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국궁의 역사와 변천을 다루는 문서.2. 전근대
한민족과 활의 인연은 아주 오래되었다. 고조선과 동시대에 있었던 동예에서 박달나무로 만드는 목궁(木弓)인 '단궁(檀弓)'이 중국까지 알려졌다고 하며, 부여의 건국신화에서도 동명왕과 활 관련 이야기가 나오고, 고구려의 주몽은 물론이며 고구려가 쓰는 활을 가리켜 중국에서 ' 맥궁(貊弓)'이라고 따로 기록했을 정도로 활이 각별한 위치였다. 활이라는 무기 자체만 놓고 보면 수렴 진화의 하나로서 특정 지역이나 문화권을 가리지 않고 널리 써 온 무기지만, 신화적인 면에서든 실용적인 면에서든 많고 많은 무기들 중에서 굳이 활이 등장한다는 건 그만큼 특별하게 생각했다는 뜻이다.한민족은 고대부터 합성궁과 복합궁을 사용해 왔다. 복합궁은 다른 종류의 나무들을 합쳐서 만든 활, 합성궁은 목재 외의 다른 재료를 추가로 사용한 활을 뜻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한반도 전역에서 합성궁을 사용한 것은 아니며, 극소수 발견되는 삼국시대 이전 활 유물 중에서는 단순한 목궁도 발견된다.
환목궁(신창동 저습지 출토)과 원삼국시대 목궁 두 사진 출처
삼국시대 때는 소갈비뼈를 사용해 만들기도 했다. 위 사진이 고구려 골제 활고자(긴 것 4개)와 줌통(짧은 것 2개). 평양 영화9년명 고분 출토품으로, 일반적인 고자와 달리 길이가 길어 활채까지 이어진다. 저 길이와 형태 때문에 학계 일각[1]에서는 활고자가 아닌 궁간(弓幹)으로 보고 있으며, 활 그림이 나오는 고구려 벽화들을 근거로 활 중간중간 마디에 탄성을 강화하기 위해 다른 부재를 추가로 덧붙인 것으로 보고 있다. 사진 출처
한민족의 역대 군주, 지도자들 중에서도 명궁이 많아서 부여를 세운 동명왕,[2]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3] 고려를 세운 왕건,[4] 조선을 세운 이성계,[5] 그리고 정조도 명궁이었다고 한다.[6] 심지어 대한민국의 대통령인 박정희(...)도 국궁을 즐겼으며 활을 잘 쐈다고 알려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고려의 혼군이자 무신정변으로 맥없이 당하는 모습만 연상되는 의종이 의외로 뛰어난 궁술을 보여줬고 후삼국시대의 폭군 궁예도 '활을 잘 쏜다'는 이름일 정도인 걸 보면 한국이 예로부터 활을 각별하게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군주는 아니지만 오늘날 해상왕이라는 별명을 지닌 장보고 역시 본명은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로, 활 잘 쏘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궁복'의 '궁'은 말 그대로 '弓', 즉 '활'이고 '복'이 먹보, 심술보 할 때 우리말 접미사 '-보'의 음차라는 것이다.[7]
3. 조선시대
한민족이 활을 중시하는 문화가 더욱 심화된 시기는 바로 조선 시대이다. 태조 이성계만 봐도 활을 들고 전장을 휩쓸던 희대의 명궁이었고, 공자의 가르침인 육예[8]에서도 활쏘기를 중시하고 있기 때문에 유교를 공부하는 선비들 또한 활쏘기를 정신수양 도구로 사용했다. 게다가 조선군 군사교리도 활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무과 시험에서부터 활과 관련한 과목만 5가지를 훌쩍 넘어간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는 무사라고 일컫는 사람들도 모두 활을 쏘는 사람들을 칭했다. 당시에는 민간에서도 활이 유아용으로도 발달하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활쏘기를 즐겼으며, 덕분에 방태기 활, 탄궁, 교자궁처럼 다양한 민간용 활이 존재했다.조선시대에도 위로는 임금부터 아래에는 평민들까지 활쏘기를 즐겼다. 활쏘기는 유교의 육예[9]에 들었기 때문에, 바른 자세를 유지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으로 보았다. 또 군사적으로도 갑오개혁 이전(1894년)까지 군대의 제식무기였다. 따라서 무과시험에도 멀리 쏘기와 기사(騎射: 말 타고 활쏘기)가 있었다. 잘 알려져 있듯 이순신 장군이 무과에서 첫 실패를 경험한 과목도 기마사격이었다.
