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4 08:53:21

가토 고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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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e5e5e5
내각관방장관 (1947~)
초대
하야시 조지
2대
니시오 스에히로
3대
도마베치 기조
4대
사토 에이사쿠
5대
마스다 가네시치
6대
마스다 가네시치
7대
오카자키 가쓰오
8대
호리 시게루
9대
오카타 다케도라
10-12대
후쿠나가 겐지
10-12대
후쿠나가 겐지
13-15대
네모토 류타로
16·17대
이시다 히로히데
18대
아이치 기이치
19대
아카기 무네노리
20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21·22대
오히라 마사요시
23-25대
구로가네 야스미
26대
스즈키 젠코
27·28대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29대
아이치 기이치
30·31대
후쿠나가 겐지
30·31대
후쿠나가 겐지
32대
기무라 도시오
33·34대
호리 시게루
35·38대
다케시타 노보루
36·37대
니카이도 스스무
35·38대
다케시타 노보루
39대
이데 이치타로
40대
소노다 스나오
41대
아베 신타로
42대
다나카 로쿠스케
43대
이토 마사요시
44대
미야자와 기이치
45·47·48대
고토다 마사하루
46대
후지나미 다카오
45·47·48대
고토다 마사하루
49대
오부치 게이조
50대
시오카와 마사주로
51대
야마시타 도쿠오
52대
모리야마 마유미
53대
사카모토 미소지
54대
가토 고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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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 요헤이
56대
다케무라 마사요시
57대
구마가이 히로시
58대
이가라시 고조
59대
노사카 코켄
60·61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60·61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62대
무라오카 가네조
63대
노나카 히로무
64·65대
아오키 미키오
66대
나카가와 히데나오
67-69대
후쿠다 야스오
70·71대
호소다 히로유키
70·71대
호소다 히로유키
72대
아베 신조
73대
시오자키 야스히사
74대
요사노 가오루
75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76대
가와무라 다케오
77대
히라노 히로후미
78대
센고쿠 요시토
79대
에다노 유키오
80대
후지무라 오사무
81-83대
스가 요시히데
84대
가토 가쓰노부
85·86대
마쓰노 히로카즈
85·86대
마쓰노 히로카즈
87대
하야시 요시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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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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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huugiin_logo.png 일본 중의원 ( 야마가타 4구)
선거구 개편 제41-42대
가토 고이치
선거구 폐지

