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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야마 토오루 平山 亨|Toru Hirayama |
|
출생 | 1929년 3월 19일 |
아이치현 나고야시 | |
사망 | 2013년 7월 31일 (향년 84세) |
사이타마현 사야마시 | |
직업 | 영화감독, PD |
학력 | 도쿄대학 문학부 미술사학과 |
활동 기간 | 1954년 - 199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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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영화감독이자 PD초대 가면라이더, 가면라이더 V3 등의 쇼와 가면라이더 시리즈를 비롯해 토에이 특촬 히어로의 프로듀서를 맡으며 기획단계에서 원작의 플롯과 각종 설정까지 직접 완성시켰다.
또한 슈퍼전대 시리즈뿐만 아니라 모든 특촬 작품의 원작가와 각본가, 주제곡 작사가 등으로 크레딧된 가상의 인물 야츠데 사부로를 만든 것도 히라야마였다. 히라야마의 개인 필명에 가까웠는데 다른 프로듀서도 이 명의를 대신 사용하면서 단체 명의가 되었다.
2. 생애
나고야에서 4남매 중 첫째로 태어난 히라야마는 구제중학교 시절인 1944년에 학도병으로 참전해 방공호 제작과 공장 근무 등 많은 일에 종사하였다.젊은 시절 도쿄 대공습으로 죽은 사람 시체를 수습하는 일을 했는데 아이를 안고 죽은 젊은 어머니의 시체가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시체를 떼어놓을 수 없어 하염없이 울었으며 "이런 세상을 구해주는 사람이 왜 없을까. 누군가가 이런 세상을 구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했으며 자신이 만드는 히어로라고 했다.
1949년에는 도쿄대학 문학부에 입학하며 타케우치 토시오에게 헤겔 미학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도 흥미를 얻지 못하고 영화 감독을 꿈꿔 왔다. 대학교 졸업에 즈음하여 영화 회사나 대중 매체와 관련된 취직 시험을 보았지만 모두 불합격이 되면서 1년으로 연기되자 아는 사람의 소개를 받고 아르바이트로 영화 회사에서 조감독을 맡았다. 그리고 토에이에 입사하기 위해 시험을 본 끝에 마침내 합격하며 대학 졸업과 동시에 들어가게 되었다.
토에이 교토촬영소 제작부 제작과에 배속된 이후, 마츠다 사다츠구(松田 定次) 감독에게 지도를 받고 영화 조감독으로 9년동안 130개 이상의 사극 작품에 참가했다.
1963년에는 영화 감독으로 승진된 뒤, 제니가타 헤이지 체포록(銭形平次捕物控)에서 처음으로 감독을 맡았으며 1년 뒤에는 히라야마의 의형이자 나중에 감독이 된 마츠무라 쇼지의 지도를 받고 토신 TV 영화가 제작한 TV사극 미토 고몬에서 처음으로 단독 각본에 관여하였고 세마리의 떠돌이 무사 등 총 2개의 작품에서 감독을 맡았다.
그러자 급속하게 보급된 텔레비전의 영향으로 영화 제작 수가 대폭 줄어들자 1965년 12월에 교토에서 본사가 있는 도쿄로 옮기며 텔레비전 부문 기획자 보좌를 수여하였다. 이후에는 토에이 TV 사업본부장이 된 와타나베 요시노리 차장 밑에서 텔레비전 부문 프로듀서 취임과 동시에 활동을 개시했다.
1966년 7월에는 텔레비전 부문 기획자로 승진하면서 같은 해 10월 TV 아사히의 전신인 NET TV 프로듀서 미야자키 신이치로부터 제안을 받은 악마군을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을 시작으로 캡틴 울트라, 가면의 닌자 아카카게, 자이언트 로보, 유도 일직선 등 인기 프로그램을 연달아 담당하였고, 1971년 4월부터 방송을 시작한 가면라이더 시리즈도 엄청난 인기를 끌어올리며 같은 프로그램의 창시자 중 1명으로 알려지게 되자 이후에도 이시노모리 쇼타로와 관련된 수많은 특촬 프로그램에 관여하며 매일같이 이시노모리 프로덕션에 드나들기도 했다.
1976년 10월에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토에이 TV 기획영업 제2부가 신설됨에 따라 부장대리에 취임하였으며, 다음해 1977년 6월에는 와타나베 요시노리의 충언으로 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성격적인 문제 때문에 관리직으로 가지 못했고 오랜 시간 동안 회의와 책상에 들러붙은 일에 곤혹스러워하자 1979년 3월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스스로 부장직을 사임했고 그와 동시에 부장대리 겸 기획으로 강등되었다.
