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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 피닉스

리버 피닉스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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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베니스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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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피 컵 - 남우주연상
제47회
( 1990년)
제48회
( 1991년)
제49회
( 1992년)
올레그 보리소브
( 유일한 목격자)
리버 피닉스
( 아이다호)
잭 레먼
(글렌게리 글렌 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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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8b8b2><colcolor=#ffffff> 리버 피닉스
River Phoen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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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리버 주드 피닉스[1][2]
River Jude Phoenix
출생 1970년 8월 23일
미국 오리건주 마드라스[3]
사망 1993년 10월 31일 (향년 23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웨스트 할리우드[4]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직업 배우, 음악가
신체 178cm, 64kg, AB형[5]
활동 1982년 - 1993년
부모 아버지 존 피닉스(1947년생)[6]
어머니 하트 피닉스(1944년생)[7]
형제 여동생 레인 피닉스(1972년생)[8][9]
남동생 호아킨 피닉스(1974년생)
여동생 리버티 피닉스(1976년생)[10]
여동생 서머 피닉스(1978년생)[11]

1. 개요2. 상세3. 출생
3.1. 하나님의 자녀파(派)
4. 연기 활동
4.1. 데뷔4.2. 1980 - 1985: 소년기
4.2.1. 스탠 바이 미(1986)4.2.2. 지미의 사춘기 (1988)
4.3. 1986 - 1993: 청년기
4.3.1. 허공에의 질주 (1988)4.3.2. 인디아나 존스와 최후의 성전 (1989)4.3.3. 아이다호 (1991)
5. 음악 활동6. 동물권, 환경 운동7. 사망
7.1. 의혹과 반론7.2. 여파
8. 필모그래피
8.1. 영화8.2. 텔레비전8.3. 뮤직비디오
9. 가족 관계10. 연인 관계

[clearfix]

1. 개요

미국의 배우이자 음악가.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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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말 할리우드의 차세대 스타로 각광받던 배우로,[12] 꽃미남 미모[13]에 우수한 연기력을 갖춰 당대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던 배우였다.[14] 현 시대를 살아가는 10~20대에게는 생소한 인물이지만 그가 활동했던 시기만큼에는 그는 역대급 임팩트를 남긴 할리우드 스타로 평가받는다. 만약 X세대[15]라면 미국인은 물론 다른 나라 사람들도 리버 피닉스 정도는 다 안다.

1993년, 만 23세의 나이에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2019년작 영화인 조커의 아서 플렉을 연기하여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호아킨 피닉스의 형이다.

3. 출생

1970년 8월 23일, 히피인 알린 듀네츠와 존 리 바텀 사이에서 태어났다.

모친 알린은 컴퓨터 오퍼레이터와 결혼을 하고 스물셋의 나이에 뉴욕 맨해튼의 한 사무실에서 비서 일을 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늘 바라왔던 영화나 드라마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1968년 여름, 백팩 속에는 옷 몇 벌을, 주머니 속에는 단 몇 달러만을 넣고 서부지역을 향해 도망치듯 떠난 히치하이킹 여행에서 존을 만나 마드라스에 정착해 첫 아이인 리버 주드 바텀(River Jude Bottom)을 낳았다.

리버(River)라는 이름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 싯다르타』 속 '생명의 강(River of Life)'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한 이름이다. 영어 이름의 경우 단어, 자연물을 이름으로 잘 쓰지 않아 리버의 이름은 특이한 편에 속해 종종 인터뷰어들에게 왜 이름이 리버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기도 하였다.[16] 또한 리버의 중간 이름인 주드(Jude)는 영국 배우 주드 로와 마찬가지로 비틀즈의 노래 Hey Jude에서 따왔다고 한다.