파일:shuugiin_logo.png 일본 중의원 ( 야마가타 3구)
제41-42대
지카오카 리이치로
제43-45대
가토 고이치
제46대
아베 주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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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예비대본부장관·경찰예비대 상당·해상보안청장관 (1950년~1952년)
초대
마스하라 케이키치
2대
오오하시 타케오
3대
야나기사와 요네키치
방위청장관 (1952년~2007년)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1대
기무라 토쿠타로
2대
오무라 세이치
3대
스기하라 아라타
4대
스나다 시게마사
5대
후나다 나카
임시대리
이시바시 단잔
임시대리
기시 노부스케
6·7대
고타키 아키라
8대
츠시마 슈이치
9대
사토 키센
10대
이노 시게지로
11대
아카기 무네노리
12대
에사키 마스미
13대
니시무라 나오미
14대
후지에다 신스케
15대
시가 켄지로
16·17대
후쿠다 도쿠야스
18·19대
고이즈미 준야
20대
마츠노 라이조
21대
칸바야시야마 에이키치
22·23대
마스다 가와시치
24대
아리타 기이치
25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26대
마스하라 케이키치
27대
니시무라 나오미
28대
에사키 마스미
29·30대
마스하라 케이키치
31대
야마나카 사다노리
32대
우노 소스케
33대
사카타 미치타
34대
미하라 아사오
35대
가네마루 신
36대
야마시타 칸리
37대
구보타 엔지
38대
호소다 키치조
39대
오무라 쇼지
40대
이토 소이치로
41대
타니가와 가즈오
42·44대
쿠리하라 유코
43대
가토 고이치
45·62·63대
가와라 츠토무
46대
타자와 키치로
47대
야마사키 타쿠
48대
마츠모토 주로
49대
이시카와 요조
50대
이케다 유키히코
51대
미야시타 소헤이
52대
나카야마 도시오
53대
나카니시 케이스케
54대
아이치 가즈오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55대
칸다 아츠시
56대
타마자와 도쿠이치로
57대
에토 세이시로
58대
우스이 히데오
59대
규마 후미오
60대
누카가 후쿠시로
61대
노로타 호세이
45·62·63대
가와라 츠토무
64대
토라시마 가즈오
65대
사이토 도시쓰구
66대
나카타니 겐
67·68대
이시바 시게루
69·70대
오노 요시노리
71대
누카가 후쿠시로
72대
규마 후미오
방위대신 (2007년~)
초대
규마 후미오
2대
고이케 유리코
3대
고무라 마사히코
4대
이시바 시게루
5대
하야시 요시마사
6·24대
하마다 야스카즈
7·8대
기타자와 도시미
9대
이치카와 야스오
10대
다나카 나오키
11대
모리모토 사토시
12·17·18대
오노데라 이쓰노리
13대
에토 아키노리
14대
나카타니 겐
15대
이나다 도모미
16대
기시다 후미오
12·17·18대
오노데라 이쓰노리
19대
이와야 다케시
20대
고노 다로
21-23대
기시 노부오
6·24대
하마다 야스카즈
25대
키하라 미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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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기시 노부스케
2-3대
미키 다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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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시마 쇼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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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다 다케오
6대
카와시마 쇼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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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타니 슈지
8대
마에오 시게사부로
9-10대
미키 다케오
11대
다나카 가쿠에이
12대
후쿠다 다케오
13대
다나카 가쿠에이
14대
호리 시게루
15대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16대
니카이도 스스무
17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18대
우치다 쓰네오
19대
오히라 마사요시
20대
사이토 쿠니키치
21-22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23-24대
니카이도 스스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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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로쿠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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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마루 신
27대
타케시타 노보루
28대
아베 신타로
29대
하시모토 류타로
30대
오자와 이치로
31대
오부치 게이조
32대
와타누키 타미스케
33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34대
모리 요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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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즈카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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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고이치
37대
모리 요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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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나카 히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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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 마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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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사키 타쿠
41대
아베 신조
42대
타케베 쓰토무
43대
나카가와 히데나오
44대
아소 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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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키 분메이
46대
아소 다로
47대
호소다 히로유키
48대
오시마 다다모리
49대
이시하라 노부테루
50대
이시바 시게루
51대
다니가키 사다카즈
52-53대
니카이 도시히로
54대
아마리 아키라
55대
모테기 도시미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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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미즈타 미키오
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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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다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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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다 다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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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나 에쓰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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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다 다케오
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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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미키 다케오
1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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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다 미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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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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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미즈타 미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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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우치 요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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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토 토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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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즈카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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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하라 노부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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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가키 사다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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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 고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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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바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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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테기 도시미쓰
54대
아마리 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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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이치 사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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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다 도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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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테기 도시미쓰
5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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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대
시모무라 하쿠분
60대
다카이치 사나에
61대
하기우다 고이치
62대
도카이 기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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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43대 방위청장관
일본국 제54대 내각관방장관
가토 고이치
加藤紘一 | Kato Koichi
파일:가토 고이치.jpg
<colbgcolor=#3333cc> 출생 1939년 6월 17일
아이치현 나고야시 히가시구
사망 2016년 9월 9일 (향년 77세)
도쿄도
재임기간 제43대 방위청장관
1984년 11월 1일 ~ 1986년 7월 22일
제54대 내각관방장관
1991년 11월 5일 ~ 1992년 12월 12일
내각관방부장관 (정무담당)
1978년 12월 8일 ~ 1980년 7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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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333cc><colcolor=#ffffff> 가족 아버지 가토 세이조, 배우자 가토 아이코, 삼녀 가토 아유코[1]
학력 츠루오카 제3중학교[2]
고지마치 중학교 (졸업)
도쿄도립 히비야 고등학교 (졸업)
도쿄대학 (법학 / 학사)
최종 당적

