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18:44:45

1960 AFC 아시안컵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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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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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7
사우디아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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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1
미정

[1] 본선 진출 16개국. [2] 본선 진출 24개국. [3] 2024년 개최.
같이 보기: 역대 AFC 아시안컵, 역대 UEFA 유로, 역대 코파 아메리카, 역대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역대 CONCACAF 골드컵, 역대 OFC 네이션스컵 }}}}}}}}}
1960 AFC 아시안컵 대한민국
AFC Asian Cup Korea 1960
1960년 AFC 아시안컵
대회기간 1960년 10월 14일 ~ 10월 23일
개최국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대한민국
본선 진출팀 4개팀
대회 결과
우승 대한민국
준우승 이스라엘
3위 대만
4위 남베트남
수상
득점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조윤옥
이전·이후 대회
1956년
영국령 홍콩
1960년
대한민국
1964년
이스라엘

1. 개요2. 지역예선
2.1. 서부지역 예선2.2. 중부지역 예선2.3. 동부지역 예선2.4. 본선 진출팀
3. 참가팀 정보4. 결승 리그
4.1. 1경기 대한민국 5 - 1 남베트남4.2. 2경기 대한민국 3 - 0 이스라엘4.3. 3경기 대만 2 - 0 남베트남4.4. 4경기 남베트남 1 - 5 이스라엘4.5. 5경기 대한민국 1 - 0 대만4.6. 6경기 이스라엘 1 - 0 대만
5. 결과6. 이야깃거리

[clearfix]

1. 개요

1960년 10월 14일부터 10월 23일까지 대한민국 제2공화국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개최된 제 2회 아시안컵이다.

1958년 아시안게임 축구 대회[1] 이후 2년만에 시작한 아시아 축구 대회로 대한민국이 처음으로 개최한 아시안컵이자 축구 관련으로 한국에서 개최한 첫 국제대회이기도 하다. 1956년 홍콩 아시안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대한민국이 개최국 겸 우승국 자격으로 자동으로 4개국(4강) 본선 아시안컵에 진출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 아시안컵 경기를 보도한 대한뉴스에는 제2공화국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의 모습이 담겨있다.

본 대회에서 우승을 한 이후, 태극전사들은 아시안컵에서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하는 징크스를 이어가고 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항목 말미에 기술. 덤으로 아시안컵으로선 개최국이 우승한 첫 번째 사례이기도 하다. 또한 최초의 대회 2연패가 첫 두 대회에서 바로 이루어진 셈이 되었다. 당시 공식명칭은 아시안 네이션스 컵 1960이었다.

2. 지역예선[2]

지난 1956년 대회와 마찬가지로 당시 아시아 국가들이 지역예선도 참가가 어려워서 기권한 아시아 국가들도 많았다. 기권팀 외 참가 거부팀은 취소선, 지역예선 첫 출전 국가는 진한 표시.
  • 서부지역: 인도[3], 이란, 이스라엘[4],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영국령 실론, 네팔
  • 중부지역: 말라야[5], 싱가포르, 남베트남[6], 버마,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태국
  • 동부지역: 홍콩, 필리핀, 대만[7], 일본

