사 그리고 1931년과 1933년에 조선총독부가 발행하는 월간지 『조선』에 자신이 지은 시를 기고했다. #
1933년 이유립은 조선유교회[5]에 가입했으며, 1935년에는 조선유교회의 기관지 『일일시보』의 주필을 맡았다. 1938년에는 동아일보 삭주지국장을 맡았으며, 1939년에는 카미카제학원[6]을 세우고 그곳의 교사로 있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이유립은 아버지가 죽고 북한의 토지개혁으로 땅까지 빼앗기자 1948년 월남하여 강화도 대시전에[7]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1949년 오형기라는 사람이 이유립을 찾아왔는데, 오형기는 이유립의 부탁에 환단고기 초간본을 빌려가 필사했다.[8]
1952년 이유립은 영친왕을 옹립하여 왕정복고를 꾀했다가 발각당해 조사를 받았다. 관련 기사
이후 이유립은 1963년 단단학회를 조직하고 1965년 잡지 『커발한』을 발간하여 본격적인 민족주의 역사활동에 나선다. 이유립은 『커발한』은 물론 『자유』[9]에도 민족주의 성향의 글을 다수 게재했으며,[10] 국사찾기협의회에 가담하였고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와도 대담을 가졌다. 대담을 실은 조선일보 1978년 10월 22일자 신문. 3면에 실려 있다.
한편 이유립은 1976년 집을 잠시 비운 사이 이유립이 도망쳤다고 오해한 집주인이 집에 있던 환단고기 초간본을 팔아넘기면서 환단고기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유립은 환단고기를 달달 외운 덕에 환단고기를 복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11] 어찌되었건 이렇게 보관한 환단고기는 1979년 세상에 공개된다. 이유립의 제자인 조병윤이라는 사람이 광오이해사라는 출판사를 통해 환단고기를 출판한 것이다. 이유립은 이에 대해 분노하여 조병윤을 파문하고 1983년 배달의숙을 발행인으로 오자와 발문을 삭제한 새 판본을 내놓았다. 이때 이 판본의 서지사항을 1979년으로 기재했다.
1979년 이유립은 박창암에게 환단고기를 주었는데, 박창암은 이유립의 허락을 받지 않고 일본인 사학자 가지마 노보루(鹿島昇)에게 환단고기의 주해를 부탁했다. 이후 가지마 노보루가 환단고기를 왜곡하자, 이유립은 화를 내면서 박창암에게 원고를 돌려달라고 요구했으나 복사본을 돌려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고 한다.[12]
이후 이유립은 국사찾기협의회로부터 소외되기 시작한다. 1981년 개최된 국사 교과서 공청회에 이유립은 나오지 못했고 국사찾기협의회 측도 환단고기를 논거로 들지 않았다. 이유립은 안호상, 임승국 등 국사찾기협의회 인사들을 비난하는 글을 썼고, 이후 그들과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1986년 4월 17일, 이유립은 문집 정리 작업 도중 쓰러져 18일 오전 1시에 사망했다. 사후 그의 문집은 대배달민족사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1]
사암공파-서령공파 35세.
[2]
음력
11월 14일.
[3]
이유립이 창시한 단군교 계통의 종단. 단단학회라고도 한다. 1909년 해학 이기가 세운 단학회를 모체로 이유립이 재건했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당시에 단학회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4]
스스로는 독립운동가 운초
계연수가 고대로부터 전해진 사서들을 편집해 정리한 환단고기를 전수받은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계연수는 실존인물인지조차 불명확하며 대체로 이유립이 편저자로 내세운 허무인이라고 본다.
[5]
1932년 조직된
유교의 친일 단체.
#
[6]
조선유교회 산하 단체
[7]
태백교의 교당.
[8]
그러나 이유립이 대시전을 세운 것은 1969년의 일이었다.
[9]
박창암이 1968년 창간한 월간 잡지.
[10]
이때 쓴 글의 내용이 환단고기와 일치하면서도 모순되는 부분이 많아, 환단고기가 이유립이 저술한 위서라는 증거가 된다. 즉, 이유립 스스로 초안을 지속적으로 수정 보완하며 환단고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해당 논문
[11]
다른 곳에서는 오형기 필사본이 남아 있어 환단고기가 지금까지 전해져 왔다고 한다.
[12]
그러나 이유립의 말과는 달리, 가지마 노보루가 펴낸 환단고기 일역본 해제에는 1979년 가을에 이유립으로부터 환단고기를 직접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한문 해석 지도까지 받았다고 쓰여 있다. 거기에다 이유립은 환단고기 일역본의 출간을 축하하는 시까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