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59:20

이상민(농구)/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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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농구대잔치 시절3. 영광의 현대 - KCC 시절4. 이적과 마찰5. 삼성으로의 이적 이후6. 플레이 스타일
6.1. 장점6.2. 단점6.3. 할리우드 리6.4. 항명 논란6.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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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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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현대 다이냇 전주 KCC 이지스의 레전드 이상민.
그러나 영원한 KCC의 전설이 될 줄 알았던 이상민은
서울 삼성으로 가고 은퇴 후 그 팀의 감독이 되었다.
'가드왕국'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서울 삼성 썬더스 시절.
농구 선수 이상민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농구대잔치 시절

홍대부고 시절에는 천재 가드라는 말을 들으며 동 시기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즐비한 다른 고교팀들을 원맨쇼로 농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당시 홍대부고 전력이 강하지 않아서 이상민이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 했다.

원래는 고려대에 진학할 예정이었지만, 고대의 구타 문화가 싫어서 고집을 부린 끝에 연세대로 진학했다고. 하지만, 정작 고려대 박한 감독은 구타를 하는 사람은 아니고, 오히려 연세대 최희암 감독이 구타의 신봉자였으니 잘못 들어간 셈.[1] 본인도 신입생 시절에는 은근히 후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2]

"외곽슛이 좋지 않고 드리블이 높고 파울관리를 못 한다." 라는 혹평을 들으면서도 원 가드로 선배인 문경은, 후배인 우지원, 김훈, 서장훈을 이끌고 코트의 사령관으로서 연세대의 최전성기를 이끌었고, 곱상한 외모와 맞물려 이후 두고 두고 이어지는 오빠부대의 인기를 얻었다. 1993-94 농구대잔치 연세대의 20승 1패 우승의 주역 중의 주역.

이 당시 이상민은 그야말로 패스하는 기계였다. 최희암은 철저한 분업 농구를 추구했기 때문에 이상민의 역할은 볼 운반과 리딩에만 한정되었다. 문제는 이상민의 저학년 시절에는 오성식[3]이 있으면서 어느 정도 볼 운반과 리딩을 분담할 수 있었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연세대 전성기 때는 주전 5명 중 가드는 이상민 혼자라서 볼 운반과 리딩을 이상민 혼자서 해결해야만 했다. 이로 인해 고교 때 보여줬던 여러가지 장점들이 대학 시절 봉인되어버렸다. 문경은, 우지원, 김훈 등 외곽슛에 능한 스몰 포워드 3명이 주전인 상황에서 공격 롤을 부여하기는 어려웠고 설사 부여한다 쳐도 보조하는 슈팅 가드도 없는 상황에서 리딩만으로도 힘든 상황이었다. 마찬가지로 파워 포워드 없이 홀로 골밑을 지켰던 서장훈도 과부하가 심했다.

그런데 연세대 졸업시즌이었던 농구대잔치 1994~95시즌 풀리그 최종전 對 고려대와의 경기에서 이상민은 후반 1분여를 남겼을 즈음 인사이드로 돌파해 오던 김병철의 레이업을 걷어내기 위해 같이 뜨다 착지할 때 선수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부상을 당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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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바로 그 부상장면. 무릎 인대가 끊어져 버린 부상이었는데 이상민이 고통스러워서 눈물을 글썽거렸고, 그걸 보고 팬들이 울부짖는 모습까지 당시 뉴스를 탔다.
대학 졸업 후 현대전자에 입단하나, 부상 치료도 시킬 겸 당장보다 프로화 이후를 노릴 겸 현대는 이상민을 바로 상무로 입대시킨다. 이 때 대전 현대의 전설을 같이 만들어 내는 조성원도 같이 입대시켰다.

입대 후 이상민은 그때까지 잠재되어 있던 올라운더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4] 사실 상무에서 본인의 기량이 만개했다기보다는, 최희암의 손길을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최희암은 철저한 분업농구를 추구한 감독이라 연세대 시절의 이상민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부분을 어느 정도 억제하면서 리딩에 신경써야 했다.[5] 거침 없이 득점을 하고 좋은 운동능력을 앞세워 리바운드를 걷어내고 적재적소에 패스를 찔러넣으며 빛나는 활약을 펼쳤고, 두 번이나 트리플 더블을 기록하기도 하는 등 다재다능함을 뽐냈다.[6] 하지만 기아자동차와 연세대로 인해 농구대잔치 우승에는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그가 상무에 있던 사이, 한국 농구는 프로화가 되며 한국프로농구가 출범했다.

