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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bbd1a><colcolor=#00386a> 청 성조조 황태자
아이신기오로 인청 愛新覺羅 允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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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화석이밀친왕(和碩理密親王) |
봉호 |
황태자(皇太子) → 폐태자(廢太子) → 황태자(皇太子) → 폐태자(廢太子) → 화석이친왕(和碩理親王) |
생몰 기간 | 1674년 6월 16일 ~ 1725년 1월 27일(52세) |
부친 | 청 성조 강희제 |
모친 | 효성인황후 |
재위 기간 | 청 황태자 |
1675년 ~ 1708년 | |
청 황태자 (복위) | |
1709년 ~ 1712년 |
[clearfix]
1. 개요
청나라의 제4대 황제인 강희제의 둘째 아들이자[1] 적장자로서,[2] 첫 번째 황후였던 효성인황후의 소생으로 아명은 보성(保成)이며 이 이름은 훗날 윤잉의 호가 되기도 하였다. 청나라의 황족으로 역사상 황제가 공식 석상에서 책봉한 유일한 황태자지만, 옹정제 즉위 후에 바뀌었다.자질이 뛰어난 황자였으나 두 살 때 황태자로 책봉된 탓에 형제들의 질시를 받았고, 그로 인하여 황제의 자리를 놓고 벌어진 골육상쟁의 가장 큰 희생양이 되었다. 특히 형제들의 질시와 부황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지나친 압박으로 인하여 점점 난폭한 행동을 일삼았다 그 결과 아버지 강희제는 자신의 아들들 중 가장 총애한 그를 황태자에서 폐위시켰고, 다시 복위시켰으나 또다시 폐위하여 생전 다시는 관작을 회복하지 못하고 연금된 채 생을 마감하는 등 굴곡진 삶을 살았다.
2. 생애
그의 어머니인 효성인황후는 만주족 최고의 명문가이자 정황기 출신으로 당시 보정대신이었던 허셔리 소닌의 손녀이다. 효성인황후가 궁에 들어간 후 강희제는 그녀를 매우 사랑하여 이미 윤잉 전에 아들인 승호(承祜)를 두었으나 요절하였다. 삼번의 난으로 뒤숭숭하던 1674년(강희 13년), 효성인황후는 윤잉을 낳은 뒤 난산으로 곧바로 붕어하였다. 이에 크게 상심한 강희제는 효성인황후에게 주던 사랑을 윤잉에게 모두 쏟아부었고, 실제로 윤잉은 강희제의 자식들 중 강희제의 평생을 통틀어 가장 많은 총애를 받았다. 뒤이어 강희제는 내란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청 제국의 결속과 안정, 그리고 황실에 대한 신민들의 충성을 고무하기 위하여 이듬해인 1675년(강희 14년)에 효장태황태후와 인헌황태후의 명에 따라 윤잉을 황태자로 책봉하고 정전인 태화전에서 황태자 책봉식을 거행하였다.[3] 당시 강희제는 황태자를 책봉할 때 이러한 성지를 내리며 사면령을 내렸다.황제가 이르노니,
하늘의 뜻을 이어받고 백성을 다스릴 줄 아는 옛 제왕들은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 태자를 세워 나라의 근본을 탄탄히 하여 종묘와 사직에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다. 짐은 오랫동안 이에 대해 심사 숙고하였다. 열성조의 뜻을 지켜나가기 위하여 이 중대하나 경사스러운 당부를 하노라. 적장자 윤잉은 날마다 영민해지며 그 순수함을 더욱 보여주고 있나니 태황태후마마와 황태후마마의 영을 받들어 전례에 따라 종묘, 사직, 천단, 지단에 제를 올린 후 강희 14년(1675년) 12월 13일 윤잉을 황태자에 봉하오니 동궁에 거처하게 하며 만년을 이어갈 황통을 중히 여기며 사해와 천하의 마음을 잇도록 하라.
