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30 03:13:55

후안 로만 리켈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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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로만 리켈메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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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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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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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92> CA 보카 주니어스
Club Atlético Boca Juniors
파일:Juan-Roman-Riquelme-broke-the-silence-We-want-to-tell.jpg
이름 후안 로만 리켈메
Juan Román Riquelme
출생 1978년 6월 24일 ([age(1978-06-24)]세)
아르헨티나 산페르난도
국적
[[아르헨티나|]][[틀:국기|]][[틀:국기|]]
신체 183cm, 79kg
직업 축구 선수 ( 공격형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경영인
소속 선수 AA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1992~1995 / 유스)
CA 보카 주니어스 (1995~1996 / 유스)
CA 보카 주니어스 (1996~2002)
FC 바르셀로나 (2002~2005)
비야레알 CF (2003~2005 / 임대)
비야레알 CF (2005~2007)
CA 보카 주니어스 (2007 / 임대)
CA 보카 주니어스 (2008~2014)
AA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2014)
<colbgcolor=#003492> 스태프 CA 보카 주니어스 (2019~ / 부회장)
국가대표 51경기 17골 ( 아르헨티나 / 1997~2008)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유년기3. 선수 경력
3.1. 클럽 경력3.2. 국가대표 경력
4. 플레이 스타일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
6. 여담7.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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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항상 베론이 최고가 될 것이라고 말해왔으나, 가스파르트를 만나서 바르셀로나에서 리켈메가 앞으로 최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카를로스 빌라르도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 선수이자 현 CA 보카 주니어스 부회장. 선수 시절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였다. 현역 시절 세계 정상급의 드리블, 탈압박, 킬패스, 중거리 슛, 데드볼 능력을 겸비하여 비야레알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조직적인 팀 단위의 압박과 빌드업 등이 강조되는 현대 축구의 흐름에서 사실상의 마지막 정통 플레이메이커였기 때문에 '현대 축구의 반역자'로 통한다.

2. 유년기

출신지인 동네가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 아이레스 항구 남쪽에 있는 빈민가 지역 출신에 외모가 약간 컨츄리틱 한 외모를 가져서 농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딴에는 또래이면서 동안인 파블로 아이마르와 비교돼서 이런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는 풍문도 있다.[1] 실제로 아이마르는 일찍이 유럽에 진출했지만, 리켈메는 약간 늦게 진출하여 일찍 돌아온 케이스. 아이마르는 발렌시아, 레알 사라고사, 벤피카를 거쳤고, 리켈메는 보카 주니어스에서 바르셀로나 비야레알을 거쳐 다시 보카 주니어스로 리턴한 케이스이다.[2]

3. 선수 경력

3.1. 클럽 경력

리켈메는 아르헨티나의 명문팀 보카 주니어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다. 1990년대 후반부터 두각을 드러낸 리켈메는 등번호 10번을 달고 보카 주니어스를 2차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2000년, 2001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2연패를 달성하였다. 특히 2000년 인터컨티넨탈컵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인상깊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팀의 승리를 이끌었으며 이후 특급 유망주로 각광을 받으며 바르셀로나로 이적을 했지만, 측면 윙포워드로 기용이 되어 하비에르 사비올라, 파트릭 클라위버르트와 같이 쓰리톱으로 뛰었다. 이 시절은 리켈메나 바르셀로나에게나 시련의 시절로 나쁜 팀 성적의 바르셀로나 속의 리켈메는 실패한 유망주 취급을 받았었다. 호나우지뉴가 영입되자 비야레알로 임대를 떠나게 되고 거기서 본격적인 축구 실력을 뽐내기 시작한다.

리켈메는 비야레알에서 2004-05 시즌 15골을 득점하여 리그 3위로 이끌며 2005-06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티켓을 따냈다. 2005-06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맨유, 벤피카, 을 상대로 2승 4무를 기록하며 조 1위를 이끌며, 16강에 진출했고, 16강에서 레인저스에게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승리를 거두었고, 8강에서 인테르를 상대로도 그렇게 승리하며 4강까지 이끌었다.[3]

아스날과의 4강전에서 1차전에서 0-1로 패해, 2차전에서 반드시 승리해야했지만, 리켈메는 페널티킥 실축을 해버리며,[4] 합산 스코어 0-1로 아쉽게 탈락했다.

