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57:32

상대성 이론/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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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 이론
Theory of Relativ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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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명칭의 역사3. 상대성 이론과 상대론적 역학4. 배경
4.1. 광학과 에테르 문제4.2. 피조의 실험(1851)4.3. 마이컬슨-몰리 실험(1887)4.4. 전기동역학과 에테르 문제
5. 특수 상대성 이론
5.1. 새로운 운동학(1905)
5.1.1. 구조5.1.2. 특징 및 발전 과정
5.2. 발전5.3. 실험적 검증
6. 일반 상대성 이론
6.1. 탄생기(1907 - 1915)
6.1.1. 등가 원리(1907)6.1.2. 빛의 굴절(1911)6.1.3. 경쟁 이론들(1911-1913)6.1.4. 정적 중력장 이론(1912)6.1.5. Entwurf 이론(1913 - 1915)6.1.6. 중력장 방정식(1915)6.1.7. 힐베르트 액션(1915)
6.2. 형성기(1916 - 1925)6.3. 과도기(1925~1950s)6.4. 황금기(1955~)
7. 여담

1. 개요

상대성 이론의 발단부터 발전 과정을 다루는 문서이다. 상대성 이론은 매우 빠른(빛의 속력에 가까운) 속도에서 일어나는 뉴턴 역학의 문제를 해결했으며, 공간, 시간, 질량, 에너지, 중력 등의 기본적인 물리학의 대상들이 특수한 상황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이러한 성과는, 19세기 이후 빛을 다루는 학문인 광학과 이를 전기장·자기장의 전파로 설명하는 전자기학의 발달로 빛에 대한 이해가 성숙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뉴턴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성숙된 토양 위에 나타난 다양한 성과들을 하나의 역학 이론으로 체계화하여, 물리학이 새로운 기반 위에서 발전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모든 역사적인 이론들이 그렇듯이 아인슈타인이 모든 것을 다 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분야의 학자들이 이 분야를 연구하고 발전시켰다.

2. 명칭의 역사

처음에 상대성 이론은 아인슈타인이 헨드릭 A. 로런츠의 에테르 이론( 로런츠 변환)을 상대성 원리에 기초하여 재구성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기에 로런츠-아인슈타인의 이론(Lorentz-Einstein theory)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었다. 막스 플랑크는 1906년 9월 전자에 관한 공개토론회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Prinzip der Relativität 또는 Relativitätsprinzip)를 강조하면서 상대적 이론(Relativtheorie)이라는 용어를 제안했다. 같은 행사에 참석한 알프레드 부쉐러(Alfred Bucherer)가 이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Einsteinsche Relativitätstheorie)으로 바꾸어 부른 것이 상대성 이론이라는 명칭의 시초라 알려져 있다.[Planck(1906b)] 막스 플랑크는 이미 1906년 3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주목하고("상대성 원리"를 이론의 이름처럼 사용하였다.) 그 운동 방정식의 해밀턴 함수를 유도해낸 바 있다.[Planck(1906a)]

아인슈타인은 처음에 자신의 이론에 대하여 "상대성 원리"란 표현을 주로 사용하였다. 1907년 파울 에런페스트(Paul Ehrenfest)와의 교류 논문에서 처음으로 "상대성 이론"을 사용하였는데[Einstein(1907)], 이는 에런페스트가 사용한 용어를 단순히 받아준 것으로 이후에도 한동안 "상대성 원리"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후 그는 1910년 "이 원리들을 바탕으로 한 이론을 우리는 '상대성 이론'이라고 부를 것이다"라고 보다 직접적으로 용어를 수용하였다.[Einstein(1910)]

한편 독일 수학자 펠릭스 클라인(Felix Klein)은 1910년 "불변 이론"(Invariantentheorie)이란 이름을 제안하였으나, 물리학계에서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5] 이후 아인슈타인은 1921년 9월 에버하르트 지치머(Eberhand Zschimmer)가 소개해준(제안한) "불변 이론"(Invarianz-Theorie)이라는 명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을 밝혔다.
Nun zum Namen Relativitäts-Theorie. Ich gebe zu, dass dieser nicht glücklich ist und zu philosophischen Missverständnissen Anlass gegeben hat. Der Name Invarianz-Theorie würde die Forschungsmethode der Theorie bezeichnen, leider aber nicht den materiellen Inhalt der Theorie (Konstanz der Lichtgeschwindigkeit, Wesensgleichheit von Trägheit und Schwere). Trotzdem wäre die von Ihnen vorgeschlagene Bezeichnung vielleicht besser, ich glaube aber, dass es Verwirrung anrichten würde, den allgemein akzeptierten Namen nachträglich zu verändern.
이제 "상대성 이론"이란 이름에 대하여. 저도 그것이 만족스럽지 않고 그간 철학적 오해를 일으켰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불변 이론"이라는 이름은 이론의 연구 방법을 설명하지만, 아쉽게도 이론의 내용을 설명하지는 못합니다(광속의 불변성, 관성과 중력의 동등성). 그럼에도 당신이 제시해준 용어가 더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이름을 나중에 바꾸는 건 혼란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로부터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이란 용어가 주는 혼란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나, 이미 대중화된 명칭을 굳이 바꿀 필요성이나 타당한 명분 또한 있다고 보지는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불변 이론"에 대한 태도 역시 분명하지는 않다.
  •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중력 이론(일반 상대성 이론)이 상대성 원리를 일반화한다는 의미에서 1913년 처음으로 기존의 상대성 이론(특수 상대성 이론)에 대비되는 명칭으로 "일반화된 상대성 이론"(Verallgemeinerten Relativitätstheorie)[Einstein(1913)]이란 용어를 도입하였다. 이후 이론이 완성될 시점인 1915년부터는 기존의 상대성 이론을 "특수 상대성 이론"(spezielle Relativitätstheorie), 중력 이론을 "일반 상대성 이론"(allgemeinen Relativitätstheorie)으로 부르게 된다.[Einstein(1915)] 이 때 "특수"는 관성계에 한정된, "일반"은 모든 좌표계에 적용되는 이론이란 뜻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이후에도 [math(E=mc^2)]이란 식을 설명하면서 "특수 상대성 이론(the special theory of relativity)"이란 말을 적극 사용하였다. #

"일반" 상대성 이론 또한 "상대성" 이론 못지 않게 이름이 주는 혼란이 심하다. "일반 상대성"은 모든 좌표계에서 물리법칙의 표현이 동일하다(일반 공변성, general covariance)는 취지로 해석할 수 있으나 일반 공변성만으로는 일반 상대성 이론을 특징지을 수 없다. 공변성은 일반 상대성 이론만의 특징이 아니며 모든 물리 이론은 공변성을 만족하도록 재구성할 수 있다. 1917년 독일 물리학자 에리히 크레슈만(Erich Kretschmann, 1887~1973)이 아인슈타인의 용어선정을 비판한 것으로 유명하고,[Kretschmann(1917)] 이후 프랑스 수학자 엘리 카르탕(Élie Cartan, 1869~1951)은 뉴턴 역학을 미분기하학으로 재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것을 뉴턴-카르탕 이론(Newton-Cartan theory)이라 한다.[Cartan(1923)] 다만 맥락을 감안하자면 공변성은 아인슈타인이 일반 상대성 이론 및 미분 기하학을 통해 처음으로 개척하기 전까지는 구체화된 적이 없는 개념이었고 사후적으로 그것이 물리적인 의미가 없다는 게 밝혀진 것이다. "뉴턴의 중력 이론"에 대응시켜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이라는 이름도 간간히 사용되며 큰 문제는 없지만 대중적인 이름은 아니다.

3. 상대성 이론과 상대론적 역학

의미 전달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잠깐 여기에서는 오늘날 잘 알려진 아인슈타인의 시간과 공간에 관한 이론을 상대성 이론(Theory of Relativity)이라 하고, 상대성 이론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물리학 분야를 상대론적 역학(Relativistic Mechanics)이라 하자. (외국에서는 그냥 "Relativity"라고 하는데, 상대"론"은 다소 아쉬운 번역이다.) 일반적으로 둘은 동의어이지만 이런 구분이 좋은 이유는, 상대성 이론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이론이 아니며, 아인슈타인 이후로도 이 분야에 대한 어마어마한 기여와 대상 분야의 확장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미 현대 물리학과 상대성 이론은 분리해서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깊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계속 이론이라 불리는 것도 애매한데, 양자론과 양자역학, 그리고 진화론과 진화생물학의 관계와도 비슷한 맥락이다.

모든 상대론적 역학의 바탕이라 할 수 있는 특수 상대성 이론은 19세기 내내 축적되었던 광학과 전기동역학, 특히 전기동역학의 성과에 대한 궁극적 수확이라고 할 수 있으며, 1890년대에 등장한 로런츠의 전기동역학 이후로 이에 영향을 받은 수학적으로, 일부는 개념적으로도 비슷한 이론(푸앵카레, 라머, 비헤르트, 콘, 아인슈타인 등)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였다. 이들은 모두 상대론적 역학으로 분류할 만하다. 그 중 아인슈타인은 새로운 운동학을 구축한다는 굉장히 독특한 해법을 제시하였고 상대론적 역학의 표준이 되었기에 이러한 주장을 상대성 이론이라 부르고 일반적으로 아인슈타인을 상대성 이론의 창시자라 부른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상대론적 역학의 하위 항목, 즉 "상대론적 중력 이론"(Relativistic theory of gravitation)에 속하지만, 특수 상대성 이론의 역사와는 어느 정도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이론에 이어서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전시켰고 이름도 비슷해서 "아인슈타인의 (두) 상대성 이론"으로 묶여서 불리지만, 일반 상대성 이론이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 외에는 상당히 독립적인 분야이고, 역사적 배경 또한 특수 상대성 이론의 대두(+리만 기하학)라는 것 이외에는 크게 고려할 부분이 많지 않다. 또한, 다른 가능성이 거의 없는 특수 상대성 이론과는 달리 일반 상대성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개인적인 (미적) 판단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까지 결정적인 문제가 없는 시대 초월적인 이론이며 상대론적 중력 이론의 실질적 바탕을 이룸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대안 이론들이 연구되고 있다.

4. 배경

개요적인 설명은 상대성 이론의 역사 탭을 참고할 것.

4.1. 광학과 에테르 문제

(에테르 이론의 발전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Janssen, Stachel (2004), "The Optics and Electrodynamics of Moving Bodies", Max Planck Institute for the History of Science 참조.)

19세기 초 빛이 파동이라는 이론이 정설이 되면서 동시에 가상의 매질, 혹은 "광학적 에테르"(luminiferous ether)의 성질에 대한 여러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는 19세기 전체에 걸쳐 물리학계의 매우 중요한 토픽이었다. 에테르는 광학의 문제이면서, 한편으로는 19세기 중반 이후 도입된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에 의하면 빛이 전자기파와 동일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전자기학의 문제이기도 했다. 에테르의 본성에 관한 연구는 그간 발견된 여러 중요한 광학적 현상들에 의존하며, 그들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1720년대에 제임스 브래들리(James Bradley, 1692–1762)는 별의 연주시차를 구하기 위한 과정에서 광행차(stellar aberration) 현상을 발견하였다. 별의 연주 시차는 지구의 공전 반지름 및 별까지의 거리로 결정되며, 지동설의 대표적인 증거가 되지만 크기가 너무 작아 1830년대 이후에야 검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브래들리는 그보다 100년도 더 이전에, 별의 겉보기 위치의 변동을 보여주는 다른 종류의 현상을 발견한 것이다. 광행차 현상은 1년 동안 지구의 위치(연주시차)가 아니라, 지구의 속도에 의존한다. 비 내리는 날 비가 관측자에게 떨어지는 겉보기 방향은 관측자가 걷는 방향에 의존하듯이, 별빛이 지구에 떨어지는 겉보기 방향 역시 지구가 공전하는 방향에 의해 결정되며 지구의 공전 속도와 빛의 속력의 비율 [math(v/c)]에 비례한다. 이러한 광행차 현상은 별의 연주시차에 앞서 지구의 공전을 증명하는 첫번째 관측적 증거로써 작용했으며, 빛의 속력을 측정하는 데에도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19세기 초 빛의 간섭 현상을 발견한 영국의 영(Thomas Young, 1773-1829)과 프랑스의 프레넬(Augustin Jean Fresnel, 1788–1827)에 의해 빛의 파동 이론이 대두되면서, 광행차 현상은 다른 의미로 중요해졌다. 파동 이론 안에서 광행차 현상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지구가 지나가는 경로 상에서 빛의 매질인 에테르가 완전히 고정되어 있어야만 했다. 광행차 현상은 이처럼, 에테르의 성질에 관한 최초의 관측적 증거를 제공하였고, 그에 대응하여 가장 원시적인 에테르 모형이 탄생하였다.

한편 에테르가 고정되어 있다면, 그에 대해 계속 움직이는 지표면에서 보았을 때에는 빛의 진행 방향이나 속력이 달라지게 된다. 예를 들어, 광원에서 빛이 방출되면 이 빛은 에테르에 실려가는 파동이므로, 에테르에 대하여 고정된 속력 [math(c)]를 갖게 된다. 그러나 에테르에 대하여 속력 [math(v)]로 움직이는 관찰자가 보았을 때 빛의 속력은 갈릴레이의 속도 덧셈 규칙에 따라 [math(c)]가 아닌 [math(c \pm v)]가 된다. 이러한 효과를 에테르 바람(ether wind)이라고 한다. 과학자들은 에테르 바람을 측정함으로써, 즉 에테르에 대한 지구의 상대적 움직임을 포착하여 에테르를 직접적으로 검출하지 않고도 간접적으로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때 에테르의 운동 상태는 절대 공간(정지 좌표계 또는 정지계)의 운동 상태에 대응된다고 말할 수 있다. 광행차와 같이 지구에서 관측되는 특이적 광학 현상들은 지구가 에테르에 대하여 운동하는 좌표계(운동계)에 속해 있기 때문이 된다. 그렇다면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주장했던 상대성 원리(Principle of Relativity), 즉 절대 속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발견은 고전 역학에 국한되며 물리학의 근본적인 원리는 아니게 되는 것이다.

에테르 바람을 측정하고자 했던 가장 초창기의 시도로, 아라고(François Arago, 1786–1853)는 프리즘에 의한 빛의 굴절률이 프리즘의 (에테르에 대한) 속력에 의존하는지를 결정하고자 했다. 파동의 굴절에 관한 스넬의 법칙(snell's law)이 파동의 전파 속력에 의존하므로, 매질의 속력 역시 그에 관여할 것이란 생각이었다. 1810년 아라고는 1년에 걸쳐 동일한 별빛에 대한 프리즘의 움직임(=지구의 움직임)의 영향을 조사했다.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1년 내내, 스넬의 법칙은 동일하게 성립했으며 에테르에 대한 지구의 움직임은 확인할 수 없었다.

이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1818년 프레넬은 에테르가 완전히 고정된 게 아니라 에테르가 부분적으로 이끌린다는 가설(Ether dragging effect)을 추가로 도입하였다. 아라고의 실험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빛이 에테르 속을 진행하는 동안 그 방향을 따라, 그 속력에 비례하여 에테르가 이끌려야 했다. 그 비례 계수를 프레넬 계수(Fresnel coefficient)라 한다. 단, 진공에서 광행차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에테르 끌림이 매질의 특성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매질의 굴절률을 [math(n)]이라 하면, 매질의 운동(속력 [math(v)])에 의해 에테르가 이끌리는 속도 [math(f\cdot v)]는
[math(\displaystyle f = 1 - \frac{1}{n^2})]
를 만족시킨다. 진공에서는 [math(n=1)]이므로 에테르 끌림은 나타나지 않는다. 프레넬 계수는, 아라고의 실험처럼 소위 [math(v/c)]에 대하여 1차(first order)항 수준의 에테르 바람을 검출하기 위한 실험들이 실패한 이유를 고정된 에테르 가설 내에서 잘 설명하였다.

한편 에테르의 끌림이 매질의 종류에 의존하지 않고 일괄적으로 물질에 끌려진다, 즉 지구가 지나가는 동안 에테르가 지구에 밀려서 "함께" 움직이게 된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math(f \equiv 1)]) 이러면 에테르 바람은 1차항은 물론이고 2차항 이상 수준에서도 검출할 수 없게 된다. 스토크스(George Gabriel Stokes, 1819~1903)는 1845년 이러한 요지의 에테르 모형을 제시하였는데, 광행차 현상은 이 이론을 강하게 부정하였기에 스토크스의 이론은 광행차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다. 하지만, 훗날 로런츠는 스토크스의 이론이 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부족하다고 논증하였다.

4.2. 피조의 실험(1851)

1851년 프랑스의 과학자 이폴리트 피조(Hippolyte Fizeau, 1819–1896)는 에테르가 물질에 의해 얼마나 끌리는지에 관한 프레넬과 스토크스의 이론을 비교하기 위해, 흐르는 물에 의해 빛의 속력이 변하는 정도(빛의 상대 속력)를 검출하는 실험을 수행하였다.
파일:Fizeau.png
피조의 실험
피조는 간섭계 장치를 활용해, 광선을 둘로 나누어 두 광선이 거울에 의해 반사되면서 서로 반대방향으로 동일한 경로를 통과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경로 중 두 변에는 물이 [math(v)]의 속력으로 일정하게 흐르도록 하였는데, 그림의 경우 광선 1(빨간색)은 물의 흐름을 반대로 받아 속력이 느려질 것이고, 광선 2(파란색)는 물의 흐름이 더해져 속력이 빨라질 것이다. 이 때 두 광선은 닫힌 회로를 따르기 때문에, 지구의 속도에 의한 영향은 무시할 수 있다. 따라서 지구가 에테르에 대하여 정지해 있다고 가정하면, 광선 1의 속력은 [math(\displaystyle \frac{c}{n} -fv)], 광선 2의 속력은 [math(\displaystyle \frac{c}{n} + fv)]가 된다. 따라서, 두 광선의 소요 시간 차이 [math(\Delta t)]는
[math(\displaystyle \Delta t = \frac{2l}{\displaystyle \frac{c}{n} - fv} - \frac{2l}{\displaystyle \frac{c}{n} + fv} \approx \frac{4nl}{c}\frac{v}{c}nf)]
가 된다. 여기에서 끌림 값 [math(f)]는 스토크스의 경우 완전한 끌림, 즉 [math(f = 1)]을 제시하였고 프레넬의 경우 [math(f = 1 - n^{-2} = 0.43)] (물에서 [math(n = 1.33)])을 제시하였다. 피조의 실험은 프레넬의 이론값을 [math(15\%)]의 오차로 검출함으로써, 프레넬의 이론이 보다 정확하다는 것을 보였다.

