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3:58:46

고은 성폭력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진행 과정
2.1. 과거의 성추문과 가짜 고은 사건2.2. 이문열의 소설 사로잡힌 악령2.3. 2017-2018년 미투 운동 때 성폭력 의혹이 제기되다2.4. 재평가 및 여론
3. 지자체의 반응

1. 개요

시인 고은 성폭력을 저질렀던 사건. 대한민국의 미투 운동을 통해 수면 위로 떠올랐다.

2. 진행 과정

2.1. 과거의 성추문과 가짜 고은 사건

고은의 성폭력 의혹은 미투 운동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이미 그가 문단에 등단한 직후부터 고은의 성추문에 대한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60~70년대에 고은이 폭음을 하며 성폭력과 기행을 일삼은 탓에 일부 문인들이 그를 실제로 경찰에 고발하는 등 여러 차례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당시 고은의 성추문은 2018년 미투 운동에서 폭로된 것처럼 단지 성추행이나 성기 노출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훨씬 심각한 수준의 것들이었다.

그는 당사자 여성만 아니라 한 가정과 동료 문인까지 파멸시켰다. 시인이자 러시아어, 일본어 번역가 구자운은 환속하여 세상에 나온 고은에게 호의를 베풀어 그를 자기 집에서 먹고 자게 해 줬는데 고은은 그 은혜를 구자운의 아내와 간통하는 걸로 갚았다. 구자운의 부인은 자녀들을 버리고 떠나 버렸고 본래 다리에 장애가 있었던 구자운은 아들 둘과 남겨진 채 폭음으로 고통을 달래다 위암으로 숨을 거두었다. 진짜 사이코 스릴러는 이 다음인데 문상객들이 찾아가 보니 고은은 자기 때문에 가정이 박살나고 요절한 시인의 시신 옆에서 사발에 막걸리 부어 놓고 젓가락으로 두들기며 반야심경을 읊고 있었다고 한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13>비운의 시인 구자운 소설가이자 동서문화사 사장인 고정일의 폭로

이 무렵 등장한 것이 당시 문단에서 널리 회자된 가짜 고은 사건이다. 고은은 자신의 기행과 성폭력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극구 부인하며 자신을 사칭한 '가짜 고은'의 짓이라고 말했다. 고은 본인의 기억에 따르면 '가짜 고은'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61년이라고 한다. 이어 1962년 고은이 종단으로부터 징계를 받고 환속하자 '가짜 고은'도 머리를 기르고 환속한 세속인 차림으로 고은 행세를 하고 다녔다. 고은이 밝힌 환속 이유를 다룬 1963년 경향신문 기사에는 '가짜 고은'이 전국 각지에서 갖가지 범죄를 저지르고 다녀서 수배령이 내려졌으나 체포하지 못하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하나의 전쟁이 사소한 발단으로 시작되듯이 그의 환속도 사소한 데서 고려되었다.
작년과 금년 사이에 가짜 고은이 생겨나서 서울을 중심으로 김천, 여주, 대전, 제주, 수원, 대구 등지를 비롯해서 각 산중사원에서 갖은 비행, 부녀농락, 협박, 사기, 가짜약혼 등을 하면서 명예가 훼손됨으로써 화가 났지만, 중부서에서는 전국적으로 수배하고 있으나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
그 가짜는 정부고관댁을 방문해서 사기행각을 하였다. 이렇게 신변의 인격이 구석구석에서 타락하기 때문에 그는 날마다 우울하였으나 한편 마음대로 해먹으렴 하고 잠자코 있었다.
아무튼 그는 현 종단의 형성내질이나 아직도 봉건적인 운명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외부적인 것보다 자신의 비승려성을 발견하고 나서 환속할 것을 홀연히 결심한 것이다.
경향신문 1963년 8월 3일자 3면 《시인 고은은 왜 환속했나》
이렇게 전국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가짜 고은'이 나타나 추행과 기행을 일삼자 '가짜 고은은 홍길동'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생겨났다. 이에 진짜 고은은 '가짜 고은'이 한두 명이 아니라면서 자신의 유명함을 한탄하기도 했다. '가짜 고은'의 악행은 갈수록 대담해져서 서울에서는 모 대학 영문과 졸업반인 여대생과 결혼하고 제주도에서도 충남대 가정과 출신의 여자와 동거하는가 하면 계룡산에서는 공주 지방의 문학청년들의 추앙을 받으며 금품 수취도 일삼으며 각종 사기 행각을 벌였다. '가짜 고은'의 악행 때문에 진짜 고은이 억울하게 가해자로 몰려 죽도록 얻어맞은 적도 여러 차례라고 한다.

인터넷도 휴대폰도 없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가짜 고은'은 신통하게도 진짜 고은의 지방 스케줄을 척척 알아내 경주, 김천, 충남 등 각지에서 열린 백일장, 한시대회 등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하여 추행과 기행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공교롭게도 '가짜 고은'이 이런 물의를 일으킬 때마다 진짜로 초청받은 '진짜 고은'은 무슨 사정 때문인지 행사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분개한 지방 문인들이 고은을 고발하기도 했다. 고은은 이에 대해 '가짜 고은'의 소행이라고 계속 강변하였다. '진짜 고은'은 이런 신출귀몰하던 '가짜 고은'을 붙잡기 위해 기를 썼다고 하지만 문학 관련 행사장에 수없이 나타난 '가짜 고은'과 좀체로 마주치지 못했다.

고은의 주장에 의하면, 이런 신출귀몰하던 '가짜 고은'이 잡힌 것은 두 차례였다고 한다.

첫 번째는 제주도에서 지역 유력자의 딸과 사기 결혼한 '가짜 고은'이 검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검거 시점에 대해서는 고은 스스로도 증언이 오락가락했다. 어떤 인터뷰에서는 1963년의 일이라고 하며 다른 인터뷰에서는 1968년의 일이라고 했다. 체포 정황에 대해서도 본인이 직접 체포했다고 하기도 하고 붙잡혔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8년에 직접 체포했다는 회고는 후술하는 두 번째의 서울에서의 체포 이야기와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개연성이 높은 회고에 의하면 고은은 잘 알려진 대로 1963년 목포발 제주행 배에서 세 번째 자살 시도를 하려다 실패해서 제주도 산지항에 도착했다. 그의 제주 방문은 이때가 세 번째[1]였는데 그가 이번에는 제주도에서 눌러 살려고 왔다고 밝히자 제주일보 등 지역 언론에서 '진짜가 나타났다'는 기사를 실으며 이전에 누군가 고은을 사칭해 사기결혼을 했다가 들통나 붙잡혔다고 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 사기결혼 이야기와 사칭범 검거 사실은 고은의 주장 외에는 다른 객관적인 자료(언론기사, 사건기록, 관련자 증언 등)로 검증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오히려 고은이 환속하기 이전 아직 승려 신분으로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2] 한 여자와 사실혼 관계까지 치달았다고 주장했다. 사기결혼 이야기는 이 과거 행적을 둘러대기 위해 꾸며냈다는 것이다. #