하지만 다음 시즌에는 리켈메의 폼이 급격히 떨어졌고, 마누엘 펠레그리니 감독은 리켈메를 팔아버리며 팀을 리빌딩 하게 된다.[5][6]

리켈메는 보카 주니어스로 복귀했고, 2007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3번째 우승을 차지하고 대회 MVP까지 거머쥐며 화려하게 복귀를 알렸으며 이후 2014년에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로 이적한 뒤 한국 시간으로 2015년 1월 26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2023년 6월 26일 팀 아르헨티나 vs 보카 주니어스로 늦은 은퇴전을 치렀는데, 마이애미 이적으로 휴가 중인 메시도 출전했으며[7] 메시가 리켈메에게 코인토스를 양보하거나 친밀하게 포옹하고 사진을 찍거나 하는 등 인연이 부각되었다. 본인 또한 45세의 나이에도 녹슬지 않은 축구센스를 선보였다.

3.2. 국가대표 경력

1997년 FIFA 세계 청소년 대회를 우승으로 이끌고 그해 11월 16일, 다니엘 파사레야 당시 감독이 리켈메를 성인 국가대표팀으로 발탁시켜 콜롬비아와의 1998 프랑스 월드컵 남미 지역 예선에 출장하면서 데뷔하였다. 이후 1999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하여 3도움을 기록했고, 2003년 4월 30일 리비아와의 친선 경기에서 A매치 첫 골을 넣었다.

그러나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최종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하였고, 2004 코파 아메리카때는 부상으로 빠졌다.

2005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간만에 메이저 대회에 출전하여 3골 1도움으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결승에서 브라질에 4-1로 완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리켈메는 대회 실버볼을 수상했다.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대표팀의 주전 플레이메이커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리켈메가 전방의 에르난 크레스포, 막시 로드리게스, 하비에르 사비올라 등에게 순간적으로 뿌려주는 킬패스는 굉장히 위협적인 공격루트였고, 세트피스 상황에서 그가 올려주는 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술이었다. 조별예선 첫 경기인 코트디부아르 전부터 아르헨티나가 넣은 두 골에 모두 관여했다. 에르난 크레스포의 첫 골은 프리킥 상황에서 리켈메가 길게 붙여준 공이 키퍼가 튀어나와 처리하기에는 애매한 위협적인 위치로 떨어지는 바람에 튀어나온 루즈볼을 크레스포가 영리하게 주워먹은 것이며, 이후에는 코트디부아르의 오프사이드 트랩을 완벽하게 무력화시키는 엄청난 스루패스를 찔러넣어 하비에르 사비올라의 골을 어시스트 했다. 두 번째 경기인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전에서는 공격포인트는 기록하지 못했지만 공격의 기점 역할을 톡톡히 하며[8] MOM으로 선정되었다. 세 번째 경기인 네덜란드전에서도 직접적인 공격포인트는 없었지만 위협적인 땅볼 프리킥과 중거리슛을 선보였으며, 죽음의 조라 평가받던 C조를 2승 1무로 쉽게 통과하며 16강 멕시코와 격돌하게 되었다. 16강 멕시코전에서도 그의 활약은 여전했는데, 팀이 1대0으로 지고 있던 전반 10분 코너킥 상황에서 정확한 킥으로 에르난 크레스포의 동점골을 어시스트 했고, 이후에도 기가 막힌 턴동작 이후 하비에르 사비올라에게 멕시코 수비진을 바보로 만드는 엄청난 킬패스를 찔러주는 등 종횡무진 활약했으며, 막시 로드리게스의 원더골에 힘입어 8강에 진출했다. 개최국 독일과의 8강전에서도 후반 49분에 또 한번 코너킥 상황에서 정확한 킥으로 로베르토 아얄라의 선제골을 어시스트 했으나, 감독이었던 호세 페케르만이 1골을 지키기 위해 리켈메와 크레스포를 차례로 교체한 것이 화근이 되어 후반종료 10분전 미로슬라프 클로제에게 동점골을 허용하고 결국 승부차기 끝에 탈락하며 리켈메의 첫 월드컵 도전은 8강에서 마무리되었다.[9] 그럼에도 3도움[10]을 기록하며 그를 중심으로 전술을 짰을 때 얼마나 위력적인 선수인지를 또 한번 입증했다.