4.3. 마이컬슨-몰리 실험(1887)

피조의 실험으로 에테르에 관한 프레넬의 이론이 스토크스의 이론보다 정확하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며, 따라서 에테르 바람은 2차항 수준 이상을 검출할 수 있는 실험이라면 성공적으로 포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분위기에 찬물을 얹은 것이 마이컬슨-몰리 실험이다. 마이컬슨(Albert Abraham Michelson, 1852–1931)은 마이컬슨 간섭계라 불리는 장치를 개발하여 [math(v^2/c^2)], 즉 2차(second-order) 수준의 에테르 바람을 잡아내기 위한 실험을 계획하였다.
파일:Michelson-Morley.png
마이컬슨 간섭계의 도식

마이컬슨 간섭계의 원리를 간단하게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광원 [math(S)]에서 방출된 광선은 거울 [math(M)]에서 나뉘어, 광선 1(빨간색)은 거울 [math(M_1)]에서 반사되어 [math(M)]을 거쳐 검출기 [math(D)]로 들어가며, 광선 2(파란색)는 거울 [math(M_2)]에서 반사되어 [math(M)]을 거쳐 검출기 [math(D)]로 들어간다. 에테르가 간섭계에서 대하여 위와 같이 [math(v)]의 속력으로 움직인다면, (빛은 에테르에 대하여 상수 [math(c)]의 속력을 갖는다.) 광선 1이 [math(MM_1)]을 왕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다음과 같다.
[math(\displaystyle \frac{l}{c+v} + \frac{l}{c-v} = \frac{2lc}{c^2-v^2} \approx \frac{2l}{c}\left(1 + \frac{v^2}{c^2}\right))]

그리고, 광선 2가 [math(MM_2)]를 왕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다음과 같다.
[math(\displaystyle \frac{2l}{\sqrt{c^2-v^2}} \approx \frac{2l}{c}\left(1 + \frac{1}{2}\frac{v^2}{c^2}\right))]

이로부터, 에테르 바람의 효과를 2차항 수준으로 검출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매우 작은 값이지만, 마이컬슨은 빛의 도달속도 차이가 간섭무늬로 나타나 이것을 정밀하게 탐지할 수 있도록 장치를 설계하였다. 또한, 충분한 차이를 검출하려면 지구의 운동 방향이 반대가 되는 6개월의 간격을 두고 실험을 진행해야 했다.

다소 정확도가 떨어졌던 1881년의 1차 실험 이후, 마이컬슨은 보다 신중한 접근을 위해 몰리(Edward Williams Morley, 1838–1923)와 협력하였다. 그들은 먼저 1886년 향상된 정확도의 피조 실험을 반복하여 프레넬의 이론이 옳음을 재확인하였다. 즉, 에테르는 물질의 운동에 의한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후 마이컬슨과 몰리는 두 번째 단계로 1887년 간섭계를 개선하고 정밀도를 높여 2차 실험을 진행했다. 마이컬슨과 몰리는 전년도의 결과를 바탕으로 자연스럽게도 에테르 바람을 검출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충격적이게도 유의미한 간섭무늬가 관찰되지 않았다. 즉, 에테르 바람은 검출되지 않았다. 이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스토크스의 이론처럼) 에테르가 물질에 완전히 이끌린다고 가정하는 것이었다. 피조의 실험과 마이컬슨-몰리 실험은 에테르의 운동에 관한 전혀 다른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4.4. 전기동역학과 에테르 문제

한편, 1860년대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이 전기장과 자기장의 상호작용으로 전자기파가 발생하며, 이것이 곧 빛이라는 이론을 제시하고 이후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Hertz, 1857~1894)에 의해 1887년(마이컬슨-몰리 실험과 같은 해)에 전자기파를 발생시키는 데에 성공하면서 광학은 전자기학의 일부로서 여겨지게 되었다. 이 중, 움직이는 물체의 광학 문제는 곧 움직이는 물체의 전자기 현상을 설명하는 전기동역학(Electrodynamics) 문제에 대응되었다.

전기동역학이 처음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유도 현상(induction)으로, 아라고와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에 의해 처음 연구되기 시작하였고 이에 대해 거시적 관점의 현상학적 이론(Neumann, 1798~1895), 즉 유도 현상을 여러 관측적 현상으로 이루어진 원리 중 하나로 포함하려는 이론과 미시적 관점의 이론(Weber, 1804~1891), 즉 전하들의 전기력, 자기력에 의한 미시적인 상호작용의 결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등장하였다. 이렇게 현상학적(기술적) 접근 및 미시적(해명적) 접근으로 나뉘는 것은 패러데이 및 맥스웰에 의해 전자기학이 정립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맥스웰이 전기동역학까지 완성하지는 않았다.) 전기동역학에 의한 광학을 연구하기 위해 올리버 헤비사이드(Oliver Heaviside, 1850~1925)와 헤르츠는 거시적, 현상학적 접근을 시도하였고, 헨드릭 안톤 로런츠(Hendrik Antoon Lorentz, 1853–1928)와 앙리 푸앵카레(Henri Poincaré, 1854~1912)는 미시적, 해명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전기동역학을 다루기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에테르와 물질 사이의 상대적인 운동을 구체적으로 해명해야 한다. 헤비사이드와 헤르츠는 물질 내에서 에테르의 운동상태가 물질과 동일하다고 가정했다. (물질 바깥에서의 에테르의 운동에 대한 이들의 입장은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이들의 가정에 따르면 모든 운동계에서 (물질 내) 전자기 방정식 및 그 현상은 동일한 양상을 띤다. 이는 지구의 운동이 어째서 지면 위에서 이루어진 전자기적 현상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지를 잘 설명한다. 하지만 헤비사이드와 헤르츠의 이론은 몇몇 움직이는 물체의 광학 현상을 적절히 설명할 수 없었는데, 바로 피조의 실험이 매질 내 에테르가 부분적으로'만' 끌린다는 가설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다만, 이들은 모든 광학 현상을 포섭하기 위해 에테르의 움직임을 더 자세히 기술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여겼다. 이후 마이컬슨-몰리 실험의 결과가 발표되면서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이는 매질 내 에테르가 완전히 이끌려야 보다 적절히 설명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로런츠의 전자론
파일:H_A_Lorentz_(Nobel).jpg
헨드릭 A. 로런츠
상대론의 전신에 해당하는
전자론을 발표했다.
한편, 로런츠가 1890년대에 정립한 대표적인 미시적 전기동역학 이론, 일명 전자론(electron theory)은 전기동역학의 새로운 이론적 프레임을 통해 광학 현상들까지 설명한다는 대담한 도약을 시도하였다. 로런츠는 헤비사이드나 헤르츠의 이론과 달리 물질과 에테르를 엄격히 분리하여 "완전히 고정된" 에테르 가설을 도입하였다. 여기에서 에테르는 각각의 부분이 서로에 대해 움직이지 않는 강체의 성질을 가진다. 또한 둘은 오로지 전자기적 과정으로만 상호작용하는데, 우선 물질에 많이 존재하는 전자가 에테르에 전기장과 자기장을 형성하면, 거꾸로 전자들은 전기장과 자기장에 의해 로런츠 힘을 받는 방식으로 에테르의 영향을 받게 된다.

로런츠 이론의 핵심은 에테르를 고정시킨 상태에서 에테르 바람 실험들이 실패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전기동역학적 프레임 및 여러 추가 가설을 통해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로런츠 이론은 에테르가 물질에 이끌린다는 방식의 설명을 모두 물질 간의 상호작용으로 대체하여 물질적 실체로서의 에테르가 무의미해지는 데에 촉매의 역할을 하였다. 로런츠 이론에서 다음 3가지의 중요한 요소를 살펴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로런츠의 견해와 푸앵카레의 견해만이 나란히 제시되는데, 이들은 대표성을 띨 뿐 실제로는 라머, 비헤르트, 콘, 부헤러 등 더 많은 물리학자들이 저마다의 이론을 내놓으면서 로런츠의 이론에 기여하였다.
1. 1차 에테르 바람 실험과 국소 시간
먼저, 로런츠 이론은 전기동역학이 1차 에테르 바람 실험들이 언제나 실패하도록 이루어져 있음을 증명하였다. 예를 들어, [math(v)]의 속력으로 움직이는 기준계에서 바라보았을 때 그 운동 방향으로 진행하는 전자기파의 진행 속력은 원래의 전자기파, 그리고 그것과 물질 속 전자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생성된 전자기파의 합성에 의해 ([math(v/c)]에 대해 근사적으로) [math(\displaystyle \frac{c}{n} - \frac{v}{n^2})]이 되며 따라서 에테르에 대한 전자기파의 진행 속력은 [math(\displaystyle \frac{c}{n} - \frac{v}{n^2} + v = \frac{c}{n} + \left(1 - \frac{1}{n^2}\right)v)]가 되는 것이었다. 프레넬 계수는 1차항 수준의 에테르 바람 실험이 실패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에테르 끌림 가설이었으나, 로런츠 이론은 고정된 에테르 모델에서 프레넬 계수를 설명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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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푸앵카레
로런츠의 이론을 바탕으로
상대론의 많은 요소를 앞서 밝혀냈다.
후속 연구에서 로런츠는 운동계에 다음과 같이 국소 시간(local time)이라는 양을 도입해 프레넬 계수를 보다 간단한 방법으로 유도할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전자기파의 특징은 오로지 위상 [math(t-x/v)]에만 의존하는데, 에테르에 대해 운동하는 매질에서 전자기파의 속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위상에 일반적인 시간(에테르의 "실제" 시간) 대신 국소 시간을 도입하면 된다. 이 식을 원래의 식 꼴로 정리하면 [math(v)] 자리에 프레넬 계수가 도출된다.
[math(\displaystyle t' = t - \frac{v}{c^2}x)] [10]
로런츠는 국소 시간에 특별한 물리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나, 푸앵카레는 1898년 빛의 왕복을 통해 운동계의 각 점에 위치한 시계들을 동기화한다면 이 시계들은 국소 시간을 읽게 됨을 증명하였다. 빛의 속력은 각 좌표계에서 동일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국소 시간을 운동계의 시간"처럼" 받아들인다면, 이 현상은 두 건의 동시성이 좌표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남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국소 시간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푸앵카레는 국소 시간에서 규약적 의미에만 집중하고, 여전히 에테르에 실제 시간을 부여하였다. 로런츠의 국소 시간 개념은 광학적 실험이라는 특정 맥락에서 나타나며, 푸앵카레의 아이디어는 이들 실험에 사용되는 간섭계의 원리에 맞닿아 있다. 말하자면, 국소 시간은 "간섭계 실험을 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받아들인 것이다. 한편 로런츠 이론에 독립적으로 전기동역학을 연구했던 에밀 콘(Emil Cohn, 1854~1944)은 1904년 실제 시간과 국소 시간을 실질적으로 구분할 방법이 없다면서 적어도 전기동역학에서는 동등하게 다룰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콘은 "역학적 시계"라는 개념을 따로 정의하여, 이들은 갈릴레이 변환에 따른 시간을 읽을 수도 있다고 한 발 물러섰다.
2. 2차 에테르 바람 실험과 수축 가설
한편, 동일하게 생각하면 2차항 수준의 에테르 바람은 검출되어야 정상인데 실제 실험들, 즉 1887년의 마이컬슨-몰리 실험, 그리고 1902/1904년의 레일리-브레이스 실험 등은 모두 실패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로런츠는 에테르가 운동하는 물체에 어떤 역학적 영향을 미쳐서, 그 운동방향으로 물체들의 길이가 "실제로" 축소된다(수직 방향의 영향은 없다)는 수축 가설(contraction hypothesis)을 제시하였다. (1889년 피츠제럴드(Fitzgerald)가 같은 가설을 제시하여 로런츠-피츠제럴드 수축이라고 흔히 불린다.) 에테르에 정지해 있을 때 물체의 길이를 [math(l)]이라 하면, 에테르에 대해 [math(v)]의 속력으로 움직이는 물체의 길이 [math(l')]은 다음과 같다.
[math(\displaystyle l' = l\sqrt{1 - \frac{v^2}{c^2}})]
마이컬슨-몰리 실험의 요지는 에테르에 대한 운동 방향으로 빛의 왕복 시간이 늘어난다는 것인데, 그 차이(간섭 무늬)가 검출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빛의 왕복거리가 줄어들어야 했고, 그러면 다음과 같이 두 경로의 소요 시간이 일치된다.
[math(\displaystyle \frac{l'}{c+v} + \frac{l'}{c-v} = \frac{2lc}{c^2 - v^2}\sqrt{1 - \frac{v^2}{c^2}} = \frac{2l}{\sqrt{c^2 - v^2}})]
수축 가설은 2차항 실험의 결과를 설명하기 위한 로런츠의 전기동역학의 특징적인 요소이자, 결점으로 지목되었다. 먼저, 수축 가설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전자 결합력의 변환 방식이 전기장, 자기장의 변환 방식과 동일해야 함이 지적되었는데, 이것이 성립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없었고, 따라서 이 사실을 추가적으로 가정해야 한다는 점에서 Ad Hoc으로 여겨졌다. 푸앵카레는 수축 가설에 큰 불만을 느꼈고, 푸앵카레 변형력(Poincaré Stress)이라는 새로운 힘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 역시 Ad Hoc에 해당한다.
3. 로런츠 변환과 상대성 원리
여기서 전기동역학-광학 문제를 보다 넓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1차, 2차 에테르 바람 실험들이 모두 실패한 것은, 지구와 같은 운동계에서 에테르에 대한 지구의 움직임을 실험적으로 검출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물리학자들은 두 가지의 선택을 할 수 있었다. 하나는, 보다 정교한 2차 에테르 바람 실험이나 3차 이상의 에테르 바람 실험을 통해 에테르 바람의 검출에 궁극적으로 성공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에테르 바람이 검출되지 않는 것이 물리학의 근본적 원리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후자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에테르 바람의 존재는 (에테르에 대한) 정지계와 운동계 사이의 실질적인 차이를 증명하는데, 이것의 검출이 불가능함은 정지계와 운동계를 구분할 실질적 방법이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지계와 운동계는 전기동역학 및 광학적으로 모든 물리법칙이 동일하게 성립해야 한다. 즉, 역학의 상대성 원리가 다시 도입되는 것이다. 푸앵카레가 전기동역학-광학의 상대성 원리를 처음으로 주장한 학자로, "상대성 원리"라는 명칭 역시 사실 1904년 푸앵카레에 의해 처음 도입되었다.

물론, 상대성 원리의 부활은 미적으로 만족스러운 해답이지만 다소 도약이 필요했으며, 로런츠는 상대성 원리를 직접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1차 및 2차 에테르 바람 실험이 실패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특별한 좌표 변환을 고안했다. 먼저, 정지계에서 운동계로의 좌표 변환은 고전 역학에서와 같이 갈릴레이 변환이다.
[math(\begin{aligned} t' &= t \\ x' &= x-vt \\ y'&=y \\ z'&=z \end{aligned})]
여기에 로런츠는 다음의 두번째 변환을 도입하였다.(1899/1904년) 이 변환 공식을 사용하면 정지계와 운동계에서는 동일한 맥스웰 방정식이 성립하며, 따라서 에테르 바람이 실패한 이유를 자연스럽게 설명하게 된다.
[math(\begin{aligned} t^* &= \frac{t'}{\gamma} - \gamma\frac{vx'}{c^2} \\ x^* &= \gamma x' \\ y^*&=y' \\ z^*&=z' \end{aligned})] [math(; \quad \displaystyle \gamma = \frac{1}{\displaystyle \sqrt{1-\frac{v^2}{c^2}}})]
여기에서 시간의 변환식은 바로 국소 시간이 되고, [math(x)] 좌표의 변환식은 수축 가설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렇게 변환을 두 단계로 나누어 제시한 이유는 로런츠는 두번째 변환에 물리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푸앵카레를 비롯하여 여러 물리학자들은 산발적으로 이 변환에 물리적 해석을 부여하는 데 성공하였는데, 명확한 정리는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였다. 푸앵카레는 두 변환을 합쳐서 로런츠 변환(Lorentz transformation)이라 부를 것을 제안하였고, 1905/1906년의 전기동역학 논문에서 상대성 원리를 앞세웠으며 군론을 이용해 로런츠 변환을 완성하고, 이것을 고전역학의 중력에도 확장하여 전파 속력을 광속으로 제한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뒤에 설명할 특수 상대성 이론의 수학적 모델(로런츠 불변성)에 사실상 도달하였다. 하지만, 푸앵카레의 이론은 근본적으로 로런츠 이론에서 발전했기 때문에 여전히 전기동역학에 강하게 묶여 있는 형태였으며 무엇보다 에테르 정지계에 실제 시간을 부여하면서 운동계에서 국소 시간과 실제 시간을 혼용하는 등 고전적 시간 개념을 끝까지 고수하였다.[Darrigol(2005)]

로런츠의 이론은 에테르 바람을 측정하는 실험들이 실패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전기동역학 이론"이었다. 로런츠는 다양한 가설의 도움으로 전기동역학의 방정식들이 에테르의 흐름이 숨겨지도록, 지구의 절대 운동이 관찰되지 않도록 만든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로런츠의 이론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최대 11개에 달하는, 특정 사실들을 설명하기 위해 임시 변통적으로 도입된 Ad Hoc 가설들로 인해 구조적으로 투명하지 않고 매우 불안정했으며, 상대성 원리를 사실상 받아들였음에도 여전히 각각의 운동계에 에테르에 대한 속도 벡터를 도입하고, 수축 가설이 "에테르에 대한 속도"에 의존한다는 점 등이 인식론적인 맥락에서 흠으로 지적되었다. 이 문제는 1905년 베른의 특허청에서 근무하던 한 무명의 젊은 물리학자가 훌륭하게 해결하였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에 관한 이론의 수정이라는, 사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에 의한 것이었다.

5. 특수 상대성 이론

5.1. 새로운 운동학(1905)

파일:Einstein_patentoffice.jpg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새로운 운동학 체계인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다.
구축될 이론은 — 다른 모든 전기동역학처럼 — 강체의 운동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각각의 이론이 하는 주장은 모두 강체(좌표계), 시계 및 전자기 과정 사이의 관계를 다루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충분치 못한 고려는 운동체의 전기동역학이 현 시점에서 고심하는 난관들의 근원이 된다.
Die zu entwickelnde Theorie stützt sich — wie jede andere Elektrodynamik — auf die Kinematik des starren Körpers, da die Aussagen einer jeden Theorie Beziehungen zwischen starren Körpern (Koordinatensystemen), Uhren und elektromagnetischen Prozessen betreffen. Die nicht genügende Berücksichtigung dieses Umstandes ist die Wurzel der Schwierigkeiten, mit denen die Elektrodynamik bewegter Körper gegenwärtig zu kämpfen hat.
당시 26세였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1905년 6월 30일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에 제출한 30쪽짜리 논문 "운동체의 전기동역학에 대하여"(Zur Elektrodynamik bewegter Körper)[Einstein(1905)]는 지금까지 소개한 대체적인 흐름과 굉장히 다른 관점에서 전기동역학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그 요점은 시간과 공간에 관한 이론, 즉 운동학(kinematics)의 기반을 새로 세우면 전기동역학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단 두 가지 가설"을 바탕으로 로런츠 이론이 예측하는 모든 사실들을 그대로 유도하였으며, 이로 인해 로런츠 이론의 불안정했던 기반이 순식간에 단단해졌다. 무엇보다, 이 두 가지 가설은 전기동역학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로런츠 이론에서 나타나는 국소 시간, 수축 가설 등 운동학적 현상들이 물리학 전체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일 수 있었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의 1905년 논문은 갈릴레이의 운동학을 대체하는 새로운 운동학의 탄생이라 할 만하다. 이는 특수 상대성 이론의 형성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한 걸음이었다.