두 번째는 서울에서 활개치던 '가짜 고은'을 종로3가 백궁다방[3]에서 형사와 함께 검거했다는 것이다. 고은은 이 사건에 대해서도 1970년대 중반의 일이라고 했다가 1968년의 일이라고 하는 등 증언이 오락가락했다. 그래도 이 사건은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 1968년에 일어난 사실로 확인되며 1970년대로 기억하는 것은 단순한 기억 착오로 보인다.
▼ 2일 서울 성동경찰서는 S출판사원 전의섭씨(32, 서울 성북구 삼양동)를 잡아 즉결 심판에 돌렸는데…
▼ 전씨는 시인 고은씨(33)로 행세하면서 주로 바람난 문학소녀들을 꾀어내 농락하고 다녔다는 것으로…
▼ 이 바람에 진짜 고씨는 난데없이 알지 못하는 여자들로부터 다정한 전화와 편지를 받고 당황하곤 하다가 지난 28일 모 여선생과 만나기로 돼있던 다방에 형사와 함께 나가 전씨를 붙잡았다고…
▼ 철창 신세가 된 전씨는 자기의 승명이 「고운(高雲)」이라 『고운입니다』하면 여자들이 으레 「고은」인줄 알고 따라다니더라고 극구 변명…
동아일보 1968년 10월 2일자 3면 《휴지통[4]

고은과 지인들은 이 당시의 정황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한 뒷이야기를 전한 적이 있다. 검거 당시 이 '가짜 고은'은 시인을 사칭한 사기를 노모를 모시는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었으며 심지어 대학 영문학과 졸업반 여성과 관계를 갖고 결혼까지 한 상태였다. 체포된 '가짜 고은'은 진짜 고은에게 감옥에 가게 되면 어머니와 아내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고 하소연하고 사기결혼을 한 그의 아내도 '남편을 새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눈물로 호소하였다고 한다. 고은은 이를 딱하게 여겨 고발장을 찢은 뒤 술을 사 주며 따귀만 두어 대 갈긴 뒤에 용서를 해주었다고 한다. #1 #2 이는 고은의 호방하고 따뜻한 인격을 보여주는 미담으로 회자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동아일보 기사를 자세히 보면 '진짜 고은'이 '가짜 고은'을 잡고서도 용서해 줬다는 미담도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우선 실명까지 적시된 이 '가짜 고은' 전씨는 전업 사기꾼이 아니라 직장인(출판사 직원)이었다. 자기 직장이 버젓이 있는데 생계를 위해 전업 사기행각을 벌였을 가능성은 낮다. 또 기사에는 그가 즉결심판에 처해졌다고 나온다. 이것은 죄질이 경범죄 수준으로 미미했음을 의미한다. 이때 잡힌 '가짜 고은' 전씨가 1960년대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사기, 혼인빙자간음 등으로 이미 수배가 내려진 당사자였다면 '진짜 고은'이 고발장을 찢건 말건 무거운 형사처벌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는 출판계에 종사하던 범인 전씨가 이름이 익은 관련 문인들을 사칭하며 사기 데이트를 벌인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가짜 고은' 이야기가 100% 거짓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당시 고은에 얽힌 수많은 기행 및 범죄 행각이 모두 '가짜 고은'의 소행이라고 보기에는 명쾌하게 설명되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 많다. 1968년 '가짜 고은'이 검거되었지만 이후에도 수년간 '가짜 고은'의 출몰은 끊이지 않았다. 이문열은 고은을 모델로 한 것으로 유명한 소설 사로잡힌 악령에서 이러한 고은의 해명을 빗대 "해방 뒤 이 나라에는 가짜 백작사건까지 있었지만 가짜 문인이 있었다는 말은 그의 연보나 자서전 이외에는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거기다 그 소동이 있었다는 60년대 중반만 해도 그의 지명도는 전국적으로 가짜가 돌아다닐만큼 높지도 못했다. 그 전에도 그 뒤에도 그보다 지명도 높은 사람이 수없이 많았는데 어째서 그들에게는 한 번도 그같은 가짜 소동이 없고 그때만 해도 그리 대중적이지 못하던 그에게만 집중적으로 가짜 소동이 일어난 것일까."고 꼬집었다.

결국 '가짜 고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1960~70년대 초까지 고은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소문이 계속 퍼지자 당시 고은이 몸 담고 있던 순수 문학계는 점점 그를 배척하였다. 이에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낀 고은은 네 번째 자살 시도를 했다. 1970년 무렵 북한산 정릉 계곡에서 수면제 100여 알을 먹고 잠들었으나 마침 주변에서 훈련하고 있던 예비군들에 의해 발견되어 북한산 입구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져 다음날 30시간만에 깨어났다. 다행히 그의 주머니 속에 다소간의 돈이 들어 있었던 탓에 이 돈으로 병원비를 지불하고 그를 입원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외진 병원이었지만 어찌 알았는지 최인훈 등 동료 문인들이 병문안을 와서 그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

순수 문학계에서 멀어지던 고은은 1974년 갑자기 저항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를 발표하며 저항시인으로 변신했고 이어 1974년 11월 진보 성향 문인들을 결집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진보 성향 문인 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족문학작가회의)'를 창설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하여 진보 문학계의 좌장이 되었다. 이후에는 '가짜 고은' 사건도, 고은과 관련된 성폭력 루머도 더 이상 나돌지 않게 되었다.

고은의 이러한 변신은 본인의 추악한 악령을 감추고 민주화 운동이라는 거대하고도 절대적인 시대의 숙제이자 사명감이라는 타이틀 뒤에 숨어 더욱 악이 번성하게끔 하였다. 이 악은 절멸되지 않으며 오히려 주위에 부역자, 동조자들로 인하여 엽색 행각은 사소한 일, 대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 정도로 묵과되었으며 고은을 비난하는 것은 곧 민주화 정신의 문학계를 비판하는 것으로 걷잡을 수 없이 그 의미가 커져만 갔다.