대한민국 아시안컵 우승 스토리

2.1. 서부지역 예선

아프가니스탄, 실론, 네팔이 기권하면서 4팀간의 풀리그로 진행이 되었다. 기간은 1959년 12월 5일~1959년 12월 18일, 개최장소는 인도 코치의 마하라자 대학 스타디움에서 치러졌다.[8]
경기 결과 원정
파일:팔라비 왕조 국기.svg 이란 3 - 0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이스라엘
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0 - 1 파일:파키스탄 국기.svg 파키스탄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이스라엘 3 - 1 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파일:팔라비 왕조 국기.svg 이란 4 - 1 파일:파키스탄 국기.svg 파키스탄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이스라엘 2 - 0 파일:파키스탄 국기.svg 파키스탄
파일:팔라비 왕조 국기.svg 이란 1 - 3 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이스라엘 1 - 1 파일:팔라비 왕조 국기.svg 이란
파일:파키스탄 국기.svg 파키스탄 0 - 1 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파일:파키스탄 국기.svg 파키스탄 4 - 1 파일:팔라비 왕조 국기.svg 이란
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1 - 2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이스라엘
파일:파키스탄 국기.svg 파키스탄 2 - 2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이스라엘
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1 - 2 파일:팔라비 왕조 국기.svg 이란
순위 국가 경기수 득점 실점 승점
1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이스라엘 6 3 2 1 10 8 8
2 파일:팔라비 왕조 국기.svg 이란 6 3 1 2 12 10 7
3 파일:파키스탄 국기.svg 파키스탄 6 2 1 3 8 10 5
4 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6 2 0 4 7 9 4

이스라엘은 첫경기에서 이란에게 3-0 패배를 당하며 불안한 출발을 했지만, 지난 대회 득점왕인 스텔마치가 건재했고, 새로운 스타 라피 레비가 두번째 시합인 인도전에서 헤트트릭을 기록하는등, 대회 총 5골을 기록하며 이스라엘의 본선 진출을 이끌었다.
이란은 시작은 좋았으나, 이후 파키스탄과 인도에게 연패를 당하면서 순식간에 최하위로 떨어진상황에서 이스라엘과 무승부를 기록하고, 파키스탄과 인도를 연이어 잡았음에도, 결국 떨어졌다. 이스라엘과의 2차전이라도 잡았으면 순위가 바뀌었을테지만, 2, 3경기 연패가 너무나도 뼈아팠다.
파키스탄의 경우 경기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아, 대회에서 8득점을 했음에도 누가 득점을 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예선 개최국 강호 인도는[9] 30,000명의 홈팬의 뜨거운 지원을 받았음에도 무려 4패를 당하며 4강 본선 아시안컵에 진출 실패했다.

2.2. 중부지역 예선

버마, 태국, 캄보디아는 기권했고, 인도네시아는 AFC 회원 분쟁으로 인해 참가가 거부되었다.
남은 세팀간의 풀리그로 진행되었고, 기간은 1959년 5월 9일~13일, 장소는 싱가포르 잘란 베사 스타디움에서 진행되었다.
경기 결과 원정
파일:싱가포르 국기.svg 싱가포르 1 - 4 파일:베트남 공화국 국기.svg 남베트남
파일:싱가포르 국기.svg 싱가포르 2 - 5 파일:말라야 연방 국기.svg 말라야
파일:베트남 공화국 국기.svg 남베트남 1 - 0 파일:말라야 연방 국기.svg 말라야
순위 국가 경기수 득점 실점 승점
1 파일:베트남 공화국 국기.svg 남베트남 2 2 0 0 5 1 4
2 파일:말라야 연방 국기.svg 말라야 2 1 0 1 5 3 2
3 파일:싱가포르 국기.svg 싱가포르 2 0 0 2 3 9 0

지난 대회 본선 진출국 남베트남이 첫경기부터 개최국을 4-1로 압살하였고, 개최국인 싱가포르는 2일뒤 말라야에게도 5-2로 대패를 하며 2패로 탈락. 4일을 쉰 베트남과 2일을 쉰 말라야의 대결은 전반 이른 시간에 터진 하 탐의 골로 마무리 되었다.

