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07:07:12

김인식/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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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추어 시절2. 프로 시절
2.1. 해태 타이거즈 수석 코치 시절2.2.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시절2.3. OB- 두산 베어스 감독 시절2.4.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2.5. 세부 성적
3. 국가대표 야구팀 감독

1. 아마추어 시절

은퇴 이후 모교인 배문고 감독[1]을 시작으로 지도자 인생을 시작하여 상문고(1978~1980), 동국대(1982~1985)등에서 감독을 역임했다. 동국대 시절에는 특유의 자율 훈련으로 유명했으며 부임 직후에는 악명높은 아침 산길 구보를 없애기도 했다. 이 때 장호연, 한대화, 이건열, 송진우, 김민호 등의 선수들을 길러냈다.

2. 프로 시절

2.1. 해태 타이거즈 수석 코치 시절

파일:해태타이거즈 김인식 코치.jpg
파일:해태 타이거즈 엠블럼(1982~1995).svg 해태 타이거즈 코치시절

1986년 한일은행 시절 선배인 김응용 감독의 부름을 받고 해태 타이거즈의 수석코치로 부임하면서 프로야구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 당시 사실상의 투수코치 역할을 겸하면서 전성기 해태의 막강 투수진을 완성했으며, 김응용과 김인식이 함께 일한 1986~1989년 사이에 해태는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이 당시 김인식 코치의 역할은 단순한 코치 이상의 조력자로서, 권위적인 김응용 감독과 선수단 사이에서 분위기를 조절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 OB 베어스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된 한대화가 은퇴를 결심하고 임의탈퇴 공시되어 대둔산에 칩거하고 있을때 직접 찾아가 그를 설득해서 합류시킨 것도 김인식 수석코치였다.

코치에게도 육두문자를 수시로 내뱉던 괄괄한 성격의 김응용 감독이었지만 유독 김인식 코치만은 상당히 존중하고 때로는 어려워하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호텔 로비의 대형 TV 앞에서 혼자 리모콘을 들고 채널 선택권을 독점하던 김응용 감독 앞에서 태연하게 자기가 보고 싶은 채널로 돌려버리는 유일한 인물이었다고... 그런데도 유독 김인식 코치 앞에선 좀처럼 싫은 소리를 못했던 김응용 감독도 미스테리다. 한일은행 선후배 사이라는 돈독한 관계도 있지만, 김응용에겐 자신이 잘 모르는 투수분야의 전문지식을 가진데다 무뚝뚝한 자기 대신에 선수들과 소통하고 어루만져줄 부드러운 성격을 가진 김인식이 꼭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이 당시부터 차세대 감독 후보로 일치감치 주목받던 김인식은 1990년 전라북도를 연고로 한 제 8구단 쌍방울 레이더스의 초대 감독으로 낙점되어 감독으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한다.

2.2.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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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KPuIYF.png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시절

1991년부터 쌍방울 레이더스가 1군 리그에 합류하면서 시즌 초에는 자타공인 꼴찌 전력으로 평가받았으나 첫 해부터 예상 외의 선전, 이 해 52승 71패 3무의 성적으로 LG 트윈스와 함께 공동 6위에 올랐다.[2] 최하위는 2년 연속 꼴찌의 암흑기였던 OB 베어스. 9승 7패 27세이브 whip 0.90 ERA 1.64의 성적으로 신인왕을 차지한 특급 좌완 조규제가 뒷문을 잠갔으며 타격에서는 27홈런 92타점 타율 .262의 김기태가 대활약했다. 조규제의 경우 마무리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6회 이후를 책임지는 중무리로 뛰었으며, 김기태의 경우 시즌 초반 두달 동안 극도의 부진을 겪었으나 김인식 감독이 끝까지 3~4번에 고정시키고 스타팅 멤버에 출장시키면서 시즌 중반부터 포텐셜이 폭발했다. 또한 김원형도 데뷔 첫승이후 내리 8연패로 몰리고 김원형 본인이 2군행을 자청해도 끝까지 1군 선발로 뛰게 만들었다가 선동열을 상대로 최연소 완봉승[3]을 터뜨리고 그 후 포텐이 터지면서 쌍방울 주축 선발로 자리매김했다. 이 때부터 김인식 감독의 불펜 혹사 성향믿음의 야구라는 장단점이 이미 눈에 띄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4]