이후 진보문단의 거장이 된 고은은 성추행 파문이 불거지기 1년 전인 2017년 3월 TV에 출연하여 당시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아울러 문단 내 성폭력 사태에 대해 "슬픈 일"이라고 말하면서 "현대 초기에는 퇴폐적, 퇴행적 일탈을 한 문인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작가들도 사회가 요구하는 윤리적 기준을 갖춰야 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

2.2. 이문열의 소설 사로잡힌 악령

그의 악이 번성하는 한 파렴치한 엽색(獵色)의 식단도 풍성했다. 자랑스레 휘젓고 다니는 색주가는 기본이었고 손쉽고 뒷말없는 유부녀는 속되게 표현해 간식이었다. 더욱 악의 섞어 말하자면 신선한 후식도 그 무렵에는 그에게는 흔했다. 시인의 허명에 조금했다가 화대도 없이 몇 달 침실봉사만 한 신출내기 여류시인이 있는가 하면, 뜻도 모르고 관중의 갈채에만 홀려 있다가 느닷없이 그의 침실로 끌려가 눈물과 후회 속의 아침을 맞는 얼치기 문학소녀가 있었고, 그 자신이 과장하는 시인이란 호칭에 눈부셔 옷 벗기는 줄도 모르다가 (중략) 놀라 때늦은 비명을 지르는 철없는 여대생도 있었다.
사로잡힌 악령》, 이문열

1994년 소설가 이문열이 소설 사로잡힌 악령을 발표하여 문학계에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승려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폭음을 일삼던 문인이었는데 유명 원로 스님의 수제자라는 명성을 이용해 문화예술계의 고위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문학계의 중심인물로 군림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주인공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여성 문학 지망생들을 농락하는 악마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가 지나친 악행을 일삼자 일부 문인들은 그를 문학계에서 배척하려고 시도한다. 이에 주인공은 살길을 모색하기 위해 이번에는 민주투사로 변모한다. 그리고 오히려 더욱 유명 인사가 되어 자신의 권력으로 예전보다 더 심한 악행을 일삼으며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소설 속에서 또 다른 효봉스님의 문도의 입을 빌려 그가 무턱대고 계속해서 스승님을 찾아 어찌어찌 상좌가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또한 문단에 데뷔한 후 자칭 효봉 스님의 상좌(수제자)라고 말하는 등 효봉 스님의 명성을 이용하여 문화예술계의 고위 인사들과 쉽게 교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소설에서는 명사 사냥꾼으로 표현되었다. 한 예로 말 몇 번 섞어 본 것이 몇 년 뒤에는 아주 잘 아는 사이로, 또 몇 년 뒤에는 죽마고우로 포장되어 사람들을 현혹했다는 대목이다.

남북작가회담을 추진하다가 구속된 일도 소설 속에서는 방북을 선수치고 싶었으나 빼앗긴 것에 대한 분, 그러나 이러한 일로 또다시 추앙받게 되고 떠받들어 받게 된 씁쓸한 현실에 대한 비난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이 소설 주인공의 실제 모델이 바로 고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자 당시 고은이 좌장으로 있던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을 비롯해 진보 계열 문인들이 집단으로 들고 일어나 이문열을 공격했다. 당시 진보 문인들은 민주투사 출신이며 현재 진보 계열 문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고은을 의도적으로 비방하고 있다며 이문열을 맹비난했다. 당시 고은은 김영삼 정권이 자신을 표적으로 삼아 음해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맹공에 밀린 이문열 작가는 "특정인물을 상정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비난이 수그러들지 않자 자신의 출간 단편집에서 제외했으며 이 책에 대해 절판 조치까지 취했다. 때문에 이 작품은 1994년 출간된 중단편집 '아우와의 만남' 초판에서만 볼 수 있다.

한 가지 알아 둬야 할 것은 이문열이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고은을 상당히 존중했다는 점이다. 이문구의 <산 너머 남촌>에 실린 송기숙의 발문, 시골 밭둑의 싱싱한 수풀을 보면 1982년에 1979년 지미 카터 내한 반대시위에 대한 재판을 받기 위해 대구교도소로 이감되어 있던 고은을 면회하기 위해 송기숙, 이문구, 황석영, 김지하 등이 대구로 왔는데 대구에 살던 이문열도 찾아가 함께 면회했다. 그런 이문열이 왜 10여년 뒤에 < 사로잡힌 악령>을 썼을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그때는 없었다.

2018년 미투 운동의 최전선에 선 최영미가 그의 시로 고은을 천하에 고발했을 때 많은 국민들이 충격의 도가니에 빠진 것에 반해 그 당시 훨씬 높은 수위로 강도 높게 소설적 표현을 이용하여 고은을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실체가 널리 알려지지 못하였다. 만약 그 당시 정의가 바로세워졌다면 노벨문학상 후보라는 문단의 오점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사로잡힌 악령 전문

더 자세한 내용은 사로잡힌 악령 참조.