3.1. 하나님의 자녀파(派)

리버의 부모님은 리버의 출생 이후 종교적으로 난교를 실천하는 '하느님의 자녀들(The Children of God)'이라는 사이비 종교 단체에 가입했고 선교의 일환으로 남미 지역을 순회하며 살았다. 이 때 어린 리버와 동생들은 종교 단체의 노래를 부르고 기타를 치며 길거리 공연도 자주 했는데 사실상 구걸에 가까웠다. 그들은 후에 종교 단체의 비리와 폐단에 염증을 느껴 개종했고, 다시 미국에 돌아와 정착했다. 이 때 그들은 새로 시작한다는 의미로 피닉스라는 성으로 개명하게 된다.[17]

리버는 이런 생활 환경 탓에 정규 학교 수업을 들어본 적이 없고, 정규 교육을 받으면 당연히 아는 상식인 위인, 역사, 문학 등을 전혀 몰랐다. 극작가 나오미 포너는 "리버 피닉스는 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는 읽고 쓸 수 있었고 그러는 것을 좋아했지만 역사나 문학적 감각에 대한 깊은 사유가 부족했다."고 회상했다. 14살 때 찍은 영화 《컴퓨터 우주 탐험》에 함께 출연했던 또래 이선 호크, 제이슨 프레슨과도 배경지식이 너무 차이가 나서 스탭들이 하나하나 가르쳐줘야 했는데 리버가 힘들어했다고 한다.[18] 다행히 아역 배우들끼리는 아이답게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리버의 동생들은 그와 같이 재능이 많은데 그 중 한 명이 바로 호아킨 피닉스다.

4. 연기 활동

4.1. 데뷔

피닉스 가족이 미국에 정착한 후, 댄서이자 아역배우 에이전트인 아이리스 버튼은 리버가 동생들과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잔돈을 벌고 있는 모습을 포착한다. 그는 그녀 덕에 여러 편의 광고 영상 찍을 수 있게 되었고, 1980년, 여동생 레인과 함께 TV 쇼에 조연 급으로 출연하기 시작한다.

4.2. 1980 - 1985: 소년기

리버는 1980년부터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판타지》라는 TV 쇼에 여동생 레인과 함께 출연해 노래를 불렀고 1982년에는 CBS 방송 프로그램 시리즈에 출연하기도 했는데, 기타를 들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흉내를 내던 리버의 모습을 보고 PD가 섭외했다고 한다.

TV 시리즈가 끝난 1년 후, 리버는 1984년 TV 미니 시리즈 《Celebrity》에 피터 넬슨의 아역으로 출연했다. 비록 10분 정도만 화면에 나왔지만 리버의 배역은 매우 중요했다. 그 후 몇 달이 안 되어 ABC 방송국에서 난독증을 가진 소년을 연기해 호평을 얻었다. 호아킨 피닉스와 같이 출연했으며 이 방송이 호아킨 피닉스의 데뷔작이 되었다. 여러 편의 드라마 출연 후, 1985년, 그는 에단 호크와 함께 그의 첫 영화 《컴퓨터 우주탐험》에 출연하게 된다.

4.2.1. 스탠 바이 미(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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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만 16세의 리버는 로브 라이너의 《 스탠 바이 미》 (Stand by Me, 1986)에서 주인공 무리의 리더 격인 크리스 챔버스를 연기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

워싱턴 포스트에서는 리버가 이 영화의 중력같은 역할을 했다고 극찬했다. 그에 대해 리버는, "나는 크리스 챔버스와 나를 동일시해서 마지막 촬영 후 가족이 곁에 있지 않았다면 정신과 의사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 했을 정도로 역에 몰입해있었다.

스탠 바이 미》와 같은 달에 개봉한 피터 위어 감독[19]의 《모스키토 코스트》에서는 해리슨 포드의 아들 역을 맡았다. 리버의 연기를 본 위어 감독은 "그는 당연히 스타가 될 것"이며 "연기력 이외에도 그에겐 무언가가 있다. 로렌스 올리비에도 없는 무언가가 그에겐 있다."라고 이야기했다.

4.2.2. 지미의 사춘기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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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키토 코스트》 이후, 리버가 만 17세이던 1988년 2월과 3월, 그가 주연을 맡은 영화 《지미의 사춘기》 (A Night in the Life of Jimmy Reardon, 1988)와 《KGB의 아들》이 차례대로 개봉하게 된다.

그 중 《지미의 사춘기》는 하이틴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이며, 그는 영화 속 자신의 연기에 스스로가 실망했다고 한다. "내가 생각한 대로 연기가 나오질 않았고, 그건 전적으로 내 탓이다. 나는 코미디를 하고 싶었는데 내가 이 역에 맞는 사람인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였다.