이러한 급진적인 변화가 가능한 데에는,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원리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그간 정지계와 운동계의 구분을 강요했던 에테르 개념을 완전히 제거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테르는 뉴턴의 절대 공간과 마찬가지로 운동에 위계를 부여하는 개념이었으나, 로런츠가 에테르의 동역학을 전기동역학으로 대체한 것에 이어서 아인슈타인은 에테르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물리학에서 상대성 원리와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은 완전히 사라졌다. 또한 에테르의 제거로 정지계와 운동계의 시간(실제 시간과 국소 시간)은 완전히 동등해지면서 고전적 시간 개념은 비로소 본질적인 변화를 맞게 되었으며, 에테르는 수축 가설의 역학적 원인으로 지목되던 것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 또한 순수 운동학적 현상으로 환원되었다.

5.1.1. 구조

아인슈타인의 해당 논문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1) 운동학 편 :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설을 바탕으로 새로운 운동학을 구축한다.
* 상대성 원리 : 뉴턴 역학이 성립하는 좌표계와 그에 대하여 등속 병진 운동하는 좌표계(이하 관성계)에서 모든 물리법칙(특히 전기동역학 및 광학 법칙)은 동일하게 성립한다.
* 광속 불변의 원리 : 관성계에서 임의의 운동 상태를 갖는 광원에서 방출된 빛의 속력은 진공에서 [math(c)]로 동일하다.
아인슈타인은 먼저 사건의 동시성에 대해 논의한 후, 광선의 왕복을 통해 동시성이 상대적임을 논증한다. 다음으로 두 원리를 이용해 관성계 간의 좌표변환이 다음과 같음을 논증하였다.

[math(\begin{aligned} t' &= \gamma\left(t-\frac{v}{c^2}x\right) \\ x' &= \gamma\left(x-vt\right) \\ y'&=y \\ z'&=z \end{aligned} ; \quad \displaystyle \gamma = \frac{1}{\displaystyle \sqrt{1-\frac{v^2}{c^2}}})]
이는 물론 완전한 로런츠 변환이지만 이름을 직접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다음으로 시간 지연 길이 수축과 같은 로런츠 변환의 물리적 의미를 밝혀낸다. 특이적으로 여기에서 쌍둥이 역설이 다뤄진다.[13] 마지막으로 상대론적인 속도 덧셈 공식을 유도하고, 속도의 합성이 언제나 광속보다 작음을 보인다.

[math(\displaystyle U = \frac{\displaystyle v+w}{\displaystyle 1 + \frac{vw}{c^2}})]
2) 전기동역학 편 : 운동학 편의 결과들을 바탕으로 로런츠의 전기동역학을 그대로 유도한다. 먼저 로런츠 변환을 바탕으로 진공 맥스웰 방정식이 불변임을 이용해 전기장과 자기장의 변환식을 유도하고, 기전력과 로런츠 힘의 관계를 논한다. 그 다음으로 상대론적 도플러 효과와 광행차 현상을 다루는데, 여기에서 가로 방향 도플러 효과(TDE)가 처음으로 다뤄진다. 또한 빛의 에너지의 변환, 반사 시 거울에 가해지는 복사압 등 광학 이론을 다룬 뒤, 전하가 있을 때의 맥스웰 방정식의 변환, 마지막으로 느린 전자의 동역학에 대해 다룬다.

5.1.2. 특징 및 발전 과정

  • 발전 과정
아인슈타인이 특수 상대성 이론에 이르는 정확한 과정은 가장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아쉽게도 직접적인 증거가 매우 부족하여 학자 간에 통일된 의견이나 요소가 거의 없다. 여기에서는 주로 1940년대 이후의 아인슈타인이 했던 증언들을 중심으로 구축되었던 가장 정석적인 스토리를 소개하지만, 각각의 요소에 반대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음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또한 감안할 점은, 거시적인 상대성 이론의 역사(혹은 상대론적 역학의 역사)와 아인슈타인의 개인적인 연구 과정은 당연히 불일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적어도 1898년부터 꾸준히 전기동역학 문제를 연구했고 결론적으로 특수 상대성 이론에 다다른 건 직전의 일이며, 그 전까지 아인슈타인은 7년이 되도록 상대성 이론과 거리가 먼 이론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아인슈타인이 줄곧 전기동역학 문제의 핵심이라고 생각한 것은 바로 상대성 원리였다. 그는 1895년 로런츠의 전기동역학 연구로부터 전기동역학 및 광학에서도 [math(v/c)]에 대한 1차항 수준에서는 상대성 원리가 성립한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물론 이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설명은 상대성 원리가 "정확하게" 성립한다는 것이었다. 상대성 원리와 관련하여 아인슈타인이 제시하는 몇가지 사고실험은 전기동역학에서의 상대성 원리 문제를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 빛을 쫓는 문제
    1946년 저서 "Autobiographical Notes"에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16살(1896년)일 때 떠올렸던 한 사고실험을 설명했는데, 이는 특수 상대성 이론이 제기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담고 있다.
    만약 내가 속력 [math(c)](진공에서의 광속)의 빛줄기를 쫓아간다면, 이 빛줄기는 공간 상에서 진동하는, 정지한 전자기장으로 보여야 한다. 하지만 경험이나 맥스웰 방정식을 비추어 보았을 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내게 직관적으로 분명했던 것은 그러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판단했을 때 모든 것이 지구에 정지한 관찰자에 대한 것과 동일한 법칙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첫번째 관찰자가 스스로 빠른 속도로 병진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거나, 판단할 수 있을까? 이 역설에 이미 특수 상대성 이론의 싹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문제는 아인슈타인의 가장 유명한 사고실험 중 하나이며, 그 자체로는 굉장히 단순하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접근해보면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한 가설에 의하면, (후술하겠지만)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견하기 전, 즉 시간과 공간의 이론을 수정하는 선택을 하기에 앞서 상대성 원리를 직관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해 뉴턴의 입자설처럼 빛의 속력이 광원에 의존하는 방출 이론(emission theory)을 심도 있게 연구했는데, 이 사고 실험은 방출 이론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고 여겨진다. 이 문제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다음을 참고. (John D. Norton, "Chasing a Beam of Light: Einstein's Most Famous Thought Experiment" #)
  • 자석과 도체 문제

파일:Magnet_and_conductor.svg

자석과 도체 문제(magnet and conductor problem)는 패러데이의 유도 전류 실험의 연장선 상에 있는데, 이 실험은 두 가지 방식으로 행할 수 있다. 편의상 에테르에 대해 정지한 가상의 좌표계를 정지계라 하자. 정지계에 도체를 가만히 두고 그곳에 자석을 접근시키면 유도 기전력(전기장)이 발생하고 도체에 전류가 흐른다. 반대로, 정지계에 자석을 가만히 두고 도체를 접근시키면 이번에는 도체 속 자유전하들이 자기력을 받아 가속하면서 마찬가지로 전류가 발생한다. 두 상황은 분명 설명이 완전히 다르기에, 서로 구분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측정가능한 물리량, 즉 전류의 크기는 동일하게 예측된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떤 것이 에테르에 대해 정지해 있는지 알 수 있을까?
이 문제를 정지계와 운동계의 문제로 바꿀 수 있다. 당시에는 맥스웰 방정식, 즉 전기정역학이 정지계에서만 성립한다고 여겼으며, 따라서 올바른 풀이를 제공하는 것은 오로지 정지계 뿐이다. 하지만 이 문제에서는 좌표계의 속도를 임의로 잡아도 우연히 같은 답을 얻으므로, 사실 무엇이 올바른 풀이였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정말로 우연일까? 당시 물리학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인슈타인은 이것이 전기동역학에도 상대성 원리가 성립함을 보여준다고 굳게 믿었고, 논문이 완성될 때까지 줄곧 연구의 기준점으로 삼았다.
아인슈타인은 일찍이 이러한 사고실험에 중점을 두고, 추가로 피조의 실험과 광행차 현상에도 영향을 받아 상대성 원리가 고전역학뿐만 아니라, 전기동역학과 광학에서도 정확하게 성립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편 상대성 원리는 여러 운동 상태의 기준계가 모두 물리적으로 동등함을 의미하므로, 어떤 특정한 운동상태를 가정하는 에테르 이론과 맞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에서 에테르 개념을 배제했다.

이 시점에서 아인슈타인은 당시 가장 성공적이던 맥스웰-로런츠의 전기동역학에서 한 가지 중대한 문제점을 짚었다. 바로 진공에서의 광속이 광원의 운동 상태와 관계 없이 항상 같다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어 광원 기준계에서 속력 [math(c)]의 빛을 방출하면 광원에 대하여 [math(v)]의 속력으로 움직이는 다른 계에서는 [math(c+v)]의 빛으로 보일 것이며, 따라서 좌표계의 운동상태에 따라 위와 같은 법칙은 적어도 기준 속력의 값이 달라지므로, 상대성 원리와 충돌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공간 속에 퍼져서 빛의 속성을 결정한다고 여겨지던 에테르 개념을 제거한다면 전파 속력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광원밖에 없었다.

이러한 점에 입각해 초창기의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력이 광원에 의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런 종류의 이론을 빛의 방출 이론(emission theory)이라 하며, 당시 아인슈타인은 맥스웰의 파동 이론을 대체하기 위한 다양한 방출 이론을 시도하면서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다. (뉴턴의 입자설이 대표적인 방출 이론으로, 이 단계에서 아인슈타인이 광양자 가설을 떠올렸다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방출 이론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모든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으며 결국 맥스웰-로런츠의 이론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의 작업은 상대성 원리와 광속의 불변성을 어떻게든 조화시키는 문제로 수렴했다. 하지만 둘은 아무리 보아도 서로 모순인 것처럼 보였고, 아인슈타인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7년 간(1898-1905)의 헛되었던 고민 끝에, 해결책은 갑자기 나를 찾아왔다. 공간과 시간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법칙은 우리의 경험과의 명확한 관계 위에 세워진 뒤에야 그 타당성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이들 개념과 법칙에 충분히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동시성의 개념을 보다 가변적인 것으로 수정한 이후, 그렇게 나는 특수 상대성 이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Nach siebenjährigem vergeblichem Nachdenken (1898-1905) kam mir plötzlich die Lösung mit dem Gedanken, daß unsere Begriffe und Gesetze über Raum und Zeit nur insofern Geltung beanspruchen dürfen, als sie mit den Erlebnissen in klaren Beziehungen stehen, und daß die Erfahrung sehr wohl dazu führen könne, daß wir diese Begriffe und Gesetze abändern. Durch eine Revision des Begriffes der Gleichzeitigkeit unter gestaltbarer Form gelangte ich so zur speziellen Relativitätstheorie.[14]
논문이 완성되기 불과 5~6주 전, 아인슈타인은 고전적인 운동학이 아닌 다른 종류의 운동학이 가능하며,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해법은 시간과 공간의 성질을 선험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실제 측정 과정(경험)에 의존해 조작적으로 정의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아인슈타인은 동시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정의를 했는데, 이 과정은 푸앵카레가 로런츠의 국소 시간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과 일치한다. 먼저 두 점 AABB가 있을 때, AA에서 빛을 쏘아 BB에서 반사시켜 다시 AA에 도달하게 한다. 시간을 동기화하려면, AA에서 BB로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BB에서 AA로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같아야 한다. 즉, AA에서 빛이 출발하는 AA-시간을 tAt_A, 빛이 BB에서 반사되는 BB-시간을 tBt_B, 빛이 AA에 돌아오는 AA-시간을 tAt_A'이라 하면 다음과 같다.

[math(\displaystyle t_B - t_A = t_A' - t_B)]


그런데 만약 막대 [math(AB)]가 길이 방향으로 [math(v)]의 속력으로 움직이는 좌표계를 설정하면, [math(t_A, t_B, t'_A)] 사이에는 다음 관계식이 성립한다.

[math(\displaystyle t_B - t_A = \frac{\overline{AB}}{c-v})]

[math(\displaystyle t_A' - t_B = \frac{\overline{AB}}{c+v})]

이 좌표계에서는 [math(t_B - t_A)]와 [math(t_A' - t_B)]가 일치하지 않으므로, 시계가 동기화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두 좌표계는 시계의 동기화에 대하여 동의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동시성의 상대성(Relativity of Simultaneity)이다. 아인슈타인에게 있어서는 이 발견이야말로 7년 간 고민했던 전기동역학 문제가 일단락되고, 특수 상대성 이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하이라이트는 로런츠의 전기동역학의 핵심인 로런츠 변환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는 1895년의 완성되지 않은 로런츠 변환만을 알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고, 그는 처음으로 전기동역학적 담론에서 벗어나 로런츠 변환이 순수하게 운동학적인 맥락에서의 관성계 간 좌표 변환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로런츠에게는 단순 수학적 장치였으며, 푸앵카레에게는 측정의 문제에 머물렀다는 점에서 아인슈타인의 1905년 논문은 특수 상대성 이론의 발단에 있어서 가장 기념비적인 것이었다.
  • 아인슈타인 이론과 로런츠 이론의 비교
전기동역학을 다루는 데 있어서 수학적으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로런츠의 전자론은 동등하며, 시간과 공간의 특이적 성질 역시 선대 학자들에 의해서 상당 부분 밝혀진 바 있다. 상식적으로 로런츠 변환이 알려진 이상 그에 대한 물리적 해석을 논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발상이 아니다. 물론, 로런츠의 이론에서는 에테르 기준계와 그 외 기준계를 엄격히 분리한 반면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는 그러한 구분을 제거했기에 물리적 해석이 보다 완결성을 띠게 된 점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라면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로런츠의 이론을 보강하는 것에 그쳤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처음에는 로런츠-아인슈타인 이론이라 불렸다) 하지만 로런츠의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의해 대체되었다는 것이 현재의 표준적인 시각인데, 이것을 가능하게 한 궁극적 원인은 다음과 같은 차이점 때문이다.
(1) 로런츠의 이론이 구성적(constructive)이라면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공리적(axiomatic)이다.
(2) 로런츠의 이론은 역학적(mechanic)인 반면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운동학적(kinematic)이다.
로런츠는 프레넬 계수나 길이 수축을 논하기 위해 맥스웰 방정식을 이용해 전자의 거동을 분석하는 등, 미시물리학(microphysics)에 근거한 개별적 접근을 사용했으며, 궁극적으로 이것을 에테르가 전자에 미치는 영향으로 해석하는, 역학적 분석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보조적 가설이 들어갔으며, 구조적인 난잡함으로 인해 이론이 옳은 답을 예측함에도 그의 가설들은 Ad hoc으로 여겨졌다. 상대성 원리에 대응되는, 대응 상태 정리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대응 상태 정리는 전기동역학에 국한되는 논리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른 물리학 분야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 역시 상대성 원리를 확신한 이후 처음에는 상대성 원리를 유도하는 구성적인 이론을 시도했으나, 접근 상의 어려움으로 인해 이를 포기하고 과감하게 상대성 원리(와 광속 불변)를 기본 공리로 하는 이론을 제안하였으며, 최대 11개에 달하던 로런츠의 가설은 2개의 공리로 줄어들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접근을 열역학 법칙에 비유하였다. 3개의 열역학 법칙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카르노와 클라우지우스의 열역학은 기체의 복잡한 미시물리학적 분석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반대로 구성 법칙들을 이용해 기체의 성질을 유도한다. 특수 상대성 이론도 마찬가지로 전기동역학의 복잡한 미시적 분석에 의존하지 않고, 그로부터 유도될 수 있는 일반적 법칙들을 아래에 두어 다른 물리학에서도 그 원칙이 성립함을 쉽게 기대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성질로 인해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 프레넬 계수, 길이 수축 등은 그 기전에 대한 역학적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운동학적으로 그러한, 즉 추가적 해명이 필요하지 않은 시간-공간의 기초 성질이 된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예견하는 개별 요소들이 이미 선대에 밝혀진 사실들이라도(실제로 전부는 아니지만), 아인슈타인의 업적을 단순 재구성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뉴턴의 역학 법칙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이미 밝혀진 것들이라도 뉴턴의 업적이 작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표준적인 물리 이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이미 밝혀진 사실들을 최소한의 가설로부터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제시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전기동역학에 국한되던 연구들이 다른 분야에도 쉽게 확장될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 아인슈타인이 받은 영향
아인슈타인이 어떤 학자들의 영향을 어떻게 받았느냐 하는 문제는 특수 상대성 이론의 역사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이슈 중 하나이다. 1905년 논문에서 등장하는 이름은 맥스웰, 뉴턴, 헤르츠, 로런츠, 베소 총 5명이며, 인용 주석은 한 건도 등장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아인슈타인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고 보는 건 순진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동시기 논문들을 참고할 때 고의적으로 출처를 남기지 않는 성격은 아니었다. 이 문제는 아인슈타인의 여러 증언, 당시에 아인슈타인이 쓴 편지나 원 논문에 나타나는 개념, 수법, 이름, 기호 등을 참고하여 간접적으로 연구하는 방법에 크게 의존한다. 후자의 경우 개념, 이름 등에서 아브라함의 이론과 공통 분모가 나타나는데, 아브라함의 이론은 수축 가설을 부정하는 등 애초에 로런츠 이론과 크게 다르다.