1984년부터 특촬 잡지에 제목을 내건 "내가 사랑한 캐릭터들"로 초대 가면라이더의 괴인 중 한명인 지옥 대사와 가면의 닌자 아카카게의 최종 보스 코가 겐요우사이 등 히라야마 본인이 관여한 조연들을 주역으로 한 소설을 연재했다. 그래서 텔레비전에서 다 그릴 수 없었던 설정을 소설 형식으로 썼다.
1988년 1월 10일부터 동년 12월 25일까지 방영된 저먼 탐정단 마린구미 기획을 마지막으로 정년퇴임했다.
퇴임 후에는 1991년부터 2004년까지 극단 이로하, 1993년부터 1999년까지 토에이 아카데미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요요기 애니메이션 학원에서 강사 지도를 맡았다.
2011년 4월부터 폐렴 증세로 장기 입원하였으며 이후에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 한동안 치료실에서 심장비대증과 가벼운 당뇨병은 물론 뇌경색을 병행하며 투병생활을 했다.
2013년 7월 31일, 심부전증으로 사이타마현 사야마시의 병원에서 향년 84세로 숨을 거두었다. 숨진지 5일만인 8월 4일에는 추모식을 거행해 후지오카 히로시[1], 미야우치 히로시, 니이보리 카즈오, 하기와라 사요코, 스즈키 타케유키 등 히라야마와 함께했던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3. 특징
시청자, 특히 어린이 시청자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귀신같이 잘 알아냈다. 상품 판매가 잘 안 되었다거나, 여러 이유로 조기종영된 작품은 있어도 시청률은 항상 기준 이상을 마크했다고 한다. 당시로선 새로운 시도를 해서 "에이~ 이런 게 팔리겠어?" 라는 소리를 들은 작품도 히트시켜서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했다고 한다. 70년대 중반 이후의 작품은 기획하고 아이디어만 낸 작품이 많다.히라야마가 잘하는 건 노선 변경이었는데 시청률이 좀 위험해지거나 출연자의 스케줄 문제로 출연이 안 되면 노선 변경으로 작품을 크게 뜯어고친다. 등장인물이 바뀌거나, 세계관 자체가 바뀌어버리기도 한다. 별 이유가 없는데도 "바꾸지 않으면 시청자가 질린다." 라는 이유로 바꾸기도 한다. 이러면서 설정이 충돌해버리기도 하고 맥거핀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변경이 잦아 히라야마의 작품은 전반과 후반 분위기가 이게 같은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르다. 이런 점을 신선하게 보는 팬들도 있고, 작품을 파괴시켰다거나, 설정이 꼬였다며 화를 내는 팬도 있다. 히라야마가 작품을 만들던 시대엔 비디오 같은 기록 매체도 없거나 일반인이 쓰기 힘든 시대였으므로 방송이 끝나면 다시 볼 방법이 없고 작품을 볼 기회는 그 작품을 방송, 재방송하고 있을 때 밖에 없었다. 이런 시대라서 이렇게 만드는 것이 더 유리했고 바꿔서 생기는 문제를 눈치채는 시청자가 별로 없던 것이다.
히라야마의 작품은 일관된 분위기나 치밀한 설정 같은 건 기대해선 안 되며, 참신한 컨셉과 그때그때 재밌는 전개를 중심으로 봐야 한다. 다만 히어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 노선 변경을 해도 어린이에게 유해하고 교훈이 없을 것 같으면 절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같이 일하는 각본가는 이가미 마사루. 감독은 야마다 미노루가 있다.
4. 여담
- 초대 가면라이더 9화와 10화를 촬영하고 있던 중 후지오카 히로시가 사고로 중상을 입으며 계속 출연할 수 없게 되자 히라야마는 긴급 기획 회의를 개최해 혼고 타케시의 사망설로 기울어진 마이니치 방송과 스태프들을 상대로 "히어로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아이들의 대단한 꿈을 망칠 순 없다"고 완강하게 반대했다. 이후 가면라이더 2호의 기용과 후지오카가 복귀한 프로그램을 연결해주고 나아가서는 같은 작품을 2년 가까이에 걸쳐 지속시켰다.
- 눈물이 엄청나게 많아서 기획 중에도 울고, 팬 이벤트를 해도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죽기 전에 쓴 자서전 제목이 '울보 프로듀서의 유언장.'이다.
- 빙하전사 가이슬러거, 격주 루벤카이저 등 애니메이션도 프로듀스했지만 "하청사와 애니메이터가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라고 했으며 두 작품 다 흥행 실패했다. 그래서 특촬물만 하기로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