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고영민의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2. 두산 베어스
2.1. 짧았지만 강렬했던 전성기
KBO 골든글러브 2루수 부문 수상자 (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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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최고 전성기 시절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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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멩이 고영민 Ver. 팬메이드 영상 |
2002년 성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차 1번으로 두산 베어스의 지명을 받았다. 고교 시절에도 수준급의 2루수로 주목받긴 했으나 2차 1번으로 지명받을 정도는 아니라는 평가여서, 고영민의 1년 후배이자 다음해 야수 최대어인 박경수 스카우트를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1] 하지만 고영민이 국가대표급으로 성장한 이후에는 그냥 그 순번에 뽑을 수 있는 선수를 뽑았다는 의견이 대세.
상위 순번 지명 선수임에도 주전 2루수였던 안경현의 벽에 막혀 입단 이후 4년 내내 2군 생활을 해야 했으며 1군에는 아주 가끔씩만 모습을 보였다. 1군 승격이 결정된 후 2군 마지막 경기에서 발목 부상을 당하는 등 어느 정도 불운이 겹치기도 했다. 4년째는 야구를 그만둘 생각을 했다고도 할 정도로 2군에서 설움을 많이 겪은 선수이며, 이 때문에 두산 팬들은 고영민을 2군 훈련장인 이천 베어스필드에서 키운 대표적인 선수로 생각한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 김경문 감독의 기대를 받으며 국대급 내야수로 성장했다. 달감독 특유의 SM 플레이의 본보기로 유명하다. 일반적인 감독-선수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밀고 당기기 스킬이 시전된다고 봐도 좋을 듯...[2] 결국 포텐이 터지기 시작한 고영민은 이종욱- 민병헌 과 함께 두산 육상부를 이끌며 두산 발야구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2007시즌에는 수준급의 수비력과 더불어 타격에서도 펀치력을 선보이며 두산의 중심타자인 3번타자로서 맹활약 하였고, 한국시리즈에서도 맹활약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7 시즌을 마치고 본인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2루수 부문 KBO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하며 국가대표 2루수로서의 최전성기를 알렸다.
베이징 올림픽과 2009 WBC 때 탄탄한 수비력을 높이 평가받아 정근우를 제치고 국가대표 주전 2루수로 활약했다. 위에도 언급했듯 대형삽질을 많이 저질러서 시청자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이익수라는 별명답게 넓은 수비범위가 가장 주목받고 있지만, 2루수로서 고영민의 최대 강점은 바로 글러브에서 공을 빼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고 손목힘이 강해 스냅만으로 강한 송구를 할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이로써 더블플레이시 굉장한 위력을 보여주며, 특히 1루를 등지고 송구를 받아 피벗하면서 1루에 송구하는 장면에서는 고영민의 장점을 유감없이 볼 수 있었다. 베이징 올림픽 결승전 마지막 더블플레이 장면에서 많은 야구팬들이 심장을 쓸어내렸지만[3] 정작 두산팬들은 그러려니 했다고...
이렇게 07~ 08 시즌 고영민은 계속해서 승승장구 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국가대표 2루수로서의 면모를 더욱더 확고히 하는가 했는데... 하지만 단일 시즌이나 그 시절 고영민의 당시 임팩트를 따라올 선수는 많지 않다는 평가다.
2.2. 200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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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시즌은 타율 0.235, 홈런 6, 타점 29, OPS 0.699 로 부진했다. WBC 후유증인듯.