3. 영광의 현대 - KCC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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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 후 프로팀이 된 현대에 복귀하며 KBL에 데뷔했다. 데뷔 시즌에 전년도 8개 팀 중에서 6강에도 못 드는 굴욕을 맛본 현대는 조니 맥도웰과 제이 웹이라는 당대 최고의 용병 둘을 보유하게 되면서 정규시즌 1위로 올라섰고 이상민은 1997-98 시즌 정규시즌 MVP의 영광을 안았다.[7] 그리고 챔프전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이 때는 기아 엔터프라이즈 허재의 투혼이 더 빛나서 챔프전 MVP는 실패[8]. 그러나 이 때를 기점으로 현대는 왕조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정규리그 3연패와 두 번의 챔프전 우승이 바로 그것

팀의 에이스 포인트 가드로서 맹활약하며 추승균, 조성원, 조니 맥도웰과 함께 팀의 전성 시대를 이끈다. 다만, 1999-2000 시즌 청주 SK 나이츠와의 챔피언결정전에서 이상민은 로데릭 하니발 포스트업과 수비에 털리고 맥도웰은 서장훈에게 잡히며 신선우 감독이 토털 바스켓볼이라는 전략을 들고 나오는 계기가 되었지만, 어쨌든 그 전까지는 정말 팀의 대들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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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그룹이 흔들리고, 팀이 KCC로 팔리고 연고지가 변경되는 동안에도 이상민은 굳건하게 팀을 지켰다. 그러나 역시 세월은 속일 수 없는지 03-04 시즌부터는 부상에 시달리며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기존의 추승균, 2003-04 시즌 도중 다시 돌아온 조성원과 함께 원주 TG삼보 엑써스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며[9] 챔프전 MVP가 되기도 했지만, 점차 하락세가 눈에 띄게 드러났다. 2004-05 시즌에는 챔프전에서 평소에는 본인이 항상 압도하던 신기성에게 털리며 별다른 활약을 못하는 등 팀의 패배를 바라만 보기도. 그래도 하락세를 보이는 와중에도 경기별로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는 일은 종종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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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적과 마찰

파일:서울 삼성의 유니폼을 입은 이상민.jpg
누구나 현대-KCC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은퇴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상민은 KCC에서 은퇴하지 못했다. 서장훈이 FA로 영입되는 과정에서 보상선수로서 이상민이 삼성 썬더스로 이적했던 것이 원인인데, 이 때문에 KCC는 큰 비판을 받았다.[10]

당시 FA 보상선수에서 제외되는 보호 선수는 3명까지 지정할 수 있었는데 우습게도 FA로 이적해온 선수는 자동 보호 선수로 지정되며, 보호 선수 3명에 자동 포함되었다. 즉, 당시 KCC가 FA로 데려온 서장훈, 임재현은 자동으로 보호선수가 되고, 나머지 보호 선수로 선택할 수 있는 선수는 한 명뿐이라는 것. KCC엔 이상민이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프랜차이즈 스타이면서 "소리 없이 강한 남자" 추승균이 있었기에 둘 중 하나는 보호 선수에서 제외해야 했다.[11]

그런데 추승균 역시 노장이라 볼 수 있지만 이상민보다 2살 어렸기에 효용 가치는 추승균이 더 크다고 KCC쪽에서는 봤고, 그래서 이상민은 보호 선수에서 제외되었는데, 당시 감독인 허재의 말에 따르면 '삼성이 설마 노장인 이상민을 고르겠어?' 라는 생각으로 보호 지정을 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렇다고 추승균을 풀었다면 삼성은 100% 추승균을 데리고 갔을 것이다(...). 그야말로 KCC 입장에서는 황당한 FA 규정 이 때 허재 감독은 임재현과 서장훈을 데려오면서 기존 선수단+새 용병들을 합쳐 반지 원정대를 구성하려고 했는데, 이상민의 이적으로 완전히 틀어지게 된다.

당시 삼성은 이상민보다 신인 선수 지명권을 우선 요구했지만, KCC가 가지고 있던 신인 선수 지명권은 하승진까지도 노려볼 수 있는 지명권이었기에 그것을 거부[12], 결국 삼성은 이상민을 FA 보상 선수로서 데려갔다. 저 때 이상민의 입단식 사진을 보면 단장과 감독은 웃고 있지만 이상민의 표정은 좋지 않았으니, 이상민 본인의 심정은 상당히 복잡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프랜차이즈 스타를 헌신짝처럼 버렸다며 KCC 구단은 엄청난 비판을 받았고,[13] 이상민의 빈자리를 채운 임재현은 임봉사라는 굴욕적인 별명까지 붙을 정도로 이상민보다 못한 활약을 보인 데다, 이적한 이상민이 선봉장으로 그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KCC를 격파하는 상황까지 오자 이상민을 떠나게 만든 KCC는 희대의 뻘짓을 저질렀다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14] 이에 70여명의 팬들이 서초구에 위치한 KCC 본사 앞에서 시위를 펼치기까지 했다.