1992년에는 전년도 신인왕을 차지하면서 뒷문을 책임졌던 조규제가 혹사의 여파로 7승 7패 8세이브 ERA 3.17로 부진에 빠지면서 투타의 밸런스가 붕괴, 41승 1무 84패 승률 .329의 초라한 성적으로 꼴찌로 추락하고 말았다. 결국 이 해를 끝으로 쌍방울과 재계약에 실패하면서 야인으로 돌아간 김인식은 1994년까지 스포츠신문의 해설위원 등으로 일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엿보았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이건열이 밝히길 김인식이 해태 수석코치에서 쌍방울 감독으로 옮겨가면서 동국대-해태 제자이자 해태에서 주전 포지션 없이 떠돌던 이건열을 같이 데리고 가려고 했으나 김응용 감독이 막았다고 밝혔다. 비록 주전 포지션은 없지만 막상 남 주기에는 아까운 계륵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덧붙였다.

2.3. OB- 두산 베어스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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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OB 베어스 엠블럼.svg OB 베어스 감독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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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1999~2009).svg 두산 베어스 감독시절

1994년 OB 베어스 항명파동으로 팀 분위기가 완전히 와해되어 버린 OB 베어스는 결국 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윤동균의 후임 감독으로 김인식을 선택한다. 애초에는 선수단 장악에 있어서 강성인 백인천 감독이 유력한 후보였으나 최종적으로 인화력이 있는 김인식으로 선회했다. 그리고 이 선택이 결과적으로 김인식 본인에게나 두산 베어스의 역사에서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니...

1995년 시즌 초반 전문가들의 OB에 대한 예상은 잘 해야 5~6위권 전력이라는 평가였으나, 시즌 초반부터 공격력이 대폭발하면서 수위로 치고 나간 OB는 예상을 깨고 13년만의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투수 쪽에서는 에이스 김상진3경기 연속 완봉승을 포함해 17승 7패 ERA 2.11의 커리어 하이 성적을 올렸고, 2선발 권명철이 15승 8패 ERA 2.47의 성적을 거두었다. 타선에서는 25홈런 101타점으로 최초의 잠실 홈런왕을 차지한 김상호의 활약과 하위타선에 붙박이로 배치된 2년차 고졸 신인 심정수의 21홈런, 그 외에도 14홈런을 친 공격형 신인포수 이도형이나 베테랑 김형석, 이명수 등이 강타선을 구축했다.

이 해 OB는 사실상 대어급의 전력 보강이 전무한 상황에서 팀 케미스트리가 완전히 무너진 팀을 추스르고, 8월 중순까지 무려 6게임이나 벌어져 있던 1위 LG 트윈스와의 승차를 최종전에서 불과 반 경기차이로 뒤집고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차지함으로서 미라클 두산[5]이라는 팀 컬러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이 당시 김인식 감독은 박철순, 김형석, 김상호, 장호연 등의 고참선수들을 적절히 활용함과 동시에 심정수, 정수근, 진필중 등의 신인급 선수들을 육성하여 붕괴 직전의 팀을 다음해 우승으로 이끄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96년에는 5년동안 평균 188.1이닝을 던진 에이스 김상진이 혹사의 여파로 부진에 빠지고 당시 방위 복무 중이었던 권명철 장원진이 방위병 출전금지 조치를 받아 공익근무요원으로 남은 기간 동안 복무하게 되어 전력에서 이탈했다. 게다가 김형석과 박철순 등의 노장 선수들이 노쇠화하면서 급추락했다. 전년도 1위 팀이 꼴찌로 추락하는 유일한 사례를 남기고 말았다. 사실 전력상 꼴찌까지는 하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당시 초특급 신인이었던 고려대학교 포수 진갑용의 2차 1순위 지명권을 놓고 7위 LG 트윈스와 꼴찌 경쟁을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결국 1997년부터 서서히 팀의 세대교체에 들어간 김인식 감독은 10년 동안 3, 4번 타자로 활약한 김형석을 방출하고, 1998년 시즌 후에는 김상호도 류택현과 함께 1억원의 현금 트레이드로 LG 트윈스에 내보냈다. 에이스였던 김상진도 구단의 사정상 현금 5억 5천만원에 삼성 라이온즈에 팔았다.

