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8-10-02 19:13:04

엘튼 존/개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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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살 시도
1.1. 1968년1.2. 1975년
2. 커밍아웃, 결혼과 이혼3. 신체 및 개인적인 특성
3.1. 머리3.2. 건강
4. 가족5. 집6. 수집 활동
6.1. 애견 애호가6.2. 자동차 애호가6.3. 음반 애호가
7. 정치적인 면8. 관련 화제거리9. 사건사고
9.1. 대만 공항 소동9.2. 돌체 앤 가바나 불매운동9.3. 푸틴 장난전화9.4. 경호원 성추행 누명9.5. 공연 테러 불발

1. 자살 시도

1.1. 1968년

1967년 12월부터 1968년 6월까지 린다 우드로라는 여성과 교제했다. 그녀는 엘튼 존보다 두 살 더 많고 키도 더 크고 재산도 더욱 많았던 중산층 여성이었다. 두 사람은 1967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났다. 엘튼 존이 블루스 밴드 <블루솔로지>에서 활동하던 시기[1][2], 셰필드의 한 카바레 클럽에서 공연을 했을 때였고 당시 클럽에서 한 DJ가 린다 우드로를 때리던 광경을 목격해 엘튼 존이 이를 막으면서 린다 우드로를 구했다. 곧바로 서로 눈이 맞아 엘튼 존은 다음 블루솔로지 공연에도 보러 오라고 하면서 한동안 사이좋게 지내었다. 1968년 초반, DJM 음반사에서 버니 토핀과 함께 상근 작사/작곡가로 일하던 시기 때 린다 우드로는 그의 비서로 잠시 일하기도 했다. 린다 우드로는 셰필드에, 엘튼 존은 런던에서 지냈다가 얼마 뒤, 런던 북부 이즐링턴에 위치한 아파트로 이사갔다. 엘튼 존이 자비를 내는 일이 없었고 전부 린다 우드로가 댔다.

하지만 린다 우드로는 자신의 미래 계획에서 엘튼 존의 음악적인 부분까지 고려하지 않은 데다 엘튼 존이 음악을 하는 것에 대해 개의치 않아 했다. 거기다 린다 우드로는 엘튼 존의 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200파운드(한화로 28만 원)나 하던 약혼반지를 린다 우드로의 돈으로 사면서 결혼 케이크도 주문했고 1968년 6월로 예정된 결혼식 초대장을 주변 지인들에게 보내는 등 린다 우드로는 결혼식에 대한 계획들로 내세웠지만, 엘튼 존은 이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아 했고 그 시점부터 혼란을 가지기 시작했다. 엘튼 존의 음악 경력이 몇 년간 침체되어 이어지던 무명과 그저 그런 연주자로만 살 것 같은 불안감, 곧 펼쳐질 예정이던 가정생활에서 느낀 갑갑함과 음악이 아닌 안정적인 직장을 종사하도록 원하던 린다 우드로의 생각 등으로 편하지 못한 마음을 지내고 있었다. 엘튼 존의 부모님과 주변인들도 이 결혼에 대해서 크게 반대했다.

결국 복잡한 생각들로 이기지 못해 1968년 6월 초, 아파트의 부엌에서 오븐을 열고 가스를 틀어놓은 채로 자살을 시도했다. 가스 오븐에 머리를 집어넣고, 불을 약하게 킨 채 누웠고, 오븐 안에 베개를 집어넣고 창문을 죄다 열어놓은 이상한 방식으로 자살을 시도한 것이다. 당시 버니 토핀은 부엌에서 가스 냄새가 나는 걸 느껴 침실에서 나왔는데 21살의 다 큰 남성이 오븐에 머리를 처박고 누워있는 광경이 우스꽝스러워서 처음에는 놀랐다기보다는 폭소했다. 누가 봐도 우스운 상황이긴 하지만 그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해서 버니 토핀은 서둘리 그를 일으켜 엘튼 존의 부모에게 연락을 했고 엘튼 존의 의붓아버지 프레드 페어브라더의 트럭에 탑승하고 병원으로 떠났다. 며칠 뒤, 엘튼 존은 런던 킹리 스트리트에 위치한 백 오네일스 술집에서 버니 토핀, 롱 존 볼드리[3]와 함께 술을 새벽까지 퍼마셨다. 당시 롱 존 볼드리는 엘튼 존에게 직설적이면서 솔직한 충고를 말했는데 그날 밤 존 볼드리가 엘튼 존에게 했던 충고는 본인의 삶을 구했다고 할 정도였다고 밝혔다. 새벽 4시에 술집에서 나온 엘튼 존은 린다 우드로의 아파트로 들어가 결혼을 취소한다고 말했다. 이에 충격받았던 린다 우드로는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싶어서 자신이 임신했다고 말했지만 이런 거짓말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 이후 엘튼 존은 린다 우드로의 아파트에서 떠나 아버지의 트럭을 타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고, 버니 토핀도 곧 이어서 런던으로 돌아왔다. 엘튼 존이 린다 우드로를 만난 마지막 순간이며 이후 서로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4] 이런 삶에서 엘튼 존을 빠져나오게 만든 존 볼드리의 조언이 엘튼 존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어 그를 생명의 은인으로 뜻깊게 생각하면서 그에게 감사했다. 1975년 9집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의 5번 트랙 "Someone Saved My Life Tonight"에서 당시의 일을 다룬 내용을 담았다.[5] 린다 우드로는 40년 뒤, 영국의 언론 사와 인터뷰를 하며 엘튼 존과 지냈던 시기를 여러 차례 회고했다.[6] 레지 드와이트 시절의 엘튼 존을 여전히 그리워하는 듯하지만 엘튼 존은 린다 우드로와 지내던 시기를 자신의 어두웠던 시기 중 하나로 회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2. 1975년

한창 전성기였던 1975년 10월 22일,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했던 자신의 Benedict Canyon 맨션에서 수면제 60알을 삼켜 수영장에 뛰어들면서 자살을 시도했다.[7][8] 수면제를 다량으로 한 번에 복용한 것도 위험한데 당시 엘튼 존이 위스키, 와인, 스카치 등을 몇 병이나 마시는 것이 일상이었던 알코올 중독자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매우 위험한 행위였다. 술에 수면제를 탈 경우 죽을 수 있는데 부교감신경 억제로 인한 호흡부전으로 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면제를 다량으로 삼켰던 엘튼 존은 수영장에 뛰어들기 직전 "2시간 뒤면 죽어 있을 거야!!"라고 소리치면서 어머니와 외할머니, 엘튼 존 밴드의 3기 멤버들이 보는 앞에서 수영장에 뛰어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경악하여 즉시 911을 불렀고 엘튼 존을 수영장에서 꺼내 인공호흡을 했다. 그렇게 엘튼 존은 10월 24일까지 2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고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혼수상태에 빠졌던 그를 보살펴 주었다. 미국 방문이 처음이던 외할머니 아이비 해리스는 손자의 이런 모습을 보고 큰 실망을 느껴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등 상황이 난리였다.[9][10]

West Of The Rockies 투어를 진행하던 시기이자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입성하고 바로 다음 날에 일어난 일이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고 고작 다음 날인 25일부터 26일까지 다저 스타디움에서 두 공연을 진행했고 26일 공연을 끝으로 1975년 투어를 마치고 몇 개월 동안 휴식을 가졌다. 이 일은 오랫동안 숨겨져 있었다가 2000년대에 와서 뒤늦게 밝혀졌는데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충격받은 사람들도 다수 있다. 당시 촬영된 다저 스타디움 공연 다큐멘터리는 전반적인 상황이나 분위기가 그리 밝지 않은 데다 엘튼 존의 어머니가 공연 중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그대로 수록되었다.[11]

이 사건은 같은 해 발매된 "Someone Saved My Life Tonight"과는 상관없다. 상술했듯이 1968년의 사건에 대해서 묘사된 곡이고, 이 곡이 수록된 9집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는 자살 소동이 생기기 4개월 전인 1975년 5월 19일 발매되었고 발매 1년 전인 1974년 5~8월에 작사/작곡되고 녹음된 곡이다.

2. 커밍아웃, 결혼과 이혼

파일:external/3.bp.blogspot.com/Elton+John+%26+Renate.jpg
레나테 블라우엘과 엘튼 존. 1984년
〈Louder Than Concorde〉 투어를 마치고 2개월 뒤이자 11집 Blue Moves가 발매되기 전인 1976년 10월 7일, 롤링 스톤 인터뷰에서 양성애자 커밍아웃했다.[12] 동성애자가 아니라 양성애자로 커밍아웃을 했던 이유는 2000년대 말 디테일즈 인터뷰에서 당시 커밍아웃의 필요를 느끼면서도 동성애자라고 밝힌다는 건 한창 누리던 전성기에 가는 타격이 너무 클까 봐 한편으로 두려웠기 때문에 저지른 비겁한 과오라고 뒤늦게 밝혔다.

