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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기/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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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추어 시절2. 프로 시절
2.1. 태평양 돌핀스 시절
2.1.1. 1990년 시즌2.1.2. 1991년 시즌2.1.3. 1992년 시즌2.1.4. 1993년 시즌2.1.5. 1994년 시즌2.1.6. 1995년 시즌
2.2. 현대 유니콘스 시절
2.2.1. 1996년 시즌2.2.2. 1997년 시즌2.2.3. 1998년 시즌2.2.4. 1999년 이후
2.3. SK 와이번스 시절

1. 아마추어 시절

'미스터 인천'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 태어난 곳은 서울특별시 성동구이다. 한양초등학교에 재학했을 때까지는 서울에서 자랐는데 이는 아버지 김진영 감독이 해병대 야구단과 중앙대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으면서 주로 동대문야구장에서 경기를 지휘하는 등 당시 서울에서 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는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는 인천에서 나왔으나, 다만 중학교 때부터는 아버지의 고향인 인천으로 넘어와서 상인천중학교에 진학했고 이후 남은 학창시절을 모두 인천에서 보냈다.

인천고 3학년 재학 시절이었던 1985년에는 전국대회에서 타율 0.457, 46타수 21안타의 성적을 올려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했다. 공교롭게도 김경기가 이영민 타격상을 받을 정도로 승승장구하던 사이 아버지가 지휘하던 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는 연전연패를 거듭하면서 최하위를 면치 못했다. 이 때문에 당시 신문기사에 난 제목이 '가장은 18연패, 자식은 승승장구'였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타격에는 천부적 소질이 있었기에 청소년대표팀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한미일 고교야구대회에서 4번타자로 활약했다.
동영상이 시작되자마자 2루타를 치는 4번타자가 인천고 3학년 김경기.

출중한 야구 실력을 보유한데다 지역을 대표하던 왕년의 슈퍼스타 아버지를 둔 만큼 고교 졸업 후 바로 지역 연고 프로팀인 청보 핀토스의 유니폼을 입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당시 김진영 감독과 김경기가 함께 살던 인천 집 근처에는 암울한 인천팀의 타선을 이끌어줄 영웅의 등장을 기다리며 김경기의 청보 입단을 종용하는 이들이 몰려들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당시만 하더라도 고졸 선수보다는 대졸 선수를 뽑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던 시절이라[1] 고교 졸업 후 고려대학교 법학과(1986학번)로 진학했고[2] 대학교 1학년부터 주전 5번타자로 발탁되어 활약하였다. 1988년 춘계 대학리그에서 MVP를 수상할 정도로 이미 대학야구에서 정평이 난 강타자가 됐다.
서울 올림픽 야구 미국전에서의 김경기 (6분 50초, 12분 13초 적시타)

고려대 2학년 때였던 1987년 중화컵 참가 국가대표로 선발된 것을 시작으로 3학년 때인 1988년에는 서울 올림픽 야구 종목에 출전하는 국가대표팀으로 선발되는 등 이후 대학 3년간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서울올림픽 준결승 일본전 1대3 패배 당시, 9회초 한국팀의 마지막 타자로 등장했지만, 일본투수 노모 히데오에게 삼진을 당하기도 했다.

대학 4학년 시절인 1989년에는 국가대표 4번타자로 나서서 IBA 회장배 국제야구대회 우승을 이끌며 대회 베스트 9 3루수 부문에[3] 선정되었다. [4]

2. 프로 시절

아주 오래 전부터 당연스럽게 인천팀 유니폼을 입을 것이라고 예측됐고 1990년 1차지명 2순위로 고향팀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했다. 입단 조건도 화려한데 당시 역대 신인 타자 계약금 최고액이자 인천 연고팀 역사상 신인 최고 계약금 신기록인 6000만원(1차 계약금 4000만원+특별 우대금(보너스) 2000만원)의 계약금을 받으며[5] 화려하게 입단했다.

당시 이 계약 조건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냐면 역대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인 장효조가 1983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할 때 받았던 계약금이 4000만원이었고 동기생 김동수가 받은 계약금도 4000만원이었다. 게다가 모기업 태평양화학의 재무 사정을 고려하면[6] 6000만원의 계약금은 최고의 대우였다.

