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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몬트리올의 역사를 다루는 항목이다. 과거 프랑스령 캐나다의 중심지였던 몬트리올은 오래도록 캐나다 제1의 도시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현재는 여러 번의 실각과 타 도시의 선전이 겹치며 위상이 많이 내려온 상태지만, 여전히 토론토와 함께 캐나다의 양대 도시로써 자국을 대표하고 있다.몬트리올은 식민 지배국들이 원주민들과 가죽 거래를 위해 세운 도시인 퀘벡 시나 토론토와는 달리, 순전히 원주민들의 개종을 위해 세워진 선교 도시였다. 몬트리올의 옛 지명 빌 마리(Ville-Marie) 역시 마리아의 도시라는 뜻이다. 따라서 천주교의 영향이 오랜 기간 지속되어 왔으며, 이는 언어적 차이와 함께 캐나다의 다른 지방과의 문화적 차이를 야기했다.
2. 자크 카르티에와 식민지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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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 도래 이전 오슐라가 요새의 모습 |
한편 1535년 프랑스의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Jacques Cartier)는, 1년 전 그가 발견한 뉴펀들랜드와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일대의 탐험을 계속하기 위해 배를 타고 바다로 떠나게 된다. 카르티에 일행은 대서양과 뉴펀들랜드를 지나 어느 날 세인트로렌스강 안쪽의 스타다코나(Stadacona)[1]에 도달하게 된다. 카르티에 일행은 현지에 살던 이로쿼이 연맹 사람들에게 이곳이 어디냐고 묻는다. 원주민들은 그들의 언어로 간단하게 "마을이다."(카나타; Kanata)라고 대답했으며, 그걸 지명으로 알아들은 카르티에 일행은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 전부를 카나다(Canada)라고 명명한다. 이게 지금의 캐나다 국호가 된다. 스타다코나를 떠나 세인트로렌스 강 안쪽으로 항해를 계속한 카르티에 일행은, 몬트리올 섬 위의 마을 오슐라가(Hochelaga)에 도달한다. 카르티에는 오슐라가가 자리한 섬 중간의 산에 몽루아얄(Mont Royal)[2]이란 이름을 붙이고, 자신이 발견한 땅과 원주민들의 특성, 언어를 메모한 뒤 스타다코나를 거쳐 프랑스로 돌아간다.
카르티에의 오슐라가 방문과 함께 세인트로렌스 강과 몬트리올이 프랑스에 알려지자, 1611년 또 다른 탐험가 사뮈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이 몬트리올 방문해 모피 교역소를 세우고 플라스 루아얄(La Place Royale)이란 이름을 붙인다. 샹플랭은 또한 지금의 몬트리올 섬 일대를 프랑스 고위 관료의 이름을 따 빌므농 섬(Lille de VIllmenon)이라 부른다. 1639년, 누벨프랑스 원주민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전하고자 했던 제롬 르 루아예르 드 라 도베시에르(Jérôme le Royer de la Dauversiè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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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마리에 세워진 첫 교회 |
3. 영국령 캐나다
1756년, 승승장구하던 몬트리올에게 프랑스-인디언 전쟁이라는 악재가 닥친다. 전쟁 초기 프랑스는 루이 조제프 드 몽캄(Louis-Joseph de Montcalm) 장군을 앞세워 영국군의 침략을 잘 방어해내지만, 초반의 부진에도 흔들리지 않은 영국군에 의해 아브라함 평원에서 쥐어터지며 퀘벡 시까지 빼앗긴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프랑스군은 보드레이유 후작(Marquis de Vaudreuil)의 지휘 하에 몬트리올로 돌아가 전력을 보강한 뒤 이듬해 생트푸아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퀘벡 시를 다시 되찾는다. 그러나 영국군은 퀘벡 시에서 끈질긴 버티기에 들어갔고, 이어 키브롱 만 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찾아온 영국 해군의 도움과 함께 프랑스군을 격퇴한다. 퀘벡 탈환과 함께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온 영국군은 1759년, 프랑스군 최후의 보루였던 몬트리올을 점령하며 퀘벡 전역을 차지한다.전쟁에서 승리한 영국군은 1763년 파리 조약을 체결해 공식적으로 퀘벡을 제 손에 넣는다. 1775년 미국 독립 전쟁으로 퀘벡 전역이 잠시 미군에게 점령당하는 일도 있었지만 몬트리올만큼은 전장의 혼란을 피해 갔다. 한편 미국 독립 전쟁에서 패한 영국은, 1791년 헌법(Constitutional Act of 1791)의 제정과 함께 영국령 북아메리카 잔여 영토를 재편한다. 영국은 세인트로렌스강의 흐름을 따라 프랑스계가 주류였던 몬트리올과 퀘벡 일대를 하류 캐나다(Lower Canada)라고 이름붙였고, 반대편의 영국계 지역은 상류 캐나다(Upper Canada)로 부른다. 19세기 초 몬트리올은 스코틀랜드 및 잉글랜드 출신 이주민들과 독립 전쟁에서 도망나온 왕당파까지 가세하며 영국계 인구의 숫자가 부쩍 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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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을 진압하는 영국군[4] |