제일 먼저, 로런츠의 이론(특히 수축 가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마이컬슨-몰리 실험의 경우 아인슈타인에게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오늘날의 많은 학자들이 여긴다. (Holton, 1969) 마이컬슨-몰리 실험이 아인슈타인의 두 가설 중 하나인 광속 불변의 원리에 영향을 주었다고 흔히 해석하지만, 이는 사실 관계를 다소 왜곡한 것이다. 1954년 Davenport에게 남긴 아인슈타인의 증언에 따르면, 마이컬슨 몰리 실험의 의의는 2차항 이상에서 전기동역학의 상대성 원리가 성립함을 증명했다는 것인데 그는 이미 그 실험의 결과를 알기 전에 (1차항 수준의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상대성 원리가 옳다고 생각했고, 마이컬슨-몰리 실험은 그 생각에 확신을 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즉, 아인슈타인에게 시작점이나 전환점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지만, 이를 다시 부정하는 연구도 있다. (Dongen, 2009) 어느 쪽이든 물리학계에서 특수 상대성 이론이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마이컬슨-몰리 실험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음으로, 아인슈타인이 사전에 읽었다고 밝힌 전기동역학 논문은 1차항 수준의 로런츠 변환(상대성 원리)이 도입된 로런츠의 1895년 논문이 유일하다. 이는 1904년 논문의 완전한 로런츠 변환은 알지 못했다는 의미이며, 이 경우 자신이 유도한 좌표 변환에 로런츠의 논문을 인용하지 않은 것은 자연스럽다.[15] 실제로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원리를 받아들일 때 상술했듯이 자석과 도체 문제, 피조의 실험, 광행차 현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진술했는데 피조의 실험과 광행차는 그 자체만 봤을 때는 상대성 원리와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이들은 로런츠가 1895년 전기동역학을 이용해 "1차 에테르 실험의 실패"라는 맥락에서 설명했다는 공통점이 있다.[Norton(2005)]

이외에,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 중 상당수는 이미 전기동역학을 연구했던 여러 학자들의 논문에 흩어져 나타난다. 다른 학자들의 논문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각각의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이 중에 몇몇은 아인슈타인이 관련 저서를 읽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있다.
  • 푸앵카레, 알프레드 부헤러(Alfred Bucherer, 1863~1927)는 상대성 원리를 주장하였다.
  • 로런츠와 조지프 라머(Joseph Larmor, 1857~1942)는 로런츠 변환을 거의 완성했으며, 푸앵카레는 완전히 완성했다.
  • 콘과 부헤러는 에테르 개념을 부정했다.
  • 푸앵카레, 콘, 막스 아브하람(Max Abraham, 1875~1922)은 국소시간의 물리적 의미를 파악했다.
  • 라머, 콘은 로런츠 변환으로부터 시간 지연을 묘사했다.
  • 로런츠와 푸앵카레는 전자의 상대론적 동역학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요소들은 전부 흩어져 있기 때문에 (정답이 없는 상태에서) 정답만 고르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며, 실제로 정답을 모두 골랐더라도 아인슈타인은 공리적 구성이라는 전혀 시도되지 않은 방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업적의 독보성은 분명한 것이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아인슈타인처럼 근본적인 운동학을 수정한다는 대담한 시도는 보이지 않았다.[Darrigol(2005)]

물리학 논문 외에 아인슈타인은 데이비드 흄(David Hume)과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다고 수차례 증언했고 실제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다. 구체적으로, 그는 흄의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A Treatise of Human Nature)를 탐독했다고 밝혔는데, 가장 중요한 대목은 "개념이란 오로지 실제 세계에 대한 경험에 의존해서 세워져야 한다"고 역설한 부분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돌파구는 동시성의 개념을 빛 신호의 왕복이라는 경험적인 과정을 이용해 정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술하였듯 아인슈타인이 시간과 공간을 경험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막바지에 이르러서이다. Norton은 아인슈타인이 흄의 사상을 수동적이고 제한적인 방식으로 적용했다고 주장하였다. 고전적인 시간-공간 개념 속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한 이후, 자포자기 심정으로 시도한 남은 선택지가 바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바꾸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시도는 상대성 이론이 성립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가 되었다.

5.2. 발전

아인슈타인의 논문이 처음부터 학계에서 전기동역학 문제의 궁극적 해결로 비춰지거나, 로런츠의 전자론을 바탕에 두고 있는 다른 이론들에 비해 크게 우월하다고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이는 1905년 이후 뒤따라오는 상대성 이론의 발전사(특히, 일반 상대성 이론)를 거치며 아인슈타인 중심의 연구 흐름이 분명해지면서 점진적으로 굳어진 후대의 이미지와 재해석에 가깝다. 당대의 이해로는 아인슈타인의 논문이 로런츠의 전자론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유도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져 많은 경우 로런츠-아인슈타인 이론(Lorentz-Einstein theory)이라고 함께 불렸는데, 정작 로런츠와 아인슈타인은 서로의 이론을 대체로 분명히 구분했다. 특히 로런츠는 국소 시간 등의 물리적 해석으로 아인슈타인의 해석을 인용했지만, 자신의 좌표 변환이 시간-공간의 새로운 구조를 나타낸다는 아인슈타인의 해석에 반대했고, 죽을 때까지 고전적인 시간과 공간 개념을 고수하였다. 오해할까봐 덧붙이지만, 아인슈타인과 로런츠는 이 때의 인연으로 둘도 없는 친구이자 학문적 동료가 되었고 로런츠는 아인슈타인에게 여러모로 정신적인 스승 역할을 했다.

그의 여동생의 증언에 의하면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논문이 물리학 연보에서 받아들여질지 조마조마했다고 하며, 결국 논문이 출판되자, 즉각 어그로를 끌 수 있을 것이라 설레하면서 여러 반응을 상상했으나 다음 물리학 연보에서 언급조차 없자 엄청나게 실망했다고 전해진다. 오랜 기다림 끝에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로 여겨지던 막스 플랑크(Max Planck)가 편지를 보내 그의 논문에 관심을 표하자 아인슈타인은 뛸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플랑크는 아인슈타인과 서신으로 몇 차례 교류를 나누었고, 자신이 있던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주최하였다.

흥미롭게도 로런츠-아인슈타인 이론이 처음 마주한 반응은 저명한 물리학자 카우프만(W. Kaufmann)이 실험적으로 부정했다는 것이다. 당시 이들의 이론은 로런츠-피츠제럴드 수축(길이 수축)을 부정한 막스 아브라함(M. Abraham)의 이론과 경쟁중이었고, 카우프만은 전자의 경로를 정밀하게 측정한 결과 아브라함의 예측이 보다 정확하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러나, 향후 재차 검증 결과는 로런츠-아인슈타인 이론의 손을 들어주었다.

초창기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과 여러 물리학자들은 상대성 이론을 계속해서 발전시켰다. 아인슈타인은 9월 후술할 에너지의 방출이 질량의 감소로 이어진다는 후속 연구([math(E=mc^2)])를 제출했는데, 이는 고전 역학이 상대성 이론에 의해 어떻게 수정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첫 논문으로 평가된다. 아인슈타인은 이 결과를 특수 상대성 이론의 최대 결과 중 하나로 여겼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보강된 증명을 내놓았다. 이후 막스 플랑크는 1906년 고전 역학의 힘이 상대론적으로 불변하도록 확장하였고, 아인슈타인은 다시 1907년 리뷰 논문에서 중력을 설명하기 위한 등가 원리를 도입하였으며, 헤르만 민코프스키는 1908년 시간과 공간을 통합한 4차원 시공간 개념을 제안하였다.

1907년 막스 폰 라우에(Max von Laue)는 아인슈타인이 놓쳤던 프레넬 계수 문제를 설명했는데, 프레넬 계수는 광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으므로 이것이 상대성 이론에서 어떻게 설명되는지를 자세히 살펴보자. 굴절률이 [math(n)]인 매질 내에서 빛의 속력은 [math(\displaystyle \frac{c}{n})]이다. 매질이 (빛이 진행하는 방향으로) [math(v)]의 속력으로 움직이고 있는 기준계를 선택하면, 이 기준계에서 빛의 속력, 그리고 그것을 ([math(v/c)]에 대한) 1차 전개를 구하면 다음과 같다.
[math(\begin{aligned} \displaystyle \frac{\displaystyle \frac{c}{n} + v}{\displaystyle 1 + \frac{v}{cn}} &\approx \left(\frac{c}{n} + v\right)\left(1 - \frac{v}{cn}\right) \\ &\approx \frac{c}{n} + \left(1 - \frac{1}{n^2}\right)v \end{aligned})]

프레넬 계수의 정체는 상대론적 속도 덧셈 공식이었던 것이다. 갈릴레오 변환에서는 매질과 빛의 속도가 덜 더해진 것처럼 보였기에, 프레넬은 에테르가 매질에 이끌린 것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피조의 실험은 고전 역학 안에서 에테르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대론에서는 에테르 없이 순전히 운동학적으로 유도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로런츠가 이미 1895년 사실상 같은 과정을 거쳐 유도를 했고 그 자체로는 매우 중요한 성과였지만, 로런츠는 이것이 에테르에 의해 빛의 진행속력이 영향을 받은 역학적 결과로 해석하였다. 설명력에 있어서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한 단계 진보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5.2.1. 질량-에너지 동등성(1905)

질량-에너지 동등성은 질량이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고, 에너지가 질량으로 돌아올 수 있음을 말한다. 대표적인 현상이 핵분열 핵융합, 그리고 쌍생성-쌍소멸이다. 1932년 콕크로프트와 월턴이 핵반응에서 나온 입자들의 에너지가 전체 질랑변화와 같다는 것을 보이면서 질량-에너지 동등성이 성립함을 증명한다.

물체의 관성(질량)이 전자기 에너지로 표현될 수 있다는 개념은 1905년 이전부터 꽤 자주 논의되었고, 푸앵카레도 그 중 한 명이다. 이러한 논의들을 바탕으로, 1900년 초반에는 모든 물질적 과정이 전자기 과정으로 해명될 수 있다는 사조가 특히 괴팅겐 대학을 중심으로 발생했다. 여기에는 헤르만 민코프스키, 막스 아브라함, 훗날 일반 상대론에 기여한 다비트 힐베르트 등이 포함된다.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지 3개월 뒤 "물체의 관성은 에너지 함량에 의존하는가?"(Ist die Trägheit eines Körpers von seinem Energieinhalt abhängig?)라는 논문에서 유사한 주제를 다루었다. 여기에서 아인슈타인은 양쪽 방향으로 방사되는 복사 과정을 이용해 물체의 관성이 복사 에너지의 방출량에 비례해 감소한다는 결론을 유도했다. 그리고 특별한 설명 없이 이러한 설명이 모든 유형의 에너지에 적용된다고 논의를 확장하였다. 일반적으로 아인슈타인의 해당 논문이 실제로 질량-에너지 동등성에 대한 완전한 증명을 내놓았다고 여겨지지는 않으며 이후에도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많은 학자가 후속 연구로 논리를 강화했다. 다만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론을 바탕으로 "임의의" 에너지와 질량의 관계를 탐색한 첫 학자로 여겨진다.

질량-에너지 동등성을 놓고 처음에는 질량이 운동에너지에 비례해 증가한다(상대론적 질량)고 해석하였지만, 나중에는 질량은 정지질량만으로 한정하는 추세로 바뀌었다.

5.2.2. 4차원 시공간(1908)

파일:민코프스키.jpg
헤르만 민코프스키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4차원 시공간 개념을 발견했다.
아인슈타인의 대학 시절 수학 교수이기도 했던 괴팅겐의 헤르만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 1864~1909) 또한 동시기에 전기동역학 문제를 연구하고 있었다. 민코프스키가 1908년 발표한 전기동역학 연구는 기본적으로 아인슈타인의 것과 물리적 입장을 같이 하기 때문에 현재는 특수 상대성 이론의 후속 연구 중 하나로써 여겨진다. 다만 민코프스키는 한 발 더 나아가 4차원 시공간(spacetime)이라는 상위 구조를 제안함으로써 상대성 이론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본래 대수적 형식화를 대체하는 새로운 (기하학적) 형식화를 마련하였으며 시간과 공간에 관한 이해에 있어서 다시 한 번 큰 변화를 가져왔다. 시공간 개념은 이해하기 까다로워 고등학교 및 일반 물리학에서는 대수적 형식화를 가르치지만 전문적인 교재에서는 무조건 시공간 형식화로 접근한다.

민코프스키가 발견한 것은 시공간의 계량(metric) 구조, 쉽게 말하자면 기하학적 구조이다. 간단하게 언급하면
좌표공간에서 두 점 사이의 거리는 피타고라스 정리에 따라

[math(d^2=x^2 + y^2 + z^2)]

이라는 공식으로 구할 수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직교좌표계 사이의 회전변환에 대해 불변이다. 한편 4차원 시간-공간에서는

[math(d^2=c^2dt^2 - dx^2 - dy^2 - dz^2)]

라는 식이 로런츠 불변이었다. 그렇다면 시공간에서 관성계는 직교좌표계에 해당하고, 로런츠 변환은 회전변환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math(d^2)]은 바로 시공간 위 두 점 사이의 거리의 제곱이 된다! 이것을 시공간 간격(spacetime interval)이라고 한다. (두 점 사이의 관계에 따라 음수, 양수, 또는 0이 되므로 부호는 필요에 따라 바꿔줘야 한다.) 민코프스키는 이런 사유과정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합쳐서 진정 고유의 기하학이 존재하는 하나의 4차원 공간인 "시공간"으로 다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이용하면 물리법칙은 모두 로런츠 불변이므로, 이따가 다시 등장하는 좌표계와 무관한 기하학적 양들, 즉 텐서들을 물리법칙에 대응시킬 수 있다. 가장 간단한 예로, 아까 로런츠 불변이라고 말한 고유 시간은 특정 경로를 잘게 쪼갠 다음, 각 구간에서 두 점 사이의 ‘시공간 간격’의 제곱근(거리 제곱이었으니까)을 모두 더한 것이다. 물체가 [math((0, 0) \rightarrow (t, tv))]로 직선 상을 운동했다면 고유시간은 [math(\sqrt{c^2t^2-t^2v^2}=c\sqrt{1-\biggl(\dfrac{v}{c}\biggr)^2}t)]가 된다. 시간 단위로 맞추고 싶으면 c로 나누면 된다. 두 점 사이의 거리는 두 점을 잇는 벡터의 크기이기도 하며 당연히 좌표계에 무관한 양이 될 것이다.

이외에 (중력을 제외한) 물질들의 질량, 에너지, 압력 등을 모두 집어넣은 스트레스-에너지 텐서, 전기장과 자기장을 합친 패러데이 텐서 등도 민코프스키의 기초작업에 의해 함께 도입되었다. 결국 나중에 가서는 일반상대론으로 넘어가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하게 되지만, 아인슈타인은 아직 이것들을 다룰 수 있는 수학을 배우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일반상대론에서는 좌표변환이 완전히 자유롭지만, 특수상대론에서는 로런츠변환만 허용되므로 이 때 도입된 텐서들은 관성계에 한정된 꼴이다.

5.3. 실험적 검증

5.3.1. 아이브스-스틸웰 실험(1938)

상대론적 도플러 효과, 특히 가로 도플러 효과(Transverse Doppler Effect)를 검증한 실험으로, 이는 아인슈타인이 1905년 원 논문에서 유도한 것이었다. 상대성 이론의 시간 지연 효과(로런츠 부스트)를 처음 검증한 중요한 실험으로 여겨진다.

5.3.2. 하펠-키팅 실험(1971)

두 제트기에 원자 시계를 싣고 지구를 돌아 시간 지연 현상을 검증한 실험.

6. 일반 상대성 이론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인 일반 상대성 이론의 발단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번째로, 원래 표준 중력 이론이었던 뉴턴의 만유인력(1687)이 어떤 위기에 봉착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사실 뉴턴의 이론은 태양계 내에서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영국 수학자 존 애덤스(John Adams)와 프랑스 수학자 르베리에(Le Verrier)는 뉴턴 중력 모델을 기반으로 천왕성의 궤도를 통해 그 외부에 새로운 행성이 있음을 예측하였고, 그 궤도를 수학적으로 계산하였다. 1846년, 그 행성은 실제로 발견되었으며 이 행성이 바로 해왕성이다.

한편 르베리에는 1859년 수성의 근일점이 기존에 알려진 행성 분포, 지구 자전 및 뉴턴 모델로부터 예측되는 것 이상의 세차운동을 보인다는 것을 보고하였다. 알려진 모든 외부 인자를 제거하였을 때 수성은 [math(100)]년에 약 [math(45'')] 만큼의 세차운동을 보이는데, 이는 뉴턴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케플러의 법칙이 말해주듯 뉴턴의 역제곱 중력 법칙에 따르면 공전 궤도는 하나의 타원으로 닫혀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베리에는 이미 천왕성의 궤도로부터 새로운 행성의 존재를 밝혀냈으므로, 수성 또한 그 내부에 새로운 행성이 존재한다고 설명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 르베리에는 수학적으로 예측되는 가상의 행성을 도입하여 벌컨(Vulcan)이라 불렀다. 벌컨을 찾으려는 천문학계의 오랜 노력이 있었으나 그 시도는 실패적이었다.

두번째로, 20세기 초 새로 등장한 역학인 특수 상대성 이론의 입장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모든 물리법칙이 로런츠 불변성을 따르고, 정보의 이동이 광속을 넘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뉴턴의 이론은 정보의 이동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수정이 불가피하다. 푸앵카레는 1905년 (아인슈타인의 논문이 나오기 전) 중력이 로런츠 불변성을 따르도록 수학적인 수정을 시도했다. 여기에 중력의 전파 속력이 광속으로 제한되면서 중력파 개념도 등장했는데, 너무 이른 시도인데다 푸앵카레가 이후 이 분야에 크게 기여하지 않고 1912년 사망하면서 족적이 끊겼다.

푸앵카레의 업적은 잊혔지만, 중력이 상대성 이론에 맞게 수정되어야 함은 분명했다. 하지만 어떻게 수정되어야 하는가? 중력을 수정하는 문제는, 재료 자체는 넘쳐나던 특수 상대성 이론과는 달리 수성의 근일점 이동 말고는 실험적 실마리가 매우 부족했다. 다만 중력이 로런츠 불변성을 따라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아인슈타인이 1907년에 내놓은, 일반 상대성 이론을 향한 첫 실마리가 말해주는 바는 매우 당혹스러운 것이었는데, 그 요지는 특수 상대성 이론에 맞게 중력을 수정해야 할 뿐 아니라, 중력을 올바르게 포함하려면 특수 상대성 이론 또한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6.1. 탄생기(1907 - 1915)

등가 원리가 처음 제시된 1907년부터 중력장 방정식(아인슈타인 방정식)이 완성된 1915년까지를 소위 일반 상대성 이론의 탄생기(Genesis of General Relativity)라 부른다. 이 시기는 특수 상대론을 기반으로 여러 학자들(아브라함, 노르드스트룀, 미에 등)이 각자의 중력 이론을 발표하던 시기이며,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론은 그 중 (강력한) 하나였다. 따라서, 이때의 일반 상대론은 거의 전적으로 아인슈타인의 발상 및 사고과정과 의사선택에 의존하여 발전하였으며,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론"이라 불리는 이유이다.

물론 아인슈타인은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아인슈타인은 노르드스트룀, 아브라함의 이론이나 그들의 일반 상대론에 대한 비평과 상호작용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켜나갔고, 친구 마르셀 그로스만의 도움으로 가우스, 리만, 크리스토펠, 리치, 레비치비타가 발전시킨 미분 기하학을 배워 일반 상대론의 수학적 기초로 삼았으며, 친구 미헬레 베소의 도움으로 수성의 근일점 이동에 관한 계산 공식을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틀린 방정식을 바탕으로 하여 값이 맞지 않았지만 나중에 바뀐 방정식으로 아인슈타인이 따로 계산한 결과 정확한 값이 도출되었다.) 하지만 이론의 기초 작업에 있어 아인슈타인이 항상 지배적인 역할을 한 것도 맞다.