2.3. 동부지역 예선

일본이 기권하여, 3팀간의 풀리그로 진행되었다. 기간은 1959년 3월 29일~4월 3일, 장소는 필리핀 마닐라의 리살 기념 스타디움에서 개최되었다.
경기 결과 원정
파일:필리핀 국기.svg 필리핀 4 - 7 파일:대만 국기.svg 대만
파일:필리핀 국기.svg 필리핀 0 - 7 파일:영국령 홍콩 기.svg 홍콩
파일:대만 국기.svg 대만 7 - 4 파일:영국령 홍콩 기.svg 홍콩
순위 국가 경기수 득점 실점 승점
1 파일:대만 국기.svg 대만 2 2 0 0 14 8 4
2 파일:영국령 홍콩 기.svg 홍콩 2 1 0 1 11 7 2
3 파일:필리핀 국기.svg 필리핀 2 0 0 2 4 14 0

유달리 7과 연관이 있는 대회로, 3경기 모두 승자가 7득점을 했다. 필리핀은 무려 14실점을 하며 최하위로 쳐졌고, 사실상의 본선 진출국 결정전인, 대만과 홍콩의 대결이 22,000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열렸다.[10] 여기서 대만은 홍콩을 제치며 아시안컵에 첫 진출을 하게 되었다.

2.4. 본선[4강] 진출팀

국가명 진출 자격 진출 자격 획득일 진출횟수 최근 진출 최고성적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대한민국 개최국 - 2회 1956 우승
[KOR]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이스라엘 서부지역 예선 승자 1959년 12월 17일 2회 1956 준우승
[ISR]
파일:베트남 공화국 국기.svg 베트남 공화국 중부지역 예선 승자 1959년 5월 13일 2회 1956 4위
[SVM]
파일:대만 국기.svg 대만[15] 동부지역 예선 승자 1959년 4월 3일 1회 첫 진출

3. 참가팀 정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1960 AFC 아시안컵 대한민국/참가팀 정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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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승 리그[4강]

결승리그 4강은 지난 대회와 동일하게 풀리그로 치러졌다.
대한뉴스 제 285호

4.1. 1경기 대한민국 5 - 1 남베트남

1960년 10월 14일 15:15분
개최국이자 디펜딩 챔피언인 대한민국은 시작부터 조윤옥의 골로 앞서나갔고, 우상권, 최정민, 문정식이 연이어 골을 넣으며 4-0으로 크게 앞서 나갔다. 응옌 반 투의 만회골이 터졌지만, 1분뒤에 첫골의 주인공 조윤옥이 또다시 골을 터뜨리며, 지난 대회처럼 5골로 남베트남을 폭격하며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4.2. 2경기 대한민국 3 - 0 이스라엘

1960년 10월 17일 15:00
지난 대회 우승팀과 준우승팀의 대결로 사실상의 결승전이 된 경기로 후술된 여담을 보면 알겠지만 인명피해도 발생했으며 관중이 미어터져 터치라인까지 넘어와 일본인 주심이 이대로면 경기 진행 못한다고 할 정도였다. 경기 양상은 원정팀 이스라엘이 이러한 관중들의 기에 눌려 위축된 플레이로 일관하며 의외로 싱겁게 첫 경기 두 골의 주인공 조윤옥이 두 골, 우상권의 한 골을 묶어 가볍게 압살하면서 한국은 사실상 우승을 거의 확정지었다. 경기 종료 후 이스라엘 감독은 한국 팀에 진게 아니라 위압적인 관중들 때문에 졌다는 소감을 남겼다.

4.3. 3경기 대만 2 - 0 남베트남

10월 16일 15:00
경기결과는 대만의 2-0 승리. 아침부터 비가 내렸기 때문에 그라운드 사정이 좋지 않았고, 그로 인해 전반전에는 양팀 무득점이었으나 후반에 2골을 넣어 승리했다고 한다.

베트남은 경기 전날 주전 4명이 추가로 도착하여 경기에 임하였으나 2패로 우승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4.4. 4경기 남베트남 1 - 5 이스라엘

1960년 10월 19일
경기 시작시간이 알려져있지 않다. 예선에서 5골을 넣었던 레비가 이경기에서도 골을 터뜨렸고, 지난 대회 득점왕 스텔마치도 한골 추가하며 남베트남을 5-1로 이겼다. 베트남의 쩐 반 누엉의 골이 이대회 유일의 PK득점이었다.

