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1 04:25:33

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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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기산풍속화도 석전.png
기산 김준근, 〈기산풍속화도〉, 석전하는 모양
덴마크 코펜하겐 국립박물관 소장

1. 개요2. 역사3. 해외 유사 사례4. 대중매체5. 여담6. 관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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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석전(石戰) 한민족의 민속 놀이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때는 정월 대보름이나 단옷날에 했던 놀이다.

눈싸움과 비슷하지만 석전(石戰)은 말 그대로 돌(石) 싸움(戰)으로, 눈뭉치 대신 돌멩이를 던진다. 그러니까 전장에서의 피튀기는 투석전을 민간인들이 한 것이다. 보통 인접한 두 마을끼리 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직접 마주보고 던지거나 아니면 지형지물을 활용해 상대편 마을까지 밀어붙여 점령하면 승리한다.

2. 역사

옛 기록에 따르면 석전은 최소 삼국시대 고구려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1]
每年初, 聚戲於浿水之上, 王乘腰輿, 列羽儀以觀之. 事畢, 王以衣服入水, 分左右爲二部, 以水石相濺擲, 諠呼馳逐, 再三而止.
매년 정초(正初)에 패수(浿水)[2] 가에 모여 놀이를 하는데, 국왕은 가마를 타고 와서 우의(羽儀)를 나열해 놓고 구경한다. 놀이가 끝나면 왕이 옷을 물에 던지는데, 군중들은 좌우로 두 편을 나누어 서로 물과 돌을 뿌리거나 던지고, 소리치며 쫓고 쫓기기를 두 세번 되풀이한 뒤 그만 둔다.
수서》 〈고구려전〉
파일:석전1.jpg
파일:석전2.jpg
파일:석전3.jpg
내가 조선에 당도한 첫 해 동안에 나는 전통적인 편싸움, 즉 석전을 구경할 흥미롭고 미심쩍은 특권을 누린 적이 있었는데, 이런 경험은 한번만이라도 겪어보기를 갈망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고, 지혜롭고 박식한 여자들일지라도 언제나 앞으로 나서게 되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내가 입국 이후 몇 주가 흐른 뒤에 하루는 우리집을 나서 친구를 방문하고자 가는 길에, 두 패로 나뉜 것으로 보이는 아주 소란스럽고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무리가 있는 곳을 지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친구에게 이런 상황을 말하고 무슨 일인지를 물었더니, 그것은 내가 목격했던 석전의 전초전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신랑은 나 혼자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안전하지 못할 거라고 하면서, 아주 고맙게도 끝까지 바래다 주겠노라고 제안했다.

우리는 이내 돌과 던지는 무기가 우리 쪽으로 날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어느 조선인의 집에 대피하고자 뛰어가야만 했다. 하지만 요리조리 피하기와 되돌아 가기를 반복하고 종종 담벼락 뒤로 우리들 몸을 숨기기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길모어 씨(Mr. Gilmore)의 집에 당도하였는데, 그때 뭔가 어수선하고 동요된 상태였으므로 나는 분명하게 평정이 이뤄지기를 기다렸고 그리하여 현명하고 사려 깊은 여인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이 같은 종류의 일이 벌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번은 우리들 중 성질이 급한 한 젊은 동포가 이 석전의 모습을 사진 찍으러 나갔다가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어느 냉정한 미국인 한 사람이 최근에 호랑이를 사냥하기 직전에 그 자리에서 카메라로 호랑이의 모습을 먼저 담았는데, 그것에 그가 경쟁심을 느꼈던 것인지 우리들의 젊은 친구가 그 같은 시도를 했던 것이었다. 그는 곧 모든 던지는 무기들이 조준하는 대상물이 자기이며, 이들 피에 굶주린 악당들이 완전히 자기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불운하기도 하고 불법적인 것이지만 6연발 권총으로 무장한 상태였기에, 지나치게 흥분하고 불안했던 그는 군중을 향해 총을 발사하고는 도망을 쳤다. 그가 쏜 총탄은 원주민 가운데 한 사람의 다리살을 파고 들어갔고, 그가 쓰러지자 다들 그가 치명상을 입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정말로 양쪽 무리 모두의 분노가 가장 격렬한 형태로 완전히 얼어붙은 젊은 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달아났고, 군중들은 분노의 외침과 더불어 그를 추격했다.