그런데 70년대까지만 해도 양성적인 면이 있었는지 1978년 인터뷰에서는 자신이 양성애자인 면이 있다면서 자신보다 연상의 여성에 매력을 느낀다고 밝혔다.[13] 어찌 되었든 갑작스러운 커밍아웃으로 인해 화제를 일으켰고 한동안 앨범과 싱글의 판매량이 크게 줄어든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엘튼 존/1970년대 문서 참조. 커밍아웃 이후에도 성 정체성 논란은 없어지지 못했고 엘튼 존 본인도 공공연하게 밝히기보다는 흐지부지하게 넘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자신의 광팬이자 독일인 사운드 엔지니어 '레나테 블라우엘(Renate Blauel)'과 1984년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 날에 결혼했다. 엘튼 존은 1982년 9월 17집 Too Low For Zero 몬트세랫AIR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던 시기에 레나테와 만나 자연스레 친한 사이가 되었고 이후 결혼까지 결심한 것이었다.[14] 당시 오노 요코와 션 레논, 로드 스튜어트, 영국의 유명 토크쇼 진행자 마이클 파킨슨 등이 하객으로 참석했다. 그러나 성격 차이, 생활의 차이 등으로 인하여 4년간의 결혼 생활을 끝으로 1988년 11월 18일 이혼했다.[15]

레나테 블라우엘은 위자료로 500만 파운드를 받았고 둘의 사적인 사생활까지 철저히 지키면서 조용히 이어갔다. 레나테 블라우엘은 이혼 이후로 자신의 이야기를 신문에 팔거나 인터뷰에 나가 험담하는 행동은 하지도 않았고 1980년대 말부터 영국 서리 주에서 지내게 되면서 엘튼 존과의 관계를 마무리했다.

엘튼 존은 당시 결혼했던 시기를 매우 후회한다고 했다. 엘튼 존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었고 함께 보내던 좋은 시간도 많았다고 했지만, 친하게 지냈던 동료이자 본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전 아내였던 사람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는 점은 커다란 실책이라고 밝혔다. 엘튼 존은 이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롤링 스톤 잡지 인터뷰로 통해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밝혔고 12년 만에 다시 커밍아웃을 함으로써 십수 년간의 성 정체성 논란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16]

3. 신체 및 개인적인 특성

  • 과거의 아놀드 슈워제네거처럼 앞니가 크게 벌어져 있다. 이를 두고 피아노 건반 같은 이빨이라고 하기도 한다. 엘튼 존을 캐리커처로 그릴 때 벌어진 앞니를 유난히 돋보이게 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이 들어서 교정한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달리 엘튼 존은 교정하지 않았다.[17]
  • 젊은 시절에는 날씬한 체형이었지만 비정상적인 생활을 십수 년간 보내면서 체형이 두꺼워졌다. 1990년에는 폭식증으로 인해 100kg 이상이나 나갔지만 1991~92년에 다이어트를 함으로써 제법 날씬해졌다. 1994년 이후로는 나잇살도 있다 보니 통통한 체형을 유지하고 있다.
  • 1990년대 초반부터 왼쪽 귀에 귀걸이를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 독설도 자주 날리고 욕설도 서슴지 않고 사용하는 편이다. 과거에는 소극적이고 말을 아끼는 성격이었지만 1990년대부터 웬만하면 자신의 생각을 표출하려는 성격이 되었다. 대부분은 공연에서 음향 문제로 인해서 화냈다. 1992년 11월 21일 아르헨티나 공연에서는 롤랜드 RD-1000의 음향에 문제가 생겼는데 고치지 못하는 바람에 공연 내내 화를 냈고, 1995년 8월 17일 독일 공연에서 "The Bitch Is Back"을 부르는 증, 드럼의 사운드가 너무 크다고 무대 스태프에게 요청했지만 스태프 측에게 의견 반영이 되지 못해 엄청나게 화를 냈다.[18][19] 평소에 그렇게 혐오하는 파파라치에게 폭언을 쏟은 적도 종종 있다. 기분에 따라 상당히 변덕적으로 변하던 경우도 잦았는데 2006년 5월 28일 아일랜드 더블린 공연에서는 " Goodbye Yellow Brick Road와 이 곡이 수록된 앨범이 정말 싫고 다신 부르고 싶지 않다"라고 하거나 곧 이어서 "무대를 은퇴하고 유럽 공연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라고 했다. 2001년 11월 영국 맨체스터 공연에서는 "음악업계를 매우 혐오스럽다"라고 하더니 이어서 "이제 그만둘 때도 되었으니 Songs From The West Coast가 본인의 마지막 음반"이라고 한 적도 있다.[20] 2010년대 중-후반 시점으로 이런 노골적인 발언을 자제하는 편이다.
  • 공연에서 흥을 맞춰 노는 관객들을 제지하고 과잉경호하는 경호원들에게 소리친 경우가 잦았다. 2005년 6월 18일 왓포드 공연에서는 사진을 찍는 관객들을 제지하지 말라고 경호원들에게 말한 적 있는데 이처럼 관객들의 호응을 받는 경우가 흔하다.[21] 하지만 본인도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2015년 6월 7일 영국 글로스터 공연에서는 경호원 중 한 명을 무대로 불러와서 사과한 적도 있다.
  • 2017년 3월 25일, 70세 생일을 맞이했다. 이 날 로스앤젤레스의 집에서 인터뷰를 진행했으며 UCLA 대학에서 에이즈 재단 주최 행사를 진행, 그날 저녁에는 지인, 가족 등이 참석한 파티를 열었다.[23] 레이디 가가, 스티비 원더, 라이언 애덤스가 참여하여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24]

3.1. 머리

파일:external/ak-hdl.buzzfed.com/grid-cell-16133-1399563943-26.jpg 파일:external/d376bd6d55574bac08cd5bccfa85c49b8b21a70caa6e1e38b164c4507a0efb6c.jpg
1976년 2013년
화려한 이미지에 가려 있어서 크게 각인이 되진 않지만 현재와 달리 젊었을 때는 탈모 노안이었다. 전성기 시절의 사진들만 찾아봐도 머리가 거의 대머리 수리로 봐도 무방했다. 어렸을 때부터 풍성한 머리숱은 아니었고 1973년까지는 탈모 조짐이 있었지만 비교적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1974년부터 탈모가 더욱 심하게 진행하여 머리가 휑하게 변했다. 1973년에 머리를 분홍색과 초록색으로 염색한 게 화근이었다. 당시 런던에서 했을 때 문제없었지만, 뉴욕에 가서 다시 하고 나서 샤워를 했는데 분홍빛 물과 머리카락들이 곳곳에 나뒹굴고 있었다고 한다.[25] 화학물질의 부작용을 제대로 당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로 인해서 1년 사이에 머리가 확 빠져버렸고 1977년부터 2년간 금색 가발에 베레모를 쓴 걸 시작하여 1980년부터 1991년까지 자신의 머리를 감추기 위해 모자를 쓰면서 활동했다. 1980년대 사진들 중에서 모자를 안 쓴 사진을 보면 거의 대머리 수준이었고, 1985~86년에는 분홍색 포니 테일로 가꾸기도 했었다. 1987~90년의 모습을 보면 40대가 아니라 70대 이상의 노인으로 보일 정도의 엄청난 노안이었다. 이 시기에는 어둡고 칙칙한 옷에다 장례식장에서 쓸법한 모자, 검은 선글라스로 착용했었다. 본인도 이 시기의 자신의 모습이 70대 노인이었다고 밝혔다.[26]

1991년 12월에서 1992년 3월 사이, 한화로 4,000만 원 이상의 모발 이식을 받았고 20대보다 더욱 안정적이고 풍성한 머리를 가지게 되었다.[27] 엘튼 존이 받았던 모발 이식은 모낭을 뽑아서 앞머리에 심는 방법이 아니라 기존의 머리에 붙임 머리 형식으로 머리칼에 인공적인 머리칼이 연장되는 경우이다.[28] 그 후로 모발 관리를 잘해서 그런지 20~30대 시절보다 젊어보인다는 소리가 많다. 엘튼 존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에서 모발 이식 이후, 중노년 시기의 모습을 떠오르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머리숱이 별로 없던 젊은 시절의 엘튼 존을 보고 놀라거나 이식한 머리를 가발이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젊었을 때 머리 색은 연갈색이었고 모발 이식 이후에도 연갈색이다. 2000년대 이후로 주황빛으로 변했고 금발과 연갈색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3.2. 건강