4.5. 5경기 대한민국 1 - 0 대만

1960년 10월 21일 15:00
1위 대한민국과 역시 1승으로 여기서 승점을 더 쌓아 1위를 노리는 대만의 대결. 두 팀은 지난 대회 예선에서 맞붙어서 본선 진출을 겨뤘고 대만은 우승도 우승이지만 지난 대회의 복수도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2년전 도쿄 아시안게임 결승에서 패해 대만에 2대회 연속 금메달을 내주고 이번 대회 개최 반년전인 1960년 4월에는 로마 올림픽 예선 대만 원정에서 PK 선언에 대한 한국측의 과도한 항의와 대거 난입한 관중을 이유로 몰수패가 선언돼 올림픽 출전 티켓을 헌납하는 등 여러모로 양국이 서로 쌓인게 많은 상황이었다.(현 대만축구를 보면 상상하기 힘들지만 이 당시는 인도와 함께 한국축구의 주요 라이벌이었다.) 경기 양상은 대만이 기술적으로 우위에 있었고 한국이 투지로 맞섰다는 당시 실제로 관전한 기자가 내린 평대로 시종일관 시소게임이 펼쳐졌지만 후반 9분에 터진 문정식의 골을 잘 지켜내며 대한민국이 3전 전승 우승을 확정지었다.

4.6. 6경기 이스라엘 1 - 0 대만

1960년 10월 23일
경기 시작시간이 알려져 있지 않다. 준우승팀 결정전으로, 경기 일정상으로는 2일뒤에 바로 경기를 해야하는 대만이 4일을 쉰 이스라엘에 비해 압도적으로 불리 했다. 역시 경기는 팽팽하게 진행되었고, 슐로모 레비의 후반에 터진 골로 이스라엘이 두 번째 준우승을 거두게 된다.
순위 국가 경기수 득점 실점 승점
1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3 3 0 0 9 1 6
2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이스라엘 3 2 0 1 6 4 4
3 파일:대만 국기.svg 대만 3 1 0 2 2 2 2
4 파일:베트남 공화국 국기.svg 남베트남 3 0 0 3 2 12 0
1960 AFC 아시안컵 우승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2번째 우승

대한민국이 무패 전승으로 대회 2연속 우승을 차지하였다.

5. 결과

순위 국가 경기 득실 승점 비고
<rowcolor=#373a3c> 1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3 3 0 0 9 1 +8 6 우승
<rowcolor=#373a3c> 2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이스라엘 3 2 0 1 6 4 +2 4 준우승
<rowcolor=#373a3c> 3 파일:대만 국기.svg 대만 3 1 0 2 2 2 0 2 3위
<rowcolor=#373a3c> 4 파일:베트남 공화국 국기.svg 남베트남 3 0 0 3 2 12 -10 0 4위
  • 득점왕 : 조윤옥(1940~2002)(대한민국) 4골

6. 이야깃거리

  • 1회 아시안컵 우승, 1회 아시아청소년선수권 우승 등으로 축구 열기가 뜨거웠던데다 안방에서 대회가 개최되다 보니 관중 흥행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16,000석 규모로 지어진 효창운동장에 무려 10만 이상의 인파가 몰려들었고, 주최측은 입석을 감안해 3만 장의 표를 팔았으나 이미 이런저런 초대권이 뿌려진 상태였고, 축구관계자, 월담자(?) 등 해서 실제 입장인원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자리를 잡지 못한 관중들이 경기장 아래 트랙에까지 빼곡히 들어찬 바람에 선수들은 하프타임에도 라커룸에 들어가지 못하고 피치 위에서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한국과 이스라엘의 경기날에는 경기장 담장 일부가 무너지면서 27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공식기록은 입석 판매로 3만명으로 기록되었다.
  • 4강 본선 아시안컵 진출팀이 지난 대회에서 홍콩이 빠지고 대만으로 바뀐 구성이다. 물론 순위도 동일하게 결정되었다.
  • 지역예선 개최국들인 인도, 필리핀, 싱가포르는 모두 최하위로 본선진출에 실패했다.
  •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 스쿼드는 항목참조. 함흥철, 박상훈, 김홍복, 차태성, 손명섭, 우상권 선수가 지난대회에 이어 2회째 참가하였다.

