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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시대에 사용된 갑옷과 투구를 총칭한 문서.2. 갑옷 양식
2.1. 몽골 침략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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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우용곡이 그린 고려전기 갑옷 출처 |
기록은 고려도경 등을 통해 추정만 가능하며, 유물의 경우, 주변 동아시아 국가들(유목민 왕조, 중원왕조)과 유사하다.
고려의 궁궐이었던 개성시 만월대 유적, 평안북도 동창군 학성리 병실터(11세기 추정), 익산 미륵사지 유적 등에서 출토된 찰갑 유물이 몇점 있다. 다만, 시기 구별은 잘 안되기는 하지만 7~20세기 찰갑들은 구조가 거의 동일한 경우가 많아 구분이 어려워 주변 유물들을 통해 비교해 봐야 알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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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동창군 학성리 병실터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
비록 같은 시대는 아니지만 투공 형태 자체만 놓고 보면 위 사진에 나오는 조선시대의 유성룡의 찰갑, 동래읍성 출토 찰갑, 창녕화왕산성 연지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찰갑과 비슷한 형태를 보여주는데 투공방식으로 보아 연결방식도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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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 유물은 평안북도 구성시(그 유명한 귀주성이 있다)에서 출토된 원주 투구 유물이 전해지나, 어느시기 유물인지 알 수 없다. |
2.1.1. 일본 측의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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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때의 모습을 일본 측에서 기록한 삽화인 몽고습래회사(蒙古襲来絵詞). 당시 몽골군과 고려군의 복식이 묘사되어있으며 목화를 신은 세 병사를 고려군으로 보고 있다. 역사스페셜에 의하면 이 사진에서 투구에 깃털이 북슬북슬하게 난 날개(?) 같은 게 달려 있는 게 고려군이라고 한다. |
고려군의 투구는 전형적인 송나라의 양식에서 영향을 받은, 양쪽 관자놀이 부분에 봉시식(투구 드림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이 달린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저 문제의 군인 3명을 두고 고려군이 아니라 남송의 원병 아닌가 하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1차 원정 당시 한족 군대는 주력이 아니었다는 점[2], 타국군과 함께 전투를 벌일 경우 몽골군은 타국 군대를 최전선에 앞세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고려군이 선두에 섰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개심사지 5층석탑에 새겨진 팔부중상과 몽고습래회사 속 고려군으로 추측되는 병사들의 모습이 유사하다는 점 등 고려군일 가능성을 높여주는 근거들이 꽤 있다.
단 몽고습래회사는 이걸 그린 화가가 직접 몽골군과 고려군을 본 적이 있는지가 불분명하며, 주로 고려군이라고 하는 군인 세 명이 그려져 있는 부분이 그림 속 다른 부분들보다 유독 선명하여 후세에 가필한 것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는 등 정확성에 의문이 많이 가는 유물이라 이걸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즉 몽고습래회사 역시 고려군 복식을 고증하는 데에 있어서 한계가 있지만 일단 고려군을 묘사한 회화가 너무 희귀한데다, 얼마나 정확하게 그렸는가와는 별개로 문제의 그 군인 3명이 한반도 왕조의 복식과 유사하거나 고려 관련 기록과 일치하는 묘사가 있어서[3][4] 현재로서는 고려군을 고증하는 데에 있어서 참고할 수밖에 없는 유물인 건 사실이다.
2.1.2. 고려시대 예술 속의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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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불경인 대방광불화엄경에는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오는데, 고려 갑옷보다는 오히려 송나라 갑옷에 가깝다.[5] | 개심사지 5층석탑에 남아있는 암각화. | 국조오례의를 바탕으로 그린 조선시대의 찰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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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는 송나라의 투구와 비슷한 봉시식이 달린 투구를 쓰는 경우가 많지만 여말선초부터는 송나라 양식이 더 이상 보이지 않으며, 조선시대에는 몽골의 투구인 몽고발주와
첨주형 투구가 주로 쓰인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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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는 호항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스카프같은 견건(肩巾)을 목에 둘러 앞에서 묶고 있는데, 조선시대엔 견건을 맨 기록이 없고 호항을 목에 두르고 있다. 호항을 착용하고 있으나 견건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것 아닌가 하는 의견도 많았는데, 동시대 주변국의 갑옷을 살펴보면 그러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시대에 함께 존속했던 주변국들의 갑옷을 살펴보면 호항을 따로 착용하기보다는 투구 드림의 형상 자체가 호항과 합쳐진 형상이 많은데, 한반도 왕조는 전통적으로 동시대의 중국계, 유목민족 국가들의 갑옷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을 감안하면[7] 고려 역시 드림 자체가 목을 보호하는 형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 고려시대에는 허리에 포두[8]를 두르고 그 위에 혁대를 두르거나 전대를 묶어서 고정한다. 반면 조선시대에는 포두를 착용한 사례가 거의 없다. 조선 역시 악학궤범에서 묘사한 황화갑 등의 의장용 갑옷에서는 포두를 두르며, 회화나 왕릉 무인석상에서는 포두를 착용한 모습이 많이 포착되기는 하지만 실전에서는 널리 쓰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9]
조선시대와는 달리 고려시대의 경우 포두가 예술작품 속 묘사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기록도 존재한다.