2007 코파 아메리카에도 출전해 5골 3도움이라는 엄청난 활약을 펼치며 팀을 결승까지 끌어올렸다. 리켈메가 중심이 된 아르헨티나는 피파 랭킹 1위에 온갖 스타 플레이어가 즐비한 우승후보 1순위였고 예상대로 결승까지 파죽지세로 올라갔다. 그러나 정작 결승에서 주전 대부분이 빠진 브라질에게 3-0으로 참패하며 준우승에 그친다.[11] 당시 대표팀 주장인 로베르토 아얄라의 자책골로 안그래도 분위기도 안좋았는데, 리켈메 본인은 어이없게도 줄리우 밥티스타에게 압도를 당하고 말았다.[12]

2007년 칠레와의 경기에서 한 경기에 프리킥으로 2골을 꽂아넣으며 팀의 2-0 승리를 견인하기도 한 리켈메는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니콜라스 파레하, 하비에르 마스체라노와 함께 와일드카드로 출전하여 아르헨티나 주장을 맡아 아르헨티나의 올림픽 축구 2연패에 공헌했다.

그러나 디에고 마라도나가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리켈메의 역할을 축소시켰고, 그의 경기력을 대놓고 질타하는 발언을 쏟아냈는데 이를 계기로 마라도나와 리켈메 간에 불화가 생겨나면서 리켈메는 2009년 3월, 마라도나가 있는 한 대표팀 복귀는 없을 것이라는 발표와 함께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결국 2010 남아공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도 제외되었다.

2011년 8월, 알레한드로 사베야가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이후 리켈메의 국가대표팀 복귀를 설득하여 브라질과의 2연전에 아르헨티나 대표팀으로 선발했으나 부상으로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4. 플레이 스타일


일명 현대 축구의 반역자, 마지막 10번 (El Ultimo Diez), 최후의 클래식 플레이메이커. 압박과 점유율로 대변되는, 고도의 조직화가 진행되는 현대 축구의 패러다임 속에서 팀의 공격 작업을 홀로 전담하는 공격형 플레이메이커들의 황혼기를 홀로 장식했던 인물이다. 압도적인 볼키핑 및 탈압박 능력과 04-05 시즌 라리가에서만 15골을 꽂아넣을 정도의 뛰어난 득점 감각, 그라운드 어디든 다양한 구질로 정확히 동료 발 밑으로 공을 보내는 스루패스 및 키패스 능력, 각종 데드볼 상황을 포함한 득점 상황에서 거리에 상관없이 중거리 슛을 꽂아넣을 수 있는 압도적인 킥력 등 플레이메이커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대부분의 능력을 당대 최고 레벨로 지니고 있었다.

