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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trasbourg(
프랑스어) Straßburg( 독일어) Strossburi(알자스어)}}} 스트라스부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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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 문장 | |
국가 | 프랑스 | |
레지옹 | 그랑테스트 | |
영토 집합체 | 알자스 유럽 집합체(6AE) | |
데파르트망 구역 | 바랭(67)[1] | |
앵테르코뮌 | 외로메트로폴 드스트라스부르(중심도시)[2] | |
인구 | 290,576명 | |
면적 | 78.3km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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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0년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 왕국이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이 지역을 전리품으로 획득한 이후 프랑스 땅이었다 독일 땅이기를 반복한 알자스-로렌 지역의 대표 도시이다.프랑스 북동부 알자스 주의 주도였으나, 2016년부터 시행된 프랑스 행정 지방 제도 개편에 따라 현재는 그랑테스트의 주도이다.
인구는 27만 명, 광역권 인구는 광역 76만[3]으로 프랑스에서 7번째로 큰 도시다.[4]
2. 역사
- 기원전 1세기 - 로마의 지배[5].
- 496년 - 프랑크 왕국의 지배 시작, 메로빙거 왕조에 의한 도시 복원.
- 842년 - 프랑크 왕국의 분열,《 스트라스부르 서약》체결
- 843년 - 베르됭 조약으로 중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됨
- 870년 - 메르센 조약으로 동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됨
- 925년 - 로트링겐 공국에서 알자스[6]가 분리되어 슈바벤 공국에 속하게 됨.
- 1254년 - 라인 도시 동맹에 가입
- 1381년 - 2차 라인 도시 동맹에 가입
- 1531년 - 슈말칼덴 동맹에 가입
- 1681년 -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스트라스부르를 포함한 북알자스를 기습 침공, 점령
- 1697년 - 레이스베이크 조약에서 프랑스 왕국 영토임을 승인받음
- 1871년 -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독일 제국의 지배, 알자스로렌 지역의 수도
- 1919년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제3공화국의 알자스모젤 지역으로 귀속
- 1940 ~ 1944년 -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에 합병.
- 1945년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제4공화국의 알자스 지역으로 복귀
- 1949년 - 유럽 평의회 설치
- 1988년 -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그랑드일 선정
- 1992년 - 유럽연합의 유럽의회 설치
- 1998년 - 기존의 인권재판소와 인권위원회가 통합된 유럽인권재판소 설치.[출처]
842년 스트라스부르 서약이 체결된 곳이기도 하다. 프랑스 문명과 독일 문명의 교차점이라고 할 수 있는 도시에서 나온 문서가 프랑스어와 독일어의 첫 흔적을 담고 있으니 의미심장하다고 하겠다.
원래 17세기까지는 독일에 포함된 지역으로 신성 로마 제국에 소속된 도시였다. 1681년 루이 14세가 선전포고 없이 기습 공격으로 침공하여 점령하였고, 1697년 레이스베이크 조약을 통해 프랑스 영토로 인정받았다. 이후 프랑스와 독일이 알자스-로렌을 놓고 쟁탈전을 벌일 때마다 스트라스부르의 주인도 계속 바뀌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다시 독일 땅이 되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가 승리하면서 49년만에 다시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17세기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이 지역을 점령한 이래 정책적으로 이 지역에 독일어 사용을 억제하고 프랑스어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지만 20세기 초중반까지만 해도 지역민들의 대다수는 독일어 방언을 사용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 독일의 프랑스 침공 전에 프랑스 정부가 주민들을 후방으로 소개할 때 나온 공고문도 프랑스어와 독일어로 같이 표기될 정도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지속적인 프랑스어 교육으로 현재는 프랑스어가 많이 보급되었고 현재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프랑스어를 능통하게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프랑스 10대 대도시 중에는 유일하게 프랑스어/ 독일어 병행 수업을 하는 초등학교(Ecole élémentaire)가 있는 도시이다. 주민들의 상당수는 여전히 독일어에도 능통하지만 그 비율이 점점 적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서양에서 처음으로 금속활자와 활판 인쇄술을 발명하여 세계최초의 독일어 성경책을 찍어낸 것으로 유명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이곳에서 살면서 활동을 했다. 그 때문에 구시가지에 구텐베르크 광장이 있으며 그 곳에 그의 동상이 있다. 당시 스트라스부르는 유럽 인쇄술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당시 스트라스부르의 인쇄소들이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 성경을 찍어낼 수 있었던 것은 스트라스부르가 1201년 자유 제국도시 지위를 획득한 이래 특정 영주의 지배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유럽연합의 유럽의회와 유럽인권재판소, 유럽 평의회가 소재하여 유럽정치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3. 명칭
'스트라스부르'라는 이름은 사통팔달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다는 데에서 유래하여 독일어의 길(Straße)과 도시(Burg)를 합친 슈트라스부르크(Strassburg, Straßburg)라고 명명되었다.현재 프랑스 관광청 공식 한글 홈페이지에는 한글로 "스트라스부르그"라고 표기되어 있다. 프랑스어 발음으로는 스트라스부르로 표기되어야 하지만 독일어권인 해당 지역의 언어적 특성을 반영하여 이렇게 표기한 듯. 대한민국의 각 행정기관별로 두 표기를 혼용하고 있다. "Strasbourg Agreement Concerning the International Patent Classification" 역시 "국제특허분류에 관한 스트라스부르그 협정"이라고 한다.
