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2 19:36:30

김기태(재일교포)

김기태의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fffff [[청보 핀토스|청보 핀토스]] 등번호 26번}}}
감사용
(1982~1985)
김기태
(1986)
배경환
(1987~1990)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7번
송진호
(1982~1986)
김기태
(1987)
김성길
(1989~1992)
}}} ||
파일:金城基泰.jpg
가네시로 모토야스
[ruby(金城, ruby=かねしろ)] [ruby(基泰, ruby=もとやす)] | Motoyasu Kaneshiro
한국명 김기태 (金基泰)
출생 1952년 10월 16일 ([age(1952-10-16)]세)
일본 오사카부 오사카시 히가시스미요시구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코노하나 상고(此花商業高校)
포지션 투수
투타 우언우타
프로 입단 1970년 드래프트 5라운드 ( 히로시마)
소속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1~1976)
난카이 호크스 (1977~1984)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5)
청보 핀토스 (1986)
삼성 라이온즈 (1987)

1. 개요2. 생애
2.1. 선수 경력
2.1.1. 일본 프로야구 시절2.1.2. 한국 프로야구 시절
2.2. 은퇴 이후
3. 피칭 스타일4. 여담5. 연도별 성적
5.1. 일본 시절5.2. 한국 시절
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일본프로야구 KBO 리그에서 뛰었던 투수이다. 재일 조선인으로 전성기에 일본에서 뛸 때에는 언더핸드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빠른 볼로 유명했으며, KBO 리그에서 뛴 재일교포 선수들 중에서는 가장 화려한 일본프로야구 성적을 기록했다.

2. 생애

2.1. 선수 경력

2.1.1. 일본 프로야구 시절

신인드래프트 5순위로 지명되어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나 제구력이 좋지 않아 1971년에는 2군에서만 뛰었고, 1군 데뷔는 1972년이었다. 이 해 3승 3패와 평균자책점 3.95를 기록했고, 이듬해 1973년에는 처음으로 두 자릿수 승리와 2.54의 평균자책점이라는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1974년에는 20승 15패 평균자책 3.64 207탈삼진을 기록하며 다승왕과 탈삼진왕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해 히로시마는 리그 꼴찌! 말 그대로 꼴찌팀에서 다승왕이 나온 것으로 한동안 센트럴리그 유일한 기록이었지만 1984년 요코하마의 엔도 가즈히코가 17승 17패로 꼴찌팀 다승왕을 차지하며 깨졌다. 최신 기록은 2013년 야쿠르트의 오가와 야스히로(16승 4패).

그러나 그 해 시즌 종료 후, 지인의 차에 동승했을 때 교통사고를 당해 미세한 유리 조각이 각막에 박혀 실명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의사는 김기태의 상태를 보고 더 이상의 야구 생활은 힘들다는 선고까지 한다. 거기다가 병원 치료 중 약물 부작용과 합병증까지 겹치자 이제는 일상생활조차 힘들 것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럼에도 히로시마의 구단주가 의사들에게 '못 고치면 해고를 각오하고 꼭 다시 마운드에 세워라'고 했을 정도로 구단에서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수술로 실명 위기는 벗어났고 오른쪽 눈은 회복했지만 왼쪽 눈은 거의 보이지 않아 야구를 포기하기 직전까지 갔으나, 1975년 봄 유명 콘텍트렌즈 회사의 제품을 착용하여 어찌어찌하여 왼쪽 눈의 회복에도 성공했다. 반년간의 투병생활 끝에 의사의 만류를 무릅쓰고 1975년 8월에 다시 마운드로 복귀했다. 이후 마무리 투수로 뛰며 활약했고, 이해 10월 15일 카프의 첫 우승이 결정된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전에선 마무리 투수를 맡아 무실점으로 경기를 매듭지어 헹가래 투수가 되었다.[1]