그런데 KCC 입장에서 보자면 보호 선수로 이상민 대신 추승균을 지키고 신인 선수 지명권도 지킨 건 결과적으로 대성공이 되긴 했다. 임재현은 FA로 이적한 첫해에 그야말로 임봉사 모드로 까였지만 이적 2년차부터는 주전과 식스맨을 오가며 들개같이(...) 뛰어다니며 좋은 활약을 보였고 이상민 대신 지킨 추승균은 3년 동안 팀의 기둥이 되어 주었으며 결국 이 둘이 팀이 두 번의 우승을 거두게 만든 공신이 되었기 때문. 거기다 삼성이 이상민 대신 달라고 한 신인 지명권을 지킨 끝에 그걸로 하승진을 뽑으며 대성공을 거두었으니.

결국 이상민의 이적 문제는 팀과 선수의 입장이 갈리며 생긴 어쩔 수 없는 부분일 수도 있는 것. KCC로 온 서장훈은 이상민과의 플레이를 원했다는 인터뷰를 해서[15] 주변 사람들을 더 안타깝게 만들었다.[16][17]

그리고 이상민이 삼성으로 건너간 후 기사를 통해 KCC에 대해 비판했고, 2010년 은퇴를 결정했을 때 KCC가 일방적으로 등번호 11번의 영구 결번을 선언하면서 이상민과 KCC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이 나고 만다.[18][19]

추승균이 비하인드 썰을 풀었는데 이 때 KCC는 삼성이 이상민을 선택할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한다.[20] 그런데 말 그대로 설마가 현실이 되어버렸고, 추승균, 서장훈, 이상민 셋이서 그 날 과음했다 밝혔다. 그리고 이상민은 사실 이때 은퇴까지 생각했는데 주위에서 말렸다 한다. 특히나 서장훈이 엄청 힘들어했는데 이상민과 뛰고싶어서 KCC로 왔는데 이상민이 본인 때문에 떠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 이상민 이적 후에 선수단 분위기도 엉망이 되어 훈련도 제대로 못했다 한다.

5. 삼성으로의 이적 이후

이적한 이후, 첫 시즌에는 기대 이상의 좋은 활약을 보였다. 자신의 최다득점을 깨고 35점을 넣어서 승리에 견인하기도 했다. 결국 그 시즌 많지 않은 시간을 뛰면서 9.8점 5.5어시스트의 준수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아쉽게 두 번 다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전성기가 지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삼성 썬더스를 두 번이나 챔피언결정전에 이끌기도 했다.

다만 인기도 여전했고 활약을 보인 경기들도 있으나, 이상민은 부상과 체력 저하로 더 이상 시즌 내내 제대로 된 활약을 보일 수는 없는 선수가 되어 있었다. 실제로 이 시기 삼성을 이끈 것은 안준호 감독의 팀 세팅과 테렌스 레더와 같은 좋은 외국인 선수의 힘이 더 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대신 삼성은 그 전까지는 서울에 있는 팀 정도였는데, 이상민의 영입 이후, 인기 팀으로 급부상하는 가외적인 소득을 얻기는 했다. [21]
결국 2009~10 시즌이 끝나고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직전까지도 올스타 투표 1위는 이상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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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플레이 스타일

6.1. 장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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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에는 182의 키[22][23]지만 투핸드 덩크를 꽂아넣을 정도의 운동능력을 자랑했고, 전성기가 좀 지난 무렵까지도 이에 근접하는 운동능력을 유지했다.[24] 이런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키에 걸맞지 않는 리바운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동체급 최상의 사이즈다 보니 포인트가드 치고 힘도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이상민이 운동능력에만 의존한 플레이를 한 건 아니다. 오히려 이상민의 장점을 꼽을 때 가장 1번으로 꼽는데 플레이메이킹 능력과 패스능력이다. 적재적소에 공을 배급하며 팀을 이끄는 포인트 가드의 기본 덕목에 충실한 선수였고, 그래서 전성기가 지나 운동능력을 많이 잃은 삼성 썬더스 시절에도 강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다. 자신이 직접 수비리바운드를 잡은 후 바로 달려나가며 앞선으로 던져주는 속공 패스는 특히 올라운드함과 패스 능력이 조화된 이상민의 특기. 여담으로 추승균 전 감독이 이상민을 역대 최고의 포인트가드로 꼽았는데 그 이유는 같이 뛰어본 가드중 가장 패스를 편하게 줬기 때문이라 한다. 즉 가장 완벽한 타이밍에 딱 원하는 위치로 주는 걸 본인이 뛴 가드들중 가장 잘했고 그 결과 참 슛을 편하게 올라갔다 한다.