이는 태평양 입장에서도 이 수준의 대우는 당연했다. 김경기는 해방 직후 인천야구를 대표했던 슈퍼스타 김진영의 외아들이자 고3 때 이영민 타격상을 받고 대학야구에서 최고의 거포로 활약했던 선수였다. 그야말로 모든 인천 팬들이 오매불망 갈구하던 "인천야구의 맏아들"이었다. 무엇보다 1982년 삼미 창단 이후 제대로 된 거포라고는 김동기 밖에 없던 사정상 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핵심 타자임이 분명했기에 장효조의 대우를 넘는 파격 대우를 해줄 수 밖에 없었다.

입단 첫 해부터 그에게 걸었던 구단과 팬들의 기대는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었고 그 기대에 걸맞게 주전 1루수와 4번타자로 활약하게 된다. 입단 당시 그의 등번호는 원래 37번이었으나[7] 1993년부터 한국프로야구에서 처음으로 00번 등번호를 달면서 이때부터 등번호 00번은 곧 그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그는 당시 홈구장이던 숭의야구장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보이며 홈팬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아 미스터 인천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입단 당시의 태평양 감독은 지옥 훈련으로 유명한 김성근 감독이었으나 김경기는 오히려 김성근의 지옥 훈련을 수월하게 소화할 수 있었다. 그 비결은 아버지 김진영 감독으로부터 받은 지옥 훈련 덕분이었다. 김진영 감독 역시 김성근보다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덜 하지는 않은 악바리 지도자였기에 아들에게도 강한 훈련으로 몰아붙였다. 그 덕에 김경기는 풀타임을 충분히 치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체력을 갖추게 됐고 김성근식 지옥 훈련을 모두 소화할 수 있었다. 그래서 1990년 시즌 내내 김성근 감독은 김경기에게 만큼은 특타를 시키지 않고 오히려 쉬라고 전화를 줄 정도였다고 한다.

김경기는 고교 선배 김동기와 1992년 시즌 트레이드를 통해 팀에 이적한 윤덕규와 함께 'YKK' 타선을 구성하며 팀의 공격을 이끌었다. 특히 부동의 4번타자로서 매년 0.270~0.290 타율 사이에 20개 안팎의 홈런을 쳐내면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던 물방망이 타선 속에서 단연 빛나는 활약을 해줬다. 특히 1994년에는 시즌 23개의 홈런을 기록하면서 인천 연고팀 역사상 최초의 홈런왕 등극도 기대하게 했으나 역대 최초 좌타자 홈런왕을 노리던 1년 후배 김기태의 기세에 밀려 홈런 순위 2위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 3경기 연속 홈런을 쏟아내며 팀을 창단 후 최초로 한국시리즈까지 끌어올리는 주역이 되기도 했다.

팀명이 현대 유니콘스로 바뀐 이후에는 주장으로서 박재홍, 이숭용과 함께 클린업 트리오를 구축하며 1996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이끌었고 1998년에는 감격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면서 숭의야구장에서 연안부두를 부르며 오열하던 인천 팬들과 함께 환호했다. 개인 커리어에서도 1996년과 1998년에 1루수, 3루수 포지션에서 각각 리그 No.1이 되었다. 다만 골든글러브는 1996년에만 수상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고질적인 허리 부상으로 인해 짝수년에만 유난히 잘하던 '징검다리 시즌 징크스'에 시달렸고 2000년 시즌 중에 새로운 인천 연고팀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됐다. 하지만 SK 이적 이후 큰 활약을 하지 못한 채 다소 이른 나이에 프로 선수 생활을 마치게 된다.

