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지 전경
항구 일대
1. 개요
튀르키예 서남부의 항구 도시. 무을라에서 남쪽으로 40km, 달얀에서 서쪽으로 30km 떨어진 반도 끝단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10만명이다. 보드룸 및 페티예와 함께 튀르키예 서남부의 대표적인 관광 도시 중 하나로, 요트 항해 및 다이빙 명소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령 시미 섬 및 로도스로 향하는 페리 선이 운행하며, 겨울철에는 지중해 각지의 요트들이 정박해 월동한다.2. 역사
기원전 6세기 경에 건설되어 피스코스 (Φύσκος)라 불렸고, 카리아 지방에 속했다. 다만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3천년부터 성채 있었다고 기록했다. 아케메네스 제국 시기 피스코스는 레토 신에게 신성한 숲이 있었고, 좋은 항구로 평가되며 번영했다. 그러던 기원전 334년, 마케도니아 군이 도시를 포위하자 6백여 주민들은 가망 없다 여기고 성내 귀중품 불사른 후 여인과 아이들 데리고 언덕으로 피신했다. 성채 전략적 가치를 알았던 마케도니아 군은, 성채의 파괴된 부분을 보수하고 수백의 수비대를 남긴 후 떠났다.
알렉산드로스 3세의 사후 안티고노스 1세,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 셀레우코스 왕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거쳐 기원전 3세기에 일대는 로도스 왕국령이 되었다. 로마 제국기에 피스코스는 보드룸, 카우노스에 밀려 중소 도시로 남았다. 다만 일대의 풍부한 대리석 매장량 덕에 대리석 수출항으로 유지되었다. 중세 멘테셰 후국 시기에 지명은 그리스어로 대리석 뜻하는 마르마론 (màrmaron)에서 유래한 마르마리스로 명명되었고, 터키어 메르메르 역시 같은 유래를 가지고 있다.
1522년 쉴레이만 1세는 로도스 원정 시에 마르마리스를 오스만 해군 거점으로 삼고 폐허이던 성채를 재건했다. 당시 성채와 함께 지어진 바자르에는 쉴레이만 1세의 모후 아이셰 하프사 술탄이 세운 작은 카라반사라이 (대상 숙소)가 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인 1801년에 케이트 제독 휘하 120척 영국 함대 및 애버크럼비 휘하 육군 1만 4천명이 8주간 마르마리스 만에 주둔하며 이집트의 프랑스 군과 싸우기 위한 훈련 및 보급을 실시했다.
1957년의 페티예 지진 당시, 성채와 그 부근의 옛 건축물 제외한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후 한동안 한적한 어촌으로 남아있다가, 1970년대 들어 유럽 관광객들이 몰리며 관광 도시가 되었다. 1979년부터 튀르키예 문화부 주관 하에 성채는 보수 후 박물관으로 전환되었다. 7개 갤러리 중 가장 큰 것은 전시실, 중정은 계절화로 장식되었다.
2018년 고고학자들이 인근에서 기원전 300년의 그리스인 격투기 선수 디아고라스 무덤을 발굴했다. 피라미드꼴 영묘에는 '나는 맨 꼭대기에서 주시하여 그 어떤 겁쟁이도 이 무덤을 훼손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경구가 적혀 있었다. 1970년까지 해당 영묘는 성인의 무덤이라 여겨 현지인들이 기도에 대한 응답을 듣기 위해 찾더가, 성스러운 곳이 아니라는 조사 결과 후 약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