카메라와 외투는 내팽개쳐지게 되었고, 그는 미국공사관의 대피소에 도달하기 위해 거의 1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달렸는데, 간신히 이곳에 도착하니 헐떡거리고 탈진한 상태가 되었다. 그의 총을 맞은 피해자는 그다지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는데, 그는 벌금을 물고 몇 주 간의 투옥, 가장 엄한 견책, 그리고 이 나라를 떠나라는 완곡한 요청을 수용하는 것으로 이 사태를 모면하였다.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3], 상투의 나라 중
구한말 외국인이 기록한 석전을 보면 수십, 수백의 장정들이 서로 짱돌을 던지고 곳곳에서 부상자가 속출하며 심지어는 승세를 탄 쪽이 상대방 마을로 쳐들어가서 집까지 부술 정도였으니 마치 전쟁 같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듯 하나, 그래도 위의 사례를 보면 '일단은' 놀이 취급이라 총 같은 무기는 반칙이었던 듯 하다.

어찌나 과격한 놀이였던지 실제로 사람 몇 죽어나가는 건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일례로 1903년 2월경, 석전놀이를 구경하던 운산금광의 미국인 직원 클레어 헤스(Clare W. Hess)는 재미삼아 한 편에 끼어서 다른 편으로 돌 하나를 던졌는데, 하필 다른 편 석전꾼의 머리에 적중, 맞은 석전꾼은 머리가 터저서 뇌가 흘러나와 즉사했다. 클레어 헤스는 죽은 석전꾼의 가족들에게 보복을 당할까봐 두려움에 떨었지만 백성들 생각으로는 원래 석전놀이는 상대편의 사상자를 발생시키려고 돌을 던지는 것이기 때문에 고작 그거 가지고 문제를 삼은 조선인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석전은 때로 권력자, 예를 들어 평소에 횡포를 부리던 지주나 수탈의 앞잡이 역할을 하던 아전 등의 집으로 우르르 몰려가 돌을 던지는 식으로 항의하는 민심의 표출구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 놀이와는 별개로 프로 스포츠 성격의 석전이 또 따로 있었다. 즉 전용 코트를 정해놓고 그 영역 안에서 정해진 인원끼리 투석전을 벌였는데 민첩 원딜인 투석꾼과 별개로 몽둥이를 쓰는 근딜과 방패를 쓰는 탱커가 있으며, 지휘하에 일사불란하게 진을 짜고 기동하는 등 전략적인 요소도 있었다. 그리고 고대 로마의 검투경기처럼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지고 사람이 실신하거나 죽어나가는 맛까지 있으니 이렇게도 재미진 경기에 관중이 없을 리가 없다. 단 경기에 참가하는 것은 돌던지기와 돌피하기에 능한 전문 석전꾼이었다.[4] 이 스포츠는 상무적인 요소가 강했던 초창기 조선왕실에서도 인기가 있어서 태종 이방원은 중병에 걸려 앓아 누워 있다가도 석전경기가 열린다 하면 벌떡 일어나서 구경갔고, 태조 또한 석전을 좋아했다. 세종의 경우 처음에는 지원했지만 아무래도 유교를 국시로 삼는 국가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싸움을 즐기는 것이 좋게 보이지 않다 하여 결국 금지했는데, 이런 와중에 양녕대군의 아들들이 몰래 석전을 벌이다가 사람을 죽여서 귀양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제전 성격의 석전경기는 계속 했다.