2.1. 태평양 돌핀스 시절

파일:태평양 김경기.png

2.1.1. 1990년 시즌

신인으로서 타율 .285 (17위), 10홈런 (16위), 118안타(리그 7위) 68타점 (5위), sWAR 26위 (2.84) OPS .798 (17위) wOBA .372 (15위) wRC+ 128 (15위) wRAA 15.3 (15위) 29 2루타 (1위) 179루타 (8위) 를 기록하며 최다안타, 타점, 2루타, 누적루타는 리그 TOP 10, 이외 기본/세이버 스탯 기준 리그 15위 수준의 우수한 성적을 기록하며 팀의 간판타자이자 팀 WAR 1위 김동기와 함께 KK 타선을 구축한다.[8]

특히 각 팀의 간판타자들이 즐비한 1루수 부문에서 신인으로서 우승팀 엘지의 1루수이자 그해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김상훈 (sWAR 3.21, 타율 .322, wRC+ 141) 에 이은 리그2위의 성적을 기록하며 신인시즌 부동의 주전 1루수이자 인천의 차세대 간판으로 자리를 잡았다.

2.1.2. 1991년 시즌

김동기와 함께 팀의 중심타자로서 활약하였다.

타율 .291(16위) 114안타(18위) 8홈런 59타점 (14위) wRC+ 116 .5 (21위), sWAR 2.0 (30위 밖) 등을 기록하며 기본 스탯으로서는 전년도와 비슷한 수준의 타격을 보였으나 세이버 스탯에서는 전년보다 상대적으로 부진하였다. 1루수 부문 순위에서도 전년도 2위에서 6위 (sWAR기준)으로 내려앉았다.

2.1.3. 1992년 시즌

21홈런(리그 7위)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20홈런 이상을 넘긴 시즌이었으나 타율 (.254) 및 타점(65), 최다안타(118), wRC+ (98.8) 으로 팀 내에서는 타격 부문에서 모두 1위 였으나 전체적인 리그 순위에서는 상대적으로 부진했던 시즌이었다. 이는 전보더 더 진한 물방망이를 자랑하며 점점 추락하는 팀 순위와도 연관이 있었다.

2.1.4. 1993년 시즌

0.280 타율과 8홈런 49타점을 기록하였다.

2.1.5. 1994년 시즌

윤덕규-김경기- 김동기로 이어지는 Y2K 클린업 트리오 주축역할로 활약했는데, 여기서 4,5번 타순인 김경기-김동기로 이어지는 KK포는 실로 위력적이었다.[9] 그 해 김경기는 23홈런을 기록하여 활약한다. 더불어 태평양 투수진의 분전까지 더해져 태평양은 정규리그를 2위로 마치고 플레이오프에서 한화를 상대로 스윕하면서 팀 최초 한국시리즈 진출의 쾌거를 이루었고 김경기 역시 3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해 한국시리즈 진출에 기여하였다.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신바람 모드 절정이었던 LG 트윈스에 의해 일방적인 스윕으로 아쉽게 준우승 고배를 마셨지만 타선의 기둥 김경기의 활약을 무시할 순 없을 것이다.[10]

23개의 홈런으로 25개의 홈런을 친 쌍방울의 김기태(1969)를 바짝 쫓고 있었다. 이 당시 김경기는 컨디션이 좋아서 몰아치려고 바짝 벼루었으나, 정규리그 마지막 시리즈 상대였던 쌍방울의 투수들이 스트라이크를 안던지는 등 견제를 당해 홈런을 추가하지 못하였고, 이때 홈런왕에 실패하면서 선수생활 무관에 그치게 된다.[11][12] 이후 한화와의 플레이오프에서 3경기 연속홈런을 치면서 울분[13]을 풀었다고 한다.[14]

94년 골든글러브도 서용빈에 밀려서 수상에 실패했다. 당시 홈런 등의 클래식 스탯으로 결정되던 1루수 포지션에서 서용빈이 수상한 것은 우승 프리미엄이 많이 고려되었다고 볼 수 있다. 홈런은 김이 23, 서가 4, 타점은 김 70 서 72, 안타는 김 120 서157. 타율은 김 .274 서 .318로 홈런 외 타율, 안타는 서용빈이 우위였다. 세이버매트릭스로 보면 김경기는 wRC+ 147.8 (리그 7위), OPS .862 (리그 7위), sWAR 4.35 (리그 8위) 로 모두 10위권 내에 위치해 1루수 Best player였다. 서용빈은 wRC+ 133.2, OPS .791, sWAR 3.85 (리그 16위)로 10위권 밖.