소속 파벌 무파벌
지역구 야마가타 3구
의원 선수 13 (중)
의원 대수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경력 외무성 외교관
자유민주당 정조회장
중의원 테러대책특별위원장
일중우호협회장
자민당 동물 애호 관리 추진 의원 연맹 고문
방위청장관
자유민주당 국회대책수석부위원장
자민당·표류 표착물 대책 특별 위원회 위원장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대리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대행
자유민주당 간사장 대리
굉지회 최고고문
}}}}}}}}}
1. 개요2. 생애3. 정치 성향4. 소속 정당5. 선거 이력6. 여담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전직 정치인이다.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굉지회의 프린스로 불렸으며 야마사키 타쿠,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함께 YKK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방위청 장관, 내각관방장관, 자민당 정조회장·간사장·굉지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화려한 공직 경력과 개혁적인 행보로 한때 총리에 가장 가까운 남자로 손꼽혔지만 가토의 난과 비서의 탈세 의혹으로 거물급 정치인에서 지역 토호 정치인으로 완전히 몰락하여 끝내 총리직에 오르지 못한 채 정치 생활을 마감했다.

2. 생애

아이치현 나고야시 히가시구 시라카베에서 쓰루오카시 시장을 지낸 가토 세이조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야마가타로 이주해 유년시절을 쓰루오카시에서 보냈다.

아버지가 자유당 공천을 받아 25회 중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되자 가족 일가가 도쿄로 이주했다. 가토도 이때 치요다구에 위치한 고지마치 중학교로 전학했고 3년뒤인 1955년 도쿄도립 히비야 고등학교[3]에 입학했으며 1958년 졸업했다.

이후 도쿄대학 이과에 지원했으나 낙방했고 다음해 문과시험에 합격했다. 대학 재학 시절 당시 번성했던 안보투쟁에 참가했다. 대학 졸업 후 1963년 아사히 신문 입사 시험에 합격했으나 자신이 목표로 한 외교관 시험에선 떨어졌다. 그해 4월 도쿄대학 법학부에 내부 편입했고, 같은해 외무성 시험에 합격한뒤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이듬해인 1964년 외무성에 입성했다.

외교관 재직시 국립 국립타이완대학 하버드 대학교에서 유학했으며 1967년 홍콩 부영사로 있을 때 결혼했다. 1970년 일본에 돌아와 아시아국 중국과 차석사무관이 되었고 얼마 뒤 부친이 향년 6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71년 후원회의 추천을 받아 후계자로 낙점되어 중의원 출마를 선언했고, 이듬해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 구 야마가타 2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당선 이후 다나카 가쿠에이의 파벌인 목요회에 들어가길 희망했으나,[4] 다나카의 비서인 하야사카 시게조가 가토의 지역구인 야마가타 2구는 다나카의 파벌에 속하는 의원이 없어 가토를 영입하기에는 다나카도 부담스럽다며 대신 오히라 마사요시의 파벌인 굉지회에 들어갈 것을 권유했다. 마침 오히라는 가토의 아버지인 가토 세이조와 초선 동기이기도 했기에 굉지회에 들어갈수 있었다.

1978년 오히라 내각이 발족하며 내각관방부장관에 올랐다. 내각관방부장관 재임 시절인 1980년 나리타 국제공항 문제 해결과 관련하여 중핵파를 비롯한 반대파와의 협상에 나서기도 했지만 실패했다.

1984년 제2차 나카소네 내각 당시 방위청 장관으로서 처음 입각했으며 1985년 제3차 개조 내각 발족때도 유임, 1986년까지 재임했다.

이후 1991년 미야자와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으로 다시 입각했으며, 이 당시 일본 종군 위안부 문제를 두고 위안소 설치·위안부 모집 등에 일본 정부가 관여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가토 담화를 발표했다.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패배하여 창당 이래 처음으로 야당으로 추락한 자민당은 1994년 7월 자민당 & 일본사회당 & 신당 사키가케 연립정권 발족으로 10개월만에 여당에 복귀했고, 가토는 고노 요헤이 총재 아래 정조회장에 취임했다. 가토는 자사사 연립 정권의 지지자 중 한 명이었다.

