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1 17:24:25

김반굴

金盤屈
? ~ 660년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신라의 인물이다. 김서현 만명부인의 손자이자, 김흠순의 아들이다.[1] 아들로는 김영윤이 있다.

황산벌 전투에서 죽음으로써 관창과 함께 역사에 이름을 남긴 화랑, 세속오계 중 '임전무퇴'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2. 생애

계백과 5천 결사대가 김유신이 이끄는 5만 군사를 맞아 네 차례나 저지하자 신라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질 지경이 되었다. 이때, 김유신의 동생인 김흠순이 반굴에게 "신하가 되어 임금님께 충성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며 위험을 보고 목숨을 바치는 것이 충효인 것이다." 라는 말로 그를 자극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반굴은 적진에 뛰어들었다.

별동대를 이끌고 작전을 펼친 반굴은 백제군에 포위되어 결국 전사하고, 부대는 전멸했다. 뒤이어 김품일의 아들인 관창이 소부대를 이끌고 돌진했으나 역시 휘하 부대는 전멸하고 본인은 두 번 사로잡힌 뒤 결국 목이 잘렸다. 신라군이 이를 보고 용기백배하여 백제군은 마지막 다섯번째 교전에서 패하며 황산벌 전투는 마무리되었고, 백제 사비성이 함락되며 멸망하게 되었다.

혼자서 돌격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삼국사기에서 관창이 돌격할때 而彼衆我寡(적은 많고 아군은 적었기 때문에)라고 적고 있는 걸로 보아 절대 혼자 공격에 나선게 아니며 자연히 먼저 공격한 반굴도 일정한 수의 군사를 이끌고 움직였음을 알 수 있다. 애초에 이 정도 인재에게 자살돌격 하라는 것도 말이 안되는 소리고, 상무정신이 중요하다지만 필요성도 낮고 개죽음이 뻔한 전투를 무조건 밀어붙이는 군대는 반자이 돌격을 감행한 일본군 말고는 없다. 엄연히 필요하되 위험한 작전을 소부대와 함께 펼치며 교란전을 벌였으나 결국 백제군을 무력화하는 데 실패하고 본인은 전사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황산벌 전투 전투서열을 정리한 대전대 군사학과 윤일영 교수는 백제군이 4차례에 걸쳐 신라군을 저지한 후에 반굴의 공격이 이뤄진게 아니라 반굴의 공격이 그 4차례 공세에 포함 되어있다고 주장한다. 삼국사기 계백 열전에선 신라군을 4차례 걸쳐 격퇴했다고 서술했고, 반굴이나 관창이나 단기로 공격하지 않았다. 이들의 공격이 4차례 공세에 포함되지 않았다면 4차례 공세에 이 둘의 공세까지 더해(관창의 공세는 2번이니까) 7차례에 걸쳐 저지하고 8차례째에 무너졌다고 서술해야 한다는게 윤교수의 주장.

분명히 관창보다 먼저 돌진해서 용맹하게 전사했고, 끝발도 관창보다 높은데 일화도 없이 한 번에 전사했기 때문인지 이상하게 관창보다 인지도가 좀 많이 낮다. 삼국사기에도 관창이 자신의 열전이 있는 반면 반굴은 자신의 열전이 없고 아들 영윤의 열전 앞부분에 붙어서 소개될 정도이다.

3. 대중매체에서

화랑이라는 점 때문에 대부분의 영상매체에서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묘사되는데, 아들 김영윤이 있었던 것을 보면 실제로는 20대는 넘었을 것이다.
  • 1992년 KBS 드라마 < 삼국기>에서는 비교적 고증에 충실하게 묘사되었는데 여타 매체처럼 반굴이 단기 돌격을 하다가 전사하는 것이 아니라 보졸들과 함께 대열에서 나란히 싸우다가 난전 중에 전사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 2012년 KBS 드라마 < 대왕의 꿈>에서는 제57회에서 등장해 단기로 나아가는데 백제군 성채 앞에서 계백의 휘하 장수와 겨루다 사망한다. 사망 후에야 화랑이라는 걸 알게 된 백제군 장수들이 모두 놀란다. 시신이 신라군으로 돌아간 뒤에는 아버지 김흠순이 그의 시신을 안고 울고 반굴의 죽음을 알게 된 화랑도들이 달려와 그 시신을 목격하는데 관창이 "그의 죽음을 칭송하지 못할망정 왜 비통하게만 있느냐"며 김유신 이하 신라군 장수들을 질책한다.


[1] 따라서 김유신 문명왕후에게는 조카가 된다. [2] 반굴은 처음에는 "고위층이 죽어야 한다"는 아버지 말에 아버지가 죽으려는줄 알고 "아부지가 죽을라캅니꺼? 사나입니데이" 같은 말이나 하며 어리버리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후 장면에서 김품일한테 떠밀리는 관창이 "진짜 개죽음 아이지예?"하며 애써 독한 얼굴을 짓는 것과 대조적이다. [3] 사실 이 김유신의 사위라는 대목은 < 화랑세기>에서 나오는 내용으로 정사에는 없는 기록이다. [4] 그 때 김유신은 날만 궂으면 삭신이 쑤신다는 늙은 병사들을 찾아가 "비 오려나" 물어보던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