4.3. 1986 - 1993: 청년기

4.3.1. 허공에의 질주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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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개봉한 두 편의 영화로부터 몇 달 후, 리버가 만 18세가 된 시점에 그가 출연한 또 하나의 작품, 대감독 시드니 루멧의 《 허공에의 질주》 (Running on Empty, 1988)가 개봉된다.

이 영화는 FBI에 쫓겨 떠돌이 생활을 하는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 중, 피아노에 소질을 보이는 첫째 아들의 이야기를 담았는데, 평생 거처를 옮겨다녔던 피닉스 가족의 삶과 일맥상통한다. 당시 교제 중이던 배우 마사 플림튼과 호흡을 맞추었으며, 이 영화에서 리버는 가짜로 연기하는 것이 싫어 직접 피아노를 배워서 연주한 것으로 화제가 되었다. 이 영화로 인해 National Board of Review에서 남우조연상을 타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동 부문의 후보가 된다. 루멧의 저서 『영화 만들기』에 따르면,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작가와도 논쟁할 줄 아는 대담함을 보여주었다고 한다.[20]

4.3.2. 인디아나 존스와 최후의 성전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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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리버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 인디아나 존스와 최후의 성전》 (Indiana Jones and the Last Crusade, 1989)에서 어린 인디아나 존스 역으로 카메오 출연하게 된다.

1991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하룻밤》에 출연하여 젊은 해병을 연기했다. 같이 출연한 주연 여배우는 리버는 자신과 배역을 떨어뜨리는 것을 힘들어할 정도로 배역과 한 몸이 되었다고 기억한다. "리버가 연기한 배역은 그와 성격이 너무 달랐다. 히피였던 리버가 해군을 연기하는 것에서 힘들어했다. 그래서 술을 마셨다."라고 회상했다.

4.3.3. 아이다호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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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와 키아누 리브스는 리버의 남동생 호아킨 피닉스와 키아누가 함께 출연했던 영화 《페어런트 후드》를 통해 처음 만나게 된다. 이후 《바람둥이 길들이기》에 함께 출연하게 되며 절친이 되었고 거스 밴 샌트의 《 아이다호》 (My Own Private Idaho, 1991)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리버 피닉스는 어머니를 찾아 여행하는 남창 마이크를 연기했다. 《 허공에의 질주》와 함께 리버 피닉스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데이비드 안센이란 평론가는 "마이크가 그의 사랑을 고백하는 캠프파이어 씬에서 섬세함이 느껴진다. 그 장면, 그리고 모든 장면에서 리버 피닉스는 마이크로 분한 그의 모습을 너무 깊이 보여줘서 우리가 전에 그를 본 적이 있는가 하고 질문하게 만든다. 아주 대단하게 섬세한 연기였다."라며 평했다. 이 영화를 통해 베니스 영화제, 평론가 협회, 독립영화제에서 주연상을 타게 된다. 이 연기로 인해 리버는 주연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였고, 개성 강한 연기파의 이미지를 굳혔지만 이 시기에 리버는 마리화나, 코카인, 헤로인 등 수많은 마약을 복용하기 시작한다. 거스 밴 샌트는 훗날 『핑크』라는 리버에 관한 책을 썼는데 거기서 리버는 다른 마약 중독자와 달리 특별한 때만 마약을 복용했고[21], 대신 알코올 의존증 문제가 있었다고 밝혔다. 또한 리버는 자신의 커리어에 문제가 생길까 두려워 마약 중독 문제를 숨기려고 했다.[22]

후에 로버트 레드포드와 함께 《 스니커즈》라는 스릴러 영화를 찍었다. 이 때 즈음에 리버는 《 흐르는 강물처럼》의 폴 역할을 브래드 피트에게 빼앗기게 된다. 그 후 《콜 잇 러브 (The Thing Called Love)》라는 음악 영화를 찍었고, 이 영화는 리버의 마지막 완성본 영화로 기록된다.