문종(文宗) 32년 -바로 원풍 원년이다- 6월 갑인에 송나라 사신 안도(安燾)와 진목(陳睦) 등이 와서 조서를 반포하고 물품을 하사하였는데, 그 물품은 다음과 같다. 국왕의 옷은 2벌로, 각각 금은엽장칠갑에 담았는데, 1벌당 자화라겹공복이 1벌, 천 색화라한삼 1벌, 홍화라수겹삼첨 1조, 홍화라수겹포두 1조, 홍화라수늑백 1조, 백면릉겹고 1벌이다. 화(靴)는 1켤레로, 홍라수겹보(紅羅繡夾複) 2개에 싸서 홍투배대(紅透背袋)에 담았다. 요대(腰帶)는 2개로, 각각 나수보 1개로 싸서 홍투배대에 담은 다음 금도은갑에 담았는데, 하나는 옥(玉)이 16알이고 누진백희해아두미가 모두 10사로 대모친금반홍정에 박았으며, 하나는 투서가 17알이고 두미가 10사로 대모친금반홍정에 박았다.
『해동역사』[10]
『해동역사』[10]
늑백 2개는 무릎까지 다리를 묶는다. 『상례비요(喪禮備要)』에 늑백 2개는 무릎에 이르기까지 다리를 묶는 것이라 했다. 당나라 시(詩)에서는 갈비대를 묶어 빛난다 하였다. 또 송나라 신종이 고려의 문종에게 의복을 사여했는데, 자화라수겹포두 1조, 홍화라수늑백 1조를 겹바지 위에 허리부분에 차례대로 매었다. 포두는 대개 겹으로 재봉하여 만들며 늑백 1조 역시 허리띠 위에 묶는다.
『최와문집』[11]
『최와문집』[11]
이 세 가지 정도의 차이점을 제외하면 조선시대 초중기의 찰갑 양식과 거의 판박이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고려시대의 포형 찰갑이 몽골 침략 이후 투구나 일부 장구류가 송나라식에서 몽골식으로 바뀐 것을 제외하면 디자인 면에서 큰 차이 없이 계속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2.1.3. 고려도경 속 묘사
투구와 갑옷[鎧甲]은 아래위가 붙어 있는데 그 제도는 봉액(逢掖)과 같아서 형상이 궤이(詭異)하다. 금화고모(金花高帽 금꽃으로 꾸민 높은 모자)는 거의 2자[尺](약 60cm)나 되고, 비단옷과 푸른 도포[錦衣靑袍]에 헐렁하게 맨 띠[帶]는 고(袴 바지)에까지 드리우니, 대개 그 나라 사람은 키가 작아서 특별히 높은 모자와 비단옷[錦衣]을 입어 그 모양을 장하게 한 것이다. 이제 그림을 그려서 각각 그 명색(名色)을 뒤에 나열한다.
서긍의
고려도경에 의하면 3만 명에 달하는 고려의 용호중맹군(龍虎中猛軍)(국왕 친위대)이 모두 갑옷을 착용했다고 하며, 이 갑옷은 위 아래가 붙어 있는, 봉액(逢掖) 형태이고, 어깨를 가려주는 부박(覆膊)이 없다고 했고, 또 다른 장군의 갑옷은 철찰(鐵札)을 검은 가죽으로 덮고 각각의 철찰을
명주실로 꿰매어 서로 붙어 있게 하며, 허리에는 오색 꽃무늬 띠를 드리웠다고 한다. 계급이 높아질수록 띠가 많아졌으며 가장 높은 계급은 띠가 10개가 넘었다고 한다.여기서 봉액(逢掖)은 겨드랑이가 만났다는 뜻인데, 이 한자가 봉액(縫掖)(겨드랑이를 꿰맸다는 뜻)이나 이 단어(縫腋)[12]를 잘못 쓴 것이라면 고려 시대의 포형 갑옷도 조선 시대의 갑옷과 마찬가지로 옆트임이 나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의 포형갑옷과 똑같은 방식으로 추정된다. 즉, 고려 시대의 갑옷 상의는 조선시대의 것과 거의 똑같은, 중앙에서 여미며 옆트임이 난 포형 갑옷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투구는 착장 시에 등 뒤로 걸쳤다는 묘사가 나온다. 갑옷의 등 부분이나 어깨에 고정하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현대 방탄모보다도 무게가 많이 나가는 투구를 목에 걸면 당연히 목이 졸린다. 그리고 머리에 두건을 쓴 차림이었다고 하는데 시대적 배경으로 보건대 문라건이나 '호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항목 참고.