그러나 시력이 나빠지는 후유증에다 트레이드 마크였던 강속구도 잃어버리며 성적이 하락해 1976년 시즌 후 장명부와 맞트레이드 되어 난카이 호크스로 이적했다. 트레이드 직후인 1977년에는 마무리 투수 자리를 에나츠 유타카에게 넘기며 선발로 활약해 다시 2점대 평균자책점과 10승을 기록하며 부활했고, 에나츠가 팀을 떠나자 다시 마무리 투수가 되었다. 1979년 16세이브를 기록하여 최우수 구원투수상을 수상하였고, 1980년에도 13세이브로 리그 1위는 아니었지만 역시 최우수 구원투수상을 수상했다. 1981년에는 급성 간염을 겪는 등 부침도 있었지만, 1982년 최다 경기인 57경기에 출전해 21세이브를 올리며 클로저로서 커리어 하이를 맞았다. 이후로도 난카이의 구원투수 자리를 지키다가 1985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었으나 별다른 활약 없이 시즌을 마무리했고, 이후 청보 핀토스의 스카우트를 받고 한국 프로야구에 진출했다.

2.1.2. 한국 프로야구 시절

청보에서는 그의 일본시절 활약을 고려해서 장명부, 김일융 같은 성적을 올려주길 기대했지만, 일본에서의 혹사와 잦은 부상으로 인한 기량의 저하로 9승밖에 올리지 못했다. 같은 해 입단한 재일교포 투수 김신부보다 더 못한 성적. 그런데 시즌 후 삼성 라이온즈 김근석, 정현발 두 주전급 선수를 내주면서 김기태를 영입했다. 1986 시즌 후 김일융이 계약만료로 일본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 대체자로 일본에서 거물급 투수였던 김기태를 영입한 것. 그러나 삼성에서는 7승 밖에 올리지 못했다. 그렇게 한국에서 2시즌간 59게임, 270⅓이닝을 던져 16승 19패 5세이브, 평균자책 3.73이란 다소 기대치에 모자란 성적을 남기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청보-삼성 시절에 KBO의 리그 수준과 팀에 대해 불만을 여러모로 표시했다고 한다. 특히 연봉협상 시 기록 달성에 대한 옵션계약을 가지고 걸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일본에서 최고의 자리에 있던 선수여서 KBO 초창기 프로에 대한 관념이 부족했던 국내 선수들에게 자극을 주기도 했다.

2.2. 은퇴 이후

은퇴 이후에는 메밀국수 식당을 경영했다가 펜스 완충재 제작 업체 운영으로 업종을 전환했었다. 이후에는 오사카에서 유소년 야구 지도자로 지내고 있다. # #

3. 피칭 스타일

파일:/image/295/2009/01/12/%25B0%25A1%25B3%25D7%25BD%25C3%25B7%25CE.jpg
현역 시절의 투구폼. #

팔을 크게 위로 들기 때문에 와타나베 슌스케같은 정통 언더핸드처럼 생각되기 쉬우나, 타자에게 등을 보일 정도로 상체를 비틀어 높은 언더핸드/약간 낮은 사이드암 정도의 릴리스 포인트에서 던지는 변칙적인 투구 폼을 가지고 있다. 마치 매가 하늘을 나는 우아함이 깃들은 투구폼이라고 일컬어지며, 실제로 과거 1970년대의 프로야구를 본 많은 팬들이 아름답고 인상적인 폼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투구 폼으로 인한 잦은 도루 허용은 단점으로 꼽힌다. 구종의 경우, 140km에 육박하는 빠른 패스트볼을 주로 던졌으나 변화구는 거의 던지지 않았다.

4. 여담

현역 시절의 대표적인 별명은 "불사조"였다. 교통사고로 선수 생활이 불투명해졌지만 그를 극복하고 재기하는데 성공했기에 붙여진 별명.

코노하나상고 재학시절, 재일교포팀으로 두 번이나 한국을 방문했던 선수. 허구연의 불멸의 전설 재일동포야구단 특집 방송에서도 이에 관한 얘기를 하였으며 당시에 한국에 언더핸드 스로투수가 적어서 타자들이 속수무책으로 공략당했다고 한다. 물론 상술했듯이 일본에서도 드래프트 5위로 뽑히고 다승왕도 차지했을 정도로 뛰어난 투수였고, 잠수함 투수 중에서도 투구폼이 워낙 특이하고 구위가 뛰어났기 때문에 단순히 언더핸드라서 공략하기 어려웠다고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1980년 10월 2일,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는 공 한 개도 안 던지고 세이브를 기록했다. 당시 9회 2사 후에 등판, "11년 연속 도루왕"에 오른 1루주자 후쿠모토 유타카를 견제구로 잡아내면서 세운 진기록.