그렇게 김인식 감독은 정수근, 홍성흔, 심정수, 김동주 등의 젊은 선수 중심으로 개편하면서 1998년부터 두산 베어스를 황금기로 이끌기 시작한다.

성공적인 리빌딩으로 젊어진 두산 베어스는 1998년 4위, 1999년엔 양대리그 승률 1위를 차지했으나 1999년에는 플레이오프에서 한화 이글스에게 4연패를 당하면서 우승을 놓치고 만다. 2000년에는 무려 99홈런 308타점을 합작한 우동수 트리오를 앞세워 드림리그 2위를 차지, 한국시리즈에서는 당시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현대 유니콘스에게 3연패 뒤에 3연승하면서[6] 한국시리즈 사상 초유의 역스윕을 달성할 뻔했으나 7차전에서 맹활약한 톰 퀸란의 활약으로 두산은 현대의 막강한 힘에 밀려 아깝게 준우승에 그친다. 하지만 당시 최강팀 현대를 7차전까지 끌고간 것만으로도, 3연패 후 3연승을 기록했던거 역시 믿을 수 없는 상황이였다. 2001년에는 전년도보다 떨어진 투수력으로 시즌 3위에 그쳤으나 준 플레이오프에서 한화 이글스를, 플레이오프에서는 전년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현대 유니콘스를 차례로 꺾고 1위팀 삼성 라이온즈까지 한국시리즈에서 4승 2패로 꺾으면서 파란의 우승을 차지한다. 9회 우승에 빛나는 김응용 감독에게 한국시리즈 사상 첫 패배를 안기면서 자신의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한 김인식 감독은 비로소 명장의 반열에 올랐으며 이 무렵이 김인식 감독의 야구인생에서도 최고의 황금기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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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두산 베어스 우승 엠블럼 V3.svg 2001년 두산 베어스의 세 번째 우승이자 본인의 두 번째 우승을 거두고 헹가레를 받는 장면 [7]

2002년에는 시즌 중반까지 2위로 순항했으나 월드컵 이후 팀 전반에 4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로 인한 피로감이 덮치면서 5위(승률 .503)포스트시즌 진출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 무렵부터 김인식 감독의 장기 집권에 따른 팀 분위기의 정체와 잇단 주전 선수의 트레이드, 2군 육성의 실패로 인한 팜 시스템의 붕괴 현상이 나타난다.

2003년에는 초반에는 홍성흔 등의 주전이 부상으로 빠지자 무려 시즌을 11승 39패로 시작해 백골퍼의 롯데한테도 밀려 8위로 떨어지는 등 고전을 거듭한다. 후반기에는 팀이 살아나 SK와 4위 싸움중이던 한화한테 고추가루를 뿌리는 등 유종의 미를 거두기는 했지만 결국 .435의 승률로 7위에 그치면서 몰락하고 말았다. 한때 종신 감독 계약설까지 돌던 김인식은 결국 시즌이 끝난 뒤 두산이 LG, 삼성등과 함께 선동열 감독 영입 경쟁에 뛰어들면서 구단과 불편한 관계에 빠졌고 이 때 해태 시절의 제자인 선동열에게 스스로 자리를 양보하는 형태로 사임하면서 9년 간의 두산 감독직을 끝냈다. 그러나 후임은 당시로선 영 뜬금없는 선택이었던 배터리코치 김경문이었다.