조선시대에 석전으로 가장 유명했던 고장은 안동, 김해, 평양 세곳으로 개중 안동의 석전꾼들은 기록에 이르기를 맨손으로 짱돌을 던지는 것도 모자라 아예 작정하고 사람 죽이는 데 쓰는 전쟁용 줄팔매, 그러니까 투석구로 돌을 날렸다고 한다. 숙련자가 쓰는 투석구는 조약돌조차 시속 140km의 속도로 발사해 중갑옷을 입은 상대도 한방에 골절시킬 수 있는 흉악한 물건인 만큼 당연히 전투력이 엄청났다. 안동 석전꾼들은 특히 중무장하여 근접전에 능한 왜인들을 잘 때려잡았는데, 삼포왜란 때 제포에 웅거한 왜구가 차일(가리개)과 방패를 설치하고 조선 관군의 화살을 막으면서 버텼으나 안동 현지 주민들을 데려와서 돌팔매질을 시키니 모조리 개박살났다고 한다. #[5] 또한 임진왜란 때는 죽령 방면 방어를 명받은 경상좌방어사 성응길이 긴급소집한 안동 석전꾼들로 안동에 접근하던 일본군 2군 선견대를 격퇴해 사흘 이상의 시간을 벌고 초조해진 가토 기요마사가 길을 바꿔 1군이 통과한 조령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조선 후기의 평양 석전꾼들은 맷집으로 유명했는데, 당장 나무 몽둥이에 방패까지 든 평양 석전꾼들이 터프하게 돌맞으면서 밀고들어오자 서울 석전꾼들이 밀렸다는 내용도 있다. 위장 잠입하여 적 마을에 침투 사보타주를 벌이거나, 상대 마을로 처들어가 집을 부수기도 하고, 부락의 체급별로 다양한 단체전을 벌이기도 하는 등, 군사 작전에 버금갔다.

한성부(서울) 근교에서는 특히 염천교 패와 애고개 패[6]가 만리재 고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 석전놀이 앙숙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기록에 왕왕 석전 부대가 나타나지만, 조총 등 개인화기가 발달하면서 유희 수준으로 내려간다. 그래도 영조 때에도 기록이 보이는 등 꾸준히 나타난다. 조선 전기에는 안동의 석전꾼들이 이름이 높았으나,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평양의 석전꾼이 유명했으며, 돌을 던지면 맞히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평양 장정들은 머리에 돌을 맞은 흉터가 없으면 치욕으로 여겼고, 석전에 패해 집으로 도망오면 어머니가 이를 크게 질책하며 석전장으로 돌려보낼 정도였다고 하니, 그 열기가 대단했고 터프했다 하겠다. 소년들도 사내다움이 있어야 한다며 참여가 권장 되었을 정도. 석전에 승리한 마을은 석전꾼들이 환영을 받으며 마을로 개선했고, 패배한 마을의 석전꾼들은 마을 밖에서 노숙해야 했다고 한다. #

매우 위험한 행위이기에 조선시대 당시에도 여러차례 금지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워낙 뿌리가 깊어 명이 잘 안 먹히다가 20세기에야 일제에 의해 근절되었다. 금지한 명목상의 이유는 치안 안정이지만, 실제로는 달리는 기차에 돌을 던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원태우 지사의 사례처럼 투석을 통한 독립운동을 우려했다는 이유도 있다. 이후로는 주로 총격전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다큐멘터리 ' 깡패 건달로 보는 100년'에 따르면 석전꾼들은 정월 대보름에 강을 사이에 두고 돌싸움으로 한 해의 농사를 여는 풍습인 석전에 전문적으로 동원된 사람들이다. 석전꾼은 범죄자나 거지 등 불량배들이 많았고, 관의 감시를 받았던 이들은 관리들의 동원에 쉽게 응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 반체제적인 독립협회가 집회를 할 때 공권력으로는 해산시킬 수 없었기에 사적인 인력들[7]을 동원하여 해산시켰는데, 이 중에 오강의 석전꾼들이 기록되어 있다. 즉, 석전은 일반적으로 을 사이에 두고 일어났다는 뜻이다.