5. 음악 활동

파일:리버 피닉스 밴드.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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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리버의 연기 활동이 가족들의 주 수입원이었지만 리버는 사실 음악에 상당한 열정을 두고 있었다. 친한 친구들, 친척과 함께 연주를 하기 시작했고 재능이 많았던 리버 피닉스는 노래도 부르고 곡도 쓰고 기타도 쳤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 광고를 찍었고, 연기는 흥미로워서 했지만 레코딩 아티스트가 되는 삶을 꿈꾸기도 했다고 밝혔다. 연기자로 데뷔하기 이전에도 리버는 형제들과 함께 연주를 하면서 길거리를 다녔는데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서 경찰들에 의해 제지되기도 했다. 지미의 사춘기에서는 리버가 작곡하고 녹음한 노래를 엔딩 크레딧에 넣으려 했는데, 20세기 폭스사에서 잘랐다고 한다. 하지만 감독은 다시 감독판에 넣었다는 후문. 리버는 이후 여동생 레인과 함께 Aleka's Attic 이라는 밴드를 결성한다. Aleka's Attic의 곡 중 한 곡은 아이다호의 사운드 트랙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보통 밴드의 곡은 PETA 같은 보호단체의 자선 앨범에 수록되었다.

생전에 Red Hot Chili Peppers와의 관계가 깊었으며, 이들의 명곡 중 하나인 Give it away에 리버 피닉스를 가리키는 가사가 있다. 또한 이들의 Transcending은 리버 피닉스를 추모하는 곡이다.

6. 동물권, 환경 운동

리버 피닉스는 동물권리 보호와 환경보호 그리고 정치 운동에 힘쓴 것으로 유명하다.[23]. 그는 PETA 대변인이었으며 1992년에 모금 활동도 하여 인도주의자 상을 받았다.[24] 1990년에는 어린 팬층을 겨냥한 환경의식 에세이를 썼고 미국의 유명한 잡지사인 세븐틴에도 실렸다.

따라서 리버는 채식주의자, 그것도 유제품조차도 안 먹는 비건이었으며 가죽 벨트를 사용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극단적인 채식주의자였다. 리버의 첫 여자친구이자 배우인 마사 플림튼은 "우리가 15살이었을 때 리버와 저는 맨해튼의 비싼 레스토랑에 갔어요. 저는 연한 껍질의 게를 주문했는데 그가 갑자기 울면서 레스토랑을 나가버렸어요. 제가 따라나오자 그는 '난 너를 사랑해... 근데 왜?'하고 말했어요. 그는 내가 동물을 먹는다는 것이 상당히 아픔으로 느껴졌던 거에요."하고 회상했다.[25]

리버는 경제적으로도 많은 환경, 인권 단체에 기부를 했으며 코스타리카의 위험에 처한 땅 800에이커(약 98만 평)를 구입했다고 한다.

7. 사망

1993년 10월 31일에 리버는 조니 뎁 로스앤젤레스 선셋 스트립에서 운영하던 클럽인 '바이퍼 룸'에서 공연을 하기로 되어있었는데 그 날 새벽, 리버는 실외에서 쓰러졌고 5분 이상 발작을 일으켰다. 그의 동생 호아킨 피닉스 911에 전화를 걸었을 때는 리버가 숨을 쉬는지 안 쉬는지 조차 말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 후 그는 앰뷸런스에 태워져 여러가지 응급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새벽 1:51, 향년 2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리버 피닉스의 부검 결과 밝혀진 공식 사인은 급성 다량 약물 중독이었으며 혈액에서 많은 양의 헤로인 코카인 그리고 다른 약물들이 발견되었다.

7.1. 의혹과 반론

그러나 그의 죽음에는 한 가지 의혹이 있다. 부검 결과 그의 몸 어느 곳에서도 약물을 복용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26]

하지만, 위에 언급된 뉴욕타임스 기사에 나온 검시관의 실제 발언을 보면, 주삿바늘 자국은 없지만, 섭취(ingested)나 흡입(inhaled)을 했을 가능성은 있다고 한다.[27] 살해당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아서 수사는 종결됐다.

