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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도요 카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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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시리즈 우승
★★★
1979 · 1980 · 1984
리그 우승
(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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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 1군 마쓰다 줌줌 스타디움 히로시마 · 2군 히로시마 도요 카프 유우 연습장 · 지방 홈구장 미요시 킨사이 스타디움
과거 히로시마 시민 구장
홈 중계 채널 파일:J SPORTS 1 로고.svg
주요 인물 구단주 마츠다 하지메 · 감독 아라이 타카히로 · 선수회장 오세라 다이치 · 주장 공석 · 어드바이저 쿠로다 히로키
스카우트 브래드 엘드레드
구단 상세 정보 역사 · 선수단 및 등번호 · 역대 선수 · 응원가 · 유니폼 · 카프죠시 · 2022년 센트럴 리그 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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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창단 초창기3. 1970년대 중반 ~ 1990년대 초반4. 1998년 ~ 2012년

1. 개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역사를 서술한 문서.

2. 창단 초창기

지역의 사업가들과 창단 감독 이시모토 히데이치[1]등의 야구인들을 중심으로 지역의 부흥을 위해 1950년 센트럴리그에 참가했지만, 이후 줄곧 부진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세리그 구단이 7개 구단이었는데[2] 1951년에는 다이요 훼일즈[3]에 합병까지 논의될 정도로 경영난이 심각하였으나[4] 히로시마 시민들이 모은 성금으로 합병만은 면했다. 그리고 1952년 짝수로 팀을 맞추기 위해 승률 3할 이하 팀을 타 구단과 합병하기로 결정하면서 가뜩이나 시민구단으로 창단되어 재정적 받침이 없었던 히로시마 카프의 존속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팀의 에이스인 하세가와 료헤이가 이끄는 히로시마 카프는 극적으로 3할 승률에 안착,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반면 쇼치쿠 로빈스는 3할 이하로 시즌을 마감하며 다이요 훼일즈와 다이요-쇼치쿠 로빈스라는 이름으로 합병[5], 두 기업이 함께 운영하는 구단이 된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자금이 부족한 시민구단인지라 언제나 재정난에 시달렸고, 늘 성적은 B클래스[6]를 맴돌았다. 1967년까지 18년 연속 B클래스는 NPB 사상 두번째 최장 기록이다.[7] 결국 1968년 히로시마 시민들이 단체로 현내 대표 기업인 도요공업[8]에 구단 좀 맡아 달라고 탄원하여 결국 마쓰다가 히로시마의 운영을 맡게 되었다. 구단주 마쓰다 쓰네지는 새로 감독에 취임한 네모토 리쿠오에게 "시즌 전패를 해도 좋으니 히로시마의 기틀을 만들어 달라" 고 요청했고 네모토 감독은 오너의 지시를 받들어 팀을 그 해 센트럴 리그 3위로 이끌며 창단 후 첫 A클래스 진입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히로시마는 이후 제자리를 찾으며 상황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3. 1970년대 중반 ~ 1990년대 초반

그래도 이런 노력이 결실을 거둬 고바 타케시 감독이 취임한[9] 1975년, 창단 25년 만에 처음으로 센트럴리그 우승을 달성하면서 부진으로 일관하던 구단 역사에 종지부를 찍기 시작했다. 이 해부터 빨간색 유니폼을 입기 시작한 것과 히로시마 전성기의 시작이 겹쳤기 때문에 세간에서 히로시마를 아카헬 군단(붉은 헬멧 군단)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다만 일본시리즈에선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6전 2무 4패로 우승에 실패했다. 이후로도 고바 감독의 지휘 하에 1979년[10] 1980년 일본시리즈에서 킨테츠 버팔로즈를 상대로 2년 연속 4승 3패의 전적으로 대망의 일본 시리즈 우승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KBO 리그의 전설적인 30승 투수로 남긴 장명부가 79, 80년 2연패하던 시절에 주전으로 많은 활약을 하면서 올드팬의 추억에 아직도 남아있다.

