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그녀의 생애 요약 |
2. 어린 시절
1905년 러시아 제국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대인으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한 사업가였는데 원래는 화학을 공부할 생각이 없었으나 당시 유대인이 다닐 수 있는 대학이 워낙 제한되어 있었던 탓에 화학과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자 전공불문하고 뛰어들어 그것을 업으로 삼게 되었다. 결국 그는 그 방면으로 꽤 성공하여 그녀는 어린 시절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큰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안락하고 커다란 아파트에서 살았고 그 아파트 건물 1층에는 아버지 소유의 약국이 있었다. 아버지는 대단히 엄격하고 조용한 사람이었고 그녀가 기억하는 한 가까운 친구는 하나도 없었다. 여가시간마다 그는 당시 러시아에서 유행하던 사회비평[1]을 즐겨 읽었는데 그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은 그 자신이 러시아에서는 드물게 보는 자수성가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나름대로 존경했지만 그다지 친밀한 부녀관계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는 정반대였는데 아름답고 발랄하며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해서 늘 집에서 연회를 베풀곤 했다. 성장기를 통틀어 그녀는 어머니와 늘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어머니를 굉장히 싫어했었다. 그녀는 나와는 정반대인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에도 그렇게 생각했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녀는 원칙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인 스타일 면에서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사상 따위에는 무관심했던 반면 사교적인 것들에는 관심이 많았다. 어린 시절 그녀와 내가 부딪쳤던 것은 내가 비사교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나는 아이들과는 놀지 않았고, 여자친구 하나 없었다"고 그녀는 회고했다.
그녀에 따르면 어린 시절 양쪽 부모 어느 쪽으로부터도 그다지 깊은 사랑을 받지 못했던 그녀가 유일하게 인정받는 경우는 주로 그녀의 영특함이 발휘되는 때였다. 이를테면 난데없이 어머니가 그녀를 친척들 앞에 내세우며 의기양양해 하는 경우 혹은 아버지가 그녀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던 것은 주로 그녀가 어린아이지만 아주 명료한 생각을 나타냈을 경우였다고 그녀는 얘기했다. 어린 시절에서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그녀가 안티페미니즘적인 생각[2]을 가졌던 반면 소위 말하는 남성적 요소들에 대해서는 우월한 가치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녀가 일찌감치부터 인간에 대해 가장 높이 평가해 온 속성은 통상적으로 남성적이라고 간주되어 온 것들, 즉 이를테면 목적추구성과 강인함이었다고 그녀 자신은 회고했다.
로젠바움 일가의 특이한 점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그들의 삶에 별달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머니는 종교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관습적이고 감정적인 면에서 종교적인 체했을 뿐 확신에 찬 진정한 신앙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의 가족은 그저 의례적으로 1년에 한두 차례 성일을 지키는 것이 고작이었고 실제로 그녀는 자라는 동안 한 번도 따로 종교적인 훈련을 주입받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반유대주의가 폭풍처럼 거세질 무렵에도 그녀의 집안에서는 별로 유대인 문제가 심각하게 거론된 적이 없었다. 후에 그녀는 "나는 유대인으로 태어났다"고만 인정할 뿐 그 사실이 종교적, 사회적, 기타 어떤 면에서건 그녀에게 그 이상의 아무런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그녀는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단지 그뿐이었다.
그녀의 어린 시절 러시아는 그야말로 역사의 격동기를 겪고 있었다. 이미 1914년에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던 러시아는 독일, 오스트리아와 전쟁에 들어갔으며 1917년 2월 말 그녀의 생일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러시아 황제가 퇴위했다. 로마노프 왕조의 절대권력은 사라졌고 노동자들, 학생들, 중산층이 주축이 된 대다수의 시민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2월 혁명에 열광했다. 당시 10대 초반의 소녀였던 그녀는 당시 총리가 된 젊은 변호사 알렉산드르 케렌스키(Alexander Krensky)를 열렬히 사모하였고 그 사람이야말로 자유와 개인주의를 수호해주는 화신이라고 믿었다. 정작 케렌스키는 사회주의자였다.
당시에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레프 트로츠키, 이오시프 스탈린 같은 볼셰비키들이 망명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속속 돌아오고 있었다. 물론 그 중에는 블라디미르 레닌도 섞여 있었다. 그들이 돌아와 점점 힘을 장악하게 되자 당시의 처참해진 경제를 살리고자 고군분투하던 그녀의 영웅 케렌스키는 10월 혁명으로 정권을 잃고 결국 해외로 피신했다.