2.3. 2017-2018년 미투 운동 때 성폭력 의혹이 제기되다

  • 최영미의 '괴물' 발표와 JTBC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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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미는 2017년 12월 '괴물'라는 제목의 거의 실명 고발에 가까운 시를 발표했다. 시 '괴물'에서 젊은 여자만 보면 성폭력을 저지른다는 "En"시인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으로 언급했는데 "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라는 구절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은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말이 많았고 결국 시의 주인공 En이 고은인 것으로 밝혀졌다.
    2018년 2월 6일 JTBC는 고은이 그동안 공공연하게 제기되어 왔던 문단 내 성폭력 문제의 주요 가해자라는 주장을 보도했다. 이후 파문과 의혹이 급격히 확산되었다. #1 #2 #3 #4
    최영미는 그동안 문학인 4명에게 성추행을 당했는데 그 네 명 모두 고은이 창단하여 초대 회장을 맡았던 문인단체 '한국작가회의(구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이라고 추가로 밝혔다. #
  • 고은 옹호
    이후 사회적 여론이 악화된 가운데 '문학과 지성사' 설립자로 유명한 진보 성향의 문학평론가 김병익이 고은을 옹호하는 입장을 밝혔다. '옛날부터 술좌석에서 시끄럽고 난잡스러웠다.', '너무 시시콜콜 다 드러내고 폭로하고 비난하면 세상이 좀 살벌해지고 여유가 없어지는 것 같다. 우리가 이렇게 일거수일투족 조심하다 보면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싶다.' 라고 주장했다. #1 #2 김병익뿐만 아니라 문단 내 성추행과 연루되었다고 거론되는 시인들이 고은을 옹호하는 한편 최영미를 비난하는 의견을 내 논란이 불거졌다.
    이승철 시인이 SNS을 통해 최영미를 비난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승철은 "최영미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며 비난했다. 이승철은 "이 땅의 민족문학은 사실상 최영미 현상으로 인하여 절단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최영미의 성격을 거론하며 인신공격성 발언을 이어갔다. "최영미, 그녀는 선병질적으로 튀는 성격이었다. 매우 완강한 자존의 소유자였고, 어찌 보면 유아독존적 처신이었다." 이어 이승철은 "미투 투사들에 의해 다수의 선량한 문인들이 한꺼번에 도매금으로 매도되는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이승철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국장과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총장을 역임한 바 있다. 고은은 '민족문학작가회의'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한국문학평화포럼'의 명예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
  • '한국작가회의(구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반응
    한편 최영미가 지칭한 네 명의 성추행 문학인들의 소속 단체인 '한국작가회의(구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어떠한 입장 표명도 하지 않은 채 아직 새 집행부가 인수인계도 받지 않았다며 4월 이사회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겠다면서 입장 표명을 미루었다. #
    이후 소속 회원인 이윤택까지 성폭력 논란에 휩싸이게 되자 '한국작가회의'는 사건이 터진 지 16일(2월 22일)만에야 고은, 이윤택 징계안 상정 및 처리에 대한 보도자료를 냈다. 이 징계 상정안은 3월 10일 이사회에서 통과여부가 확정될 방침으로 전해졌다. 이는 징계안이 가결되기 전에 고은이 직접 거취를 결정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준 것으로 풀이되었다.
    그러나 창업주인 고은을 징계하는 안에 대해 한국작가회의 내에서 반발이 상당하다고 전해졌다. 한국작가회의 소속 한 여성 시인은 "고은은 남자한테도 뽀뽀하는 천진한 분이고, 옛날 윤리와 지금의 윤리는 다른데 작은 흠으로 거장을 매장시키면 안 된다"며 작가회의 결정에 반발했다고 한다. #
  • 고은의 반응
    고은은 성폭력 파문이 일어난 후 한 언론을 통해 “후배 문인을 격려하는 취지에서 한 행동”이라고 해명한 뒤 3월 4일 영국 가디언지를 통해 부인 성명을 낼 때까지 일절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다.
    2월 18일 고은 재단을 통해 수원시가 마련해 준 광교산 자락의 주거 및 창작공간[5]을 올해 안에 떠나 “‘자연인’으로 살 수 있는 곳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할 것”이라는 계획만을 짧게 밝혔다. # # 그러나 고은 재단은 "퇴거 방침은 최근 불거진 성추행 의혹 논란과는 무관하다."고 선을 그었다. #
  • 연이은 추가 폭로
    2월 27일, 추가 의혹이 연이어 폭로되었다. #
    1. 2000년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술집에서는 고은이 자신의 시집 출판 계약을 논하는 자리에서 중소출판사 여직원의 신체를 더듬었다고 한다. 고은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여직원은 회사에 피해라도 갈까봐 저항하기 힘든 상황이었다고 한다.
    2. 2008년 4월 고은은 지방의 한 대학 초청 강연회에 참석했다. 행사 후 당시 20대 여성 대학원생 3명과 30대 문인(폭로 당사자)과 5명이 함께한 뒤풀이 성격의 술자리에서 고은은 20대 여성 대학원생의 신체를 만지더니 급기야는 바지를 벗고 고은 자신의 성기를 노출하는 추태를 보였다고 한다.

    2012년 5월에도 자신의 신체를 노출했다는 사실이 추가 폭로되었다. 작가지망생 이모 씨(28)에 따르면 광주의 한 행사에 초청시인으로 초대받은 고은은 행사 뒤풀이에서 테이블 위에 올라가 바지를 벗고 신체 일부분을 노출했다고 한다. # #
    고은과 가까운 일부 문인은 사실상 고은의 추태를 간접적으로 돕는 역할도 했다고 한다. 그들은 고은과의 술자리에 여성 제자만 불렀다고 한다. 여성을 같은 문인이 아니라 접대부로 취급하는 저급한 문화에서 비롯된 것. #
  • 최영미 추가 폭로
    2월 27일, 같은 날 나온 최영미의 증언은 더욱 충격적이었는데 1993년 즈음 탑골공원 한 선술집에서 고은이 남녀 문인 6~7명이 있는 자리에서 바지 지퍼를 내리고 자기 성기를 주무르는 자위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더욱 기막힌 것은 그의 발언이었는데 황홀에 찬 표정으로 신음소리를 내면서 자위를 즐기더니 "야 니들(20대 여성 문인들 포함)이 여기 만져 줘"라는 명령까지 했다는 것이다. # 주변에 있던 남자 문인들은 말리기는커녕 희죽 웃으며 상황을 즐겼다고 한다. 술집에는 고은 일행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주변에 일반인 손님 예닐곱 명은 더 있었다고 한다. 누워서 황홀경에 빠진 괴물을 위에서 내려다보더니 술집 여자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아유 선생님두-”라고 했다고 한다.
    내 입이 더러워질까봐 내가 목격한 괴물선생의 최악의 추태는 널리 공개하지 않으려 했는데, 반성은커녕 여전히 괴물을 비호하는 문학인들을 보고 이 글을 쓴다. 내가 앞으로 서술할 사건이 일어난 때는 내가 등단한 뒤, 1992년 겨울에서 1994년 봄 사이의 어느날 저녁이었다. 장소는 당시 문인들이 자주 드나들던 종로 탑골공원 근처의 술집이었다. 홀의 테이블에 선후배 문인들과 어울려 앉아 술과 안주를 먹고 있는데 원로시인 En이 술집에 들어왔다. 주위를 휙 둘러보더니 그는 의자들이 서너개 이어진 위에 등을 대고 누웠다. 천정을 보고 누운 그는 바지의 지퍼를 열고 자신의 손으로 아랫도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보는 놀라운 광경에 충격을 받은 나는 시선을 돌려 그의 얼굴을 보았다. 황홀에 찬 그의 주름진 얼굴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아- ” 흥분한 그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 한참 자위를 즐기던 그는 우리들을 향해 명령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야 니들이 여기 좀 만져줘.” ‘니들’ 중에는 나와 또 다른 젊은 여성시인 한명도 있었다. 주위의 문인 중 아무도 괴물 선생의 일탈행동을 제어하지 않았다. 남자들은 재미난 광경을 보듯 히죽 웃고….술꾼들이 몰려드는 깊은 밤이 아니었기에 빈자리가 보였으나, 그래도 우리 일행 외에 예닐곱 명은 더 있었다. 누워서 황홀경에 빠진 괴물을 위에서 내려다보더니 술집여자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한마디 했다. “아유 선생님두-” 이십 년도 더 된 옛날 일이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처치하기 곤란한 민망함이 가슴에 차오른다. 나도 한때 꿈 많은 문학소녀였는데, 내게 문단과 문학인에 대한 불신과 배반감을 심어준 원로시인은 그 뒤 승승장구 온갖 권력과 명예를 누리고 있다. 공개된 장소에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물건’을 주무르는 게 그의 예술혼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나는 묻고 싶다. “돌출적 존재”인 그 뛰어난(?) 시인을 위해, 그보다 덜 뛰어난 여성들의 인격과 존엄이 무시되어도 좋은지. -시인 최영미 2018.2.27-
  • 탑골주점 주인 한복희씨 반박문 발표
    2월 28일, '탑골'주점 주인 한복희가 최영미의 주장이 거짓이라며 반박을 신문에 기고했다.
    "그 분은 승려 출신이라는 자긍심이 항상 있었고 입으로는 수없이 기행적인 행동과 성희롱 발언을 언급 했을지언정 의자 위에 등을 대고 누워 바지 지퍼를 내리고 자신의 아랫도리에 손을 넣고 만지고 그런 추태적 성추행 기행을 했던 기억은 아닌 것으로 안다."




