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8-21 05:33:20

와타나베 히데키


<colbgcolor=#E3DDCB,#010101><colcolor=#402626,#DDDDDD> 와타나베 히데키
[ruby(渡, ruby=わた)][ruby(辺, ruby=なべ)][ruby(英, ruby=ひで)][ruby(樹, ruby=き)] | Hideki Watanabe
파일:hideki.jpg
출생 1960년 2월 1일
도쿄도 분쿄구
국적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사망 2015년 7월 13일 (향년 55세)
학력 테이쿄 고등학교 (중퇴)
활동 기간 Blueberry Jam (1979-1981)
C-C-B (1983-1989, 2015)
VoThM (1989-)
솔로 (1990-)
SNS 파일:Ameba 아이콘.svg

1. 개요2. 생애
2.1. (1970년대) 어린 시절2.2. (1977~1981) Lady, Blueberry Jam 시절2.3. (1982~1989) C-C-B 활동 시절2.4. (1990~) VoThM과 三喜屋・野村モーター'S BAND, 솔로 활동 시절
3. 사망4. 디스코그래피
4.1. 솔로 앨범4.2. 참가작품
5. TV 출연6. 라디오 출연7. 영화 출연8. 여담

1. 개요

일본 뮤지션이자 베이시스트.

2. 생애

2.1. (1970년대) 어린 시절

1960년 2월 1일 도쿄도 분쿄구에서 태어났다.

유아기 시절때는 무엇이든 입에 넣는 버릇이 있었어서 부모님이 눈을 뗄 수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중학생 무렵,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을때 담당 선생이 비틀즈의 노래를 불렀고, 이때 비틀즈를 처음 알게 되어 꽤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 비틀즈에 빠져서 노래들을 많이 들었고 89년 라디오 방송에서 다시 언급하기를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비틀즈의 노래는 Day Tripper라고 한다. 그를 계기로 시간이 지나 중학교 3학년 시절에 새뱃돈으로 베이스 기타를 샀고, 자신은 꼭 프로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고등학생 시절에서는 축구부, 야구부로 유명한 테이쿄 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히데키는 줄곧 축구를 좋아했고 열심히 했었지만, 입학하고 나서는 사정이 좋지 못했다고 한다. 입학 당시 테이쿄 고등학교는 성적이 일본 1등이였고 그것을 보면서 다시 축구를 할까 하고 생각했었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동급생들도 많았고 축구부의 같은 학년의 신 부원만으로 100명이 넘는데다, 무엇보다도 당시 입부 조건이 민머리가 아니면 안된다는 점이 컸기에 본인은 밴드 노선을 지향하기도 했고 민머리만큼은 싫어서 결국 그만두게 되었다. 자신이 입학한 목적이 사라지게 되었기에 여러모로 마음 고생도 깊었다고 한다.

1학년으로 입학하기 전의 봄방학에 다시 중학교 시절부터 밴드 활동을 하면서 프로가 되고싶다는 생각이 떠오르고 고등학교를 가지 않고 연습을 많이 하고싶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같이 활동했었던 밴드 멤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고등학교 가는것 그만두자 하고 나눴고, 이 사실을 부모님께 한명씩 이의를 전했을 때는 화를 냈다고 한다. 목적이 사라진 시간을 지내다 같이 활동했었던 밴드의 멤버들이 일찍 고등학교를 그만뒀다는 소식이 들리고 쉬는 날에는 멤버들과 모여서 연습도 하는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시절에는, 불심이 깊어져서 쭉 학교를 쉬었다. 아침에는 교복과 도시락을 갖고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한 뒤에는, 학교를 결석해 연습이 있을때는 연습을 하고 야마노테선에서 일부러 시간을 허비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연습 스튜디오에 가기도 하고, 연습이 없을 때는 아침 10시쯤까지 야마노테선 안에서 이케부쿠로의 문예 지하로 불리는 곳에서 영화를 보거나, 해안가에서 도시락을 먹기도 했다고 한다.
89년 라디오 Let it CCB 히스테리 중 와타나베 히데키 편 #1 #2 #3(영상이 비공개 되어서 링크로 대체)