《청사고》성조인황제본기, 열전7, 이밀친왕전
하늘의 뜻을 이어받고 백성을 다스릴 줄 아는 옛 제왕들은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 태자를 세워 나라의 근본을 탄탄히 하여 종묘와 사직에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다. 짐은 오랫동안 이에 대해 심사 숙고하였다. 열성조의 뜻을 지켜나가기 위하여 이 중대하나 경사스러운 당부를 하노라. 적장자 윤잉은 날마다 영민해지며 그 순수함을 더욱 보여주고 있나니 태황태후마마와 황태후마마의 영을 받들어 전례에 따라 종묘, 사직, 천단, 지단에 제를 올린 후 강희 14년(1675년) 12월 13일 윤잉을 황태자에 봉하오니 동궁에 거처하게 하며 만년을 이어갈 황통을 중히 여기며 사해와 천하의 마음을 잇도록 하라.
《청사고》성조인황제본기, 열전7, 이밀친왕전
청 제국 역사상 황제가 황태자를 공식 석상에서 책봉한 일은 이 사례가 최초이며 유일한 경우이다. 강희제는 윤잉을 황태자에 책봉하고 난 후 제왕학 수업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윤잉은 머리가 총명하여 4살 때 천자문을 떼고 7살 때에는 사서오경을 다 암송하였다 하며 줄곧 아버지가 내려주는 어려운 공부와 과제를 금방 끝내고 모두 맞추는 등 강희제와 윤잉을 가르치던 스승들의 칭찬을 한 몸에 받았다
강희제는 특히 박학홍유(博學鴻儒) 출신으로 학식이 높기로 유명한 대신 이광지(李光地)를 태자의 스승인 태자태사로 삼아 윤잉을 지도하였다. 윤잉에게 제왕의 싹이 보이자, 강희제는 윤앙에게 황제만 입을 수 있는 황포를 입도록 허용하고 자금성 어디에서든 가마와 말을 탈 수 있게 해주었으며 새로 동궁인 육경궁(毓慶宮)을 지어서 그곳에 기거하게 하였다. 1686년(강희 25년) 강희제는 여러 학사들을 초대하여 윤잉에게 유교 경전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는데, 윤잉은 이내 한어, 만주어, 몽골어 등 3개 국어에 능통하고 유교 경전의 중요한 구절을 모두 외울 수 있었다. 정무로 바쁜 강희제는 틈이 나면 윤잉에게 제왕학을 가르치는 등 윤잉이 다음 황제로서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도와주었고 기대하였다.
서양 선교사들도 윤잉에게 좋은 인상을 받아 "정중하고 잘생긴 황태자"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23세가 된 황태자의 잘생기고 단정한 외모는 또래 황족 중 가장 완벽하다고 할 수 있다.[4] 그는 완전무결한 황태자로 궁정의 황족들 가운데서 그를 칭찬하지 않는 자가 한 명도 없을 정도다. 언젠가 그의 아버지처럼 중화제국에서 유례없는 위대한 황제 중 한 명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조아킴 부베
조아킴 부베
2.1. 불화의 시작
강희제는 윤잉에게 여러가지 중책을 맡기고 준가르 원정 당시 윤잉에게 경성의 사무를 주관하게 했다. 또한, 윤잉의 대우를 황제에 준하는 수준으로 정했다. 윤잉에 대한 이러한 우대는 만주족의 공동통치 풍습을 계승한 것이었다. 누르하치도 자신의 적장자 저영에게 사실상의 대리청정을 맡기기도 했다.하지만 이는 누르하치 시절과 마찬가지로 부자간의 균열을 초래했다. 윤잉이 황태자이자 공동통치자가 되자 조정에서 강희제보다 윤잉을 따르는 파벌이 형성된 것이다. 또한, 이전시대의 서자인 황자들은 대부분 권력을 얻지 못했던 것[5]과 달리 강희제의 서자들은 관료화되어 조정에서 중용받고 친왕이 될 기회가 있었다.[6] 이렇다보니 황자들이 태자 자리를 노리고 권력을 키울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황장자 윤제가 강희제의 신임을 받으며 전장에서 군공을 세우고 납란 명주 등과 함께 세력을 키웠기에 윤잉의 불안은 더욱 커져갔다.
1690년(강희 29년) 강희제의 제1차 가르단 원정 때 윤잉은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으나 원정 도중 강희제가 말라리아에 걸리자 제3황자 윤지와 더불어 강희제를 문병하라는 전갈을 받았다. 그러나 부황을 간병하면서 슬픈 기색을 비치지 않아 노한 강희제는 윤잉을 북경으로 보내고 근신하게 하였다. 그 후 윤잉은 아버지 대신 태묘의 제례를 책임지는 등 아버지의 신임을 회복하고 정무를 맡았다.
