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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uby(蘭, ruby=らん)][ruby(学, ruby=がく)] · Rangaku에도 시대 일본으로 들어온 서양의 학문을 말한다. 난(蘭)은 네덜란드를 한자 음차로 표기한 화란(和蘭)에서 비롯했으며 이는 네덜란드를 통해 일본으로 서양의 학문이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2. 상세
에도 막부는 시마바라의 난을 계기로 기독교를 금지하고 쇄국 정책을 추진했지만, 네덜란드는 기독교를 포교하지 않는 조건으로 나가사키의 데지마를 거점으로 에도 막부와 제한적으로 교류했다. 네덜란드와의 교류를 통해 제한적으로나마 일본으로 서양의 학문이 전파되었다.16세기 전국시대부터 서양의 학문이 전파되기 시작하면서, 이후 에도 막부 시대에는 난학자들이 배출되었으며, 17세기 이후에는 일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네덜란드의 서적을 일본어로 번역한 서적이 나오기도 했다. 대표적인 서적이 18세기 일본에서 서양의 책을 "완역한" 최초의 사례인 해체신서. 한편 에도 막부의 난학은 과학 기술과 의학 분야를 위주로 지리나 인문학, 예술 분야 등에도 영향을 끼쳤지만, 종교에 관해서는 철저히 탄압했다.
해부학 외에도, 뇌전기의 발명이나 세키 다카카즈의 미적분 발견, 미우라 바이엔의 변증법 제시 등 근대의 강제적인 개항 이전부터 연구해왔던 난학 덕분에 일본의 지식인들은 개항 후 빠르게 신문물에 적응 할 수 있었으며, 막부와 지식인은 데지마의 네덜란드인들로부터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난학은 일본이 비교적 빠르게 근대화에 성공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난학숙(蘭学塾)이라고 하여, 에도 시대 난학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기관이 있었다. 에도,오사카,나가사키,사쿠라 등에 있었으며, 그중 나가사키의 나루타키주쿠는 1824년에 독일인이면서 네덜란드의 군의관이었던 시볼트가 설립하였는데, 진료소를 겸했으며 일본인들에게 서양 의학과 자연과학을 강의하였다. [1]
1853년 쿠로후네 사건과 이듬해의 미일화친조약으로 에도 막부는 초기부터 유지했던 쇄국 정책을 폐지한다. 이때 네덜란드 이외의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학문은 난학과의 구분을 위해 양학(洋学)으로 부르기도 했다.
3. 비판
역사학계에서는 난학이 당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시각이 주류지만,[2] 근래에 들어선 난학의 역할이 제한적이었다는 의견 또한 제시되고 있다.이와 관련해서, 한국의 문헌학자 김시덕 교수는 "난학이 큰일을 했다고 보는 것이 정(正), 하지만 제한적이었다고 하는 게 반(反),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난학은 역할을 했다고 하는 게 합(合)이라고 한다면, 저는 반(反)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한국과 일본에서 "반(反)"에 해당하는 의견이 적음을 지적한다. 김시덕 교수는 당대 일본 사회 내 백성의 측면에 집중하는데, 일본 근대화의 발판이 되었다고 하는 난학이 당대 일본 백성들에게까지 실질적으로 가져다 준 확실한 혜택은 우두법(종두법) 정도밖에 없었고, 난학으로 유입된 해부학 같은 서양의 의학 기술이라는 것도 한의학의 단점을 제치고 그것을 완벽하게 대체하지도, 일본의 치료 수준을 비약적으로 높이지도 못했다고 말한다. 즉, 난학이 지식인을 넘어서, 당대 일본 사회의 민중들에게까지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이와 더불어, 김시덕 교수는 난학을 들먹이며 한국을 비교하고 까내리는 일부 혐한 분자들에게 "역사과잉" 문제를 거론한다. 일본은 대항해시대를 거쳤기에 똑같이 유럽에 대해 문을 열었던 오스만튀르크나 페르시아, 청나라와 비교해야 하고, 조선은 청제국 내에서의 다른 성(省)들과 비교해야 한다며, 조선과의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 #[3]
김시덕 교수가 스스로 말했듯, 김시덕 교수의 난학 반론(反論)이 학계의 주류 견해나 정론은 아니다. 하지만, 김시덕 교수의 난학 반론(反論)이 꼭 정답은 아닐지라도 김시덕 교수의 말대로 난학을 혐한의 소재로써 이용하는건 옳지 못하며, 또한 난학 의식의 다양성은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1]
당시 막부는 서양인들의 거주를 데지마로 한정하였기에 지볼트는 데지마에서 살면서 나루타키주쿠로 출근하였다. 이마저도 당시 서양인은 데지마 바깥으로 나가는 것 조차 금지되었기에 지볼트는 막부로부터 특혜를 받은 것이었다.
[2]
한국의 일본사학계 포함.
https://www.japanhis.or.kr/index.ink
[3]
김시덕, <일본인 이야기> 2권, 메디치미디어,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