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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심인 저우청진의 풍경
시가지 북쪽의 바이포산 전경
1. 개요
东平영어 Dongping
산둥성 타이안시의 현. 지난시와 허쩌시, 랴오청과 지닝시 사이의 평원에 위치하며 인구는 현 치고 많은 80만명이다. 시가지는 남쪽의 다칭강과 화베이 지역의 주요 담수호인 서쪽의 둥핑호 덕에 물이 풍부하면서도 북쪽과 동쪽에는 산지가 있어 방어에 유리하다. 따라서 상고대부터 동이족의 도시가 세워져 무염 (無鹽), 수창 (須昌) 등으로 불리다가 전한 시기 '동쪽의 평안'이란 뜻인 동평 (東平) 지명이 정해졌다.
수당대에는 운주 (鄆州)라 불렸고, 고구려계 이정기가 자립한 치정 절도사국 (이제)의 수도가 되어 번영하였다. 북송 말엽에 동평부 (東平府)가 설치되었고, 서남쪽의 양산박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였기에 《 수호전》에 자주 언급되었다. 동평 외에 그 치소인 주성 (州城)으로 불리기도 했다. 다만 명대 들어 동평주로 격하되었고, 명청교체기 및 청말~민국기에는 여러 전란을 겪었다. 시가지는 고대에는 동쪽 구릉지대, 중세부터는 서쪽 15km 지점의 저우청진 (州城镇)에 있다가 근래 들어 현 위치로 이전되었다. 송원대에 경제적으로 번영한 도시답게 시내에는 4천여 후이족 공동체가 있다.
주요 출신 인물로 중국 4대 추녀 중 하나인 종무염, 전한 시기의 학자 하후승, 건안칠자 중 하나인 유정, 북송 초기의 고관 양호, 화가 양해, 70-80년대 중공의 고위 간부 완리 등이 있다.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홍수와 전란, 문화대혁명, 수차례의 시가지 교체 때문에 문화유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구시가지인 저우청진에 옛 모습이 일부 남아있다. 서쪽의 둥핑호에는 대운하가 지나고, 사방으로 고속도로가 있다. 철도 교통은 와르철도가 둥핑역을 지나긴 하지만, 석탄 운반용이라 사실상 부재하다. 다만 지난~지닝을 잇는 지지고속철도가 공사 중이며, 둥핑역에 정차할 예정이다.
2. 역사
일대에서는 신석기 유적이 발견되었고, 상고대에는 동이족이 거주했다. 서주 시기에는 동이 계열의 제후국인 수구 (须句), 숙 (宿), 장 (鄣)과 화하계 제후국인 수 (遂)가 공존했다. 춘추시대 들어 수와 장은 제나라, 수구는 송나라, 숙은 노나라에 병합되었다. 노나라는 시가지 동남쪽의 현 후팅촌에 후읍 (郈邑)을, 제나라는 시가지 동쪽의 현 우옌촌에 무염읍 (無鹽邑)을 두었다. 전국시대에 일대는 전부 제나라에 속했다.2.1. 고대
진나라 시기 시가지 동쪽 다웬강변에 무염현 (無鹽縣), 서남쪽 20km 지점의 둥핑호 연안에 수장현 (張縣)이 설치되어 설군 (薛郡)에 속하였다. 전한 시기에 무염현은 제후국인 양국 (梁國)에 속했고, 장현은 수양현 (壽良縣)으로 개칭되어 동군 (東郡)에 속했다. 또한 현 시가지 서쪽 15km 지점의 둥핑호 연안에 수구국을 계승하여 세워진 수창현 (須昌縣), 시가지 서부에 장현 (鄣縣)이 신설되어 역시 동군에 소속되었다. 이때 남쪽 15km 지점의 현 원상현 관할에 설치된 동평륙현 (東平陸縣)은 후일 동평 지명의 기원이 되었다.기원전 144년, 한문제의 아들인 양왕 유무가 사망한 후 양국이 분할되어 유무의 삼남 유팽리가 무염현을 중심으로 한 제동국 (濟東國)에 봉해졌다. 기원전 116년, 유팽리가 잔혹한 성격으로 인해 폐위되자 제동국은 대하군 (大河郡)으로 개편되었다. 한무제의 13주 개편 후 대하군과 동군은 모두 연주 (兗州)에 소속되었다. 기원전 52년, 한선제가 아들 유우를 동평왕에 봉하며 대하군은 동평국 (東平國)으로 개편되었다.[1] 기원전 31년, 유우의 잘못으로 현 지닝시에 해당하는 항보현과 번현이 산양군으로 이관되었다가 3년 후 환원되었다.