4. 특징
역사적으로 중세와 근대를 걸쳐 독일에서 인쇄업이 가장 발달한 도시였다. 특히 구텐베르크가 활판인쇄술을 발명한 곳으로 유명하다. 마인츠 태생의 구텐베르크는 당시 인쇄업의 본산이었던 스트라스부르(슈트라스부르크)으로 이주하여 인쇄업에 종사하며 활판인쇄술을 발명하는 업적을 남겼다.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판인쇄술로 찍어낸 독일어 번역 성경은 종교개혁의 확산 뿐만 아니라 독일어 맞춤법 확립에 큰 기여를 했다.라인강을 맞대고 독일과 접해 있는 국경도시로 자전거로 20분만 밟으면 독일로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몹시 가까우며 2017년 4월부터는 지상전철( 트램)이 개통되어 5분이면 라인강 너머로 마주한 국경도시인 켈(Kehl)[8]을 넘을 수 있다. 현재도 지리적으로 독일과 몹시 가까운 이유 때문에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으로 오고가는 루프트한자 리무진 버스가 다닐 정도.
프랑스 입장에서도 교통은 물론, 전략적으로도 중요도가 높은 도시여서 프랑스 철도 초창기에 선로가 놓였다. 파리 동역에서 스트라스부르를 잇는 철도가 이미 1840년대 말에 세워졌다. 과거 파리 동역의 이름이 스트라스부르 역(Gare de Strasbourg)이기도 했는데 역 이름을 행선지를 따서 지었기 때문.[9]
독일 문화권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이라 크리스마스 마켓도 독일 주요 대도시만큼 성대하게 열리고, 이 지방 요리도 독일 요리와 느낌이 비슷하다. 자우어크라우트를 곁들인 소박한 요리가 많다.
5. 그랑딜 구시가지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국어 | 스트라스부르 : 그랑딜에서 노이슈타트까지 |
영어 | Strasbourg, Grande-Île and Neustadt | |
프랑스어 | Strasbourg, Grande-Île et Neustadt | |
독일어 | Straßburg, Von Grande-Île nach Neustadt | |
국가·위치 | 프랑스 그랑테스트 스트라스부르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88년[10] | |
등재기준 | (ii)[11], (iv)[12] | |
지정번호 | 495 |
그랑딜은 작은 섬이라 강따라 한 바퀴 도는데 크게 걸리지는 않는다. 작은 강을 끼고 있는 아기자기한 느낌이라 어디든 예쁘지만 쁘띠프랑스 지역과 보방댐에서의 뷰는 특히나 예쁘다. 옆나라의 브뤼헤도 연상되는 풍경이다.
사진에 나와있는 크고 아름다운 노트르담 성당[13]과 성당주변의 구시가지, L'Ill 하천 안 섬에 있는 쁘띠뜨 프랑스(Petite France)[14]는 이곳을 상징하는 명소이다. 독일어권 목조건축문화를 대표하는 파흐베르크하우스(Fachwerkhaus)들과 로마제국 시대부터 유럽 일대에서 유행하던 목구조 양식의 건축들이 잘 보존되어 있고, 고풍스러운 중세나 유럽의 작은 도시의 풍경을 갖고 있는 시가지가 유명하다. 쁘띠뜨 프랑스(Petite France)란 단어는 15세기 부터 섬안에 존재해온 매독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에서 유래되었다. 당시 징병/파병 등 전쟁을 이유로 떠났던 프랑스인들은 흔히 매독[15]을 앓은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때 매독 환자들을 위한 병원이 자리했던 수로 일대가 '매독에 걸린 프랑스인'이라는 의미의 쁘띠뜨 프랑스(Petite France)로 불리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같은 단어의 전혀 다른 뜻으로 사람들에게 어필되고 있다.[16]
6. 교통
가장 가까운 공항으로는 스트라스부르 엔츠하임 국제공항이 있다. 철도교통의 중심은 스트라스부르 빌역이 맡고 있다.시내 교통망은 A,B,C,D,E,F 6개 노선의 트램을 주축으로 하여 짜여져있다. 스트라스부르 빌역의 트램 플랫폼만 지하에 있으며, D선은 라인강을 건너 독일 켈 까지도 간다.