구한말 외국인의 기록에는 어린아이나 여자들도 활쏘기에 능했다고 적고 있다. 기록에는 활터에서 활쏘기로 돈내기를 자주 했다. 역사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말단 무관들이 술내기를 하다가 수백발을 겨뤘다는 기록도 있다. 10발을 쏴서 더 잘 맞힌 이가 승리하는 내기로 시작했으나, 양쪽 모두 계속 적중하는 바람에 승부를 낼 수가 없으니, 그때마다 술 한 잔 더하고 다시 10발을 쏘는 상황이 벌어졌다. 하지만 술 마시고 활을 쏘는 데도 양쪽이 모두 수백 발을 적중시켜서 승부가 안 나더라는 이야기.(...)
중국의 기록에서도 한민족은 활을 잘 다룬다고 평했으며, 조선 말기에는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조선사람들은 활을 잘 쏜다는 기록을 남겼다. 미국에서는 조선 병사가 활을 쏘는 그림이 그려진 우표를 만들기도 했다. 지금의 후손들이 올림픽에서 양궁을 잘 하는 것도 선조들의 덕이라는 말이 있다.
전투용 활의 맥이 남아 있었던 17세기 이전의 국궁은 연사속도, 사정거리에서는 화약무기를 성능에서 앞서기도 했다. 물론 특히, 임진왜란 직전에, 화포로 잡기에 너무 빠르고 화살로 잡기에는 갑옷을 점점 잘 갖추어 입는 오랑캐 상대로, 개인화기로 개발된 승자총통보다는 위력은 비할 바가 못되지만, 어차피 적 병사를 필요한 살상력만으로, 많이 죽이는 게 전투의 승패를 가린다. 잭 처칠은 1940년대에도 활의 장단점을 잘 파악해서, 소총이 주무기던 시대에 소총수도 이루어내기 힘든 전과를 올렸다. 조선 무관들이 쓰는 각궁의 성능이 우수했어도, 활의 중요성이 감소한 원인은 다음과 같다.
- 활은 숙달하는 데에 평생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 총에 비해 살상력이 압도적으로 약하다.
- 활을 숙달한 군대를 만들고 관리하는 비용이 더 비싸다.
- 수성전에는 몰라도, 야전에서는 궁병을 지킬 보병 분과가 또 필요하다.[11]
- 각궁의 재료인 물소뿔이 비싼 수입품이었다.[12]||
특히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왜군은 조선군이 쓴 화포가 인상 깊어 화포술을 도입해간 반면, 조선군은 임진왜란 개전 1년 만에 이미 조총 제조 시설을 빠르게 만들 정도로 적극이었다. 사실 이미 조선 초기부터 승자총통류 핸드캐논조차 국궁에 못지 않게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국궁은 보편무기로서 평가함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때는 직접적인 살상력에 집착하기보다는 태권도처럼 그저 무예로서 편의성을 강조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인터넷에 종종 올라오는, 국궁을 조총의 보조용으로 사용하는 사법은 활의 중요성이 감소한 조선 후기의 방법이다.
조선시대 활쏘기는 사대부들이 육예로서 연마하던 사정 위주의 활쏘기와 무과 시험 응시를 위해 연마하던 벌터질 위주의 활쏘기 등 여러 양상으로 유행하였고, 유교 육예 버프 + 상류층이 하던 것만큼 일반인들도 따라하려고 했으니, 전시에 집에 있는 총이나 활이나 다 들고와서 정규군의 화력에 보탬이 되어준 것 뿐이다.(통념과 달리 19세기가 되면 민가에서도 사냥꾼이 아니더라도 그냥 화승총은 흔했다. 동학농민운동 때 "농민"운동이라 쟁기나 낫으로만 싸운 줄 착각하는데, 화승총도 꽤 많이 사용되었다.)
양반들, 특히 문반 사대부들은 양반들만 출입할 수 있는 사정 射亭 이라 불리는 활터에서 주로 유엽전 활쏘기를 즐겼다. 사정은 무과시험의 유엽전 규격과 유사한 약 120보 거리에 과녁을 설치하여 사용했다. 사대부들은 마을 단위나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사계(射契)라 부르는 일종의 동호 모임을 구성하여 다른 사정이나 사계와 활쏘기 기량을 겨루어 술이나 음식을 내기하는 편사 등 시합을 하기도 했다.