    고은이 수없이 성희롱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위행위를 한 것을 본 기억은 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반박문이라고 나온 것이 오히려 고은이 수없이 기행적인 행동과 성희롱 발언을 했음을 다시 한번 입증해 준 꼴이 되고 말았다. 또 단순히 사실관계를 부인하는 반박문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유려한 필체와 화려한 수식어로 이루어져 있어서 대필 의혹까지 제기되었다. #
    반박문을 기고한 한복희가 운영하던 '탑골'주점은 고은이 창설한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소속 작가들이 매일 안방같이 드나들던 아지트와 같은 곳이라고 한다. 당시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 작가들은 한복희를 '한선생'이라고 불렀다. '민족문학작가회의'는 30주년 기념식에서 한복희씨에게 감사패와 함께 준회원 자격을 부여한 바 있다. # # #
    이승철도 다시 한 번 최영미의 발언을 반박했다. "최영미가 언급한 그 시절에 난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매일매일 일과처럼 우린 그 <탑골>에서 술을 마셨다. 허나, 난 <탑골> 주점에서 최영미가 동아일보에 기고한 고발장 내용 같은 사실을 전혀 목격한 적이 없다. 그런데 왜 최영미는 바로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 사실 묘사를 하면서 그때 한 자리에 있었다는 문인들의 이름을 안 밝히고, 일방적인 주장을 하는 건가"라면서 최영미를 비난했다. 이승철은 이미 지난 2월 7일 자신의 SNS을 통해 최영미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면서 맹비난한 바 있었다. #
  • 영국 가디언지 반박 성명 발표
    3월 4일, 고은은 해외 언론을 통해 성명을 발표하여 자신의 성폭력 관련 행위를 부인했다. 영국 언론 가디언지는 영국 출판사인 블러드액스 북스(Bloodaxe Books)의 고은 담당자인 닐 애스틀리(Neil Astley)씨를 통해 고은의 성명을 입수하여 발표했다.
    "상습적인 성추행을 했다는 혐의에 대해 단호하게(flatly) 부인한다. 나는 한국에서 시간이 흘러 논란이 수그러들고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지만, 관련 사실과 맥락을 접하기 힘든 나의 해외 독자들을 위해 분명히 밝힌다. 나는 나 자신과 부인에게 부끄러울 행동을 한 적이 없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시인으로서 명예가 실추되는 일 없이 계속 집필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는 점이다.”

    애스틀리씨는 “현재까지 한국 언론에 보도된 내용은 한 사람의 문제 제기에서 비롯되었고,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다른 고발자들의 진술들은 입증되지 않은 것들 뿐이다. 성추문 스캔들로 인한 그의 추락은 그가 한국 사회에서 누린 명사로서의 지위와 대중적 찬사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애스틀리씨는 또 “블러드액스 출판사는 여전히 고은의 문학적 유산을 지지한다.”고 덧붙였다. 블러드액스 출판사는 '만인보'를 비롯하여 고은의 여러 시집을 출간하여 판매했다.
    애스틀리씨는 현재 고은이 종양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해 회복 중이라며, 최근의 수술과 그에게 가해진 비난의 결과 인해 몸이 매우 약해진 상태라고 전했다. # 고은이 입원해 있는 병원이 어느 곳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고은은 불과 며칠 전에도 수원 광교 자택 정원에 있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된 바 있다.
  • 최영미의 반응
    3월 4일, 고은의 반박 성명이 보도된 후 최영미는 기자들에게 "고은이 남은 마지막 기회를 날려 버린 것 같다. (고은이) 사과하고 참회하고 용서받아야 하는데 참 딱하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최영미는 SNS에 통해 "제가 괴물에 대해 매체를 통해 한 말과 글은 사실입니다. 문화예술계 성폭력을 조사하는 공식기구가 출범하면 나가서 상세히 밝히겠습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
  • 박진성의 추가 폭로
    고은의 성추행 부인 성명이 나온 다음날 새로운 폭로가 나왔다. 박진성은 3월 5일 자신의 블로그에 ‘고En 시인의 추행에 대해 증언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고은의 성추행을 목격했다고 밝혔다.
    2008년 4월 C대학교(충주대)에서 주최한 ‘고은 초청 강연회’ 후 뒷풀이에서 고은은 옆자리에 앉은 20대 여성의 손과 팔, 허벅지를 차례로 만지며 성추행했다. 피해 여성이 당황했지만 고은의 성추행은 계속되었다. 이에 박진성은 뒷풀이 모임을 주선한 H대학 K교수에게 항의했지만 가만 있으라는 얘기와 함께 묵살당했다. 성추행이 이어지자 피해 여성이 저항했고 고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성 3명 앞에서 지퍼를 열고 자신의 성기를 꺼내 3분 넘게 흔들었다. 고은은 자리에 앉더니 “너희들 이런 용기 있어?”라고 말했다. 고은에게 성추행을 당한 여성은 밖으로 나가 울고 있었고 박진성은 그녀가 다 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택시에 태워 보냈다. 박진성이 돌아와 피해 여성을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하자 술자리는 급속도로 가라앉았고 고은은 그 여성이 “참석자 중 가장 젋고 예쁜 여성”이었다고 말했다. 그때가 아직 날이 훤한 오후 5시였다. 당시 식사 겸 술자리는 방이 따로 있는 그런 음식점이 아니라 오픈된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옆자리에는 다른 손님들이 있었고 시인 일행의 술자리를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후 K교수가 2차로 노래방을 가자고 얘기했으나 기분이 가라앉은 고은은 싫다고 말했고 고은과 K교수 단 둘이서 함께 어디론가 떠나면서 모임은 끝났다.
    저는, 저와 그 당시 여성들만 당한 줄 알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문단에서 굴러먹은 지 17년째, 고En 시인의 그런 만행들은 여기저기서 들려왔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2018년. “30년 전 격려 차원에서 그랬다”는 고En 시인의 변명을 보고 또 한번 경악했습니다. 30년 전이면 1988년인데, 그 이후에 제가 들은 똑같은 패턴의 희롱과 추행들은 유령이 한 짓입니까? 어제 "부끄러울 일 안 했다, 집필을 계속하겠다", 고En 시인의 입장 표명을 보고 다시 참담함을 느꼈습니다. 정말 궁색한 변명입니다. 그의 추행과 희롱을 보고 겪은 시인만 적게 잡아 수백명이 넘습니다. 수십년 간 고En 시인이 행해온 범죄입니다. 문단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을 왜 노 시인은 부정하는 것입니까.