1995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당시 가토는 같은 파벌이던 고노가 아닌 헤이세이 연구회 하시모토 류타로를 지지했고, 하시모토가 총재직에 오르자 간사장에 취임했다. 다음해인 1996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오자와 이치로가 이끄는 신진당과의 양당 대결을 승리로 이끌었고, 선거 직후 자민당은 과반수에 미달했지만 노나카 히로무 간사장 대리와 함께 신진당의 분열로 인해 탈당한 의원들의 영입전을 벌여 자민당이 단독으로 중의원 과반수 복귀를 이루어내는데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1998년에 치러진 제18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자 간사장직에 물러났고, 이후에도 당 내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면서 하시모토의 후임에 오부치 게이조를 지지했다. 그해 12월 미야자와 기이치 전 총리가 굉지회 회장에서 물러나자 그 후임으로 굉지회의 제6대 회장에 취임한다. [5]

1999년 자민당 총재선거 당시 총리인 오부치 게이조가 자자공 (자민당 - 자유당 - 공명당) 연립정권을 지지하자 이에 반발하여 근미래정치연구회의 회장인 야마사키 타쿠와 함께 출마했으나 패배했고, 오부치는 개각을 하면서 가토와 야마사키의 파벌을 일부러 소외시켜 당내 비주류로 전락시켰다.[6]

오부치의 뒤를 이어 총리에 취임한 모리 요시로가 각종 잡음으로 인한 낮은 지지율에도 정권을 이어나갈 뜻을 보이자, 가토는 본인의 정치생명을 걸고 야당이 제출한 내각불신임안에 찬성할 계획을 세웠고, 이것이 바로 일본 정치의 주류 파벌을 보수본류에서 보수방류로 크게 변화시킨 가토의 난이다.

가토의 난은 노나카 히로무와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반격으로 인해 처절한 실패로 끝났고, 굉지회는 호리우치 미쓰오 전 통상산업대신을 주축으로 하는 호리우치파, 고가 마코토 전 운수대신을 주축으로 한 고가파, 그리고 다니가키 사다카즈 국가공안위원장을 주축으로 하는 다니가키파[7] 로 분열되었다. 설상가상으로 2002년 3월 자신의 비서가 탈세혐의로 인해 체포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굉지회 회장 사임과 자민당을 탈당했고, 한달 뒤인 4월 중의원을 사퇴했다.

다음해인 2003년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시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국회에 복귀했다. 하지만 차기 총리 후보로 유력시 되었던 과거와 달리 본인의 실책으로 자신의 정치적 파벌을 완전히 상실해 야마가타현 일대의 토호 정치인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이후 자민당에 복당한 뒤 다시 굉지회로 돌아와 최고고문에 올랐으나, 2005년 9월 굉지회 최고고문직을 사임하고 굉지회도 탈퇴했다.

한때 자민당 내부에서 분열되어 있던 굉지회의 세 파벌(호리우치파, 고가파, 다니가키파)을 하나로 통합하는 대굉지회 구상이 부상하자 가토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파벌에 복귀하는 것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고 결국 자신이 파벌에서 탈퇴함과 동시에 정계은퇴 까지 무파벌을 유지하면서 대굉지회 구상은 떡밥으로 남게 되었다.[8]

2006년 8월 15일 17시 50분경, 야마가타현 쓰루오카시에 위치한 가토의 친가에 방화 사건이 일어났다. 그의 집에 불을 지른 방화범은 일본 우익단체의 회원으로, 가토가 "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비판적인 발언을 하고 있었던 것에 항의를 나타내고 싶었다"고 방화의 동기를 밝혔다.

이에 대해 자민당 초선의원 이나다 도모미는 이를 두고 정치 심포지엄에서 "선생의 집이 불탔다"고 경솔한 어조로 발언하여 큰 비판을 받았다. 한편 일본 공산당 사민당 의원들은 가토의 항의발언에 공감의사를 보였기 때문에 가토는 좌파 진영과의 연계를 의식하기 시작한다.