94년은 클래식 스탯(홈런) 이나 세이버매트릭스 (wRC+, OPS, sWAR)로 리그 1루수 Best player 이자 타자부문 리그 TOP9 에 들었지만 무관으로 끝나며 상복이 유난히 따르지 않았던 그의 커리어하이 시즌이었다.


94 플레이오프 3차전 결승홈런 (7분 14초) - 플레이오프 3경기 연속홈런~

2.1.6. 1995년 시즌

0.295 타율과 12홈런 46타점을 기록하였다.

2.2. 현대 유니콘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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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1996년 시즌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 수상자 (1996)

1996년 신생팀 현대 유니콘스의 주장이자 4번 타자로 타선이 약한 가운데[15]에서도 20홈런[16] 64타점[17]을 기록하였고, 중심타자 1루수로 활약하였다.[18]

96년은 94년에 가려진 그의 베스트 시즌으로 그의 커리어 내 유일한 수상인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를 차지한다.

96년 시즌은 공격과 수비에서 모두 1루수 리그 No.1를 기록하였다. 94년에 이은 2번째 시즌.

8월 17일 인천 숭의야구장에서 해태와의 홈경기에서 DH2차전의 100홈런을 달성했다. (28세 4개월 12일)

96년 시즌에는 wRC+ 141(9위), OPS .824(10위), sWAR 3.64 (15위), 20홈런(리그 4위) 64타점(10위), wRC 73.1(9위),wRAA 21.5(8위)의 기록으로 대부분 타자부문 TOP10안에 들며 1루수 부문 세이버 기록에서는 거의 모든 순위에서 이승엽을 제치고 1위를 기록했다. 그해 이승엽은 wRC+ 134.3 OPS .811 sWAR 3.65 9홈런 76타점을 기록했다. [19] [20]

또한 수비력기준으로 시상하던 스포츠 서울의 매직글러브 도 수상 (1루수) 하여 96년 1루수 부문에서 타격과 수비 모두 리그 Best를 찍었다.


96 한국시리즈 1차전. 1:25부터 보자.

2.2.2. 1997년 시즌

1997년은 6개 홈런에 36타점, 0.254 타율로 커리어로우를 기록한다.[21]

2.2.3. 1998년 시즌

1998년에는 용병 스콧 쿨바 영입과 더불어 3루수로 전향.[22][23] 하였고 통상 경기 중반까지 3루수, 후반에는 쿨바와 1-3루 교체를 통해 1루를 보면서 박재홍- 쿨바-김경기로 이어지는 클린업 트리오 타선의 주축역할을 하였다. 98년 성적은 타율 .274, 홈런 18, OPS .811, wRC+ 124.9, OPS .811, sWAR 3.88.

팀 주장으로서 현대 유니콘스 창단 3년만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이자 역대 인천 연고팀 사상 첫 우승의 기쁨을 맛보며 94, 96년 준우승의 아쉬움을 달랬다.

특히 98년은 그가 골든글러브 3루수 후보로 명함을 내민 특이한 해로 기록된다.

그는 wRC+ 124.9, OPS .811, sWAR 3.88을 기록하며 세이버매트릭스로는 홍현우 wRC+ 125.3, OPS .811, sWAR 4.41 와 1,2위를 다투었고 세이버매트릭스를 차치하더라도 우승프리미엄을 지닌 김경기가 골든글러브를 받아도 이견이 없을 시즌 이었지만 당시는 (지금도 그렇지만) 기자단에 의한 지명도 투표 경향이 강했던 까닭에 3루수 이미지가 강하고 3할을 친 김한수 (세이버로는 리그 3위- wRC+ 113.6, OPS .786, sWAR 3.44) 가 수상을 했다. [24][25]

1998년은 94년 (무관으로 그친 리그베스트, 커리어하이), 96년(리그베스트) 만큼 빛났지만 팀의 우승에 가리어 공헌도가 잘 알려지지 않은 시즌으로 3루수 골든글러브 수상도 충분히 할 수 있었던 훌륭한 시즌 이었다. 실제 sWAR는 94년에 이은 그의 2번째 베스트 시즌. 그리고 그의 짧은 프로 선수생활(12시즌) 중 마지막 전성기이자 레귤러 주전시즌으로 기록 된다.

