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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in, Yuri Mikhailovich # #[1]
1. 개요
러시아의 경제학자, 역사학자, 번역가, 스파이. 풀 네임은 유리 미하일로비치 부틴(БУТИН Юрий Михайлович)이고 줄여서 유 엠 부틴(또는 부찐)으로도 불리운다.2. 생애
그에 대해서는 1996년 실제로 러시아 유학을 했던 강인욱 교수가 조사한 내용을 따른다. 자세한 것은 링크 참조. 강인욱의 북방역사기행 <48> 고조선에 미친 러시아사람 잊혀진 소련의 고조선 연구자 - 유 엠 부찐 6·25 때 소련 스파이 부찐, 2000년 전 고조선 밝히다[2]유 엠 부틴의 생애는 이르쿠츠크 지역의 향토인명사전(Иркутск. Историко-краеведческий словарь, 2011)에 나와있다. 그는 1931년 11월 17일 치타주 자바이칼군의 집단농장에서 출생하였다. 시베리아인과의 혼혈이었다고 한다. 어릴 때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으로 인해 중앙아시아로 이주했고 그 곳에서 한국인들을 많이 접하면서 한국어를 습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2년 칸스크 사관학교(Канское военное училище) 동방어 번역학과를 졸업하였는데, 언어적 재능이 뛰어나서 한국어는 물론 중국어, 프랑스어, 일본어 등 8~9개 언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이후 1952년에서 1955년까지의 4년 동안 한국전쟁에도 비밀리에 투입되어 군 통역가로 근무했다. 제대한 후 타지키스탄 대학의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분소의 극동지질학연구소에서 박사과정을 수료, 1969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는 카자흐스탄 위구르연구소, 이르쿠츠크 민중경제연구소에서 교수로 근무했다.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초까지는 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분소 고고민족학연구소에서 근무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한국과 관련된 고대사, 고고학 문헌을 번역하는 번역가로 활동했다.[3] 이후에는 단순히 자료의 번역을 넘어 각국의 자료를 섭렵하면서 1982년에 『고조선』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1984년에는 『고조선』의 후속 연구인 『고조선에서 삼국시대로』를 발간하였고, 1986년에는 고조선과 한국 고대사에 관련한 그간의 작업들을 모아서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국가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이후 그는 한국 고대사 분야에서 손을 떼고 본래의 직업인 경제학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다 2002년 11월 15일 이르쿠츠크에서 사망하였다.[4]
3. 유사역사학의 주장
환단고기 신봉자들로 대표되는 유사역사학집단으로부터, 고조선과 관련하여 위의 사진과 같은 말을 했다고 주장하는 인물이다. 위의 사진은 상생방송에서 퍼트리는 영상 중 하나인 '환단고기 북콘서트 러시아편'에 나오는 영상을 캡쳐해 떠돌고 있는 사진이다. 영상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고조선은 1천년 간 중국 지배를 받지 않은 독자적 문화를 발전시켜왔다. 한사군은 현재 한국 국경 밖에 있었다. 동북아 고대사에서 단군조선을 제외하면 아시아역사는 이해할 수 없다. 그만큼 단군조선은 아시아 고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데 한국은 어째서 그처럼 중요한 고대사를 부인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일본이나 중국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내는데 한국인은 어째서 있는 역사도 없다고 하는가? 도대체 알 수가 없는 나라이다.
정리하면 고조선은 1000년 동안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고 한사군은 한국 국경 밖에 있었으며 단군조선은 아시아 고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헌데 한국은 그걸 부정하니 이해할 수 없는 나라다. 라는 것이다.
3.1. 진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유엠 부틴이 저런 말을 했다는 근거도 없고 심지어 저 사진 속의 사람이 유엠 부틴이라는 증거도 없다.유사역사학의 주장에 따르면 유 엠 부틴은 '러시아 고대사 세미나' 중에 위와 같은 발언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 엠 부틴이 해당 발언을 한 '러시아 고대사 세미나'가 언제 얼렸는지, 세미나의 주제는 무엇이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더군다나 유 엠 부틴의 생애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는 경제학자였다. 단지 19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 초까지 10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고고민족학연구소에서 근무하며 주로 한국과 관련된 문헌을 번역하는 활동을 했던 것이다. 물론 국가박사학위를 받은 부분에서도 알 수 있듯 그가 단순히 번역작업만 한 것은 아니었다.