일반 백성들도 활쏘기를 즐겨 하였는데, 응시 자격에 신분의 제한이 덜하고 학문적 요구도 문과보다는 더 적었던 관계로 무과 시험을 입신양명의 기회로 보았기 때문에 3년마다 시행되는 식년시와 나라에 난리가 날 때마다 부정기적으로 실시된 별시에 응시하기 위해서 활을 연마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한 야생동물이나 산적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실리적 이유로도 활쏘기를 하였다. 신분이 낮은 백성들은 사대부들이 활을 연마하는 射亭에서는 활쏘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너른 벌판에 나뭇가지 두개를 세우고 그 사이에 솔포라 부르는 오늘날의 현수막과 같은 두꺼운 포목을 매달아 걸어놓고 활쏘기를 연습하였는데 이를 벌터질이라 하였다. 무과 시험 준비를 위해서는 각궁과 정량궁 등 규격에 맞는 활을 준비하여 연습해야 했지만, 실용적인 사냥이나 평시 습사용으로는 고가인 활보다 목궁 등 값싸고 성능이 떨어지는 활도 사용되었다.
조선 시대의 무과시험은 경국대전에 이르러 완비되었는데, 6개 실기 시험과 병서 1개 과목으로 구성되었고, 그중 6개 실기 시험 중 활쏘기가 4개에 이를 정도로 중요시되었기 때문에 무과 급제를 위해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활쏘기에 투자해야 했다. 무과 시험과목은 첫째로 나무로 만든 뭉툭한 박두전을 멀리 쏘는 과목으로, 3발 이내에 240보 이상을 보내어야 합격이었다. 둘째로는 애기살로도 불리는 편전이라 하는 일반 화살보다 약 3분의 2정도로 짧은 화살을 통아라고 부르는 일반 화살과 같은 길이의 옆이 트인 대롱에 걸어 쏘는 것으로 130보 거리에서 쏘아 과녁에 맞는 개수로 점수를 매겼으며, 셋째로, 철전 혹은 육량시라고 하는, 일반 화살보다 7배 이상 무거운 화살을 정량궁이라 부르는 크고 강한 활로 쏘는 시험으로 최소 80보 이상을 보내야 합격이었다. 넷째는 기사로서,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아 목표물을 맞히면 점수를 주어 평가하였다. 다섯째는 말을 타고 달리며 창으로 목표물을 찌르는 기창이 있었고 여섯째는 말을 타고 작은 공을 다루는 격구 과목이 있었다.
4. 조선 후기
조선 후기 속대전이 간행되면서 상기 실기 6개 실기과목에 전투용 화살인 유엽전 쏘기와 편곤(쇠도리깨) 등이 과목에 추가되었다. 유엽전 쏘기는 각궁으로 무게가 8돈인 촉 모양이 버드나무 잎 모양인 화살을 120보 거리에서 쏘아 3발 중 최소 2발을 맞혀야 하는 과목으로, 유엽전 쏘기가 유일하게 조선시대로부터 전해져서 오늘날 활터에서 사용하는 145미터 거리에서 과녁을 쏘게 된 유래가 된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에서 무관이 되기 위해 무과를 준비하려면 가장 중요한 과목이 활쏘기와 말타기였다.목전, 철전, 편전, 기사는 조선 후기 무과가 폐지되고 활쏘기가 쇠퇴하면서 그 장비와 쏘는 법이 맥이 끊어졌고, 사대부들이 취미로 해오던 유엽전 활쏘기만이 전국 각지의 사정에서 전해온다. 일제강점기에 조선궁술연구회에서 간행한 <조선의 궁술>에서 소개된 궁술의 교범도 유엽전 활쏘기를 전하기 위한 것이라 서문에서 언급한다. 오늘날 국궁장 혹은 궁도장이라는 곳에서 배우게 되는 활쏘기는 이 120보 유엽전 활쏘기를 재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614년 광해군 시절 편찬한 <지봉유설>에서 일본인들이 ' 중국의 창술, 조선의 편전, 우리는 조총이 천하제일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조선 편전의 위력에 대한 기록은 동북아시아를 통틀어 발견된다. 또 야사, 수필, 일화 등의 기록을 모아둔 조선 후기의 대동야승(大東野乘)에선 비슷하지만 약간 다르게 중국의 창, 일본의 칼, 조선의 활이라는 기록도 있다.
죠션에 궁시(弓矢)가 잇슨지 임의여러쳔년이오 따라서궁시의 발달(發達)은 여러나라를 압도(壓倒)하얏나니 이는 궁시가 잇슴으로써가 안이오 오래됨으로써가 안이오 오직 궁술(弓術)의 묘기(妙技)가 잇섯슴이라. 텰젼이 잇섯고 편젼이 잇섯고 류업젼이 잇섯슨즉 텰젼은 텰젼의 묘법이 편젼은 편젼의 긔술(奇術)이 류엽젼은 류엽젼의 신기(神技)가 다 따로 잇섯슬 것이라 그러한대 이 묘법과 기술과 신기를 발휘하야 국위(國威)와 국광(國光)을 낫하내얏슴은 공인(共認)하는 바이나, 이러한 묘법 긔술, 신기를 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주엇슬 따름이오 문자(文字)로 젼함이 잇지 못함은 이실로 유감(遺感)이라 안이치 못할지라. 그러함으로 이제 로사(老師)와 숙무(宿武)의게 톄육에 가장 적합한 류엽젼을 쏘는 법의 대개(大槪)를 젼하기를 청하야 아래에 긔록(記錄)하게 됨이니라..