비야레알의 리즈 시절을 이끌었던 주역이었으며 2005-06 시즌 챔피언스 리그 8강에서 인테르를 홀로 털어버리고, 2000년 도요타컵에서는 레알 마드리드를 보카 주니어스를 데리고 털어버리는 무시무시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국가대표에서의 활약도 뛰어나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에서도 엄청난 실력을 보여주었는데, 2005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의 퍼포먼스, 2006 독일 월드컵에서의 퍼포먼스, 2007 코파 아메리카에서의 퍼포먼스를 보면, 이 선수의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유럽 대항전 레벨과 세계 대회 본선급 레벨에서조차 상대 팀이 그 한 명을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기량을 과시했다.
파일:Riquelme Dribble.gif
당대 최고 수준의 볼키핑 실력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단순히 볼을 잘 다루어 압박을 벗겨내는 능력뿐만 아니라 피지컬이 매우 뛰어나 수비수 한두 명이 바짝 달라 붙어도 패스 타이밍을 기다리며 공을 지켜내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마크맨과 등으로 비비면서도 동시에 발로 공을 컨트롤하며 주변 상황을 파악하다가 상대 뒷공간을 파고드는 공격수에게 최고 수준의 스루패스를 넣어주는 것이 리켈메의 전매특허 스타일이다. 183cm의 비교적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와 튼튼한 하체를 봐도 알 수 있듯이 타고난 피지컬을 갖췄고, 무게중심이 낮고 밸런스까지 뛰어나 실제로 당시 비야레알이나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의 경기를 살펴보면 리켈메가 상대팀 수비 둘 정도를 등진 상태에서 어깨 싸움만으로 버텨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거기에 더하여 손을 잘 사용하여 몸싸움에 들어갔을 때 딱 반칙이 불리지 않을 정도로 손으로 밀어내고 유니폼을 살살 당기는 지능적인 플레이도 자주 선보였다. 이렇게 특유의 발기술과 어깨빨, 거기에 손까지 교묘하게 사용하며 어떻게든 끈적끈적하게 볼을 지키는 모습을 보면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플레이메이킹 및 기회 창출 능력도 정말 뛰어났다. 상대 수비 2~3명을 상대로 볼을 소유하고 있다가 수비수를 아군의 공간으로 끌어당기며 확보한 공간으로 순간 튀어나가는 동료들을 칼같이 포착해 정확하게 발밑으로 스루패스를 연결하는 역습 플레이의 반복은 리켈메 이후 그 어떤 선수도 재현하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직접적으로 득점 찬스로 연결되는 패스 뿐 아니라 경기 전체를 조율하는 능력 역시 최고였다. 팀이 빠르게 역습을 진행해야 할 때는 흔히 말하는 대지를 가르는 패스를 통해 한번에 길게 최전방으로 공을 뿌려주고, 급하게 공격할 상황이 아닐 때에는 자신이 볼을 천천히 소유하며 의도적으로 상대 수비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렇게 생긴 공간으로 침투하는 동료에게 패스를 연결해 본인이 공격 루트를 설정하고 창조하는 예술적인 플레이를 경기 내내 보여줬으니 그야말로 '플레이메이커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답게 압도적인 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상술했듯 아웃프론트와 인프론트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구질의 스루패스, 로빙패스 등 각종 패스를 그라운드 어느 곳이든 동료의 발 밑으로 정확하게 전달해주는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경이롭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거기에 거리에 상관없이 골키퍼를 두려움에 떨 수 있게 만드는 중거리 슛 능력을 보유하고 있어 일반적으로는 상상도 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곳에서 중거리 골을 터트리거나 유효슈팅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킥력 좋은 선수라면 빠질 수 없는 데드볼 처리 능력도 탁월하여, 국가대표와 클럽팀을 가리지 않고 데드볼 스페셜리스트로서 전담 키커로 활약했다. 코너킥과 프리킥 등으로 꾸준하게 어시스트를 기록했으며 때에 따라서는 본인이 직접 득점으로 해결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러한 플레이에는 단점이 있었는데, 리켈메가 뛰는 팀은 그에게 플레이 스타일 및 볼 소유권 대부분을 위임해야 했다는 점이었다. 이렇듯 그를 기용하려면 현대 축구의 흐름에 역행해 나머지 팀 전체를 리켈메 한 명에게 맞춰야 했기 때문에 그의 컨디션이 좋지 않을 시에는 팀의 공격 작업 전체가 힘들어지는 문제점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단점들은 좁은 간격 속에서의 조직적인 압박을 상대하기 위해 팀원 전체의 빌드업을 요구하는 현대 축구 감독들 입장에서 골칫거리였다. 또한, 활동량과 수비가담이 없는 수준은 아니었으나 활발한 수준도 아니었기에 그를 보조해줄 수비형 미드필더 및 풀백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13] 이렇듯 조건은 조금 까다롭지만 충족만 되면 상위권[14]의 팀 성적이 보장되니 리켈메 본인이 곧 팀의 전술 그 자체일 수밖에 없는 유니크한 선수였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리켈메 이외에도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즐비하여 그에게만 팀을 맞추기 어려웠고, 특히나 그에게 주어진 윙포워드 자리에서는 볼 소유도 제한되니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바르셀로나 시기엔 팀 내 사정과 맞지 않는 포지션으로 인해 하락한 폼, 아리엘 오르테가의 존재 때문에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본선 명단에 오르지 못했다.