당연히 현대에 이르러서는 금지다. 했다가는 폭처법은 기본이요 돌멩이를 던지는 것이므로 특수폭행죄도 성립하고, 재수 없으면 소요죄가 적용될 공산이 크며, 사상자라도 나오면 가해자는 폭행치사죄가 적용된다. 대신 현대에는 학교 운동회나 행사 같은 때 돌 대신 콩주머니나 모래주머니를, 사람에게 던지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박을 향해 던지며 노는 '박터트리기 놀이'[8]를 한다.[9]

북한에서 1980년대 말, '민속경기놀이'라는 이름으로 널뛰기나 각종 민속놀이를 인민들에게 권장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석전놀이도 딱 한번 재현되었는데, 사상자가 너무 많이 발생해서 취소시켰다. 대신 군사체육종목으로 미국놈 까부시기라며 미군이 그려진 나무판을 세우고 돌을 던지는 것으로 변형되었다.

3. 해외 유사 사례

석전과 비슷한 행위를 하는 전통들을 세계 각국에서 꽤나 자주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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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일본에서는 석합전(石合戦, いしがっせん)이라는 명칭으로 조선의 석전과 똑같은 풍습이 존재하였다. 일본의 경우에는 영지민들이 투석을 잘 하면 수성전에서 농성할 때도 유용하므로 다이묘들이 권장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조선과 똑같았다. 아니, 오히려 전근대 일본은 더욱더 마을 간에도 배타적인 데다가 전쟁이 나면 제일 큰 피해를 입는 것이 농민들이었으므로 낙오무사 사냥이라고 해서 패잔병 사무라이를 기습해 죽이고 무기와 갑주를 약탈할 정도로 농민들도 독이 잔뜩 올라 있었으니 조선보다 수위가 낮았을 턱이 없다.[10]

중국에서 존재한 계투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마을간 패싸움으로 돌팔매에서 그치는게 아니라 본격적인 장병기를 들고 싸울 정도였다. 역시나 중앙권력이 잘 닿지 않는 외변에서는 이민족의 맹습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 할 수 있다고 묵인해줬었다. #

또한 이탈리아 북부 이브레아에서 개최되는 ' 오렌지 전투 축제'에서는 이름대로 오렌지를 던진다. 19세기 평민 출신의 비올레타라는 여성이 결혼식을 치른 뒤 초야권을 요구하던 영주의 성에 불려가게 되는데, 영주를 마주한 순간 그녀는 숨겨 가지고 있던 단도로 영주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그녀의 행동에 자극을 받은 민중들이 폭정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고, 이때 변변찮은 무기가 없어 영주의 사병을 향해 오렌지를 던진 것이 오렌지 전투 축제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주로 시칠리아산 오렌지를 사용하는데, 축제에서 던지는 오렌지는 상하거나 상품가치가 떨어진 것만을 사용하며 사전에 손으로 주무르거나 해서 최대한 물렁물렁하게 만들어 부상을 방지하는 조치를 취한다. 또한 집중사격받는 영주의 사병 역할을 맡은 인원들은 높은 탑을 형상화한 축제 차량 위에 올라가고 투구도 쓴다.