한편, 바이퍼 룸에 있던 리버의 여자친구인 사만다 마티스가 그녀의 지인에게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레드 핫 칠리 페퍼스 출신 기타리스트인 존 프루시안테가 리버에게 '끝내주는 기분을 만들어줄거다' 라며 음료를 건넸고, 리버는 그 음료를 마신 뒤 곧장 몸이 안 좋아지자 이 안에 뭐가 든거냐며 존에게 소리쳤다고 한다. 또한 영화 감독 윌리엄 리허트는 리버의 장례식에서 우연히 기묘한 대화를 들었다고 증언한다.' '존'이라는 사람이 리버에게 그를 죽인 음료를 주었고 체포될까봐 겁이나 3일째 맨션에 틀어박혀 있기 때문에 장례식에 오지 못했고, 조니뎁이 그에게 체포되지 않을 것이니 나와도 된다고 말하러 갔다, 조니뎁이 해결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조니뎁도 리버의 장례식에 오지 않았다.)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www.dmitory.com/hy/245009806

그런데, 생전에 리버 피닉스와 친구였던 밥 포레스트가 쓴 자서전인 'Running with Monsters' 에 따르면, 사망 며칠 전의 리버는 밥 포레스트, 존 프루시안테와 함께 마약을 하는 루틴이 있었으며, 사망하기 전날 마약을 많이 한 상태였다고 한다. 링크[28]

위에 언급된 더 가디언 기사에 따르면 본래 리버는 주변 중독자들이 마약을 끊도록 도왔으나 어느새 마약을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본인도 중독자가 되었다고 한다.[29]

7.2. 여파

  • 사회적 활동을 많이 하고, 소신있는 발언을 자주 했던 리버의 생전 이미지로 인해 사후에 리버는 "채식주의자 제임스 딘"이라고 묘사되기도 했고 다른 요절한 배우들과 비교되어 보도되기도 했다. 리버는 생전에 《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다니엘 몰로이역에 캐스팅 되어 있었는데 리버를 대신하게 된 크리스찬 슬레이터는 캐스팅 수익금 전부를 리버가 생전에 기부하던 자선단체에 기부하였으며, 영화 엔딩 크레딧에는 리버 피닉스에게 헌정한다는 문장이 나온다. 거스 밴 샌트는 그의 영화 《 밀크》에서 클라이브 존스 역을 리버에게 주기로 했고 90년대에 영화를 제작하려 했지만 결국 그 역은 에밀 허쉬가 2008년에 연기하게 된다. 그리고 밴 샌트 감독은 리버를 주인공으로 앤디 워홀 영화를 찍으려 했지만 그의 죽음으로 무산되었다고 밝혔다.[30]. 아이러니하게도 리버 피닉스는 《바스켓볼 다이어리》에 출연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의 죽음으로 그 배역은 디카프리오에게 갔고[31] 국내에는 리버를 모델로 그려졌다고 잘못 소문이 나있던 《 토탈 이클립스》도 리버가 아주 큰 흥미를 보이던 작품이라고 한다.[32]
  • 리버가 사망할 당시 호아킨 피닉스 911에 구조 전화를 건 음성이 녹음되어 방송에 공개되고( #유튜브 링크) 장례식장에 리포터가 침입해서 리버의 시신 사진을 찍어가는 등 미디어는 예의없는 모습을 보였고 이에 염증을 느낀 호아킨 피닉스는 한동안 할리우드를 떠났었다.
  • 리버의 죽음 이후 어머니 알린(개명 후 하트 피닉스)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기고한다.
"그의 친구, 동료 그리고 우리 가족들은 리버가 정규적으로 약을 복용하던 사람이 아닌 것을 압니다. 그는 우리와 같이 플로리다 집에서 함께 살았고 클럽 소동의 일부인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그 때 유타에서 6주간 촬영을 하고 왔어요. 우리는 핼러윈과 나이트 클럽, 파티 같은 분위기가 그의 보통 경험과 아주 벗어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젊은 청년들이 약물 복용으로 죽어 갔을까요? 저는 리버가 떠남으로써 세상이 그의 세대의 정신이 어떻게 닳아 무너지고 있는지 집중하길 소망합니다. 리버는 지구에 살아있으면서 큰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는 그의 목소리를 찾았고 집을 찾았습니다. 온 세상의 이야길 듣는 걸 잘 하던 리버는 아무도 그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는 것에 좌절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체르노빌에서 일어난 일에도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엑슨발데즈의 기름 유출 사건에도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피가 튀는 전쟁에도 아직 충분하질 않습니다."