2008년 2월 자민당의 야마사키 타쿠, 민주당의 센고쿠 요시토, 에다노 유키오, 공명당의 히가시 준지, 사민당의 쓰지모토 기요미 등과 함께 초당파 스터디 그룹인 "라의 모임"을 창설했다.[9]

2008년 7월 일중우호협회장에 취임했다. 같은 달 닛폰BS방송에 출연하여 "납치 피해자는 북한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북한과의 외교 교섭이 정체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고이즈미 내각 당시 관방부장관이던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 관방장관의 안을 뒤엎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발언에 대해 납치 피해자 가족 등 관련 단체가 거세게 항의하자 가토는 일본이 약속을 어겨 북한이 일본을 불신하게 되었기에 교섭이 정체 상태에 되었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고 해명했다.

김정일을 "그 나라(북한)에서는 일종의 천황 폐하 같은 포지션의 인물이지요." 라고 말해 논란을 빚었다.

2009년 1월 야마가타현지사 선거가 열리자 현직 지사였던 사이토 히로시를 지지했지만, 사이토는 야권과 자민당 참의원 기시 고이치가 지지한 요시무라 미에코에 밀려 낙선했다. 그해 9월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민주당 돌풍에도 불구하고 당선되어 13선 의원이 되었다.

2010년 2월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의 비서가 정치자금규정법 위반으로 기소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하토야마는 과거 가토의 비서가 기소되었을 때 비서가 죄를 지었으면 의원도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었는데 하토야마가 총리직에서 사퇴하길 거부하자 가토는 "어째서 과거와 현재의 발언이 다른가. 총리가 됐다고 책임을 지지 않는건가"라고 비판했다.

2010년 8월 한일 병합 100주년을 계기로 식민지 지배를 입은 피해자와 그 후손들에게 충분한 배상을 촉구 할 것을 추구하는 "한-일 과거사의 해결과 미래를 향한 평화의원회의"를 창설했고, 한국 국회의원들과 함께 평화의원회의의 유일한 자민당 의원으로써 일본의 한국 병합에 대한 위법성, 위안부 합의 문제의 해결 방법 등에 대해 논의했다.

2012년 12월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가토는 자민당 중앙당과 야마가타현지부의 지지를 받았지만 같은 지역구의 참의원이었던 기시 고이치가 이에 반발, 사카타시 시장을 지낸 무소속 후보인 아베 주이치를 지지하여 조직이 분열되는 상황이 일어났다.

가토는 반 자민당 세력을 결집한 무소속 후보인 아베에게 패배했으며 73세 이상 후보자는 비례대표 출마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자민당 규정에 따라 비례대표 부활에도 실패하여 낙선했다. 당시 선거에서 가토는 자당의 압승 속에 자민당 후보로서는 유일하게 도호쿠 지역에서 낙선한 후보가 되었다.

가토는 중의원직에서 낙선한 뒤 일중우호협회 회장으로 일중 관계 개선을 위해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와 함께 중국측 우호 협회 회장과 회동을 가졌고, 2013년 4월 지역구를 셋째 딸인 아유코에게 넘겨준뒤 정계를 은퇴했다.

2014년 전 건설대신인 고가 마코토와 함께 임팔 전투에서 희생한 병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미얀마를 방문했다가 쓰러져 2년동안 요양 생활을 해야 했고, 2016년 폐렴으로 인해 병세가 악화되어 그해 9월 9일, 도쿄도 내 병원에서 향년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장례식에는 YKK의 일원이었던 야마사키 타쿠 전 자민당 부총재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모리 요시로 전 총리, 아오키 미키오 전 내각관방장관, 아베 신조 총리, 스가 요시히데 내각관방장관 등의 인사가 참여했고, 야당 인사로는 오자와 이치로 생활당 대표, 시이 가즈오 공산당 위원장, 간 나오토 전 총리 등이 참여했다.