부상 및 부진으로 인하여 2009년에는 1억 6,000만 원이던 연봉이 2010년에는 1억 3,500만 원으로 15.6% 삭감되었다. 두산 1, 2군 내야수를 통틀어 유일한 삭감 대상이었다...[4]
2.3. 201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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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고영민/선수 경력/2010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
2.4. 2011 시즌
시범경기에서는 똑딱거리며 3할대 타율을 기록했다. 타격폼을 수정하면서 지나치게 똑딱거리는 폼이 되어 장타력을 상실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팬들 사이에 있었다. 원래 타자 고영민의 장점은 타율 대비 높은 출루율+장타율이었지만 장타력이 감소하면 오재원과 비교해서 경쟁력이 없다는 지적이었던 것. 하지만 고영민은 원래 스윙보다는 손목힘을 이용해서 장타를 날리는 스타일이어서 장타력에 크게 지장은 받지 않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어쨌든 이번 시즌 최대 과제는 스윙시 하체를 단단하게 고정하는 것.하지만 11시즌이 끝난 결과... 결과적으로 엄청나게 부진하며 주전 2루수 자리를 오재원에게 빼앗기며 대수비 요원이 되었다. 시즌 초부터 발군의 도루능력을 인정 받아 그린 라이트를 받았는데...결과는 시망. 11시즌 전체를 말아먹는 부진은 도루능력에도 영향을 미쳤다. 도루 찬스마다 무위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이며 많은 두산팬들의 혈압에 버프를 걸어주었다.
4월 2일 개막전에서는 선발 2루수 겸 7번 타자로 나와 3번째 타석에서 4번째 득점의 시발점이 되는 3루타를 때려내었다. 기민한 수비와 재치넘치는 주루플레이는 여전. 그리고 짤방 생산력도 여전히 절륜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본격 분유 버프
4월 3일 LG와의 개막 2차전에서는 3회 2루 베이스로 빠져나가는 이대형의 타구를 귀신같이 따라가며 잡아냈으나 스텝이 꼬여[5]... 주자와 타자 모두를 살려주고 말았다. 평소 고영민의 수비실력을 감안하면 좀 아쉬우면서도 왠지 고영민답다...라고 보이는 장면. 타석에서는 1사 만루의 황금같은 기회를 잡았으나 귀신같은 병살타로 이닝을 종료시켰다. 상대 투수인
아무래도 지난 시즌 성적이 부진했다는 것에서 오는 압박감, 치고 올라오는 오재원, 그리고 팀을 나락으로 몰고간 임태훈과 감독의 자진 사퇴 등 많은 사건 사이에서 멘탈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 뭔가 하나가 잘 되는 일이 없이 타격, 수비, 주루 전반에 걸쳐 무너져내리고 있다. 타격은 허수아비급. 주루는 자동 아웃. 수비도 중요할 때 실책. 결국 오재원에게 주전을 빼앗겨 7월까지 선발 출장이 거의 없었다.
7월부터 선발로 차츰차츰 많이 나오더니 서서히 부진에서 탈출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듯 하다. 이렇게 선발기회를 부여받아 나아지더니 결국은 8월 13일 한화전에서 MVP가 되었다. 인터뷰에서 MVP로 뽑힌게 오랜만이라서 본인도 얼떨떨하다고 했다. 역시 두산 야구는 고영민이 잘해야 재밌다는 것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하지만 곧 다시 부진...
팬 입장에서는 열심히 하는 모습은 보이는 데다가 자신감이 결여된 듯한 모습으로 사소한 실수가 계속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하고 있지만 오재원의 상승세와 5위경쟁이 치열한 후반기 상황때문에 나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기도 하다
10월 6일 시즌 마지막 경기에 마지막 타석에서 느닷없이 안경을 착용하고 좌타석에 등장하여 팬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삼구삼진으로 아웃[6]당했지만 시즌 마지막까지 강렬한 임팩트를 남기며 퇴장하였다. 여담이지만 이때 팀 전체 사진에서도 눈에 바로 뜨이는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2.5. 2012 시즌
절치부심하고 신인 때부터 달았던 14번으로 바꿨다.확실히 그냥 간첩이었던 작년보단 페이스가 좋고 안정적이 된 것 같지만 고영민의 기대치가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오재원이 돌아올 때까지 확실한 모습을 보여줘야 할 듯. 하지만 복귀한 오재원이 1루를 꿰차며 경쟁에 휘둘리지 않고 2루를 꿰차는가 했는데,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잠시 2루 자리를 신인 최주환에게 넘겼으나...