- 고조선의 물질문화(Бутин Ю.М. Материальная культура Древнего Чосона, 1978)
- 고조선(Древний Чосон, 1982) : 1990년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출간된 바 있다. 러시아어로 된 원문은 인터넷으로 목차와 결론, 서론을 확인할 수있다.
- 조선에서 삼국까지의 한국(Корея: от Чосона к Трем государствам, 1984)
현재 2편의 논문과 1권의 책을 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식으로 역사학을 배우지 않은 것 치고는 수준이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외국인에다가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은 것 치고는 수준이 높다는 이야기다. 한국에 번역되어 출간된 고조선이라는 책만 보더라도
뿐만 아니라 유 엠 부틴이 역사 분야에서 활동하던 시기는 ' 냉전 시대'였다. 즉, 남한은 러시아(당시 소비에트 연방)에 갈 수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남한이 소련과 외교관계를 맺고자 하면서 1973년 소련이 대한민국 여권을 소지한 사람에 대한 입국을 허용하였기 때문에 왕래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한에서 해외여행의 자유화가 이루어진 것은 1989년이다. 그 전까지는 아무나 해외여행을 갈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1989년 이전에 개인에게 해외에 갈 자격이 주어젔다고 하더라도 공산국가에 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특히 소련은 1983년에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을 일으켜 한소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던 때라 함부로 여행은 커녕 소련에 대한 언급도 위험한 시기였다.
따라서 유 엠 부틴이 활동하던 시기에 '러시아 고대사 세미나'에 참석하여 유 엠 부틴의 발언을 들을 수 있었던 남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세미나 자료집이나 영상 혹은 녹취록이 남아있었고 추후에 그것을 입수하거나 들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영상이나 자료집, 녹취록을 찾을 수 없다. 더군다나 유사역사학은 이 부분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다. 심지어 유 엠 부틴이라고 인용된 사진 속 인물의 얼굴은 문서 상단의 링크 및 강인욱 교수의 칼럼 링크에 나온 실제 유 엠 부틴의 모습과도 매우 다르다.
더 중요한 것은 고조선(Древний Чосон, 1982)의 목차를 보면 유 엠 부틴은 단군조선에 대해 신화 시대(Мифический период)라고 하였고 기자조선에 대해서도 전설 시대(Легендарный период)라고 하였다. 즉, 실제 역사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1]
해당 링크에 올라온 사진은 이미지 파일의 이름으로 미루어보아 1989년 즈음의 모습을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2]
해당 칼럼에서 그의 30대, 60대 때 사진을 확인할 수 있다.
[3]
이때 부틴이 번역한 자료들 중에는 북한의 것들이 많았다. 1974년 고고민족학연구소에서 북한에 사절단을 파견하면서 그곳에서 출간한 고조선 자료를 받은 일이 있었다. 이후 연구소에서는 북한으로부터 받은 자료들을 번역할 사람을 찾았고, 경제연구소의 소개로 부틴이 번역가로 낙점되었다. 이렇게 부틴이 번역한 자료들은 V.E.라리체프, A.P.오클라드니코프 등의 학자들이 활용하였다.
[4]
한편으로 강인욱 교수의
최근 칼럼에 따르면 부틴은 이르쿠츠크에 살았던 말년에도 한국학을 일구기 위해 노력했다고 하며, 세 군데 대학에서 한국학과를 개설하고 삶의 마지막까지 한국학의 기반을 세우려 고군분투했다고 한다.
[5]
정제된 말로 이야기하면 번역이 상당히 매끄럽지 못하다. 위만도 중국 발음인 웨이만으로 적거나 지명, 책이름 등도 중국발음 그대로 적은 것이 많다. 다만 2019년에 나온 개정판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이 많이 개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