덩달아 아르바이트도 정말 열심히 했다. 베스트 텐에서 C-C-B 데뷔하기 이전 멤버들의 아르바이트 경력을 보여준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 스파게티 가게 웨이터, 요리사 견습, 운송 가게, 찻집의 웨이터 등 다양한 알바를 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2.2. (1977~1981) Lady, Blueberry Jam 시절

그 후로부터 17살이 되었을 적에는, 밴드활동을 이으며 음악 인생의 본격적인 시동이 걸린다. 그리고 이 시절 전문 드러머 이토 마사미의 소개로 후의 C-C-B의 멤버가 될 타구치 토모하루를 만나게 되었다.

"스테이션"의 밴드를 결성했는데, 후에 이토 마사미는 밴드를 탈퇴하고 후임 드러머로 후배 류 코지가 추천되어 3명의 만남의 시작이 되었다. #


밴드 Blueberry Jam은 1977년 결성되어 1978년 4월 21일 메이저로 데뷔한 밴드이며, 와타나베 히데키는 1979년 6월에 2대째의 베이시스트로서 가입을 하게 되었고. 밴드가 1981년에 해산을 진행할 때까지 활동하였다.

Lady는 Blueberry Jam의 해산 이후 참여한 밴드로, 짧은 활동을 이었다. Lady로 활동했을 시절 매니저 나가사와가 보컬리스트의 백 밴드의 권유를 전했고 그래서 멤버를 찾고 다시 오니 그 보컬리스트는 시골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다시 보컬리스트로 소개받은 사람은 세키구치 마코토였고, 이로서 만남의 계기가 되었다. 세키구치와 밴드는 하진 않아서 그대로 밴드는 자연 소멸되었고, 코코넛 보이즈를 결성해보면 어떤지 권유를 받고 류 코지 세키구치 마코토랑 코코넛 보이즈의 초기 멤버로서 활동하게 되는 출발점이 되었다고 한다.

2.3. (1982~1989) C-C-B 활동 시절

파일:20220711_003248.jpg 파일:-34xvpn.jpg

시간이 지나고 1983년, 코코넛 보이즈가 결성되어 베이스와 리더를 담당하였다. 당시 애칭은 히데키(ヒデキ).
베이스와 보컬을 같이 하는데도 가창력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이톤의 음색으로 다른 멤버와 하모니를 노래할때는 주로 류우와 같이 높은 음을 맡았었다.

팀 이름을 바꿀시기에 코코넛 보이즈(Coconuts Boys)의 이니셜을 따 현재의 C-C-B로 부르게 된 것도 히데키의 생각이였다.
당시 세키구치는 CNB도 고안했으나, 전자가 부르기 쉽다는 이유로 C-C-B로 되었다.

89년 ccb 히스테리 라디오에서 전하길 1985년 Lucky Chanceをもう一度 활동 당시 Romanticが止まらない이후 인기를 얻게 되면서 다음 히트한 싱글곡인 スクール・ガール도 그렇고 메인 보컬은 어느정도 류 코지였다는 인식이 존재했었어서 그런지 이후 처음 메인 보컬을 맡았을때는 상당히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처음 노래를 받았을 때는 좋은 곡으로 생각했지만, 자신이 이 노래를 불러서 반응이 좋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했었다고. 그래도 좋은 반응을 얻어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1987년, C-C-B의 초기멤버 중 한명이였던 세키구치 마코토의 마지막 C-C-B 라이브를 끝낼 때 눈물을 펑펑 흘리며 껴안는 모습을 보였다.

세번째 싱글이 히트한 이후 바빠진 스케줄 속에서도 그룹 내 음악활동 외에도 방송과 토크쇼 출연에도 열심히 임하는 등 성실한 시간을 보냈다.