2.2.4. 1999년 이후

1999년에는 0.277 타율에 6개의 홈런을 기록했는데, 시즌 초까지는 준수했으나 여름 무렵 시즌 중반에 부상을 당해 전력에서 이탈하였다.
2000년 이후에는 주전에서 밀렸고, 시즌이 시작하기 전부터 팀 동료 전준호와의 선수협 관련 마찰,[26] 새로운 인천 연고 팀인 SK 와이번스로의 트레이드설에 휩싸여 김재박 감독과의 불화설까지 제기되었으며 결국 시즌 중 SK로 트레이드되었다. [27]

2.3. SK 와이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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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시즌 중, 자진하여 SK 와이번스로의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당시 인천 팬들은 현대 유니콘스에 대한 실망감과 반발감이 상상 그 이상이었다. 신생팀 SK 와이번스에 대해서도 아직은 곱게 봐줄 수 없었던 시절, 창단 초기의 SK 와이번스에 대해 정을 못 붙이자, 인천 팬들은 "다른 건 다 좋다! 김경기라도 영입해 달라!" 구단에 강하게 요구했었다. 김경기 역시 이 무렵 같은 소속팀 선수인 전준호와의 갈등도 있었고, 그 외에 이러저러한 이유로 결국 트레이드를 요청했던 것. 트레이드 소식을 들었을 당시 현대 팬들은 충격이 매우 컸었다. 김경기는 단순히 '인천 연고지역에만 인기있는' 그런 선수가 아니었다. 비인천 연고지역 팬들도 역시 김경기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 씁쓸했던 마음이 컸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여곡절 끝에 SK 와이번스에 현금 트레이드로 입단, 입단식을 했을 때 홈 팬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갈채를 받았다.[28] 이적 후 그의 야구 인생을 다룬 기사 이적 첫 해 김경기는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로 부실했던 SK 선수단에서 리더 역할을 하면서 3할 언저리의 고타율을 유지하는 등 팀의 중심으로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당시 SK를 이끌던 강병철 감독은 정작 노장을 선호하지 않고 어린 선수들을 더 선호하는 등 적극적인 리빌딩을 추진하려는 경향이 있었으며[29] 김경기 역시 강 감독의 화살을 피할 수는 없었으며 마침 기량도 하락세를 보였기에 대타 혹은 벤치를 지키는 데 그쳤다.[30] 결국 2001년 시즌 종료 후[31] 현역 은퇴를 선언하면서[32] 2002년 4월 새로 개장한 문학구장 개장경기에서 은퇴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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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뛰지는 못했지만 인천 연고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답게 은퇴 후 김경기의 유니폼과 현역 시절 사용했던 배트가 인천 SSG 랜더스필드 안에 위치한 L's 갤러리[33] 레전드 플레이어 존에 진열되어 2021년 박물관이 폐관될 때까지 전시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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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BO 리그에 고졸 선수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84년 신인 지명회의부터였지만 각 구단들이 고졸 선수들을 중점적으로 뽑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다. [2] 당시 고려대 최남수 감독이 아버지 김진영 감독의 절친한 후배였던 영향이 컸다고 한다. 