동세대 포인트 가드들 중에서는 포스트업을 가장 잘 구사하는 선수였다. 자신보다 키가 작고 힘이 약한 상대가 매치업되면 포스트업으로 상대를 눌러버리는 모습도 종종 선보였다.[25] 앞에서 서술했지만 이상민이 현역시절이던 90~2000년대까지 이상민보다 키가 크고 힘이 좋은 국내 포인트 가드는 없었다.[26] 그 키 덕에 언제나 국내리그에서 이상민은 압도적인 피지컬로 상대 1번을 찍어눌렀고, 이상민의 포스트업 플레이는 다른 올라운드 능력 있는 팀내 선수와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상대팀이 수비에서 여러 모로 골이 아파지는 상황을 자주 연출했다. 이상하게도 김승현에게 털리는 날이 많았지만, 김승현은 스피드와 힘이 이상민보다 뛰어난 선수였다.[27] 하지만 신기성은 그런 김승현보다 빨라서 김승현을 털었고, 그 신기성은 이상민보다 작고 약해서 이상민에게 털리고... 고만해 미친놈들아...

외곽슛은 대학 시절만 해도 좋았으나 현대 입단 이후 점점 발전해서 커리어 중반 이후에는 좋은 건 아니지만 나쁘지는 않은 수준까지는 유지했다. 특히 영 안 들어간다 싶다가 중요 순간에 외곽슛을 터트리며 상대 팀을 울리는 일도 많았고, 3점슛 라인에서 한 발 이상 떨어진 곳에서 뜬금없이 슛을 성공시키는 일도 있었다. 2002 이사안게임 준결승 필리핀전에서 경기 전체로는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다 대표팀이 뒤지던 마지막 순간에 3점 버저비터로 대표팀을 승리로 이끈 게 이런 일의 예 중 하나.[28]

한편 삼성으로 가기 전 몸이 멀쩡하던 시절에는 수비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다. 탄탄한 몸과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자신보다 큰 상대도 제법 수비해 냈으며, 이런 수비력은 특히 조성원과 함께 나왔을 때 조성원 대신 상대의 2번 또는 3번 포지션 선수들을 수비할 때[29]나 아시아권 대회에서 투 가드로 강 모 선수와 함께 나와 상대 2번 포지션 선수들을 수비할 때 더욱 빛이 났다. 훌륭한 바스켓 센스를 바탕으로 상대 패스의 맥을 끊으며 해내는 스틸도 일품이었다. 또는 힘들기는 하였지만 양경민이나 김영만 같이 3번 포지션 중에 공수에서 극강인 선수들도 잠깐잠깐씩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한국인 가드 선수들 중에선 최고 수준의 블록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키가 큰데다 점프력도 좋았으니 가능한 일. 특히 속공 레이업을 하는 상대를 쫒아가 블록해 내는 장면을 종종 연출했고, 김주성 데뷔 이전인 전성기에는 KBL 국내 선수 블록 순위에 서장훈 다음 자리 정도에 들어간 일까지도 있다. 심지어 서장훈이나 김주성을 블록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비록 나이와 부상이 쌓이면서 삼성 이적 후엔 수비에서 한창 때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턴오버를 남발하며, 구멍 소리 듣는 일도 생겨나게 되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수비가 뛰어난 편에 속하였으며, 삼성 시절에도 기본은 하였다. 구멍소리를 듣는 하이라이트 필름을 종종 만들어서 그렇지[30]

이상민의 전성기인 연세대나 현대 시절엔 자신을 보조할 수 있는 슈팅 가드가 따로 없는 상황에서 볼 운반과 리딩을 전담해야 했다. 연세대는 이상민(포인트 가드), 문경은 김훈 우지원(스몰 포워드), 서장훈(센터)인 조합[31]이었고 현대에서도 조성원[32] 추승균 모두 스몰 포워드였다. 그로 인해서 역할이 축소되고 부담이 커졌으나 딱히 볼 운반과 리딩 문제를 드러낸 적은 없었다. 현대에서는 리딩 부담이 큰 상황에서 공격롤도 연세대 시절보다 커졌음에도 무리 없이 소화해냈다.

삼성 이적 후에는 전성기가 지난 상황이지만 연세대 초반 오성식[33] 이후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슈팅 가드였던 강혁과의 조합을 이뤄서 좋은 활약을 보였다. 이상민이 1번, 강혁이 2번을 보는 정석적인 플레이도 잘 하면서 강혁이 1번 이상민이 2번을 소화하는 변칙적인 플레이에도 능한 모습을 보였다. 원래 다재다능한 면모를 갖고 있던 선수였으나 멤버 구성상 억제되왔던 장점들이 드러났던 것이 삼성 시절이었다.