1695년(강희 34년) 윤잉은 과이가씨를 황태자비로 맞아들였다. 이듬해에 강희제가 다시 가르단을 치러 출정하자 윤잉은 북경에 남아 섭정황태자로서 대리청정을 하였고, 각부와 남서방의 보고도 태자인 윤잉에게 집중되었다. 중요한 일은 대신들이 의논한 후 윤잉에게 보고하였고 윤잉이 처리한 후에 출정 중인 강희제에게 전갈을 보내어 맞게 처리하였는지 자문을 구하였다. 그러나 원정 도중 강희제는 다시 중병에 걸렸고 이번엔 병세가 위중해지자 윤잉에게 황위를 넘기고 자신은 태상황제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피력하였다. 그러나 강희제는 곧 완쾌하였고 가르단의 군세를 대파하고 개선하자 윤잉을 의심하기 시작하며 윤잉을 더욱 닦달하게 되었다.
이 시기 강희제와 윤잉이 주고받은 편지 내용에는 부자지간의 균열과 긴장감이 서려있다. 강희제는 윤잉에게 다음과 같이 질책하는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네가 라마승을 자주 만나고 여기저기 놀러다닌다는 소리가 들린다. 언관들이 너를 질책할까봐 걱정이구나.', '어망은 더이상 보내지마라. 매일 군무를 관리하는데 어떻게 한가로이 낚시를 하겠느냐.' 또한, 윤잉에게 보내는 편지에 평소와 같이 명령조가 아니라 청유형을 사용하여 윤잉이 화들짝 놀라 '신의 영광과 부귀, 생사는 모두 황부께 달려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감당하기 어려우니 다시는 사용하지 않으시길 간청합니다.'라고 답장했다.[7]
그러면서도 강희제는 윤잉에게 여전히 집착적인 애정을 쏟았다. 강희 35년에 윤잉에게 '나는 네가 보고 싶은데 왜 답장이 늦느냐?', '네 옷이 낡았던데 네 옷 4벌을 나한테 보내라. 네가 입은 옷을 입고 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려한다.'라는 서신을 보냈다. 윤잉은 이런 아버지의 집착과 통제에 점차 질려가기 시작했다.
2.2. 반목과 첫 폐위
20대까지 윤잉은 똑똑하고 빈틈없이 정무를 처리하였으나 30대 이후부터는 점차 환락과 엽색행각을 즐겨가며 탐욕스러웠다고 한다. 20대까지 이부를 관장하던 윤잉은 30대에 접어들자 근무를 나태하게 하는 등 강희제의 분노를 사서 이부의 관장권을 회수당하였다. 그 사이에 장성한 다른 황자들은 강희제의 인정을 받고 각 부처를 통솔하기 시작하자 윤잉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었다.이 중 윤잉의 옆에서 윤잉을 지원하던 황태자당(皇太子黨)은 반격할 태세를 갖추고 반윤잉 세력과 마찰을 일으켰다. 이 황태자당의 수뇌는 바로 윤잉의 외종조부이자 효성인황후의 숙부인 영시위내대신 색액도(索額圖)였다. 윤잉이 점점 송고투에게 의지하자 강희제는 송고투가 감히 부자 사이에 끼어들었다고 불평을 했고 강희 42년 역모죄로 처형한다.[8] 황태자당의 수뇌인 송고투가 역모죄로 죽었으니 그에게 의지한 윤잉의 입지는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 윤잉의 상태는 갈수록 악화된다. 밤중에 황궁을 배회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이상행동을 보이자 강희제는 당황하며 "윤잉이 귀신들린 것 같다", "힐방전(윤잉의 궁인들 처소)이 불길해서 윤잉이 이상해졌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윤잉이 평군왕 눌이소 등의 고위 황족들, 대신들, 형제들을 구타하자[9] 강희제는 깊이 실망했고 황자들은 윤잉을 경멸했다. 황태자인 윤잉의 입지가 좁아진 것을 눈치챈 몇몇 대신들은 다른 황자들의 옆에서 윤잉을 비난하며 당파 싸움을 점점 격화시켰다. 이 때부터 강희제는 아들인 윤잉의 자질을 의심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에게 윤잉이 다음 황제로서의 자질이 있는지 물어보는 비문(秘文)을 자주 보냈고 관리들은 강희제에게 표문으로서 그 답을 올렸는데 대부분이 윤잉은 다음 황위에 앉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올렸다.