3. 정치 성향

미키 다케오 전 총리와 더불어 자민당 내 대표적인 리버럴 ( 좌파) 인사였으며, 일본이 과거 한국과 중국에 대해 식민통치 시절 저지른 잘못을 사죄하고 헌법9조 개정에도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등 자민당 내부에서 일본 정치의 극우화를 비판한 몇 안되는 인사 중 하나였다.

가토는 2007년 1차 집권기를 보내던 아베 신조 총리가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한 일을 두고 "미국에 가서 할 것이 아니라 한국 국민에게 먼저 사과해야 한다"고 발언했으며, 고노 담화를 수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아베 총리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냈고 집단자위권 행사 용인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4.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72 - 2002 입당
정계 입문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02 - 2003 비서의 탈세 사건으로 인한 탈당


2003 - 2016 복당
정계 은퇴
사망

5.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72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 야마가타 2구

65,987 (21.15%) 당선 (2위) 초선
1976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7,496 (24.16%) 재선
1979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4,382 (23.10%) 당선 (1위) 3선
1980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8,806 (33.44%) 4선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3,170 (34.57%) 5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2,194 (33.30%) 6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3,717 (30.39%) 7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8,784 (44.29%) 8선[10]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야마가타 4구 112,033 (65.77%) 9선
2000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31,181 (72.14%) 10선[11]
2003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야마가타 3구

[[무소속(정치)|
무소속
]]
137,206 (58.92%) 11선
2005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59,486 (69.58%) 12선
2009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30,502 (56.86%) 13선
2012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0,303 (35.24%) 낙선 (2위)

6. 여담

  • 일본의 정치인들이 기자회견을 할때 일어서서 기자회견을 하는 일명 기립형 기자회견을 정례화 시킨 인물이다. 본래 일본 정치인들은 기자회견을 할때 앉아서 기자회견을 하는 착석형 기자회견 방식이 주류였으나, 가토가 관방장관 재직 중이던 1992년 10월 앉아서 회견을 하면 TV에서 잘 안보인다는 지지자의 지적을 받아 개선사항을 행동으로 옮긴것이 그 시초이다. 그가 기립형 기자회견을 실시한 이후, 다른 일본의 정치인들도 기립형 기자회견을 실시하게 되었다.

[1] 제2차 기시다 제2차 개조내각 어린이정책, 저출산대책, 남녀공동참획, 독자활로 담당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2] 재학 도중 전학. [3] 아베 노부유키, 마치무라 노부타카등의 거물 인사들을 배출한 일본 명문 고등학교 중 하나이다. [4] 처음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가토의 결혼식 당시 주례를 맡은 인연으로 본인의 파벌인 정책과학연구소에 들어올것을 권유했으나, 가토는 나카소네와는 잘 안 맞는다며 이를 거절했다. [5] 이때 가토가 굉지회 회장에 선출된것에 대해 반발한 고노 요헤이, 아소 다로 등은 굉지회를 이탈해 대용회 (현재의 지공회)를 결성한다. [6] 총재선거 출마를 앞두고 있던 오부치는 자신이 무투표로 당선되길 원했으나 가토와 야마사키가 갑자기 총재선 출마를 선언하자 격노했다. 평소 온후한 인품을 지니고 있던 오부치 였으나, "그 녀석은 나를 쫒아내려 했다"라고 말해 가토와 야마사키에 대한 분노와 견제의 뜻을 나타냈다. [7] 다니가키는 훗날 굉지회에서 독립한 뒤 자신의 파벌에 소속된 의원들을 이끌고 유린회를 결성했다. [8] 2023년 자민당에서 불거진 파벌 정치자금 문제로 인해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67년만의 굉지회 해체를 결정하면서, 대굉지회 구상은 끝내 실현되지 못하고 떡밥으로만 남게되었다. [9] 당초 이 그룹은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과 정계 재편을 향한 리버럴 세력 결집을 목적으로 하는 " 비빔밥의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발족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풍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이집트의 태양신인 에서 이름을 딴 라의 모임으로 개칭된다. [10]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 [11] 2002.3 자유민주당 탈당
2002.4.9 의원직 사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