2.1.1. 동평국 (東平國)
이후 30여년간 번왕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황자들을 봉하는 추은 (推恩)으로 동평국 산하에는 29개의 후국이 신설되었다. 그중 율향 (栗鄕), 서양(西陽)은 산양군에 이관되었고 상구(桑丘), 도향 (桃鄕), 부양 (富陽)은 태산군으로 이관되었다. 기원전 4년, 유우의 아들 동평양왕 유운이 죄를 지어 자살하자 동평국이 폐지되어 동평군 (東平郡)이 되었다. 서기 1년, 유운의 아들 유개명이 왕으로 봉해지며 왕국이 부활했다.[2] 서기 6년, 유개명이 아들 없이 죽자 그의 동생 엄향후 유신의 아들 유광이 계승하였다. 다만 이듬해 유신이 반란을 일으킨 동군 태수 적의에 가담하여 칭제한 것에 연루되어 유광까지 주살되며 동평국은 다시 동평군이 되었다.신나라 시기 대하군은 유염군 (有鹽郡)으로, 동군은 치정군 (治亭郡)으로 개칭되었다가 후한 들어 기존으로 환원되었다. 39년, 광무제의 유창이 동평공으로 봉해졌다가 41년에 동평왕으로 승격되며 다시 동평국이 설치되었다. 비슷한 시기 수양현은 수장현 (壽張縣)으로 개칭되었고, 59년에 수창현과 함께 동평국으로 이관되었다. 시가지 동쪽 10km 지점에 있던 태산군 (泰山郡) 산하의 부양현 (富陽縣)도 이 무렵 폐지되었다.[3] 이로써 일대에는 동평군 산하 무염, 수장, 수현, 장현이 있었다.
84년에는 유창의 아들 유상이 임성왕으로 책봉되며 임성, 항보, 번현이 임성국으로 분리되었다. 120년에는 산양군 산하 영향현이 동평국으로 이전되었다. 유창 사후 부자상속으로 유충-유창-유단-유개로 이어지던 동평국은 220년 조위 건국과 함께 폐지되어 군으로 돌아갔다. 223년에 조조의 아들 조휘 (曹徽)가 동평왕으로 봉해졌고, 이듬해에 수장현왕 (壽張縣王)으로 격하되었다가 232년 재차 동평왕이 되었다. 그 무렵 동평국의 치소는 무염현에서 수창현으로 이전되었다. 또한 제북국의 강현, 동군의 범현이 동평국으로 이전되었다.
2.2. 중세
송대에 세워져 청대에 보수된 석패방
265년 서진 건국과 함께 사마의의 종손 사마무가 동평왕으로 봉해졌고, 307년에는 사마무의 정적인 구희가 동평왕이 되었다. 다만 둘다 311년 정강의 변 당시 사망하였고, 동평군으로 환원되었다. 5호 16국 시기 일대는 325년 후조가 점령했다가 351년 은호의 북벌로 동진령이 되었다. 다만 355년 전연, 370년 전진이 정복했다가 384년 사현의 북벌로 재차 동진령이 되었다. 다만 388년 사현의 사후 후연의 모용수가 중원을 압박하더니 394년, 동평태수 위관을 전사시키고 일대를 정복하였다. 그리고 398년, 동평군은 연주에서 서주 (徐州)로 이관되었다가 같은해 북위가 후연을 압박하는 혼란기에 현지 한족 군벌 벽려혼이 자립하여 동진에 복속하였다. 다만 이듬해 남연이 정복하여 신설한 병주 (并州)에 귀속시켰다가 410년 유유가 정복한 후 연주로 환원되었다.
422년, 북위 군대가 제수 (濟水) 서안 지역을 정복하며 동평군은 북위와 유송 사이에 분할되었다. 유송은 치소를 산에 의지하는 무염성에 두고 수창, 수장, 무염, 평륙현의 치소를 모두 그에 이전시켰지만 467년 내분 도중에 청주 및 연주 자사가 투항하여 동평군 전역이 북위령이 되었다. 이듬해 일대는 신설된 동연주 (東兗州)에 소속되었다가, 494년 다시 연주로 환원되었다. 북제 시기인 556년에 기존의 동평군을 이루던 수창, 수장, 범, 부성, 강현을 무염현에 병합시키며 수창현이라 명명하였다. 동시에 태산군과 동양평군이 폐지되며 그 산하에 있던 5개의 현들이[4] 동평군에 병합되었고, 그중 낙평현을 평륙현에 병합시키고 낙평현이라 명명했다. 또한 안덕군 산하 평원현이 편입되며 분할된 대산현이 신설되었고[8개현], 이렇게 확정된 동평군의 치소는 현 타이안시인 박평현으로 정해졌다.