6.2. 단점

포인트 가드 치고는 드리블이 높다.
이상민이 활약하던 시기의 농구대잔치나 KBL에서는 지금처럼 앞선 압박이 심하지 않아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으나 국제 경기에선 약점을 노출했다. 높은 드리블 때문에 스틸을 잘 당하다보니 감독이 화가 나서 이상민을 벤치로 불러들이고 강동희를 내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공 간수를 못해서 마구 털리거나 한 일은 없지만, 가끔 상대 수비수에게 분석당하며 제대로 공략당하면 턴오버를 남발하는 일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KBL 챔피언결정전에서 SK 나이츠와와 대결한 경기. 당시 SK의 로데릭 하니발이 이상민보다 좋은 신체조건으로 압박을 하자 드리블에서 문제를 노출하며 이런 약점을 노출했다.[34] 허재와 매치업 되는 경우에도 약한 모습을 보였다. 전반적으로 자기보다 크거나 힘이 좋은 선수에겐 약했다.

파울관리를 잘 못했다. 파울 트러블에 걸려서 고생하거나 퇴장을 당하는 일이 잦았다. 조성원 때문에 상대 2번 3번을 수비하는 경우가 많은 탓도 있었으나 상대 1번을 상대하면서도 파울트러블에 빠지는 경우도 흔했다.[35]

파일:이상민 항의.jpg
또한 팬서비스도 좋지 않은 편이다. 최희암이 연세대 선수들에게 팬서비스에 관한 일침을 날린 이유가 연세대 선수들 팬서비스가 매우 엉망이었기 때문.[36]

6.3. 할리우드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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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프로농구에서 할리우드 액션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가 바로 이상민이다. 상대의 파울을 유도해내는 것은 선수의 능력에 해당하지만, 유독 이상민의 경우는 슬쩍 상대가 닿기만 해도 "악"소리와 함께 화려하게 쓰러지는 모습을 유난히 자주 보였고, 거기에 이상민의 스타성으로 인한 심판보정 효과 의혹과 그런 이상민의 모습까지도 옹호하는 극렬 이상민 팬덤[37]으로 인해 빠가 까를 만드는 연쇄효과가 이어지면서, 농구팬 일각에서 할리우드 리라는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이상민과 같은 대학동문이자 인척관계에 있던 석주일 해설자도 한 몫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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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 이상민은 수비시에도 할리우드 액션으로 오펜스 파울을 유도하려 하거나 적극적으로 상대의 볼을 뺏으려다 외려 자기가 파울을 하는 일도 많았고, 그로 인해 파울 트러블에 빠지며 팀을 난관에 빠트리는 일도 많았다.

할리우드 액션과 파울 트러블, 극렬 팬덤[38]은 이상민의 평가를 깎아먹는 3대 요인이다.

6.4. 항명 논란

2007-2008 시즌 삼성에서 경기 중 작전 타임 상황에서 안준호 감독에게 대놓고 반말을 한적 있다. 긴 말 필요 없이 이 영상을 보자.
안준호: 아 지금 가면 안돼
이상민: 아 되지 왜 안돼?
안준호: 돼? 돼? 돼? 그래?
이상민: 아 된다니까!

사실 경우에 따라서 감독에게 자기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으나 문제는 단순 의견 제안이 아니라 반말을 했다는 것이고, 가도 된다는 이유를 설명한 것도 아니고 그냥 감독의 말은 틀렸고 자기 말이 맞다는 식의 우기기에 불과 했다는 것. 단순히 감독의 지시에 반말로 대답을 하고 넘어갔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39]

후에 안준호 前 감독이 인터뷰했을 때 기자가 저 장면이 담긴 동영상을 보여주자 상민이는 그렇지(건방진 캐릭터) 않다라고 말했다. 본인도 오픈 마인드로 선수들과 소통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그 과정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사실 이상민이 욕먹을 건덕지가 많은 것은 분명하나 저걸 '항명'이라고 하는 것은 과한 비난이다. 안준호는 농구계에서 인품이 좋은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고, 직장 내에서 같이 오래 일하며 친해진 선후배끼리 존대말에 가끔 반말을 섞어가는 이른바 '반존대'를 하면서 대화하는 경우는 흔하다. 무엇보다 저 '항명'을 당한 안준호 본인도 이상민이 건방진 사람이 아니며, 이를 소통의 일환일 뿐이라고 한 걸 보면 내막을 모르는 제3자 입장에선 그렇게 보는게 맞다.[40] 저 대화가 어느 상황에서 나왔는지,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지, 이상민이 평상시 감독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지 알 수 없는 일반 팬의 입장에서 저 장면 하나만 보고 항명이라고 하는 건 그야말로 억측이고, 이걸 갖고 보호선수 명단에서 뺀 걸 연계하는 건 더 심한 억측이다.

6.5. 여담

웨이트 트레이닝을 처음 한 건 실업팀 입단 후라 밝혔다. 그러다가 무리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허리를 다쳤고 그 후에는 비시즌에는 재활운동 하기만 바빴다고 한다. 비교적 일찍 스피드와 운동능력을 잃은 건 이 때문인 듯 하다.