최주환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고영민도 이전 시즌처럼 부진한 것은 아니지만 07, 08년도 만큼 미쳐 날뛰는 것도 아닌 그저 약간 변태같은 2루수일 뿐 군 제대 후 포텐이 터지고 있는 최주환을 상대하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인다. 적어도 09년만큼의 모습은 보여 줘야 할 듯 한데, 7월 24일 9회 간만의 대수비로 나와 뭔가 보여주고 싶었는지 병살 코스로 굴러온 평범한 2루 땅볼을 송구 에러(정확히는 유격수쪽으로 토스했는데 말도 안되는 곳으로 날아갔다)해버리면서[7] 한동안 더 덕아웃 지킴이로 활동할 듯. 그래도 경기 시작 전 최재훈이 두피 마사지를 해준다면서 수건을 머리에 씌운 채 머리채를 잡고 끌어올리는 등 짤방 지분은 사수했다.
4월 18일 삼성전에서 뜬금포를 쏴서 시즌 1호 홈런을 기록했다. 1점차 승리였기 때문에 이 홈런은 꽤 중요한 한 방이었으나 이날 최재훈이 대폭발을 하는 바람에 묻혀버렸다.
7월 3일 무등야구장에서 열린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3회 초 심판의 삼진아웃 판정에 항의하는 모습이 나와 논란이 되었다.
일단 현재는 최주환과 번갈아 주전을 맡고 있다.[8] 그래도 가끔씩 해 준다.
7월 31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대구 원정경기에서 좋은 수비와 나홀로 2타점을 올리며 팀의 2:1 역전승을 이끌었다.
2.6. 2013 시즌
허리 부상으로 1군에 늦게 합류했는데, 사사구에 따르면 척추분리증이 발병했다고 한다. 2루에는 허경민과 오재원이 자리를 잡은 상황. 외야로 전향하려는 것인지 중견수로 출장하기도 했다.이후 각종 부상으로 2군에 내려갔고, 회복에 전념하다 6월 말부터 2군 경기에 출장하기 시작. 4할 타율을 찍기도 하고 홈런도 두 개 쳤지만, 1군에 자리가 없다는 게 문제.
별다른 활약없이 2013년 시즌을 끝냈고, 겨울철을 앞두고 어째선지 소셜 커머스 사이트에서 출몰하기 시작했다. 고제트 핫팩이란 상표명인데, 일단 팔리기는 잘 팔리는 모양.
시즌 이후 동결된 7,500만 원에 연봉 계약을 체결했다. 팬들 사이에는 한 게 뭐있다고 동결이냐며 까는 글이 제법 있었다.
2.7. 2014 시즌
시즌 후 손시헌, 최준석이 FA로 빠지고, 작년 퓨처스리그에서 맹활약한 김동한이 군입대를 하면서 내야에 약간의 공간이 생겼고, 시범경기에서 홈런을 치는 등 활약하면서 최주환을 밀어내고 개막 엔트리에 들어가는데 성공했다.4월 6일 KIA 타이거즈와의 홈경기에서 2루수로 선발출장했다. 상대 선발 양현종을 노린 엔트리인듯.
이후 10일에 2루수 - 2번 타자로 선발 출장했다.
4월 16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도 2루수 겸 7번타자로 선발 출장했다. 이번엔 장원삼을 노린 엔트리. 멀티히트를 기록했다.
4월 30일 넥센과의 경기에서 2루수 선발 출장하였다. 그러나 타격에서 많이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4월 한 달 동안 타격도 좋지 않고 설렁설렁 플레이를 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시즌 극초반과는 달리 팬들에게 엄청 까였다. 해설진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는 평가를 내렸으며 심지어 이순철 해설위원은 아예 2군 가란 소리를 할 정도였다.
이후로는 오재원에게 완벽하게 밀리며 출장을 드문드문 하면서 그저 그런 성적을 냈고 결국 6월 27일자로 외야수 보강을 위해 박건우가 등록되면서 말소되었다.
8월 23일 말소된 이원석 대신 1군에 콜업 되었다.