그러나 반란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반란의 불씨는 영국 정부의 귀에도 흘러들어갔고, 놀란 영국 정부는 제1대 더럼 백작 존 램턴(John Lambton)을 캐나다에 파견해 식민지 통치의 문제를 보고하도록 했다. 명을 받고 캐나다를 둘러 본 백작은 영국으로 돌아가 더럼 보고서(Durham's Report)를 발간한다. 더럼의 보고서는 영국 정부의 양캐나다 통합 정책을 지지함과 동시에, 현지의 민심을 무시하는 식민지 정부와 프랑스어 탄압 정책은 지속적인 반란을 낳을 것이라는 경고를 담고 있었다. 보고서의 내용을 잘 귀담아 들은 영국 정부는 1841년 하-상캐나다 정부를 통합한 다음 현지 주민들로 내각과 의회를 구성한다. 또한 탄압 정책도 완화시켜 몬트리올의 프랑스계들이 다시금 프랑스어를 쓸 수 있도록 했다.
4. 산업화와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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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시기 몬트리올의 전경 |
급성장한 몬트리올은 주변의 행정구역을 하나 둘 흡수하기 시작한다. 1883년에는 몬트리올 일대 최초 정착지였던 오슐라가를 합병했으며, 다년간 인근 도시들을 합병하다 1910년 10개, 1918년에는 3개를 합병하기에 이른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몬트리올은 북미에서 가장 개방적인 도시였다. 당시 이웃 미국인들은 금주령이 떨어진 자국을 떠나 카바레, 도박장 등 유흥업소가 흥행하던 몬트리올로 넘어오곤 했다. 1930년대 대공황이 터지며 도시가 잠시 휘청이기도 했지만, 곧이어 벌어진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쟁 특수를 맞아 다시 빠르게 성장한다.
5. 쇠퇴
캐나다의 태동기부터 줄곧 최대 도시 자리를 유지하던 몬트리올은 토론토의 급성장과 함께 자리를 위협받기 시작한다. 실제로 당시 토론토 증권거래소의 거래량이 몬트리올을 넘어서고, 몬트리올보다 십 년은 빠르게 인구 100만 명을 찍는 등[5] 점차 캐나다의 종주도시 지위를 넘보기 시작한다. 토론토는 인근의 미국 중서부와 함께 중공업 기반을 다지며 입지를 넓혀 나갔다. 세인트로렌스 수로(Saint Lawrence Canal)의 개통과 함께 대서양~ 온타리오 간 화물이 몬트리올을 지나쳐 가게 된 건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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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엑스포 캐나다관의 모습 |
그러나, 몬트리올은 1970년대 전반에 걸쳐 나타난 여러 번의 악재와 함께 본격적으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당시 몬트리올과 퀘벡은 조용한 혁명(Révolution tranquille)과 함께 주 전체에 만연했던 구시대적, 가톨릭적 관습의 뿌리를 뽑아내고 있었고, 장차 퀘벡 독립운동의 출발에 큰 영향을 끼친다. 동시에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퀘벡 자유당(Parti libéral du Québec, PLQ)이 집권하면서 주 내부 경제 주도권을 영국계로부터 빼앗고 프랑스어 사용을 장려하는 등, 과거의 영화를 되찾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정책은 몬트리올 내의 영어권 기업들이 토론토로 빠져나가는 계기가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토론토의 부상에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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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개막식 행사 도중 행진하는 캐나다군 |
6.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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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다운타운의 스카이라인 |
[1]
지금의
퀘벡시 일대다.
[2]
훗날 몬트리올의 어원이 된다.
[3]
성모 마리아의 도시라는 뜻. 선교도시로 출발한 몬트리올의 기원을 잘 드러내는 이름이다.
[4]
그림은 몬트리올 인근의 생-듀스타슈(Saint-Eustache)에서 벌어진 반란을 나타낸다.
[5]
몬트리올의 인구는
1951년에 100만명에 도달한다.
[6]
보다 못한 캐나다 정부가 재정 지원을 조금 해 주긴 했다. 물론 턱없이 모자랐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