6.1.1. 등가 원리(1907)

중력을 다른 힘과 구별시키는 가장 중요한 성질은 바로 등가 원리(Equivalence principle)로, 자유낙하하는 물체들이 성상에 관계없이 동일한 가속도로 떨어진다는 것은 뉴턴의 역학이 정립되기 전(16세기)부터 실험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에서 수행했다고 알려져 있는 유명한 실험(일화 혹은 전설) 역시 등가 원리를 설명한다. 등가 원리는 관성 질량과 중력 질량의 등가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으며, 이는 1885년 처음 이뤄진 외트뵈시(Eötvös) 실험에서 정밀하게 검증된 바 있다. 물체의 관성질량과 중력질량을 각각 [math(m_i, m_g)]라 하고 가속도를 [math(a)], 중력 가속도를 [math(g)]라 하면 그 관계는 다음과 같다. 이 때, [math(a)]는 각 물체가 중력장에 의해 갖게 되는 가속도이며, [math(g)]는 중력장이 각각의 물체에 부여하는 효과이다.
[math(m_ia = m_gg)]
[math(\Downarrow)]
[math(m_i = m_g)]
(등가 원리 1)
[math(\Leftrightarrow)] [math(a = g)]
(등가 원리 2)

초창기 연구 단계(1905~1907)에서 아인슈타인은 다른 이론물리학자와 마찬가지로 뉴턴의 중력장 모델을 그대로 확장한 이론을 구상하려 했다. 그러나 이내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접근이 등가 원리와 잘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고전 역학에서는, 수직 중력장에 의한 수직 가속도는 수평 속도에 독립적이지만, 질량-에너지 등가원리([math(E=mc^2)])에 의하면 물체는 초기속도에 의존하여 관성 질량이 늘어나므로 중력 질량이 그에 맞춰져 같이 늘어나지 않으면 이러한 것이 설명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간극을 자연스럽게 설명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등가 원리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돌파구를 마련하였다. 이는 당시 그가 중력 문제와 함께 상대성 원리를 가속계로 확장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것을 기존의 고전적 등가 원리, 즉 약한 등가 원리(Weak Equivalence principle; WEP)와 구분하여 아인슈타인 등가원리(Einstein Equivalence principle; EEP)라 부른다. 1907년에 아인슈타인은 EEP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이는 일반 상대성 이론의 서막을 알리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상대성 원리, 즉 물리법칙들이 좌표계의 운동상태에 독립적이라는 가정을 오직 가속하지 않는 기준계에만 적용해왔다. 상대성 원리가 서로에 대해 가속하는 계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
두 계 [math(\Sigma_1)]과 [math(\Sigma_2)]를 생각하여 [math(\Sigma_1)]는 [math(X)]축 방향으로 가속시키고, [math(\gamma)]를 (순간적으로 상수인) 가속도의 크기라고 하자. [math(\Sigma_2)]는 정지해있으나 균일한 중력장에 놓아 모든 물체들이 [math(X)]축 방향으로 [math(-\gamma)]의 가속도를 갖도록 하자.
현재까지의 경험 속에서 우리는 두 계 [math(\Sigma_1)]과 [math(\Sigma_2)]가 어떤 면에서도 서로 다르다고 할 이유가 없으며, 따라서 앞으로의 논의에서 우리는 중력장과 그에 대응되는 기준계의 가속이 완벽하게 물리적으로 동등하다고 가정할 것이다.
이 가정은 상대성 원리를 일정하게 병진 가속운동하는 기준계로 확장시킨다. 이 가정의 경험적(heuristic)인 가치는, 균일한 중력장을 (이론적 접근이 어느 정도 가능한) 일정하게 가속하는 기준계로 교체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아인슈타인, "상대성 원리와 그로부터 도출되는 결론들에 대하여" V. 상대성 원리와 중력 (1907)[18]

EEP는 역학의 범위에서는 WEP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단순히 다른 표현이지만, 보다 일반적이고 범용성이 넓으며, 특수 상대성 이론의 영역에서는 중력과 시공간의 관계에 대하여 시사하는 바가 커진다. 아인슈타인은 EEP가 상대성 원리의 확장 문제와 중력의 상대론적 기술 문제를 하나로 묶어준다고 생각하였으며, 이 둘은 당시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에 대해 가장 고민하고 있던 두 가지 문제이기도 했다. 당시의 아인슈타인은 등가 원리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1. (가속 ⇒ 중력) 상대성 원리를 확장할 수 있다. 가속계에 놓인 관찰자는 관성계 안에서 중력을 받고 있다고 해도 문제가 전혀 없으므로, 관찰자는 자신의 운동상태를 전혀 알 수 없게 된다. 이 말은 실험적으로 관성계와 가속계를 구분할 수 없다는 말이나 같다. 즉 실험의 결과를 내놓는 주체인 물리법칙은 어떤 운동상태의 좌표계에서도 동일하게 성립해야 한다.
2. (중력 ⇒ 가속) 중력을 특수상대론을 이용해서 간접적으로 다룰 수 있다. 가속계는 특수상대론을 위치별로 다르게 적용해서 다루면 되는데, 관성계에 놓인 중력장은 가속계에서 얻은 결론들을 그대로 갖다쓰면 되기 때문이다.

당시의 발견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19]
내가 (베른에서) "Jahrbuch der Radioaktivität und Elektronik"(잡지)에 제출할 특수 상대성 이론에 대한 포괄적인 요약을 작성하느라 바빴을 때, 동시에 나는 뉴턴의 중력 이론을 특수 상대성 이론에 맞게 수정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방향은 일부 성과가 있었으나 물리적으로 불안정한 가정을 바탕으로 하였기에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 때 나는 다음과 같이 생애 가장 행복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중력장은 전자기 유도에 의해 만들어지는 전기장과 같이 오직 상대적으로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지붕에서 자유낙하하는 관찰자는 떨어지는 동안 (최소한 순간적으로) 중력장을 느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관찰자가 어떤 물체를 놓으면, 물체는 특정 화학적, 물리적 본성에 관계없이 그에 대해 정지나 등속도 운동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따라서, 관찰자는 자신의 상태를 '정지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의 발전과정에서 제시된 근본 발상과 방법" (Fundamental Ideas and Methods of the Theory of Relativity, Presented in Their Development) (1921)
돌파구는 어느날 갑자기 찾아왔다. 나는 베른의 특허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갑자기 한 생각이 나를 스쳤다: 한 사람이 자유낙하를 한다면, 그는 자신의 무게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 간단한 사고 실험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것은 나를 중력 이론으로 이끌었다. 나는 생각을 이어나갔다: 떨어지는 사람은 가속한다. 그렇다면 그가 느끼고 판단하는 것은 가속하는 기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상대성 이론을 가속하는 기준계로 확장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중력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으리라 느꼈다. 떨어지는 사람이 그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의 기준계에서 지구의 중력장을 상쇄시키는 새로운 중력장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가속하는 기준계에서는, 새로운 중력장이 필요하다.
아인슈타인, "나는 어떻게 상대성 이론을 만들었는가" (How I created the theory of relativity) #

6.1.2. 빛의 굴절(1911)

한편, EEP를 통해 기존 상대성 이론의 중요한 특징인 광속 불변이 중력장이 있는 경우에도 유지되는지 밝힐 수 있다. 이는 가속계에서 광속 불변이 여전히 성립하느냐는 문제와 같다. 아인슈타인은 이 문제가 상대론적 중력 이론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중력이 있는 환경에서 광속 불변이 깨진다면, 상대성 이론은 중력을 기술하는 데에 명백히 한계가 있는 것이며 중력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이론을 확장해야 한다.
(2) 빛은 파동이므로 고전 중력 이론에서는 빛이 휘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광속 불변성이 깨진다면 하위헌스의 원리에 의해 빛이 휘기 때문에 태양을 지나오는 별빛을 관찰함으로써 실험적으로 이론을 검증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이 문제에 대해 1907년 당시에 일차적으로 이론적 설명을 시도하였으나, 급하게 작성해서 그런지 논의가 다소 정리되지 않았다. 또, 예측되는 빛의 굴절량이 너무 작아 실험적 검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아인슈타인은 중력 문제에 대한 의욕을 잃고 양자 문제에 눈을 돌린다.

파일:Einstein_Portr_05936.jpg
프라하의 아인슈타인(1912)
1911년 4월 프라하(Prague) 카렐 대학교(Charles University)의 이론 물리학 정교수로 채용된 아인슈타인은 다시 중력 문제로 돌아온다. 그가 1911년 6월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에 제출한(9월 출판) 논문(『빛의 진행에 대한 중력의 영향』)은 일반 상대성 이론의 본격적 출발을 알리는 중요한 논문으로 여겨진다. 여기에서 아인슈타인은 에너지가 받는 중력(WEP의 유도), 중력에 의한 빛의 진동수 변화, 시간의 흐름, 빛의 굴절 등 다양한 이슈를 한층 더 선명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이 때의 논리 전개는 (아인슈타인답게) 매우 깔끔하여 도플러 효과를 통해 빛을 다루는 과정은 아직도 교과서에 자주 인용된다. 단, 이 때의 논의는 일차항까지만 고려하였다.
3년 전 출판된 논문에서, 나는 이미 빛의 진행이 중력의 영향을 받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려고 시도하였다. 이제 다시 이 주제로 돌아온 것은 내 기존 논의가 만족스럽지 못한데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분석의 가장 중요한 결과 중 하나가 실험적 검증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전개하려는 이론은 태양 주변을 지나는 광선은 그 중력장에 의해 굴절을 겪게 됨을 예측한다. 이 때 태양 근처에 고정된 별은 태양으로부터의 각거리가 증가하게 되며, 그 양은 거의 1 각초(arc second)에 이른다.
아인슈타인, "빛의 진행에 대한 중력의 영향 (on the influence of gravitation on the propagation of light)", 1911[20]

이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1) 에너지는 중력을 받는다.

[math(S_2)]에서 [math(h)]만큼 낮은 곳에 위치한 [math(S_1)]로 에너지(복사 형태)를 보내면
[math(\displaystyle E_1 = E_2 \left(1 + \frac{\gamma h}{c^2}\right))]


가 된다([math(\gamma)]는 중력장의 세기). 이로부터 (2)~(4)가 유도된다.
(2) 빛은 중력에 의해 진동수가 바뀐다. (높이에 따라 시간의 흐름이 달라진다.)
(3) 빛은 중력에 의해 속력이 달라진다.
(4) 별빛은 질량 [math(M)]을 가진 천체 근처(거리 [math(\Delta)])에서 [math(\displaystyle \frac{2GM}{c^2\Delta})]만큼 굴절된다.[21]

특히, (4)에서 아인슈타인은 훗날 에딩턴이 시도했던 개기 일식 실험을 직접 제안하여 자신의 이론의 실험적 검증 방법에 대한 토대를 구축하였다.
... 따라서, 태양을 지나는 광선은 [math(4 \cdot 10^{-6} = 0.83)] 각초에 해당하는 굴절을 겪게 된다. 이것은 광선의 굴절에 의해 태양 중심으로부터 별의 각거리가 증가한 것처럼 보이는 양이다. 태양과 근접한 부분의 하늘에 고정된 별은 개기일식 동안 보이게 되므로, 이 이론의 결과(빛의 굴절)를 경험과 비교할 수 있다. (...) 제시된 논의가 비록 충분치 않거나 심지어 모험처럼 보이더라도, 이곳에서 꺼낸 질문에 천문학자들이 응해주길 절실히 바라고 있다. 어떠한 이론이 되더라도, 우리는 스스로 빛의 진행에 대한 중력장의 영향이 현재 사용되는 장비들로 검출이 가능한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동일 논문)

6.1.3. 경쟁 이론들(1911-1913)

아인슈타인의 등가 원리 논문은 중력 문제에 관심을 갖던 이론 물리학자들의 주목을 끌어내고, 중력 적색 편이, 태양에 의한 별빛의 왜곡 등 실측 가능한 예측을 제시하여 일부 천문학자들의 관심 또한 얻을 수 있었다.

1911년 11월, 괴팅겐의 아브라함(Max Abraham)은 광속이 중력 퍼텐셜에 의존한다는 아인슈타인의 가설에 주목하여 민코프스키 시공간을 기반으로, 상대성 이론을 기반으로 한 중력장 이론을 빠르게 발표하였으며 이를 통해 아인슈타인의 결론 또한 포함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Abraham(1911)] 그의 이론은 중력을 상대론화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단적으로, 중력장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math(\displaystyle \red{-\frac{1}{c^2}\frac{\partial^2 \Phi}{\partial t^2}} + \frac{\partial^2 \Phi}{\partial x^2} + \frac{\partial^2 \Phi}{\partial y^2} + \frac{\partial^2 \Phi}{\partial z^2} = 4\pi G\rho)]

[math(\displaystyle F_t = -\frac{\partial \Phi}{\partial t}, \quad F_x = -\frac{\partial \Phi}{\partial x}, \quad F_y = -\frac{\partial \Phi}{\partial y}, \quad F_z = -\frac{\partial \Phi}{\partial z})]

첫번째 식으로부터 아브라함은 중력의 속도를 광속으로 규정했고, 빛은 횡파이고 중력은 종파라 하였다. (라플라스 연산자를 달랑베르 연산자로 바꾸면 당연히 나오는 결과다.) 또한 빛의 속력은

[math(\displaystyle \frac{1}{2}(c^2 - c_0^2) = \Phi - \Phi_0)]

과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math(\Phi/c^2)]이 매우 작다면 이는 아인슈타인의 공식 [math(c = c_0(1 + \Phi/c^2))]을 유도한다. 다만, 민코프스키 시공간은 전제 자체가 광속 불변의 원리를 기반으로 하는데, 계산 과정에서 임의로 도함수를 취하는 등 아브라함의 이론은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다음 논문에서 아브라함의 이론을 비판한 이후로, 아인슈타인과 아브라함은 상대방의 중력 이론에 대해 강렬한 비판을 주고받았다. 이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민코프스키의 시공간 거리를 보다 일반화된 개념으로 확장시키는 등 뜻밖의 수확을 남기기도 하였는데, 이는 물리적 맥락에 따른 해석은 아니었다.[23] 이 때 아브라함의 비평은 상당히 날카로워, 아인슈타인 또한 이 과정에서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한편 핀란드의 노르드스트룀(Gunnar Nordström)은 1912~1913년에 걸쳐 WEP를 반영하지만 ‘모든 점에서’ 광속 불변의 원리가 성립하는 중력이론(아인슈타인의 재해석으로는 "적당한 좌표를 선택하면")을 완성하는 데 성공한다. 이것은 WEP와 광속불변을 만족하는 유일한 중력이론이었다. 1907년 당시 아인슈타인은 계산 끝에 이것이 어렵다고 보고 EEP로 넘어가면서 광속 불변을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특수 상대성 이론과 WEP이 양립할 수 있다는 건 당시로서는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었다. 다만 아인슈타인은 광속 불변보다는 상대성 원리를 보다 근본적인 물리학 원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광속 불변을 위배하는 대신) 상대성 원리를 확장시켜주는 자신의 EEP에 충분한 확신과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이들 경쟁 이론과 끊임없이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이론을 수정해나갔고, 물론 아브라함과 노르드스트룀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브라함의 이론은 (수학적으로 불안정함에도) 수성의 근일점 문제를 당시 (완성되지 않은) 아인슈타인 이론보다 더 잘 설명하였으며, 중력파의 속력이 광속임을 예측하였다. 노르드스트룀 이론의 경우 아인슈타인이 훨씬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며 1914년에는 그의 이론을 미분 기하학의 언어로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Einstein and Fokker, 1914[24]) 이 과정에서 유도된 중력장 방정식 [math(R = kT)]은 아인슈타인의 최종 중력장 방정식과 유사하다. (아인슈타인은 이미 1913년 이와 유사한 방정식을 연구하였기에 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는 없다.)

아인슈타인은 노르드스트룀 이론을 자신의 이론에 대한 가장 유력한 경쟁자로 생각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론에서는 빛이 휘고, 노르드스트룀의 이론에서는 빛이 휘지 않으므로 자신이 제안했던 굴절 실험을 통해 (뉴턴 역학과 더불어) 승부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25]

6.1.4. 정적 중력장 이론(1912)

아인슈타인은 중력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EEP를 선택하였으며, 가장 먼저 중력에 의한 빛의 굴절을 예측하였다. 하지만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광속 불변의 원리가 동시성의 상대성이나 시간 팽창을 단편적으로 알려줄 수 있지만 관성계의 일반적인 물리적 과정을 다루기 위해 로런츠 변환이 필요하듯이, EEP를 기반으로 중력장이 놓인 관성계를 다루기 위해서 궁극적으로 가속계에 대응하는 좌표 변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물론 로런츠변환이 아니다. 로런츠변환은 광속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1905년 당시 특수 상대론을 다룰 때와 같은 방법론을 적용하여 중력장 환경에서 일어나는 좌표 변환을 구하려고 시도하였다.

1912년 2월, 아인슈타인은 1911년 논문의 후속작(『빛의 속력과 중력장의 정역학』[26])을 발표하여 정적인 [math(x)] 축 방향 중력장에 대한 좌표 변환을 유도하고, 그 안에서 시간과 공간의 기하학적 성질, 물리 방정식들의 변환을 다루었다.

[math(\begin{cases} \displaystyle \xi = x + \frac{ac}{2}t^2 \\ \eta = y \\ \zeta = z \\ \tau = ct \end{cases}​)][27]


이 좌표변환에서는 가속방향으로, 혹은 중력장 방향으로 광속 [math(c)]가 유일한 변수가 되는데[28], 그렇다면 [math(c)]가 바로 중력퍼텐셜의 역할을 할 것이다. 이 때 중력장방정식은 [math(c)]를 결정하는 단일 식이 된다. 이는 명백하게 로런츠 변환이 아닌 다른 좌표 변환이다. 따라서, (EEP가 참일 경우) 중력장이 각각의 입자보다는 좌표계의 변환에 관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논문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발견이 있었다. 첫 번째로, 아인슈타인은 등속원운동계에서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성립하지 않는다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관성계에서 봤을 때 일정한 각속도로 회전하는 원에 고정된 관찰자(등속원운동계)는, 자신의 운동방향과 수직인 원 반지름은 변하지 않지만 운동방향으로 난 원둘레는 길이수축에 의해, 관성계의 측정값에 비해 길어진 것으로 관측한다. (관성계에서는 회전하는 원둘레의 작은 조각들이 일정한 비율로 길이 수축한다고 보게 된다.) 관성계에서 원주율이 [math(\pi)]이므로, 등속원운동계에서의 원주율은 [math(\pi)]보다 커진다. 비유하자면 원뿔에서 빗변이 원의 반지름, 밑면 둘레가 원의 둘레인 상황이다. (이 경우, 원주율<[math(\pi)])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위 논문에서 등가속계의 좌표변환은 유클리드 기하학을 전제하고 얻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등속원운동계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이상, 등가속계의 경우도 사실 잘못된 전제를 바탕으로 유도된 것일 수도 있었다. 가장 단순한 가속계도 사정이 이러할진데 이후에 보다 일반적인 중력장을 다룰 시점에 이르러서는 기하학이 도대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시간은 과연 어떻게 흐를지 아인슈타인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특수 상대론에서 쓰던 “막대와 시계”로는 도저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인슈타인은 기존의 방법론을 포기하고 새로운 방법론을 찾아야 할 상황에 놓인 것이다.

두번째 발견은 다음과 같다. 기존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막스 플랑크(Max Planck)는 1906년 입자의 해밀토니안

[math(\displaystyle H = -m\sqrt{c^2 - q^2}\quad(q^2 = v_x^{\,2} + v_y^{\,2}+v_z^{\,2}))]


를 발견하였다.[29] (당시 그대로 표기이다.) 이 때, 외부 힘을 받지 않는 입자의 운동 방정식은 [math(\delta \int Hdt = 0)]으로 나타낼 수 있다. (풀면 등속 직선 운동한다는 뜻이다.) 아인슈타인 역시 자신이 구한 중력장 좌표 변환에 대한 물체들의 운동 방정식을 계산하였는데, 그 해밀토니안이 신기하게도 정확히 똑같은 형태를 가졌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줄곧 추구해온 일반 상대성 원리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보다 일반적인 중력장 상황에서도 운동 방정식을 비슷한 방식으로 기술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플랑크가 구한 방정식에서는 [math(c)]가 상수, 아인슈타인이 구한 방정식에서는 [math(c)]가 중력퍼텐셜에 따른 변수라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자신이 구한 좌표 변환이 마침 [math(c)] 이외에는 방정식을 건들지 않았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방정식의 형태상 유사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실 굉장히 운이 좋았다고도 볼 수 있는 상황이다.