그 후에도 1983년부터 1991년까지 A클래스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으며 특히 1984년, 9년 전 일본시리즈에서 맞붙었던 한큐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현재까지는 최후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 당시 팀을 이끌던 선수들은 타자로는 야마모토 코지, 기누가사 사치오, 타카하시 요시히코, 미즈타니 지츠오 등이 중심이 된 호타준족의 타자들이 있었고, 소토코바 요시로, 이케가야 코지로, 김기태, 장명부, 에나츠 유타카, 키타벳푸 마나부, 오노 유타카, 카와구치 카즈히사, 츠다 츠네미 등의 투수들이 주축이 되어 활약하였다. 1991년에는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야마모토 코지 감독의 지휘 아래 리그 우승을 거두며 일본시리즈에 진출, 7차전까지 가며 분투했으나 당시 황금시대에서도 절정을 달리고 있던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패해서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리고 22년동안 포스트시즌 진출을 하지 못했다. [11]

그래도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일본의 고도 경제성장으로 인한 활황 덕분에 구단이 어느 정도는 돈을 들일 여력이 있었고, 비교적 드래프트가 공정하게 진행되던 1990년대 초중반까지는 모자라는 자금력을 우수한 스카우팅과 빡센 훈련으로 메우면서 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FA 제도가 실시되고, 신인 드래프트에서 사실상 자유 스카우트나 다름없는 역지명 등 각종 기괴한 제도가 도입되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에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자금력이 풍부한 요미우리 자이언츠 같은 팀들에게 극도로 유리해진 리그 환경에서 카프는 선수들에게 투자는 커녕 있는 선수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팜에서 애써 키운 뛰어난 선수들이 FA나 출혈성 트레이드로 줄줄이 유출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1991년의 리그 우승 이후 2012년까지 센트럴리그 우승은 고사하고 포스트시즌 진출이 없는 것은 물론이요,[12]타 구단에 비해 재정이 빈약한 탓에 타 팀에게 주축 선수들을 뺏기는 경우가 많았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프랜차이즈 출신 미무라 토시유키 감독의 조련 아래 오가타 코이치( 우익수)[13] - 쇼다 코조( 2루수)[14] - 노무라 켄지로( 유격수)[15] - 에토 아키라( 3루수) - 마에다 토모노리( 중견수) - 루이스 로페스( 1루수) - 카네모토 토모아키( 좌익수)[16] - 니시야마 슈지( 포수) - 투수로 이어지는 핵타선 혹은 붉은 악마 타선[17]이 나름 유명했다. 하지만 투수진은 카와구치 - 키타벳푸 - 오노의 노쇠화와 츠다 츠네미의 사망, 그 뒤를 이었어야 할 유망주 투수들이 무리한 혹사 기용으로 한두 해 반짝한 뒤 부상 → 기량저하 테크를 타 하나둘씩 사라지는 일들이 반복되면서 투수진 뎁스가 겨우 사사오카 신지 한 명만 풀타임으로 버티는 정도로 매우 얄팍해졌다.

결국 우승 기회에서 번번이 투수진 붕괴로 무너지고, 급기야 자금난 속에서 이 무시무시한 타선을 유지할 길이 없어 에토 아키라를 FA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내준 것을 시작으로[18], 카네모토 토모아키, 아라이 타카히로 등이 줄줄이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하면서 히로시마는 한신의 팜이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생길 정도로 주축 선수들의 전력 유출이 심각했다. 심지어 앤디 시츠, 네이트 민치, 그렉 라로카, 데니스 사파테 등 우수한 외국인 선수들도 마찬가지로 타 팀으로 빠져나가는 신세를 겪었다.

4. 1998년 ~ 2012년

이후 1998년부터 2012년까지 15년 연속 B클래스를 기록했으며, 게다가 앞으로도 별로 좋아질 건덕지가 안 보였기 때문에 난카이 호크스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팀의 암흑기에 세운 20년 연속 B클래스 기록을 갈아 치울 최유력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19]

2000년대 들어서는 타 구단, 특히 한신의 팜 구단이라는 오명을 들을 정도로 스타플레이어의 유출이 심각했다. 카네모토 토모아키, 앤디 시츠, 아라이 타카히로 등이 모조리 FA로 한신 타이거스로 적을 옮긴건 상당히 유명하다. 거기에 에이스 구로다 히로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까지 있었기에 그야말로 꿈도 희망도 없어보이는 상황이었다.

