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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영양 남씨[1] |
출생 | 1900년[2] 1월 8일 |
경상북도 안동군 일직면 송리리[3] | |
사망 | 1950년 10월 10일 |
경상북도 대구시 | |
가족 |
아내 권계승[4], 슬하 5남 장남 남경호[5], 차남 남상호[6], 3남 남태호[7] 4남 남규호[8], 5남 남철호[9]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1122호 |
상훈 | 대통령표창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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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00년 1월 8일 경상북도 안동군(현 안동시) 일직면 송리리에서 아버지 남병화(南炳和, 1873 ~ 1944. 10. 1)와 어머니 진성 이씨(1874 ~ 1943. 7. 20)[10]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925년 2월 안동군에서 개최된 경북청년대회에 참가하여 대회 준비위원에 선임되었고, 8월에는 안동군 지역 내 8개의 청년회를 통합한 안동청년연맹 결성에 참여해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인 1926년 겨울에는 안동군 안동면 읍내 여인숙 하성향(河成鄕)의 집에서 조선공산당원인 김남수(金南洙)로부터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라는 권유를 받고 이에 승낙해 가입했다. 이후 이회승(李會昇)을 책임자로 하는 경북 야체이카에 배속되었고, 1927년 3월 일직청년회 집행위원이 되었다.
그 뒤 1927년 가을, 안동군 안동면 읍내 북문[11] 밖(현 안동시 북문동) 여인숙 손문로(孫文老)의 집에서 개최된 야체이카 회의에 참여했는데, 안상길(安相吉)의 명령을 받은 이회승으로부터 조선공산당원이 되라는 지령을 받고 이에 승낙해 본격적으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고려공산청년회를 탈퇴한 그는 곧 안동 야체이카에 배속되었고, 이 무렵 안동 풍산소작인회 집행위원으로도 선출되어 활동했다.
1928년부터는 신간회 안동지회에 참여해 상무간사, 1929년 1월에는 대표위원 등으로 활동하다가 1930년 7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0년 11월 1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구류갱신 결정이 났고, 12월 27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이른바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형,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곧 출옥했다.
광복 후에는 경상북도 대구시 대명동(현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 거주하면서 좌익 활동에 관여했다. 이 때문에 경찰서에 잠시 구금되기도 했고,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 직후에 예비검속되어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으며, 대구형무소로 이송된 뒤 10월 10일 총살당했다.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안동시 일직면 송리리에 안장되었다가 2008년 11월 2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1]
수의공파(修義公派)-안동 송동(松洞) 문중. 24세 재(在) 항렬. 족보명은 남재장(南在璋).
[2]
남씨대동보 권4 893쪽에는 1888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3]
인근의 망호리와 함께
영양 남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남자현도 이 마을 출신이다.
[4]
1895 ~ 1958. 8. 2.
안동 권씨 부정공파(副正公派) 권영진(權寧瑨, 이명 권영국權寧國, 1879 ~ 1947. 11. 3)의 장녀이다.
[5]
南敬鎬. 남씨대동보 권4 893쪽에는 南京鎬로 등재되어 있다. 1916 ~ 1946. 12. 15.
[6]
南相鎬. 남씨대동보 권4 894쪽에는 南象鎬로 등재되어 있다. 1919 ~ 1948. 1. 16.
[7]
南泰鎬.
[8]
南奎鎬. 1932 ~ .
[9]
南哲鎬. 1935 ~ .
[10]
이한봉(李翰鳳)의 딸이다.
[11]
지금의 안동시 북문동
안동의료원 정문 앞에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