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18:23:07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

<colbgcolor=#CDE2F8><colcolor=#000000>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
Πρίγκιπας Ανδρέας της Ελλάδας και της Δανίας
파일:Prince Andrew of Greece and Denmark.jpg
이름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Ανδρέας της Ελλάδας και της Δανίας)
출생 1882년 2월 2일
그리스 왕국 아테네
사망 1944년 12월 3일 (향년 62세)
모나코 몬테카를로 메트로폴 호텔
배우자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 (1903년 결혼)
자녀 장녀 마르가리타, 차녀 테오도라, 3녀 케킬리아, 4녀 소피아, 장남 필리포스
아버지 요르요스 1세
어머니 러시아의 올가 콘스탄티티노브나 여대공
형제 큰형 콘스탄티노스 1세, 작은 형 요르요스, 큰누나 알렉산드라, 셋째 형 니콜라오스, 작은 누나 마리아, 셋째 누나 올가, 막내 남동생 크리스토폴로스
신체 188cm[1], O형( Rh-)
종교 그리스 정교회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결혼2.3. 지속된 혼란2.4. 여섯의 재판(Trial of Six)2.5. 말년과 사망
3. 가족관계
3.1. 조상3.2. 자녀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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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리스 왕국 요르요스 1세 러시아의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의 넷째 아들. 콘스탄티노스 1세의 동생이다.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의 아버지이자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시아버지[2]로 현 영국 국왕 찰스 3세친할아버지이기도 하다.[3]

2. 생애

2.1. 어린 시절

파일:640px-Princess_Princess_Maria_of_Greece_and_Denmark_with_her_parents_and_siblinsg_1880.jpg
요르요스 1세 일가, 1880년대
앞줄에서 맨 가운데가 안드레아스이다.[4]

1882년 2월 2일 아테네의 타토이 궁전에서 요르요스 1세의 4남으로 태어났다. 안드레아스는 조산아였기에 태어날 당시 너무 조그맸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안드레아스는 188cm로 가족들 중에 가장 컸다. 참고로 아버지는 약 170cm[5]고 아들은 183cm이다.

그리스어, 덴마크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러시아어를 배웠다. 다른 형제들보다 그리스인이란 정체성이 강했던 안드레아스는 오직 그리스어만 쓰길 고집했다. 안드레아스는 불편한 구궁전에서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규칙적인 삶을 살았다.

안드레아스가 14살일 때부터 주 2회씩 아테네에 있던 사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후에 군사독재 정부를 세우는 테오도로스 팡갈로스와 꽤나 친해지게 되었다. 지도하던 선생님은 안드레아스를 ’크고 빠르고 영리하지만 눈이 나쁘다.‘라고 평가했다. 20살 때 아버지, 형제들, 총리, 대주교, 국방부 장관, 사관학교의 선생님들 중 절반 정도에게 시험을 받고 나서야 기병대에 입대할 수 있었다.[6]

2.2. 결혼

1902년 첫째 고모 영국의 알렉산드라 왕세자비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하면서, 영국의 왕비가 되자 안드레아스는 고모부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거기서 같은 마차에 탔던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와 사랑에 빠져 앨리스의 부모님이 별로 이 조합을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약혼해 1903년 10월 6일 다름슈타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앨리스는 유럽의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였고 안드레아스 왕자는 유럽의 할아버지 크리스티안 9세의 손자였기 때문에 수많은 유럽 왕족들이 두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마르가리타, 테오도라, 케킬리아, 소피아, 필리포스를 포함한 1남 4녀가 태어났다.

2.3. 지속된 혼란

1909년, 그리스의 정치 상황은 아테네 정부가 크레타(여전히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일부)와 그리스 본토의 연합을 요구했던 크레타 의회를 지지하기를 거부하면서 쿠데타로 이어졌다. 불만족했던 장교들은 민족주의 군사 연맹을 결성하며 여러가지 개혁을 요구했는데, 그중 왕자들을 군대에서 사임하기를 요구했다. 이는 안드레아스의 군대 사임과 베니젤로스의 권력 상승으로 이어졌다.

몇 년 후, 1912년 발칸 전쟁이 발발했을 때 안드레아스는 제3기병연대의 중령으로 군대에 복직되었고 야전 병원의 지휘를 맡았다. 전쟁 중에 아버지가 암살당하면서 안드레아스는 코르푸 섬에 있는 몬 레포스에 있는 별장과 일부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세계 1차대전 당시 형 콘스탄티노스 1세가 중립 정책을 주장했지만 그리스 정부는 연합군을 지지해 왕실과 베니젤로스 정부 간의 갈등이 생겼다. 결국 1917년 콘스탄티노스 1세가 퇴위하며 왕실 가족들은 처음으로 스위스로의 망명길에 올랐다.