  • 과거에는 마약 알코올에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중독자였다. 1974년 1월, 8집 Caribou를 콜로라도에서 작업하고 있을 때 첫 코카인을 흡입했고, 이후 1975년부터 1990년까지 15년 동안 마약을 달고 살았다.[29] 어린 시절의 수줍음과 불우했던 기억들로 인해서 마약은 자기 자신과 얘기하게 만들었고 위로가 되는 걸로 생각했다고 밝혔다.[30] 다양한 종류의 마약을 십수 년간 복용했고 코카인은 거의 식사하듯이 복용했다. 이로 인해서 각종 부작용과 질병을 가졌고 1986년에는 성대결절이 생겼다. 1980년대 말에는 우울증 간질, 심각한 성격 장애를 겪기도 했다. 마약에 관련된 부분은 영화 킹스맨: 골든 서클에서 셀프 디스하기도 했다.
  • 알코올 중독은 1970년대 초반부터 20년 가까이 이어지던 것이었고 비슷한 시기에는 폭식증도 앓았다.[31] 1980년대에는 마약 복용이 중독을 넘어 습관으로 자리 잡았고 집에 몇 주째 처박혀 스카치를 몇 병이나 들이마시면서 4분에 한 번씩 코카인을 시도했다. 언제 알프스 산맥을 지나가면서 자신이 그동안 시도한 코카인 양을 전부 합치면 저 정도 하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32]
  • 1990년에는 체중이 100kg이나 나갔는데 자신의 망가진 모습을 보고 말년의 엘비스 프레슬리 재림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33]
  • 알코올 중독 때문에 이런 일도 있었다. 1997년 9월 19일, 뉴올리언스에서 촬영된 미국의 프로그램 <VH1 Storytellers>의 엘튼 존 방영분에서 한 관객이 가장 창피했던 기억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엘튼 존은 1979년 11월에 레이 쿠퍼와 함께 A Single Man 투어를 진행하러 호주로 갔을 때 기억이라고 했는데 당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고 나서 테킬라를 들이켜 심하게 취하는 바람에 스튜디오에서 30분 동안 Rocket Man을 연주했다고 밝혔다. 스튜디오의 사람들이 점심 먹으러 나갔다 다시 스튜디오에 들어왔는데 엘튼 존은 똑같이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고 한다.[34]
  • 1990년 4월, 라이언 화이트의 사망은 커다란 충격을 받음과 동시에 자신의 삶을 돌아본 계기가 되었고 1990년 7월 29일부터 6주 동안 시카고의 갱생시설에 입원했다.[35] 그 후로도 꾸준히 비정상적인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며 마약, 알코올, 폭식증 등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모발 이식까지 받아 새사람이 되었다. 그 후로 건강이 악화되는 일도 가끔씩 있지만 다행히 별 탈 없이 지내오고 있다.
  • 1999년 7월 9일, 런던의 웰링턴 병원에서 심장 문제로 수술했고 심장 페이스메이커를 달았다. 의사들이 확인해본 결과, 엘튼 존의 심장 박동이 비정상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36]
  • 마약을 끊고 나서도 약물복용 후유증 같은 질병이 생기지 않은 걸 보면 그가 재활 치료 이후 얼마나 건강관리에 꾸준히 신경 쓰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그러나 습관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지 재활 치료 이후로 많은 세월이 흘러도 1주일에 2번 정도 코카인을 하는 꿈을 꾼다고 밝혔다.[37]
  • 2013년 7월, 급성 맹장염으로 목숨이 위험했다. 7월 5일, 엘튼 존은 독일 할레에서 열린 공연에서 복통을 호소하며 공연 도중에 급히 앰뷸런스에 실려 나갔고 공연을 중단했다. 병원에서 엑스레이 촬영 후, 치명적인 맹장 종기를 발견했고 7월에 유럽에서 열릴 모든 공연들을 취소했다. 7월 31일 모나코에 위치하고 있는 병원에서 성공적으로 맹장염 수술을 받았다. 그의 대변인의 말에 따르면, 수술 전 그의 맹장은 폭탄과도 같았다고 할 정도로 위험했다고 한다. 엘튼 존은 단지 식중독 정도일 줄 알았다고 했고 죽다 살아났다고 밝혔다. 팬들은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고 엘튼 존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수술 후 정말 많은 응원을 받았다며 팬들 덕분에 빨리 회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글을 남기며 고마움을 표시했다.[38]
  • 2015년 12월 23일, 디즈니랜드에서 가족들과 휴가를 즐겼는데 당시 엘튼 존은 휠체어에 앉아 경호원이 그를 끌어주는 모습이 공개되었다.[39] 얼마 지나지 않아 2016년 1월, 엘렌 디제네러스 쇼에 게스트로 출연한 방영분에서 밝히길, 당시 발목을 살짝 접질려 휠체어에 앉게 된 것이었고 다행히 다음 날부터 상태가 좋아졌다고 밝혔다. 팬들은 그의 건강이 나빠진 게 아닌가 싶어 살짝 노심초사했다. 정작 엘튼 존은 발목을 접질린 것보다 디즈니랜드에서 가족과 함께 티컵 놀이기구에 탄 게 제일 엿 같았다고 말해 웃음을 주었다.
  • 2017년 4월, 남미 투어 중에 희귀한 박테리아균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40] 3월 31일 브라질부터 4월 10일 칠레까지 6일간 남미에서 Wonderful Crazy Night 투어를 진행했고 칠레 공연을 마치고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갑자기 고통을 호소했다. 이후 2일간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은 뒤, 4월 22일 완치되어 퇴원했고 윈저의 저택에서 안정을 취했다. 결국 4월 28일부터 5월 5일까지 진행 예정이었던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의 〈The Million Dollar Piano〉 투어, 5월 6일 캘리포니아 주 베이커즈필드 공연을 취소했으며 6월 3일 영국 런던 공연부터 다시 무대에 오를 예정이라고 했다. 엘튼 존은 공연 취소에 대해서 팬들을 실망하게 만들어 미안하다며, 또한 자신을 돌봐준 의료진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튼 존은 인스타그램에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 팬들에게 고맙다는 따뜻한 말을 전했다.[41] 5월 초-중순까지 건강 회복에 집념하면서 완전히 건강 회복하였다. 5월 21일에는 <Elton John: The Cut> 뮤직비디오 프로젝트로 인해 제70회 칸영화제에 참석하는 일이 있었는데, 프랑스 니스 공항로 도착한 근황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42]

4. 가족

아버지는 스탠리 드와이트(Stanley Dwight), 어머니는 실라 아일린 드와이트(Sheila Eileen Dwight)가 있다. 두 사람 모두 1925년생이다. 1941년부터 교제하다가 1945년에 결혼했고 2년 뒤, 1947년에 엘튼 존(레지 드와이트)을 낳았다.[43] 어렸을 때부터 친아버지와 어색하고 소원했던 사이를 가졌던 걸로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이던 친아버지 스탠리 드와이트는 엘튼 존이 소극적인 성격으로 자라는 걸 못마땅하게 여겼고, 또래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많은 걸 제약했기 때문에 엘튼 존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엄격한 편이긴 했으나 아버지에 비해 자유분방하던 어머니 실라 드와이트와 마찰이 심해서 자주 싸웠었고 엘튼 존이 15살이던 1962년 5월 4일에 이혼했다.[44] 엘튼 존의 유년 시절과 부모님에 대해서는 엘튼 존/1960년대 문서 참조.