그리고 윤잉의 유모의 아비 내무부 총관 능보의 부정축재, 윤잉이 외번 몽골에서 무례를 범한 일, 결정적으로 황18자 윤개가 병환에 시달리자 강희제가 쾌유를 기원하고 있을 때 윤잉이 강희제의 막사 안을 염탐하면서 강희제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1708년(강희 47년)에 다음과 같은 성지를 내리고 윤잉을 황태자에서 폐위시켜 서인으로 삼았다.
짐이
태조 폐하,
태종 폐하,
세조 폐하의 대업을 이어받은지 48년 째로 신하들과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고 아껴와 천하를 편히 다스리려 하니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나 황태자 윤잉은 조상들의 유훈을 어기고 짐의 가르침도 따르지 아니하며 점점 사특하고 음란해져 많은 이들의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예전 색액도가 모반을 획책할 때에도 짐은 군신의 정에 흔들렸으나 이내 처형하였다. 그러나 지금 윤잉은 외숙조( 색액도)의 복수를 갚는다고 붕당을 결성하고 짐은 오늘 변고를 당해 내일 뜨는 해를 보지 못할까봐 밤낮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이런 사람이 어찌 열성조의 유업을 계속 이어나가겠는가? 또한 윤잉은 태어나면서 어미를 죽였다. 이러한 사람은 예로부터 불효하다고 하였다. 만일 불효하고 자애롭지 않은 자를 임금으로 삼는다면 조종의 업을 완수하겠는가? 이에 오늘 천지와 종묘, 사직에 고하여 윤잉을 황태자에서 폐위하노라.[10]
《청사고》성조인황제본기, 열전7, 이밀친왕전
예전 색액도가 모반을 획책할 때에도 짐은 군신의 정에 흔들렸으나 이내 처형하였다. 그러나 지금 윤잉은 외숙조( 색액도)의 복수를 갚는다고 붕당을 결성하고 짐은 오늘 변고를 당해 내일 뜨는 해를 보지 못할까봐 밤낮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이런 사람이 어찌 열성조의 유업을 계속 이어나가겠는가? 또한 윤잉은 태어나면서 어미를 죽였다. 이러한 사람은 예로부터 불효하다고 하였다. 만일 불효하고 자애롭지 않은 자를 임금으로 삼는다면 조종의 업을 완수하겠는가? 이에 오늘 천지와 종묘, 사직에 고하여 윤잉을 황태자에서 폐위하노라.[10]
《청사고》성조인황제본기, 열전7, 이밀친왕전
조칙을 요약하자면, 윤잉이 횡음무도하고 내외에서 돈을 끌어모아 대신들을 이용하여 외숙조인 송오투의 원수를 갚는다고 부황을 죽이려 하니, 이러한 폐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처라고 하였다.
하지만, 강희제는 이 직후 윤잉을 폐위한 것을 후회하며 식사도 못하고 밤에 잠도 못잘 정도로 괴로워했다. 결정적으로 황8자 윤사가 얼마나 막대한 지지를 받는지 강희제가 알게 되면서 상황이 변한다. 행실에 문제가 많고 윤잉을 미워하던 황장자 윤제가 민간의 점쟁이의 말을 인용하며 윤사를 황위 계승자로 추천하고, 여러 황자들과 수많은 대신들이 윤사를 지지한 것이다.[11]
강희제는 조서를 내려 공개적으로 황태자를 새로 세우라는 말을 언급하는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나라의 적으로 규정해 참수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강희제는 윤잉을 죽이겠다고 한 윤제를 냉궁에 유폐한 뒤 윤사 역시 작위를 박탈하고 그 집에 연금하여 크게 뉘우치도록 하였다.