그 무렵 어느 날 오후의 일을 그녀는 평생 생생하게 기억했다. 어느 날 그녀는 아버지의 약국 안에 있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부랴부랴 약국 안에 있던 얼마간의 개인소지품을 챙겨 아파트에 감추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버지가 물건들을 감추고 위층에서 막 돌아오는 순간 한 패의 무장군인들이 들어오더니 문 앞에 붉은 딱지를 붙였다. 인민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국유화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개인가게뿐 아니라 은행 및 은행에 비치된 개인 안전금고까지 모든 것이 국유화라는 명목으로 압류되던 시기였다.
"그 어린 나이에도, 나는 공산주의가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곧 국가를 위해 산다는 것을 의미했다. 문맹이고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 문맹자와 가난한 자들이 지상의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고 그들이 얘기하고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고 그녀는 회고했다.
이처럼 공산주의를 직접적으로 겪은 것이 평생 그녀의 정치성향을 결정짓게 하는 피할 수 없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의 가족은 제1차 세계 대전의 몰수 과정을 직접 겪어야 했으며 이후 새로운 공산주의 체제에 적응하기 위해 투쟁해야 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 당시 러시아에서의 삶은 음울했지만 특히 정권을 장악한 세력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적응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당연히 이래야 한다고 느끼는 그러한 방식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한 세계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린 소녀 시절 이미 그녀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지만 정작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에 입학해서는 역사학을 전공하였고 훗날 그녀가 두각을 나타냈던 문학과 철학 분야는 거부하였는데 그 두 분야에서 당시 학계가 높은 가치를 두고 평가하던 것 대부분에 그녀는 조금도 동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3. 미국으로
1925년 대학 졸업 후 아인 랜드
최고 명예상을 수상하면서 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관광안내원 일자리를 얻었다. 러시아에서 끔찍하리만큼 불행을 느끼며 안내원으로 살아가던 중 그녀는 미국에 있던 친척의 편지 한 통으로 그 막다른 골목같은 직업에서 빠져나와 자유를 향하게 되었다. 시카고에서 살던 포트노이가의 잠시 다녀가라는 방문 초대로 그녀는 1926년 러시아를 떠났는데 1970년 잠시 여동생을 만난 것 이외에 그것이 조국 및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미국에서 알리사 지노비예브나 로젠바움은 아인 랜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녀의 독특한 개성과 끈질긴 개인주의는 이름의 선택에서도 드러난다. 그녀의 이름은 독일어로 '하나'라는 'ein'과 같은 발음이 나며 영어로는 소나무 'pine'과 각운이 똑같다. 성으로 택한 랜드는 미국에서 첫 번째 영화 시나리오를 쓰던 무렵 사용하던 레밍튼-랜드 타이프라이터에서 따 온 것이었다.
비록 영어는 서툴렀지만 그녀는 잠시 시카고에 머문 후에 할리우드로 떠났는데 이때 그녀의 지갑에는 50달러 밖에 없었다고 한다. 영화를 위한 글을 써서 생계를 해결해 볼 작정이었다. 할리우드에 온 지 이틀째 되던 날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던 미국인 연출가 세실 B. 드밀을 사귀게 되었는데 그는 그녀를 '왕 중 왕'을 찍고 있는 촬영현장으로 데려갔고 이어 그녀를 엑스트라로 기용하기도 했으며 그녀에게 주니어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일거리를 주기도 하였다. 방문비자를 받고 미국에 잠시 다니러 왔다가 불안하게 눌러앉아 있던 그녀는 1929년 찰스 프랭크 오코너[3]와 결혼함으로써 비로소 미국에 머물 수 있는 합법적 신분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 프랭크를 이렇게 회상했다.
프랭크는 내게 정신의 연료다. 그는 내 소설을 창조한 인생관에 현실성을 부여해주었으며, 주위에는 온통 경멸감과 혐오감만 불러일으키는 인간들과 사건뿐들뿐인 잿빛 사막에서 내가 오랫동안 그 인생관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결혼 직후 그녀는 RKO의 의상분과에 취직했다. 비록 그 일이 싫었지만 영어를 더 배우는 동안 생계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생각에서 두말 않고 그 일에 매달렸다. 그녀의 언어발달은 놀라울 정도여서 그녀는 성인이 되어 새로운 언어를 배운 후 예술적 마스터 경지에 이른 몇 안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4]로 꼽힌다.
4. 작가 데뷔
30살의 아인 랜드
그녀의 첫번째 소설은 러시아를 떠나기 전 환송파티에서 그녀가 친구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쓴 것이다. 그녀의 친한 친구는 러시아가 거대한 공동묘지라는 것, 러시아 국민들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미국인들에게 알려달라고 그녀에게 부탁했다.
