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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블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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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000><colcolor=#fff,#dddddd> 앤서니 블런트
Sir Anthony Blunt
KCVO
파일:external/stoneofthegoddess.files.wordpress.com/anthonyblunt-124835290867232600.jpg
본명 앤서니 프레더릭 블런트
Anthony Frederick Blunt
출생 1907년 9월 26일
영국 잉글랜드 햄프셔 주 본머스
사망 1983년 3월 26일 (향년 75세)
영국 잉글랜드 런던 웨스트민스터
국적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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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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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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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업 사학자

1. 개요2. 엘리트 학자3. 엘리트 학자의 숨겨진 과거4. 자백과 그 이후의 삶5. 여담6.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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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미술사학자. 한국에는 케임브리지 5인조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2. 엘리트 학자

1907년 잉글랜드 햄프셔 주 본머스에서 태어났다. 삼형제 중 둘째로, 형인 윌프리드 블런트도 미술사학자였고 동생 크리스토퍼 블런트는 동전연구가[1]로 삼형제가 모두 비슷한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는 점이 특징이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언어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미술사를 공부한 것은 대학원에서였는데[2] 1932년 연구를 위해 프랑스와 중부유럽을 여행했던 것이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40년에 발표한 논문은 《Artstic Theory in Italy 1450-1600》(1945)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책을 통해 그는 27년간 영국의 왕실미술수집품 조사관[3]으로 근무했다. 이 직책에서 일한 공로로 1956년에 빅토리아 훈장 2등급(KCVO)을 받았는데 2등급 이상의 훈장이었기 때문에 '(Sir)'의 호칭도 함께 받아 기사가 되었다.

1947년에는 런던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런던 대학교 그룹 소속 코톨드 연구소[4]의 소장을 맡았다. 코톨드 연구소는 영국 주류 미술사학계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곳이었고 왕실과도 함께 일을 했다는 점에서도 학자로서 그가 상당히 엘리트 코스를 밟아 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랬기 때문에 그가 소련의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사실에 영국 사회가 더 큰 충격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3. 엘리트 학자의 숨겨진 과거

그가 소련에 포섭된 것은 1933년에서 1934년으로 추정된다.[5] 스파이 활동은 195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념에 따라 포섭된 간첩의 전형으로, 당시 케임브리지에 유행하던 마르크스주의와 반 파시즘 정서, 그리고 게이라는 그의 성적 지향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6][7] 그는 1939년에 영국 육군에 입대하였고 정보요원으로 프랑스에서 복무하다가 됭케르크 철수작전으로 영국에 돌아왔으며 이후에는 MI5에 합류하여 암호해독요원으로 활동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을 앞두고 독일에서 윈저 공 아돌프 히틀러, 그리고 나치 인사들 사이에서 오고 간 편지들을 회수해 오는 똥처리 임무를 맡았는데 이 임무를 맡은 뒤 조지 6세 대영도서관에서의 근무를 권하여 왕립 아카이브에 빅토리아 공주[8]의 편지를 비롯한 문서들을 추가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물론 이 시절에도 그는 소련의 스파이였다.

그가 스파이 활동을 그만둔 것은 1950년대 초반이었다. 도널드 매클린 가이 버지스가 소련으로 도망간 것이 그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가이 버지스는 그와 케임브리지 시절부터 절친했던 사이였고 그를 포섭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MI5에서 조사를 받기도 했고 심적으로도 상당히 괴로워했다. 킴 필비와 매클래런과 버지스가 소련으로 도망간 것과는 달리 그는 스파이 활동을 그만두고 영국에 남아 그 뒤에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심했다.

4. 자백과 그 이후의 삶

MI6가 그의 스파이 활동을 알아차린 것은 1963년으로 블런트가 스파이 생활을 접은 지 이미 10년이 넘은 뒤였다. KGB의 스파이였던 미국인 마이클 스트레이트의 자백으로 밝혀진 사실이었는데 MI6는 1964년에 블런트 본인에게서 자백을 받을 수 있었다. 그를 심문한 MI6 요원은 1964년부터 6년에 걸친 긴 시간 동안 그를 통해서 그의 스파이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지만 그가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1979년까지 공개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왕실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앞에서 언급된 것과 같이 그는 왕실에서 직접 부여한 임무들을 수행했고 공식적으로도 왕실의 업무를 대신 맡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중 스파이를 뛰어넘은 삼중 스파이 그가 소련의 스파이라는 점이 밝혀졌을 때 뒤따를 파장을 걱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와 영국 왕실의 관계는 그가 스파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뒤에도 계속되어서 1972년까지 이어졌다.