한 살 터울의 사촌매제 염경엽(법학과 1987학번)보다 고려대 1년 선배였다. [3] 이 대회의 MVP는 한양대 관광학과(국문학과 부전공) 2학년 구대성이었고 베스트 9 투수 부문에는 한양대 체육학과 3학년 정민태가 뽑혔다. [4] 1989년에는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 및 한미야구선수권 대회 대비 국가대표로도 선발되었으나 이 해 중반에 국가대표팀 감독이 김충남 연세대 감독으로 교체되고 김경기의 프로 지명이 확실하다는 이유만으로 대표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다 국가대표팀 감독이 김영빈 원광대 감독으로 다시 교체되면서 국가대표로 재발탁됐다. 이 당시 IBA 대회에 참가한 4학년생 국가대표는 김경기가 유일했으며 나머지는 신예급인 1~3학년생 선수들이었다. [5] 인천 연고팀 신인 최고 계약금 기록은 2년 뒤 정민태가 1억6천만원을 받으며 김경기의 기록을 훌쩍 뛰어넘게 된다. [6] 아모레퍼시픽은 당시나 지금이나 화장품업계에서 톱클래스 수준의 인지도와 매출 규모를 지닌 기업이긴 하지만 재계 전체로 보면 초대형 기업은 아니었다. 물론 과거 인천 연고팀의 모기업인 삼미그룹 청보식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기업이기는 했다. 그렇지 않다. 삼미그룹은 80년대 재계 14위 정도의 기업이었고(두산보다도 순위가 높다) 애초에 프로야구 창설할 때 조건이던 기업규모에도 맞는 규모가 큰 기업이었다. 여담으로 삼미그룹이 가지고 있던 삼일빌딩은 당시 전국에서 제일 높은 빌딩이었다. 삼미가 약했던 것 기업이 가난해서가 아니라, 인천야구 풀이 당시 암흑기였기 때문이다. [7] 참고로 1년 먼저 태평양에 입단한 사촌형 김풍기의 등번호가 38번이었다. 이와 연관이 있을 듯. 그리고 김경기 이후에는 이재주가 등번호를 물려받는다. [8] 1990년 이전에는 김동기 홀로 타선을 이끌었다. [9] 특히 태평양 돌핀스는 타선이 매우 물방망이였기 때문에 김경기의 활약은 매우 컸다. 그만큼 견제도 많이 받았고 스탯도 손해보았다. 쌍방울 약체 시절 김기태나 꼴찌하던 한화의 김태균처럼. [10] 1,3,4차전은 한점차 접전이었다. [11] 만약 쌍방울 선수들이 정면승부를 선택했다면 홈런왕은 김경기가 됐을지도 모른다. [12] 2018년 10월 13일 광주챔피언스필드 롯데-기아 경기 중계중 언급. 경기 중후반에 캐스터가 롯데 투수 오현택의 홀드왕 관련해서 말을 하다가 김경기 해설위원에게 선수시절 유명했는데 개인타이틀 획득한 적 있는지 물어보자 김경기 본인이 한 말. [13] 본인이 직접 언급. [14] 1차전 2회 선제솔로포, 2차전 7회 8대0으로 달아나는 추가솔로포, 3차전 연장 10회초 2:1로 결승포. 플레이오프 MVP제도는 1995년부터 시행되었는데 만약 좀더 일찍 시행되었다면 MVP가 될수 있었다. [15] 현대가 창단하면서 이뤄진 전력 보강은 박재홍, 박진만 뿐이었다. 모두 신인. [16] 시즌 홈런 4위. 1위 박재홍 30, 2위 양준혁 28, 3위 이종범 25, 4위가 김경기와 김상호. 96년 시즌에는 20홈런이상이 딱 5명이었다 [17] 타점 10위 [18] 당시 3번 타자는 신인 첫 해 30-30 클럽 달성한 괴물 루키 박재홍이었다. 그 뒤를 받쳐준 선수가 바로 거포 김경기. [19] 3위는 마해영이었으나 wRC+ 119, OPS .760 sWAR 2.44로 1,2 위권과 타격성적 차이가 심했다. [20] 이승엽은 95년에 13개, 96년에 9개의 홈런을 기록했으나 97년부터 폭발하기 시작하며 97년부터 03년까지 7년연속 1루수 골든글러브 수상을 했다. [21] 그에게는 짝수년도에 잘하고 홀수년도에 부진한 징크스가 있었다. 그리고 태평양-현대의 순위는 항상 짝수년도에 잘하고 홀수년도에 부진했다. [22] 대학교 4학년에 국가대표 3루수였으나, 프로 데뷔 후 8년간 1루수였다. [23] 프로 데뷔 후 김성근 감독이 그에게 3루수 연습을 시켰다. 