김승현, 신기성, 이상민 당대를 호령했던 이 3명의 가드는 물고 물리는 관계였는데, 김승현은 스피드가 무척 뛰어난 선수인것은 맞으나 신기성에 비해서는 반발자국 느린 편이었고, 신기성은 스피드가 뛰어났지만 높이와 힘에서 이상민에 밀렸고, 이상민은 높이가 뛰어났지만 스피드와 힘을 고루 갖춘 김승현에게 밀리는 형국이었다. 반대로 신기성은 김승현에 비해 힘은 부족했지만 스피드가 더 뛰어나서 속도로 공,수에서 김승현에 앞섰고, 이상민은 신기성에 비해 스피드는 느릴지언정 신장과 탄력면에서 앞섰다. 김승현 역시도 이상민에 비해 높이가 크게 떨어진건 사실이지만 스피드와 힘에서 모두 이상민에 비해 뛰어난 편이었다.

당대 라이벌이었던 김승현에게 특히 약했던 이유는 자신의 장점인 큰 신장보다 김승현의 스피드와 힘의 밸런스가 더 뛰어났기 때문이다. 확실히 김승현에 비해 키가 큰 것은 사실이고, 절대적인 기준에서도 스피드가 빠르지만 김승현보다는 느렸다. 김승현은 상당히 하체근력이 뛰어난 편이었고, 되려 5cm이상 키가 큰 이상민 상대로도 골밑에서 엉덩이로 툭툭 밀어내는 포스트업과 아이솔레이션 손쉽게 득점을 따내곤 하였다. 공격 시에도 이상민은 드리블이 상당히 높은 편이라 김승현이 힘으로 강하게 프레싱 하면 애를 먹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반면 김승현에게 강한 신기성에게는 유독 강한 모습을 보였는데, 무엇보다 신기성에 비해서 스피드는 느릴지언정 피지컬적으로 거의 압도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신장과 힘 모든 면에서 신기성에 비해 뛰어났다. 특히 신기성은 외곽포가 주무기였는데, 이상민의 신장과 탄력앞에서는 발휘하기 어려웠다.