한편, [math(Hdt = -m\sqrt{c^2dt^2 - dx^2 - dy^2 - dz^2}\,)]이므로 운동방정식은

[math(\displaystyle \delta \int \sqrt{c^2dt^2 - dx^2 - dy^2 - dz^2} = 0)]


으로 바꿀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학창 시절의 (가물가물해져가는) 기억 속에서 이 공식이 가우스의 곡면 이론(theory of surface)의 어떤 공식(측지선)과 유사하다는 걸 떠올렸고, 이내 중력을 휘어진 시공간으로 기술해야 한다(혹은 가우스 곡면 이론이 자신의 이론에 유용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아인슈타인은 중력이 시사하는 기하학적 의미에 접근할 수 있었고 단편적이지만 일반 상대성 원리가 적용되는 첫 방정식을 찾아냈다. 많은 성과를 얻었지만, 아직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아이디어를 일반화할 수 있는 수학을 알지 못했다.

6.1.5. Entwurf 이론(1913 -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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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그로스만
marcell grossmann, 1878~1936
1912년 8월 아인슈타인은 모교 취리히 연방 공대(ETH Zürich)의 이론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취리히로 돌아간 아인슈타인은 동료 수학자 마르셀 그로스만(marcel grossmann)을 만나 이 문제를 상의하다가, 그로부터 가우스의 곡면 이론을 바탕으로 리만(Riemann), 크리스토펠(Christoffel), 리치(Ricci), 레비치비타(Levi-Civita) 등이 발전시킨 기하학, 소위 절대 미분학(Absolute Differential Calculus)[30]을 소개받는다. 이 이론은 리치, 레비치비타가 1901년 집대성하여 발표한 최신 이론이었다.[31]
미분 기하학은 기본적으로 좌표 변환에 대해 성분이 일정한 규칙으로 변화하여 서로에 대한 선형결합이 불변량이 되는 텐서(Tensor)를 연구하며, 텐서들을 사용하면 공간에 임의로 좌표를 놓더라도 모든 좌표계에서 똑같이 얻을 수 있는 절대적인 양을 도출해낼 수 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좌표 변환에 대한) 성분의 변환 규칙성을 공변성(covariance)이라 한다. 또한, 그 안에서 리만 기하학은 공간 자체의 기하학적 성질, 즉 곡률을 미분 기하학의 방법(텐서)를 이용해 다루는 분야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중력 이론이 상대성 원리를 일반화하는 일반 상대성이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미분 기하학의 공변성은 이러한 아이디어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 비관성 좌표계에서 공간이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따른다는 이론적 판단 등을 바탕으로, 아인슈타인은 "이거다!" 싶어 그로스만을 끌어들여 리만 기하학을 바탕으로 하는 완전히 새로운 중력 이론을 구상하였다.

그간 어느 수준 이상의 고급 수학(예: 민코프스키 시공간)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던 아인슈타인은 갑자기 최첨단 수학인 리만 기하학을 배워야 할 상황에 처했고 그것을 습득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전해진다. 이후에도 (비단 아인슈타인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리만 기하학과 관련하여 여러 오개념에 시달리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요새 저는 중력 문제에 전념하고 있고, 제 한 동료 수학자의 도움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낼 수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제 생애 통틀어서 이처럼 무언가에 곤란을 느낀 적은 없었고, 수학에 깊은 경의를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수학의 매우 절묘한 부분들은 지금까지의 제 짧은 생각으로는 순전히 사치라고 여겼던 것들이었습니다! 이 문제에 비하면 본래의 상대성 이론은 아이들 장난에 불과합니다.
아인슈타인이 조머펠트(Arnold Sommerfeld)에게 쓴 편지(1912년 10월 29일)의 일부 #
파일:002957_02.jpg
『일반화된 상대성 이론과
중력 이론의 초안』

1913년 발표된 『일반화된 상대성 이론과 중력 이론의 초안』[32] 혹은 아인슈타인-그로스만 이론(Einstein - Grossmann theory)은 리만 기하학이 접목된 첫 번째 일반 상대성 이론 논문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논문은 두 파트로 나누어져 있으며, 첫 번째 파트는 아인슈타인이 서술한 물리학적 내용이고, 두 번째 파트는 그로스만이 서술한 순수 리만 기하학 내용이다. 이는 리만 기하학이 물리학자들에게 생소할 것을 고려한 부분이다.

새로운 중력 이론의 기본적인 개념은 다음과 같다.

(1) 4차원 시공간을 도입하며 물리적 과정을 표현하기 위한 좌표계는 이 안에서 자유롭게 잡을 수 있다.

(2) 모든 물리량은 텐서로 표현된다.

(3) 중력장은 메트릭 (대칭) 텐서(Metric tensor) [math(\boldsymbol{g_{\mu\nu}})]의 10개의 성분으로 표현된다.

이미 민코프스키는 특수 상대성 이론을 두 점 사이의 거리가

[math(d\tau^2 = c^2dt^2 - dx^2 - dy^2 - dz^2)]


으로 표현되는 가상의 4차원 공간 위에서 다룰 수 있음을 보였다. 중력이 있는 경우에도, EEP에 의하면 적어도 각각의 점 근방에서는 적당한 좌표를 선택하여 (자유 낙하 좌표계) 특수 상대성 이론이 성립하도록 할 수 있으므로 각각의 점에서 적당한 좌표를 잡으면 두 점 사이의 거리가 위와 같이 표현되는 4차원 시공간을 도입한다.

1912년 논문의 회전하는 원판이 보여주듯, 일반적인 중력장을 다룰 때에는 시간과 공간의 성질을 (관성계에서처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다. 시간의 흐름은 각각의 점에서 달라지며 공간은 비유클리드 기하를 따른다. 따라서 특정 운동상태에 대응되는 좌표계를 굳이 구하지 않고 4차원 시공간 위에 자유롭게 4차원 좌표를 잡을 수 있도록 한다. 이 때, 좌표의 물리적 의미는 각 점에서 측정의 기준이 되는 좌표계, 즉 관성계와의 변환 관계로 결정된다.

또한 텐서의 선형결합은 좌표변환에 대한 불변량을 만드며, 이들을 조합한 물리 방정식을 만들 경우 그 표현은 (좌표 변환에 대하여) 고정되므로 일반 상대성 원리의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예를 들어, 물질 과정을 나타내는 물리량은 (반변) 텐서 [math(\displaystyle \Theta^{\mu\nu} = \rho \frac{dx^{\mu}}{d\tau}\frac{dx^{\nu}}{d\tau})]로 표현된다. 이 텐서는 Minkowski(1907), Abraham(1909), Laue(1911) 등이 도입하였다. wikiversity

이 논문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메트릭 텐서[33]의 도입이다. 메트릭 텐서는 각 공간에서 정의되어 두 벡터의 내적을 계산해주는 연산자이며, 공간의 기하학적 성질을 규명하는 핵심 열쇠이다. 민코프스키가 도입했던 시공간 거리는 특수한 메트릭 텐서로 다시 표현할 수 있다. 즉, 시공간 거리

[math(d\tau^2 = c^2dt^2 - dx^2 - dy^2 - dz^2)]


[math(\displaystyle (\eta_{\mu\nu}) = \begin{pmatrix} c^2&0&0&0 \\ 0&-1&0&0 \\ 0&0&-1&0 \\ 0&0&0&-1 \end{pmatrix})]


에 대하여 [math(d\tau^2 = \sum_{\mu\nu}\eta_{\mu\nu}dx^{\mu}dx^{\nu})] 라 표현할 수 있다. 이제 일반적인 좌표변환을 고려하면 [math(\eta_{\mu\nu})]는 (민코프스키 메트릭을 기준으로)

[math(\displaystyle (g_{\mu\nu}) = \begin{pmatrix} g_{00}&g_{01}&g_{02}&g_{03} \\ g_{10}&g_{11}&g_{12}&g_{13} \\ g_{20}&g_{21}&g_{22}&g_{23} \\ g_{30}&g_{31}&g_{32}&g_{33} \end{pmatrix})]


로 일반화되어야 한다([math(d\tau^2 = \sum_{\mu\nu}g_{\mu\nu}dx^{\mu}dx^{\nu})]). 이 때, EEP를 고려하면 [math(g_{\mu\nu})] 각각의 성분은 중력장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이 영감을 얻었던 특수 상대성 이론의 운동 방정식

[math(\displaystyle \delta \int \sqrt{c^2dt^2 - dx^2 - dy^2 - dz^2} = 0)]


은, [math(c)]가 변수인 경우에도 동일한 표현을 갖는다. 이제 일반적인 좌표 변환을 가정하면 이 식은

[math(\begin{cases} \displaystyle \delta \left\{\int ds \right\} = 0 \\ \\ \displaystyle ds^2 = \sum_{\mu\nu} g_{\mu\nu}dx^{\mu}dx^{\nu} \end{cases}​)]


로 일반화되며, 이러한 일반적인 좌표계에서 자유 입자는 등속 직선 운동이 아닌 곡선 운동을 한다. 각 좌표계에 대한 운동 궤적을 지정하는 것은 좌표계에 따라 달라지는 메트릭 텐서의 성분 [math(g_{\mu\nu})]이며, EEP에서는 좌표계의 운동 상태가 바로 중력장과 대응되므로, 10개의 [math(g_{\mu\nu})]는 중력장을 정의한다.

마지막으로, 어떤 중력 이론이 완성되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물질에 의해 중력장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결정하는 중력장 방정식이 필요하다. 이 논문은 새로운 중력장 방정식이 어떤 형태를 띠어야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잘 제시하고 있다. 즉,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른 중력장 방정식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함을 명시하였다.
(1) [math(g_{\mu\nu})]를 결정한다.
(2) 푸아송 방정식 [math(\nabla^2 \phi = 4\pi G\rho)]를 일반화한다.
(3) 즉, [math(g_{\mu\nu})]의 미분 연산자로부터 얻어지는 2차 텐서 [math(\Gamma_{\mu\nu})]에 대하여

[math(k\cdot\Theta_{\mu\nu} = \Gamma_{\mu\nu})]
란 형태를 띠어야 한다. (푸아송 방정식의 형태를 감안하면 2차 미분방정식이어야 한다.)

이 때, 메트릭 텐서의 미분으로 이루어진 텐서는 공간의 곡률을 표현하므로 중력이 시공간의 곡률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제시된 추론은 모두 적절하고, 실제로 최종 방정식과 유사한 식을 이 때 이미 발견하고 연구하였으나 뉴턴 중력의 유도에 실패하였으며, 아인슈타인과 그로스만은 올바른 방정식이 아니라 판단하여 그 방정식을 제외하였다. 아인슈타인은 이후 구멍 논변(Hole argument)이라는 것을 도입하여 중력장 방정식이 완전한 공변성을 가질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는, 공변성을 선형 변환으로 제한하여 중력장 방정식을 제시하였다. 이 때의 중력장 방정식은 선형 변환에 대해 불변인 스칼라를 한정한 후 그것을 변분하여 유도한 것이었다. 이 때의 과도기적 이론을 논문의 이름을 따 Entwurf 이론(초안 이론)이라고 부른다. Entwurf 이론이 현재의 일반 상대성 이론과 다른 구체적인 점은 Entwurf 이론 문서 참고.

6.1.6. 중력장 방정식(1915)

Entwurf 이론은 일반 상대성 이론의 수학적 기초의 대부분을 이미 제시하고 있지만 중력장 방정식에 한해서는 문제가 많았다. 아인슈타인이 이것을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1915년 3월 미분 기하학을 정리한 수학자 레비치비타(Levi-civita)가 아인슈타인에게 편지를 보내 중력장 방정식의 수학적 오류를 지목했을 때에는 자신의 방정식을 최대한 방어하려 하였다. 이후 여름(6월 28일 ~ 7월 5일)에는 괴팅겐 대학의 수학자 다비드 힐베르트(David Hilbert, 1862~1943)의 초빙으로 Entwurf 이론을 수학자들에게 강의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아인슈타인은 힐베르트와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대면을 가졌고, 괴팅겐의 학풍 또한 자신이 있는 베를린보다 낫다며 치켜세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몇 개월 후 아인슈타인은 중력장 방정식의 오류를 하나둘 알아채고 방정식에 대한 확신을 잃어갔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기존 중력장 방정식이 잘못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915년 11월 28일 Alnord Sommerfeld에게 쓴 편지의 일부. #) 각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Entwurf 이론 참고.
  • 중력장 방정식은 일정하게 회전하는 좌표계를 허용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이 미분 기하학을 도입하는 계기를 제공한 회전 원판 좌표계( 정적 중력장 이론 문단 참고)가 자신의 이론에 맞지 않은 것이다.
  • 수성의 근일점 이동을 측정값인 100년에 45″가 아닌 18″로 예측했다.
  • 방정식을 유도하는 라그랑지언을 특정했던 조건에 오류가 있었다. 이 때문에 중력장 방정식은 근거를 잃어버렸다.

결국 2년 정도 유지했던 중력장 방정식을 통째로 버린 아인슈타인은 10월 하순부터 본격적으로 새로운 방정식을 준비한다. 사실, 이 방정식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그로스만과 연구할 때 이미 연구했던 방정식으로 수학적으로 가장 직관적인 리만 텐서를 기반으로 얻은 것이었다. 하지만, 둘은 당시 이 방정식이 뉴턴 이론을 유도하지 못하고 에너지 보존법칙을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여겨 마지못해 포기했었다.

1915년 11월, 아인슈타인은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Prussian Academy of Sciences) 정기 회의에 나와 (정회원이었다.) 1주에 한번씩 총 4차례(4/11/18/25일)에 걸쳐서 논문을 제출하면서 강의를 병행했다. 그의 방정식은 논문이 나올 때마다 수정되었으며 동료들이 (사실, 스스로도) 흐름을 따라가기 버거워할 정도로 아인슈타인은 정신없이 이론의 완성에 매진했다. 힐베르트와의 일화를 보면 알겠지만 그는 일종의 경쟁 상황에 처해있었다. 각 주차의 강의(논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최근 몇 해 동안 나는 상대성 원리가 균일하지 않은 운동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전제로 일반 상대성 이론의 기초를 세우는 데에 집중하였다. 나는 합리적으로 표현된 일반 상대성 원리를 만족시키는 유일한 중력 법칙을 찾았다고 믿었으며, 이 해법이 정확하다는 사실을 작년 "Sitzungsberichte"[34] 에 제출한 논문[Einstein(1914)]에서 보이려고 하였다.
새로운 비판을 통해, 나는 이 사실을 제시되었던 방법으로 일절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게 그렇게 보인 것은 잘못된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나는 내가 유도했던 장 방정식에 대한 믿음을 잃었으며, 가능성을 제한할 수 있는 보다 자연스러운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는 장 방정식이 보다 일반적인 공변성을 가져야 한다는 요구로 되돌아왔으며, 이는 3년 전 내 친구 그로스만과 함께 작업하였을 때 무거운 마음으로 포기한 것이었다. 사실, 우리는 그 때 이 문제의 해법에 거의 가까웠으며, 이는 다음에 제시될 것이다.
(...) 이를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 매력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가우스, 리만, 리치, 레비치비타가 세운 일반미분학(절대미분학)의 진정한 승리를 선언하기 때문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하여" 서문
1주차 - Zur Allgemeinen Relativitätstheorie (1915.11.04)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하여>
[36]

아인슈타인의 1주차 강연(논문)은 Entwurf 이론의 방정식을 포기하고 보다 일반적인 공변성을 다시 가정하겠다는 선언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논문은 보통 아인슈타인이 물리적 접근법을 버리고 수학적 접근법을 취한 결과로 해석되나, 최근 연구에서는 11월의 수정 또한 Entwurf 이론의 연장선에서 봐야한다고 지적했다. 즉, 아인슈타인은 일관적으로 물리적 접근법에 우위를 두어 일반 상대성 이론을 완성시켰다.[Renn(2007)] <Zurich Notebook>을 통해, 이 논문의 내용은 3년 전 아인슈타인과 그로스만이 처음 연구했던 내용을 거의 그대로 갖고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내용을 이제 되살릴 수 있었던 건 아인슈타인이 중력장의 정의를 보다 자연스럽게 바꾸면서부터다.

[ 자세한 내용 ]

Entwurf 이론의 내용을 보고 오는 것이 좋다. 이 논문이 제시하는 변화 요소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1) 좌표 공변성 범위 변경. (선형 변환 => Unimodular 변환)
2) 중력장 정의의 변경
3) 중력장 방정식의 변경
(1) 좌표 공변성 범위

아인슈타인은 중력장 방정식의 공변성에 제한을 가할 (구멍논변으로 대표되는) 물리적 정당성이 없다는 것을 대체로 깨달은 것으로 보이나, 그럼에도 좌표 제한 자체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먼저 새로운 좌표 제한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좌표 변환 행렬의 행렬식이 [math(1)]이므로 다양한 양이 스칼라가 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math(\sqrt{-g})]가 스칼라가 된다는 것이다. 미소 부피 [math(d\tau)]는 그 자체로 스칼라이며 [math(\displaystyle \Gamma^{s}_{s\tau} = \frac{1}{2}g^{s\alpha}\frac{\partial g_{s\alpha}}{\partial x^{t}} = \frac{\partial(\ln \sqrt{-g})}{\partial x^{t}})]는 공변벡터이다. 그리고 텐서 밀도 [math(\mathfrak{T}_{\mu\nu})]는 그냥 [math(T_{\mu\nu})]로 쓰면 된다. ([math(\sqrt{-g})]를 곱할 필요가 없다.)