그동안의 왕이이었던 조카 알렉산드로스 1세가 사망하자 콘스탄티노스 1세와 왕실 가족들은 다시 그리스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안드레아스는 다시 한 번 군대에 복직되었다. 이번에는 소장으로 복직되었다.[7]
파일:73FDFA6A-055F-430A-8411-F6A021F26854.jpg
1921 다른 소장들과 함께한 소장 안드레아스 왕자.
다른 소장들은 60대인 것에 비해 안드레아스는 40대에 소장이 되었다.

안드레아스는 그리스-터키 전쟁(1919-1922)의 사카리야 전투에서 제 2군단의 지휘를 맡았다. 그는 터키의 위치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식량난으로 굶주림에 시달리고 탄약부족으로 고통받는 그의 부하들을 과도한 위험에 빠뜨리는 것을 거부하고 안드레아스는 자신의 전투 계획을 따랐다. 후퇴할 것을 명령 받은 이후 1922년 3월, 그는 에피로스와 이오니아 제도의 제5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2.4. 여섯의 재판(Trial of Six)

그리스-터키 전쟁의 결과는 너무나 참담했다. 그리스 민중들은 분노했다. 대중의 분노의 순간을 포착한 안티로열리스트 파벌은 왕당파 정부에 반대했고 아테네와 에게 제도에서 군사 쿠데타가 펼쳐졌다. 이들은 패배에 대한 책임으로 콘스탄티노스 1세의 퇴위와 왕당파 정부의 붕괴를 요구했다. 결국 콘스탄티노스 1세는 아들 요르요스 2세에게 양위했으며 왕당파 정부 장관들은 체포되었다. 6명의 고위장관들이 2주간의 재판만에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들의 대부분은 사형판결을 받은 즉시 사형당했다.
파일:C4296901-7048-43AF-A116-F5AEDF0841AB.jpg
재판을 받는 안드레아스 왕자
중앙의 아래쪽에 앉아있다.
이외에 두 명의 피고인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고위지휘관이었던 안드레아스는 코르푸에 있어 체포돼 아테네로 이송되었다. 며칠 후 다른 사람들과 같은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고, 같은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영국 외무부 장관 조지 커즌은 영국 정보부 요원 제럴드 타블롯을 보내 안드레아스 왕자의 처벌에 대해 신(新) 정권의 지도자들과 협상하게 했는데, 그 결과 다행히도 안드레아스 왕자의 사형 대신 ‘높은 군사 지휘 경험이 완전히 부족하다’라는 선고 후 일가에게 추방령이 내려져 안드레아스 왕자의 가족들은 또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2.5. 말년과 사망

1922년부터 거의 10년간 파리에서 가족들과 망명했다. 사랑하는 고향을 떠나 고작 40대의 나이로 실직한 안드레아스는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다. 이는 아내인 앨리스 왕자비도 마찬가지였고 급기야 앨리스가 조현병 진단을 받아 정신병원에 입원하면서 결혼생활마저 사실상 끝났다. 딸들을 다 시집 보낸 후 안드레아스는 파리에서의 생활을 접고 프랑스 남부로 갔다.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처럼 안드레아스는 애인을 만들었고 술에 의존하며 살았는데 아들 필리포스 때문에 장모인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와 연락하고 지냈다. 빅토리아 공녀는 어느날 안드레아스와 만났을 때 자신이 앨리스 이야기를 꺼내자 안드레아스는 울음을 참지 못해 무너지기 직전이었으며 50대의 나이에 벌써부터 귀가 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1937년 11월 16일 헤센 대공가로 시집간 셋째딸 케킬리아 비행기 추락사고로 시어머니, 남편, 두 아들, 함께 탑승했던 사용인들까지 모조리 사망하는 참사가 터졌다.[8][9] 가장 사랑하던 딸과 사위, 어린 외손자들의 죽음에 안드레아스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결국 고통과 상실감을 이기지 못해 가족들과의 생활을 단절하고 장모인 빅토리아 공녀하고만 연락을 주고 받았다. 참척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장모에게 "어느 정도 정신을 유지하고 있지만 시간이 아픔을 치유해준다고는 말할 수는 없습니다. (케킬리아의 죽음은) 매우 매우 힘든 타격이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견디기 힘들어집니다.(I’m keeping fit up to a point, but I cannot say that time has had any healing effect. It was a very, very hard blow and the weight of it becomes heavier as time passes.)"라는 애통한 내용의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안드레아스 왕자는 모나코에서 나올 수 없었고 가족 누구와도 만날 수도 없었다.[10][11] 점점 건강이 나빠진 안드레아스는 2차 대전 종전 전인 1944년 12월 3일 62살에 심장마비로 밤중에 급사했다.[12]