북주 시기 동평군은 낙평현을 내보내어 7개현을 통솔했다. 한편 북제 시기부터 일대에는 여러 불교 사원이 세워졌다. 수나라 들어 583년에 동평군은 폐지되어 연주에 직할되었고, 590년 일대에 운주 (鄆州)가 신설되었다. 그 치소인 운성 (鄆城)은 현 윈청현에 있었다. 운주는 607년 동평군, 617년 다시 운주, 618년 동평군을 거쳐 619년 운주로 돌아왔다. 한편 수장현이 재설치되어 제북군에 편성되었다가 622년경 운주 관할로 복귀하였다. 742년에는 또다시 동평군으로 전환하며 치소를 수창으로 옮겼다. 754년 제양군을 폐지하며 5개현[6]이 동평군으로 이전되었고, 그중 장청현은 이후 제남군으로 재배치된다.
2.2.1. 이정기 정권
756년, 동평군은 운주로 전환되었고 이듬해 또 동평군이 되었다가 758년 운주로 고정되었다. 8세기 후반 안사의 난 이후 고구려계 치청절도사 이정기가 일대를 장악했다. 그는 779년, 본거지를 청주 (현 칭저우)에서 중원과 가까운 운주로 옮겼다. 이정기 이후로도 이납, 이사고, 이사도로 이어지던 이제 (李齊) 정권은 819년에 당나라 군대가 운주성을 함락하며 종식되었다. 이후 운주의 치소는 수창현으로 고정되었고, 이정기의 운주성은 1000년의 황하 대범람 때에 제수가 사라지며 형성된 둥핑호에 수몰되었다. 한편, 대범람 당시 수창현이 침수되고 성벽이 무너지자 지주 요현 (姚鉉)은 현 시가지 서쪽에 새 도시인 주성 (州城)을 세웠다.
2.2.2. 동평부 (東平府)
대범람 후에 세워진 주성 (동평부성). 성벽은 본래 토성이다 청대에 전성으로 개축, 중일전쟁기 헐렸다가 최근 북벽만 일부 재건되었다. 다만 좌측 해자에 놓인 다리는 송명대 것.
북송 시기 운주는 안정을 누리며 발전했고, 1119년 동평부 (東平府)로 승격되었다. 그 무렵, 《 수호전》으로 알려진 송강의 반군이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조정에 귀순하여 동평의 수비를 맡기도 했다. 정강의 변 이후 제남을 지키던 유예는 1128년 12월, 금나라에 투항하여 동평지부로 봉해졌다. 1130년 금나라는 유예를 옹립하여 화북의 괴뢰정권인 유제를 세웠고, 동평부는 수도인 대명부에 대치되는 동경으로 승격되었다. 다만 이는 1137년 유제의 멸망 후 취소되었다.
금나라 시기 동평부는 산동서로 (山東西路)의 치소였다가 후일 동평로 (東平路)로 승격되었다. 1161년, 채석기 전투에서 금군이 패하고 해릉양왕이 암살되는 혼란을 틈타 산동의 한인 신기질과 경경이 2천의 병력과 봉기하였다. 1162년, 동평부를 장악한 신기질은 직접 남송과 연락을 위해 왕래했으나 돌아와보니 장안국이 배신하여 경결이 살해되고 봉기군이 와해되어 있었다. 분노한 그는 50의 결사대를 모아 금군 진영을 급습, 장안국을 잡아 남송으로 망명하였다.
1220년 산동을 공격한 칭기즈칸은 한인 엄실을 동평행태 (東平行台)에 봉했고, 이후로도 반세기 가량 엄씨 가문이 동평총관 (東平总管) 혹은 동평만호(東平萬戶)를 역임했다. 1262년 이단의 난 시에 만호 엄충범이 토벌군을 동평에 집결시켰다. 원나라 시기 동평은 경강 대운하와 제수의 합류지로써 경제적으로 발전하였고, 자체적인 동평로의 치소였다.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주성'으로 언급하며 멋진 대도시라 묘사하였다.
2.3. 근세
1600년경에 세워진 주청 청진사
1367년 명나라 군이 일대를 점령하여 동평로를 동평부로 환원시켰다. 1370년 수장현을 수성현 (须城)과 양곡현 (阳谷)으로 분리시켰다. 1374년, 동평부는 동평주 (東平州)로 강등되어 제녕부 (济寧府)에 소속되었다. 동시에 수성현도 폐지되었고, 송원교체기에 파괴되었던 동평성이 재건되었다. 그리고 1385년, 동평주는 연주부 (兗州府)로 이관되었다. 한편 1438년, 다수의 후이족이 동평에 정착하였다.