2.4.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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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1994~2006).svg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svg 한화 이글스 감독시절

한 해 동안 야구계를 떠나 있던 김인식은 2004년 11월에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계약하면서 다시 한번 현역에 복귀한다. 하지만 그 해 12월 돌연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입원, 현역 복귀가 물거품이 되는 듯 했으나 의외로 빠르게 회복하면서 예정대로 팀 훈련에 합류한다.

팀 올드멤버 출신 유승안 감독은 팬들의 환호 속에 부임했지만 비난 속에 경질당했고,(당시 정황을 모르는 '뉴비'팬들의 주장처럼 유승안 체제의 한화는 결코 아름답지 못했다.) 경질 당시인 2004년 한화의 엔트리는 막장 그 자체. 김태균, 이범호, 제이 데이비스가 있던 타선의 중심축은 확실히 살아 있었지만 나머진 아무것도 내세울게 없는 무주공산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투수력과 수비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팀이었다. 그냥 2004시즌 당시의 선수단 스탯만 들춰봐도 답이 나온다. 그래도 시즌 중반까지는 5할 근처의 승률을 유지하고 4위 싸움을 했지만 8월 중반부터 답이 없을 정도로 무너지면서 최종적으로는 롯데한테 세 게임차[8]로 앞선 시즌 7위였으니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다음은 김인식 부임 당시 한화의 문제점들을 나열한 것이다.
  • 병역비리 파동으로 이영우가 끌려간 이후 리드오프 부재&좌익수 부재로 골머리를 앓았다. 고졸거포 최진행은 변화구대처, 수비에 심각한 문제를 보이고 2군으로 추락한 상태.
  • 야심차게 영입했던 공격형 포수 이도형은 부상 및 부진으로, 두산에 현금을 보태서 보낸 강인권이 아까워 보일 정도의 미미한 활약을 보였다.
  • 2003년 말 마무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황금 독수리' 송지만을 내주고 얻은 권준헌은 부상으로 시즌아웃이 결정된 상황이었다.
  • 4승 15패의 문동환은 2004년 최악의 선발투수였으며, 7.67의 방어율을 기록한 정민철은 은퇴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이러한 한화 이글스 마운드에서 최고의 투수는 39세의 송진우와 루키 송창식밖에 없었다.
  • 그러나 전년도 신인왕 후보 송창식은 혹사에 이은 부상으로 시즌 아웃이 결정된 상황이었다.
  • 불펜투수라고 할 만한, 이렇다 내세울 선수가 없었다.(정말 없다.)그나마 좀 던져주던 마정길은 병역비리로 끌려간 상태였고 박정진도 군대로 갔다.(애초 이 팀이 제대로 된 불펜진을 가진 역사가 송진우 초반 몇 년, 그리고 구대성 밖에 없다.)
  • 이범호가 맡던 유격수, 원바운드 송구의 3루수 백재호, 그리고 전설의 임과장 임수민이 버티던 2루, 한화의 내야진은 진정 답이 없었다.

김인식 감독은 이러한 문제점을 차근차근 개선해 나갔다. 놀라운 점은 약점인 투수력을 보강하기보단 강점인 공격력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을 택한 것, 당시 용병 투수를 뽑을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김인식의 선택은 용병타자 두명이었다.( 제이 데이비스와 마크 스미스란 백인 외야수, 하지만 스미스의 부상 크리로 인해 틸슨 브리또로 교체.)