2.3. 두 번째 복위와 폐위
강희제는 윤잉을 폐하고도 여전히 이 아들에 대한 미련을 포기할 수 없었고, 윤사가 주도하는 정국을 타파하고자 하며 조정 대신들을 불러 차기 황태자로 적합한 황자를 추천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은 강희제의 뜻을 따르지 않고 윤사를 지지했다. 강희제는 이 결과에 충격받아 효장태황태후와 효성인황후가 꿈에서 나왔다며 이는 윤잉의 광증이 회복될 징조라고 주장하면서 윤잉을 다시 복위시킬 뜻을 피력했다. 이듬해인 1709년(강희 48년)에 ‘비록 기괴한 행동을 하였으나 점차 그 상태가 나아지고 있다’는 이유로 윤잉을 복위시키고 윤잉의 비 구왈갸씨 역시 황태자비로 재책봉되었다. 그러나 윤잉이 이미 부황인 강희제의 후궁과도 동침하였다는 사실[12], 다시 기방에서 수많은 기생들과 같이 주색잡기에 빠지는 등 엽기적인 행각을 계속 벌이고 있어서 강희제를 실망시켰다. 1711년(강희 50년), 강희제는 남순 중 윤잉이 일부 대신들과 더불어 강희제를 몰아내고 윤잉을 황제에 즉위시키려 한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보고를 받게 된다. 이 때 윤잉과 접촉한 대신들은 모두 과거 색액도가 이끌던 황태자당의 잔당으로 보군통령 탁합제(托合齊), 병부상서 겅거이(耿額), 형부상서 치슈(齊世武), 그리고 팔기의 군사를 이끄는 도통과 부도통 등이다.강희제는 윤잉이 새로운 사람이 되길 바랐으나 결국 윤잉은 돌이킬 수 없는 역모의 주동자가 되었다. 강희제는 즉시 귀경하여 탁합제와 겅거이, 치슈 등을 교사하고 도통 오샨(鄂繕)은 유폐된 후 안친왕 악락의 묘소의 능지기로 보냈다. 황제와 황태자가 오랫동안 같이 존재하면서 황태자가 조정에서 제2의 황제로서 황권을 저지할 가장 강력한 장애물이라고 생각한 강희제는 다시 윤잉을 폐할 결심을 굳히고 1712년(강희 51년) 음력 9월 30일, 강희제는 윤잉을 잡아들이고 복위한 이래 광증이 아직 치유되지 않았고 인심을 크게 잃으니 이러한 자에게 열성조의 유업을 잇게 할 수 없으니 함안궁(咸安宮)에 가두어 영원히 서인으로 삼겠다는 성지를 내렸다. 이후로는 생전에 황태자를 뽑지 않을 것임을 공언하고 일체의 황태자 책봉에 관한 조정의 공론화를 차단하였다. 더불어 강희제는 만약 이러한 의견이 조정에서 나올 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참형에 처하겠다는 성지를 한번 더 내렸다.
이 사건의 폐단으로 청 제국 멸망할 때까지 황태자를 황제의 치세에 책봉하지 않았다. 대신, 황제가 죽은 뒤 황제가 다음 황제에 걸맞은 황자의 이름을 적은 유언장이 만천하에 공개되면 그 황자는 황태자로서 잠시 섭정을 하다가 며칠 뒤 정식으로 황제에 등극하게 된다. 이러한 황제 선출 방법을 바로 저위비건법(태자밀건법)이라고 부른다.
폐위된 후 조선에서는 청에서 다녀온 사신들이 황장손(홍석)이 어질기 때문에 강희제가 태자를 내치고 다른 아들을 내세우지 못한다고 보고하는 기록이 여럿 있다.