시신은 처음에 니스의 정교회 묘지에 묻혔다가 1946년에 아테네 근교 타토이 왕실 묘지로 이장되었다. 그의 유품은 종전 후 안드레아스의 애인이었던 앙드레 드 라 비기니가 정리해 아들 필리포스에게 건네주었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Prince Andrew
of Greece and Denmark)
<colbgcolor=#FFF3E4,#331c00> 요르요스 1세
(George I)
<colbgcolor=#FFFFE4,#323300>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colbgcolor=#E4FFEC,#00330f>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Friedrich Wilhelm, Duke of Schleswig-Holstein-Sonderburg-Glücksburg)
헤센카셀의 루이제 카롤리네
(Princess Louise Caroline of Hesse-Kassel)
헤센카셀의 루이제
(Princess Louise of Hesse-Kassel)
헤센카셀의 빌헬름
(Prince William of Hesse-Kassel)
덴마크의 샤를로테 공주
(Princess Charlotte of Denmark)
러시아 제국의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Olga Constantinovna
of Russia)
러시아 제국의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
(Grand Duke Constantine Nikolaevich of Russia)
니콜라이 1세
(Nicolas I)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주
(Princess Sophie Dorothea of Württemberg)
작센알텐부르크의 알렉산드라 공녀
(Princess Alexandra of Saxe-Altenburg)
작센알텐부르크 공작 요제프
(Joseph, Duke of Saxe-Altenburg)
뷔르템베르크의 아말리 여공작
(Duchess Amelia of Württemberg)

3.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호엔로에랑엔부르크 공비 마르가리타
(Margarita, Princess of Hohenlohe-Langenburg)
1905년 4월 18일 1981년 4월 24일 호엔로에랑엔부르크 공작 고트프리트[13]
슬하 4남 1녀
2녀 바덴 변경백비 테오도라
(Theodora, Margravine of Baden)
1906년 5월 30일 1969년 10월 16일 바덴 변경백 베르톨트[14]
슬하 2남 1녀
3녀 헤센의 대공세자비 체칠리아
(Cecilie, Hereditary Grand Duchess of Hesse)
1911년 6월 22일 1937년 11월 16일 헤센의 대공세자 게오르크 도나투스[15]
슬하 3남 1녀
4녀 하노버의 게오르크 왕자비 소피아
(Sophie, Princess George of Hanover)
1914년 6월 26일 2001년 11월 24일 헤센의 크리스토프 공자[16]
슬하 2남 3녀
하노버의 게오르크 빌헬름 왕자[17]
슬하 2남 1녀
1남 에든버러 공작 필립
(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
1921년 6월 10일 2021년 4월 9일 엘리자베스 2세
슬하 3남 1녀[18]

4. 여담

파일:로마노프 왕조와 영국 왕실.jpg

[1] 외아들 필리포스(183cm)보다 크다. [2]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 조지 6세에게는 사돈 겸 진외당숙(아버지 조지 5세의 외사촌)이기도 하다. [3] 필립 공의 차남인 요크 공작 앤드루 왕자의 이름은 할아버지인 안드레아스 왕자에게서 딴 것이다. [4] 사진을 잘 보면 장손 찰스 3세의 어린 시절의 외모와 약간 닮았다. [5]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장에서 174cm의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요르요스 1세가 조금 더 작았다. [6] 부인 앨리스 왕자비는 안드레아스가 자신의 직업을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의무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어느 다른 사람들처럼 승진하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한다. [7] 사실 가장 어린 나이에 소장이 되어 왕자로서의 특혜 논란이 있다. [8] 당시 넷째 아이를 임신한지 8개월이었던 체칠리아가 비행기 안에서 갑작스럽게 조산이 시작됐고 이로 인해 급히 착륙을 시도하다가 사고가 일어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평소에도 체칠리아는 비행을 무서워했다고 하는데 결국 비행기 추락 사고로 숨졌다. [9] 당시 너무 어리고 아파서 함께 비행기에 타지않은 케킬리아의 막내딸 요하나는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고작 3살의 나이로 수막염에 걸려 요절하고 말았다. [10] 외아들 필리포스는 영국 해군으로 참전했고 사위들은 독일 국방군으로 참전했다. 그 중 막내 사위 헤센카셀의 크리스토프 공자는 전사했다. [11] 그나마 전쟁 중반에 사촌인 덴마크의 악셀 왕자(1889~1964, 숙부 덴마크의 발데마르 왕자의 차남)가 잠시 찾아온 적이 있었다고. [12] 3년만 더 살았더라면 외아들 필리포스 엘리자베스 2세의 결혼을 볼 수 있었다. [13]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트의 외손자(3녀 알렉산드라의 아들)로 빅토리아 표도로브나 대공비 루마니아의 마리아 왕비의 조카. [14] 막시밀리안 폰 바덴의 아들 [15] 촌수로는 체칠리아와 5촌이다. 체칠리아의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의 외사촌이기 때문. [16] 헤센카셀 방백 프리드리히 카를 마르가레테 공주의 5남이다. [17]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빅토리아 루이제 공주의 차남으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4세의 남동생이자 그리스의 왕비 프레데리키의 오빠이다. [18] 찰스 3세, 프린세스 로열 앤, 요크 공작 앤드루 왕자, 에든버러 공작 에드워드 왕자 [19] 왼쪽 위부터 외증조부 니콜라이 1세, 외조부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 어머니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 안드레아스 본인, 왼쪽 아래부터 외아들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 장손 찰스 3세, 장증손 웨일스 공 윌리엄, 장현손 웨일스의 조지 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