또한 특별한 트레이드 없이 팀 내의 한물간 투수를 여럿 재기 시키며 재활 공장장이란 별명을 얻었다. 다음은 그 사례들.[9]
  • 송진우를 빼곤 믿을구석없던 선발진을 송진우- 문동환- 정민철- 김해님- 양훈으로 결정짓고 시즌을 시작, 중간에 양훈이 빠지고 최영필이 들어오기도 했지만 시즌 말미까지 로테이션을 유지시키는 뚝심을 보여준다. 선수들도 기대 이상의 성적으로 보답하였다.
  • 5월달이 되자 항명 사건을 일으켰던 젊은 불펜투수 조영민을 SK에 넘기고 베테랑 외야수 조원우를 받는 트레이드를 성사했다. 조원우는 당시 넘쳐나는 SK의 외야자원 때문에 철저히 소외된 상태였는데[10] 조원우는 한화 이적 후 이영우의 빈자리(좌익-리드오프)를 말끔하게 메꾸며 소금같은 활약을 펼쳤고 친정팀 SK와 붙은 그해 준플레이오프에서도 맹타를 휘둘러대며 준PO MVP까지 차지했다.
  • 촉망받던 1순위 선수로 입단 → 은퇴 → 다시 현역복귀 후 아무런 실적없이 2번째 은퇴를 앞뒀던 지연규에게 대뜸 마무리 보직을 맡기놓고 그게 성공한다.. 누군가가 지연규에게 마무리보직을 맡긴 이유를 여쭙자 나온 대답이, "걔가 공 제일 빨러~"였다. 철저한 1이닝 등판을 시켰으며 이 당시 한화가 구원 상황 자체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시즌 내내 불과 38이닝 20세이브를 기록, 그러나 이것은 구대성 이후 한화이글스 최다 세이브 기록이었다.
  • 불안한 수비의 유격수 이범호를 3루수로 컨버전시켰다. 사소해 보여도 이글스의 운명을 결정지은 일대 사건이었다. 삼성 시절 당한 무릎 부상으로 인해 전성기에 비해 확연히 줄어든 수비폭을 보여준 틸슨 브리또 덕분에 이범호의 3루 수비는 일취월장했고, 후에 영입된 김민재와 함께 최강의 3-유간 수비력을 보여줬다.[11]
  • 신경현에 밀려 어정쩡해진 포수 이도형을 지명타자로 고정, 이도형은 2할 중반과 22개의 홈런으로 타선에 적잖은 힘을 보탠다. 당시 한화 중심타선은 공포 그 자체, 3번 데이비스-4번 김태균-5번 이도형-6번 이범호였고, 나중엔 브리또까지 7번에 가세하여 포스트시즌 진출팀다운 위용을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부임 첫해인 2005년 한화가 6월 이후 총체적 부진에 빠진 롯데 자이언츠, LG 트윈스를 제치고 4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데 기여한다. 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어스에 스윕패를 당하긴 했으나 이전의 준플레이오프에서 강팀이던 SK 와이번스를 3대 2로 꺾는 이변을 보여 주었다. 이후 한국으로 복귀한 구대성, 특급 신인 류현진의 가세로 2006년 준우승(시즌승률 3위)-2007년 3위의 호성적을 거두면서 한화에서 다시금 지도력을 확인받았으나 한화의 마지막 가을야구 시즌이던 2007년 중반부터 지나친 노장 선호, 부상 선수 당겨쓰기 등으로 인해 젊은 야구 팬들을 중심으로 김인식 감독의 팀 운영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2008년의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2009년의 최하위 추락으로 구단의 신임을 잃고 재계약에 실패하여 사실상 감독으로서의 커리어를 마감하게 된다. 후임 감독은 동국대 시절 제자였던[12] 한대화 삼성 수석 코치.

한화 시절의 김인식은 초기 2~3년동안의 공에도 불구하고[13] 말년에 보여 준 문제점이 너무나 크게 드러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현재의 젊은 야구팬들에게 그의 감독으로서의 이미지는 대체로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아무래도 인터넷 시대의 야구 붐을 주도하는 20대들에게는 그의 야구가 너무 낡은 것으로 비춰졌고, 결국 프로란 마지막까지 성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세한 점은 김인식/비판 문서 참조.