6.1. 아시안컵 저주?

2027 AFC 아시안컵 사우디아라비아 시점 기준으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이 대회가 마지막 우승이다.[17][18][19] 이러한 아시안컵 잔혹사는 아시아의 맹주라는 칭호를 갖고 있는 대한민국과 영 어울리지 않기에 이상하리만큼 부진한 성적을 설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설들이 있었다. 물론 유난히 아시안컵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못해 생긴 뇌피셜을 기반해 억지로 만들어낸 이야기들이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자.
  • 백범의 저주 : 효창운동장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대회는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하여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여러 애국지사들의 묘역이 있는 효창공원 경내에 건설된 효창운동장에서 개최되었고, 이미 효창운동장 건설 당시에도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20] 이에 순국선열의 혼들이 노하여서(?) 우승을 못 하고 있다는 것. 그럼 당해에 열린 2회 대회부터 우승을 못했어야 하는거 아닌가?
  • 납메달의 저주 : 대회 우승 후 받은 금메달이 사실 납에다 금칠만 한 겹 덮은 납메달이었던 것. 대회를 주관한 AFC 또는 대한축구협회의 누군가가 빼돌린 것으로 추측된다. 대한민국 선수들은 시상식 며칠 후에야 이를 깨닫고 대한축구협회에 제대로 금메달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유야무야 시간만 흘러간 게 50년이 넘었던 것. 그 사이에 당시 우승멤버 중 대다수가 세상을 떠났고 한을 품은 원혼들이 저주를 걸었다는 설. 관련기사#1 #2 이 기사가 나온 것이 2004년인데 10년이 더 지난 2015년까지도 진짜 금메달 수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두 번째 링크에서 기자와 인터뷰를 했던 문정식, 손명섭 두 분도 그 사이에 작고했다. 2019년 1월 4일, 대한축구협회가 이 때 당시의 메달을 진짜 금메달로 만들어 우승멤버 및 가족들에게 전달하는 행사를 갖기로 했다. 당시 우승멤버였던 김홍복 선수의 딸이자, 1984 LA 올림픽 여자농구 은메달리스트인 김화순 씨가 참여한다고 한다. 계획 수립 당시 우승멤버는 김선휘, 이은성 두 분만 살아있었다. #
  • 이스라엘의 저주 - 저번 대회와 이 대회 모두 이스라엘을 준우승시키고 우승한 데에서 착안한 것이다.

[1] 1위 대만(금메달) 5승 0무 0패 11득 4실
2위 대한민국(은메달) 4승 0무 1패 15득 6실
3위 인도네시아(동메달) 4승 0무 1패 15득 7실
4위 인도 2승 0무 3패 11득 13실

5위 이스라엘(8강) 2승 0무 1패 6득 3실
6위 홍콩(8강) 2승 0무 1패 8득 6실
7위 남베트남(8강) 1승 1무 1패 8득 5실
8위 필리핀(8강) 1승 0무 2패 4득 9실
9위 파키스탄(14강 조별리그) 0승 1무 1패 2득 4실
10위 싱가포르(14강 조별리그) 0승 0무 2패 2득 4실
11위 버마(14강 조별리그) 0승 0무 2패 4득 7실
12위 일본(14강 조별리그) 0승 0무 2패 0득 3실
13위 말라야(14강 조별리그) 0승 0무 2패 2득 8실
14위 이란(14강 조별리그) 0승 0무 2패 0득 9실