어머니는 건축업자 프레드 페어브라더(Fred Farebrother)와 재혼했고 엘튼 존도 의붓아버지와 더욱 친하게 지내왔다. 엘튼 존을 음악적으로 큰 공을 기울인 것도 의붓아버지와 어머니 덕분이었다. 엘튼 존이 동성애자라는 점도 흔쾌히 수용했다.[45] 어머니와 의붓아버지는 1972년 1월에 공식적으로 재혼했다.[46]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은 없다. 엘튼 존의 1975년 10월 25~26일 다저 스타디움 공연과 1979년 5월 20~28일 구소련 투어에서 동행하면서 여행을 즐긴 적도 있다.[47] 프레드 페어브라더는 2010년 6월 11일, 흉부 전염으로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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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튼 존과 친아버지, 이복 동생들 사이먼, 로버트, 제프리. 1972~73년 경
스탠리 드와이트는 요크셔주에서 군 복무 중 만난 연구기술자 '에드나 클라프'와 몇 개월 뒤 1962년 12월 28일에 재혼했고 1964년부터 1969년까지 5년에 걸쳐 4명의 아들 스탠리 E 드와이트, 로버트 A 드와이트, 제프리 윌리엄 드와이트, 사이먼 매슈 드와이트를 낳았다을 낳았다. 한창 사춘기였던 엘튼 존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아버지가 다른 여성과 재혼하여 4명의 자식을 낳고 금세 새 가정을 차린 것,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하지 않았으면서 이복동생들에게 더욱 큰 사랑을 주면서 보살피고 지내던 모습이 커다란 상처로 다가오면서 자존심을 크게 망가뜨렸다고 밝혔다.[48]

부자 간의 사이는 그 후에도 썩 좋지 않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서로 편지로 주고받고 친아버지의 집에 방문하거나 이복동생들에게 생일 카드나 매년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냈다.[49]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튼 존은 젊었을 때 각종 인터뷰에서 친아버지를 크게 원망한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그만큼 10대 때 아버지의 엄한 교육으로 인한 불안한 정서를 가지고 자랐다는 점으로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크게 품었다고 할 수 있다.

스탠리는 오랫동안 건강이 좋지 않았고 1983년 1월에 심장 우회 수술을 받았다. 1991년 12월, 66세로 병으로 사망했지만 엘튼 존은 아버지의 병문안이나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엘튼 존이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1982년 안필드 구장에서 열린 왓포드와 리버풀의 경기였고 1970년대 이후에도 서로의 소원했던 관계는 풀어지지 못했다. 비록 엘튼 존은 친아버지에 대한 원망감을 크게 품었지만 세월이 흘러 2001년 인터뷰에서는 아버지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하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고마운 분이라고 밝혔다.[50] 스탠리는 죽기 전에도 아들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면서도 그리워했다.[51]

엘튼 존의 이복 동생 중 한 명인 '제프 드와이트'는 2010년 데일리 메일 인터뷰에서 자신의 삶과 엘튼 존과의 관계, 드와이트 가문에 대해서 자세히 밝혔다.[52] 영국 루딘에서 평생을 지내왔고 18살 때 강도 혐의로 체포되어 교도소에 4년 동안 구속된 적도 있었다. 결혼 이후로 여러 명의 자식을 가지면서 가정을 이어왔지만 생계가 어려워져 1995년에 집을 팔았고 그 대신 창고 같은 허름한 집을 짓고 나서 거기서 사는 중이라고 했다. 엘튼 존은 이복동생들과도 사이가 소원하다고 하는데, 엘튼 존과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은 것은 1991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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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퍼니시, 의붓아버지, 엘튼 존, 어머니. 2002년
엘튼 존의 어머니, 의붓아버지는 아들의 비정상적인 삶에 반감을 가져 스페인으로 거주하면서 아들과 몇 년간 만나지 않았다가 1990년에 재회했다.[53] 2008년에는 해고된 엘튼 존의 옛 30년지기 동료들 관해서 얘기하다가 심각한 다툼으로 이어져 7년간 어머니와 애기도 안 하면서 지냈다가 2016년 2월에 화해하여 사이를 회복했다.[54]

2017년 5월 15일, 어머니의 날을 축하하는 게시글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55] 엘튼 존의 어머니는 2017년 12월 4일 오전에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56]

스탠리 드와이트의 형제 에드윈 드와이트의 아들이자 엘튼 존과 14살 차이가 나는 사촌 형 '로이 드와이트'는 축구선수였다. 초기에는 리버풀 FC에서 활동했지만, 1957년부터 한동안 노팅엄 포레스트에서 활동했다. 엘튼 존은 로이 드와이트의 결혼식에 참석한 적도 있고, 엘튼 존이 음악계로 발을 디딜 때 도움을 준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로이 드와이트였다.[57] 로이 드와이트는 2002년 4월 9일,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005년 12월 21일, 영국에서 시민결합이 허용되자 12년간 사귀던 캐나다의 영화 제작자 데이비드 퍼니시와 함께 법적 파트너가 되었고 2014년 3월부터 영국과 웨일스에서 동성결혼이 가능해지자 그해 12월 21일 결혼식을 울렸다.[58][59] 만약 동성결혼이 처음부터 합법이었다면 결혼한 지 20년 넘은 부부인 셈. 나이 차이는 15살이다. 결혼식에는 데이비드 베컴, 빅토리아 베컴 부부, 오지 오스본, 샤론 오스본 부부 등 50명의 하객들이 참여했다.

영국법상 작위를 받은 자(남자든 여자든)의 남편은 그 작위를 공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데이비드 퍼니시는 Sir 칭호를 쓰지 못한다. 반대로 작위를 받은 자의 아내는 그 작위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에 차별 얘기가 나온다. 가령 기사 작위를 받은 자의 아내는 Lady를 쓸 수 있고, Duke(공작)의 아내는 Duchess(공작부인)를 쓸 수 있다.

2009년 우크라이나의 고아원에서 HIV(에이즈)에 감염된 레프라는 아이를 만났고 이 아이를 입양하려 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당국으로부터 나이가 많다는 이유와 현지에서는 인정되지 않는 동성부부라는 이유로 입양을 거절되었다.[60] 엘튼 존도 마음이 크게 상했는지 2011년 8월 11일 키예프 공연에서 레프 관련 얘기를 하다가 가슴이 벅차 눈물을 흘렸다. 당시 레프를 위해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를 불렀다.[61]

비록 입양에 실패했어도 이후 교류가 계속 이어진 걸로 보이는데, 2014년 크림 위기로 우크라이나-러시아 갈등이 본격화되면서 레프 가족은 살던 곳에서 키에프로 도망쳐야 했고 엘튼 존이 이를 도왔다.[62]

2010년 12월 25일, 대리모로 통해 아들 "재커리 잭슨 리번 퍼니시존"을 얻었다. 이후 아이를 위해 형제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한 명을 더 입양하려 했으나, 이번에도 일이 잘 풀리지 않았는지 같은 대리모를 통해 2013년 1월 11일 둘째 "일라이저 조지프 대니얼 퍼니시존"도 얻었다.[63] 두 아들 모두 한 명의 대리모를 통해 출산되었으며, 해당 대리모에게는 충분한 이해를 구하고 경제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고 밝혔다. 일라이저가 태어나고 나서 엘튼 존과 가장 친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 후배 뮤지션 레이디 가가가 그들의 대모(godmother)가 되었다.[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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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튼 존, 일라이저, 데이비드 퍼니시, 재커리. 2016년
엘튼 존은 인스타그램에 아들들의 사진들을 가끔씩 올리고 공식 석상에서도 데려가는 등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으로 지내고 있다. 2016년 1월 14일 엘런 디제너러스 쇼에 출연해서 밝힌 바에 따르면,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곡들로 Uptown Funk 드레이크의 " Hotline Bling"이 있고 재커리는 특히 크라프트베르크를 좋아한다고 한다. 아버지의 곡들 중에서는 Rocket Man, "Don't Go Breaking My Heart", Bennie And The Jets를 좋아한다. 엘튼 존은 아이들의 장래를 음악 쪽으로 강요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 음악보다는 레고를 더욱 좋아한다고 밝혔다.

엘튼 존과 데이비드 퍼니시 부부는 아들들에게 재산을 상속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들이 나와 비슷하게 성장하길 바라고, 아이들에게 노동의 가치를 알려주고 버릇없는 아이로 자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65]

엘튼 존은 무파사가 죽는 장면이 비극적이라서 충격받게 하고 싶지 않다고 아이들이 더 크기 전까지는 라이온 킹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했다.[66]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은 2015년 1월, 32집 Wonderful Crazy Night을 작업하면서 두 사람의 자녀들에 대한 Children's Song, 아버지임과 배우자들을 위한 사랑을 담은 The Open Chord를 썼다.