<우리, 살아 있는 자들(We The Living)>에서 그녀는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가는 상황을 자세히 기술했다. 특히 그녀는 공산주의가 보통 사람들에 대해서 뿐 아니라 특히 가장 명석한 두뇌를 가진 부류를 완전히 황폐화시킨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였고 주요 등장인물들 중의 하나를 열렬한 공산주의 이념 지지자로 만듦으로써 그 체제의 근본적인 결점이 무엇인지를 얘기하고자 하였다. 그 책의 1959년판 서문에서 그녀는 "<우리, 살아 있는 자들>은 1925년 소비에트 러시아에 국한된 스토리가 아니다. 그것은 소비에트 러시아건 나치독일이건,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건 일어날 수 있는 독재에 대한 이야기 내지는 어쩌면 미국의 사회주의화를 막는 데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라고 얘기한다. 그녀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가 공산주의의 본질적인 원칙, 즉 인간이 국가를 위해 존재한다는 데에 의거해 있음을 계속 강조했다. 그녀는 공산주의가 비록 방법적인 면에서는 잘못되었을지라도 그 이상만은 고매한 것이라는 신화를 미국인들이 받아들이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녀의 <우리, 살아 있는 자들>에 대해 출판계는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으며 그 내용이 지나치게 지적이거나 반소비에트적이라고 보고 그 출판을 거부했다. 결국 맥밀란 출판사가 그 책을 출간하기로 했는데 그 출판사측은 그 책에 대해 거의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홍보도 거의 하지 않았고 단지 3천 권을 찍어냈을 뿐이었다.
그 책에 대한 서평도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출판사나 서평자들, 그 어느 쪽으로부터의 지지도 없었으나 그 책은 꾸준히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출판 이듬해에 더 많이 팔렸다. 1959년 랜덤 하우스에서 재판을 발행한 후 그 책은 이제까지 2백만 부가 넘게 팔리고 있다.
그녀의 명성은 무엇보다도 소설가로서 드높지만 첫번째 직업적인 성공은 희곡 쪽에서 이루어졌다. 그녀의 첫 희곡은 '펜트하우스 전설(Penthouse Legend)'이라고 불리는데 제목이 두 번이나 바뀌어 나중에는 '1월 16일의 밤(Night of January 16th)'이라는 제목으로 공연되었다. 이 극은 청중을 그 연극에 등장하는 피고의 배심원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면에서 당시로서 상당히 획기적인 연극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원래 '에고'라는 제목의 짧은 소설 <성가(Anthem)>는 일종의 우화 같은 디스토피아적 이야기로서 엄청난 재난 혹은 전쟁 후 집단주의화된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 책이 묘사하는 것은 각 개인의 자아와 재능을 억압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그 사회에 얼마만큼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다.
5. 1940년대, 1950년대
1943년 장편소설 < 파운틴헤드>를 발간했지만 <우리, 살아 있는 자들(We The Living)>과 마찬가지로 무려 열두 개나 되는 출판사가 이 책의 출판을 거절하며 '너무 지적이고', '논쟁의 소지가 크며' 이런 책을 읽는 독차층은 없기 때문에 팔리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작품의 가치를 믿었다고 한다.
<파운틴헤드(The Fountainhead)>는 그녀에게 상당한 명성을 가져다준 소설인데 이 소설을 쓰기 위해 그녀는 상당히 광범위한 사전 연구를 행했다. 이 소설에서 그녀는 건축가인 주인공을 통해 이상적인 인간상을 그리려는 목표에 다가서고 있는데 그 책의 주제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주의 대 집단주의의 문제 혹은 긍정적인 이성적 에고이즘의 옹호이다. 그녀가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이기주의가 그녀가 혐오하는 탐욕적인 이기심과는 구분되는 것이듯이 이 책에서 정의하는 에고이즘은 그녀가 찬양해온 개인주의의 절대불가결한 부분이다. 그 책에 대해서는 서평가들 사이에 찬반이 엇갈렸으나 대체로 그 책이 소위 사상을 다루고 있는 소설(novel of idea)의 부류에 속하는 책이라는 것, 그리고 그 책에서 나타난 그녀의 강렬한 힘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듯하다. 그 책은 1980대까지 대략 450만 부가 팔려나갔다.