이 구절 때문에 고려군이 투구를 쓰지 않고 싸웠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서긍은 전투 중인 고려군을 만난 것이 아니라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중앙군이 줄지어 사열한 모습을 본 것이다. 즉 현대 기준으로 보자면 의장대를 만난 것과 같기 때문에 서긍이 본 고려군이 투구를 쓰지 않았다고 해서 싸우러 나간 고려군이 투구를 쓰지 않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고려도경 원문
2.1.4. 기타
당연한 얘기지만 사극 같은 데선 고증을 아주 대놓고 무시한다. 애초에 삼국시대나 조선시대와는 달리 유물도 존재하지 않으니... 무장을 자체 마련했을 지방군이라면 삼국시대 종장판주를 쓰고 나와도 고증이 틀렸다고 할 수가 없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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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 대첩 일러스트 | 동선역 전투 일러스트 |
개차반 수준의 사극 고증과 오스프리의 치명적인 삽화 오류 때문인지 토탈워 센터에선 도대체 고려 갑옷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여기서도 위 산그림 작가의 그림이 가장 정확한 듯하다는 평, 송나라 갑옷과 상당히 흡사하단 평 등 어째 한국의 사극 작가들보다 더 정확하게 아는 것 같다.
최근 들어서는 산그림 작가 외에도 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중 역사, 한복 매니아들을 주축으로 고려시대 갑옷을 그림으로 재현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참고1
참고2
참고3
2.2. 몽골 침략 후
원나라의 침략 이후로 사회가 원나라의 문화를 급속하게 받아 들이면서 이를 따라 갑주도 비슷하게 변한다. 사실상 고려 후기의 갑주와 조선시대의 두정갑과 그 투구는 원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원나라찰갑은 7세기~20세기 내내 큰 변화가 없었다. 즉 삼국시대 말에 3~6세기 찰갑(동환식찰갑)에 비해 간소화 된 이후는 조선시대까지 큰 차이점이 없다. 이는 찰갑이라는 갑옷의 제작 기법상 어쩔 수 없는 문제로, 중국이나 유목민족들 역시 고중세의 찰갑과 근세의 찰갑을 비교해보면 재질이나 수결법 등이 달라지기는 하나 전체적인 구조의 큰 틀은 별 변화가 없다.
관련 유물로는 제주도 항파두리 유적에서 출토된 찰갑편이 있으나, 아직 정확한 보고서가 나오지 않아 정확한 구조를 알 수는 없다.
2.2.1. 갑옷 양식
고려 시대의 주된 갑주 양식은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찰갑과 경번갑 그리고 쇄자갑이다. 경번갑은 쇠사슬과 철판을 이어 만든 갑옷이며, 쇄자갑은 서양의 체인메일처럼 쇠사슬을 이어 만든 갑옷이다. 경번갑과 쇄자갑은 여말선초에는 확실히 유물이 출토되나 그 이전에는 사용 여부를 확실하게 알 수 없는데, 고구려의 기록에서도 쇄자갑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 초중기에도 최소한 쇄자갑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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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정지 장군의 경번갑 유물(左) 및 복원품(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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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눈물에서의 경번갑 | 드라마 정도전에서의 경번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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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의 쇄자갑 무장[14] |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고려시대의 갑옷과 투구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갑주가 보관되어 있다.[15] 단 신사 측에서 쓴 설명과는 달리 전시된 갑옷과 투구의 양식은 한반도보다는 차라리 원나라나 청나라의 그것과 비슷하다.
2.2.2. 투구
이 투구는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중기까지 널리 사용된 첨주형 투구이다. 드라마 용의 눈물과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영남과 기타 제장들이 쓰고 나온 투구가 바로 이 투구라고 할 수 있다. 첨주형 투구는 긴 철판 4개가 세로 방향으로 둥글게 배열되고 철띠와 쇠못으로 이를 고정하는 식으로 만들어진다. 이외에도 몽고습래회사나 당대 불화 빛 불탑 부조 등에서 보이는 모습을 보면, 초중기에는 봉시식이 달린 송나라식 투구도 썼을 가능성이 높다.