명대 후반 들어 운하가 퇴적되며 동평은 점차 쇠퇴했고, 명청교체기의 혼란기에 주민들이 모여 관아에 방화하는 등 민심이 흉흉해졌다. 1641년에는 이자성의 농민 반란군이 동평을 일시 점령했다가 명군의 반격으로 격퇴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혼란은 청나라 들어 보갑제 (保甲制)가 실시되며 일단락되었다.
1730년, 동평주는 동평직례주 (东平直隶州)가 되어 조정에 직할되었다가 1735년 산주 (散州)로 격하되어 재차 동평주가 되었다. 5개 현[7]과 37개 보를 관할했고, 그 치소는 동평주성 (東平州城)에 있었다. 건륭제 연간 동평성은 기존의 토성에서 벽돌성으로 개축되었다. 다만 청대 중반부터 잦은 홍수와 가뭄, 질병으로 인해 일대에서는 도적화된 농민들의 민란이 자주 일어나 치안이 무너졌다. 19세기 중반에는 태평천국과 연계된 반군이 창궐했고, 1861년 장낙행이 이끄는 염군이 두 차례 동평성을 포위했으나 함락하지는 못하였다.
2.4. 근현대
저우청진의 다칭강 건너편에 옛 당송 대의 동평성을 재현한 세트장인 동평수호경시성 (东平水浒影视城)
1910년 동평에는 주의사회, 참사회가 설립되었다. 신해혁명 후 1913년, 주가 폐지되어 동평현 (東平县)으로 개칭되었고 제서도 (濟西道)에 속했다. 한편 청 멸망 후 수리사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자주 수해를 벌어졌고, 도적이 창궐했다. 1918년에 현지 토비 수령 장점원이 7백인과 동평성을 공격했는데, 서문 수비를 맡은 하탁옥이 내통하여 함락되고 약탈되었다. 1926년에는 농민 반란군인 홍창회가 군중을 모아 성을 공격하기도 했다.
1937년 말, 일본군이 동평성을 공습하자 현장 손영한은 도주했다. 정규군이 와해되며 현성 외부는 무정부 상태에 놓였고, 이듬해 8월 약 1천의 일본군이 침공해오자 수백여 민병대가 맞서다가 철수했다. 이후 펑슈펑의 국민혁명군, 팔로군 산동종대 등이 일대에서 항일 유격 활동을 했다. 특히 팔로군은 1943년 10월, 야습을 통해 일본군에 1백여 사상자를 안겼고 1944년 말까지 일본군의 통제력은 현성 및 주요 도로와 철도에 그쳤다. 이후 둥핑전역에 나선 팔로군은 여러 차례 실패한 끝에 1945년 5월, 2천이 넘는 일본군을 섬멸하고 현성을 점령하였다. 이후 일본군의 재점령 및 요새화를 우려하여 성벽이 대부분 헐렸다.
국공내전기 둥핑은 수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1947년 3월 국민혁명군이 동평현을 점령했으나 이듬달 철수하였고, 8월에 재차 점령했다가 역시 11월 공산군에게 패퇴하였다. 그리고 12월, 북서쪽 둥어현의 지주들이 결성한 환향단 부대가 둥핑을 기습 점령했다가 이듬해 1월에 인민해방군이 진주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둥핑현은 1950년 타이안전구, 1958년 랴오청전구를 거쳐 1959년 지난시에 소속되었다. 같은해 둥핑현이 폐지되고 다칭강 이북은 기존에 둥핑현에 속하다 재건된 핑인현, 이남은 원상현으로 분할되었다.
다만 1961년 타이안전구가 복구되며 둥핑현도 이듬해 새해에 재설치되었다. 타이안전구는 1967년 타이안지구, 1985년 타이안시로 승격되었다. 1988년에 현의 치소가 기존의 저우청진 (州城镇)에서 현재의 후툰촌 (后屯村)으로 이전되었다. 1996년에는 핑인현의 쥐셴향 일대가 둥핑현에 병합되었다. 문화대혁명 시기 둥핑현에서도 여러 반달리즘이 있었다. 특히 종교 활동이 금지되며, 1600년경 건립된 저우청 청진사가 파괴되고 이맘이 축출되었으며 쿠란이 소각되었다. 청진사는 1979년 종교의 자유 회복 후, 1997년 현정부의 지원으로 2001년에야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