<파운틴헤드(The Fountainhead)>의 성공으로 그녀는 자신의 독자층, 즉 삶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공유하는 부류의 사람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남편과 그녀는 캘리포니아에 집을 샀는데 그것은 <파운틴헤드(The Fountainhead)>의 주인공 하워드 로악이 지었을 법한 집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파운틴헤드(The Fountainhead)>의 각색 작업을 진행했고 < 움츠린 아틀라스(Atlas Shrugged)>의 주요 부분을 써나갔다.
그러던 중 1950년 나다니엘 브랜던(원명은 나다니엘 블루맨텔)이라는 사람이 그녀에게 팬레터를 보냈는데 그녀는 그 편지에 대단히 감동해서 전례없이 그에게 답장을 보냈고 그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일생에 걸쳐 우의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후 그녀는 < 움츠린 아틀라스(Atlas Shrugged)>을 남편 프랭크 오코너와 브랜던에게 헌정하였을 뿐 아니라 그를 '이상적인 독자'로 묘사하기에 이를 정도로 그들의 관계는 돈독해졌다. 브랜던과 그의 아내 바바라 브랜던이 그녀의 열성적인 팬이 되어 뉴욕으로 이주하자 랜드 내외도 곧이어 뉴욕으로 이주하였다.
뉴욕에서 브랜던은 자신의 수많은 친구들 및 친지들을 그뇨에게 소개시켜 주었고 이후 이들이 모여 '43년의 클라스(The class of 43)'라는 그룹을 만들기에 이른다. 이는 1943년이 파운틴헤드가 출간된 해임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그룹에는 연방준비은행제도(Federal Reserve System)의 회장이자 세 명의 대통령들의 고문이었던 앨런 그린스펀과, 브랜던의 사촌이자 후에 랜드의 글을 정리 출판하는 일을 담당하게 되는 레너드 페이코프 등 랜드의 사상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을 중심으로 소위 그녀가 객관주의자 운동(Objectivist movement)이라고 부른 것이 서서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Ayn Rand in Manhattan in 1957. Credit Allyn Baum/The New York Times
단연 대표작으로 꼽히는 < 움츠린 아틀라스(Atlas Shrugged)>는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그녀의 철학을 최대한으로 개진시키는 책이다. 여기서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을 창조해내면서 인간의 최우위성이라는 자신의 철학적 주제가 정치, 경제, 형이상학적 견지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철저하게 파헤친다. 그 책의 주인공은 존 갈트인데 그와 수많은 추종자들은 그 자신들이 약탈자와 거머리라고 간주하고 있는 것들에게 그들 자신과 그들의 생산적인 능력이 착취당하지 않게 함으로써 이 세계의 모터를 정지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녀의 모든 소설들이 그러하듯 인간의 최우위성을 극화시키고 있다는 이 작품에서도 독자적이고도 귀중한 개인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느냐가 선을 판별하는 기준이 된다. 만일 어떤 것이 삶에 영양을 주고 삶을 키워나간다면 그것은 곧 선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어떤 것이 개인적인 행복의 추구를 부정하거나 가로막는다면 그것은 악한 것이다.
< 움츠린 아틀라스(Atlas Shrugged)>의 출간에 따른 각 진영의 반응은 당연히 예견할 수 있다시피 상반된 것이었다. 진영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어리석은' 내용을 담고 있다느니, '터무니없다'느니 하는 온갖 부정적인 비방이 가해졌지만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노예 해방 논의의 물꼬를 틀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 움츠린 아틀라스(Atlas Shrugged)>은 객관주의라는 특정운동을 촉발시킨 계기가 되었다. 그 책의 출간으로 인해 그녀는 본격적으로 사상가의 대열에 끼게 되었으며 철학적인 영향력은 정치권[5]에서부터 테니스 코트[6], 연방준비제도[7], 알래스카 입법부[8]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에 미치게 되었다.
1959년, 그녀의 첫 인터뷰 |
6. 1960년대, 1970년대
그녀 마지막 소설을 출간한 때는 52세였지만 소설가로서의 경력을 끝냄과 동시에 대중 철학자로서, 연사로서의 그녀의 경력은 본격적으로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지식인을 위하여: 아인 랜드의 철학(For the New Intellectual: The Philosophy of Ayn Rand)>이 1961년에 출간된 데 이어 다양한 주제[9]에 관한 다양한 에세이를 모은 논픽션들이 계속 뒤를 이었다. 그러나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논픽션에서도 그녀는 인간의 권리 면에서의 주요 갈등분야를 주제로 다뤘는데 개인주의 대 집단주의, 이기주의 대 이타주의, 이성 대 신비주의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그녀의 철학에서 이 모든 영역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성은 각 개인의 어느 것이 삶을 지탱해주고 자아를 키워주는 것인가를 판별하는 도구가 된다. 집단주의, 이타주의 및 신비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건강한 자아, 이성을 가로막는 것들이라는 것이 그녀의 확고한 견해다.