7. 출신 인물
- 루돌프 민코프스키 - 천문학자[17]
- 샤를 드 푸코 - 군인, 탐험가, 지리학자, 수도자. 가톨릭과 성공회의 성인.
- 아르센 벵거 - 아스날 FC의 전 감독. 연고팀인 RC 스트라스부르 알자스의 선수로 활동한 적이 있으며,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출신이다.
- 에밀 발퇴펠 - 무도음악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
- 엘리프 샤팍 - 터키 소설가
- 프리츠 켈러 - 축구선수
- 한스 베테 - 물리학자
- 샤를 뮌슈 - 지휘자.[18]
8. 창작물에서
- WHITE ALBUM2의 coda편에서, 키타하라 하루키와 토우마 카즈사가 이 도시에서 5년만에 재회했다.
- 주문은 토끼입니까?의 배경의 모델이 되는 도시이다.
9. 사건사고
- 2015년 스트라스부르 TGV 탈선 사고가 일어났다.
- 2018년 12월 11일 스트라스부르의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총격 사건이 일어나 4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부상을 입었다. # 용의자인 셰리프 셰카트(29)는 프랑스 경찰에 의해 이튿날 사살되었는데 IS는 자신들의 매체를 통해 그가 그들의 전사였으며 따라서 자신들이 주도한 테러임을 주장하였다. #
10. 여담
- 서정원이 이곳 축구팀인 RC 스트라스부르에서 뛰었던 적이 있다. 팀이 강등권을 왔다갔다 했지만 서정원이 RC 스트라스부르에서 실질적인 에이스 역할을 했던지라 이 지역팬들에게 쎄오(Seo)라 불리며 큰 사랑을 받기도 했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가 이 지역 명문대인 스트라스부르 대학 출신이다.
- 이 도시에 있는 스트라스부르 의과대학의 한 잠겨진 법의학실험실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학살된 유대인의 신체조직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이 장기들은, 당시 나치 점령하의 스트라스부르 의대 교수로 재직하던 아우구스트 히르트에 의해 인체실험용으로 활용되던 것으로 밝혀졌다. #
- 기차역이 굉장히 독특하게 생긴 걸로 유명하다. 오래된 건물의 전면을 유리궁전 스타일로 덮은 형태. 멀리서 보면 흡사 유리돔 같은 느낌도 든다.
[1]
주의회는
알자스 유럽 집합체(6AE)로 통합되었으나, 주지사는 통합하지 않고 오랭과 바랭에 각각 있다.
[2]
메트로폴.
[3]
독일 쪽까지 합치면 121만 명
[4]
2010년 기준 인구로
파리 : 225만(광역 1,200만) -
마르세유 : 85만(광역 170만) -
리옹 : 50만(광역 220만) -
툴루즈 : 46만(광역 120만) -
니스 : 34만(광역 100만) -
낭트 : 28만(광역 87만) - 스트라스부르 : 27만(광역 76만) 순.
[5]
당시 이름은 아르겐토라툼(Argentoratum). 실제로 스트라스부르엔 아르겐토라툼이라는 레스토랑이 있다
#
[6]
스트라스부르 포함
[출처]
《도시로 보는 유럽통합사: 영원의 도시
로마에서
EU의 수도
브뤼셀까지》
[8]
스트라스부르의 라인강 건너편 도시.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프랑스에 합병되었고 독일인 주민들은 모두 추방되었으나 1953년
서독으로 다시 반환되었다.
[9]
비슷하게
파리 리옹역은
리옹에 없고 파리에 있으며 리옹에는 대신 리옹 파르디외역(Gare de la Part-Dieu, Lyon)이 있는 식이다.
[10]
2017년 등록확장
[1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12]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13]
가장 유명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과는 별개의 성당이다. 프랑스어로 노트르담(Notre-Dame)은
성모 마리아를 뜻하기 때문에 프랑스에는 노트르담이라는 이름이 붙은 성당이 많이 있다.
[14]
petit가 아니라 petite기 때문에 "쁘띠뜨" 라고 읽는다.
[15]
프랑스어 : Petit vérole 쁘띠 베홀
[16]
작은
프랑스라고 직역되는 쁘띠뜨 프랑스(Petite France).
[17]
수학자
헤르만 민코프스키의 조카이다.
[18]
본명은 카를 뮌슈[20]이며, 30대까지는 독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악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프랑스 재벌 네슬레 그룹의 딸과 결혼하고 파리에서 장인어른이 만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지휘자로 데뷔하면서 프랑스식 이름인 샤를 뮌슈로 이름을 고쳤다.
[19]
정말이지
일본
다케시마급의 대형사고다. 독일 동부에도
Strasburg라는 마을이 있지만 구분을 위해 공식적으로는 Strasburg (Uckermark)라고 표기한다. 2011년에
CNN은 Cannes, France라 써놓고 지도 위치는 스페인에다 표기하는
방송사고를 저지른 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