비야레알에서 성공했지만 팀 성적이 아쉽게 우승에는 미치지 못하는 상위권이 한계였던 점은, 라리가의 절대적 2강인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의 존재 이외에도 다른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이전에 비해 경기 수와 활동량이 많고 휴식이 그만큼 적어진 현대 축구에서 혼자 팀의 공격을 책임지고 대체자를 구하기 힘든 '고전적 플레이메이커'들에 의존하는 팀들이 다 그렇다. 상위권 팀으로 갈 수록 한 시즌에 3개 대회 이상을 동시에 진행할 수밖에 없는데, 플레이메이커 본인이 없으면 팀이 죽어버리니 무작정 쉬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매 경기 굴리다 보면 컨디션이 떨어지거나 부상 위험이 커져 팀에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리켈메의 볼소유로 인하여 공격 템포가 느려지면 결국 점유율을 내세워 승부를 보는 축구를 할 수밖에 없는데, 약팀에게는 이런 플레이가 계속 먹힐 수 있어도, 강팀 상대로는 조금만 삐끗하면 바로 역습에 당할 위험이 높다. 특히 월드컵 등의 토너먼트에서 강팀을 만나 비기거나 패배한 경기를 보면, 약팀 상대만큼 팀의 점유율이 높게 유지되지 못하는 중에도 리켈메가 팀 공격의 중심이니 공이 그에게로 집중되면서 강팀의 조직적인 압박 속에 유기적인 팀플레이가 힘들어지고 공격 패턴이 리켈메에게 의존하기만 하는 식으로 단순해지다 결국 역습을 얻어맞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리켈메의 번뜩이는 패스와 기회 창출 능력은 돋보였으니 그의 탓만을 하기에는 어려웠고, 이런 패배 속에서도 리켈메의 능력은 확실했으니 감독들이 리켈메 위주의 전술을 쉽게 재편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느림의 미학' 등의 별명 때문에 신체능력이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는데 이는 단지 속도에서만 국한된 이야기로, 사실 이마저도 작정하고 뛰는 경우는 느리지 않다. 기본적인 키가 있어 달리는 속도 자체는 꽤 빠른 편인데, 팀에 속공이 필요한 경우에 상대 수비수를 주력만으로 두세명 정도는 거뜬히 제치는 장면이 종종 나왔다. 다만 본인이 빨리 뛰는 스타일보다는 전방에서의 템포 조절과 플레이메이킹, 찬스 메이킹에 특화된 스타일로 뛰었기 때문에 활동량도 많지 않은데다 템포 자체를 느리게 플레이하다보니 완전히 느림보 이미지로 인식이 박혀버린 것이다. 어느 정도 속도를 포기한 대신 기술적인 면을 살린 유형의 공격형 미드필더는 그 당시 보기 드문 것은 아니었으나 리켈메는 꽤나 극단적이었다.

10번 플레이메이커들의 전성기가 지난 뒤, 거의 유일하게 유럽 빅리그에서 활약을 펼치던 리켈메가 물러난 지금의 현대축구에서는 그와 같은 전통적인 공격형 미드필더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신체능력은 저하되었지만 신기의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노년의 리오넬 메시가 그나마 그와 유사한 플레이를 펼친다고 할 수 있겠으나, 메시 역시도 공격형 미드필더라기보다 공격수로 분류하는 것이 옳기 때문에 리켈메의 명맥은 끊겼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는 플레이메이킹 부담을 한 선수에게 집중하기보다 필드 위 모든 선수이 같이 분담하는 현대 축구의 흐름에 의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리켈메 역시도 이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유럽 주요 리그에서 떠나 30세의 나이에 변방 리그로 이적해야만 했다. 이는 커리어가 꺾이기 이전 리켈메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반증하기도 한다. 현대 축구의 거대한 흐름을 거스르면서도 유럽 주요 리그에 팀의 핵심으로 기능하는 것은 보통의 선수라면 당연코 불가능한 일이다.[15] 어떻게 보면 소위 엑조디아라고 불리며 전술적으로 맞춰주기 매우 까다로운 선수들인 폴 포그바, 필리페 쿠티뉴, 파올로 디발라, 조르지뉴, 메수트 외질 와 같은 선수들의 원조라고도 평가받는다.

이렇듯 여러모로 '현대 축구의 반역자'라는 별명과 꼭 들어맞는 선수다. 그를 가장 잘 설명하는 이 별명이 바로 아직까지 많은 이들이 그의 플레이를 추억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아르헨티나 U-23 축구 국가대표팀