< 움츠린 아틀라스(Atlas Shrugged)>는 그녀의 마지막 소설이 되었지만 궁극적으로 그 소설 때문에 그녀는 철학자, 문학가로서 널리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1960년대에 그녀는 대학캠퍼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연사가 되었으며 Ford Hall Forum의 정기출연 인사였고 <로스엔젤레스 타임스>의 칼럼니스트가 되었다. 그녀는 조니 카슨, 필 도나휴, 탐 스니더 등과 차례로 인터뷰를 하였고 심지어 <플레이 보이>지와도 인터뷰를 했다. 그녀가 보수적인 기존 철학계로부터 종종 외면당한 이유 중의 하나는 학자들을 상대로만 얘기한 것이 아니라 바로 대중매체들도 즐겨 이용하며 일반인들을 상대로 얘기해 왔기 때문이다.
한편 나다니엘 브랜던은 20개의 강의코스를 통해 객관주의의 기본적인 철학을 강의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기회로 나다니엘 브랜던 인스티튜트가 세워졌는데 그 기관은 전미국에 객관주의에 대한 강연을 테이프로 보급하는 한편 출판부도 에세이와 모노그라프 등을 출간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62년에서 1965년 사이에 출간된 초기의 The Objectivisit Newletter는 주로 랜드나 브랜던, 그린스펀의 에세이를 실었는데 1966년 'The Objectivisit'라는 이름으로 대체되었다가 1971년 소박하게 'The Ayn Rand Letter'라는 타이프라이터로 찍힌 내용으로 바뀌었고 1976년까지 계속 출간되었다.
지적 운동의 선각자로서의 그녀의 이력에는 두 가지 단계가 있다. 1968년까지는 나다니엘 브랜던이 랜드 철학의 주요 대변자, 그것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아 왔지만 1968년에 그녀는 브랜던 부부와 결별을 선언했는데 그것은 다시 랜드 추종자들 사이에 어떤 균열을 가져왔다. 일부는 여전히 자신들을 '객관주의자'라고 부르면서 그녀가 동의한 글만을 출간하는 순수파로 남은 반면 일부는 그간의 그녀의 영향력은 인정하되 다른 해석이나 변경을 시도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Ford Hall Forum에서의 그녀의 출연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그녀는 그 자신을 숭배하는 자들이나 싫어하는 자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강렬한 카리스마와 이지적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7. 말년
1980년, 아인 랜드의 마지막 TV 인터뷰 |
말년에는 건강의 악화[10]와 1979년 남편 프랭크와 사별하는 등의 개인적인 슬픔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었지만 1980년 필 도나휴 쇼에 출연한 그녀는 삶에 대한 여전한 사랑과 내세를 부정하는 무신론을 다시 한 번 확언하였다. 만일 내세가 있다면 사랑하는 남편과 만나기 위해 당장이라도 자살하겠다는 것이 그녀의 변이었다. 1982년 3월 6일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심장 부전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장례식에는 그녀의 제자 앨런 그린스펀을 비롯한 저명한 추종자들이 참석했다. 그녀의 죽음은 오히려 그녀의 철학에 대한 학계의 새로운 관심을 촉발시켰으며 그녀의 추종자들로 하여금 더욱 열렬히 그녀의 철학을 널리 알리게끔 만들었다. 살아 생전 그녀에 대해 출간된 책이 다섯 권이었던 반면 그녀의 사후 5년간 그녀의 철학을 소개하는 다섯 권의 책이 잇달아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철학에 대한 관심이 오히려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볼 수 있다.
[1]
주로 러시아의
신비주의와 정치적인
절대주의에 반대하여
유럽의 문명과
영국의 정치제도를 옹호하는 부류의 글들이었다.
[2]
이는 사실 그녀의 평생 지속된 요소이기도 했다.
[3]
그도 '왕 중 왕'에 엑스트라로 나왔었다.
[4]
조세프 콘라드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를 연상시킨다.
[5]
마거릿 대처는 그녀를 숭배한다고 얘기한 바 있다.
[6]
빌리 진 킹은 랜드의 영향을 받았다고 얘기했다.
[7]
앨런 그린스펀은 자신의 사고형성에 끼친 랜드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고 얘기했다.
[8]
랜드를 기리기 위해 인용문집을 발간했다.
[9]
이를테면 미국 공립학교 제도, 로맨티시즘,
인종주의 등
[10]
암으로 한 쪽 폐를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