8. 필모그래피

8.1. 영화

<rowcolor=#ffffff> 연도 작품명 배역 비고
1985 컴퓨터 우주 탐험 울프강 뮬러 -
1986 스탠 바이 미 크리스 챔버스 제8회 영 아티스트 어워드 재키 쿠건 상 공동 수상
모스키토 코스트 찰리 폭스 -
1988 지미의 사춘기 지미 리어든 -
KGB의 아들 제프 그랜트 -
허공에의 질주 대니 포프 제35회 전미비평가 협회 상 남우조연상 수상
1989 인디아나 존스와 최후의 성전 어린 인디 -
1990 바람둥이 길들이기 데보 노드 -
1991 아이다호 마이크 워터스
제7회 미국 독립영화 시상식 남우주연상 수상

제38회 전미비평가 협회 상 남우주연상 수상

제48회 베니스 영화제 볼피 컵 - 남우주연상 수상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룻밤 에디 버드레이스 -
1992 스니커즈 칼 아보가스트 -
1993 싸일런트 저스티스 탤벗 로 -
리버 피닉스의 콜 잇 러브 제임스 라이트 -
2012 다크 블러드 소년 사후 개봉[33]

8.2. 텔레비전

<rowcolor=#ffffff> 연도 방송사 작품명 배역 비고
1982 - 1983 C
B
S
7인의 신부 거스리 맥패든
22회 출연

제5회 영 아티스트 어워드
드라마 부문 최우수 아역상 수상

1984 N
B
C
욕망의 그림자 11세 제피 크로포트 미니시리즈
A
B
C
ABC Afterschool Special 브라이언 엘스워스 에피소드: "Backwards: The Riddle of Dyslexia"
N
B
C
It's Your Move 브라이언 에피소드: "Pilot"
A
B
C
Hotel 케빈 에피소드: "Transitions"
1985 C
B
S
케네디가의 신화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미니시리즈
A
B
C
운명의 사람들 필립 브로건 제7회 영 아티스트 어워드
TV 스페셜 부문 최우수 아역상 수상
N
B
C
패밀리 타이즈 유진 포브스 에피소드: "My Tutor"
1986 C
B
S
Circle of Violence: A Family Drama 크리스 벤필드 TV 영화

8.3. 뮤직비디오

<rowcolor=#ffffff> 연도 아티스트 작품명 배역
1986 Ben E. King Stand by Me 본인[34]
1992 Red Hot Chili Peppers Breaking the Girl 본인[35]

9. 가족 관계

  • 아버지 : 존 리 바텀 (1947년생)
    • 이복 누나 : 조딘 바텀[36] (1963년생)[37]
  • 어머니 : 알린 피닉스 (1944년생)
    • 여동생 : 레인 피닉스 (1972년생)
      • 조카 : 조나스 윈터 (조카)
    • 남동생 : 호아킨 피닉스 (1974년생) / 제수 : 루니 마라
      • 조카 : 리버 피닉스 (2020년생)[38]
    • 여동생 : 리버티 피닉스 (1976년생)
      • 조카 : 리오 에베레스트 에쉬 (1997년생)
      • 조카 : 인디고 오리온 에쉬 (1999 ~ 2001) : 2살 때 폐렴으로 사망.
      • 조카딸 : 스칼렛 제스민 에쉬 (2001년생)
    • 여동생 : 서머 피닉스 (1978년생) / 前 매제 : 케이시 애플렉 / 매제 : 엔디 로드
      • 조카 : 인디아나 오거스트 애플렉 (2004년생)
      • 조카 : 아티커스 애플렉 (2008년생)

10. 연인 관계

  • 마사 플림튼[39] (1986년 1월 - 1989년 6월)
  • 수잔 솔곳[40] (1989년 10월 - 1993년 1월)
  • 사만다 마티스[41] (1992년 11월 - 1993년 10월)