이 대회는 14강 조별리그 다음 8강 토너먼트로 진행되었다.
아시안게임 축구 대회는 1998년까지 A매치 대회였다.
[2] 당시 지역예선에서 본선 아시안컵에 들어 갈 수 있는 자리는 단 4자리(4강) 아시안컵으로 현재 24자리 아시안컵 보다 아시안컵에 들어가기가 더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며, 현재처럼 인터넷도 없이 상대팀과 전력을 분석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지금과 비교하면 프로축구리그가 없던 국가들도 있었다.(유로도 첫 대회인 1960년 부터 1976년 대회까지 유로에 들어 갈 수 있는 자리가 단 4자리(4강) 유로 대회로 현재 24자리 유로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3] 1951년과 1962년 아시안게임 축구 두 대회 금메달(우승)팀이었으며, 아시안게임 축구는 1998년까지 A매치 대회였다. [4] 이 시절 이스라엘은 1956~60아시안컵 준우승, 1958 아시안게임 축구 대회 6위(8강), 1964아시안컵 우승하며, 자국 클럽팀으로 아챔 우승 3회, 준우승 1회 1970월드컵 12위를 기록한 강팀이었다. [5] 그 후 말라야는 1962 아시안게임 축구 대회 동메달전(3,4위전)에서 남베트남을 이기고 동메달(3위)를 기록한다. 아시안게임 축구는 1998년까지 A매치 대회였다. [6] 이 시절 남베트남은 2년전 1954 아시안게임 축구 대회 7위, 1956 호주 맬버른 올림픽 지역예선까지 통과하였고, 1958 아시안게임 축구 대회 7위, 1959 메르데카컵에서 대한민국을 3:2로 이겼고, 1962 아시안게임 축구 대회 4위를 기록할 정도로 강호였다. 아시안게임 축구는 1998년까지 A매치 대회였다. [7] 1954년과 1958년 아시안게임 축구 두 대회 연속 금메달(우승)팀이었으며, 아시안게임 축구는 1998년까지 A매치 대회였다. [8] 참고로 마하라자 대학 스타디움의 규모는 3만명. 본선 개최지인 대한민국의 효창운동장의 두 배의 규모다. [9] 1951년과 1962년 아시안게임 축구 두 대회 금메달(우승)팀이었으며, 아시안게임 축구는 1998년까지 A매치 대회였다. [10] 참고로, 홈팀인 필리핀의 경기는 각각 10,000명, 12,000명으로 3경기에 비해 관중수가 오히려 적다. [4강] [KOR] 1956 [ISR] 1956 [SVM] 1956 [15] 1954년과 1958년 아시안게임 축구 두 대회 연속 금메달(우승)팀이었으며, 아시안게임 축구는 1998년까지 A매치 대회였다. [4강] [17] 다만 A매치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단독 우승을 차지한 바가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메이저 대회 우승은 이 대회가 마지막이 아니다.(아시안게임은 1998년까지 A매치 대회였다.) 또한 공식 우승이 아닌 기록까지 포함하면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1위로 진출(2위 진출은 UAE)하는 등(1990 ~ 94 월드컵 아시아 예선은 전 지역 합동리그 예선이었고 2위 팀까지 월드컵 24개국 본선에 아시아 2개팀만이 진출이 가능했다.(아시아 2장 시절)) 아시아에서 1위를 기록한 바 있다. [18] 여담으로 대한민국의 자국 리그인 K리그의 경우 아시아 최상위 클럽대항전인 ACLE에서 최다 우승과 최다 결승 진출을 기록하며 트로피와 거의 인연이 없는 A대표팀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19] 또한 이 당시 우승멤버 18명 중 현재 생존해있는 사람은 이은성과 김선휘 2명이다. 2019년 기준으로는 박경화 역시 생존해 있었지만 2023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20] 건설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김두한이 격렬하게 반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