(2) 중력장의 정의

아인슈타인은 Entwurf 이론에서 물질이 중력에 대하여 받는 영향을 표현하기 위해 텐서 밀도를 이용하여

[math(\displaystyle \frac{\partial \mathfrak{T}^{\nu}_{\sigma}}{\partial x^{\nu}} = \frac{1}{2}g^{\tau\mu}\frac{\partial g_{\mu\nu}}{\partial x^{\sigma}}\mathfrak{T}^{\nu}_{\tau})]


를 유도하고, [math(\displaystyle \Gamma^{\tau}_{\sigma\nu} = \frac{1}{2}g^{\tau\mu}\frac{\partial g_{\mu\nu}}{\partial x^{\sigma}})]를 중력장의 성분이라 하였다. 아인슈타인은 이 선택을 "치명적인 편견"(verhängnisvolles Vorurteil)이었다고 표현하고는, 중력장의 정의를 바꾸어

[math(\displaystyle \Gamma^{\tau}_{\sigma\nu} = -\begin{Bmatrix} \sigma\nu \\ \tau \end{Bmatrix})]


라 두었다. 우변의 기호는 지금의 크리스토펠 기호이다. 음수 부호를 붙인 이유는, 측지선 방정식을

[math(\displaystyle \frac{d^2x^{\tau}}{ds^2} = \Gamma^{\tau}_{\mu\nu}\frac{dx^{\mu}}{ds}\frac{dx^{\nu}}{ds})]


와 같이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문단에서는 계속 아인슈타인의 표기를 존중하여 음수 부호를 붙일 것이므로 유의한다. 이러한 정의는, 중력과 미분 기하학의 연결을 매우 간단하게 만들어주었다. 새로운 중력장의 정의는 다음과 같이 물질에 대한 중력장의 영향을 일괄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

[math(\displaystyle \frac{d^2x^{\tau}}{ds^2} = \Gamma^{\tau}_{\mu\nu}\frac{dx^{\mu}}{ds}\frac{dx^{\nu}}{ds})]

[math(\displaystyle \frac{\partial T^{\alpha}_{\sigma}}{\partial x^{\alpha}} = -\Gamma^{\alpha}_{\sigma\beta}T^{\beta}_{\alpha})]


(3) 중력장 방정식

가장 획기적인 변화는 중력장 방정식에 있다. Entwurf 이론에서, 그리고 11월 논문에서 장방정식을 유도하는 라그랑지언은 중력장의 제곱이라는 기본 구조를 따라간다.(이는 맥스웰 방정식의 라그랑지언과 같은 구조이다.) 그러나 결과적인 방정식은 중력장 정의가 바뀌면서 완전히 달라진다. 이 방정식은 아인슈타인이 처음에 그로스만과 연구했던 식과 정확히 똑같았다.

구체적으로 지금의 리치텐서 [math(G_{im})]은

[math(G_{im} = R_{im} + S_{im})]

[math(\displaystyle R_{im} = \frac{\partial \Gamma^{l}_{im}}{\partial x^l} + \Gamma^{\rho}_{il}\Gamma^{l}_{\rho m},\quad S_{im} = - \frac{\partial \Gamma^{l}_{il}}{\partial x^m} - \Gamma^{\rho}_{im}\Gamma^{l}_{\rho l})]


인데, 여기에서 [math(\displaystyle \Gamma^{i}_{il})]이 공변 벡터이므로 [math(S_{im} = -\nabla_{m}\Gamma^{l}_{il})]이며, (아인슈타인이 한정한 좌표범위에서) 텐서이다. 따라서 [math(R_{im})] 또한 텐서이므로 이와 같이 방정식을 세울 수 있다.

[math(\displaystyle R_{\mu\nu} = \frac{\partial \Gamma^{l}_{\mu\nu}}{\partial x^l} + \Gamma^{\rho}_{\mu l}\Gamma^{l}_{\rho \nu} = -\varkappa \,T_{\mu\nu})]


이는 실제로 새로운 라그랑지언 [math(\mathfrak{L} = g^{\sigma\tau}\Gamma^{\alpha}_{\sigma\beta}\Gamma^{\beta}_{\tau\alpha})]로부터 그대로 유도되는 방정식이다. 변분법 [math(\int \mathfrak{L}d\tau = 0)]에

[math(\displaystyle \frac{\partial\mathfrak{L}}{\partial g^{\mu\nu}} = -\Gamma^{\alpha}_{\mu\beta}\Gamma^{\beta}_{\nu\alpha})]

[math(\displaystyle \frac{\partial\mathfrak{L}}{\partial g^{\mu\nu}_{,\alpha}} = \Gamma^{\alpha}_{\mu\nu})]


에 오일러-라그랑주 방정식을 적용하면 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드디어 그로스만과의 연구 초기에 검토했던 리만 텐서(리치 텐서)를 되살렸다. 이 방정식은 최종 형태에 매우 근접하며 뉴턴 법칙을 잘 유도하지만, Entwurf 이론의 망령이 아직까지는 살아 있었다. 이 때도 여전히 중력장 방정식이 먼저 결정된 후, 에너지 보존법칙은 방정식의 공변성을 제한하는 역할로 쓰인 것이다.

Entwurf 이론에서의 방식대로 에너지 보존법칙 [math(\displaystyle \frac{\partial T^{\alpha}_{\sigma}}{\partial x^{\nu}} = -\Gamma^{\alpha}_{\sigma\beta}T^{\beta}_{\alpha})]을 새로운 중력장 방정식에 적용하면

[math(\displaystyle \frac{\partial^2g^{\alpha\beta}}{\partial x^{\alpha}\partial x^{\beta}} - g^{\sigma\tau}\Gamma^{\alpha}_{\sigma\beta}\Gamma^{\beta}_{\tau\alpha} = 0)]

[math(\displaystyle \frac{\partial}{\partial x^{\alpha}}\left(g^{\alpha\beta} \frac{\partial(\ln \sqrt{-g}\,)}{\partial x^{\beta}}\right) = - \varkappa\,T^{\sigma}_{\sigma})]


을 얻는다. 첫번째 식으로부터 [math(g_{\mu\nu})]에 관한 좌표 조건을 얻고, 특히 두 번째 식으로부터 [math(\sqrt{-g} = 1)]이 되도록 놓을 수 없다는 결론을 얻는다. ([math(T^{\sigma}_{\sigma} ≠ 0)]이기 때문이다.) 이 때, [math(S_{\mu\nu} = 0)]이라고 둘 수도 없으므로 [math(G_{\mu\nu} ≠ R_{\mu\nu})]이다. 따라서, 이 때의 방정식은 일반 공변성을 갖지 못한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Entwurf 11월 4일
중력장 [math(\displaystyle \Gamma^{\tau}_{\sigma\nu} = \frac{1}{2}g^{\tau\mu}\frac{\partial g_{\mu\nu}}{\partial x^{\sigma}})] [math(\displaystyle \Gamma^{\tau}_{\sigma\nu} = -\begin{Bmatrix} \sigma\nu \\ \tau \end{Bmatrix})]
라그랑지언 [math(\displaystyle \mathfrak{L} = \frac{1}{4}g^{\alpha\beta}\frac{\partial g_{\tau\sigma}}{\partial x^{\alpha}}\frac{\partial g^{\tau\sigma}}{\partial x^{\beta}})] [math(\mathfrak{L} = g^{\sigma\tau}\Gamma^{\alpha}_{\sigma\beta}\Gamma^{\beta}_{\tau\alpha})]
방정식 [math(\displaystyle \frac{\partial}{\partial x^{\alpha}}(\sqrt{-g}g^{\alpha\beta}\Gamma^{\nu}_{\sigma\beta}) = -k(\mathfrak{T}^{\nu}_{\sigma} + \mathfrak{t}^{\nu}_{\sigma}))] [math(\displaystyle R_{\mu\nu} = \frac{\partial \Gamma^{l}_{\mu\nu}}{\partial x^l} + \Gamma^{\rho}_{\mu l}\Gamma^{l}_{\rho \nu} = -\varkappa \,T_{\mu\nu})]
좌표 제한 [math(\displaystyle \frac{\partial^2}{\partial x^{\nu}\partial x^{\alpha}}(\sqrt{-g}g^{\alpha\beta}\Gamma^{\nu}_{\sigma\beta}) = 0)] [math(\displaystyle \frac{\partial}{\partial x^{\alpha}}\left(g^{\alpha\beta} \frac{\partial(\ln \sqrt{-g}\,)}{\partial x^{\beta}}\right) = - \varkappa\,T^{\sigma}_{\sigma})]

요약하자면, Entwurf 이론에서처럼 이 때에도 에너지 보존법칙은 중력장 방정식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좌표 선택에 제한을 하게 된다. 물론 장방정식도 현재의 아인슈타인 방정식과 약간 다르다. 이 사실은 중력장 방정식에 관한 전체적 구조에 있어서 아인슈타인이 Entwurf 이론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아인슈타인은 좌표 공변성의 제한에 정당한 의미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2주차에 (과도기적인) 과격한 가정을 함으로써 이 틀을 깨버린다.

2주차 - Zur Allgemeinen Relativitätstheorie (Nachtrag) (1915.11.11)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하여(추가)>
[38]

1주차 강연이 끝난 직후 아인슈타인은 그 사이에 떠올린 아이디어를 2주차 강의에 급하게 끼워넣었다. 그 아이디어는 바로 자신의 방정식이 일반 공변성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만드는 방편이었다. 요약하자면, [math(T = \sum_{\mu\nu} g^{\mu\nu}T_{\mu\nu} = 0)]이라는 조건을 추가하면 된다.

[ 자세한 내용 ]
1주차의 마지막 조건 방정식

[math(\displaystyle \frac{\partial^2g^{\alpha\beta}}{\partial x^{\alpha}\partial x^{\beta}} - g^{\sigma\tau}\Gamma^{\alpha}_{\sigma\beta}\Gamma^{\beta}_{\tau\alpha} = 0)]

[math(\displaystyle \frac{\partial}{\partial x^{\alpha}}\left(g^{\alpha\beta} \frac{\partial(\ln \sqrt{-g}\,)}{\partial x^{\beta}}\right) = - \varkappa\,T^{\sigma}_{\sigma})]


에서부터 시작한다. 원래는 [math(T ≠ 0)]이었으므로 두 번째 식에 의해 [math(\sqrt{-g} = 1)]이라 둘 수 없다. 하지만 [math(T = 0)]이라면, 즉 물질이 아예 없는 진공이나, 전자기장에만 한정한다면 그것이 가능해진다. 이 때 중요한 것은 [math(G_{\mu\nu} = R_{\mu\nu} + S_{\mu\nu})]에서 [math(S_{\mu\nu})]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즉

[math(\displaystyle G_{\mu\nu} = R_{\mu\nu} + S_{\mu\nu} = -\varkappa\,T_{\mu\nu})]


라 놓고, [math(\sqrt{-g} = 1)]이라는 조건을 걸면 [math(S_{\mu\nu} = 0)]이므로 1주차에서 얻은 방정식이 유도된다. 따라서, [math(\sqrt{-g} = 1)]이라는 조건 하에 (1주차의) 중력장 방정식은 완전히 일반 공변적인 방정식과 같다.

아인슈타인은 이 때부터 좌표 조건을 좌표 변환 행렬식이 1인 것으로부터 [math(\sqrt{-g}=1)]로 바꾸었다. 이는 특수 상대성 이론의 로런츠 변환이나 Entwurf 이론의 선형 변환, 그리고 직전의 변환 조건처럼 좌표 변환에 의존한 좌표 조건이 아니다. 또한, 이 조건은 1주차 때처럼 수학적으로 강제되는 조건이 아니며, 완전히 편의상의 이유로만 선택되는 속성의 것이었다. [math(\sqrt{-g} = 1)]은 1916년 전반기까지 아인슈타인의 좌표 조건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처음으로 "완전히" 공변적인 방정식, 혹은 그 방법론(완전 공변 방정식을 세운 후 [math(\sqrt{-g} = 1)]로 좌표 제한)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일반 공변성을 완전히 확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math(T=0)]이라는 부가 조건을 필요로 했다. 실제로, 이 조건은 진공 상태에 전자기장만 있는 경우에만 성립하고, 물질이 있는 경우는 고려할 수가 없다. 이 경우, 푸아송 방정식의 밀도와 에너지 텐서를 대응시킬 수가 없어 비례 상수 [math(\varkappa)]를 계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 조건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 원리가 물질에 가하는 조건이 아닐까 하는 과격한 가설을 제안하였고 실제로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2주 뒤 이 가설은 흐지부지되었다.

이처럼, 아인슈타인은 최초로 자신의 이론에서 일반 공변 방정식을 찾아내고, 이는 이후 일반 공변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구하여 이 방정식을 뛰어넘는 원동력이 되었다. 어쨌거나 [math(T = 0)]은 매우 제한적인 조건이었고, 방정식은 여전히 현재의 것과 달랐다.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서 아인슈타인에게는 보다 많은 고민과 계산이 필요하였다.

3주차 - Erklärung der Perihelbewegung des Merkur aus der allgemeinen Relativitätstheorie (1915.11.18)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른 수성 근일점 운동의 설명>
[39]

이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1주차에 얻은 중력장 방정식에 적절한 근사를 적용하여 0차 근사로 특수 상대성 이론(민코프스키 시공간), 1차 근사로 뉴턴의 중력 공식과 빛의 굴절량을 설명하였으며 2차 근사로 수성의 근일점 운동을 설명하였다. 빛의 굴절량은 이 때 기존의 [math(0.85'')]에서 [math(1.7'')], 즉 두 배로 수정되었으며 수성의 근일점 운동량은 [math(43'')]로 계산되었다. 방정식의 이러한 구조는 일반 상대성 이론이

(1) 특수 상대성 이론과 뉴턴 중력 법칙을 특수한 경우로 포함하며
(2) 수성의 근일점 운동을 뉴턴 이론보다 정확하게 설명한다

는 것을 보여준다. 이 방정식은 비록 완성된 형태는 아니지만 Entwurf 이론보다 훨씬 중력 법칙을 잘 설명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며, 특히 당대 중력 이론의 숙제였던 수성의 근일점 문제를 처음으로 해결하여 노르드스트룀/아브라함의 이론 등 당대의 경쟁이론에 대한 분명한 강점을 보여주었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여러 Ad hoc에 가까운 조건을 걸어가면서 방정식을 유지했던 이유를 잘 보여준다. 이 성과로 인해, 일반 상대성 이론은 주변 물리학자들의 관심을 더욱 크게 끌 수 있었으며 카를 슈바르츠실트 역시 이 논문에 영향을 받아 슈바르츠실트 해를 계산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4주차 - Die Feldgleichungen der Gravitation (1915.11.25)
<중력의 장방정식>
[40]

드디어, 아인슈타인은 최종적인 중력장 방정식을 발표하였다. 이 방정식은 기존에 제안된 방정식들과 달리 에너지 보존법칙과 충돌하지 않아 추가적인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수학적으로 완전한 일반 공변성을 얻을 수 있었다. 3주차에서는 진공 조건에 국한되어 방정식이 사용되었으며 수정된 방정식은 진공 조건에서는

[math(G_{im} = 0)]


이 되어 기존 방정식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3주차의 결론은 이 논문으로 영향을 받지 않았다.

[math(G_{im} = -\varkappa \left( T_{\,im} - \dfrac{1}{2} g_{im} T \right))]


이 식은 현재의 중력장 방정식과 동치이다.

이처럼 중력장 방정식의 형태를 완성시키는 것을 마지막으로, 4주간 이루어진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 강연은 마무리되었다. 동시에 아인슈타인은 2주차에 세웠던 가설, 즉 일반 상대성 원리가 특수 상대성 이론으로 구축된 물질 세계에 새로운 법칙을 부여한다는 추측을 포기하고 일반 상대성 원리는 특수 상대성 이론에 아무런 제약을 가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으로, 우리는 드디어 일반 상대성 이론의 논리적 구조를 완성하였다. 가장 일반화된 형태의 상대성 원리(시공간 좌표계를 물리적으로 무의미한 매개변수로 만든다.)는 매우 특징적인 중력이론에 대한 설득력 있는 요구로 이어지며, 이는 수성의 근일점 이동 역시 설명할 수 있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중력의 장방정식" 맺음말

아인슈타인이 8년 간 자신의 이론을 완성하는 동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차세대 중력 이론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아브라함과 노르드스트룀, 4차원 시공간의 존재를 처음 깨달은 민코프스키, 리만 기하학을 구축한 가우스, 리만, 크리스토펠, 리치, 레비치비타와 리만 기하학을 아인슈타인에게 소개하고 Entwurf 이론을 같이 구축한 그로스만, 이론의 물리적 타당도의 기준이 된 수성의 근일점 이동 계산을 도와준 베소, 그리고 모든 중력 이론의 기준이 되는 뉴턴까지. 물론 양자역학의 경우와는 크게 다르다. 아인슈타인은 이 거대한 팀워크의 강력한 리더 역할을 맡았고, 아인슈타인의 지성은 이 막중한 역할을 완벽히 해내기에 충분했다. 아인슈타인은 주변의 비판에도 최대한 열린 자세로 임하여 자신의 이론을 언제든 수정할 자세 또한 되어 있었다. 이러한 모든 요소가 합쳐져서 일반 상대성 이론이라는 거대한 건축물이 완성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수학적으로 명료할 뿐만 아니라, 고전 역학의 문제(수성의 근일점 현상)를 너무나도 깔끔하게 해결하였다. 몇 달동안 아인슈타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기쁜 감정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이 이론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답다"(Die Theorie ist von unvergleichlicher Schönheit) (To Heinrich Zangger, 1915.11.26 #)
"지난 한달은 생애 가장 자극적이면서도 힘든 시간이었으나, 가장 성공적인 시간이었다"(Aber ich hatte im letzten Monat eine der aufregendsten, anstrengendsten Zeiten meines Lebens, allerdings auch der erfolgreichsten.) (To Alnord Sommerfeld, 1915.11.28 #)
"'일반 공변성'이라는 가장 대담한 꿈이 실현되었다"(Die kühnsten Träume sind nun in Erfüllung gegangen. Allgemeine Kovarianz.) (To Michele Besso, 1915.12.10 #)

하지만 일반 상대성 이론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선 아인슈타인은 가장 가까운 주변 동료들에게 자신의 최종적인 장방정식이 일반 공변적임을 다시 설득시켜야 했다. Entwurf 방정식은 베를린에서 큰 지지를 받지 못했고, 11월을 거쳐 완전히 새롭게 탄생한 장방정식 또한 처음에는 가장 가까운 동료였던 로런츠와 에런페스트의 의구심을 해결해주지 못했다. 아인슈타인과 로런츠, 에런페스트는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장방정식이 일반 상대성의 요구에 맞는지 철저한 검증에 들어갔고(장방정식을 유도하는 라그랑지언의 탐색), 그 결과 1월이 다 끝날때 쯤에서야 그들은 아인슈타인의 장방정식을 인정하게 된다. #
이론은 매우 선명하고 훌륭하네. 로런츠, 에런페스트, 플랑크, 보른이 확실한 지지자들이야. 힐베르트도 마찬가지로. #
오토 슈테른(Otto Stern)에게 쓴 편지, 1916년 2월 15일

아인슈타인은 이 때의 결과를 포함하여, 물리학 연보에 『일반 상대성 이론의 기초』(Die Grundlage der allgemeinen Relativitätstheorie)[Einstein(1916a)]란 이름의 새로운 리뷰 논문을 제출하였다. 여기에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과 그 기여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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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상대성 이론의 기초』
다음의 이론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상대성 이론"이라 불리는 이론의 가장 광범위한 일반화를 이룬다. 나는 후자를 (전자와 구별하여) "특수 상대성 이론"이라 부를 것이다. 이 이론은 잘 알려져 있으리라 생각한다. 상대성 이론의 일반화는 상당부분 공간 좌표와 시간 좌표의 형식적 동등성을 처음 인지한 수학자인 민코프스키에 의해 가능했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 필요한 수학적 도구는 이미 "절대 미분학"(absoluten Differentialkalkül)에 구비되어 있었다. 이 학문은 가우스, 리만, 크리스토펠의 비유클리드 다양체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리치와 레비치비타가 체계화한 것으로, 이미 이론 물리학의 문제들에 활용되어 왔었다. 이 논문의 B 파트에서 나는 필요한 모든 수학적 도구를 소개하였고, 최대한 간단하고 명료하게 제시하여 이 논문을 이해하기 위해 특별한 수학 문헌 공부가 필요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마지막으로, 내 친구, 수학자 그로스만에게 감사하고 싶다. 그는 내가 적절한 수학 문헌을 공부하는 수고를 덜어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중력장 방정식을 찾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아인슈타인(1916), 『일반 상대성 이론의 기초』(Die Grundlage der allgemeinen Relativitätstheorie) 서문