    문단의 선배 시인님들. 고En 시인의 '성기 노출'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것은 범죄입니다. 제발 모른 척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후대에, 그리고 당대의 여성들에게 당당하십니까. 고En 시인의 진정한 사과를 바랍니다. 묵살하지 마십시오. 그 당시 고En 시인에게 ‘성범죄’를 당했던 여성들에게 진정한 사과를 하실 수 있는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저 역시 방관자로서, 석고대죄하는 심정으로 씁니다. 제발, 사과하시기 바랍니다. 고En 시인님.



    박진성

    박진성은 고은의 공식입장을 보며 참담함을 느껴 내 문학 인생을 다 걸고 목격담을 밝히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울러 용기를 내 준 최영미를 응원한다고 말했다. #
    이와 관련해 박진성이 지목한 고은의 측근 ‘H대학 문예창작과 K 교수’는 “박진성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일은 전혀 없었다. 100퍼센트 소설이다. 그가 왜 이런 글을 썼는지 너무 황당하고 당혹스럽다. 고의로, 악의적으로 이렇게 쓴 것이라고밖에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익명 제보자가 1990년대 중후반 고은이 저녁을 먹고 2차로 간 노래방에서 고은이 광고 프로덕션 사장인 여성의 “손과 가슴, 그리고 중요 부위”를 심하게 더듬었다거나 또 다른 광고계 인사의 집에 초대받아 간 자리에서는 고은이 베란다에서 바지를 벗고 성기를 흔들다가 소변을 보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 또 박진성도 이후 자신에게 고은의 성폭력과 관련된 여러 구체적인 제보가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
  • 고은재단 성명서 해명과 시사저널의 반박 보도
    2018년 3월 6일, 문화일보는 영국 가디언지 성명서와 관련된 고은재단 측의 해명을 보도했다. 고은재단 측은 외신보도 내용에 대해 “고은이 3월에 예정된 유럽 행사의 불참을 알리기 위해 출판사 측에 설명하는 이메일을 보낸 것이 ‘성명’으로 와전된 것 같다. 국내 언론을 배제하고 해외에 입장을 밝힌 건 아니다”라고 밝혔다. 또 고은이 어느 병원에 입원해 있는지에 관한 궁금증에 대해 고은은 현재 퇴원한 상태라고 밝혔다. #
    그러나 3월 7일 '시사저널'은 고은재단 측의 해명이 사실과 다르다고 보도했다. 시사저널은 영국의 출판사 블러드액스 북스에 요청하여 고은 측이 보낸 성명서의 원문을 입수했다. 시사저널의 취재에 따르면 고은의 성명서를 가디언지에 전달한 닐 애스틀리(Neil Astley)씨는 단순한 출판사의 직원이 아니라 출판사 블러드액스 북스의 창업자이자 편집장이다. 블러드액스 북스는 '만인보' 등 고은의 여러 시집을 출간했다.
    고은 측이 블러드액스 북스에 보낸 워드파일 이름은 ‘영국에 보내는 고은의 입장문(Ko Uns statement)'이라고 되어 있다. statement는 흔히 성명서로 번역되는 단어다. 고은재단은 "국내 언론을 배제하고 해외에 입장을 밝힌 건 아니다"라고 해명했으나 이메일의 제목은 한글로 '입장문'이라고 적혀 있었다. 또 워드파일 원문에는 행사 불참 통보와 관련된 내용은 전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

그러나 일부 여성 문인은 이날 언론사에 보낸 보도자료에서 "최영미가 특정한 고은에 의한 성폭력의 실체는 아직 사실관계도 확정되지 않았다"며 "지금으로부터 23~24년 전 인사동 어느 주점에서 벌어졌다고 하는 '고은 성추행 목격담'에 대해서는 발표 다음날 인사동 탑골주점 사장이 그 같은 사실이 없었다는 취지로 공개 증언을 했고, '괴물' 시 속의 출판사 편집자로 지목된 이 역시 시 내용이 자신이 겪은 바와 다르다고 증언해 지금도 진실공방과 후속조처가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고은은 군사독재 타도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하고 한국문학 100년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고은의 생애와 작품이 얻은 가치를 여성운동의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진실이 아닌 풍문만으로 폐기하는 결과를 빚었을 때 우리 여성문학인들이 모욕감과 굴욕감을 느낌은 물론, 이것이 여성운동의 대의마저 손상할 우려를 금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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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영미와 박진성을 비롯한 언론사 대표와 기자들에게 손해배상 청구 소송 제기
    2018년 7월 25일, 법조계는 지난 17일에 고은이 서울중앙지법에 위와 같은 소송을 제기하였으며 청구 금액은 총 10억 7000원에 달하고 최영미와 박진성에게 각각 1000만원을 청구하였다고 밝혔다.
    고은 측은 성추행 의혹이 허위 보도라는 입장으로 일관했다. 최영미는 2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오늘 법원으로부터 손해배상 청구 소장을 받았다"며 "힘든 싸움이 시작되었으니, 밥부터 먹어야겠다"라는 메세지를 남겼다.
    위 소송에 대한 재판은 해를 넘긴 2019년 1월부터 시작되었다. 고은은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재판정에 출석하지 않았으며 그의 변호사만 출석했다. 그간 최영미는 고은에게 직접 성추행을 당했거나 목격했다는 증언을 대거 수집해서 재판부에 제출했으며 원고(고은)가 직접 출석해서 대질 신문을 받을 것을 요청했으나 원고측은 응하지 않았다. 관련 기사
    2019년 2월 15일, 고은이 최영미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1심에서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최영미에게 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선고 직후 최영미는 성추행 가해자가 피해자를 고소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면 안 된다며 진실을 은폐한 사람들이 반성하기 바란다고 소감을 전했다. 그런데 해괴하게도 최영미에게는 승소 판결하면서 같은 내용을 증언한 박진성에 대해서는 패소 판결을 하며 1천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2.4. 재평가 및 여론