2.8. 20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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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고영민/선수 경력/2015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
2.8.1. FA
2015년 시즌 후 FA를 신청하여 2016년 1월 13일 계약금 없이 1+1년에 연봉 1억 5천, 인센티브 2억, 총액 5억원에 두산과 계약했다. FA 시장은 마지막 미계약자였던 그의 계약으로 문을 닫게 되었다.2.9. 2016 시즌
시즌을 앞두고 오랫동안 고생했던 허리 통증이 재발해 퓨처스 출장 없이 전반기 내내 재활에 힘썼다고 한다. 7월 19일 퓨처스 경기에 처음으로 출장했다.8월 14일 잠실 넥센전을 앞두고 닉 에반스의 부상으로 인해 빠진 자리에 오랜만에 콜업됐다.
8월 20일 NC전에 7회말 대타로 나와 시즌 첫 안타(2루타)와 타점을 기록하였다.[9] 8월 21일 NC전에 9회말 대타로 나와 임창민에게 볼넷을 얻어 출루하였다.
9월 2일 KT전 9회말 최주환의 대주자로 투입되어 오재일의 적시타 때 결승 득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현역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11월 22일 전력 외로 분류되어 방출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 전반기를 통으로 날리고 복귀 후에도 출장 횟수가 위에 언급한 게 거의 전부였다고. 아무리 그래도 아직 한창 나이의 국가대표 2루수가 방출된다는 것에 대해 허리부상이 생각보다 심각한 것 아닌가 하는 추정만 할 뿐 대다수의 팬들은 납득하지 못하는 상황. 다른 구단의 러브콜을 기다렸으나 결국 은퇴 수순을 밟았다.
3. 국가대표 경력
3.1.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KBO 리그에서 2익수라 불리며 수비력을 인정받은 고영민은 2007 시즌 득점 1위, 도루 3위를 기록하며 공격력까지 만개했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됐다.당시 대회는 2008 베이징 올림픽 아시아 지역 예선을 겸한 대회였다. 한국은 일본, 대만, 필리핀과 경쟁해 우승을 차지해야만 올림픽 본선 직행 티켓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대만, 필리핀을 이기고도 일본에 3:4 1점차 석패하면서 대회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올림픽 본선 직행 실패와 상관없이 고영민으로서는 성공적인 국가대표 데뷔였다. 고영민은 대회기간 주전 2루수로 활약하며 편안한 수비를 선보였다. 또한 타격에서 역시 홈런을 두개나 때려내며 KBO 리그에서 선보였던 갭파워를 보여줬다. 이 홈런 중 하나는 무려 일본을 상대로 때려낸 것으로 가치가 매우 높았다.
3.2. 2008 베이징 올림픽 플레이오프
3.3. 2008 베이징 올림픽
2008 베이징 올림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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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표팀 개인별 성적 | |||||||||||||||
경기 | 타수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도루 | 삼진 | 4구 | 상세 |
8 | 24 | 5 | 0 | 0 | 1 | 5 | 6 | .208 | .269 | .333 | .602 | 1 | 9 | 1 |
실제로 본선 기간동안 고영민의 방망이는 매우 부진했다. 대표팀이 치른 9경기중 무려 8경기에 출전했지만 0.602의 OPS를 기록했다. 그나마 예선 풀리그 대만전 때려낸 귀중한 홈런포와 예선 쿠바전 2타점 동점타로 간신히 체면을 유지한 수준이었다. 참고로 고마워요 사토 장면 타구를 쳐낸 주인공이 고영민이다.[11]
하지만 2루 수비는 매우 견고했다. 2익수란 별명답게 매우 넓은 수비 범위를 자랑했고 볼처리도 안정적이었다. 대만전, 쿠바전, 네덜란드전에서 호수비를 보여줬으며, 대표팀이 금메달을 확정지은 대회 마지막 아웃카운트 역시 고영민의 송구에서 나왔다. 쿠바와의 결승전 9회, 유격수 박진만이 토스한 공을 받아 베이스를 밟은 후 런닝스로우로 1루수 이승엽에게 송구하여 병살타를 이끌어낸 것이다. 이와 같은 고영민의 수비력은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이 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함에 있어 큰 자산이었다.