2009년에 오랫동안 써온 히로시마 시민구장을 뒤로하고 일본 최초의 비대칭 야구장인 마쓰다 줌줌 스타디움 히로시마로 옮기고, 유니폼도 새롭게 변경하면서 이미지 쇄신을 감행하였다. 거기에 프랜차이즈 플레이어인 노무라 켄지로가 전격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과거 '붉은 악마 카프'의 재현을 많은 팬들이 바라왔다. 그런데 현실은

여담으로 2009년 교류전 당시 치바 롯데 마린스와의 막장 경기가 유명한데, 2009년 6월 10일 QVC 마린 필드에서 열린 경기에서 히로시마의 선발투수 콜비 루이스의 맹활약으로 치바 롯데가 잔루만 11개에 13삼진을 당하며 완봉패(...)를 기록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바로 다음날 경기에서 2:23으로 롯데에게 탈탈 털렸다(...) 특히 치바 롯데는 6회말에만 무려 20명의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1이닝 타자이순 성공, 12안타 4사사구 15타점 15득점을 기록하며 일본프로야구 사상 단일이닝 최다득점 기록을 세웠다. 6회말만 무려 48분이 걸렸을 정도. 그리고 롯데의 3번 타자 오마츠 쇼이츠한 회에 타석에 3번이나 서는 진기록을 세웠다. 6회말 선두타자이자 오오마츠의 바로 앞 타자였던 후쿠우라 카즈야는 도중에 교체되면서 2연타석만 기록.

이 시기엔 부진한 팀 때문인지 팬들의 성격이 다소 자학적이다. 이 팀의 암울함은 미나미가에서도 나왔던 다음 넌센스 퀴즈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Q: 赤い帽子をかぶると涙を流して小さくなるもの,なーんだ? (빨간 모자[20]를 쓰면 눈물을 흘리며 작아지는 것은?)
A: 広島カープファン… (연패중인 히로시마 팬)[21]

또한 팀이 비밀번호를 신나게 찍어대던 2000년대 후반[22]에는 히로시마 팬의 10계명이란 것도 나왔었다.
1. 승패에 연연해하지 말 것. - 어차피 이기고 지는 세상사.
2. 남의 FA 선수를 탐내지 마라. - 그들의 리스트에는 히로시마의 H 따위는 없다 . 만약 H가 보인다면 그건 모기업이 부자로 소문난 규슈 제일 인기팀이나 우리 최대의 상전의 머릿글자를 잘못 본 것이다. C가 보이면 그건 도알라가 마스코트인 팀이다[23]
3. 외국인 선수가 좋은 성적을 내도 좋아하지 말 것. - 내년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4. 외국인 선수에 정 주지 말 것. - 잘 하면 다음 시즌에 타팀에서 보게 될 것이고, 못 하면 그 날로 인천행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24]
5. FA를 앞둔 선수는 과감히 버려라. - 그들도 사람이다. 승리 또는 돈, 둘 중에 하나는 갖고 싶어한다.[25]
6. 야구는 9회말 2아웃부터다. - 제구병신 나가카와 카츠히로가 올라온 순간부터 상황은 급반전된다.
7. A클래스와 B클래스 사이에는 4차원 공간이 존재한다. - A클래스의 1, 2, 3위는 왕족, 귀족, 성직자 계급이라고 보면 된다.
8. 오늘 누가 안타를 칠 것인가보다 마티 브라운 감독[26]이 언제 베이스를 뽑으면서 항의할까를 기대하라. - 히로시마의 유일한 세일즈 포인트다.[27]
9. 한신은 우리의 상전. - 그들의 수요는 엄청나다. 원활한 공급만이 우호유지의 생명.[28]
10. 가급적이면 KBO 리그(KBO)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로 눈을 돌리자. - 이게 답.[29]
위에 나열된 팬덤의 특징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한화 이글스의 2010년대 유입 팬덤과 상당히 유사하다. 근데 팀 성적은 전혀 유사하지 않은게 문제..