[1] 출생명은 리버 주드 바텀 (River Jude Bottom). [2] 후에 동생인 호아킨의 아들 이름으로 쓰게 된다. [3] 성장한 곳은 로스앤젤레스라고 한다. [4] 사인은 약물 과다 복용이다. [5] # [6] 개명 전 출생명은 존 리 바텀 (John Lee Bottom). 하트 피닉스와 1997년 이혼했다. 근황이 알려지지 않고 있어 2015년 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나 가족들의 공식 입장은 밝혀진 바 없다. [7] 개명 전 출생명은 알린 샤론 듀네츠 (Arlyn Sharon Dunetz). 사회 운동가이다. [8] 풀네임은 레인 조안 오브 아크 피닉스 (Rain Joan of Arc Phoenix). 배우이자 음악가이다. [9] 'Joan of Arc'는 'Jeanne d'Arc' 즉 ' 잔 다르크'의 영어식이다. 참고로 생일은 1972년 11월 21일. [10] 풀네임은 리버티 마리포사 피닉스 (Liberty Mariposa Phoenix). 과거 아역배우이던 시절이 있었다. [11] 풀네임은 서머 조이 피닉스 (Summer Joy Phoenix). 배우 모델 디자이너이다. [12] 또 다른 유명한 당대 할리우드의 최고의 유망주로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발레 소녀로 유명한 제니퍼 코넬리가 있다. 둘 다 준수한 외모와 연기력을 가졌으며 연기 활동을 일찍 시작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1993년 마약으로 요절한 리버와는 다르게 제니퍼 코넬리는 1990년대 선구안이 나빠서 나락을 갈 뻔했지만 준수한 연기력으로 30세를 넘겨서 성공했다. 무엇보다 제니퍼 코넬리는 극심한 헤로인 정키였던 리버와는 다르게 마약을 일절 안 했다. 여담으로 둘의 나이는 동갑이며 제니퍼 코넬리는 동생 호아킨 피닉스와도 친분이 있으므로 만약 리버가 살아 있었다면 둘이 서로 친해졌을 수도 있다. 제니퍼 코넬리가 표지모델로 나온 잡지를 들고 있는 리버. [13] 금발 푸른 눈을 한 리버는 1990년대 당시 꽃미남으로 유명했으며, 이로 인해서 1990년대 할리우드 꽃미남을 언급할 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함께 빠지지 않고 항상 언급된다. [14] 당장 리버 피닉스의 죽음 이후로 성공가도를 달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자신의 우상이 리버 피닉스라고 대놓고 말했을 정도다. 당시 리버의 위상이 얼마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5]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중반 출생자. [16] 리버의 동생들의 이름 또한 매우 히피스럽다. 서머, 레인, 리버티, 리프. [17] 원래 성인 Bottom은 여러 가지로 안 좋은 의미이기는 하다. [18] 게다가 영화 속 배역이 무려 똑똑한 어린이 과학도였다. [19] 죽은 시인의 사회 트루먼 쇼로 알려져 있다. [20] 출처 [21] 일반적으로 마약 중독자들이 만성 중독에 빠져서 시도때도 없이 마약에 중독되어 산다는 점을 본다면 특이하다 생각할 수 있지만, 애초에 코카인, 헤로인이 의약품이었고, 심지어는 과거 의학계에서 아편 중독을 고칠 수 있는 안전한 약으로 홍보되었던 걸 생각하면, 복용 초기에는 약물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의존성을 인식하지 못 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과거 중독자들이 마약 퇴치의 취지로 하는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는 가끔씩만 하다가 어느 순간 약물이 일상으로 침투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패턴이다. 이렇다 보니, 80년대만 하더라도 주사로 투약하지만 않으면 마약에 중독되지 않는다는 미신이 있었고, 슈퍼 모델 지아 카란지도 처음에는 마약을 코로 흡입하다 중독자가 되어 결국은 주사기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에이즈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22] 사실 마약 중독자들 치고 자신이 마약을 하고 다닌다고 대놓고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은 얼마 없다. 단지 티가 날 뿐이지. 리버와 비슷한 즈음 마약 중독으로 인한 자괴감으로 자살한 커트 코베인 역시 자신이 헤로인 중독자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했었다. 마약 중독자 본인이 마약을 하고 다닌다고 공개적으로 자랑하고 다닌 건 2010년대 중후반 트랩 비트를 위시로 한 멈블 래퍼들의 등장 이후이다. [23] 여기서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은, 90년대 초에는 동물권리에 대한 콘셉트 자체가 굉장히 생소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때부터 유기농 식품을 선택할 수 있는 소비자의 권리를 위해 힘 썼는데, 지금에야 채식주의다 유기농이다 많은 선택권이 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이처럼 리버와 같이 일찍부터 많은 사회문제와 개인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낸 사람들 덕분이다. 