2.4. (1990~) VoThM과 三喜屋・野村モーター'S BAND, 솔로 활동 시절

히데키는 CCB의 해산이 다가올 적, 솔로 활동과 밴드 활동을 이어갈 것을 전했다. 라디오에서도 이야기 전하길 새로운 밴드 활동과 함께 장래는 월드 투어가 꿈이였다고 전하기도 하였다.

해산 후 가을, 기타리스트 마루야마 마사미치 ( 사이트 링크)와 밴드를 결성하였고 멤버들의 변화를 거쳐가면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당시 아이돌을 그만두고 기타리스트로 활동을 이어갔었던 노무라 요시오와 三喜屋・野村モーター'S BAND를 결성하여 작지만 여러 활동을 이어갔다. 코이즈미 쿄코의 백밴드로서 출연하기도 하였다. #

3. 사망

2015년 6월 12일 밤, 자택에서 구토감을 호소해 긴급 이송되었다. 이송된 병원에서 대동맥 박리의 진단을 받고 긴급 수술을 받았다. 당시 재결성의 C-C-B 및 AJ-米田渡 라이브 투어를 앞두고 있었으나 모두 중지되었다.

블로그에서 여전히 상태는 좋지 않아도 조금씩 호전되고 있음을 업로드하여 다시 안정적인 활동을 이을것 같았지만, 다시 상태가 악화되어서 7월 13일 18시 5분 급성 대동맥 박리에 의한 다장기 부전으로 세상을 떠났다. #
유족들은 영결식을 진행했고 프로듀서 마츠키 타카히로가 상황을 대중들에게 보고했다.

사실을 알게 된 팬들, 관계자들, 대중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당시 C-C-B 라이브를 열기 며칠 전이였고, 블로그 활동도 꾸준히 했었기에 더더욱 안타까움과 슬픔을 금치 못했다.

활동 시절과, 현재를 아울러서 인연이 존재했었던 연예인, 가수들도 소식을 듣고 추모의 글을 전했다. C-C-B 활동을 하면서 인연이 깊었던 멤버들도 추모하였다. 세키구치 마코토는 블로그를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여러모로 풍요롭게 해주어서 고맙고, 푹 쉬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 #, 시간이 지나 19일날에 와타나베 히데키의 블로그에 류 코지, 요네카와 히데유키의 추모글을 업로드 되었다. #

체커스의 멤버 타케우치 토오루와 츠루쿠 마사하루도 트위터를 통해서 그를 추모하였고 # #, SHOW-YA의 멤버 테라다 케이코 #, C-C-B 시절 깊은 인연이 되었던 마츠모토 타카시 #, 절친한 친구 스기야마 키요타카 토쿠나가 히데아키, 三喜屋・野村モーター'S BAND로 함께 활동했었던 노무라 요시오도 블로그를 통해서 추모하였다. #, #, #

8월 10일날, 신주쿠BLAZE에서 お別れの会(이별의 모임) 2부제로 이어진 장례식 절차가 진행되었다. 제 1부에서는 티켓이 없어도 참가할 수 있는 헌화식, 제 2부는 인연이 깊은 뮤지션들이 무대에 올라 스크린에 비춰진 와타나베 히데키의 예전 라이브 영상과 함께 공연을 하였다. 라이브의 일부는 니코니코 생방송으로 생중계되었으며, 여러 팬과 사람들이 참가하여 추모하였다.

기일인 7월 13일에는 절친한 친구 노무라 요시오랑 와타나베 히데키와 인연을 맻은 뮤지션들이 모여 라이브를 진행하고 있다.