엘튼 존은 10명의 대자들이 있고 모두 동료 유명인들의 자녀들이다. 존 레논의 아들 션 레논, 데이비드 베컴, 빅토리아 베컴의 아들 브루클린 베컴과 로미오 베컴, 엘리자베스 헐리의 아들 데미안 찰스, 워너 뮤직의 부사장이자 사이어 음반사의 사장 시모어 스타인의 딸, 엘튼 존의 첫 매니저였던 레이 윌리엄스의 딸 에모리나 윌리엄스 등이 있다.[67][68]

2015년 1월 1일, 뉴욕 브루클린 공연에서 카운트다운을 마치고 나서, 자신의 사촌 헤일리와 그녀와 당일 약혼한 제임스라는 남성을 무대로 불러왔다. 드와이트 일가인지 퍼니시 일가인지 알려진 바는 없다.[69]

엘튼 존은 가족을 공연에 꾸준히 데리고 오는 편이다. 2017년 6월 4일, 영국 더비셔에서 진행된 Wonderful Crazy Night 투어 공연에서 재커리와 일라이저를 무대로 데리고 왔고 엘튼 존이 "Philadelphia Freedom"을 부르기 전에 관객들에게 인사했다. 2017~18년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에서 〈The Million Dollar Piano〉 투어를 진행했을 때 두 아들을 무대로 데리고 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70]

1970년대 인터뷰 중에서, 만약 자신에게 딸이 있었더라면 엄브렐라(Umbrella)로 지었을 것이라고 말한 적 있다.[7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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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튼 존의 윈저 우드사이드 저택.
1975년 9월, 영국 윈저와 잉글필드 그린 사이에 위치한 우드사이드 저택을 구입했다.[72] 18세기에 지어진 이 저택은 엘튼 존이 구매하고 나서 정성스럽게 재단장했고 온갖 사치스럽고 화려한 물건들로 꾸며진 초호화 대저택이다. 1975년 구매 이후 지금도 이 저택에서 거주하고 있다. 종종 인터뷰나 다큐멘터리 촬영도 간간이 이 저택에서 이루어지기도 했다. 런던에서도 저택을, 애틀랜타 로스앤젤레스에서도 고급 아파트를 구입했고 프랑스 니스에서도 저택을 구입했다.[73][74] 2009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 칼레돈에서 저택을 구입했다는 루머가 떠돌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다.[75]

2017년 4월 6일, 실제 티라노사우루스의 크기에 맞춰 제작된 티라노사우루스 동상이 윈저 저택의 정원에 전시되었다. 엘튼 존에게 일하고 있는 아드리안 쿠퍼-그릭, 앤즈류 프로테로가 제작한 것으로 원래 링고 스타의 선물이었다가 엘튼 존의 저택으로 이전한 것이다. 이 동상의 이름은 데이지.[76]

6. 수집 활동

  • 선글라스와 의류 같은 패션 상품이나 차량, 꽃, 음반, 책 등의 수집광으로 유명하다. 1990년 재활 치료 이후에도 멈출수 없는 중독으로 음악 쇼핑을 꼽았다.[77] 1970년대부터 백화점에 가서 항상 엄청난 양의 물건들을 사는 것이 일상이다.
  • 2016년 11월부터 2017년 5월까지 1990년 재활 치료 이후로 20년 넘게 꾸준히 수집해온 약 8,000장의 1920~50년대 사진들을 런던의 테이트 모건에서 전시했다. 2017년 5월 17일까지 전시할 예정이었다가 5월 21일까지 연장되었다.[78]

6.1. 애견 애호가

동물을 좋아해서 1970년대에는 앵무새, 말, 토끼 등의 동물들을 키웠는데 특히 개를 크게 선호한다. 1970년대부터 길러온 개들이 20마리를 훌쩍 넘고 보더테리어, 아이리시 울프 하운드, 래브라도 리트리버, 저먼 셰퍼드, 코카 스파니엘, 아프간 하운드 등을 키웠다. 2004년에는 코카 스파니엘을 두 마리를 분양받았고 각각 이름을 아서와 마릴린으로 지었다. 아서는 털색이 검은색과 흰색 투톤이고 마릴린은 고동색이다.[79] 엘튼 존은 이 두 녀석을 데리고 외출하는 경우가 잦았고 공식 석상이나 무대에서도 자주 데려갔다. 아서는 엘튼 존이 공연을 하고 있을 때 백스테이지에서 가만히 쭉 앉아있으면서 공연이 끝날 때까지 엘튼 존을 기다렸다고 한다.[80]

재밌게도 아서는 엘튼 존 세션에 참여한 적도 있다. 2006년 1~4월 29집 The Captain & The Kid 작업 당시, 엘튼 존이 아서를 데리고 온 날에 "Just Like Noah's Ark"을 녹음하던 중, 아서가 아웃트로 간주를 연주하는 부분에서 갑자기 컹컹 짖고 나서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이는 밴드의 퍼커셔니스트 존 메이혼이 연주하고 있던 악기 카우벨 소리에 무서워했던 것이었다. 재밌는 것은 아서가 드럼 비트와 딱 맞게 짖었기 때문에 이를 재밌다고 생각해 이 녀석이 짖은 소리를 곡에 갖다 넣었고 앨범 참여자 목록에 아서도 넣었다. 이를 "woof-bells"로 표기했다.[81]

2018년 3월 2일,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 콜로세움에서 〈The Million Dollar Piano〉 투어 공연을 진행하던 중 엘튼 존은 아서가 그날 오전에 14살의 나이로 죽었다고 밝혔다. 이어서 아서를 추모하는 의미로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를 불렀다.[82] 반면 마릴린의 근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6.2. 자동차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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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6월 5일,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1970년대 초부터 수십 대의 고급 세단과 스포츠카를 수십 대나 소유하던 자동차 애호가였다. 그동안 소유했던 차량들로 롤스로이스, 벤틀리, 페라리, 애스턴 마틴, 재규어, 아우디, 마세라티 등 대부분 고급 세단 위주였다. 1972년에는 어머니에게 당시 신차였던 72년형 MG B를 선물한 적 있다.[83] 2001년 6월 5일 경매에서 자신의 차량들 대부분을 내놓았고, 이후 1998년형 벤틀리 터보 R400 LWB, 1987년형 페라리 테스타로사, 크롬 도금된 2011년형 아우디 R8 스파이더 등 경매에 내놓은 차량들도 상당수 된다. 사업 상으로 사용하는 차량은 메르세데스 벤츠, 캐딜락 에스컬레이드, 쉐보레 서버번 등.[84] 그리고 진짜 자가용이 따로 있다는 농담도 있다.

2001년 경매에서는 이전보다 운전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에 수십 년간 소유했던 차량들을 거의 다 내놓은 것이었다. 이후 다른 경매들로 통해서 자가용들을 거의 다 내놓았고, 2000년대 이후로 사업 용 차량 아니면 운전할 일이 거의 없어졌다. 2001년 경매에 내놓은 자동차 목록과 낙찰된 가격은 다음과 같다.
  • 1956년형 벤틀리 S1 컨티넨탈 패스트백: $196,250
  • 1960년형 벤틀리 S2 컨티넨탈 플라잉 스퍼: $67,550
  • 1962년형 벤틀리 S3 살룬: $54.050
  • 1963년형 롤스로이스 실버 클라우드 III 살룬: $86,250
  • 1964년형 벤틀리 S3 컨티넨탈 컨버터블: $69,750
  • 1965년형 벤틀리 S3 컨티넨탈 헤드 쿠페: $41,125
  • 1965년형 재규어 E-타입 4.2 로드스터: $80,750
  • 1973년형 롤스로이스 팬텀 VI 리무진: $223,750
  • 1975년형 벤틀리 코니시 컨버터블: $49,350
  • 1978년형 애스턴 마틴 V8 밴티지: $80,750
  • 1984년형 애스턴 마틴 V8 볼란테: $86,250
  • 1985년형 애스턴 마틴 V8 밴티지: $102,750
  • 1986년형 페라리 412 쿠페: $42,300
  • 1987년형 애스턴 마틴 V8 밴티지 볼란테: $101,650
  • 1987년형 페라리 테스타로사: $49,350
  • 1987년형 벤틀리 터보 R 살룬: $49,350
  • 1992년형 페라리 512 TR: $89.550
  • 1993년형 재규어 XJ: $234,750
  • 1995년형 벤틀리 컨티넨탈: $163,250
  • 1997년형 벤틀리 터보 R 400 살룬: $82.950

6.3. 음반 애호가

10대 시절부터 구입한 음반들을 가수별, 연도별 등으로 아주 꼼꼼히 정리하면서 각 음반들의 수록곡과 세션 연주자들, 출판회사, 표지 색깔 등 전부 일일이 알고 있을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선보였다. 이러한 음반 수집은 인기 스타가 되고 나서도 반세기 동안 꾸준히 이어졌으며, 주변인들로부터 음악을 제대로 안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2010년대 기준으로 마찬가지로, 노년이 돼서도 꾸준히 새로운 음악을 듣고 음반을 모으는 걸 즐기고 있다. 후배 음악가들과의 협업이 잦고, 새로운 세대의 음악도 자주 챙겨들으면서 칭찬도 아끼지 않는 편이다. 엘튼 존이 애플 뮤직 Beats 1에서 라디오 방송 "Rocket Hour"의 진행을 맡으면서 신세대 음악을 많이 재생한다.