실제로 이렇게 한 목소리로 낸 유명인들로 인해 팬들은 물론, 일반 대중에게까지 이전에는 뭍혀져 있던 사회 이슈들이 비로소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24] 당시의 PETA는 지금처럼 비난을 받는 단체가 아니었다. [25] 플림튼은 리버와 교제하며 그를 따라 채식주의자로 전향했지만 그가 죽고 시간이 흐른 후로부터는 더 이상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26] 부검 레포트에 흡입한 흔적도 주사 바늘을 꽂은 흔적도, 위장에 의약품이나 캡슐의 흔적도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루를 액체에 녹여 음료 형태로 마셨다는 뜻인데... [27] As for how Mr. Phoenix had taken the drugs, Mr. Carrier said: "There were no needle marks. Maybe it was ingested, maybe it was inhaled. How it was introduced into his body is unknown at this time." [28] 참고로 당시 존 프루시안테 레드 핫 칠리 페퍼스를 탈퇴하고 나서 마약에 절어 엉망으로 살았다. [29] 일단, 유족들이 의혹을 제기한 적이 없기 때문에 조니 뎁이 애초에 수사를 받을 일이 없어서, 조니 뎁이 일부러 덮었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하단에 언급되는 어머니의 추도문도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약물로 죽어갔느냐'라면서 약물 남용의 위험을 경고하는 내용이다. 여담으로 리버 피닉스의 죽음에 대해 회상하는 글을 쓴 밥 포레스트는 이후 정신을 차리고 중독자 재활 시설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 [30] 앤디 워홀의 젊은 시절이 리버와 사뭇 닮아있었다고. [31] 리버 피닉스가 출연을 앞두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확인이 되지 않은 루머이다. [32] 아쉽게도 캐스팅이 시작되기 전에 리버는 죽었고, 모두 알다시피 그 배역은 디카프리오에게 가서 그의 리즈시절 기념비적 영상으로 회자되고 있다. 만약 리버가 살아있었다면 우리는 리버의 랭보를 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33] 1993년작이지만 리버가 촬영 기간 도중 사망하여 미완성 상태로 방치됐었다. 재편집 및 재촬영으로 줄거리를 바꾸어 완성시킨 후 2012년이 되어서야 개봉했다. [34] 영화 《 스탠 바이 미》의 DVD에 수록되어 있음 [35] 카메오 [36] 트러스트(Trust)라는 이름도 있다. [37] 존이 만 15세 때 한 여자를 임신시켜 낳은 딸 [38] 호아킨 피닉스 루니 마라와의 사이에서 생긴 호아킨 피닉스의 첫 아들이며, 형 리버 피닉스를 기리며 지은 이름이다. 즉, 일찍 돌아가신 큰아버지의 이름을 조카가 이어받은 셈이다. [39] 리버의 첫 여자친구. 리버는 《모스키토 코스트》를 촬영하기 1년 전, 뉴욕 시민인 마사와 처음 만났다. "우린 서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촬영이 시작되고 나니까 둘 다 많이 변했다는 걸 깨달았죠. 모르겠어요, 우린 더 쿨해진 것 같아요. 우리 둘 다 몇 인치 더 성장했죠." [40] 둘은 한 파티에서 만났다. 그때 리버는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인 척하며 자신을 그의 애칭인 '리오'라고 소개했고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한 친구가 그녀에게 그가 유명한 배우이자 음악가인 리버 피닉스라는 걸 알려줬고 그녀가 리버에게 네가 진짜 리버 피닉스가 맞냐고 물어보자 리버는 "아뇨, 아니에요. 그 남자는 저랑 전혀 안 닮았어요!"라고 했다. 둘은 플로리다 주 미카노피에 있는 리버네 목장 근처의 집에서 동거를 했다. 리버는 그녀가 미용사로서 공부할 수 있도록 금전적인 지원을 해줬고 그녀는 리버를 돌보고 옷을 사주고 리버가 하는 일의 계획을 세워주는 등 리버를 자식처럼 대했다. [41] 둘은 《콜 잇 러브》 촬영 중 관계를 형성해나갔고 리버가 죽기 전까지 교제했다. 마티스는 리버가 죽은 후 이런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그의 인생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은 완전히 바뀌었고 몇몇은 아름답게 변화했죠. 이 계기(리버의 죽음) 덕분에 그의 가족들조차 훨씬 더 단단해졌어요. 그러니 아마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