4. 디스코그래피

4.1. 솔로 앨범

<rowcolor=black> 발매일 제목 비고
1990.11.10 <colbgcolor=#E7E6D2> White Album'90 -
2002.4.25 Welcome to my room 미니앨범

4.2. 참가작품

<rowcolor=black> 발매일 제목 비고
1990.4.21 <colbgcolor=#E7E6D2> 好色萬声男(코우쇼쿠 요로즈고에 오토코) -
1994.3.2 君がいた季節/カラオケならOK (그대가 있었던 계절/카라오케라면 OK) -
1995.11.1 恋するギャンブラー (사랑하는 캔버라) -
1997.2.21 さよならは言わない BOYS BE…オリジナル・サウンドトラック (작별은 말하지 않아 BOYS BE...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
2017.10.2 THEME PARK -
2020.2.29 440Hz with〈LIFE OF JOY440〉 -

5. TV 출연

<rowcolor=black> 방송일 제목 방송사 비고
1991.5.6 <colbgcolor=#E7E6D2> 月曜ドラマスペシャル・連休最後の特別企画『日本一のツイてない男』(월요드라마 스페셜 연휴 마지막 특별기획 일본에서 제일 재수 없는 남자) TBS -
1990.4 - 7 夜のミュージックストレンジャー (밤의 뮤직 스트레인져) TVK他 -
2001.10.25 ウラまるカフェ (우라마루 카페) TBSテレビ -

6. 라디오 출연

<rowcolor=black> 방송일 제목 방송사 비고
1990.4 <colbgcolor=#E7E6D2> 渡辺英樹のParty on the radio (와타나베 히데키의 Party on the radio) FM静岡 -

7. 영화 출연

<rowcolor=black> 방송일 제목 배급사 비고
2010.10.3 - 11.6 <colbgcolor=#E7E6D2> 大脱出!〜脱出ゲーム THE MOVIE〜 閉鎖スタジオスピンオフ『LOST SONG』 (대탈출!~탈출 게임 THE MOVIE~ 폐쇄 스튜디오 스핀오프 「LOST SONG」 ㈱アイダック -

8. 여담

  • 어렸을 적엔 비틀즈의 팬이였지만 티 렉스, 더 타이거즈, Queen등 도 좋아했다. 라디오 코너 방송에서 게스트로 혼다 미나코가 출연했을때 퀸의 멤버와 함께 활동했었던 것을 듣고 들뜬 마음으로 소통을 이어가기도 하였다.
  • TV와 인연이 거의 없을 정도로 시청하지 않았다. C-C-B시절 1987년 당시 일본의 전설 코미디언 아카시야 산마가 진행했던 프로그램에서 이야기하길 TV는 평소에 시간이 있을때도 별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비디오나 게임 정도는 조금 본다고. 산마가 보기 드문 사람이라고 얘기할 정도였다. #
  • 인품이 선하고 따뜻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평소 사람을 잘 챙겨주었고, 사소한 부분 하나에도 좋은 면을 잘 생각하고 전해주는 모습이 깊다는걸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주위에 좋은 추억을 갖고있는 연예인과 팬들이 정말 많고, 친분이 있는 사람들과 팬들의 글에서도 알 수 있는 부분들이 많다.
  • C-C-B가 독자적으로 진행했던 라디오 코너에서 츳코미를 재밌게 잘 걸었다. 진행 방식도 깔끔해서 멤버들, 게스트와 같이 진행할 때 기분 나쁘지 않도록 재치있게 걸면서 풀어주는 모습이 담겨있어 코너 진행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파일:hideki_ccb.gif
* 눈을 모으는 것을 정말 잘했으며 자신의 특기 중 하나였었다.

* 한신 타이거즈의 팬이였다. 예전에 그룹 사운드의 더 타이거즈를 좋아했었고 이름이 같아서 좋아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한신 타이거즈 팬의 응원을 받으며 Lucky Chanceをもう一度를 연주했다. #
  • 1989년 해산 이전 당시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던 일반인과 결혼하고 이혼했으며 2명의 딸들 모두 히데키가 맡았다. 초등학생이 되어 입학했을때도 PTA 회장도 적극적으로 맡고 진행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 C-C-B 활동 당시 베이스 기타를 메는 방식이 다소 높은 자리에 위치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자신에게 편했었다고 한다. 후반 시절에는 다시 허리부근으로 연주를 했다. 94년 재결성 라이브에선 그것을 반영해 베이스 기타를 잠시 높게 연주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