3. 최후
10년 전까지만 해도 황태자로서 자신이 이을 것이라 예상하던 황위는 결국 1722년(강희 61년), 강희제가 붕어하고 그의 뒤를 이어 넷째 아우인 옹친왕 윤진이 황위에 오르니 이가 옹정제이다. 옹정제는 윤잉을 풀어주지 않았지만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했고 윤잉의 자녀들에게도 잘해주었다. 비록 사소한 원한도 잊지 않는 옹정제지만 자신을 발로 차서 기절시킨 둘째 형에게 이런 이례적인 관용을 베푼 이유는 즉위 당시 세력이 부족했기에 태자당의 잔당들을 끌어왔기 때문이다. 윤잉(胤礽)은 옹정제의 피휘 정책에 따라 윤잉(允礽)으로 바꾸고[13] 그로부터 얼마 후인 1725년 1월 27일, 음력으로는 1724년(옹정 2년) 12월 14일에 윤잉은 십수년 간 연금되어 있던 냉궁 함안궁에서 52세로 생을 마감하였다.[14]윤잉이 죽은 후, 옹정제는 윤잉을 복권시켜주고 윤잉에게 이친왕(理親王)의 작위를 내리고 시호를 ‘밀’(密)이라 하였는데 밀 자의 뜻은 추박전과(追補前過), 즉 순박하였으나 생전에 과오나 죄가 있다는 뜻이다. 이에 정식 시호는 이밀친왕(理密親王)이다. 그의 무덤은 톈진 근처 황화산(黃花山)에 있는 원침(園寢)에 마련되었으며 청일 전쟁, 중일 전쟁, 문화대혁명 때 도굴되었다.
옹정제는 윤잉의 자녀들을 잘 대해주었는데[15], 이는 강희제가 윤잉의 장자인 홍석을 친왕으로 봉하고 우대하라는 유조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주사회는 가독을 이어받은 계승자가 어린 동생과 조카들을(특히 적출일 경우) 부양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16]
4. 평가
윤잉에 대한 평가는 당시만 해도 매우 부정적이었다. 조선에서 동지사로 다녀온 민진후[17] 등이 윤잉은 충성스럽지 않고 효성스럽지도 않아 몰래 누이들을 간음한 포학한 황태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숙종 대에 사은사로 다녀온 박필성은 황장자인 윤제와 황태자인 윤잉이 틈만 나면 싸우고 원수 같은 사이가 깊어져서 내환이 크게 터질 빌미가 될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옹정제는 즉위 후 둘째 형이 어릴 때부터 부황의 깊은 사랑을 받았고 은혜에 부합하여 근면하게 지냈으나 불행하게도 중년의 나이에 광증이 생겼다고 하며 어느정도 옹호하는 평을 한 바 있다.현재 연구자들은 윤잉이 폐위된 것은 개인의 자질 때문이 아니라 과도기적인 상황에 휘말렸을 뿐이라고 평한다. 만주족은 적자를 중시했으나 입관 후 풍습이 빠르게 변하고 서자인 강희제가 수많은 업적을 남기면서 적자 계승을 고집할 이유가 없어졌다. 또한 지도자의 생전에 후계자를 선정하는 것은 만주족에게는 매우 낯선 상황이었다. 이런 과도기적인 상황이 윤잉을 극도로 불안하게 만든 것이다. 강희제의 비정상적인 집착과 강한 통제는 윤잉의 상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5. 가족 관계
5.1. 부인
- 적복진 과이가씨(瓜爾佳氏 1675~1718): 도통 백작 석문병(石文炳)의 딸
- 측복진 이가씨(李佳氏 1675~1745): 경차도위 서이덕고(舒爾德庫)의 딸
- 측복진 정가씨(程佳氏): 정세복(程世福)의 딸
- 측복진 당가씨(唐佳氏)
- 측복진 왕가씨(王佳氏)
- 측복진 이씨(李氏)
- 서복진 범가씨(范佳氏)
- 서복진 유가씨(劉佳氏)
- 서복진 임가씨(林佳氏)
5.2. 자녀들
- 1자(1691~1701): 측복진 이가씨 生 / 요절
- 1녀(1693~1693): 측복진 이가씨 生 / 요절
- 2녀(1694~1694): 측복진 이가씨 生 / 요절
- 2자 화석이친왕 홍석(和碩理親王 弘晰 1694~1742): 측복진 이가씨 生
- 3자 봉은보국공품급 홍진(奉恩輔國公品級 弘晉 1696~1717): 서복진 임가씨 生
- 3녀 군주(郡主 1697~1735): 적복진 과이가씨 生 / 아라포탄(阿喇布坦)에게 출가
- 4자(1704~1705): 측복진 당가씨 生 / 요절
- 4녀(1706~1706): 서복진 범가씨 生 / 요절
- 5녀(1707~1712): 서복진 범가씨 生 / 요절
- 6녀 화석숙신공주(和碩淑愼公主 1708~1784): 측복진 당가씨 生 / 세종 옹정제의 양녀
- 5자(1708~1708): 첩 유씨 生 / 요절
- 7녀(1711~1716): 서복진 유가씨 生 / 요절
- 6자 봉은보국각희공 홍연(奉恩輔國恪僖公 弘燕 1712~1750): 측복진 당가씨 生
- 8녀 군주(郡主 1714~1760): 측복진 정씨 生 / 박이제길특 개소극랍씨(博爾濟吉特 彭蘇克拉氏)에게 출가