외곽포가 봉쇄되니 당연히 아이솔레이션도 막힐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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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타의 의미인지는 불분명하나, 최희암이 실력과 인기를 모두 가진 이상민을 다른 선수들보다 더 호되게 야단치고 있다는 식으로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2] 여담으로 이상민처럼 신입생 시절에 대학 입학을 후회한 케이스로는 전희철이 있다. 다만 전희철은 구타 문화가 아닌, 고려대 박한 감독의 무작전 전술이 본인에게 맞지 않아 입학을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3] 오성식도 원래 포인트 가드를 보는 선수지만 슈팅 가드도 소화 가능했다. 오성식과 이상민 둘을 동시에 활용하기 위해서 같이 나올 때는 오성식이 2번을 소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성식은 국대에서도 허재 백업으로 2번을 소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4] 이상민은 홍대부고 시절에도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여준 만능 가드였다. [5] 그래도 최희암은 이상민의 재능을 아껴서 그나마 이상민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둔 편이었다. 문경은이나 우지원은 거의 뭐 하루하루 슛 쏘는 기계(...) [6] 이상민의 트리플 더블은 당시 한국 남자 농구선수 중에는 최초로 기록한 걸로 알려졌지만, 2012년 들어 이전 기록들이 전산화되는 과정에서 허재, 이원우, 서장훈이 이상민보다 앞서 트리플 더블을 기록했음이 발견되었다 [7] 프로 출범 후 유일하게 영향을 받지 않은 토종 선수의 포지션이 외국인 선수에게 볼 배급을 하는 포인트 가드였고 따라서 프로 초창기에는 포인트 가드들이 정규시즌 MVP를 받았었다. [8] 다만 매끄럽지 않은 우승이었던게 기아의 경우 외국인 선수 저스틴 피닉스가 태업을 해서 불리한 상황이었는데다 현대콜까지 심했었다. 기아가 1, 2차전을 승리했었는데 협회의 입장에선 기아가 4연승으로 끝내는 것보다 챔프전을 길게 끄는 것이 여로모로 좋았기 때문에 3차전부터 현대에게 유리한 판정을 하도록 심판들에게 지시를 내렸었다. 기아의 최인선 감독은 이러한 편파 판정에 불만을 품어 7차전 전에 심판들에게 항의했으나 협회는 그런 최인선 감독에게 벌금을 부과했다. [9] 현대 신선우 감독은 당시 하위권에 쳐졌던 모비스와 용병 맞 임대를 단행하면서 모비스의 주축 센터였던 R.F. 바셋을 임대 영입했다. 다만 임대 과정에서 1라운드 지명권을 넘겨줬는데, 이게 1픽에 걸리면서 양동근은 모비스에서 은퇴할 때까지 팀의 에이스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바셋 임대는 역사상 최악의 꼼수 트레이드로 지탄을 받았고 KBL은 부랴부랴 규정을 고쳐 임대 트레이드를 원천봉쇄하였다. [10] 특히 이는 김영만을 대하는 태도와 대비되었다. 김영만은 트레이드로 와서 얼마 뛰지도 않더니 모교인 중앙대에서 코치 제의를 받자 은퇴 의사를 밝혔고 구단은 시즌이 끝나지도 않은 시점에서 은퇴식을 치러주었다. [11] 이 사건으로 인해 FA제도에 대한 비판이 강해져서 보호선수는 4명으로 바뀌었다. [12] 실제로 1픽에 걸리면서 하승진을 지명한다. 그리고 서장훈은 하승진과의 출전시간 분배 문제로 트러블이 생기며 전자랜드로 이적한다. [13] 심지어 서초동 KCC 본사로 이상민 팬들이 시위를 벌였을 정도로 이 이적에 대한 파장은 컸다. 다만 무지성의 이상민 팬들이 허재 감독까지 비난하였는데 보호 선수로 묶고 안 묶고는 프런트의 일이지 감독과는 상관이 없다. 또한 더 깊게 파고들면 KBL 규정의 문제로 봐야하는 것이다. [14] 그리고 남의 레전드를 그냥 데려간 삼성 역시도 엄청난 욕을 먹었다. 그런데 사실 욕먹을 일이 아니긴 하다. 서장훈을 내주고 이상민을 가져간 것이니 그렇지만 삼성은 기존의 강혁- 이정석에 이상민을 합해 3가드 라인을 구축하여 2년 연속 준우승의 성적을 거두었다. [15] 둘은 전술했듯 연세대학교 선후배 사이다. 게다가 서장훈은 앞서 SK에서 FA 자격으로 삼성으로 옮길 당시 본의 아니게 선배 우지원을 날려버렸던 터라(삼성이 우지원을 보호선수에서 제외했고 SK가 그를 보상선수로 지명한 뒤 곧바로 김영만과 맞트레이드했다.) 이상민이 자신 때문에 팀을 떠나게 된 것이 더욱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16] 결국 서장훈은 2년도 안 되어 하승진 등장으로 인한 출전 시간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으며 전자랜드로 트레이드 된다. 하지만 서장훈은 전자랜드로 이적하여 원하던 출전 시간을 보장받으며 좋은 성적을 내었고 서장훈과의 트레이드로 데려왔던 강병현은 KCC 우승의 주역이 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론 서로에게 윈윈이 트레이드였다. [17] 이때의 일로 애먼 서장훈까지 이상민의 팬클럽인 이응사에게 욕을 먹었고, 결국 이 사태 이후부터 보호 선수가 3명에서 4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18] 원래 삼성에서 이상민의 은퇴를 기념해 11번을 영구 결번으로 하려 했으나 KCC가 영구 결번을 선언하면서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2018-19 시즌까지 삼성에서 11번을 단 선수는 없었다. 도중에 서장훈과 이상민의 번호로 11번을 영구적으로 결번하려 했으나 서장훈에게 삼성은 잠시 거쳐가는 팀 정도였고 이상민은 KCC에서 이미 결번이 되어있자 발표 몇 시간 만에 철회하는 해프닝이 있기도 했다. 