좋은 평가를 준 후배 음악가들 중에서 특히 투첼로스에 대해서는 " 지미 헨드릭스의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 이후 최고의 라이브"라고 격찬한 적 있다.[85]

7. 정치적인 면

  • 전반적인 정치 성향은 진보적이다.
  •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했다. 2008년 4월 9일 뉴욕 라디오 시티 뮤직 홀에서 열린 힐러리 클린턴 모금 행사에 참여하여 작은 공연을 진행했고, 2016년 3월 2일 뉴욕 라디오 시티 홀에서 진행된 솔로 공연 "I'm With Her"에서 힐러리 클린턴에게 바치는 의미로 Tiny Dancer를 불렀다.[86] 엘튼 존은 클린턴 가와 오랜 친분을 가지고 있는데, 자선 활동 관련으로 자주 모습을 보이는 편이고 2007년 3월 25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진행된 엘튼 존의 60세 생일 공연에서 빌 클린턴이 무대에 나서 생일 축하 연설을 한 적 있다.[87]
  • 도널드 트럼프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선거 운동 도중에 엘튼 존 곡들을 무단 사용하여 이에 불만을 표했고 2016년 7월 엘튼 존 에이즈 재단에서 연설 중,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이 된다면 세계는 어두운 길에 빠질 것이라고 말했다.[88] 엘튼 존은 도널드 트럼프와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는 어느 정도 친분이 있던 사이였지만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고 나서 사이가 멀어졌다. 한때 사이가 괜찮았던 1990년에는 5월 18일부터 20일까지 애틀랜틱 시티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타지마할 카지노 설립 기념으로 세 차례 공연을 연 적이 있다.[89][90] 2017년 1월 20일, 엘튼 존은 도널드 트럼프의 취임식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고 밝혔다.[91] 재밌게도, 도널드 트럼프는 엘튼 존 팬이기도 하다. 팝, 록 음악 듣는 게 취미라고 했을 때 레드 제플린, 엘튼 존 음악을 특히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 있다.[92] 도널드 트럼프는 2017년에 김정은 로켓맨으로 부르기 시작한 이후로 전용기에서 엘튼 존의 Rocket Man을 매우 큰 볼륨으로 해놓고 자주 튼다고 한다.[93][94]
  • 2016년 6월 21일, 벽에 그려진 'Build Bridges Not Walls'의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면서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다.[95]

8. 관련 화제거리

  • 1991년 로완 앳킨슨과의 인터뷰. 로완 앳킨슨은 엘튼 존에게 음악적 요소와 관련 없는 이상한 질문만 하여 엘튼 존의 심기를 건드려 깐족거리는 장면을 담은 로완 앳킨슨 표 콩트이다. 공교롭게도 로완 앳킨슨은 2년 뒤 1993년, 라이온 킹에서 자주 역을 맡았고 I Just Can't Wait to Be King에서 자주 파트를 맡아서 불렀다.
  • 2000년 12월 22일, 영국 BBC의 프로그램 <TFI Friday>에 출연하여 '록 스타가 되는 법'을 친절하게 설명했다. 온갖 물건을 망치로 부숴버리고 던져버려 방을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다.[97]
  • 2004년, Q 어워드 시상식에서 립싱크하는 가수들은 총살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립싱크 가수로 마돈나를 지적했다. 이 때문에 다음 날 마돈나는 엘튼 존에게 '노망난 개구리 영감'이라고 받아치는 등 한동안 불화가 있었다.[98][99] 마돈나가 총을 맞아야 한다고 한 건 사실이 아니지만 립싱크 가수로 지목한 걸 사실이다. 엘튼 존과 마돈나는 1995년 브릿 시상식 때 같이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고 그날 백스테이지에서 서로 깔깔 웃으며 사진을 촬영하거나 1998년 4월 카네기 홀에서 스팅 주최의 아마존 열대림 보존 공연에서 듀엣을 하는 등,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이후 2012년 1월 제69회 골든 글로브에서 주제가상으로 마돈나의 "Masterpiece"가 수상하고 엘튼 존의 "Hello, Hello"가 노미네이트로 그쳤을 때에도 다시 불화가 재점화되었다가 2013년 4월, 프랑스 남부에서 서로 저녁식사를 하면서 화해를 했고 불화는 종식되었다고 선언했다.[100]
  • 2005년 한국의 사진가 배병우의 소나무 사진을 3,000여만 원에 구입하여 화제가 되었다.[101]
  • 2009년 발매된 릴리 앨런의 싱글 "Who'd Have Known"의 뮤직비디오에서 릴리 앨런이 엘튼 존에게 완전히 매료하여 리무진 운전사로 변장해 그를 납치해 집에 감금시키는 사생팬의 모습을 보여준다.[102]]] 엘튼 존에게 온갖 애정을 쏟아붓지만, 엘튼 존은 시종일관 화난 얼굴로 불편해하고 릴리 앨런이 잠든 사이에 도망친다. 실제 본인은 아니고 대역 배우다. 2008년 9월에 릴리 앨런이 취중 GQ 어워드의 '올해의 남자' 부문 시상 무대에 올라 공동 시상자였던 엘튼 존에게 막말을 하여 비난을 받았던 일이 있었는데 이 뮤직비디오는 당시 사건에 대한 일종의 반성하는 메시지를 담았다는 해석이 있다.[103]
  • 2012년, 펩시 광고를 찍었는데 '사악한 팝의 황제' 역을 맡았다.[104] 자신에게 가장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여준 자에게만 펩시를 주는 역할이다. 만족시키지 못한 이들은 전부 지하 감옥으로 떨어뜨리면서 사악하게 웃는 도중, 더 엑스 팩터 USA 시즌 1의 우승자인 멜라니 아마로가 나타나 시원한 가창력을 보이며 지하 감옥에 떨어진 이들과 엘튼 존을 포함한 모든 관중들이 들썩이며 환호를 한다. 엘튼 존은 멜라니 아마로에게 펩시를 주지만 멜라니 아마로는 펩시는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하여 엘튼 존을 지하 감옥에 떨어뜨렸다.
  • 2014년 10월 28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성소수자 포용 노력에 대해 교황은 자신의 영웅이라고 찬사를 보냈다.[106]
  • 2016년 11월 12일 사망한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리언 러셀의 11월 20일 추모식에서 사회를 맡았다.[107]
  • 2018년 4월 4일, 마틴 루서 킹 50주기를 기념하는 "꿈은 여전히 살아있다(Dream Still Lives)" 캠페인에 참여하여 자신의 꿈이 에이즈 박멸이라고 밝히며 모습을 드러냈다.[110]
  • 2018년 5월 19일, 세인트 조지 성당에서 거행된 해리 왕자 메건 마클 결혼식에서 데이비드 퍼니시와 함께 참석했다. 엘튼 존이 결혼식에서 직접 축가를 부른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정확히 결혼 피로연에서 4곡 Your Song, Tiny Dancer, "I'm Still Standing", Circle of Life를 부르며 작은 공연을 열었다고 한다.[111][112]

9. 사건사고

9.1. 대만 공항 소동

2004년 9월 23일, 대만의 공항에서 기자들에게 욕설을 퍼부은 일이 화제가 되었다.[113][114] 대만 공연을 진행하기 위해 공항에 도착했는데 공연 업체의 허술한 보안으로 인해서 기자들이 엘튼 존에게 달려들어 플래시를 터트리고 소리치는 무질서한 상황으로 변한 일이었다. 경찰이 몰려드는 기자들로부터 자신을 적절히 보호할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엘튼 존은 직접 나서서 기자들에게 "무례하고 역겨운 돼지들(Rude, Vile Pigs!)"이라고 맞대응했다. 기자 중 한 명이 나서서 "그럼 타이완을 떠나버리는 건 어때?"라고 하자 엘튼 존은 "만약 대만이 당신들처럼 돼지 같은 인간들로 가득하다면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을 것이다"라고 응수한 뒤 공연장으로 갔다. 이 장면은 대만 전역에 방송됐을 뿐 아니라 CNN을 통해 전 세계로 전해졌다.