저런 사건들이 밝혀진 뒤 거의 모든 곳에서 여론과 인식이 매우 좋지 않게 되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유사 자위행위를 하고 거리낌 없이 자신의 성기를 만져 달라고 요구하며 노래방에서는 자신의 성기를 노출하는 등 너무나도 충격적인 증언의 연속이라 그에 대한 평가는 더 나빠질 수도 없을 정도로 추락했다. 게다가 말년에 노망이 들어 버젓이 저지른 행위들이라기보단 이미 60년대부터 축적된 추악한 행태와 엽색 행각이 말년에 이르러서까지 자제가 되지 않았음을 사람들이 깨달으면서 그는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랍다", "이토록 거대한 악이 지금까지 존경받으며 성장해 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평소 고은의 시에 아는 바가 전혀 없었음에도, 이렇게까지 떠받들여지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는데, 그 주위사람들이 지금까지 떠받들여줘서 그런 것 아닌가? 도대체 이런 사람을 왜 그토록 찬양했는가? 어이없다"며 놀라움을 표했다. 실제로 이 사태 이전에도 그의 바르지 못한 행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떠돌았고 자신을 치켜세우기 위해 존경받는 문인들을 근거 없이 깎아내리고 말도 안 되는 인신공격을 하는 등 치졸하고 유치한 행태가 잘 알려져 있긴 했으나 그의 작품을 떠받들던 문학계에게 억눌려 무시되곤 했던 것.

소수의 지인들이나마 '작가의 도덕과 작품은 별개'라며[6] 그를 옹호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고 되려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사실 그의 평가가 완전 나락으로 떨어진 데는 이 지인들의 옹호가 말 그대로 결정타를 날렸다고 할 수 있다.

옹호해 주겠다고 나선 인간들조차 "그 분이 그럴 분이 아니다"라는 말은 하나도 안 했고 '그때는 시대가 그랬다'거나 '그런 행위로 시인의 업적이 폄하되어서는 안된다'는 소리밖에 안 나오면서 옹호자들조차 그런 일이 없었다고 도저히 말을 못 할 만큼 명명백백하게 그 짓을 했다는 걸 역으로 입증해 버렸기 때문.[7]

이로 인해 1994년에 이미 이를 세상에 폭로한 이문열이 재평가를 받았으며 그간 고은의 행태를 알고도 이를 묵인한 문단 권력의 추악한 협잡배에 대한 분노도 강해졌다. 대중은 "이를 알고도 묵인한 그들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들인가? 이게 과연 예술과 인생을 논하는 문학가들, 시인들이 할 일인가?"하며 혀를 끌끌 찼다.

2018년에 출간된 수능특강에 수록된 <머슴 대길이>는 미투운동 이후 EBS 수능특강 관련 강의에서 해당 부분을 전부 편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은은 집필을 계속할 것이며 절필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으며 창작과비평사[8] 당분간 출간이 힘들 것 같다고 복귀를 고려하는 입장을 보여 빈축을 샀다.

그리고 2023년 시집과 대담집을 잇따라 내놓았다. 계간지에 고 김성동 작가 추모시도 기고했다. #

물론 출간 소식에 여론이 싸늘했던 터라[9] 결국 시집을 발매했던 실천문학사에서는 출간을 취소했다. #
그러다 반년 만에 재출간했다. #

이후 고은 시인의 시 발매에 대한 여론의 비판이 부당하다며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설문조사를 공유하는 문학 신문 트윗 설문조사에서는 출판의 자유권출판의 자유권리 억압 사태에 대한 원인 분석 설문 조사라는 제목을 사용하여 극단적인 예시[10]와 내용으로 여론의 비판에 대해서 부당함을 설파했다. 하지만 출판의 자유가 있다면 고은 시인이 10년 넘게 계속된 위계에 의한 성폭력 등을 사과하지 않고 되려 피해자에게 손해 배상 등을 청구해 놓고 책을 또다시 출간한 사실에 대해서 비판할 자유가 있으며 이 비판에 출간 취소를 결정한 것은 실천문학사의 행동이라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당연히 가해자 옹호, 범죄 미화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3. 지자체의 반응

  • 수원시
    수원시는 2013년 8월 고은에게 수원시 상광교동 광교산 자락 아래 주거·창작 공간으로 마련된 '문화향수의 집'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고은은 수원시로부터 수도요금, 가스요금 등을 면제받는 혜택을 누리고 있는데 그 비용이 연 1,000만원에 상당한다고 보도되었다. 이에 대해 광교산 주민들이 개발제한구역과 상수원 보호법에 묶여 있는 지역에서 고은에게만 특혜가 제공되고 반발하면서 퇴거 집회를 열고 있었다. 주민들은 "시는 생계를 이어가려는 주민들에게 고발과 벌과금을 부과하면서 고은 시민에게는 혈세를 들여 각종 혜택을 주고 있다."며 형평성 문제를 제기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은의 성추문 파문이 발생하자 이찬열 바른미래당 국회의원(수원시 갑) 등이 퇴거를 요구하는 등 수원시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했으며 2월 18일 고은 재단이 1년 내로 퇴거하겠다고 밝히면서 이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수원시는 고은 등단 60주년을 기념해 추진할 예정이었던 문학 행사를 전면 재검토하기로 했다.
    수원시가 고은재단과 함께 건립을 추진 중이던 '고은문학관' 설립에도 제동이 걸렸다. 이미 수원시는 고은문학관 부지로 팔달구 장안동 시유지를 제공하기로 결정했고 염태영 수원시장은 고은문학관 건립사업 벤치마킹을 위해 2017년 6월 스위스의 세계적인 건축가인 페터 춤토르가 설계한 독일 쾰른의 콜롬바 박물관과 스위스 발스의 온천단지를 방문하기도 했다. # 고은의 성폭력 파문이 발생한 후 한명숙 수원시의원과 시민들이 고은문학간 설립 계획을 철회할 것을 요청했다. 수원시는 약 3주간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2월 27일 고은의 복수의 '성기 노출' 증언들이 나오자 마침내 28일 긴급 발표를 통해 고은문학관 건립을 전면 철회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수원시는 고은이 쓴 위안부 피해 할머니 추모시도 철거했으며 권선구 권선동 올림픽공원 내 ‘ 평화의 소녀상’ 아랫단 우측에 설치되어 있던 고은의 추모 시를 2월 말 철거했다고 3월 7일 언론을 통해 밝혔다. #
  • 서울특별시
    한편 서울시는 2017년 11월 21일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중 주요사업의 하나로 서울도서관(옛 서울시청사) 3층에 고은이 대표작 <만인보>를 쓴 서재를 재현한 '만인의 방'을 개관했다. 사실 1933년생인 고은은 사실 3·1운동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며 위에 썼듯이 고은은 3·1운동의 의의를 심각하게 폄훼한 인물이다. 그는 만해 한용운이 개인적인 컴플렉스에서 3·1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주장했고 당시 민족대표 33인장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폄하한 바 있었다. 그리고 서울시는 3억원의 예산을 들여 의욕적으로 '만인의 방'을 꾸몄고 여기에 3.1운동 관련 유물과 기념물을 전시했다.[11]
    그 뒤 '만인의 방' 개관 두 달여 만에 고은의 성폭력 파문이 발생하면서 이곳을 폐쇄하라는 여론이 거세졌지만 2018년 2월 11일에도 서울시는 철거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 사실 서울시도 내부적으로 상당히 난감해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러다가 고은의 성기 노출 및 자위행위 폭로가 터지자 결국 고은 기념관인 '만인의 방'을 철거했다. # #
  • 군산시
    고은의 고향 군산시에서는 시민들의 당혹감과 충격이 이어졌다. 군산으로 모셔오자는 반응도 일부 있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잠잠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고은 아버지의 행적 때문에 군산시에서는 그에 대한 반감도 상당했다.
    여기부터가 고은의 잊고 싶은 그 날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몇 년 전 군산문화원에서 시인의 생가 표지판을 마을 입구에 만들었다. 그렇지만 마을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실제 생가와는 동떨어진 곳에 푯말을 세웠다고 한다.