물론 이건 2012년까지의 이야기고 2013년부터는 잘나가는 팀이 되었으므로 해당사항과는 많이 멀어졌다. 그리고 이건 자책성 유머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4.1. 2011년 시즌

센트럴리그가 전체적으로 혼전양상을 보이면서 시즌 중반까지 이따금(…) 상위권에 올라갔다가 DTD하다를 반복했다. 단 2일이긴 하지만 2위를 기록한 때도 있었고, 올스타전까지 줄곧 3 - 5위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권을 서성대며 히로시마 팬들의 기대를 부풀려 놨지만, 올스타전 이후로 DTD 시전. 결국 또 5위로 끝났다. 2011년도 역시나로 끝나면서 연속 B클래스 기록을 14년으로 연장했다.

4.2. 2012년 시즌

2012년 시즌에는 7월 경까지 4위를 기록하더니, 7월 13일부터 15일까지 열린 원정 경기에서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를 3전 전승으로 이기며 3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코앞까지 올라왔다.[30] 그리고 때마침 요코하마도 야쿠르트를 상대로 3전 전승하면서(…)[31], 히로시마는 야쿠르트와 함께 공동 3위로 올라섰다. 그러고 또 며칠 후에는 결국 야쿠르트를 제치고 단독 3위로 등극하였다.

야쿠르트를 1~2게임 차로 앞선 이후로 초기에는 간혹 도로 뒤집히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 오히려 굳히기에 들어갔는지 2012년 8월 31일 기준으로 4위 야쿠르트와 2게임 차이로 우위를 유지했다.[32] 그 기세 그대로만 갔으면 연속 B클래스의 기록을 종결하고 클라이맥스 시리즈 사상 첫 진출을 기대…할 수 있었으나,

역시 그동안 값싼 선수들 위주로 스카우트를 해온 탓에 선수층이 빈약해서인지, 오랜만에 피를 말리는 포스트시즌 다툼을 하는 바람에 선수들의 경험부족이 드러난 건지 9월 들어 6승 17패로 내팀내를 시전하면서 3위 자리를 야쿠르트에게 내주고 2012년에도 포스트시즌의 꿈은 좌절되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포스트시즌 경쟁팀이던 야쿠르트는 9월 한달에만 16승 8패의 호성적을 거두면서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는 속담만 입증했다. 특히 9월 17~19일 야쿠르트와의 맞대결에서 싹쓸이 3연패를 당한 게 치명타가 됐다.

2012 시즌이 마감된 시점을 기준으로 히로시마는 555455565545554라는 비밀번호를 찍으면서 결국 15자리 비밀번호를 달성하는 데 성공한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한신 타이거스가 상당한 부진을 겪게 되는 바람에 무려 4년만에 4위 자리는 겨우겨우 차지했다는 점이다.