한국에서는 이를 언급하며 "인종차별주의자", "대만을 비하했다" 등 왜곡된 주장이 돌아다녔고 이것 때문에 아직도 엘튼 존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위 링크의 영상에서도 보이듯이 엘튼 존은 취재 라인을 무너뜨리고 달려들던 기자들에게 화를 냈을 뿐, 인종차별적으로 대응하거나 대만 자체를 비하한 것은 사실이 아니다. 기자들과 싸우고 나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대만에서 떠났다는 허위 사실도 있는데, 실제로 엘튼 존은 공항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떠나지 않았으며 공연은 당일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당일 공연에서 엘튼 존은 "이곳에서 공연하게 돼 매우 기쁘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공항에서 약간의 사고가 있었다."라는 말로 관객들의 웃음을 유도하면서 자연스럽게 공항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사과했다. 이어서 "공항에서 한 언사가 대만 국민 전체에 대한 것은 아니며 대만 국민은 어떻게든 자기를 도와주려 했다."라며 공항에서 행한 자신의 공격적인 언사에 대해서 해명했다. "공항에서 만난 사진기자와 카메라 기자들은 내가 만나 본 사람 가운데 가장 무례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여러분의 나라를 욕 먹이고 있다."라고 비난했다. 공항 같은 장소에서 언론이 유명인사에 그렇게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서는 안된다면서도 자신의 말로 상처받은 사람이 있다면 사과한다며 거듭 사과의 뜻을 전했다.[115][116] 주최 측의 허술한 보안으로 기자들을 막지 못했던 건 엘튼 존 같은 대스타에게 옳지 못한 행동이고 안전불감증으로 인해 2차 피해까지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주최 측의 잘못이 컸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대만 언론은 저급하기로 악명 높다고 알려져 있다.

허술한 보안으로 인한 기자들과의 마찰은 대만뿐 아니라 1993년 6월 17일 이스라엘 공연을 포함하여 여러 번 있었다.[117] 꼭 대만이라서, 동양인이었기 때문에 과격하게 대응한 것이 아니다. 1993년 이스라엘 공연 때의 일은 당시 공연에 참석했던 이스라엘인 관객이 23년 뒤 2016년 5월, 밴드의 기타리스트 데이비 존스턴의 블로그에서 그날의 상황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데이비 존스턴은 답글로 "엘튼 존은 이스라엘 기자들과 심한 마찰이 있었다"라고 당시 상황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해당 공연도 대만 공연처럼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118]

애초에 대만인 전부를 싸잡아서 비난하려는 뉘앙스로 말한 것도 아니었고, 당일 공연에서 제대로 된 해명을 하면서도 오해를 받은 사람들이 있을까봐 이에 대해서 사과를 하고 대만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음에도, 이런 가벼운 해프닝을 언급하며 엘튼 존을 인종차별주의자라 비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엘튼 존이 당시 공항에서 했던 "Rude, Vile Pigs!"라는 말에서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 요소를 찾을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9.2. 돌체 앤 가바나 불매운동

2015년 3월, 돌체 앤 가바나의 설립자 도메니코 돌체와 스테파노 가바나가 이탈리아 잡지 <Panorama>에 실린 인터뷰에서 동성애자는 "동성결혼을 해서는 안되며 시험관 아기는 인조인간이다"라고 언급한 것이 알려졌다.[119] 도메니코 돌체와 스테파노 가바나는 동성애자이며 패션 하우스를 처음 시작할 때 둘은 서로 애인 사이였다. 이렇기 때문에 성소수자들은 더 큰 배신감을 느꼈고 이에 분노한 엘튼 존은 자기 애가 인조인간이냐며 본인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돌체 앤 가바나 불매운동을 주도했다.[120] 그러자 스테파노 가바나가 인스타그램에서 엘튼 존을 비난하고 호모포비아적 발언을 하는 사람들을 부추기며 '엘튼 존에게 악플을 달 것을 요구하는 식'으로 글을 여럿 남겼다. 당연히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전 세계 성소수자들과 불임부부들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는 뮤지션들, 미디어들로부터 대대적인 보이콧이 시작되었다. 돌체 앤 가바나를 매우 선호하던 마돈나도 보이콧에 참가했다. 결국 돌체와 가바나는 대대적인 공식 사과를 해야 했고 엘튼 존도 2015년 8월이 돼서야 보이콧을 그만두었다.[121]

9.3. 푸틴 장난전화

2015년 9월, 엘튼 존은 동성애자를 억압하는 법률이 있는 러시아에 우려를 나타내 성소수자의 권리에 관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직접 말하고 싶다고 밝혔다. 9월 14일 푸틴에게 연락이 와서 같이 11분 동안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서 대화를 나눈 줄 알았지만, 러시아의 코미디언이 푸틴을 사칭해 장난전화를 건 것으로 밝혀졌다.[122] 러시아 국영 TV 채널 쇼 프로 진행자인 블라디미르 크라스노프와 알렉세이 스톨랴로프가 런던의 한 스튜디오에서 엘튼 존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던 것이고 각각 푸틴과 대변인으로 가장했다. 이 둘은 이전에도 수많은 유명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장난전화를 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엘튼 존은 장난전화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동성애자를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진 푸틴이 자신에게 전화를 한 것에 감동해서 인스타그램에 감사 메시지를 올리고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푸틴 측은 엘튼 존에게 전화통화는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고 결국 장난전화를 걸었던 두 명의 코미디언은 자백했다. 푸틴은 나중에 실제로 엘튼 존에게 전화를 걸어 이번 소동과 관련해 기분 나빠하지 말라고 위로하면서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순 없지만 악의 없는 젊은이들"이라고 해명했다. 푸틴은 엘튼 존과 만남이 성사될 수 있다고 약속했고 엘튼 존도 9월 17일 인스타그램에서 "러시아를 사랑하며 푸틴 대통령과 성소수자 문제를 논의하고 싶다는 제안은 여전히 유효하다"라며 밝혔다.

2016년 3월 28일, 드미트리 페스코프 대통령 공보실장은 엘튼 존이 2016년 5월에 푸틴과 면회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고, 엘튼 존은 2016년 5월 28일에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Wonderful Crazy Night 투어 공연을 진행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푸틴과 만날 가능성이 컸지만, 스케줄이 맞지 않아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다. 나중에는 꼭 만날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123]

9.4. 경호원 성추행 누명

2016년 3월 29일, 성추행 혐의로 피소되었다.[124] 로스앤젤레스에서 20년간 일하고 있는 경찰관 '제프리 베닝어'는 2002년 고용된 후 2014년까지 12년간 엘튼 존의 경호원이었는데 엘튼 존이 그동안 성추행을 일삼았다고 주장했다. 엘튼 존 측은 전혀 근거 없는 헛소리라고 일축하여 해당 경호원을 고소했다. 8개월 뒤 11월 18일, 제프리 베닝어 측의 주장이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되면서 동시에 사건도 종결되었다.[125]

9.5. 공연 테러 불발

2016년 9월 11일 영국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진행된 Wonderful Crazy Night 투어 일환이자 페스티벌 공연에서 폭탄 테러를 계획한 10대가 체포되었다. ​공연 3일 뒤 9월 14일, 언론에서 이 사실을 보도했다.[126][127] 피의자는 웨스트 런던에서 거주하던 19살의 하룬 사이드(Haroon Ali-Syed). 경찰 조사 결과에 의하면, 그는 런던 지하철 폭탄 테러 때 사용된 것과 비슷한 폭탄을 가지고 있었다. 폭탄 종류는 긴 못이 들어 있는 젤리그나이트 폭약(Nail Bomb)인데 터질 때 못이 사방으로 튀어나온다. 2017년 맨체스터 경기장 테러에서 사용된 폭탄이 바로 이것이다.

처음에는 버킹엄 궁전 옥스퍼드 등 여러 장소에서 테러를 고려하다가 9.11 테러 15주기를 맞아서 그날 하이드 하크에서 열릴 예정이던 페스티벌 공연에서 테러를 계획했다고 한다. 수천 명이나 모인 관중들 사이에서 폭탄을 터트릴 자살폭탄으로 계획했다. 다행히도 공연을 진행하기 3일 전, 9월 8일 런던에서 체포되었고 그가 가지고 있던 폭탄도 경찰에 의해 해제되었다.

