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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홍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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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진주 강씨
출생 1922년 1월 5일
황해도 해주군 운산면 오담리[1] 55번지
(現 황해남도 태탄군 지촌리)
사망 2000년 6월 25일[2] (향년 78세)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839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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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군인. 한국광복군에서 독립운동을 한 공적을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922년 1월 5일 황해도 해주군 운산면 오담리 55번지(現 황해남도 태탄군 지촌리)에서 태어났다. 백범 김구와 같은 고향 출신이다. 이후 신천군 신천읍 697번지로 이주해 본적을 옮겼다.

1943년 4월 10일 장호강의 주선으로 하남성에서 한국광복군 제1지대에 입대하여 본부 요원으로 활동했고, 전방 공작원 김석산(金石山)이 있던 호북성 광화현(光化縣) 노하구(老河口)[3]에 파견되어 전방 공작 및 초모·첩보 공작 등을 보조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1944년 3월 장철부, 이건국, 김중진(金重鎭)과 함께 당시 사천성 성도시(成都市)에 피난 와 있던 중화민국육군군관학교 본교(本校)에 20기로 입교했고, 이때 강홍모는 김중진과 함께 보병과를 전공으로 군사교육을 받았다.

8.15 광복 후 1947년 5월 16일 이건국과 함께 육군사관학교에 4기로 입교했고, 4개월간 교육을 받은 뒤 9월 10일 임관했다. 이후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現 파주시 문산읍) 문산리에서 육군헌병특별수사대장(육군 대위)으로 복무하던 중 백범 김구 암살 사건 당일이던 1949년 6월 26일 12시에 휘발유를 얻기 위해 경교장에 들러 김구 면담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1953년 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 제2보병사단 제32보병연대 연대장으로 고지 사수에 공을 세웠다. 1954년 4월에는 강원도 양구군에서 제7보병사단 예하 독수리부대장( 대령)으로 복무했고, 1955년 1월에는 미국 고등군사학교에 입교해 7개월간 교육을 수료한 뒤 7월 29일 귀국하기도 했다. 그러나 1956년 제5군관구사령부 참모장으로 복무 중 김창룡 암살사건 당일 당시 5군관부사령부 사령관이던 이성가 소장과 만남을 주선했다는 이유로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1957년 4월 17일 살인예비 혐의로 징역 2년형 및 파면, 급료 전액 몰수 등의 처분을 선고받았다.

5.16 군사정변 이후 1962년 3월 9일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 강문봉 중장, 이진용 전 대령, 도진희 전 국회의원 등과 함께 복권이 승인되었다. 이후 한미운수 사장을 거쳐 1972년 12월 영진상운(榮進商運) 대표이사 사장, 육군사관학교 4기생회 회장을 역임했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고, 이어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받았다. 2000년 6월 25일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2000년 6월 2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안장되었다.

3. 여담

  • 독립기갑연대 부연대장으로 근무했을 당시 2대대의 원 모 상사가 명령불이행으로 즉결처분을 받게되자 사형집행장에 뛰어들어 구출하였다. 당시 원 모 상사는 연대장의 명령을 대대 작전참모에게 전달했으나 작전참모는 장시간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 대대장에게 명령을 전달하지 못했다. 결국 원 모 상사가 책임을 지고 작전 명령불이행으로 처분을 받게되었다. #
  • 장경순의 증언에 따르면 김신과 초등학교 동창이고, 김구의 할아버지가 강홍모의 할아버지의 머슴을 지냈었다고 한다. 한번은 김구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강홍모의 할아버지의 소를 몰래 팔았는데 김구의 할아버지가 강홍모의 할아버지에게 소를 잃어버렸다고 하자, 강홍모의 할아버지가 소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리지 않는 조건으로 용서를 했다고 한다. 훗날 김구는 이 일을 기억하고 강홍모를 중국 중앙 군관학교에 추천을 해주었고, 육군 장교로 임관할 수 있었다고 한다.
  • 전 국회부의장인 장경순과 친분이 있었다. 김창룡 암살사건 당시 강홍모의 부인이 장경순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고, 강홍모 가족들의 생계에 도움을 주었다. 닉슨 독트린 당시 미군의 이삿짐 반출입 업체인 한미상운을 운영하던 강홍모에게 독립유공자로서 미군철수로 인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미군의 이삿짐 반출 횟수를 알려달라고 부탁하였고, 강홍모는 장경순에게 당시 7,000 여 명의 미군이 빠져나갔음을 알려주었다. 장경순은 야당 국회부의장인 윤제술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미 의회의 지도자들을 설득해 미군 철수를 막았다.

4. 참고자료

독립운동가 공훈록
독립운동사 6권, 국가보훈처
비화 제1공화국 제4화 암살 - 김구(2), 동아일보, 1973년 8월 6일 자.

[1] 인근의 서동리·관동리·백정리와 함께 진주 강씨 집성촌이다. 백범 김구도 이 마을 출신이다. [2] 2000년 6월 27일 부음 기사.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992년 6월 26일에 사망한 것으로 오기돼 있다. [3] 중화인민공화국 후베이성 샹양시 라오허커우시(老河口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