그가 스파이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1979년으로, 당시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가 정치적인 이유로 폭로했다. 정치권에 누가 그들의 새로운 리더인지를 주지시켜 주기 위함이었다나... 정확히 표현하면 대처는 그에 대한 면책특권이 관료집단을 중심으로 뭉친 영국 상류층의 일종의 담합이라고 판단했고 그에 따라 " 선출직 공무원이 관료 위에 있다"는 시그널을 보내기 위한 하나의 정치적 행위였다고 한다. 지금이야 대처가 보수우파의 아이콘이지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그녀는 정치혐오 정서를 타고 등장한 인물이었다.[9] 자세한 건 항목 참조.

당시까지도 케임브리지 5인조의 마지막 5번째 인물이 누군지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를 열심히 쫒아다니던 언론들은 동료 미술사학자였던 옥스퍼드 대학교의 교수 프란시스 하스켈을 용의자로 지목해서 지독하게 괴롭혔다고 한다.[10]

그는 언젠가 자신이 스파이였던 사실이 밝혀지리라는 것을 충분히 알았기 때문이었는지 대처의 폭로 이후에도 별다른 동요 없이 생활했고 연구활동을 계속했는데 만년에는 바로크 로마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이탈리아 바로크의 주요 건축가 중 한 명인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의 전기를 집필하던 중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작은 공저자였던 독일 미술사학자 요르크 메르츠에게 전달되어 계속 진행되었고 2007년에야 출간되었다.

5. 여담

  • 1948년 전역 육군 장교였던 필립 헤이가 켄트 공작부인[11]의 비서가 되기 위해 버킹엄 궁전을 찾았을 때 때마침 복도에서 그랑 스쳐 지나갔다고 한다. 그 때 조지 6세의 비서가 그를 가리켜 "우리의 러시아 스파이"라고 불렀다고(...).
  • 영국 정보부에 고용되어 이중간첩으로 활동했던 모라 버드버그는 50년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그를 공산당원으로 지목했는데 MI5는 그 보고를 무시했다. 사실 블런트 본인도 자신이 공산당원이었던 적은 없었다고 부정했다. 공산혁명보다는 파시즘과의 싸움에 관심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실 블런트 본인이 스파이로 활동한 동기는 파시즘에 대한 반감과 사회주의자로서의 이상주의 때문이었고 냉전이 시작되던 시점에 그만두었다.
  •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 시즌3 1화에 그의 이야기가 나온다.