4. 대중매체

  • 사극 대왕 세종에서 프로 석전경기를 재현해 놓은 것을 볼 수있다. 이숙번의 측근인 구종수가 세자 시절의 양녕대군을 꼬드겨 같이 석전경기를 보러 가는데 나중에는 양녕대군이 직접 경기를 뛰어보기도 하고, 가장 솜씨 좋은 석전꾼들만 뽑아서 특수부대(전위군)를 만드는 등 양녕대군과 관련해서 석전이 상당한 비중으로 등장한다. 중추부사 곽선의 첩이었던 어리도 석전경기장에서 처음으로 만난다.
  • 드라마 별순검 시즌 1에서도 석전과 관련된 사건이 등장한 적 있다. 남촌과 북촌에서 연례 석전을 벌이던 중 북촌 최고의 석전꾼이 죽게 되는데, 사실은 범인이 석전 시합 전에 마시는 국에 비상을 타서 그를 독살하고는 시합 중 돌에 맞아 죽은 것으로 위장하려 했던 것.
  • 사극 고려 거란 전쟁 7회에서 통주 전투 때 고려군이 검차 뒤에서 거란의 기병들에게 돌팔매를 날려 공격한다. 작중에서 물풀매라고 부른다.
  • 사극 임꺽정에서 청석골의 7 두령 중 1명이 돌팔매질의 명수다. 이를 알기 쉽도록 해당 두령의 이름도 배돌석(...). 군졸 시절 이봉학과 겨룬 적이 있는데, 신궁인 그와 무려 무승부로 끝났으며, 그 솜씨로 호랑이도 때려잡았을 지경으로 대단한 실력자.
  • 검정 고무신의 단역인 만득이가 돌싸움하다 앞니를 맞아 새까매졌다는 언급이 나온다. 금지된지 제법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시골 동네의 놀이 정도로 표현된다.[11]
  • 대체역사물들에서는 둘 중 하나인데 주인공이 석전을 대체할 스포츠들을 도입해 서서히 사라지거나 군사 자원을 기를 기회로 보고 장려하거나다. 물론 장려하는 측도 규칙을 상세화하여 사상자가 나오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는 묘사가 있다.

5. 여담

  •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1912년 3월 25일 조선총독부 관보를 통해 이 석전을 금지시켰다. 하다가 적발되면 구류 또는 벌금을 처했다. 이는 무기 소지를 금지한 것과 같이 일제에게 무력으로 항쟁하는 걸 막기 위한 조치였다. 실제로도 석전을 항의도구로 사용한 사례가 있기도 하고.
  • 다음 링크는 석전의 역사에 관한 만화이다. 만화에서 보듯이 짚으로 짠 모자 같은 것도 썼던 모양. 1부, 2부, 3부, 번외

6. 관련 인물

  • 김풍 - 어릴 적 봉천동 동네 친구들이 돌팔매질을 하는 장면을 보며 자라왔다고 밝힌 바 있다.


[1] 이 시기의 석전은 이후 조선시대에 유행했던 것과 기록상 다소 차이를 보이기에 풍년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성격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하고, 조선에서 명절이나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도 석전을 행한 것으로 보아 무언가 특별한 의미를 담아 했을 것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이 또한 추측이며 확실한 근거가 밝혀진 것은 아니다. [2] 지금의 대동강으로 추정 [3]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부인이다. [4] 프로 리그에서 아마추어 팀이 살아남기도 힘들었겠지만, 실력이 낮은 아마추어가 참가했다가 돌을 관중 쪽으로 잘못 던지기라도 하면 큰일이 난다. [5] 이때 왜구의 돌격을 막기 위해 녹각목을 들고 전진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대략 40에서 50 미터가량의 거리가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 가능하다. 또 왜구가 차일과 방패를 설치했다는 것에서 어설프게 만든 차일과 제대로 된 방패의 구분도 가능하다. [6] 각각 현재의 서울역 북부 염천교와 애오개 역이 있는 마포구 아현동을 말한다. 아현이라는 한자 자체가 애오개(애고개)의 한자 음차이다. [7] 풍운한말비사 기록에는 팔도의 역사, 보부상과 함께 오강의 석전꾼이 나타난다. [8] 콩주머니 던지기라고 부르는 곳도 있다. [9] 이 박터뜨리기를 포함한 운동회는 영미권의 Field Day 형식을 일본에서 수입하여 만들어진 문화다. [10] 무려 투석기를 동원하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다. [11] 1980년대 이전의 오지에 있는 시골 등지에서도 석전 비스무리한 돌싸움 놀이가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