    (중략)

    군산의 향토학자 한 분은 "6·25 동란 때 용둔리 일대의 좌우익 학살 현장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선산 김씨 일족들과 좌익 활동을 했던 고은 일가친척들과의 풀지 못한 한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또 그는 "고향을 등진 뒤로 노모와 가족들을 외면해 왔던 고은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반감도 절반의 이유쯤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군산에서는 배우 김수미, 개그맨 박명수 등과 함께 고은을 군산을 빛내는 유명인으로 지정했다. 군산에 있는 은파호수공원에 고은의 시비가 있으며 군산 벽화마을 벽화에도 고은의 시문이 새겨져 있다.
    군산시청에서는 직접적인 입장은 내놓지 않았으나 고은의 개인적인 일이기 때문에 시에서는 직접 이 문제를 개입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 포항시
    포항시는 시청사 1층, 2층 계단 벽면에 설치된 〈등대지기〉를 덧칠해서 없애기로 했다. 포항시는 2014년부터 시청사 내 계단 오르기 운동을 전개하면서 계단 벽면을 다양한 벽화, 시화로 장식했는데 그 중의 하나로 고은이 작사한 것으로 알려진 〈등대지기〉를 설치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성추행 폭로 이후에는 계단을 이용하는 민원인과 공무원들의 항의와 불만이 이어졌다. 결국 포항시는 2018년 3월 9일에 페인트를 덧칠하는 방법으로 철거하기로 했다고 공표했다. #
    사실상 〈등대지기〉는 19세기 미국의 찬송가 곡조에 일본 시인 카츠 요시오(勝承夫)가 가사를 붙여 만든 곡이다. 고은은 단순히 일본어 가사를 번역했던 사람 중 하나일 뿐이니 다소 과민한 반응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대중의 고은에 대한 분노가 매우 강해졌다는 방증이라고 볼 수 있겠다.
  • 경기도
    2018년 3월 19일 경기도와 경기관광공사는 2016년 12월 개장한 파주시 임진각국민관광지에 위치해있는 독개다리 스카이워크(인도교) ' 내일의 기적소리'에서 고은의 이름을 스티커로 가리고 안내판을 철거했다고 밝혔다. '내일의 기적소리'는 6·25 전쟁 때 폭파돼 교각만 남은 임진강 경의선철교 독개다리에 설치한 스카이워크로, 고은이 직접 이름을 지었다. 이곳은 '분단 65년, 한반도 통일의 열망을 담아 고은이 명명하고 쓰다'라는 안내판과 '내일의 기적소리' 시와 지형도를 담은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사건 이후 조형물에선 고은의 이름을 스티커로 가렸으며 안내판은 철거했다. #



[1] 창비신서 121권 『고은 문학의 세계』(1993년 발행)에 실린 인터뷰에 의하면 1960년 무렵에 구상과 처음 왔고 그 다음(날짜 미상)에 불교계 관련 일로 한 번 더 방문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2] 고은 스스로도 1963년의 제주행이 세 번째임을 인정한 바 있다. [3] 백궁다방은 단성사 옆에 위치한 서울 시내 유명 다방 중 하나였다. 단성사, 피카디리극장, 세기극장(1979년 이후 서울극장)이 모여있던 곳이라 인기 있는 데이트 장소이기도 했다. [4] 동아일보의 가십성 기사 게재 코너로, 21세기에도 남아 있다. [5] 입주 당시 광교역처럼 광교 입주민들의 반발에 시달린 바 있다. [6] 이러한 주장에서 비롯된 각종 발언 자체가 작가와 작품을 따로 떼어내어 작품의 질을 막론하고 작가의 도덕성에 문제가 있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옹호자 쪽에서조차 그의 도덕성에서만큼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7] 진짜 술 퍼먹고 남자한테 키스한 문인도 있었다. 술집에서 술 마시고 나오다가 김지하를 보게 되자 밑도 끝도 없이 달려들어 끌어안고 입술이 부르틀 정도로 키스를 했다. 강제 키스 당하다 입술 깨물린 김지하는 이후 최인호를 슬슬 피해다녔다. [8] 고은의 절친으로, 천안함 피격 사건과 관련하여 음모론을 퍼뜨린 문단 권력자 백낙청이 지배하는 출판사. [9] 1월경 실시된 설문조사 결과도 고은 시인의 복귀를 반대하는 여론이 다수다. # [10] 평생 농사만 짓던 농부가 범죄를 저질러 5년간을 복역하고 나와서 다시 농사에 종사하는데 주위에서 평생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는 것은 범죄입니까? 정의입니까? / 그 범죄 농부가 수확한 벼(장물 아님)를 모 정미소에서 판매할 수 있게 쌀로 도정해주었는데, 그 정미소에 대해 범죄인을 도와준 사악한 정미소라며 판매중단을 압박하는 것은 범죄입니까? 정의입니까? 등. 정작 고은 시인의 성폭행에 대해서는 처벌받지 않았다. 이를 폭로한 피해자와 언론 기자에 대해 고은 시인이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했을 뿐이다. [11] 만인보에 3.1 운동 관련 인물들에 대한 내용도 있다는 것이 서울시청측의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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