4.3.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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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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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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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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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의 우승에는 '왕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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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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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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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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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 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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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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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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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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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 20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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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히로시마 출신으로, 초창기 일본 아마야구와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지도자 중 하나. '천 개의 노크'( 펑고)같은 강훈련과 '무사도 야구'를 주장한, 흔히 일본 야구하면 생각나는 빡센 훈련과 기합을 중시한 인물이었다. 특히 1936년 일본프로야구 원년부터 39년까지 오사카 타이거스의 감독으로 재직하며 다른 히로시마 출신 야구인들인 후지무라 후미오 등의 선수들과 함께 최강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꺾고 37, 38년 두 차례의 우승을 이루어내며 지금의 인기팀 한신과 전통의 일전이라는 오랜 라이벌리의 발판을 닦았다. 이후 여러 구단의 감독과 코치로 지내다 고향 히로시마에 프로야구 팀이 생긴다는 소식을 듣고는 없는 살림에도 열정적으로 선수들을 끌어모으는 등 팀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히로시마 감독직을 시라이시 카츠미에게 물려준 뒤에도 몇 차례 프로 구단의 코치를 맡기도 했다. [2] 1950년 양대리그 출범 당시 센트럴리그 팀은 8개 구단이었으나 이듬해 니시닛폰 파이리츠가 퍼시픽리그 소속인 니시테츠 클리퍼스에 합병되어 니시테츠 라이온즈)가 되면서 7개 구단으로 줄었다. [3] 다이요는 초기에 히로시마에서 가까운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에 적을 둔 적이 있었다. [4] 맨발의 겐에 따르면 운용 비용도 부족해서 선수들이 입석 기차표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할 정도였다고. [5] 인수합병이 아니다. 인수가 일어난 때는 쇼치쿠가 운영포기한 1955년. [6] 4위 ~ 6위. [7] 불명예 1위는 20년 연속 B클래스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8] 東洋工業, 현재의 마쓰다. [9] 이 해에는 일본 최초의 MLB 출신 감독인 조 루츠가 감독을 맡으며 시작했다. 캠프에서 워렌 스판을 임시 코치로 대동하는 등 의욕적으로 시작했으나 개막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사퇴했다. 그래도 특유의 빨간 유니폼을 남겨놓고 갔다. [10] 그 유명한 에나츠의 21구가 벌어졌던 시리즈다. 상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11] 그래서 진출 실패 기간으로만 따지면 히로시마가 퍼시픽 리그의 모팀보다는 비밀번호가 길지만 98시즌 이전에는 1위만 못 했을뿐 A클래스는 찍었기 때문에 98시즌부터 12시즌까지 B클래스 한 기간만 비밀번호에 들어간다. 