2.5. 세부 성적

역대 감독 전적
연도 경기 정규리그 한국시리즈
1991 쌍방울 레이더스 126 52 71 3 6위 -
1992 126 41 84 1 8위 -
통산 252 93 155 4
연도 경기 정규리그 한국시리즈
1995 OB 베어스 126 74 47 5 1위 우승
1996 126 47 73 6 8위 -
1997 126 57 64 5 5위 -
1998 126 61 62 3 4위 -
연도 두산 베어스 경기 정규시즌 한국시리즈
1999 132 76 51 5 1위[14] -
2000 130 73 57 0 2위[15] 준우승
2001 133 65 63 5 3위 우승
2002 133 66 65 2 5위 -
2003 133 57 74 2 7위 -
통산 1165 576 556 33
연도 소속팀 경기 정규시즌 한국시리즈
2004 한화 이글스 2 1 1 0 -
2005 126 64 61 0 4위 -
2006 126 67 57 2 3위 준우승
연도 경기 정규시즌 한국시리즈
2007 126 67 57 2 3위 -
2008 126 64 62 0 5위 -
2009 133 46 84 3 8위 -
통산 639 309 322 8
총계 2056 978 1033 45

3. 국가대표 야구팀 감독

김인식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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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의 제자들이 이성열, 최재호이며 이 둘은 현재 고교야구계의 명감독이 됐다. [2] .425의 승률로 역대 신생팀의 첫 시즌 최고승률이다. [3] 만 19세 1개월 10일이었던 1991년 8월 14일 광주 무등구장에서 해태를 상대로 1-0 완봉승을 거뒀다. 김기태가 그경기에서 결승홈런을 쳤다. [4] 다만 이 시기는 1994년 이전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이광환 감독으로 대표되는 투수의 로테이션과 역할관념이 시작도 하기 전이라는 이야기다. 이 당시 불펜투수 혹사와 중무리는 KBO모든 감독의 공통된 성향이었다. [5] 당시에는 미라클 OB였겠지만 두산으로 바뀐 현재까지도 미라클 두산은 널리 쓰이고 있다. [6] 한국시리즈는 7판 4선승제이기 때문에 두산이 1패라도 더 하면 바로 게임이 끝나버리게 될 수 있었던 상황. [7] 이 무렵이 김인식의 야구인생에서 절정기였다. 사진 하단에 후임 감독인 김경문도 보인다. [8] 다승제 기준. 현재 승률 계산법대로라면 반 게임차 [9] 비판 문서에 잘 서술되어 있지만 이러한 믿음의 야구는 당장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김인식이 감독 직에서 물러난 뒤 팀 뎁스를 아작내는 결과를 야기했다. 물론 유망주를 군대라도 보냈으면 이렇게까지 까이지는 않았겠지만. [10] 당시 SK의 외야진에는 골든글러브 외야수 이진영이 버티고 있었고 트레이드로 박재홍이 영입되었으며 그 외 조동화, 박재상, 김강민 등 젊은 자원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11] 단 이범호의 포지션은 원래가 3루수였으니 원상복귀에 가깝다. 데뷔 초기인 이광환 시절에도 3루수를 봤었고 2004년에 팀 공격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유승안 전 감독이 유격수로 풀타임(이때 김태균을 3루수에 배치하기도 했었지만 역시 답이 안나오는 수비였다.)고정을 시켰던 임팩트가 컸던 것이다. [12] 사실 타이거즈에서도 수석코치와 주전 3루수로 해태의 한국시리즈 4연패를 함께 하기도 했다. [13] 물론 야만없이겠지만 이게 없었으면 한화는 17년간 가을야구 못했다.(2002년~2004년 3시즌 연속 가을야구 진입에 실패했다.) [14] 드림리그 [15] 드림리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