3.4. 2009 WBC
2009 W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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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표팀 개인별 성적 | |||||||||||||||
경기 | 타수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도루 | 삼진 | 4구 | 상세 |
7 | 13 | 4 | 1 | 0 | 1 | 1 | 4 | .308 | .400 | .615 | 1.015 | 1 | 3 | 2 |
지난해 올림픽과는 달리 이번엔 주로 백업으로 출전했다. 가장 인상깊었던 경기는 역시 멕시코전. 홈런에 기습번트 안타까지 원맨쇼를 펼친 인생경기. 그러나 결승전 이범호의 극적인 9회말 2아웃 동점 적시타에 이어 타석에 들어섰지만 다르빗슈에게 삼진을 당하며 물러나면서 경기를 끝내지 못했고 결국 한국은 준우승을 차지했다.[12]
4. 수상 경력
4.1. K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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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민의 KBO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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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 골든글러브 (2루수 부문) / 득점 1위 / 동군 올스타(감독추천) |
2015 | 한국시리즈 우승 |
4.2.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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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민의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수상 경력 | |
2008 | 2008 베이징 올림픽 야구 종목 금메달 |
2009 |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준우승 |
5. 연도별 주요 성적
- 푸른 글씨는 KBO 최다,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글씨는 리그 5위 내 입상 성적.
고영민의 역대 KBO 기록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석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wRC+ | WAR* |
2002 | 두산 | 16 | 10 | 1 | 0 | 0 | 0 | 1 | 1 | 1 | 0 | 1 | .100 | .100 | .100 | .200 | -70.2 | -0.18 |
2003 | 32 | 13 | 3 | 0 | 0 | 0 | 0 | 2 | 1 | 0 | 3 | .231 | .231 | .231 | .462 | 11.9 | -0.05 | |
2004 | 1군 기록 없음 | |||||||||||||||||
2005 | 16 | 18 | 2 | 0 | 0 | 0 | 0 | 2 | 0 | 0 | 9 | .118 | .167 | .118 | .284 | -30.7 | -0.19 | |
2006 | 116 | 359 | 85 | 15 |
5 (3위) |
2 | 29 | 38 | 14 | 24 | 59 | .270 | .344 | .368 | .712 | 108.1 | 2.26 | |
2007 | 126 | 536 | 119 |
29 (4위) |
1 | 12 | 66 |
89 (1위) |
36 (3위) |
61 | 105 | .268 | .373 | .419 | .792 | 124.7 | 4.91 | |
2008 | 126 | 528 | 114 | 15 | 3 | 9 | 70 |
84 (3위) |
39 (4위) |
74 (2위) |
109 | .267 | .388 | .379 | .767 | 119.1 | 4.65 | |
2009 | 85 | 331 | 66 | 11 | 3 | 6 | 29 | 59 | 12 | 33 | 76 | .235 | .339 | .359 | .699 | 82.6 | 1.26 | |
2010 | 100 | 344 | 60 | 10 | 1 | 6 | 35 | 53 | 11 | 34 | 67 | .205 | .316 | .307 | .623 | 70.0 | 0.74 | |
2011 | 93 | 208 | 37 | 5 | 1 | 3 | 16 | 31 | 6 | 18 | 50 | .210 | .305 | .301 | .607 | 67.0 | 0.20 | |
2012 | 58 | 173 | 40 | 10 | 1 | 3 | 26 | 33 | 7 | 13 | 28 | .265 | .335 | .404 | .739 | 108.5 | 1.25 | |
2013 | 10 | 17 | 4 | 1 | 0 | 1 | 1 | 3 | 1 | 3 | 5 | .286 | .412 | .571 | .983 | 156.6 | 0.22 | |
2014 | 52 | 108 | 27 | 2 | 0 | 1 | 7 | 18 | 1 | 11 | 18 | .287 | .355 | .340 | .696 | 81.7 | 0.28 | |
2015 | 41 | 77 | 22 | 1 | 0 | 3 | 11 | 13 | 4 | 6 | 22 | .328 | .403 | .478 | .880 | 138.8 | 0.68 | |
2016 | 8 | 5 | 1 | 1 | 0 | 0 | 1 | 1 | 0 | 1 | 1 | .250 | .400 | .500 | .900 | 131.2 | 0.04 | |
KBO 통산 (14시즌) |
879 | 2727 | 581 | 100 | 15 | 46 | 292 | 427 | 133 | 278 | 553 | .252 | .351 | .368 | .719 | 95.2 | 16.06 |
[1]
이에 대해서는 '
박경수 나비효과'라는 이름으로 야구팬들의 농담거리가 되기도 했다. 박경수 나비효과란 것이 아주 농담만으로 치부되지는 않는다.