이유는 3루 수비를 통해 밸런스를 잡으면 1루 수비가 더 쉬워지기 때문일라고. [24] 클래식 스탯 기준으로도 김한수는 3할 (.300) 외에는 장타율, 출루율 등에서 홍현우, 김경기 등을 성적으로 압도하지 못했고 팀 성적도 압도적이지는 않았다. [25] 김동주는 3명에 모두 뒤진 4위권 [26] 이 과정에서 김경기가 자신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냈다는 이유로 꼬투리를 잡아 일방적으로 전준호에게 주먹질까지 했다고 알려져 있다. 00현대가 역대 최강의 전력으로 손꼽히는데 전준호만 유독 이 시즌 출장이 적은 이유가 이때 부상을 입었기 때문. 아무튼 이 일로 김경기는 주전선수를 부상입힌 것까지 예상못한 구단에 제대로 찍혔다. 마침 더 젊은 이숭용이라는 1루 대체재도 있어 굳이 김경기에 매달릴 필요를 못느낀 구단은 빌미삼아 김경기를 팽한다. [27] 인터뷰에 따르면 2000년 시즌 펑고연습 도중 다이빙 캐칭을 하다가 공이 옆구리에 걸리는 바람에 갈비뼈 골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훈련이 어려움을 김재박감독에게 토로했으나 오히려 SK와의 트레이드를 고려한 김경기의 연습태만,자세불량으로 오해를 받았다고 한다. 결국 오해를 풀지 못하고 SK로 트레이드 되었다 한다. 불타는 그라운드 인터뷰 내용 참조 [28] 그리고 김경기의 SK 와이번스 이적 후 첫 경기에서 구단은 경기장에 온 팬들에게 빵을 나눠줬다. 왜 빵이었냐면 등번호가 00(빵빵)이니까. 참고로 김경기의 SK 와이번스 이적 후 첫 경기는 개막전 때보다 더 많은 관중이 야구장을 찾았다. 김경기에 대한 인천 팬들의 애정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게 하는 부분. [29] 강병철이 90년대 초 2번째로 롯데 감독을 맡았던 시절 이종운, 전준호, 박정태 등 젊은 선수들을 적극 기용해서 롯데 구단 역사상 두 번밖에 없는 한국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던 바 있으며 한화 감독을 맡았을때도 베테랑인 이정훈, 이강돈 등을 전력에서 제외시키고 신인급 선수들인 송지만, 이영우, 홍원기 등에게 적극적으로 기회를 주며 기용했던 바 있다. 물론 중간에 두산으로 트레이드된 홍원기를 제외한 나머지 둘은 한화의 주전 선수로 발돋움했으나 당시만 해도 양아들을 기용하냐며 욕을 많이 먹었다. SK 감독 시절에도 이진영, 이호준 등 젊은 선수들을 선호해 리빌딩의 기초를 어느정도 다져서 조범현과 함께 SK 왕조의 기틀을 어느정도 다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며 커리어 말년에 롯데 감독을 맡았을 때도 욕을 먹어가며 강민호, 김주찬, 이인구, 정보명 등을 기용했었다. 강병철의 양아들 항목 참조. 이는 신진급 선수들보다 노장을 더 선호하고 간혹 즉전감 베테랑을 데려오기 위해 유망주를 내주는 김성근과 상당히 대척되는 부분. [30] 그의 현역 통산 마지막 타석은 공교롭게도 그의 친정팀이던 현대 유니콘스와의 수원 원정경기였고 대타로 출장한 상황이었다. 김경기는 이 타석에서 보란듯이 홈런을 터뜨렸지만 강병철 감독은 끝내 그를 외면하고 말았다. [31] 당시 SK는 2:6 트레이드로 통해서 1루수 베테랑 김기태를 영입했고 이호준의 기량이 한창 성장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32] SK 1군 타격코치 시절 불타는 그라운드에 출연해서 회상했던 바에 의하면 "강병철 감독에게 딱 5경기만 더 나가게 해달라. 내가 경기에 뛰다가 더 이상 안 되겠다고 생각되면 스스로 옷을 벗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쓸쓸히 은퇴한 것이 너무 아쉽다"고 밝혔다. [33] 전신팀인 SK 와이번스부터 이어저 오는 구단 역사관으로 인천야구의 변천사와 SK 와이번스 히스토리, 레전드 플레이어존 및 우승 트러피 등이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