결국 2019-20 시즌, 감독 이상민의 포지션인 포인트 가드로 뛰는 연세대 후배 천기범이 삼성의 새 11번이 됐지만 2022년 음주운전 사고로 대형사고를 치면서 11번의 주인이 사라지게 된다. [19] 그러나 2023년 6월 26일 이상민이 KCC의 코치로 복귀하면서 그 동안의 섭섭했던 감정은 어느 정도 풀린 것으로 보인다. [20] 참고로 이상민이 떠나기 전에 추승균이 먼저 안준호 감독에게 전화를 했었다고 한다. [21] 다만 이상민의 인기도 점점 줄어들었고 삼성 감독이 된 후 제대로 된 성적을 내지 못하자 비인기 구단으로 전락하여 관중 동원 꼴찌를 기록하였다. [22] 현역 때는 183cm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23] 지금 기준으로도 포인트 가드로서 작은 키가 아니며, 그 시절의 포인트 가드 중에서는 가장 큰 선수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포인트 가드 치고는 크고 슈팅 가드 치고는 작은 키였다. [24] 몸이 말을 안 듣던 은퇴하기 불과 몇 년 전이던 0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경기 전 몸푸는 시간에 덩크를 심심치 않게 시전하였다. [25] 같은 포인트 가드일 경우 대부분 이상민보다 높이에 힘에서 밀렸다. 2번 중에도 이상민보다 크지 않은 선수도 여럿 있었다. [26] 물론 키가 큰 선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포인트 가드 중에 키 190이 넘는 봉하민 은희석 같은 선수가 있긴 하였지만 기본 기량 자체가 애초에 이상민의 상대가 되지 않았고, 결국 이들은 어정쩡한 트윈가드를 전전하게 된다. 은희석은 조금 후배다 보니 아주 동세대는 아니고 봉하민은 수비 전문 선수 이미지가 강했다. [27] 이상민은 기본적으로 키가 크고 골격도 포인트 가드치고 작지 않았으나 웨이트를 많이 해서 근육을 많이 키운 체구는 아니었다. 반면 김승현은 웨이트를 통한 하체 근력이 뛰어난 선수였다. [28] 다만 이때의 버저비터 슛 전에 바이얼레이션을 범했었는데 심판이 눈감아 줬다(...) [29] 심지어 우지원이나 문경은[41] 등 자신보다 2~8cm나 크면서 수비가 약한 상대편 3번 포지션 [30] 이상민은 적극적으로 스틸이나 블록을 노리는 편이었는데 상대적으로 운동 능력이 떨어진 이후에도 이런 수비를 하다보니 예전이면 성공했을 스틸이나 블록이 실패하고 파울이나 실책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31] 이 때문에 서장훈도 굉장히 고생해야 했다. 서장훈과 함께 골밑을 지켜줄 파워포워드가 없는 라인업이었고 1년이 지난 뒤에야 원래 가드였던 김택훈을 입학시킨 후 파워포워드로 포지션 변경 시켰을 정도. 다만 서장훈 입학 이전까지 주전 센터였던 김재훈이 있었는데도 파워포워드로 기용하지 않았는데 김재훈의 파워 포워드 변신이 실패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쨋든 그로 인해서 서장훈의 부담이 굉장히 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밑을 사수한 서장훈이 괴물. [32] 조성원은 신장이 작아서 슈팅 가드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신장이 작을 뿐 전형적인 스몰 포워드였다. 조성원 자신도 인터뷰를 통해서 자신은 스몰 포워드지 가드가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번 밝히곤 했다. 이당시 현대에서는 보조리딩 역할을 가끔 추승균이 할때는 있었으나 조성원의 가담은 거의 없었다. [33] 엄밀히 오성식의 주포지션은 포인트 가드긴 했지만 이상민이 입학한 이후 공존을 위해 2번으로 뛰는 경우가 많았다. 국대에서도 허재의 백업으로 2번을 본 경우가 많았다. [34] 당시 SK 감독이었던 최인선은 현대 다이냇 공격의 혈인 이상민을 막으면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 하에 하니발에게 이상민의 수비를 맡겼다. [35] 특히 대구 오리온스와 경기에서는 더 심했을 정도. 아무리 김승현한테 약했다고 하지만 유독 오리온스 상대로 하면 조기에 파울아웃을 많이 당했던 적도 있었으니... 심지어 3쿼터에 파울아웃 당한것도 오리온스 전이였다... [36] 농구 선수들 중에서도 팬서비스가 나쁜 편인 선수가 많다. 가장 최근 KCC 하이파이브 거부사건이 있다. 서장훈, 현주엽은 나쁜편인데 은퇴하고 나서는 잘 언급이 되진 않는다. 대부분 이들을 응원하는 팬들이 연식이 있는 팬들이 많고 90년대~2000년대는 팬서비스가지고 까는 분위기는 없었다. 또하나 이유라면 서장훈이나 현주엽은 좀 무섭게 생겨서 요청하기 무서운것도 있을 것이다. 서장훈은 팬서비스 괴담도 꽤 되는 편이다. 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언급조차 안된다. 의외로, 이미지가 나빴던 선수중에서 이천수나 오재원같은 경우는 팬서비스에 있어선 좋은 편이었다. 허재도 사실 성격이 매우 불같지만 팬서비스 측면에 있어서는 딱히 나쁜말은 없었다. 옛날 영상을 보면 허재가 사인을 해주는 영상이 있다. 반응도 "잘 안해줄거 같은데 해주네" 이런 반응. [37] 보통 '이응사' 이상민을 응원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팬클럽을 지칭한다. 안티들은 상민의 가까지 랑하는 사람들이라고 까고 있다. [38] 이상민 아저씨와 '이응사'로 대표되는 여성팬들. [39] 유도훈과 이현호의 작전타임때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감독의 지시에 대답을 반말로 한것이고 서로간에 막역한 사이라는게 알려지면서 크게 논란이 되지는 않았다. [40] 인터뷰 당시 안준호는 이상민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으며, 따라서 굳이 쉴드 쳐줄 이유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