참고로 소프트뱅크의 전신인 난카이와 다이에는 20년 동안 B클래스만 찍었다!!! [12] 센트럴 리그는 초창기부터 2006년까지 규정상 공동 1위팀이 생기는 경우를 제외하면 단독 1위를 한팀만 포스트시즌에 진출할수 있었다. 문제는 센트럴 리그에는 동률 1위팀이 생긴적이 없어서 있으나 마나였다... [13] 2015~2019 카프 감독 [14] 2017~2019 KIA 타이거즈 코치 [15] 2010~2014 카프 감독 [16] 2016~2018 한신 감독 [17] 70년대 신시내티 레즈의 별명인 빅 레드 머신으로 불릴 정도였다. 또한 이쪽도 신시내티 레즈와 같이 붉은 유니폼에 로고 모양이 'C'. [18] 정확히는 1994년 시즌 오프에 카와구치를 FA로 요미우리에 보낸 것이 시초긴 하나, 이쪽은 고령으로 하락세를 타던 것에 더해 도쿄에 사는 장인의 간병 문제로 이적한 것이라 카프의 FA 유출 잔혹사와는 거리가 있다. [19] 하지만 어떤 해는 바뀐 규정 때문에 피해를 봤는데 그 예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는 5년 연속 A클래스의 마지막 해인 2001년엔 3위를 기록했는데 승률이 4위팀이었던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밀렸다. 당시 베이스타즈의 성적은 69승 67패 4무 승률 0.507 이었고 카프의 성적은 68승 65패 7무 승률 0.511이었다. 원칙대로 라면 히로시마가 3위 요코하마가 반 게임차로 4위를 기록해야 되지만 왜 요코하마는 3위 히로시마가 4위가 됐냐면 이 해엔 승률이 아니라 승리 수로 순위를 결정지었기 때문에 히로시마가 비밀번호 끊는데 11년이 더 걸렸다. 이 팀도 2009년에 이 규정 때문에 우승을 날려먹었다. 사실 이 경기만 안 집어던졌으면 우승이었다 [20] 히로시마 유니폼의 모자 색상이다. [21] 원래 정답은 "ろうそく(양초)". [22] 아래 글에 2006년~2009년까지 감독을 했던 마틴 브라운의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재임 기간 중에 나온 유머인듯. [23] 실제로 히로시마가 쓰기 이전에 모자에 신시내티 비슷한 C를 쓴 바 있다. C를 쓰기 전의 히로시마는 히로시마의 H와 카프의 C를 합치거나 혼합한 로고를 썼다. [24] 그 대표가 케니 레이번 마이크 로마노다. [25] 물론 실제로는 다른 팀으로 옮기면 얄짤없이 까인다. 먼저 간 카네모토 토모아키를 따라 한신 타이거스로 옮겼다가 다시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돌아온 아라이 타카히로는 아직도 팬들의 절반은 용서하지 않았다는 말이 나올 지경. FA 선언 안 한다고 하더니 카네모토 토모아키, 그리고 자기 친동생 아라이 료타를 보고 한신으로 떠나가며 팬들에게 거짓말을 한 것과 더불어 FA 선언 이후 기자회견 때 FA 선언을 했으면서 눈물 질질 흘리며 카프가 좋아서 괴롭다는 둥 FA가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둥 말도 안 되는 언플을 때려 안 그래도 거짓말에 빡친 팬들을 더 빡돌게 만들었기 때문. 하지만 후에 또다시 FA가 되었을 때 한신의 8천만 엔을 거절하고 스스로 고작 2천만 엔으로 연봉을 존나게 후려치고 히로시마로 돌아온 것과 2016년 비록 수상은 못했지만 시즌 막판까지 타점왕 1위에 오르며 리그 우승의 1등공신으로 맹활약해서 대부분의 팬들은 용서를 했다. [26] 1990년대 초 히로시마에서 외국인 선수로 뛰었고 2006년~2009년까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감독으로 재직했다. 그러나 재임기간 동안 성적은 5위-5위-4위-5위로 4년 연속 하위권. 2010년엔 노무라 카츠야의 후임으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땜빵성이 짙은 감독을 맡기도 했으나 보기좋게 꼴찌하고 물러났다. [27] 브라운은 히로시마 감독을 맡은 4년간 8회나 퇴장당했다. 독특한 것은 브라운이 심판의 심기를 살피기는 커녕 오히려 의도적으로 퇴장을 유도했다는 것이고 (베이스를 뽑을 때에는 훗날 인터뷰에서 선수의 퇴장에 대한 항의로 '이 정도는 해야 퇴장감이다'라는 액션을 취한 것이라고 설명했으며, 심지어 퇴장 제스처가 나오기도 전에 나가서 심판이 퇴장 지시를 내리지 않기도 했다. 퇴장당할 때 코치에게 남은 경기의 작전지시를 모조리 전달하고 나가는 것은 덤.), 브라운 감독이 퇴장당한 날 히로시마는 7승 1패로 거의 무적에 가까웠다는 것. 그 뒤 라쿠텐 감독을 1년 할 때는 4번 퇴장당했지만 2승 2패에 불과(?)했다. [28] 카네모토 토모아키, 아라이 타카히로, 앤디 시츠가 대표격이다. 근데 아라이는 다시 돌아왔다그리고 2016년 한신이 카프의 승수를 제대로 공급해주며(...) 카프의 리그 우승에 엄청난 도움을 줬다. [29] 그런데 진짜로 메이저리그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게, 한때 카프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구로다 히로키가 메이저리그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기 때문. 그리고 그 구로다는 2015 시즌에 금의환향했다! 그런데 구로다가 돌아온 이듬해 마에다가 MLB로 가버린 게 함정 [30] 2012년의 대 요코하마 전적은 무려 15승 6패로, 유독 요코하마에게만 강세였다. 아니 요코하마를 제외한 다른 네 팀에게는 전부 근소한 열세였다. 결국 다른 팀과의 대결에서 패한 부분을 제일 만만한 요코하마전에서 메웠다는 소리. [31] 7월 16일부터 18일까지 열린 홈 경기에서 요코하마는 2012 시즌 첫 3연승과 시리즈 스윕을 해냈다. [32] 다만 2위 주니치 드래곤즈와는 여전히 11게임 차이로, 현저하게 밀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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