5.2. 개인 수상

6. 여담

  • 실제 경기를 보면 느릿느릿한 스피드와 개인기, 거기에 동반한 치열한 몸싸움을 통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스루패스 각을 재며 볼을 키핑하는 모습이 인상깊은데, 마치 땅을 일구는 듯한 모습이라는 비유가 많이 보여서 농부, 농켈메 등의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 리오넬 메시가 등장하기 이전에 기술적으로 아르헨티나의 10번에 가장 어울리는 선수는 리켈메였다보니 ' 남미 지단'이라는 별명은 이것 때문에 붙은 것이다.
  • 시그니처 세리머니는 양손을 양 귀에 갖다대는 것이다. 이걸 자국 국대 후배인 리오넬 메시가 월드컵 8강전에서 루이 판할을 상대로 시전했다. 판할 감독이 경기 전 메시에게 도발하는 언행을 했고 이걸 메시가 골 세리머니로 응수한 것인데, 리켈메가 바르셀로나에서 비참하게 쫓겨났을 당시 리켈메를 쫓아낸 감독이 판할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둘 사이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야 보다 자세히 이해할 수 있는 세리머니인 셈이다. 이에 대해 리켈메는 "최고의 선수를 화나게 하면 안된다. 그보다는 포옹과 키스를 선사하는 게 옳다. 최고를 도발하면 이길 수 없는 게 당연하다. 판할의 도발은 아르헨티나에게 오히려 호재로 작용했다"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
  • 메시의 국대 은퇴 파동에 대해 메시를 지지했다. 메시의 기여도를 생각할 때 그가 국대 감독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풋볼 매니저에서는 사기적인 공격 능력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빅클럽이 아닌 비야레알에서 뛰는 터라 비교적 싼 가격에 중하위권 팀에서도 영입이 가능하고, 일단 영입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활약이 보장되는 가히 치트키급 선수였다.
  • 2019년 12월 보카 주니어스 부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곧 회장 선거에 도전한다고 한다.
  • 디에고 마라도나와 사이가 굉장히 나쁘다. 하지만 원래부터 그런건 아니고 마라도나가 손수 자기의 등번호를 넘겨줬고 리켈메가 바르셀로나로 이적해 푸대접 받자 마라도나는 바르셀로나를 세계 최악의 클럽이라고 말하면서 리켈메를 옹호했다. 하지만 마라도나가 국가대표 감독을 맡고 팀 리빌딩을 시도 했을때 리켈메의 역할과 포지션을 바꾸려고 들자 리켈메는 대차게 욕하며 국가대표를 은퇴해 버렸다. 그러자 마라도나도 너 따위 없어도 우린 잘 할수 있다며 메시에게 10번의 번호와 역할을 부여, 메시는 등번호를 이어받아 대체불가능한 존재가 되었지만 국제대회 성적이 잘 나오지 못해 리켈메만큼 인상적이지는 않다는 평가가 따라다녔다. 그래도 미운정 고운정은 있었는지 마라도나가 세상을 떠난 후 인스타그램에 애도의 글을 남겼다.
  • 2000 인터컨티넨탈에서 우수한 활약을 하며 레알 마드리드를 이긴 후 세계 최고의 선수의 유니폼을 원한 아버지를 위해 루이스 피구와 유니폼을 교환했다.

7. 같이 보기

1 아본단시에리 · 2 아얄라 · 3 소린 ⓒ · 4 콜로치니 · 5 캄비아소 · 6 에인세 · 7 사비올라 · 8 마스체라노 · 9 크레스포
10 리켈메 · 11 테베스 · 12 프랑코 · 13 스칼로니 · 14 팔라시오 · 15 밀리토 · 16 아이마르 · 17 쿠프레
18 M. 로드리게스 · 19 메시 · 20 J. 크루스 · 21 부르디소 · 22 L. 곤잘레스 · 23 우스타리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호세 페케르만


