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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팔레스타인 대반란

1936년 팔레스타인 대반란
ثورة فلسطين 1936
1936–1939 Arab revolt in Palestine
날짜
1936년 4월 19일 ~ 1939년 8월 26일
장소
파일:영국 국기.svg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전역
원인
아랍인 민족국가의 독립운동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자치권 보장
유대인 재정착 반대
유대인 민족국가의 건국 반대
대치 세력

[[영국|]][[틀:국기|]][[틀:국기|]] 정부
파일:169px-British_Army_Logo.png 영국 육군
팔레스타인 경찰
유대인 정착지 경찰
유대인 예비 경찰
야간 특수부대
유대인 국가 평의회
유대인 정착민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국가방위당
하가나
아랍 고등 위원회
팔레스타인 지하드
팔레스타인 방위 협회
불명 불명
규모
25,000-50,000명 시위대 (1936년-1937년) 1,000-3,000명
경찰 20,000명 시위대 (1937년 이후) 2,500-7,500명
6,000명-15,000명의 지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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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 피해
군경 최소 262명 사망 아랍인 5,000명 사망
15,000명 부상
108명 처형
12,622명 체포
5명 추방
유대인 500명 사망
4명 처형
재산 피해
미상 미상
결과
시위 목표 달성 실패
영향
1939년 백서
1. 개요2. 배경3. 경과4. 결과5.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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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6년부터 1939년까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서 벌여졌던 대규모 반란이다.

2. 배경

시온주의가 확산되면서 영국 정부가 노골적으로 유대인 공동체들의 민족국가 건국운동에 가담하면서 원래 이 지역 정착민들인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아랍 전통과 자신들의 문화 보존을 위한 요구가 솟구쳤고, 영국의 식민 통치에 대한 반발도 켜져갔다. 1930년대 영국령 팔레스타인에서는 팔레스타인 독립당이 새로 조직되면서 대영제국에 맞서 인도식 보이콧 등을 주도했다. 청년단체들은 반시오니즘, 범아랍주의를 외치면서 총파업을 주도했고, 여성단체 또한 정치적으로 가담하면서 지방 도시들의 연대를 불러일으켰다.

이슈브( 영국령 팔레스타인 유대교도 자치정부)는 하가나( 민방위군이자 정착촌경찰)와 이르군(지하무장운동) 및 자치의회와 민정관청을 창설했다. 1935년 10월 16일 무기들이 시멘트 운반통에 숨겨져서 하가나로 배송되었고,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유대인 공동체들이 영국령 팔레스타인을 무력으로 접수할 것이라는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경제적인 상황도 큰 영향을 주었는데, 세계 1차 대전 이후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지역경제는 극심한 빈곤상태에 쳐해있었으며, 오스만 제국에 이어 영국 정부도 농업 축산업 임업 수산업에 대하여 해마다 높은 세율로 세금을 거두는 정책을 유지했고 이와 동시에 국제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가격의 하락이 동반됐다. 더불어 1920년대 후반 세계대공황이 겹치면서 원자재들의 가격이 크게 하락하면서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다. 자연 재해와 수확률 하락은 시민들의 고통을 더해줬고, 부채는 크게 증가했다. 곧이어 유대인 공동체들은 유대 민족 기금을 창립하여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부동산을 매우 비싼 값에 마구잡이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도시에서 거주하던 팔레스타인들은 두메산골로 밀려나면서 더욱 가난해졌다.

3. 경과

당대에 서아시아 식민지에서는 총파업을 통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1931년 7월, 메소포타미아 위임통치령에서 총파업을 통해 대영제국으로부터 이라크 왕국으로 독립했고 국제연맹도 가입했다. 1936년 1월 20일부터 3월 6일까지 시리아-레바논에서 일어난 총파업으로 인해 프랑스 제3공화국과 독립 협상 절차에 들어갔다. 이에 아랍 국가 위원회가 설립된 도시인 나블루스에서 1936년 4월 19일 총파업을 시작했다. 또한, 세금 납부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농촌에서는 간헐적으로 폭동이 일어났다. 모술-하이파 송유관을 타격하거나 철도망을 파괴하는 식으로 다양한 사회간접자본을 공격했다. 유대인 정착촌들도 공격을 당해 유대인들은 안전한 곳으로 이주했다. 트란스요르단 시리아에서 모집한 민병대이 팔레스타인 군단을 조직적으로 개편하는데 도음을 줬다.

1936년 10월 11일 윌리엄 필에 의해서 분쟁 해결을 위해 필 위원회가 설립되기 시작하면서 총파업과 폭동이 막을 내렸다. 필 위원회는 당시 유대인 정착촌과 수확률이 높은 경작지를 유대인들에게 비교적 적은 땅을 넘겨주고 팔레스타인을 분할 및 트란스요르단과 합병하는 계획을 추천했고,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은 모두 이에 반대를 했다. 영국 정부는 필 위원회의 보고서에 찬성을 했으나, 아랍인들의 완고한 저항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판단하에 승인을 하지는 않았고, 우드헤드 위원회에게 사건 해결 방안을 제시하도록 했다. 우드헤드 위원회는 필 위원회의 보고서를 기반으로 갈릴리 지방을 영국에 넘겨주는 방안 등 3가지 해결책을 제시했으나, 정부는 정치적, 행정적, 경제적 위기를 유발할 수 있다고 봐 승인하지 않았다.

결국, 1937년 9월 26일, 갈릴리 지방 위원 대행인 루이스 앤드류스가 나사렛에서 암살을 당한 사건을 기점으로 반란은 다시 재개되었다. 11월에는 이르군단이 정당방위라며 아랍 시민을 대상으로 공격을 전개했다. 아랍인들은 이에 반격해 게릴라군들을 위주로 살인과 사보타주 작전들을 시행했다. 혼돈 속에서 팔레스타인 정부는 이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1938년, 이집트 왕국 대영제국이 군대를 더 투입시켰고 아랍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예루살렘에 입성, 지배하게 된다.

4. 결과

대규모 저항의 결과는 실패로 이어졌고, 수천명의 아랍인들은 군법에 의해 체포되어 재판도 없이 위생시설없는 정치범 수용소에서 구금되었다.

수많은 도시들과 거주지들이 파괴되었다. 미아르는 1938년 10월 도시 전체가 없어졌으며, 야파 1936년 6월 16일 하루동안 6,000명의 이주민이 생길 정도로 젤라틴 폭탄에 의해 파괴되었고, 제닌 또한 1938년 도시의 1/4이 파괴되었다.

5. 영향

유대인 정착촌이었던 텔 아비브는 이전에는 야파 등 아랍인들의 항구를 거점으로 경제 발전을 해왔으나, 아랍인들과의 사이가 최악으로 치닫으면서 자체적인 항구를 건설했다.

1939년 백서에서 유대인들의 이민을 제한하는 정책을 시작했으나, 다비드 벤구리온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네빌 체임벌린 또한 이 정책을 전쟁 중에만 시행할 것이라고 반응하며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한편, 아랍인들의 군사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1947년 팔레스타인 내전 당시 하가나, 이르군등의 유대인 군사조직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고, 1948년 제1차 중동전쟁에서도 약해진 아랍 군대와 집중되지 못한 아랍 정치력에 의해 결국 패배로 이어졌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주요 경제 도시들이 유대인들의 정착지로 변하면서, 팔레스타인은 경제력, 군사력, 사회결집력, 정치 체제 등에서 크게 밀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