6. 저서

학자로서 그는 상당한 평가를 받던 인물이었고 영국 주류 미술사학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의 저서는 여전히 많이 읽히는 편이다. 물론 그가 주로 활동했던 시대는 40년대에서 60년대까지였기 때문에 이후에는 그의 저작을 대체할 만한 연구서가 많이 나온 상태지만 미술사학의 고전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1966년에 그의 60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발간된 전집 《Studies in Renaissance and Baroque Art presented to Anthony Blunt on his 60th Birthday》이 있다.
  • 단행본
《François Mansart and the Origins of French Classical Architecture》, 1941.
《Art and Architecture in France, 1500–1700》, 1953.
《Nicolas Poussin: A Critical Catalogue》, Phaidon 1966.
《Nicolas Poussin》, 1967.
《Sicilian Baroque》, 1968.
《Picasso's Guernica》, Oxford University Press, 1969.
《Neapolitan Baroque and Rococo Architecture》, London 1975.
《Baroque and Rococo Architecture and Decoration》, 1978.
《Borromini》, 1979.
《L'occhio e la storia. Scritti di critica d'arte (1936–38)》, a cura di Antonello Negri, Udine 1999.
  • 논문
"French Painting, Sculpture and Architecture since 1500", 《France: A Companion to French Studies》, ed. D.G. Charlton (New York, Toronto and London: Pitman, 1972), 439–92.
"Rubens and architecture", 《Burlington Magazine》, 1977, 894, pp. 609–621.
"Roman Baroque Architecture: the Other Side of the Medal", 《Art history》, no. 1, 1980, pp. 61–80.
[1] 동전수집가의 보다 전문적인 버전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실제로 영국에 왕립동전학회가 있다. [2] 미술사학자의 상당수는 학부 시절에 다른 학문을 공부하고 뒤늦게 미술사 연구에 뛰어든 경우가 많다. 특히 블런트가 대학을 다니던 1930년대에는 미술사학과라는 독립된 학과 자체도 없었다! [3] Surveyor of the King's Pictures. 왕실에서 수집하는 회화작품들을 관리하는 직책으로 왕실에서 어떤 미술품을 수집할지 결정한다는 점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자리라고 볼 수 있다. 후술할 그의 흑역사를 생각하면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자신의 정체를 숨겨 왔는지를 알 수 있을 듯하다. [4] 영국의 미술사연구소로 2차대전 중에 독일에서 통째로 망명온 바르부르크 연구소와 통합되었다. [5] 앤서니 블런트뿐 아니라 다른 케임브리지 5인조도 케임브리지 대학교 재학 시절에 포섭되었다고 한다. [6] 도대체 그가 게이라는 것과 스파이였다는 것이 무슨 상관이었냐고 할 수 있겠지만 파시즘이 동성애를 얼마나 혹독하게 탄압했는가를 감안해 보자. 더군다나 영국에서는 당시 동성애가 불법이었다. 그야말로 동성애 행위를 하는 것 그 자체로 처벌을 받았으며 같은 시기를 살았던 수학자 앨런 튜링은 동성애 행위로 화학적 거세형을 받고 우울증으로 자살하기도 했다. 잉글랜드와 웨일즈에서 동성애를 처벌하는 법이 폐지된 것은 1967년의 일이고 그나마도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에서는 더 늦어서 각각 1980년, 1982년에야 폐지됐다. 케임브리지 5인조가 전부 게이였던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개인적 조건과 시대적 배경이 앤서니 블런트를 사회주의에 마음이 기울게 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7]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소련을 위시한 적지 않은 공산주의 국가들에서도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에 대한 대우는 좋지 않았다. 물론 러시아 혁명 직후 러시아는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급진적으로 동성애자 인권을 보장했던 나라였으나 그 시절은 길지 않았고 스탈린 집권기에 들어서면서 동성애자들은 자본주의적 병폐의 증거로 대우받으며 혹독하게 탄압당했는데 소련이나 쿠바 같은 국가들에서 성소수자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굴라크로 끌려가곤 했으며 북한도 마찬가지다. 정말 개인적 조건과 시대적 배경 때문에 소련의 첩자가 됐다면 그거야말로 아주 제대로 속은 셈이다. [8]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로 프로이센 왕국으로 시집을 갔다. 빌헬름 2세의 어머니. [9]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전통적인 영국의 보수는 케인스식으로 어느 정도의 복지정책은 인정하는 쪽이었다. 실제로 영국은 의료보험을 비롯한 각종 복지정책을 비교적 빠르게 도입한 나라이기도 하다. 좌우 관계 없이 큰 정부에 호의적이었던 당대 영국 정치의 풍토를 ' 영국병'으로 명명하며 비판하고 나선 게 바로 대처였다. [10] 하스켈은 케임브리지 5인조와 같이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이었고 거기다 러시아인 어머니와 러시아인 아내(에미르타주 박물관의 큐레이터였다)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오해를 받았다고 한다. 그 덕에 하스켈에게 '앤서니'라는 이름으로 오는 낚시성 메시지들이 쏟아졌다고...지못미 [11] 1906~1968, 조지 5세의 4남이자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의 동생인 켄트 공작 조지 왕자(1902~42)의 부인으로 그리스 왕국 출신이다. 필립 공의 사촌이기도 함. [12] 영어 위키백과의 표현으로는 third cousin. 즉, 8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