시구식에서 홈런을 맞은 적이 있다. 홈런을 때린 타자는 동시대 히로시마의 주축 선수이자 리그 우승의 주역이었던 야마모토 코지.[2]

마무리 투수를 맡으면서 핀치 상황에서의 등판이 많았지만 그런 상황에서 팀이 자신에게 맡겨준다는 만족감이 컸으며, 마지막 투구는 투수 본인이 가장 자신있는 공을 던질 수 밖에 없는 점 등 마무리 투수 보직을 좋아했던 이유를 밝히고 있다. 또, 본인의 성격은 밝고 음침하며 성격이 급하다(明るく陰気で、短気で気が長い)고 밝혔다.

1976년 장훈이 주니치의 야자와 켄이치와 타격왕 경쟁을 벌일 당시 야자와에게 치기 좋은 공을 던지는 식으로 대놓고 밀어줬다는 카더라가 존재하지만, 대한민국에서만 떠돌아다니는 근거 없는 낭설이다.

마구마구에서는 게임 초창기부터 우완 오버핸드로 구현되어 있다가 2013년 2월 27일 이루어진 패치를 통해 우완 언더핸드로 수정되었다. 이 오류는 제작사가 다른 마구마구 2 카카오에서까지 정확하게 이어졌으나, 끝내 수정되지 않고 서비스를 종료했다.

5. 연도별 성적

5.1. 일본 시절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72 히로시마 27 70⅔ 3 3 - 0.500 3.95 60 9 47 62 36 31 1.47
1973 40 131⅓ 10 6 - 0.625 2.54 99 12 42 106 42 37 1.02
1974 44 252 20
(1위)
15 0 0.571 3.64 214 34 80 207
(1위)
107 102 1.13
1975 16 27 1 0 4 1.000 2.67 19 2 15 24 8 8 1.19
1976 43 102⅓ 2 9 4 0.182 4.84 101 21 55 97 59 55 1.41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77 난카이 31 189⅔ 10 11 1 0.476 2.51 149 21 80 123 72 53 1.13
1978 19 30⅓ 0 4 3 0.000 4.15 29 4 8 29 16 14 1.15
1979 53 98⅓ 4 5 16
(1위)
0.444 3.29 66 14 40 69 36 36 1.03
1980 31 56⅔ 6 4 13 0.600 3.65 45 13 21 43 25 23 1.10
1981 23 30 2 0 7 1.000 1.80 19 1 13 35 7 6 0.87
1982 57
(1위)
78⅓ 6 9 21 0.400 2.64 61 6 25 65 24 23 0.7
1983 40 54 4 4 15 0.500 3.67 46 11 19 28 22 22 1.19
1984 20 21 0 1 8 0.000 3.86 16 3 13 15 9 9 1.24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5 요미우리 17 20 0 0 0 - 4.87 17 4 14 16 12 11 1.53
NPB 통산
(14시즌)
461 1162 68 71 92 0.489 3.33 941 155 469 919 475 430 1.16

5.2. 한국 시절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6 청보 42
(2위)
175⅓ 9 14 5
(5위)
0.391 3.18 158 12 83 109
(4위)
73
(4위)
62
(4위)
1.28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7 삼성 17 95 7 5 0 0.538 4.74 89 8 60 46 57 50 1.44
KBO 통산
(2시즌)
59 270⅓ 16 19 5 0.457 3.73 247 20 143 155 130 112 1.34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86년 6완투 1완봉
1987년 5완투 1완봉
KBO 통산 11완투 2완봉

6. 관련 문서


[1] 야마모토 코지의 말에 따르면 상대팀이 연습하고 있는 사이에 히로시마 선수 4~5명은 항상 링거를 맞고 있을 정도로 선수들이 지쳐 있었다고 한다. 히로시마 구장의 무더위, 페넌트레이스 리그 우승 부담감 등이 겹친 탓이다. [2] 1999년 6월 27일 vs 요미우리 자이언츠 홈 경기로 추정, 히로시마 카프 구단 설립 50주년을 기념해 많은 홈 경기에서 OB들의 시구식이 있었다. http://members.jcom.home.ne.jp/darakyu/carpshikyushiki.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