[1]
#
[2]
몽골의 1차 일본 침공 당시 남송 군대가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 군인들이 고려군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정설처럼 돌아다녔는데,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에서는 몽한군(몽골인+한족 군대) 25,000명과 고려군 8,000명이라고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몽한군 중 한족의 비중이 얼마나 큰지는 알 수 없으나 10만의 한족이 출병했던 2차 원정 때에 비하면 최소한 한족의 비중이 크지 않았다는 점은 확실하다.
[3]
서긍의 고려도경에서는 고려군의 갑옷을 두고 어깨갑옷이 없으며 상하의가 붙어있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몽고습래회사 판본 중에는 이 문제의 군인 3명이 정확히 이 묘사에 부합하는 형태의 찰갑을 입은 판본이 있다. 또한 이들이 입고 있는 옷 역시
두루마기 등 한복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이들이 입고 있는 옷에 두정갑의 두정과 유사한 땡땡이 무늬가 있어 저 옷이 두정갑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많았는데 그럴 가능성은 낮다. 애초에 두정갑은 겉이 천일 뿐이지 속에는 철편이 달려 있어서 몽고습래회사 속 묘사처럼 휘날릴 수가 없으며, 소매부터 끝단까지 두루마기와 저 정도로 똑같이 생긴 두정갑은 몽고습래회사 외의 회화나 기록에서 나타난 적이 없고 실제 유물도 발굴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4]
단 몽골 전통 복식 역시 한복과 같은 북방계 양식을 취하고 있기에 유사한 지점이 있고, 어깨갑옷이 없는 갑옷은 고려뿐만 아니라 활쏘기를 중시하는 국가에서는 심심찮게 사용했던 양식이라 이것만으로 고려군이라고 확정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좀 더 올라가는 정도.
[5]
불교 예술에 등장하는 갑주는 정말 그 시대의 갑주를 참고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당송풍의 양식적인 형태로 그리는 경우가 많아 이것만으로 고증을 하기에는 애로사항이 많다.
[6]
일본의 원구박물관에서는 '원구'의 투구라며 첨주형 투구를 전시하고 있는데, 만일 이것이 몽골군이 아니라 고려군이 쓰던 것이었다면 고려 역시 최소한 몽골 침입기 즈음부터는 첨주형 투구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7]
조선만 봐도 그러한 양상이 보인다. 조선은 전기에는 찰갑, 후기에는 두정갑 위주로 무장하는데 이 역시 동시대 중국 왕조나 여진족이 주로 입은 갑옷의 변화 양상과 일치한다.
[8]
중국풍 갑옷에서 흔히 허리띠 안쪽에 둥근 천을 덧대어 고정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을 포두(抱肚 혹은 袍肚. 전자는 당나라 후기에 포두가 처음 나타났을 때 명칭이고 후자는 송나라 대에 들어서 바뀐 명칭) 라고 한다. 과두(裹肚)라고도 하는데, 과두의 경우 허리 안쪽의 천뿐만 아니라 허리띠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포두는 허리에 찬 무기가 갑옷과 부딪히면서 소음을 내거나 파손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에서 입었는데, 송나라 대에 들어서는 실용적인 목적 못지않게 장식성이 강해진다.
[9]
정확히는 조선 전기에는 소수나마 착용한 사례가 있었으나 그 이후에는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왕릉 무인석상들은 정석적으로 포두를 착용하고 있는데, 중기만 가도 천으로 만들어진 포두에 갑옷 문양이 표현되는 등 포두의 실제 구조를 모른 채 기존의 석상을 참고하여 만든 티가 역력하기 때문이다.
[10]
조선 후기 실학자 한치윤이 쓴 역사책으로, 송나라 황제로부터 고려 국왕이 사여받은 복식을 언급하는 대목이다.
[11]
18세기 사람인 김규오가 쓴 시문집이다.
[12]
# 조선시대의 포형 갑옷이나 대창의처럼 옆트임이 겨드랑이 아래까지 길게 들어가고 소매가 넓은 옷을 의미하며, 일본어로는 호에키(縫腋)라고 부르며 일본에선 아직도 헤이안 시대의 관복을 의미한다.
#
[13]
단 이들은 정규군이 아니어서 무장이 부실했기 때문에 이렇게 그린 것이지 고려도경 속 기록을 보고 이렇게 그린 것은 아니다. 본 그림이 등장하는 책 고려전쟁 생중계 속 다른 일러스트들을 보면 정규군들은 전투 도중 칼같이 투구를 쓰고 있다.
[14]
출처는 책 '조선전쟁 생중계' 의 일러스트 중 하나.
일러스트 작가의 블로그를 참조해보는 것도 좋다.
[15]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