朝鮮의 弓術 중 弓術의 敎範 중
朝鮮의 弓術 중 弓術의 敎範 중
5. 근대
1882년 임오군란이 진압된 후 구식군대가 사실상 없어지다시피 하면서 군사기술로서의 궁술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갔다. 1894년 갑오개혁에서 과거제가 폐지됨으로써 무과 또한 폐지되어 활쏘기를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연마하는 한량은 사라지고 민간에서만 간간이 전해지게 되었다. 1899년 6월 독일에서 하인리히 친왕이 대한제국을 방문하였을 때 대한제국 광무황제(조선 고종)는 장안의 이름난 궁수 여섯을 불러 덕수궁 후원에서 활쏘기 시범을 행했는데, 하인리히 친왕[13]이 조선 활쏘기에 큰 관심을 보여 극히 유쾌하게 끝나자, 이에 고무된 광무황제는 궁술을 장려하는 칙령을 내렸다.이 결과로 궁술 장려를 위해 경희궁 북쪽에 활터를 짓고 황학정이라 이름 붙여 조선의 대표 수사정으로 삼았고 초대 사두로 하인리히 친왕 방문시 시범을 보였던 1894년 마지막 무과 급제자 성문영 사진참조이 임명되었다. 이로부터 군사기술보다는 체육활동과 취미로서 맥을 이어 오던 활쏘기는 1928년 일제강점기 문화정치의 상황에서 황학정을 기반으로 궁술의 맥을 잇고자 조선궁술연구회가 발족되었으며 각종 궁술 대회를 주최하여 활쏘기를 장려하였고 1929년에는 조선의 활쏘기 역사와 제도, 궁시의 규격과 궁술의 교법을 국한문 혼용으로 정리한 조선의 궁술 국궁신문기사참조이라는 책을 내놓게 되었다. 조선의 궁술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가장 근세의 활쏘기 관련 서적인데, 특히 한글로 집필되된 궁술의 교법 부분에는 현재도 활터에서 사용되는 중구미, 불거름 등 순 한글 용어가 적혔다.
일제시대에는 막연히 국궁이 한국 고유의 전통문화라서 핍박받았을 거라 짐작되는 일각의 편견과는 다르게, 이시기 전통 활쏘기 상황을 연구한 최형국 박사에 의하면 링크, 일제시대 특히 말기에 들어갈수록 도리어 식민통치의 일환이나 전시상황에 대한 보탬을 목적으로 국궁을 장려하거나 권장하였다고 한다. 아래의 내용은 최박사의 연구논문 21~22쪽에 나오는 것을 일부 가져온 것이다.
오히려 일제는 조선전통의 활쏘기인 弓術을 정책적으로 권장하기도 해서 기존의 ‘일제가 조선의 무예를 직접적으로 탄압했다’라는 논리와는 정반대의 ‘Fact'가 존재하기도 한다. 그러나 서두에서 말했듯이, ‘단순히 탄압했다! 하지 않았다!’라는 이분법적인 논리 이상의 보다 정교한 식민지배정책이 조선의 궁술 안에 담겨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조선총독부의 변경된 교육령에 걸맞도록 조선 전통의 활쏘기 수업을 정식 교과목으로 채택하는 것을 논의하는 내용이다. 특히 그 목적이 ‘우리 여자들도 체위향상을 도모해서 굿센 어머니가 되며 상무 정신을 하자’라고 하여 전시동원체제 하에서 여성 또한 전쟁에 직접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로 부각시키기 위하여 조선의 궁술 수업을 정식 교과목으로 채택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939년에는 梨專 뿐만 아니라 각급 학교 전체에 戰時관련 물자통제로운동구의 생산이 제한되자 씨름, 줄다리기, 그네, 널뛰기, 활쏘기 등 조선 고유의 전통 놀이 및 무예가 정규 체조과목으로 채택되었다. 이처럼 일제는 조선 전통의 활쏘기인 弓術을 탄압 혹은 금지시키기 보다는 자신들의 전략적 이익 즉, 식민지 조선인이 ‘건강한 몸을 만들어 皇國臣民’이 될 것을 요구하며 교묘한 식민지배 정책으로 이를 활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일제시대에도 고종이 세운 황학정 등 활터에서 꾸준히 활쏘기가 계승되었다. 다만 해방이후 현대에 들어서면서 단체의 이름과 공식 명칭이
대한궁도협회와
궁도로 바뀌었고, 국궁계도 사회의 격동을 견디지 못하고 중구난방으로 난립하여 일본의
궁도처럼 통일된 규격을 정하지 못하며 분열되었다. 그래도 전술, 후술하듯 국가에서 지정하는 공식 무형문화재로서는 '활쏘기'라는 고유 명칭으로 등록되었다.국궁을 조금 이해하면 보이는 것이 많이 있다. 우리나라의 활은 원거리 사격을 장기로 삼고 있고, 또한 고대로부터 산성이 특별히 발달했다. 높은 장소에서 곡사를 하면 초장거리에서 화살 세례를 쏟아 부울 수 있고, 아래를 향해 산비탈을 타고 직사를 하면 그 사정거리와 위력은 매우 강력해진다. 산성은 비상시에 산을 의지하여 웅거하는 장소가 아니라 활을 쏘아 내리기 위한 길다란 사대였다.