이 책은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교과서로 보면 된다. 이론을 만든 아인슈타인 본인의 본래 의도를 엿볼 수 있으며 아인슈타인답게 이해하기 쉽고 철학적인 내용과 섞여 "재밌게" 쓰여있어서 참고할 만하다. 다만 논란이 되는 마흐의 원리나 잘못된 액션 등 당시까지 아직 교정되지 않은 오류가 몇 군데 있다. 구성은 다음과 같다.
(A) 상대성 원리에 대한 인식론적 고찰과 그 일반화, 공간의 비유클리드성, 공변성의 의미, 물질 분포가 관성을 결정한다는 마흐의 원리 등 물리-철학적 내용
(B) 리만 기하학의 전반적인 소개
(C) 리만 기하학을 바탕으로 한 중력장 이론
(D) 완전 유체, 전자기력 등 물질 현상에 관한 이론
(E) 중력 현상에의 적용(뉴턴 이론, 빛의 굴절, 수성의 근일점 이동)

6.1.7. 힐베르트 액션(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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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트 힐베르트
David Hilbert, 1862~1943
한편, 아인슈타인이 중력장 방정식을 완성한 시점과 거의 같은 시기에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대한 변분법적 체계를 제시하여 일반 상대성 이론의 수학적 구조가 완결성을 띠는 데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수학자 힐베르트는 괴팅겐 대학의 대표 수학자로서 기하학의 공리화에 공헌하였으며, 물리학의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1915년 여름 아인슈타인의 1914년 논문[Einstein(1914)]을 읽고는 강한 흥미를 느껴 아인슈타인에게 괴팅겐 대학에서 그의 이론에 대해 전반적인 강연을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힐베르트와 괴팅겐 학파는 이 때 처음으로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을 접했고, 그들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분위기로 헤어진 아인슈타인과 힐베르트는 이내 중력장 방정식에서 몇 가지 오류를 (아마 독립적으로?) 발견했고, 각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중력장 방정식을 수정하려 하였다. 아인슈타인의 장방정식이 11월 25일 발표되었다면, 힐베르트의 장방정식은 11월 20일 "물리학의 기초"(Die Grundlagen der Physik)라는 이름의 논문으로 발표되었다.[43] 두 이론의 접근 방법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이 중력에 관한 이론임을 무엇보다 우선시했고, 자신의 이론 체계가 실제로 중력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구체적인 중력장 방정식을 도입하고, 그것을 푸는 방법에 집중하였다. 그의 네 차례 논문 중 가장 중요한 대목은 자신의 이론이 특수 상대성 이론과 뉴턴의 중력 법칙을 일반화하며, 수성의 근일점 운동을 해결한다는 것이었다. 중력장 방정식의 완성도 분명 중요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스스로 지적했듯 중력장 방정식의 수정은 중력 문제에 대한 접근법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한편, 아인슈타인은 11월 4일 강연에서 자신의 이론의 라그랑지언을 다음 형태로 제안하였다.

[math(\mathfrak{L} = g^{\sigma\tau}\Gamma^{\alpha}_{\sigma\beta}\Gamma^{\beta}_{\tau\alpha})]

[math(\displaystyle I = \int(\mathfrak{L} - kg^{\mu\nu}T_{\mu\nu})d\tau)]


여기서 [math(d\tau = \mathrm{d}^4x)]이고, [math(\sqrt{-g})]는 좌표 변환 행렬식을 [math(1)]이라 두어 숨겨져 있다. 중력항 라그랑지언을 먼저 살펴보자. 아인슈타인은 당시 공변성을 한정한 상태에서 라그랑지언을 도입하였고 방정식이 완성된 형태와 달랐다. 이러한 선택에 대해서는, 이 라그랑지언은 맥스웰 방정식의 라그랑지언(장의 제곱)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며 두번째로 일반적인 라그랑지언이 변분하는 함수와 그 일계 미분만을 포함한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라그랑지언은 메트릭 텐서의 특성상 적당한 좌표 선택에 따라 지울 수 있기 때문에 불완전하다.

한편 힐베르트는 간단히 말해 중력과 전자기력을 통합하는 소위 통일장 이론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과 구스타프 미에(Gustav Mie)의 전자기 이론을 통합하려 하였다. 힐베르트의 연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Corry(2004)][Renn&Stachel(2007)] 등을 참고. 여기에서는 현재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한 직접적 기여만을 다룬다.
아인슈타인은 Entwurf 이론에서 먼저 공변 범위를 선형 변환으로 제한하고 그 위에서 라그랑지언과 중력장 방정식을 만들었다면, 힐베르트는 먼저 일반 공변적인 라그랑지언을 도입한 후 그 위에 공변성 제한을 가하였다. 힐베르트는 라그랑지언의 일반 공변성을 가정함으로써 훨씬 단순한 논의로도 옳은 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이후 아인슈타인이 공변성 제한을 제거하면서 힐베르트도 일반 공변성을 제거했다. 여기에서 그가 제안한 액션은 잘 알려진대로 현재 아인슈타인-힐베르트 액션(Einstein-Hilbert action) 또는 힐베르트 액션(Hilbert action)이라고 부르는 것과 동일하다.

[math(\displaystyle \int H \sqrt{g} d\omega, \quad H = K + L)]

[math(\displaystyle [\sqrt{g}K]_{\mu\nu} = \sqrt{g}\left(K_{\mu\nu} - \frac{1}{2}Kg_{\mu\nu}\right))]


여기에서 [math(K = g^{\mu\nu}K_{\mu\nu})]는 지금의 리치 스칼라이다.

누가 방정식을 먼저 완성했는가?
아인슈타인과 힐베르트 중 누가 중력장 방정식을 완성했느냐, 혹은 서로 얼마나 영향을 주고받았냐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논란이 된 사안이다. 힐베르트의 논문의 초본과 최종본의 차이, 문제의 기간동안 주고받았던 편지의 내용 등을 중심으로 여러 논란들이 있는데, 어느 정도 확실한 것은 다음과 같다.
  • 중력을 시공간의 메트릭 텐서의 동역학(시공간의 곡률)으로 기술하겠다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아이디어였고, 일반 상대론의 기본적인 구조는 이미 1914년까지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완성이 안된 것은 중력장 방정식 뿐이었다.
  • 1915년 여름 힐베르트의 초빙으로 아인슈타인의 1914년 자신의 이론([Einstein(1914)] 바탕)을 괴팅겐 대학에 강의하러 갔다. 이 곳에서 두 학자가 어떤 의견을 교환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힐베르트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호응했다.
  • 둘은 이후 독립적으로, 혹은 여름 강의의 영향으로 중력장 방정식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각자 이를 수정하려 했다. (아인슈타인은 이미 3월에 레비치비타의 지적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때는 틀린 점을 모르고 있었다가 이후 같이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그리고 1915년 11월에 상의를 위해 서로의 논문을 교환하며 크고 작은 영향을 받았다.
  • 두 학자의 접근법은 분명히 다르다. 아인슈타인은 1913년에 그로스만과 연구했던 방정식을 다시 가져와 점진적으로 발전시켰고, 힐베르트는 변분법에 기반해 방정식을 짰다. 뿐만아니라 목적 자체에도 차이가 있다.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론으로 중력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중력장을 도출하는 방정식을 완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나, 힐베르트의 (첫) 논문은 일반 상대론의 구조적 결점을 보완하고 전자기학과의 연관성을 탐색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방정식의 모양은 중요하지 않다.
  • 1990년대에 발견된 힐베르트의 논문 초본[47][48]을 비교하면, 힐베르트의 이론은 방정식의 액션 이외에는 각 시점에서의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맞춰져 있다. 아인슈타인의 구멍 논변에 따라 이론의 일반 공변성이 제한되었을 때에는 힐베르트도 일반 공변성을 (다른 방식으로) 제한했고, 아인슈타인의 마지막 논문이 나오면서 구멍 논변을 버리고 일반 공변성이 갖춰진 이후에는 힐베르트도 일반 공변성에 대한 제한을 제거했다. 또한, 힐베르트의 논문 초본에는 방정식의 형태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다.

세세하게 들어가지 않고 넓게 보자면, 이런 상황을 기준으로 했을 때 일반 상대론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아인슈타인이 독립적으로/먼저 방정식을 완성했다는 의견에 힘을 실어주는 자료[49]가 발굴되기 전에도 이 부분은 이견이 없었다. (Fölsing, Norton, Thorne 등) 그러나 방정식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둘이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의견이 완전히 수렴되지는 않았다. 여기에서는 두 학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는가에 대한 논의는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둘은 독립적으로 결론에 도달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Renn, Stachel, Yanssen, Norton) 등의 연구가 이 문제를 자세히 다룬다. 현재 과학계에서는 중력장 방정식은 아인슈타인 방정식, 액션은 아인슈타인-힐베르트 액션 또는 힐베르트 액션이라 부르는 게 대체로 통일되어 있고 결과적으로 보면 비교적 합리적으로 이름이 정해진 사례이다. 사실 과학사 전체로 보면 훨씬 억울한(?) 사례들이 많이 발견된다.(S. Carroll)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인 아인슈타인과 힐베르트 두 사람이 크게 다투지 않고 서로의 공적을 빠르게 인정했다는 데에 있다. 힐베르트가 독단적으로 이론을 완성하려 했다고 느낀 아인슈타인이 불만을 토로하면서 잠깐 관계가 소원해진 적은 있으나, 한 달 만에 결국 화해했고, 힐베르트는 일반 상대론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임을, 아인슈타인은 힐베르트가 이론의 변분 체계를 완성했다[Einstein(1916b)]는 것을 대외적으로 분명히 함으로써 서로 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우선권 논란은 두 학자가 사망한 이후에 거세졌다.

6.2. 형성기(1916 - 1925)

1915년 11월 4편의 논문으로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 이론의 수학적 기초를 완성했지만, 이론에 대한 물리적 해석과 수식의 사용법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 모호한 상태였다. 일반 상대성 이론이 충분히 쓸만한 중력이론이 되기 위해서는 제2의 기초 형성기가 필요했다. 하노흐 구트프로인드(Hanoch Gutfreund), 위르겐 런(Jürgen Renn)은 이 시기를 Formative years(형성기)라고 불렀다. 초기 일반 상대론이 가장 역동적으로 발전한 시기이다.

이때부터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론의 창시자라는 주도적 역할에서 벗어나, 일반 상대론의 기틀을 닦은 많은 기여자들 중 한 명으로써 활동하였다. 그는 초기 일반 상대론에서 에너지 보존의 문제, 중력파, 우주론 등 굵직굵직한 세부 분야를 창시하고 그에 대해 많은 학자들과 논의를 하거나 경쟁 이론으로 경합을 나누었다. 이러한 구도는 우주론 분야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슈바르츠실트(1915)와 드로스테(1916), 그리고 라이스너(1916)와 노르드스트룀(1918)은 각각 아인슈타인 방정식의 정적인 진공 해(vacuum solution)( 슈바르츠실트 계량)와 정적인 전기진공 해(electrovacuum solution)( 라이스너-노르드스트룀 계량)를 제시하여 일반 상대성 이론을 천체 문제에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아인슈타인은 슈바르츠실트(Karl Schwarzschild), 드 시터(William De Sitter)와 논의 끝에 중력파의 존재에 대한 확답을 내리고 1916년 4월 중력파 이론을 탄생시켰다.
또한 1917년 아인슈타인이 우주 상수를 아인슈타인 방정식에 삽입함과 동시에 방정식을 우주 전체에 적용하여 정적 우주 모델을 제시한 것을 시작으로 프리드만(Alexander Friedmann), 르메트르(Georges Lemaître) 등은, 각자의 선택에 따라 여러 우주 모델을 제시하였으며 허블-르메트르 법칙이 발견되는 등 현대 우주론의 초기 발전에 기여하였다.
한편 힐베르트(David Hilbert), 바일(Hermann Weyl), 클라인(Felix Klein), 뇌터(Emmy Noether) 등을 비롯한 괴팅겐 수학자들은 일반 상대성 이론의 수학적 기초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면서도 에너지 보존법칙 등 물리적 논제에 대해서도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바일의 역사적인 일반 상대성 이론 교과서 "공간, 시간, 물질"(Raum-Zeit-Materie)도 이 시기에 나왔다. 천문학자 프로인틀리히(Freundlich)와 에딩턴(Eddington)은 일반 상대성 이론이 예측하는 (아인슈타인이 등가원리로 예측한) 빛의 굴절과 적색 편이를 검증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하였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1919년 다이슨(Dyson), 에딩턴(Eddington) 등이 수행한 역사적인 개기일식 원정이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일시적으로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이것으로 아인슈타인은 독일을 넘어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1920년대 중반 양자역학 혁명이 일어나고 대부분의 물리학자/학도들이 양자역학 문제에 눈을 돌리면서 뜨거워진 분위기는 다소 식어버렸다.

6.3. 과도기(1925~1950s)

1919년의 일시적 관심 집중은 오래지 않아 일반 상대성 이론은 물리학계의 주류에서 점차 벗어나기 시작했는데, 초창기 학계의 전면적인 기여에도 불구하고 일반 상대성 이론은 여전히 난해했으며, 일반 상대성 이론이 뚜렷해질만큼 중력장이 강한 상황이 알려진 바가 없었기에 활용될 여지가 거의 없었다.[51] 더 중요한 것은 양자 역학의 대두로, 1920년대 중반 이후 젊은 물리학자들이 전부 양자 역학으로 빠지고 1930~1940년대를 지나면서 일반 상대성 이론 분야는 완전히 침체되고, 주로 소수 전문가들의 간헐적 기여들만이 이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또한 이 시기의 장기화에 한몫 했다. 이 시기를 장 아이젠슈타트(Jean Eisenstadt)는 저수위기(Low water-mark period)라 지칭하였다.[Eisenstadt(1989)]

이 시기는 놀라울 정도로 주목도가 떨어져서, 거의 잊혀진 학문 취급을 받았으며 뉴턴 역학이 예측하는 수치를 보정하는 정도 외에 쓰일 일이 없었다. 현재 일반 상대성 이론의 주 영역인 천체물리학의 중성자별, 블랙홀, 중력파, 그리고 우주론(우주배경복사)과 GPS 모두 1950년대 이후 등장한 것을 감안하면 컨텐츠가 심각하게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일반 상대성 이론의 고전적 현상(수성의 근일점 이동, 중력 적색 편이, 빛의 굴절) 중 하나인 중력 적색 편이가 1960년에야 검증된 것을 생각하면 더 심각하다. 일반 상대성 이론이 물리학의 전면에 대두되기 위해서는 훨씬 많은 이론적 발전과 자본, 그리고 기술력의 발전이 필요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이 물리학의 중추가 되는 모습을 보기 직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6.4. 황금기(1955~)

이 시기에 겹쳐진 여러가지 과학적, 기술적, 사회적 요인들은 일반 상대성 이론에 소위 황금기(Kip thorne) 또는 르네상스(Clifford Will)라 불리는 재전성기를 가져다 주었다. 이 전성기는 초창기(1919~)처럼 특정 사건이 가져다 준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었으며, 일반 상대성 이론이 현대 물리학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경향은 현재진행형이다.

발단은, 1955년 베른에서 상대성 이론 5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 소위 상대론자(Relativist)라 불리는 (마이너한) 상대성 이론 전문 연구가들이 처음으로 모여 국제적인 컨퍼런스를 연 것이다. 당연히 이 자리에 아인슈타인도 초대되었지만, 불행히도 아인슈타인은 컨퍼런스 몇 개월 전 사망하였다. 이는 그들에게 "아인슈타인의 유산을 우리가 이어나가야 한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물론, 더 중요한 건 이 자리가 전세계에 뿔뿔이 흩어져서 개인적으로 연구하던 상대성 이론 전문가들이 처음으로 모여 성과와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첫 번째 계기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간 그들이 연구했던 성과들이 한 데 모이고, 그간의 발전을 정리하고 다학제적으로 연구를 발전시킬 수 있는 하나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다.

1950년대 후반 ~ 1960년대 초 발견된 퀘이사(Quasar) 혹은 준항성전파원(Quasi-Stellar radio source)의 기묘한 성질은 그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퀘이사는 예측되는 표면적 대비 매우 강한 전파를 방출하여 그간 다뤄졌던 어떠한 천체도 이러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 이는 곧 연구자들에게 "블랙홀"이라는 이름을 떠오르게 해주었다. 하지만 일반 상대성 이론은 그간 축적된 천체 물리학의 성과들을 반영할 만큼 활발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여서(먼지 투성이 책을 다시 꺼내든 것과 같다.) 중력 붕괴, 특이점에 대한 연구를 다시 진행해야 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일반 상대성 이론은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이후, 1968년 처음 보고된 펄사(pulsar)는 중성자별임이 명백했고, 1972년 발견된 쌍성 펄사에 대한 연구는 중력파로 이어졌다. 펄사는 지금도 일반 상대성 이론을 비롯한 모든 중력 이론에 대한 최적의 실험실 역할을 하고 있다. 블랙홀 역시, 1960년대에 보고된 백조자리 X-1을 통해 간접적으로 증명되는 데에 이른다. 1965년 발견된 우주배경복사(CMB) 역시 우주론과 함께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는 데에 기여하였다.[53]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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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rigol(2005)] [Einstein(1905)] A. Einstein, 1905, "Zur Elektrodynamik bewegter Korper", Annalen der Physik 17, pp. 891-921 [13] 단, 이 때 아인슈타인은 이것이 역설인지도 모른채 짧고 쉽게 해결하고 넘어갔으며 쌍둥이 역설이 본격적으로 "역설로서" 다뤄진 것은 1911년 랑주뱅(P. Langevin)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14] 아인슈타인이 1924년 2월 6일 했던 발언에 대한 녹취록의 일부로, Friedrich Henreck의 아인슈타인 평전(1966)에 수록되어 있다. [15] "로런츠 변환"이라는 이름은 푸앵카레의 1905년 6월 논문에서야 처음 등장한다. [Norton(2005)] John D. Norton, "Discovering the Relativity of Simultaneity, How did Einstein take "The Step"?" https://sites.pitt.edu/~jdnorton/Goodies/rel_of_sim/index.html [Darrigol(2005)] Oliver Darrigol, "The Genesis of the Theory of Relativity", S´eminaire Poincar´e 1 (2005) 1 – 22 # [18] A. Einstein, "Über das Relativitätsprinzip und die aus demselben gezogenen Folgerungen.", Jahrbuch der Radioaktivität und Elektronik 4 : 411-462. 독문 영문 [19] Galina Weinstein, Einstein's Pathway to the Equivalence Principle 1905-1907 (2012) arxiv [20]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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