[1] 아이마르는 리버 플레이트의 10번이었고 리켈메는 보카 주니어스의 10번이어서 라이벌 의식이 있을만했으나 실제로는 절친한 사이다. [2] 아이마르는 2000년대 초반 발렌시아에서의 대활약으로 제2의 멘디에타라 불리며 호나우지뉴, 제바스티안 다이슬러와 함께 세계적인 유망주로 일찍이 주목을 받았다. 오히려 리켈메는 바르셀로나에서의 부진으로 인해 유망주 시절 유럽에서는 아이마르만큼의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그들의 전성기 나이에는 리켈메의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아르헨티나 내에서 에이스 자리는 리켈메가 받게 되었다. [3] 당시 8강전의 인테르와의 경기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퍼포먼스는 리켈메 커리어상에서도 최고로 평가받는 장면. 인터 밀란 선수들을 문자 그대로 가지고 놀았으며 이 경기는 축구팬들에 의해 챔피언스 리그 역사상 마지막 11대 1의 경기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4] 리켈메가 시도한 PK를 아스날의 옌스 레만이 막아내는 장면은 리켈메와 레만의 교차편집을 통해 긴장감을 극도로 높였던 명장면으로 손꼽힌다. [5] 2006년 독일 월드컵 이후 리켈메의 컨디션이 급속도로 하락한 것이 당시 비야레알이 부진에 허덕이고 있었던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으며, 이에 구단 측에서는 리켈메의 컨디션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시즌 도중 리켈메를 고국인 아르헨티나로 휴가를 보내주는 결단까지 내렸다. 하지만 복귀 이후에도 리켈메의 컨디션이 좀처럼 올라오지 않았고, 급기야 주전에서 제외된 것으로 인해 당시 팀의 감독이었던 마누엘 펠레그리니와 불화가 생겨 시즌 종료 후 인터 밀란 등 여러 강팀으로의 이적설이 돌았다. [6] 리켈메를 전력 외로 뺀 이후 비야레알은 로베르 피레스, 산티 카솔라, 마티아스 페르난데스 등으로 메웠다. [7] 이 휴가로 인도네시아전에 출전하지 않았지만 리켈메의 고별전에서는 휴가도 뒷전으로 하고 출전하였다. [8] 에스테반 캄비아소의 그 유명한 골도 리켈메와 사비올라의 센스있는 원투패스로 순간적으로 수비 라인에 구멍이 생긴 것이 결정적이었으며, 리오넬 메시가 얻어낸 프리킥 상황에서는 순간적으로 사이드로 쇄도하는 메시에게 짧은 패스를 넣어 메시가 그대로 측면을 타고 가서 땅볼 크로스를 올린 것을 에르난 크레스포가 골로 연결시켰고, 다섯번째 골인 카를로스 테베스의 골도 테베스의 과감한 1대1 돌파가 좋았지만 측면의 테베스에게 롱볼을 붙여준건 리켈메였다. [9] 공교롭게도 월드컵 직전, 챔피언스 리그에서 PK 맞대결을 펼쳤던 옌스 레만을 다시 적으로 만났으나, 레만의 선방쇼로 팀은 탈락했다 [10] 4도움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피파 홈페이지에서 3도움으로 집계한 것이 확인되었다. [11] 이 대회를 계기로 둥가의 감독으로서의 능력이 전 세계 축구팬들에게 알려졌다. [12] 세비야에서의 폭발적인 득점력이 죽어버리고, 아스날에서 삽질을 해서 그렇지 당시엔 좋은 선수였다.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엘클에서 선제 결승골을 넣고 라리가 우승에 기여하기도 했지만 로마에서 심각한 삽질을 저지른 후 이미지가 대폭 하락했다. [13] 국내 선수 중 비슷했던 선수로는 2선에 기용된 구자철이 있다. 2선의 구자철은 잘할 때는 잘하다가도 본인이 막히면 팀 전체가 막히는 공통점이 있다. 리켈메의 기용에 강력한 수비형 미드필더, 활동량으로 유명했던 풀백이 필수조건이었던 것처럼 이러한 구자철과 기성용을 보좌하기 위해 수비몰빵형 선수인 한국영을 조광래 감독은 필수적으로 기용해야 했다. [14] 컨페더레이션스컵 준우승, 챔스 4강, 월드컵 8강,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 올림픽 우승 등이 있다. [15] 비야레알이라는 팀 역시 자본력과 실력이 2강에 비해 매우 약한 팀이었기 때문에, 플레이 스타일이 어찌 되었든 일단 스타일을 맞춰 주면 한 명의 힘으로도 상위권 팀들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었던 리켈메는 팀에서 놓칠 수 없던 선수였다. 또한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도 월드컵이나 코파 아메리카의 토너먼트에서 만날 강력한 팀들과 제대로 상대하기 위해서는 중원에서 경기를 조율해줄 플레이메이커가 꼭 필요하였고 마침 폼이 제대로 올랐던 리켈메가 가장 적합한 선수였기 때문에 2005 컨페더레이션스컵, 2006 독일 월드컵, 2007 코파 아메리카에서 그에게 전술을 맞춰줄 수 있었던 것이다. [16] Apertura(아페르투라) [17] Clausura(클라우수라) [18] 돈 발롱 어워드 [19] Most Artistic Player by Marca [20] 이래 봬도 CA 보카 주니어스시절 레알 마드리드 털기, 비야레알 시절 인테르 털기 등 한 팀 찍어서 탈탈 털기의 고수다. [21] 물론 지금은 현역 은퇴로 선수 자체가 사라졌다. 피파 온라인 4에서 아이콘 버전으로 재출시 되었다.