손시헌이 두산으로 진로를 결정한 것은 박경수가
LG 트윈스에 입단했기 때문에 두산 쪽이 경쟁하기가 쉽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손시헌은 나중에 현대에서 방출된 이종욱을 끌어왔다. 이 둘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
찬스에서 큰 스윙이 나오자 바로 교체 후 "영민이가 벤치에서 생각 좀 해보라고 뺐습니다." 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다음 날 고영민은 맹타로 경기 MVP로 선정된 후 인터뷰에서 "감독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훈훈한 연출을...리포터에게 강요당했다... 그러나 달감독은 평상시에는 끊임없이 고영민을 조여도 큰 경기 때면 여지없이 "키플레이어는 고영민..." 이라고 말하곤 했다.
[3]
당시 고영민에게 공을 토스했던
박진만은 "뒤에서 보니 공이 뽈뽈거리며 날아가는데 미치는 줄 알았다"고 했고
진갑용도 "어떻게 거기서 러닝 스로를 할 수 있냐"고 회고할 정도로 당시 뛰던 선수들마저도 철렁했다고 그만큼 빠른 송구가 가능하지만 공이 느리기에 복불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4]
이는 두산에 남아 있었더라면 삭감 대상이었을 정원석이나 이대수 같은 베테랑 내야수들이 방출, 혹은 트레이드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2009 시즌 두산 야수들은 대부분 성적이 괜찮았거나 꼬꼬마 신인급들이어서 연봉을 깎을 여지가 거의 없었다. 2010 시즌에 연봉이 깎인 '야수'는 역시 부상으로 부진했던
이종욱과 유혹의
이성열...을 합쳐 단 셋 뿐이다.
[5]
슬로비디오를 보면 고영민 본인은 자신이 직접 2루를 밟고 1루로 던지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미 2루 베이스는 손시헌이 커버. 토스하기엔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였기에 고영민은 머뭇거리다가 베이스를 지나치고 말았다. 뒤이어 5cm 모자라는 처절한 베이스 태그까지...
[6]
삼구삼진이긴 해도 1, 2구를 배트에 맞히기는 했다. 3구 떨어지는 변화구에 루킹삼진(...)
[7]
2루를 밟은
김재호보다 약 1미터 정도 앞쪽으로 날아갔다. 뭔가 보여주겠다 하는 욕심은 있었으나 오랜만의 출전이라 토스감이 떨어진 듯.
[8]
오재원은
최준석의 부상 및 부진 등으로 1루수에 고정.
[9]
이것이 그의 현역 마지막 안타와 타점이 되었다.
[10]
정근우는 2루수로 출전하지 않은 날에는 지명타자 혹은 3루수로 경기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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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스윙이 커서 모든 방송사들의 캐스터와 해설위원들이 매우 크게 반응했으나 생각보다 먹혀서 펜스앞에서 잡히는 평범한 타구였다. 오히려 많은 방송사들이 이승엽의 이전 홈런 타구에는 스윙이 간결해서 처음에 플라인줄 알고 시큰둥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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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때 경기를 끝내버렸어야 했다고 회상한다. 고영민 본인에게도 정말로 아쉬운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