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노스 유적에서 바라본 시가지
렌드마크인 리키아식 절벽 무덤
1. 개요
Dalyan튀르키예 남부의 도시. 마르마리스에서 동쪽으로 30km, 페티예에서 서북쪽으로 40km 떨어진 달얀 강 동안에 위치한다. 지명은 터키어로 어살 (漁箭)을 뜻한다.
시가지는 쾨이제으즈 석호와 지중해 사이의 하안 평야에 위치하며, 바다 거북의 산란지로 유명한 이즈투주 해안과 5km 가량 떨어져 있다. 무을라 & 안탈리아 도의 여러 휴양지 중 하나로, 고급 호텔이 많다. 강 건너편에는 옛 도시인 카우노스 유적이 있다. 인구는 약 6천명이다. 조각배로 강을 따라 갈대 숲을 탐방할 수 있고, 토요일마다 장이 열린다.
2. 역사
카우노스 유적
기원전 10세기부터 항구가 있던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아폴론의 손자 카우노스가 쌍둥이 누이 비블리스의 구애를 피해 세운 도시라 한다. 현지 리키아어로는 '크비드'라 불렸고, 본격적으로 도시가 세워진 것은 기원전 6세기부터이다. 전통적으로 카리아와 리키아의 경계를 이룬 도시로, 본래 독립된 도시 국가이다가 카리아를 거쳐 리키아 령이 되었다. 한편 기존의 달얀 만이 점차 퇴적으로 현재의 이즈투주 해변을 이루며 하구 부분이 메워지자, 해안과 배후에 각각 두 항구를 두게 되었다. 다만 해안의 항구는 결국 버려져 쉴뤼클뤼 호수의 내륙 항구만 쓰이게 되었다.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546년 아케메네스 제국의 장군 하르파고스가 리키아, 카리아, 그리고 카우니아를 점령했다고 기록했다. 또한 카우노스가 가장 격렬히 저항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크레타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겼고 남녀노소 모여 포도주를 마시기를 즐겼다고 덧붙였다. 기원전 499-94년, 카우노스는 이오니아 반란에 동참했다. 2차 페르시아 전쟁 후 기원전 470년대에 카우노스는 델로스 동맹에 가담했다. 본래 동맹에 연간 1 탈란트를 내던 카우노스는 기원전 425년, 방위비 분담금이 10 탈란트로 오를 만큼 농업 및 무역에 힘입어 경제적으로 성장했다.
당시 카우노스의 특산품은 소금, 염장 생선, 말린 무화과, 노예, 송진, 선박 방수 타르 등이 있었다. 또한 현지인들도 헬라화되어 스스로도 크비드 대신 카우노스라 부르게 되었다. 기원전 387년, 카우노스는 안탈키다스 협정에 의거하여 재차 페르시아 령이 되었다. 도시는 카리아 사트라프에 속했고, 마우솔로스의 치세에 테라스와 성벽이 세워진 등 시가지가 확장되었다. 그리스 정체성 역시 유지되어 아고라와 여러 신전들이 세워졌고, 반세기 만인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 3세의 정복으로 다시 헬라화가 진행되었다.
디아도코이 전쟁 시기 카우노스는 안티고노스, 리시마코스를 거쳐 한세기 가량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령에 속했다. 기원전 200년, 일대는 셀레우코스 왕조 령이 되었으나 기원전 189년 로마 공화정의 개입으로 로도스 왕국에 편입되었다. 다만 기원전 167년, 카우노스 및 여러 로도스령 소아시아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킨 후 자치가 주어졌다. 그리고 기원전 129년, 일대는 로마령 아시아 속주에 편입되었다. 한동안 평화를 누리던 카우노스 주민들은 기원전 88년, 미트리다테스 6세에 호응하여 시내의 로마인들을 학살했다.
3년 후, 도시를 재점령한 로마는 처벌을 가한 후 다시 로도스 왕국 령으로 환원시켰다. 다만 얼마 안가 로마 제국령이 된 카우노스는 항구 도시로 번영했다. 로마 시기 극장이 확장되었고, 목욕탕과 체육관 등이 세워졌으며 아고라 분수의 리모델링 및 신규 신전들의 건축도 진행되었다. 2세기 무렵 기독교화 된 도시는 동로마 제국 시기 카우노스-헤기아로 불리게 되었다. 625년 들어 각종 해적 및 아랍 해군의 공격을 받게 된 도시는 점차 쇠퇴했다.
2.1. 쇠락
13세기 룸 셀주크의 위협과 함께 아크로폴리스에 성채가 요새화되었고, 14세기에 튀르크 세력이 카리아를 정복한 후 해상 무역의 쇠퇴로 주민들은 타지로 이주했다. 이로써 더욱 쇠퇴하던 도시는 15세기의 말라리아 창궐로 인해 버려졌다. 시가지 자체도 이후의 지진과 삼림화, 모래 바람으로 인해 점차 덮혀 세간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잊혀져 있던 도시는 1840년 영국 해군 장교인 리처드 호스킨이 재발견했고, 카우노스 유적은 1966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때 발견된 카리아어 & 그리스어 명문은 전자의 해독에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2.2. 현대
특별 보호 구역인 이즈투주 해변
1987년, 사업가들이 바다 거북의 산란지인 이즈투주 해변에 고급 호텔을 세우려 하자 영국의 국서 필립 마운트배튼과 여러 환경 운동가들이 개입한 끝에 무산시켰다. 이때 달얀이 유럽 각지에 알려지게 되었고, 튀르키예 정부는 특별 환경 보호 구역으로 지정했다. 이즈투주 해안은 2008년과 2011년, 각각 유럽 최고의 개활지 및 해변으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