- 7자 보국공 홍조(輔國公 弘晁 1714~1774): 측복진 황가씨 生
- 9녀 현주(縣主 1714~1762): 서복진 임가씨 生 / 칠왕다이제(七旺多爾濟)에게 출가
- 8자(1715~1726): 첩 전씨 生 / 요절
- 9자 삼등시위 홍요(弘遙 1716~1783): 첩 구씨 生
- 10녀(1717~1720): 측복진 정가씨 生 / 요절
- 11녀(1717~1725): 서복진 유가씨 生 / 요절
- 12녀 군주(郡主 1717~1776): 첩 기씨 生 / 객영아(喀英阿)에게 출가
- 13녀(1718~1719): 첩 주씨 生 / 요절
- 10자 다라이각군왕 홍위(多羅理恪郡王 弘爲 1718~1780): 측복진 정가씨 生
- 11자 홍병(弘丙 1720~1763): 측복진 왕가씨 生
- 14녀(1722~1722): 첩 배씨 生 / 요절
- 12자 봉은보국공 홍환(奉恩輔國公 弘晥 1724~1775): 측복진 정가씨 生
6. 대중매체
-
보보경심 배우 장뢰. 자세한 건
애신각라 윤잉(보보경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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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쇄심옥 배우 종봉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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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회 배우 예숭양
7. 둘러보기
청사고(淸史稿)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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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태조기(太祖紀)」 | 2·3권 「태종기(太宗紀)」 | 4·5권 「세조기(世祖紀)」 | |||
애신각라 노이합적 | 애신각라 황태극 | 애신각라 복림 | ||||
6·7·8권 「성조기(聖祖紀)」 | 9권 세종기(世宗紀)」 | 10·11·12·13·14·15권 「고종기(高宗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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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권 「인종기(仁宗紀)」 | 17·18·19권 선종기(宣宗紀)」 | 20권 「문종기(文宗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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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정경황후 · 정강귀비 · 각순귀비 · 효각민황후 · 액이덕특씨 |
※ 26권 ~ 160권은 志에 해당. 161권 ~ 213권은 表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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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금 정극장 정극상 정극거, · 이정국 액역도 · 비영동 , 삭해 왜흑, · 하화례 , 다적례 화석례 도류, · 안비양고 · 호이한 238권 「장혁덕등전(蔣赫德等傳)」 장혁덕 · 액색혁 · 차극 · 파합나 · 송권 · 부이점 · 여궁 · 성극공 · 김지준 · 왕영길 · 당숭아 247권 「팽이술등전(彭而述等傳)」 팽이술 · 육진분 · 요연저 · 필진희 · 방국동 · 우붕거 · 왕천감 · 조정표 250권 「이위등전(李霨等傳)」 이위 · 손정전 · 두입덕 · 풍부 · 왕희 · 오정치 · 황기 · 송덕선 · 이상아 · 아란태 · 서원문 251권 「도해등전(圖海等傳)」 252권 「감문혼등전(甘文焜等傳)」 마가도해 · 이지방 감문혼 · 범승모 · 마웅진 · 부홍열 253권 「막락등전(莫洛等傳)」 막락 · 진복 · 왕지정 · 비아달 · 이흥원 · 진계태 · 진단적 · 마비 · 엽앙류 255권 「장용등전(張勇等傳)」 장용 · 조양동 · 왕진보 · 손사극 256권 「채육영등전(蔡毓榮等傳)」 채육영 · 합점 · 항애 · 화선 · 동위국 · 동국정 · 주유덕 · 장덕지 · 윤벽 · 왕계문 257권 「조국조등전(趙國祚等傳)」 조국조 · 허정 · 주구 · 서치도 · 호세영 · 당희순 · 이린 · 조응규 · 조뢰 · 이방술 · 진세개 · 허점수 261권 「양첩등전(楊捷等傳)」 양첩 · 석조성 · 만정색 · 오영 · 감리 · 황오 · 방태 · 목혁림 · 단응거 262권 「위예개전(魏裔介等傳)」 263권 「왕홍조전(王弘祚等傳)」 위예개 · 웅사리 · 이광지 왕홍조 · 요문연 · 위상추 · 주지필 · 조신교 264권 「학유눌등전(郝維訥等傳)」 265권 「탕빈등전(湯斌等傳)」 학유눌 · 임극부 · 유홍유 · 유건 · 주배 · 장정추 탕빈 · 손지욱 · 육롱기 · 장백행 266권 「엽방애전(葉方藹等傳)」 267권 「장옥서등전(張玉書等傳)」 엽방애 · 심전 · 여두눌 · 서원공 · 허삼례 · 왕사정 · 한담 · 탕우증 장옥서 · 이천복 · 오전 · 장영 · 진정경 · 온달 · 소영조 · 숭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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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아기에 요절한 강희제의 아들들까지 합치면 윤잉은 강희제의 일곱 번째 아들이다
[2]
원래 동복 형인 승호(承祜)가 있으므로 적차자이나 승호가 3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그 후 윤잉이 태어났고 성장하여 왕작까지 받았으므로 적장자 취급을 한다.
[3]
강희제가 유교를 숭상해서 적자인 윤잉을 위해 이러한 파격적인 조치를 했다고 알려져있으나 만주족은 원래 적자를 중시한다. 홍타이지는 누르하치의 정비 4인 중 한 명의 소생이었고, 순치제는 홍타이지의 정실인 숭덕오궁 소생이었다.
[4]
조아킴 부베는 강희제의 아들들의 외모를 고평가했는데, 그중에서도 황장자 윤제와 윤잉의 외모와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5]
군왕이 된 누르하치의 7남 아바타이는 생모가 측복진이었고, 홍타이지의 서자들 중 친왕이 된 이들은 원래 적자였다가 측생자로 격하된 경우였다.
[6]
이는 강희제가 적실 범위를 황후 한 명으로 축소시키면서 생긴 문제이기도 하다. 순치제시대까지는 중궁황후가 아닌 동서양궁황비와 황귀비도 적실로 인정했으나 강희제 시대부터 황후 외의 비빈들은 동서양궁황비와 같은 예우를 받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측비 소생의 황자들은 홍타이지의 측생자들과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 게다가 강희제가 측비도 아닌 서비 소생의 서자지만 황위를 계승했으므로 황자들과 대신들은 예전만큼 적자 승계 원칙을 고집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7]
훗날 윤사가 강희제의 견제를 받을 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8]
송고투가 정말로 반역을 꾀했는지는 정황이 매우 모호하다. 현재 기록상 근거라고는 전부 강희제의 말뿐이기 때문에 송고투가 당을 결성했던 것을 강희제가 과장했을 뿐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후로도 강희제는 송고투가 착한 내 아들을 망쳤다고 화를 냈고, 대청 제일가는 죄인이라고 욕하였다.
[9]
만주어 기록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옹정제도 윤잉에게 맞은 적이 있다.
[10]
이 직후 강희제는 통곡했다.
[11]
이후로 강희제는 윤잉이 인심을 잃은 것을 윤사의 탓으로 돌리며 갈군다.
[12]
이것은 나중에 와전된 일로 당대 기록에서 나온 적이 없다.
[13]
후계자를 뜻하기도 하는 ‘윤’(胤) 자는 오직 옹정제 자신만이 써서 정통성 강화의 일환으로 형제들에게 피휘를 강요하였다.
[14]
그 자신이 황태자로 책립된 다음날이다.
[15]
윤잉의 장자인 홍석은 군왕으로 봉해진 뒤 부친의 친왕 작위를 계승했고 윤잉의 다른 자녀들도 황궁에서 계속 자랐다.
[16]
누르하치도 계모인 하다나라 컨저의 어린 아들을 직접 양육했고, 홍타이지도 계모인 아바하이의 아이들을 잘 보살펴주었다.
[17]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자 외척으로
인현왕후의 오빠이자
명성황후의 5대조이다. 스승은
송시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