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티예 시가지 전경
기원전 350년 경에 조성된 리키아식 바위 무덤과 시가지
주요 관광 명소인 나비 협곡
1. 개요
튀르키예 서남부 무을라 주의 도시. 주도 무을라에서 동남쪽으로 80km, 안탈리아에서 서쪽으로 110km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8만 5천명이다. 해안 쪽은 만 형태이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진 덕에 안정적인 연중 5~35도의 기후와 잔잔한 바다를 즐길 수 있다. 따라서 튀르키예의 대표적인 휴양 도시 중 하나로, 매년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서쪽 15km 지점의 달라만에 있는 공항을 통해 방문하는 것이 편하다.나름 유서 깊은 도시이지만 여러 차례 지진을 겪은 탓에 옛 건물은 찾기 힘들고, 페티예 박물관이나 고대 그리스의 극장 및 아민타스 암벽 무덤 유적에서 과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근해에 떠 있는 페티예 섬은 요트 정박지가 여러 곳 마련된 고급 관광지이다. 남쪽의 욀뤼데니즈는 넓은 백사장 해변으로 유명하다. 남쪽 교외에는 옛 그리스 도시 유적들이 많은데, 15km 거리의 피나라와 30km 거리의 크산투스[1], 레툰 유적이 있다.
2. 역사
테멜레소스 극장 유구
현재의 페티예 시가지는 고대 리키아의 텔메소스 유적 위에 세워진 것으로, 헬레니즘기 극장 등이 잔존한다. 리키아 전설에 따르면 페니키아 왕의 막내 공주 아게노르와 사랑에 빠진 아폴로 신이 작은 개로 둔갑하여 부끄럼 타고 내향적인 그녀의 환신을 산 후, 미남으로 변하여 사랑을 얻었다 한다. 그리고 함께 떠난 곳에서 아들이 태어나자 아폴로는 그곳을 '빛들의 땅'이란 뜻인 텔메소스라 명명했다 한다. 기원전 547년 테멜로스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장군 하르파고스가 점령한 후 다른 카리아-리키아 도시들과 함께 페르시아 령이 되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 해군이 일시적으로 페르시아를 격파한 후에는 아티카- 델로스 동맹에 가입했으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 (페르시아의 압력 하에) 동맹을 이탈해 자치도시가 되었다. 다만 기원전 4세기까지 동맹과의 관계는 유지되었다. 로마 시기 테멜로스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나, 잔존 건물들을 통해 고대 후반기 무렵 크게 번영했음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7-8세기 아랍-동로마 전쟁 시에 테멜로스는 버려졌고, 8세기 후반 요새화되어 서기 800년경 텔미소스 혹은 아나스타시오폴리스로 기록되었다.
2.1. 중세
10세기 들어 고대의 지명은 잊혀지고 항구 앞의 긴 섬에서 유래된 마크리 혹은 마크레 (Μάκρη)[2]로 불리게 되었다. 12-13세기 성벽이 확장되는 등 도시는 재차 번영하여 1106년 향수 생산 거점으로, 13세기 일대의 상업 중심지로 기록되었다. 다만 13세기 초엽 튀르크 인들이 점령, 1284년부터 멘테셰 후국의 지배를 받으며 베스카자라 명명되었다. 그리고 1424년 오스만 제국에 편입되어 메으리 (مكرى)라 불렸다.2.2. 근현대
중소 도시였던 메으리는 19세기 들어 대폭 성장하였고, 큰 규모의 그리스인 공동체가 있었다. 다만 1923년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 후 그리스계 주민들은 떠나고, 대신 그리스 출신 무슬림들이 정착하였다. 그리스 공동체의 흔적으로, 인근 카야쾨이 (옛 레비시)에 버려진 채로 잔존하는 정교회 성당이 있다. 한편 마크리 출신 그리스인들은 아테네 동쪽에 네아마크리를 세웠다.[3]1934년 오스만 제국 공군의 첫 조종사 중 한 명으로, 이스탄불- 카이로 간의 첫 비행을 시도하던 중 갈릴리 호 인근에서 사고사한 타야레지 페트히 베이를 기리기 위해 현재와 같은 지명이 붙여졌다. 1953년 8월 3일, 로마에서 베이루트로 향하던 에어프랑스 152기가 페티예 인근 크즐아다에 불시착하였다. 승무원 8명과 승객 34명 중 4명이 익사하였고, 나머지 38명의 생존자들에 대해 주민들은 숙식을 제공하는 등 온정을 베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