[1]
동북아역사재단 저, <고구려의 문화와 사상> 참고.
[2]
건국신화에서 '활을 잘 쏘았다'는 내용과 '활로 강물을 내려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는 내용을 언급한다.
[3]
주몽(추모)은 이름부터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고구려 건국 때 비류국 송양과 활쏘기 시합을 한 일화도 유명하다.
[4]
당대의 명궁이었던
신숭겸보다 활솜씨에서 한 수 위로 평가받는다. 참고로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도 활을 잘 쏘기로 유명했다.
[5]
정사에서 공성전 70연속 편전 헤드샷 기록을 달성한 공인 괴물이다. 다만 이 부분이 기록된
태조실록 총서 부분은 같은
조선왕조실록이라도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즉 사관이 실시간으로 옆에 붙어서 기록하던 시절이 아니기 때문에 활 실력이 뛰어남 자체는 사실이더라도 그 정도가 일부 과장되어 있을 수도 있는 가능성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6]
정조가 활을 쏜 기록에서 보면 50발 중 41발, 45발, 46발, 47발 등 기록이 계속 늘어나다가 이후 49발이 10번 정도 나오는데, 일부러 50발을 다 맞히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는 신하들 기 죽을까봐 그랬다는 말도 있고, 자만심을 막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다. 부친인
사도세자의 묘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화성에서 활쏘기를 하는데, 부친에 대한 예로 50시 중 한 발을 일부러 안 맞혔다는 이야기도 있다.
[7]
이 '-보' 접미사가 대표적인
고구려어식 접미사 중 하나라고 한다.
[8]
六藝, 예(禮: 예법), 악(樂: 음악), 사(射: 활쏘기), 어(御: 말타기), 서(書: 글쓰기), 수(數: 산학)
육예(六藝)에 대한 상세 설명 참고
[9]
예(禮: 예의), 악(樂: 음악), 사(射: 활쏘기), 어(御: 말타기), 서(書: 글쓰기), 수(數: 수학)
[10]
사실 한국 양궁이 강세를 보이는 것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고된 훈련 덕분이다.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장궁으로 유명한 영국 양궁의 성적이 신통찮은 반면 활이랑은 거리가 멀어 보이는 미국 양궁이 대한민국 다음으로 성적이 좋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실제로 외국에서 한국 양궁의 훈련 시스템을 따라해보려다가 훈련 강도를 직접 보고는 고개만 젓고 돌아가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외국으로 코치와 선수진이 수출되고 나서는 이전처럼 압도적인 양상도 줄어들었다고. 해외에서 돈을 더 주니깐 어쩔 수 없지.
[11]
다만 조선의 시대특성상 어디 침략을 할 것도 아니고 적군 좋으라고 굳이 야전으로 해줘야할 상황이 있는지는...
[12]
이해가 안 된다면 나무위키
각궁의 2번 한국의 각궁으로 가보자. 조상님들이 별별수를 써서라도 대체용품을 만들려고 머리를 굴린 것이 느껴진다. 영국
롱보우도 재료인 주목이 딸려서 총으로 전환했을 수준이었다. 물론,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각궁의 숫자는 충분히 많았지만 도리어 그런 만큼 국가의 재정에 악영향을 끼쳤다.
[13]
Albert Wilhelm Heinrich, 1862 - 1929. 독일
빌헬름 2세의 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