당시 하이드 파크에서 공연을 진행했던 뮤지션들 중에서 엘튼 존이 가장 거물이었기 때문에 이를 노린 테러였다고 추측이 있지만, 정작 체포 이후의 보고서에서는 자금 문제로 인해서 세운 계획이라고만 나와있다. 2017년 7월 3일, 피의자 하룬 사이드는 징역 16년 6개월을 선고받았고 가석방이 제한되었다.[128] 가석방이 제한되었기 때문인지, 언론에는 종신형 또는 무기징역이라고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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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상 막바지였다. 새해를 맞이하기 전, 블루솔로지를 탈퇴했다. [2] ELTON JOHN, 74 페이지 [3] 1960년대 영국의 블루스 뮤지션이자 엘튼 존의 가장 절친했던 음악 동료 중 하나. [4] ELTON JOHN, 60~65 페이지 [5] 올뮤직의 Someone Saved My Life Tonight 리뷰 게시글 [6] 2010년 11월 인터뷰 영상 [7] His Songs [8] Elton John interview [9] ELTON JOHN 212 페이지 [10] His Songs [11] 엘튼 존의 다저 스타디움 공연 다큐멘터리 [12] 1976년 롤링 스톤 인터뷰 [13] ELTON JOHN, 218 페이지 [14] 1984년 2월 14일 호주에서 방영된 결혼식 [15] Elton John Won't Go Breaking Estranged Wife Renate's Heart—He's a 'single Man' Again, but Friendly [16] The Seductions of Biography, 23 페이지 [17] 엘튼 존의 앞니 사진들 [18] 1992년 11월 21일 아르헨티나 공연 [19] The Bitch Is Back (live 1995/08/17) [20] ELTON JOHN, 380~381 페이지 [21] 경호원들에게 부탁하는 엘튼 존 [22] 2016년 2월 7일자 제임스 코든 카풀 가라오케 [23] 70세 기념 인터뷰 [24] 70세 생일 파티 [25] ELTON JOHN, 233 페이지 [26] Behind The Music [27] Rocket Man: Elton John From A-Z, 42 페이지 [28] Artificial hair integrations, hair weave로 명칭하기도 함. [29] Elton John goes back to his musical roots with his long-lost pop idol, Leon Russell [30] 엘튼 존 "마약으로 인생 낭비 가장 후회" [31] Larry King Interview With Elton John [32] Me Myself And I 다큐멘터리 [33] ELTON JOHN, 317 페이지 [34] VH1 Storytellers [35] A star is reborn [36] 1999: Elton Simpson John's Chronology [37] 엘튼 존 "마약으로 인생 낭비 가장 후회" [38] 엘튼 존 공식 웹사이트의 감사 메시지 게시글 [39] 휠체어에 앉은 엘튼 존 [40] 엘튼 존, 남미투어 때 '희소세균' 감염으로 죽다 살아나…미국 공연은 취소 [41] 인스타그램 게시글 [42] 건강 회복한 엘튼 존 [43] ELTON JOHN, 17~18 페이지 [44] ELTON JOHN, 27 페이지 [45] Unforgettable People (XLVII): Fred Farebrother [46] ELTON JOHN, 137 페이지 [47] 구소련 투어 다큐멘터리 [48] ELTON JOHN, 27 페이지 [49] 2010년 데일리 메일 '제프 드와이트' 인터뷰 [50] ELTON JOHN, 327~328 페이지 [51] 2010년 데일리 메일 '제프 드와이트' 인터뷰 [52] 2010년 데일리 메일 '제프 드와이트' 인터뷰 [53] ELTON JOHN, 270~271 페이지 [54] Elton Ends Feud With His Mum [55] Happy Mother's Day! [56] 엘튼 존 인스타그램의 어머니 추모글 [57] ELTON JOHN, 397 페이지 [58] 2005년 12월 21일, 시민결합 10주년 게시글 [59] 엘튼 존과 데이비드 퍼니시 결혼 관련 기사 [60] 엘튼 존, 나이 많고 미혼이어서 입양 무산 [61]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 (live 2011/08/11) [62] Elton John Saves Ukrainian Boy He Wanted To Adopt From Pro-Russian Troops [63] '동성결혼' 엘튼 존, "아들 위해 둘째 입양 원해" [64] Lady Gaga Named Godmother to Elton John's New Son Elijah [65] 살아있는 팝의 전설 엘튼존 자식에 상속않는 부모 대열 [66] Elton John will NOT let his sons watch The Lion King because 'it's too sad when Mufasa dies' [67] Elton John and Furnish to visit 10 godchildren over Christmas [68] The Rolling stone encyclopedia of rock & roll, 501 페이지 [69] 2014년 12월 31일/2015년 1월 1일 뉴욕 브루클린 공연 [70] 엘튼 존과 일라이저, 2018년 2월 17일 공연에서 [71] Atlanta Magazine, 218 페이지 [72] Elton John’s Lavish Residences in London and Nice, ELTON JOHN 208 페이지 [73] Elton John’s Lavish Residences in London and Nice [74] Elton John’s High-Rise Condominium in Atlanta and Woodside English Estate [75] Is This Elton's New Canadian Castle? [76] 엘튼 존의 공룡 동상, 데이지 [77] ELTON JOHN, 357 페이지 [78] 엘튼 존이 수집한 사진작품들 전시 -테이트 모던 [79] 아서 마릴린 [80] 아서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 [81] The Captain & The Kid의 참여자 목록 [82] Elton John Dedicates Song to Dead Dog Arthur [83] ELTON JOHN, 137 페이지 [84] 2001년 엘튼 존 연대기 [85] 엘튼 존 공식 웹사이트의 '투첼로스' 페이지 [86] 2008년 3월 2일 뉴욕 라디오 시티 홀 공연 셋리스트 [87] 2007년 3월 25일 60세 생일 공연 영상 [88] 2016년 7월자 뉴스 [89] 1990년 5월 18~20일 애틀랜틱 시티 공연들 셋리스트 [90] 1990년 5월 18일 애틀랜틱 시티 공연 부틀렉, 1990년 5월 19일 애틀랜틱 시티 공연 부틀렉, 1990년 5월 20일 애틀랜틱 시티 공연 부틀렉 [91] 엘튼 존 "트럼프 취임식서 노래 안해" [92] Trump has been a fan of Elton John for a ‘long, long time’ — but the feeling isn’t mutual [93] 북핵위기와 트럼프 정신건강 [94] '김정은=로켓맨' 불렀던 트럼프, 역사적 정상회담 상대로 [95] Build Bridges Not Walls [96] Rocker Shares Thoughts About MeToo And Weinstein [97] Elton John - 'Elton's Rock Star Masterclass' - The Final TFI Friday December 22nd 2000 [98] Elton John Vs. Madonna: The 5 Best Insults Over the Years [99] ELTON JOHN 373 페이지 [100] The Elton John-Madonna Feud Is Over, Says Elton John [101] 팝스타 엘튼 존 배병우 사진작품 샀다 [102] Who'd Have Known 뮤직비디오 [103] GQ 어워드 도중, 엘튼 존에게 막말한 릴리 앨런 [104] 사악한 팝의 황제 엘튼 존 [105] 로버트 플랜트 아이스 버킷 챌린지 영상 [106] 엘튼 존 “프란치스코 교황은 나의 영웅" [107] Leon Russell Memorial Service [108] 2017년 6월 3일 영국 더비셔 트위트넘 공연 셋리스트 [109] [킹스맨: 골든 서클] 카카오에 보내는 엘튼 존 특별 영상! [110] Dream Still Lives [111] Sir Elton is Expected to Play The Royal Wedding [112] Elton John Performs at Prince Harry and Meghan Markle's Lunchtime Reception [113] 2004년 9월 23일 대만 공항 소동 영상 1 [114] 2004년 9월 23일 대만 공항 소동 영상 2 [115] 엘튼 존, 공연서도 대만 언론 무례함 비난 [116] 2004년 9월 23일 대만 공연 셋리스트 [117] 1993년 6월 17일 이스라엘 공연 셋리스트 [118] 데이비 존스턴 블로그 [119] Dolce e Gabbana: l'unica famiglia è quella tradizionale [120] 엘튼 존 - 돌체앤가바나, 시험관 아기 '공방' [121] Elton John forgives Dolce and Gabbana after designer apologises for 'synthetic children' comment [122] 푸틴 대통령, 엘튼 존과 직접 전화통화…"곧 만날 생각 있다” 밝혀 [123] Sir Elton John and Putin will not meet in Russia [124] 엘튼 존, 男 경호원 성추행 혐의로 피소 [125] Lawsuit Against Elton is Tossed Out [126] British Teen Accused of Planning Terrorist Attack at Elton John Concert [127] 2016년 9월 11일 런던 하이드 파크 공연 영상 [128] 엘튼존 공연장·번화가 폭탄테러 계획 英 10대 종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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